김용의 선교사 목회자 세미나-복음의 변화에 대한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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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2-03-29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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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러싱제일교회(장동일 목사)는 김용의 선교사(순회선교단 대표)를 강사로 1차 영적대각성 집회를 3월 27일(화)부터 3일간 열었다. 28일(수) 오전 10시부터는 목회자세미나가 열렸다.
2008년에도 뉴욕에서 집회를 인도한 바 있는 김용의 선교사는 28일(수) 오전 세미나에서 마태복음 16장 15-18절을 본문으로 오늘날 교회의 상황에 적용한 복음의 핵심에 대해 2시간반동안 강의를 했다. 세미나가 끝나고 꼭 필요한 이야기를 들었다며 참가한 목회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다음은 강의 내용이다.
▲강사 김용의 선교사(순회선교단 대표)
▲강사 김용의 선교사(순회선교단 대표)
한국교회의 상황들을 여러 경로를 통해 듣고 알고 있을텐데, 고국교회의 상황을 말한다면 썩 분위기가 좋은때가 아니다. 다들 염려들을 한다. 몇몇교회 빼고 대체로 어렵다는 말을 한지가 오래됐다. 제가 볼때는 목회자 모임에서 가보면 한마디로 말하면 분위기가 패배의식 비슷한 것이 있다. 힘들고 어렵다고 한다. 심지어 캠퍼스 사역도 예전같지 않다고 한다. 현장의 어려움도 있지만 워낙 한국상황이 급변하니 접근이 힘든다. 영적이야기를 하려면 그런것을 싫어한다. 도대체 접근이 안되니 인생의 본질의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안된다.
전부 다 감각적이고 자극적이며 워낙 가치관이 무너져 있다. 신앙은 물론이고 인간적인 대화를 진지하게 해 나가기가 어렵다. 캠퍼스 선교사역단체의 사역자들의 헌신율도 예전보다 못하다. 교회와 선교단체의 이야기이다. 목회의 현실이 얼마나 각박한지 왠만한 교회는 어렵고 사역지를 선정할수 없는 분들이 많다. 사회가 기독교에 적대적이 되어 대형교회가 아니면 힘든 상황이다. 상황자체를 보면 진짜 암담하다. 그리고 어지간한 용기가 아니면 교회의 본질을 가지고 본론적인 이야기를 꺼내기가 만만치 않는 상황이다.
고 옥한흠 목사가 전교단적으로 모인 2007년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설교자로 나서서 요한계시록의 사데교회를 본문으로 설교를 했다. 사데교회 어떻게 책망을 받았는지를 설교했다. 워낙 사회도 반기독교적인 분위기이고 매스콤을 통해 교회문제가 너무 까발려지고 공격을 당하는 바람에 교회 성직자 그리스도인 이라면 완전히 어려운 시대이다. 교회내에도 크리스찬들 끼리 서로 불신하다. 불법이 성행하고 사랑이 식는다는 주님의 이야기가 먼이야기가 아니다.
한가지 분명한것은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 무슨 도전을 받아도 약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약한 교회란 없다. 하나님의 마음안에 초라한 교회 작은교회 약한교회라는 것은 없다. 세속적인 시야로는 그렇게 볼수 있다. 교회가 어떻게 모이던 상관없이 강한교회이고 승리하는 교회이다. 누구나 당해낼수 없다. 주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하셨다. 교회는 교단의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이다. 예수님이 나의 교회라 말할때는 주님의 이름이 걸린것이다. 주님이 약하거나 초라하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이야기이다.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다.
단호히 말씀하기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세상의 사단이 악의 세력을 통해 교회를 대적하는데 교회가 역사가 존재하는 한 수없는 공격을 받겠지만 수세적인 표현보다는 오히려 교회가 어둠을 공격하면 성문짝이 견뎌나지 못할것이다. 음부의 권세가 대문짝을 감당하지 못하고 주님의 교회가 이긴다. 교회는 반드시 이기는 교회임을 믿는다. 어떤 상황과 어떤 처지라도 주님의 교회이기에 주님의 권세로 이기는 교회이다.
요한계시록 7개 교회를 보면 비리비리하다. 에베소교회는 규모를 갖추었는데 첫사랑을 잊어버리고, 칭찬을 받은 빌라델비아와 서머나 교회는 너무 작다. 성한교회가 별로 없었다. 어떤교회는 핍박을 받고 문을 닫을 정도이고, 좀 되는 교회는 오늘날 세속주의에 빠졌다. 주님은 그 어슬픈 교회를 '금촛대'라고 '별'이라고 하신다. 주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만왕의 왕이다. 주님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교회에 대해 모두에게 한 말은 이기는 교회라고 말하셨다. 언제든지 머리되신 주님에 온전히 순종하면 교회는 이길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교회가 반드시 이 영광을 보아야 한다.
교회는 지금도 승리하고 있다. 이란같은 경우 극한 핍박을 받고 있다. 이란 역사상 핍박을 받을수록 가장 복음주의 교회가 강하게 부흥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교회가 세속주의로 빠지는 도전을 받는데, 남아공에서 열린 3차 로잔대회에서 세계복음주의 지도자들이 모여 복음주의 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가장 큰 적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짐작에는 이슬람이라고 생각할수 있다. 교회가 저항에 부딪쳐 있다. 미국같은데는 반기독교 국가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인데 놀랍게도 기독교 역사의 어느때보다 가장 순교자를 가장 많이 내는 시기이다. 일년에 십만명이 순교한다. 한쪽에는 배불러서 교회가 세속주의로 빠지는데, 한쪽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내는 강력한 양상이다.
세상에서 발표되는 뉴스는 전혀 균형이 있는 뉴스가 아니다. 교회가 일어나는 상황 정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에 관심이 없다.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확장되는지 알만한 수준도 안된다. 균형있는 시각을 가질 능력이 안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보여지는 나라가 아니다. 지금 어느때보다 격렬한 영적전쟁을 치루는 때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도전을 받지만 주님의 교회는 생각하는대로 실패하고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때일수록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낼때이다. 한가지 분명한것은 전세계 170여개가 넘는 나라에 한국사람이 나가 선교를 한다. 파송순위 2위국가이다. 6만여교회가 살아있고 어느때보다 도전도 많이 받지만 지금까지 주어진 것을 볼때 그냥은 물러설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교회이다.
