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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복음의 증인, 방지일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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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3-0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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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은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림 받았다고 하는데, 방지일 목사는 에녹을 연상케 하는 인물이다. 사실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거의 주목치 않았다. 적어도 1957년 중국선교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러했다. 필자 역시 그에 대해서는 한국 장로교회의 주경신학의 거장이었던 박윤선 목사의 친구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물론 그가 197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지만, 그런 그를 언론에서는 그의 이력과 사역, 그리고 그에 관한 교훈을 알렸고, 그러한 그에 관한 기사가 세상에 보도되면서 더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고 판단된다. 필자는 그의 자료를 읽으면서 한 가지 확신을 갖는 것은 그는 한국교회를 위한 선교사, 목회자의 본보기라 생각되는 것이다.

방지일 목사는 현재 103세이시다. 지금도 그는 국내, 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설교, 세미나, 강연 등 다양한 사역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왕성한 집필을 하고, 그가 출판한 저서만 해도 약 100여 권에 달하며, 지금도 가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으며, 그는 한국교회에 살아있는 산 증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가 귀 담아 들어야 할 교훈이다. 따라서 필자는 그의 생애(중국 선교사역까지)를 중심으로, 중국선교 사역을 중심으로 그가 경험했던 부흥에 초점을 맞추어 아직 드러나지 않았던 사건, 역사를 재구성하여 그 의미를 해석하고자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그가 아직도 건재하게 살아 계시다는 것이며, 이는 필자의 글 가운데 보이지 않는 어떤 무게로 남아 있다.

1. 생애 - 중국 선교사로 떠나기까지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대부흥이 일어나고, 2년 후부터 한국교회는 백만인 구령운동을 비롯한 각종 전도운동이 일어나면서 전국적으로 靈風이 불고 있었고, 관서지방은 더욱 그리하였다. 그러한 때, 1911년 5월 21일, 방지일은 평북 선천에서 독실한 믿음의 가정(아버지는 방효원, 어머니는 계은승)에서 10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어릴 때, 아버지 방효원 목사가 중국 선교사로 떠났고,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후 세상을 떠나 지일은 조부모 품에서 자라났다. 조부모님(방만준, 당시 영수로 교회를 섬김)들 역시 신실한 믿음의 분들이셨기에 지일은 그분들의 신앙의 지도와 본을 받았던 것이다.

"내 조부님은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하신 말씀은 별로 없으시다. 하지만 조부님과 나는 한 이불에서 자곤했는데 밤에 어쩌다 깨어나서 보면 베개를 이마에 대시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밤새 그렇게 기도하시다가 또 새벽이면 교회로 가신다. 그 말씀 없으신 할아버지의 신앙이 내게 배어들었다 할 것이다.”

그는 어릴 때 조부님의 보살핌 가운데 자라면서 조부님의 신앙을 자연스럽게 배웠고, 그가 배운 신앙의 덕목은 “성수주일, 십일조 실행, 근독성경, 전도열심, 근면, 강인함 등 이었다. 지일은 아버지보다는 조부님의 신앙을 통해 점점 사역자로 준비되어 갔다. 지일은 선천에 있는 신성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평양 숭실대로 진학하였다. 주변에서는 그가 총명하였기에 연희의전에 진학하길 권유했지만, 나름 목사가 되길 원하는 꿈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로서도 숙부 숙모님들의 기대를 어기는 것은 죄송했지만 벌써 마음에 신학을 하기로 작정한 바라 내 결정대로 숭실대를 택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결심대로 숭실대에 입학을 하였으며, 숭실대학 시절 그의 삶은 매우 규칙적이었다. 즉 공부, 일, 야학, 교회생활이 전부였다. 지일의 삶은 다음과 같은 그의 고백으로 알 수 있는데,

“대학 4년 동안 나는 공부하며, 일하며, 야간학교로, 교회까지 세웠다 함은 이미 기록한 바이다. 이런 삶이 내 대학의 생활이었다.”