한국의 교회학자중 한사람이 교회지도자 모임에서 자기의 사견을 말했다. "사실 2천년 기독교 역사속에 기록되어 있던 일들이 120년 역사의 한국교회안에 왠만한 일들이 다 있다. 복음의 합작, 복음의 확장, 복음때문에 고난, 그리고 부흥, 선교등등 2천년 역사속에 일어난 복음의 과정이 짧은 120년 한국교회의 역사속에 뚜렷하게 드러난다." 개인의 사견이다. 충분이 수긍이 가는 지적이다. 2천년 기독교 역사중에 개혁도 있었다. 그런데 한국교회 120년동안 2천년 기독교 역사상 일어난 다른것은 뚜렷하데 존재했는데 아직 한국교회 역사상 뚜렷하게 경험하지 못한 복음의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의미심장한 이야기이다.
나는 한국교회가 짧은 기간안에 폭발적으로 부흥하는 70-90년을 부흥속에 신앙생활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70년초에 예수만나고 당시는 돌이켜 보니 대단하다. 73년 빌리그래함대회등 수백만명이 모인 집회가 계속 열렸다.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과 더불어 국가적으로도 성장했다. 그러자 삶의 형태가 바뀌어졌다. 정신없는 회오리 바람을 치듯이 밀려오는 상황변화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보낸 지난 30년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만들었다. 한국교회 부흥의 시기때는 그물을 쳐 놓으면 들어와 담기만 하면 됐다. 어디를 갈지모르고 담기만 했던 그때 교회가 주님의 진리에 양보없이 정신만 차렸다면 좋았다. 하나님이 주신 어마어마한 기회가 역사에 반복되기가 쉽지 않다. 이제는 그 좋은시절 다 보내고 그물을 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찾아다녀야 한다.
우리가 과연 다음세대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개혁이라는 문제에 있어 한국교회는 어느나라보다 상당히 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고 말그대로 성경대로 믿는다. 복음주의와 개혁주의가 어느나라보다 가장 강력히 뿌리내린 나라가 한국이다. 고난의 시기를 보내면서 한국전쟁의 어려움을 겪었지만 한국인의 성향안에는 '믿으려면 제대로 믿자', '예수님을 닮자', 혹은 '성경말씀대로 믿자'가 지금도 통한다. 다른데는 복음 자체를 거부한다. 아직도 한국성도는 '말씀대로 믿자' '제대로 믿자' '십자가 정신으로 믿자'고 하면 그래도 눈물이 남아있고 가슴을 칠 회개할 기회가 남아있다. 그런데 그마저 물건너가면 이때는 정말 어려워 진다. 불과 얼마 안남았다.
왜냐하면 다음세대들이 복음을 전혀 모른채 살아왔다. 교회안의 자녀들을 생각해보라. 가장 세상적인 세속적인 것을 받아들인다. 그것도 세상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변질시켜 놓은 세속화가 영향을 주었다. 아까 말한 로잘린 대회때 지도자들이 현 복음주의교회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인 70%이상이 세속주의라 했다. 무슬림이 아니다. 이슬람은 3번재 위협이다.
복음주의는 정말 십자가의 본질앞에서 온전하게 개혁되고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과 기회는 사라질것이다. 차라리 확 빗나가면 분별하기 쉬운데 할 것은 다 따라하고 기가 막히게 세속화가 성행하며 덧칠해 놓았다. 그것이 위험하다. 그런 위험이 개인 삶이나 교회안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볼때 인생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과 교회가 십자가 복음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위기가 없다. 인생에서 질병등 여러 비극이 있지만 인간최대의 비극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교회가 당하는 수많은 위기와 도전이 많지만 능히 이길 힘을 가지고 있다. 승리한 교회이다. 그런데 교회가 십자가 복음을 잃어버린다면 이것보다 심각한 위기가 없다. 그런면에서 진정한 개혁, 지금이야 말로 하나님의 진정한 개혁이 있어야 한다.
야곱에게 베델이 있듯이, 탕자에게 아버지가 있듯이 우리교회에는 우리가 돌아갈 십자가 복음이 있는 것은 위로이고 희망이다. 우리는 십자가 복음만 되돌려야 한다. 우리 사역에는 젊은이들이 주종이다. 젊은이들을 끌기위해 여러 수단이 동원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젊은이들을 끌수 있을만한 미끼를 없앴다. 초심으로 가는데 가장 거칠게 헌신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몰려든다. 오직 십자가 복음이다.
젊은이들이 갈망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이 불확실한 시대에 인간에 줄수있는 최대의 메세지는 복음이다. 그리고 복음에 거칠게 자신의 삶을 올인해서 내던지는 것이 불안한 시대에 사람들이 듣고싶고 보고싶은 것이다. 참된 복음을 용기있게 선언하는 것을 듣기 힘들고, 혹 있다고 해도 문제는 그 복음에 자신의 삶의 전부를 걸고 운명을 거는 것을 보기가 쉽지 않다.
주제를 좁히자. 교회는 반드시 어둠을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변화시킬수 있고 변화시킬 능력이 있다고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여러분들은 복음이 복잡한 현대사회에 반들헤게 된 사람을 변화시킬수 있다는 것을 믿는가. 죄송하지만 목에 칼이 들어오는 환경에서 이 믿음을 포기하면 교회는 끝이다.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으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속이는 것이다. 정말 절망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 PCUSA나 성공회는 동성애자가 목사안수를 받일수 있다. LA같은 경우는 자녀들이 동성애에 대해 의무적으로 배워야 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노무현 정부때 법무부가 발의하여 국회에 상정된 동성애 인권을 보장하는 법안이 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동성애를 비난하면 벌금을 내야한다.
교회가 세상에 무장해제를 당하는 이런 상황에 이때도 복음은 변화시킬수 있는가. 이런 저항적인 세상을 향하여 무기력한 보이는 교회임에도 세상을 변화시킬수 있는가. 그 능력이 지금도 있는가. 2천년전 복음이 현재 사람을 변화시킬수 있는가. 이 사실과 질문앞에서 우리 태도를 확실히 해야 한다. 아니면 양심선언하고 교회문을 닫는 것이 낫다.
주제는 "복음의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복음은 과연 변화시킬 능력이 있는가. 디모데후서 3장을 보면 복음의 능력은 경건의 모양에 있다. 복음의 모양은 있지만 복음의 능력을 부인할것이 말세에 일어날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진정으로 복음은 변화시킬 능력이 있는가. 교회안에서 일반적인 상황은 그렇게 성경대로 변화되기는 어렵다는 극단적인 이야기를 왕왕한다. 이런 세가 흐르고 있다.
나는 '순회선교단'에 속한다. '순회선교단'은 무식하여 말씀 그대로 믿는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기에 다시 오실 예수를 그대로 믿는다. 이것은 교리적으로는 아니라고 본다. 모든 교회가 꿈같이 생각하는 것이 주님 재림이다. 마태복음 24장 14절에 보면 선교완성을 하면 주님이 다시 오신다.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면 모든 민족에 복음이 전해져야 하기에 선교에 모든 삶과 모든 에너지를 동원해야 한다. 아니면 선교완성이 안되어 주님이 안오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선교에는 관심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순회선교단'은 15년된 자생단체인데 소식지 제호가 "그 날이 오기까지"이다. 주님이 재림하는 그 날이 오기까지 라는 의미이다. 순회선교단은 하나님나라의 부름과 선교완성을 위한 연합과 섬김으로 부르심이 목표이다. 말로 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주님이 빨리 오실려면 연합을 해서 선교완성을 끝내자는것이다. 선교완성이 되면 그 날이 온다는 말씀을 믿고 무식한 6명이 부르심을 받아 시작한 것이 '순회선교단'이다.
순회선교단은 2가지 철칙이 있다. 첫째 선교지에 나가면 어떤 핑계로던지 돌아오지 못하도록 퇴로를 차단한다. 둘째 절대 편히 죽어 자연사를 못하도록 한다. 그 말은 예수님의 핏값주고 산 선교사들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핏값만큼 살다가 죽어야 한다. 노년에 은퇴하고 안락하게 즐기다가 편하게 죽는다는 것은 성도에게는 있을수가 없는 이야기이다. 교회에 전할 기회가 있으면 도전한다. 절대 장로님 이상은 무덤을 국내에서 사용하지 말고 선교현장에 사용하라고 한다. 그러면 성묘하기 위해 식구들이 선교지를 방문할것이기 때문이다. 제 생각은 그것이 당연하다.
이런 마음으로 선교지를 돌아가다니면서 선교완성하면 주님이 다시 오실수 있다며, 선교완성을 위한 모든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연합을 하자고 독려한다. 천진난만한 발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하나이다. 그리스도만 높아진다면 예수님만 증거하고 복음화만 된다면 누가 나를 이용하던 상관이 없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60여개 나라를 돌아다닌다. 내가 본 관점은 선교동원을 위해 연합하는 것이 힘들다. 자기가 가진것을 내놓지 않는다. 누구 좋으라고 연합을 하느냐는 반응이다.
'순회선교단'은 전세계 선교지를 방문하여 영성집회하고 모든것을 동원해서 선교사들이 못하는 것을 해준다. 하지만 연합하기가 힘들다. 말로는 주님오시기를 원한다지만 선교현장에 가면 안그렇다. 절대 이용을 안당하려고 한다. 한쪽에는 건물을 짓고 쓸일이 없고, 한쪽은 사역은 있는데 건물이 없다. 한쪽은 사람은 있는데 돈이 없고, 한쪽은 돈은 있는데 사람이 없다. 선교사가 100여명이 있는 어느 지역에서 집회를 했는데 한 선교사가 도움을 못받고 아사직전이다. 이만큼 우리에게 연합이 어려운 상황이다.
'순회선교단'은 돌아다니며 조건없이 섬기며 우리를 마음껏 이용하라고 한다. 우리처럼 서로 자기것을 내놓고 연합만 하면 주님이 곧 오실것이라고 하면 감동을 받을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이상하다고 한다. 몇년을 돌다가 주저앉았다. 그래서 선교완성은 실제로 원하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합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갈등속에 내부적인 문제도 일어났다. 공동생활에서 서로를 비난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복음은 분명히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는데 사역자들도 못된 성격이 안버려진다.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는 사람들이 믿음따로 삶따로 였다. 그러다가 떨석 주저앉았다. 우리는 헌신한 사람인데 무엇이 그렇게 잘못되었는가. 복음이 잘못된 것인가를 하나같이 고민을 하다가 그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총체적인 복음앞에 우리의 헌신되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눈물뒤에 숨겨진 기가막힌 병든자의 실체들이 드러났다.
그리는 우리는 변화를 경험했다. 저희는 큰 충격을 받았다. 십자가 복음이 그렇게 뚜렷하게 충격으로 다가오고 우리는 도저히 더는 안된다고 받아 들였다. 저희는 변화를 경험하고 그 변화를 선교사들과 나누게 됐다. 그러자 그렇게 불가능하게 보이던 선교사님 사이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났다. 총제적인 복음앞에 우리를 세우고 사역에 전환점이 되었다. 바닥을 치고 절망가운데에서 하나님이 복음을 다시 보게하셨다. 십자가 복음을 생명으로 붙잡으니 세상적인 다른것에 대해 관심이 없어진다. 오직 주님이 일하시는 것이 보고 싶다.
복음이 결론이 되니 기도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도에 올인을 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의 내면의 변화를 겪으면서 복음은 과연 우리를 변화시킬수 있는가. 어떤 한계에 가면 도저히 넘어서지 않는 변화되지 않는 이런 부분에서 절망을 하고 주저앉혔던 주제였다. 과연 복음은 우리를 변화시킬수 있는가. 예. 당연히 변화시키고 변화시킬수 밖에 없다.
복음이 우리를 변화시킨다고 하면 도대체 성경이 말하는 변화는 무엇인가. 무엇이 변화되어야 복음의 진정한 변화인가. 혼돈이 된다. 목회현장에서 선교현장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나의 사역현장에 관계가 있는가를 보라. 먼저 븍음에 의한 변화는 감격과 흥분이 되는 변화가 성경이 말하는 변화가 아닐수 있다.