특히, 방지일에게 대학시절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첫째는 그의 절친한 친구인 박윤선, 김진홍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과 함께 월간지인 <게자씨>를 간행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잡지는 순전히 전도를 위한 것으로 제작하여 보급하였고, 또한 둘째는 정오리교회를 개척한 것이다. 평양역을 지나면 대동강역이 나오는데, 이 지역에 교회가 없어 처음에는 그곳에 야간학교를 열어 야학을 하면서 아이들이 수 백 명 늘어나고, 그의 가족들도 교회에 나왔지만, 주일에 예배를 드릴 곳이 없었다. 마침 그 지역에 마포삼열 선교사가 미리 사 둔 땅이 있어 헐값으로 구입하여 교회를 세우니 그 교회가 바로 정오리교회였다. 방지일은 이미 대학시절부터 교회에 대한 사랑, 구령의 열정, 봉사적 삶을 실천하였다.

그 후 방지일은 1933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에 매진하면서 그가 삶의 목표로 둔 것은 세 가지, 첫째는 성경. 둘째는 기도. 셋째는 전도였다. 지금의 방지일 목사의 삶의 철학은 바로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내 신학교 생활에는 성경, 기도, 전도 이 세면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스스로 물으며 늘 생각을 몰아 나갔다. 거기서 성경은 기도의 내용이며, 성경 보는 만큼 기도하자. 성경이 기도의 내용이 되게 성경으로 기도하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누는 하나님과의 대화보다 더 큰 은사가 없음을 말함이다.”

그는 이 세 가지 덕목을 이루기 위해서 매우 부지런하게 생활을 하였는데, 신학생 중심의 기도그룹을 형성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이들은 김석구, 김진홍, 방지일, 박윤선, 도승주, 김홍전, 최봉석, 마두원, 이유택, 등이었다. 이들은 함께 공부하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전도하는 삶에 매진하였다. 기도는 주로 김인서 장로집에서 매주 목요일에 모였고, 또한, 매일 아침 4시에 모란봉에 올라 그곳에서 약 3시간 정도 기도하였다. 전도는 전차전도, 전주전도, 우편전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하였으며, 신학교를 졸업하고 박윤선, 김진홍은 미국에 유학하였으나 방지일은 총회 선교부의 부름을 받아 중국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다.

방지일은 평양신학교 시절, 평양에 위치한 장대현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공부하였고,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1937년 2월,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때 방지일의 삶의 방향은 전환되었는데,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박윤선과 김진홍은 미국 유학으로, 하지만 그는 복음을 위해 좀 더 일찍 선교지에 헌신하게 된 것이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복음사역을 위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주의 일꾼을 부르실 뿐만 아니라 기묘한 방법으로 그 일꾼을 사용하신다는 하나님의 역사를 배우게 된다. 이제 방지일이 중국선교를 시작하게 되는 동기와 그의 중국사역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2. 중국선교사로 지원한 동기

중국선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면서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주님은 신실한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고, 그들은 한국인 지도자들에게 선교적 사명을 가르쳤던 것이다. 따라서 1912년 설립된 장로교 총회는 1912년 중국에 선교사 파송을 결의하였고, 1913년 1진으로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세 명이 일찍이 파송 받았으며, 2진으로는 1917년 부친 방효원, 홍승한이 파송되었고, 후에 박상순, 이대영 선교사가 가담하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1진으로 간 선교사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예컨대 박태로는 신병으로 귀국하였고, 사병순, 김영훈은 여러 이유로 선교지를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2진부터는 선교의 열매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에 방지일 선교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중국선교사로 부름받아

사실, 방지일은 신학교 시절, 선교에 대한 꿈 보다는 미국 유학에 대한 계획을 세워 공부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미국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유학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당시 아버지 방효원 선교사가 갑작스럽게 상해로 이임이 되어 청도에 선교사가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총회 선교위원회 김석항 목사로부터 정식공문을 보내온 것이다. 이때 방지일은 중요한 결심을 해야 할 때였다. 많은 고민 끝에 방지일은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어차피 복음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유학인 것인데 총회의 작정이 곧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 함을 깨달은지라 “예”하고 대답을 하고서 친구들은 미국으로, 나는 중국으로 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방지일의 순종과 복음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다. 만일 그가 미국 유학의 길을 선택했더라면 방지일의 삶은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부름 앞에 인간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였다. 방지일은 이렇게 언제나 하나님 중심, 하나님 주권사상의 삶과 신앙을 유지했던 것이다.