1. 복음의 변화에 대한 오해-
상황과 조건의 변화는 변화가 아니다.
성경적인 예로 말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야기이다. 역사에 전무후무하게 상황과 조건의 변화를 경함한 한세대를 꼽으라면 출애굽 사건이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구출을 받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신분이라는 상황과 조건이 자신들을 불행하게 하는 모든 조건이라 생각했다. 그들에게 주인이 바뀌어 하나님이 주인이 되신 상황과 조건의 변화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가면 되었다. 가난안땅을 정탐하고 와 하나님의 어머어마한 기적과 상황과 조건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려 한다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이것이 역사에서 가장 최대로 상황과 조건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의 모습이다. 우리가 무엇이 변해야 정말 변하는가. 한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상황과 조건의 변화는 성경이 말하는 변화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변화해야 정말 변화일까. 인간의 중심의 변화없이는 정말 변화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을 배부르게 하면 그 사람이 바뀌나. 더 사악하게 될 수 있다. 선교에서 정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은정주의이다. 선교지에 가서 인간적인 감정으로 불쌍한 마음에 퍼다준다. 그리고 배불리면 나중에 거지근성은 못고친다. 선교의 가장 큰 병폐가 그것이다. 사람의 배만 불러 바뀌어진다면 십자가 복음이 왜 필요하느냐. 사람들은 인기있는 말이 아니라 잘 안듣는다.
사람의 어려운 일을 도와주는 일은 오히려 쉽다. 가난한 것은 도와주고, 병난 사람을 고쳐주어도 목표를 다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의 중심을 바꿀수 없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고생할때는 겸손하다가 나중에는 벌고나면 악독함 교만함 사악함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다. 결론은 마음의 중심이 바뀌지 않고는 상황과 조건이 바뀌어도 진정한 변화가 아니다.
70-80년 한국교회가 척박한 상황에서 기적과 능력을 풍미하는 과정을 너무 잘안다. 그때 한국교회가 조금만 더 정신차리고 본질에 집중했다면 지금 한국교회 진단한다는둥 호들갑을 떨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30여년전 유행하던 메시지가 그대로 오늘도 나타난다. 심은대로 거둔다. 무슨 가치를 심어주고 어떤 것을 목표로 하게 했는지 뿌린대로 거둔다. 그때 들었던 가치와 메세지가 오늘날 그대로 전해진다. 과연 이대로 가면 되겠는가.
상황과 조건의 변화로는 사람이 변화가 안된다. 한 영혼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상황과 조건의 변화를 가지고 우리는 얼마나 간증했는가. 간증의 핵심은 여기서 멈추면 안된다. 문둥병자 병을 낫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는 말씀을 했다. 세상적으로 돈을 많이 벌거나 자녀들이 명문대학 가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축복이 될수도 있고 저주도 될수 있는 기회이다. 이때 정신차리고 다른짓을 하지말고 주님을 보고 존재의 변화를 가지라고 목회자들이 복음의 십자가로 인도했다면 한국교회가 지금과는 전혀 양상이 달라졌을것이다.
2. 복음의 변화에 대한 오해-
'전심'이 아닌 '진심'만으로는 변화가 아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부자관원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모태신앙중에 드문 모태신앙이다. 부자이고 관리이고 젊은이다. 타락을 안하고 영혼의 겸손함이 있는 신실한 사람이다. 그렇게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다. 계명을 잘지키고 모범으로 살았다. 더불어 영생에 대한 고민을 숨기지 아니하고 예수님에게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느냐고 물었다. 예수님이 그 중심을 정확히 보시고 한가지 부족한것이 있다고 스스로 존재를 볼수 있도록 충격적인 도전을 하신다.
주님은 영생은 너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하나를 더 붙이는것이 아니다. 너의 전부를 걸고 유일하게 붙잡는것이 영생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돈이냐 영생이냐고 물으셨다.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자를 나누어주고 전심이 어디에 있는지 주님이 아신다. 부자관원의 전심은 돈쪽에 가있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알고 콕콕 찌르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절대 핵심을 피해가지 않으셨다.
돈이냐 영생이냐. 부자관원은 영생을 진지하게 추구하던 사람이었으며 영생을 눈앞에 두었기에 그는 성경에서 가장 아쉬운 기록을 남긴다. 그는 돈을 근심했다. 사람은 몸이 가는 곳에 마음이 가는 것이다. 양자택일의 귀로에 있으면 그 마음을 속일수 없다. 진짜 내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절대 자기마음을 숨길수 없다. 돈에 미친사람은 다 안다.
복음은 장난이 아니다, 복음이 밝히기 시작하면 아무로도 위장할수 없다. 십자가의 복음이 증거되는 현장에는 완전히 엎어서 변화가 되어야 한다. 너무 매그럽게 멋있게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을 복음에 선택의 기로에 세우지 않으면 언제 그렇게 살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그런적이 없다. 예수님은 부자관원에게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셨다.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주님이 양보하셨다면 적당하게 만들어낼수가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확 짤라냈다. 복음앞에 한영혼이 뒤집어 지고 자아중심적인 인간이 하나님중심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연습해서 될 일이 아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인간의 설득 감동 감화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수 있다.
결론은 그렇게 진지했던 사람이라도 전심이 아니면 변화할수 없다. 목사들도 속았지만 많은 성도들도 속았다. 저사람이 대단하고 굉장하다는데 정직하게 말해서 아닌것이다. 결국은 저런 모습을 드러낼수 박에 없다. 그러니 전심이 아닌 진심으로는 진정한 변화가 될수가 없다. 우리도 자신에게 속았다. 이렇게 헌신했는데, 누가 변화가 안되었다고 하는가 라고 생각할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냉철하게 비추니 끔찍하다.
결정적인 순간을 못넘기는 실상이 우리의 모습이다. 변화가 아닌것을 속아서 변화되었다고 하고 모래위에 집을 지으면 상황이 흉해진다. 이상한 괴물이 많이 생긴다. 괴물 장로 권사 사역자가 나온다. 복음은 한번도 변한적이 없다. 복음은 순결하다. 예수 그리스도이니까 절대 안변한다. 2천년전에 순수했는데 이제는 현대에 맞추어 복잡해지는 예수복음은 없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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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도 뉴욕에서 집회를 인도한 바 있는 김용의 선교사는 28일(수) 오전 세미나에서 마태복음 16장 15-18절을 본문으로 오늘날 교회의 상황에 적용한 복음의 핵심에 대해 2시간반동안 강의를 했다. 세미나가 끝나고 꼭 필요한 이야기를 들었다며 참가한 목회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다음은 강의 내용이다.
▲강사 김용의 선교사(순회선교단 대표)
▲강사 김용의 선교사(순회선교단 대표)
한국교회의 상황들을 여러 경로를 통해 듣고 알고 있을텐데, 고국교회의 상황을 말한다면 썩 분위기가 좋은때가 아니다. 다들 염려들을 한다. 몇몇교회 빼고 대체로 어렵다는 말을 한지가 오래됐다. 제가 볼때는 목회자 모임에서 가보면 한마디로 말하면 분위기가 패배의식 비슷한 것이 있다. 힘들고 어렵다고 한다. 심지어 캠퍼스 사역도 예전같지 않다고 한다. 현장의 어려움도 있지만 워낙 한국상황이 급변하니 접근이 힘든다. 영적이야기를 하려면 그런것을 싫어한다. 도대체 접근이 안되니 인생의 본질의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안된다.
전부 다 감각적이고 자극적이며 워낙 가치관이 무너져 있다. 신앙은 물론이고 인간적인 대화를 진지하게 해 나가기가 어렵다. 캠퍼스 선교사역단체의 사역자들의 헌신율도 예전보다 못하다. 교회와 선교단체의 이야기이다. 목회의 현실이 얼마나 각박한지 왠만한 교회는 어렵고 사역지를 선정할수 없는 분들이 많다. 사회가 기독교에 적대적이 되어 대형교회가 아니면 힘든 상황이다. 상황자체를 보면 진짜 암담하다. 그리고 어지간한 용기가 아니면 교회의 본질을 가지고 본론적인 이야기를 꺼내기가 만만치 않는 상황이다.
고 옥한흠 목사가 전교단적으로 모인 2007년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설교자로 나서서 요한계시록의 사데교회를 본문으로 설교를 했다. 사데교회 어떻게 책망을 받았는지를 설교했다. 워낙 사회도 반기독교적인 분위기이고 매스콤을 통해 교회문제가 너무 까발려지고 공격을 당하는 바람에 교회 성직자 그리스도인 이라면 완전히 어려운 시대이다. 교회내에도 크리스찬들 끼리 서로 불신하다. 불법이 성행하고 사랑이 식는다는 주님의 이야기가 먼이야기가 아니다.
한가지 분명한것은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 무슨 도전을 받아도 약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약한 교회란 없다. 하나님의 마음안에 초라한 교회 작은교회 약한교회라는 것은 없다. 세속적인 시야로는 그렇게 볼수 있다. 교회가 어떻게 모이던 상관없이 강한교회이고 승리하는 교회이다. 누구나 당해낼수 없다. 주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하셨다. 교회는 교단의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이다. 예수님이 나의 교회라 말할때는 주님의 이름이 걸린것이다. 주님이 약하거나 초라하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이야기이다.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다.
단호히 말씀하기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세상의 사단이 악의 세력을 통해 교회를 대적하는데 교회가 역사가 존재하는 한 수없는 공격을 받겠지만 수세적인 표현보다는 오히려 교회가 어둠을 공격하면 성문짝이 견뎌나지 못할것이다. 음부의 권세가 대문짝을 감당하지 못하고 주님의 교회가 이긴다. 교회는 반드시 이기는 교회임을 믿는다. 어떤 상황과 어떤 처지라도 주님의 교회이기에 주님의 권세로 이기는 교회이다.
요한계시록 7개 교회를 보면 비리비리하다. 에베소교회는 규모를 갖추었는데 첫사랑을 잊어버리고, 칭찬을 받은 빌라델비아와 서머나 교회는 너무 작다. 성한교회가 별로 없었다. 어떤교회는 핍박을 받고 문을 닫을 정도이고, 좀 되는 교회는 오늘날 세속주의에 빠졌다. 주님은 그 어슬픈 교회를 '금촛대'라고 '별'이라고 하신다. 주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만왕의 왕이다. 주님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교회에 대해 모두에게 한 말은 이기는 교회라고 말하셨다. 언제든지 머리되신 주님에 온전히 순종하면 교회는 이길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교회가 반드시 이 영광을 보아야 한다.
교회는 지금도 승리하고 있다. 이란같은 경우 극한 핍박을 받고 있다. 이란 역사상 핍박을 받을수록 가장 복음주의 교회가 강하게 부흥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교회가 세속주의로 빠지는 도전을 받는데, 남아공에서 열린 3차 로잔대회에서 세계복음주의 지도자들이 모여 복음주의 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가장 큰 적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짐작에는 이슬람이라고 생각할수 있다. 교회가 저항에 부딪쳐 있다. 미국같은데는 반기독교 국가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인데 놀랍게도 기독교 역사의 어느때보다 가장 순교자를 가장 많이 내는 시기이다. 일년에 십만명이 순교한다. 한쪽에는 배불러서 교회가 세속주의로 빠지는데, 한쪽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내는 강력한 양상이다.
세상에서 발표되는 뉴스는 전혀 균형이 있는 뉴스가 아니다. 교회가 일어나는 상황 정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에 관심이 없다.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확장되는지 알만한 수준도 안된다. 균형있는 시각을 가질 능력이 안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보여지는 나라가 아니다. 지금 어느때보다 격렬한 영적전쟁을 치루는 때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도전을 받지만 주님의 교회는 생각하는대로 실패하고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때일수록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낼때이다. 한가지 분명한것은 전세계 170여개가 넘는 나라에 한국사람이 나가 선교를 한다. 파송순위 2위국가이다. 6만여교회가 살아있고 어느때보다 도전도 많이 받지만 지금까지 주어진 것을 볼때 그냥은 물러설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교회이다.