중국사역

중국으로 선교사로 파송된 때는 1937년 4월, 총회로부터 선교사 파송장을 받아 그 달 28일, 평양을 떠나 선천으로 가 지인들을 만나 교제한 후에 압록강을 건너 대련까지 배로 청도에 도착하여 래양에 닿았을 때는 그해 5월 7일이었다. 특히 그가 선천에 갔을 때, 심인곤 선생의 말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는데, 당시 심 선생은 방지일 선교사에게 말하길, “이런 감격이 있소, 전에는 논어, 맹자를 저들에게 배웠더니 이제 생명의 말씀을 지고 가게 됐소, 방 목사는 가서 성경만 가르치시오. 이 일이 방목사의 일이요.” 그가 청도 래양에 처음 도착했을 때 중국어는 전혀 몰랐는데, 하지만 그가 21년 동안 중국선교를 하면서 사역에 놀라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는데, 이는 성령의 은혜, 부흥의 역사이었다. 따라서 우선 그 사역을 간단하게 살펴보고, 다음으로 부흥에 대한 그의 견해를 논하고자 한다.

방지일 선교사가 선교지를 중국 청도로 정한 이유가 무엇일까? 앞서 이미 언급하였지만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파송되었던 지역은 청도 래양이었다. 그러나 점차 선교지 지역이 확장되기 시작, 루하현, 평도, 즉묵, 해양 5현으로 늘어났으며, 동쪽은 동해노회, 남쪽은 교동노회로 분리되었는데, 산하에 교회가 약 30개소가 넘어 래양노회가 분리되었다. 이때 방지일 선교사는 중일전쟁으로 인해 청도를 선교지로 정했다. 그리고 열심히 전도하여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가 첫 번째 설립된 교회로서 중가와교회였다. 교회는 나날이 성장하였고, 그 후 태평촌에도 교회가 설립되었고, 오가촌에도, 소촌장에도 교회를 또 설립하였다. 이렇게 해서 선교사들이 개척한 교회가 약 40여 곳이 되었다.

하지만 중일전쟁 후, 1949년 10월 10일, 중국은 급속도로 공산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교회개척은 중지되었고, 공산당이 중국 전역을 잠식하고 있을 때, 난민들은 기본적인 의식주가 문제였으며, 이때 죽창을 만들어 약 1년 넘게 수만 명의 난민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예배, 전도, 성경공부 등을 실시하여 큰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또한, 피난민들 가운데는 한국인들도 포함되었는데, 미군 수송함을 알선하여 이들을 무사히 귀국토록 조치하였다. 하나님은 이런 고난가운데 부흥을 허락하시어 주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던 것이다. 즉 고난 가운데 그를 부흥시켜 난관을 극복하도록 하신 것이다. 방지일 선교사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하나님의 은혜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 모든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니며 혼자서는 그 일을 할 수도 없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 일 뿐이다.”

3. 선교사역가운데 부흥

부흥은 성령의 역사로서 회심을 비롯한 회복, 소생, 치유, 은사, 능력 등의 총체적인 활동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첫째, 성령의 일하심이요, 둘째는 성령의 일하심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방지일 선교사가 중국 청도에서의 사역환경은 평범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중국에서 다섯 번의 정권변화를 경험하였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간단한 글에 다섯 번의 정변을 당했다고 몇 줄에 썼지만 정작 그 곳에 살아보면 그 한 번 당하는 일이 그 어떠하였는가 회고하기만 하여도 아찔하다.” 이는 중국에서의 그의 삶의 위험과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중국선교사로 부임하면서 정착한 지역이 청도, 래양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중국어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하지만 당시는 중국과 일본 간의 전시체제이기에 전쟁 통에 피난민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고, 그런 가운데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여야 할 상황이었다. 그에게 특히 기억에 남는 사건은 일군에 징집된 한국인들 800명을 찾아왔던 일이다. 그리고 미 육전대 클레먼트 준장을 통해 확보한 해사협회에서 이들에게 교육을 하여, 학교도 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클레먼트 준장에게 부탁하여 의식주를 제공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포함한 수 만 명을 본국으로 송환하기 위해 외국상선을 교섭하여 동포들을 귀환토록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국인 피난민들을 위해 활동을 하였다. 피난민들은 중국 공산당 관할지역에서 나왔기에 당장 먹고, 자는 의식주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했고, 주일이면 그들을 위해 예배를 인도해야 했다. 그들은 외국인이지만 방지일 선교사를 의지하고 따랐다. 이때 보살핌을 받은 이들은 후에 방지일 목사에게 편지를 기록하여 그 감사를 하기도 하였다.