한국의 교회학자중 한사람이 교회지도자 모임에서 자기의 사견을 말했다. "사실 2천년 기독교 역사속에 기록되어 있던 일들이 120년 역사의 한국교회안에 왠만한 일들이 다 있다. 복음의 합작, 복음의 확장, 복음때문에 고난, 그리고 부흥, 선교등등 2천년 역사속에 일어난 복음의 과정이 짧은 120년 한국교회의 역사속에 뚜렷하게 드러난다." 개인의 사견이다. 충분이 수긍이 가는 지적이다. 2천년 기독교 역사중에 개혁도 있었다. 그런데 한국교회 120년동안 2천년 기독교 역사상 일어난 다른것은 뚜렷하데 존재했는데 아직 한국교회 역사상 뚜렷하게 경험하지 못한 복음의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의미심장한 이야기이다.
나는 한국교회가 짧은 기간안에 폭발적으로 부흥하는 70-90년을 부흥속에 신앙생활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70년초에 예수만나고 당시는 돌이켜 보니 대단하다. 73년 빌리그래함대회등 수백만명이 모인 집회가 계속 열렸다.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과 더불어 국가적으로도 성장했다. 그러자 삶의 형태가 바뀌어졌다. 정신없는 회오리 바람을 치듯이 밀려오는 상황변화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보낸 지난 30년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만들었다. 한국교회 부흥의 시기때는 그물을 쳐 놓으면 들어와 담기만 하면 됐다. 어디를 갈지모르고 담기만 했던 그때 교회가 주님의 진리에 양보없이 정신만 차렸다면 좋았다. 하나님이 주신 어마어마한 기회가 역사에 반복되기가 쉽지 않다. 이제는 그 좋은시절 다 보내고 그물을 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찾아다녀야 한다.
우리가 과연 다음세대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개혁이라는 문제에 있어 한국교회는 어느나라보다 상당히 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고 말그대로 성경대로 믿는다. 복음주의와 개혁주의가 어느나라보다 가장 강력히 뿌리내린 나라가 한국이다. 고난의 시기를 보내면서 한국전쟁의 어려움을 겪었지만 한국인의 성향안에는 '믿으려면 제대로 믿자', '예수님을 닮자', 혹은 '성경말씀대로 믿자'가 지금도 통한다. 다른데는 복음 자체를 거부한다. 아직도 한국성도는 '말씀대로 믿자' '제대로 믿자' '십자가 정신으로 믿자'고 하면 그래도 눈물이 남아있고 가슴을 칠 회개할 기회가 남아있다. 그런데 그마저 물건너가면 이때는 정말 어려워 진다. 불과 얼마 안남았다.
왜냐하면 다음세대들이 복음을 전혀 모른채 살아왔다. 교회안의 자녀들을 생각해보라. 가장 세상적인 세속적인 것을 받아들인다. 그것도 세상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변질시켜 놓은 세속화가 영향을 주었다. 아까 말한 로잘린 대회때 지도자들이 현 복음주의교회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인 70%이상이 세속주의라 했다. 무슬림이 아니다. 이슬람은 3번재 위협이다.
복음주의는 정말 십자가의 본질앞에서 온전하게 개혁되고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과 기회는 사라질것이다. 차라리 확 빗나가면 분별하기 쉬운데 할 것은 다 따라하고 기가 막히게 세속화가 성행하며 덧칠해 놓았다. 그것이 위험하다. 그런 위험이 개인 삶이나 교회안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볼때 인생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과 교회가 십자가 복음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위기가 없다. 인생에서 질병등 여러 비극이 있지만 인간최대의 비극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교회가 당하는 수많은 위기와 도전이 많지만 능히 이길 힘을 가지고 있다. 승리한 교회이다. 그런데 교회가 십자가 복음을 잃어버린다면 이것보다 심각한 위기가 없다. 그런면에서 진정한 개혁, 지금이야 말로 하나님의 진정한 개혁이 있어야 한다.
야곱에게 베델이 있듯이, 탕자에게 아버지가 있듯이 우리교회에는 우리가 돌아갈 십자가 복음이 있는 것은 위로이고 희망이다. 우리는 십자가 복음만 되돌려야 한다. 우리 사역에는 젊은이들이 주종이다. 젊은이들을 끌기위해 여러 수단이 동원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젊은이들을 끌수 있을만한 미끼를 없앴다. 초심으로 가는데 가장 거칠게 헌신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몰려든다. 오직 십자가 복음이다.
젊은이들이 갈망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이 불확실한 시대에 인간에 줄수있는 최대의 메세지는 복음이다. 그리고 복음에 거칠게 자신의 삶을 올인해서 내던지는 것이 불안한 시대에 사람들이 듣고싶고 보고싶은 것이다. 참된 복음을 용기있게 선언하는 것을 듣기 힘들고, 혹 있다고 해도 문제는 그 복음에 자신의 삶의 전부를 걸고 운명을 거는 것을 보기가 쉽지 않다.
주제를 좁히자. 교회는 반드시 어둠을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변화시킬수 있고 변화시킬 능력이 있다고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여러분들은 복음이 복잡한 현대사회에 반들헤게 된 사람을 변화시킬수 있다는 것을 믿는가. 죄송하지만 목에 칼이 들어오는 환경에서 이 믿음을 포기하면 교회는 끝이다.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으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속이는 것이다. 정말 절망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 PCUSA나 성공회는 동성애자가 목사안수를 받일수 있다. LA같은 경우는 자녀들이 동성애에 대해 의무적으로 배워야 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노무현 정부때 법무부가 발의하여 국회에 상정된 동성애 인권을 보장하는 법안이 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동성애를 비난하면 벌금을 내야한다.
교회가 세상에 무장해제를 당하는 이런 상황에 이때도 복음은 변화시킬수 있는가. 이런 저항적인 세상을 향하여 무기력한 보이는 교회임에도 세상을 변화시킬수 있는가. 그 능력이 지금도 있는가. 2천년전 복음이 현재 사람을 변화시킬수 있는가. 이 사실과 질문앞에서 우리 태도를 확실히 해야 한다. 아니면 양심선언하고 교회문을 닫는 것이 낫다.
주제는 "복음의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복음은 과연 변화시킬 능력이 있는가. 디모데후서 3장을 보면 복음의 능력은 경건의 모양에 있다. 복음의 모양은 있지만 복음의 능력을 부인할것이 말세에 일어날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진정으로 복음은 변화시킬 능력이 있는가. 교회안에서 일반적인 상황은 그렇게 성경대로 변화되기는 어렵다는 극단적인 이야기를 왕왕한다. 이런 세가 흐르고 있다.
나는 '순회선교단'에 속한다. '순회선교단'은 무식하여 말씀 그대로 믿는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기에 다시 오실 예수를 그대로 믿는다. 이것은 교리적으로는 아니라고 본다. 모든 교회가 꿈같이 생각하는 것이 주님 재림이다. 마태복음 24장 14절에 보면 선교완성을 하면 주님이 다시 오신다.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면 모든 민족에 복음이 전해져야 하기에 선교에 모든 삶과 모든 에너지를 동원해야 한다. 아니면 선교완성이 안되어 주님이 안오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선교에는 관심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순회선교단'은 15년된 자생단체인데 소식지 제호가 "그 날이 오기까지"이다. 주님이 재림하는 그 날이 오기까지 라는 의미이다. 순회선교단은 하나님나라의 부름과 선교완성을 위한 연합과 섬김으로 부르심이 목표이다. 말로 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주님이 빨리 오실려면 연합을 해서 선교완성을 끝내자는것이다. 선교완성이 되면 그 날이 온다는 말씀을 믿고 무식한 6명이 부르심을 받아 시작한 것이 '순회선교단'이다.
순회선교단은 2가지 철칙이 있다. 첫째 선교지에 나가면 어떤 핑계로던지 돌아오지 못하도록 퇴로를 차단한다. 둘째 절대 편히 죽어 자연사를 못하도록 한다. 그 말은 예수님의 핏값주고 산 선교사들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핏값만큼 살다가 죽어야 한다. 노년에 은퇴하고 안락하게 즐기다가 편하게 죽는다는 것은 성도에게는 있을수가 없는 이야기이다. 교회에 전할 기회가 있으면 도전한다. 절대 장로님 이상은 무덤을 국내에서 사용하지 말고 선교현장에 사용하라고 한다. 그러면 성묘하기 위해 식구들이 선교지를 방문할것이기 때문이다. 제 생각은 그것이 당연하다.
이런 마음으로 선교지를 돌아가다니면서 선교완성하면 주님이 다시 오실수 있다며, 선교완성을 위한 모든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연합을 하자고 독려한다. 천진난만한 발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하나이다. 그리스도만 높아진다면 예수님만 증거하고 복음화만 된다면 누가 나를 이용하던 상관이 없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60여개 나라를 돌아다닌다. 내가 본 관점은 선교동원을 위해 연합하는 것이 힘들다. 자기가 가진것을 내놓지 않는다. 누구 좋으라고 연합을 하느냐는 반응이다.
'순회선교단'은 전세계 선교지를 방문하여 영성집회하고 모든것을 동원해서 선교사들이 못하는 것을 해준다. 하지만 연합하기가 힘들다. 말로는 주님오시기를 원한다지만 선교현장에 가면 안그렇다. 절대 이용을 안당하려고 한다. 한쪽에는 건물을 짓고 쓸일이 없고, 한쪽은 사역은 있는데 건물이 없다. 한쪽은 사람은 있는데 돈이 없고, 한쪽은 돈은 있는데 사람이 없다. 선교사가 100여명이 있는 어느 지역에서 집회를 했는데 한 선교사가 도움을 못받고 아사직전이다. 이만큼 우리에게 연합이 어려운 상황이다.
'순회선교단'은 돌아다니며 조건없이 섬기며 우리를 마음껏 이용하라고 한다. 우리처럼 서로 자기것을 내놓고 연합만 하면 주님이 곧 오실것이라고 하면 감동을 받을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이상하다고 한다. 몇년을 돌다가 주저앉았다. 그래서 선교완성은 실제로 원하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합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갈등속에 내부적인 문제도 일어났다. 공동생활에서 서로를 비난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복음은 분명히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는데 사역자들도 못된 성격이 안버려진다.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는 사람들이 믿음따로 삶따로 였다. 그러다가 떨석 주저앉았다. 우리는 헌신한 사람인데 무엇이 그렇게 잘못되었는가. 복음이 잘못된 것인가를 하나같이 고민을 하다가 그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총체적인 복음앞에 우리의 헌신되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눈물뒤에 숨겨진 기가막힌 병든자의 실체들이 드러났다.
그리는 우리는 변화를 경험했다. 저희는 큰 충격을 받았다. 십자가 복음이 그렇게 뚜렷하게 충격으로 다가오고 우리는 도저히 더는 안된다고 받아 들였다. 저희는 변화를 경험하고 그 변화를 선교사들과 나누게 됐다. 그러자 그렇게 불가능하게 보이던 선교사님 사이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났다. 총제적인 복음앞에 우리를 세우고 사역에 전환점이 되었다. 바닥을 치고 절망가운데에서 하나님이 복음을 다시 보게하셨다. 십자가 복음을 생명으로 붙잡으니 세상적인 다른것에 대해 관심이 없어진다. 오직 주님이 일하시는 것이 보고 싶다.
복음이 결론이 되니 기도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도에 올인을 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의 내면의 변화를 겪으면서 복음은 과연 우리를 변화시킬수 있는가. 어떤 한계에 가면 도저히 넘어서지 않는 변화되지 않는 이런 부분에서 절망을 하고 주저앉혔던 주제였다. 과연 복음은 우리를 변화시킬수 있는가. 예. 당연히 변화시키고 변화시킬수 밖에 없다.
복음이 우리를 변화시킨다고 하면 도대체 성경이 말하는 변화는 무엇인가. 무엇이 변화되어야 복음의 진정한 변화인가. 혼돈이 된다. 목회현장에서 선교현장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나의 사역현장에 관계가 있는가를 보라. 먼저 븍음에 의한 변화는 감격과 흥분이 되는 변화가 성경이 말하는 변화가 아닐수 있다.
1. 복음의 변화에 대한 오해-
상황과 조건의 변화는 변화가 아니다.