“제 할아버지 곽사희는 1987년 하나님에게로 가셨습니다. 그는 떠나실 때 기도하시면서 가셨습니다. 때로 목사님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는 제가 목사님과 통화할 것을 상상도 못하셨을 것입니다. ... 모든 분들이 목사님의 사랑을 다 알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친구들은 크게 흥분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공산 치하에서 9년간의 사역을 하였다. 이때 그가 중국에서 사역할 수 있었던 유일한 근거는 성령을 통한 강력한 부흥이었다. 부흥이 일어나면 어떤 역경도 극복할 수 있으며,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고, 삶의 위기 가운데서도 주의 은혜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방지일 선교사는 체험한 것이다. 그의 사역가운데 우리는 바로 이런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시 방지일 선교사는 오로지 주님의 은혜가운데 그 사랑을 맛보며 살다가 끝까지 주의 복음을 증거 하였다. 이런 사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피려면 먼저 그의 선교관을 정리한 후에 그가 이렇게 부흥을 경험한 것은 그의 어떤 신앙이었는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의 선교관

한국교회는 일찍이 선교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주변 여러 나라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특히 중국은 1912년 총회차원에서 선교사 파송을 결의하여 박태로를 비롯한 2명이 청도로 파송 되었지만, 이들은 선교에 대한 바른 이해, 선교지에 부적응, 언어문제 등으로 귀환하고 말았다. 이어서 방효원을 비롯한 2명의 선교사가, 그리고 1937년에는 방지일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그는 선교에 대해 말하길, “선교는 주님의 지상명령에 따라 구원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데 있다.”라고 하였다. 그는 언제나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오직 구원의 복음을 중심에 두었다. 이는 과거 선교사들이 가르쳐준 사상이다. 물론 그 지역사회의 교육, 의료, 복지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그것은 정부의 일이지 선교사의 임무는 아니라고 주장하였고, 그러면서도 그는 선교지에서 죽창과 청도한국학교를 운영하면서 선교에 전념하였다. 이는 그에게 있어 선교의 주 업무는 복음증거지만,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방법에 있어서는 자립정신을 심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선교는 무엇을 주는 선교는 예속적이 되고, 그들에게 정말 주어야 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복음이었다. 즉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의 복음을 줄 때, 사람들은 그 사랑으로 되돌려 준다는 것을 그는 중국에서 체험적으로 경험했던 것이다. 오늘날 선교지에서 피선교지인들에게 가난하다고 연민의 정으로 베풀기만 하는 인도주의적 차원의 선교에 대한 반대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그 열매를 거두고 있는데, 지금도 당시 교인들이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내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교지에서 부흥을 경험하게 된 중요한 요인은 무엇일까?

그의 부흥관

방지일 목사가 부흥이라 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그의 성경강해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을 이렇게 푼다. 성령충만은 “그의 지배하에 산다는 말이다. 그가 온전히 나를 주장하고 관리함이다. 누구나 성령을 받아 죄를 인식하고 속죄함을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았다. 거기서 충만함을 받아 온전히 그 수하에 살아야 한다.” 이는 그가 성령의 존재를 부흥의 원천으로 여기고, 그 성령의 지배하에 살 때, 내 이성, 내 감정, 내 의지가 다 그의 수하에 거하게 된다는 말이다. 또한, 그는 성령은 각 개인의 사람을 지로한다고 하였다.