성경적인 예로 말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야기이다. 역사에 전무후무하게 상황과 조건의 변화를 경함한 한세대를 꼽으라면 출애굽 사건이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구출을 받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신분이라는 상황과 조건이 자신들을 불행하게 하는 모든 조건이라 생각했다. 그들에게 주인이 바뀌어 하나님이 주인이 되신 상황과 조건의 변화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가면 되었다. 가난안땅을 정탐하고 와 하나님의 어머어마한 기적과 상황과 조건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려 한다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이것이 역사에서 가장 최대로 상황과 조건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의 모습이다. 우리가 무엇이 변해야 정말 변하는가. 한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상황과 조건의 변화는 성경이 말하는 변화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변화해야 정말 변화일까. 인간의 중심의 변화없이는 정말 변화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을 배부르게 하면 그 사람이 바뀌나. 더 사악하게 될 수 있다. 선교에서 정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은정주의이다. 선교지에 가서 인간적인 감정으로 불쌍한 마음에 퍼다준다. 그리고 배불리면 나중에 거지근성은 못고친다. 선교의 가장 큰 병폐가 그것이다. 사람의 배만 불러 바뀌어진다면 십자가 복음이 왜 필요하느냐. 사람들은 인기있는 말이 아니라 잘 안듣는다.
사람의 어려운 일을 도와주는 일은 오히려 쉽다. 가난한 것은 도와주고, 병난 사람을 고쳐주어도 목표를 다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의 중심을 바꿀수 없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고생할때는 겸손하다가 나중에는 벌고나면 악독함 교만함 사악함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다. 결론은 마음의 중심이 바뀌지 않고는 상황과 조건이 바뀌어도 진정한 변화가 아니다.
70-80년 한국교회가 척박한 상황에서 기적과 능력을 풍미하는 과정을 너무 잘안다. 그때 한국교회가 조금만 더 정신차리고 본질에 집중했다면 지금 한국교회 진단한다는둥 호들갑을 떨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30여년전 유행하던 메시지가 그대로 오늘도 나타난다. 심은대로 거둔다. 무슨 가치를 심어주고 어떤 것을 목표로 하게 했는지 뿌린대로 거둔다. 그때 들었던 가치와 메세지가 오늘날 그대로 전해진다. 과연 이대로 가면 되겠는가.
상황과 조건의 변화로는 사람이 변화가 안된다. 한 영혼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상황과 조건의 변화를 가지고 우리는 얼마나 간증했는가. 간증의 핵심은 여기서 멈추면 안된다. 문둥병자 병을 낫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는 말씀을 했다. 세상적으로 돈을 많이 벌거나 자녀들이 명문대학 가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축복이 될수도 있고 저주도 될수 있는 기회이다. 이때 정신차리고 다른짓을 하지말고 주님을 보고 존재의 변화를 가지라고 목회자들이 복음의 십자가로 인도했다면 한국교회가 지금과는 전혀 양상이 달라졌을것이다.
2. 복음의 변화에 대한 오해-
'전심'이 아닌 '진심'만으로는 변화가 아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부자관원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모태신앙중에 드문 모태신앙이다. 부자이고 관리이고 젊은이다. 타락을 안하고 영혼의 겸손함이 있는 신실한 사람이다. 그렇게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다. 계명을 잘지키고 모범으로 살았다. 더불어 영생에 대한 고민을 숨기지 아니하고 예수님에게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느냐고 물었다. 예수님이 그 중심을 정확히 보시고 한가지 부족한것이 있다고 스스로 존재를 볼수 있도록 충격적인 도전을 하신다.
주님은 영생은 너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하나를 더 붙이는것이 아니다. 너의 전부를 걸고 유일하게 붙잡는것이 영생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돈이냐 영생이냐고 물으셨다.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자를 나누어주고 전심이 어디에 있는지 주님이 아신다. 부자관원의 전심은 돈쪽에 가있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알고 콕콕 찌르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절대 핵심을 피해가지 않으셨다.
돈이냐 영생이냐. 부자관원은 영생을 진지하게 추구하던 사람이었으며 영생을 눈앞에 두었기에 그는 성경에서 가장 아쉬운 기록을 남긴다. 그는 돈을 근심했다. 사람은 몸이 가는 곳에 마음이 가는 것이다. 양자택일의 귀로에 있으면 그 마음을 속일수 없다. 진짜 내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절대 자기마음을 숨길수 없다. 돈에 미친사람은 다 안다.
복음은 장난이 아니다, 복음이 밝히기 시작하면 아무로도 위장할수 없다. 십자가의 복음이 증거되는 현장에는 완전히 엎어서 변화가 되어야 한다. 너무 매그럽게 멋있게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을 복음에 선택의 기로에 세우지 않으면 언제 그렇게 살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그런적이 없다. 예수님은 부자관원에게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셨다.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주님이 양보하셨다면 적당하게 만들어낼수가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확 짤라냈다. 복음앞에 한영혼이 뒤집어 지고 자아중심적인 인간이 하나님중심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연습해서 될 일이 아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인간의 설득 감동 감화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수 있다.
결론은 그렇게 진지했던 사람이라도 전심이 아니면 변화할수 없다. 목사들도 속았지만 많은 성도들도 속았다. 저사람이 대단하고 굉장하다는데 정직하게 말해서 아닌것이다. 결국은 저런 모습을 드러낼수 박에 없다. 그러니 전심이 아닌 진심으로는 진정한 변화가 될수가 없다. 우리도 자신에게 속았다. 이렇게 헌신했는데, 누가 변화가 안되었다고 하는가 라고 생각할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냉철하게 비추니 끔찍하다.
결정적인 순간을 못넘기는 실상이 우리의 모습이다. 변화가 아닌것을 속아서 변화되었다고 하고 모래위에 집을 지으면 상황이 흉해진다. 이상한 괴물이 많이 생긴다. 괴물 장로 권사 사역자가 나온다. 복음은 한번도 변한적이 없다. 복음은 순결하다. 예수 그리스도이니까 절대 안변한다. 2천년전에 순수했는데 이제는 현대에 맞추어 복잡해지는 예수복음은 없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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