그에게 있어 부흥이란 성령의 역사로부터 비롯하며, 성령이 역사할 때 교회가운데 부흥이 일어나 회심과 능력, 그리고 치유와 축사, 용기와 담대함 등이 일어나 모든 환경을 극복하고 극한 고난과 고통가운데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 그는 부흥을 성경 그대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부흥은 성경의 가르침이며,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사상에 근거한 믿음, 성경중심의 삶, 그리고 오로지 기도 열심에 기초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하나님의 주권사상이다. 방지일 선교사는 중국이 공산화되었지만, 선교지역을 떠날 수도 없었고, 떠나서도 안 되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선교사역, 교회설립하는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리고 때로는 공산당에게 잡혀가 취조를 당하면서 그 고난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러나 방지일은 인내함으로 끝까지 믿음으로 견디었다. 공산정권은 방지일 선교사를 추방하기로 하여 그는 모택동 주석에게 공문을 보냈다. 내용은 본인을 파송한 곳으로 보내달라는 것. 결국은 1957년 그는 중국정부에 의해 홍콩으로 퇴거 명령을 받고 중국선교를 모두 마치고 고국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으나, 그는 중국에서의 자신의 사역에 대해 말하길, “내게 대한 처단은 이렇게 일단락이 되니 여기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남이라 실로 공문을 몇 번 냈다.” 방지일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주권, 섭리사상의 믿음을 소유했던 것이다.

사실, 한국장로교 신학사상은 주로 칼빈주의적 신학을 그 중심으로 한다. 여기서 개혁주의 신학이 나왔다. 다시 말하면 개혁주의란 칼빈주의를 포함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으로서 좀 더 폭넓은 신학사상을 말하는데, 방지일은 평양 장로회신학교 시절, 이 신학에 충일한 선교사들의 신학을 배웠던 것이다. 또한 방지일이 당시 수학했던 교수진은 마포삼열, 라부열, 곽안련, 이눌서, 왕길지 등의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친 교수진들이 포진되어 있었기에 그는 하나님이 주권사상으로 무장되었음이 분명하다. 그가 중국의 공산화 가운데서도 그 모진 고난을 견디고 극복한 것은 이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둘째, 말씀에 충만한 삶이었다. 방지일 선교사는 그가 선교사 사직을 한 후에 영등포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 그의 가장 중요한 두 기둥은 말씀과 기둥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말씀과 기도에 대한 분명한 신앙적 확신이 있었다. 이 두 가지는 그에게 있어 마치 마치의 두 바퀴와 같은 것이다. 특히 그는 언제나 말씀 공부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평양신학교 재학 시절에도 기도동지회를 만들어 말씀을 공부하였고, 말씀이 곧 기도내용임을 확신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선교지에서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사회가 어수선하였지만, 죽창에서도 말씀공부를 쉬지 않았다. 그는 고백하길, “그 몇 해 9년 공산정권하에 있은 것은 말씀과 기도의 깊이를 갖게 됐다.”

그는 선교지에서 언제나 성경을 중심에 두었고, 개인적 모임이나 교회 모임에서 성경공부는 언제나 중심이었다. 그리고 성경은 선교의 핵심이요, 성경가르침이 선교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선교란 성경을 주로 강론하며 가르치는 일이 그 일이라 함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곤고한 선교지에서 말씀이 자신을 살렸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21년 동안의 선교에 성경이 중심이었다고 단언한다. “나의 21년의 일이라면 중국 형제자매들과 성경을 같이 맛보는데 있었다고 단언할 수도 있겠다.” 그에게 있어 성경은 자신의 영혼을 살리고, 영혼들을 살리는 영적양식이었고, 이것이 그의 부흥의 원천이었다.

셋째, 기도의 삶이었다. 기도는 방지일 선교사를 믿음의 굳건한 반석위에 세우는 수단이었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상황은 나날이 악화되었고, 공산당원들은 방지일 목사를 취조하면서 경계하였다. 그야말로 초긴장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외로운 삶이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언급하면서 기도에 대해 말하길, “극히 고독한 면이 없지 않았으니 이는 래왕하는 사람이 대부분 끊어졌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기도의 줄만은 그대로 묶이어 있음이다. 이 줄이 당기여 주는가 하면 저 줄을 내가 당기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공산치하에서의 삶을 표현하길, “하나님이 지켜주셔 매일 매일이 은혜, 기적의 생활”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 보호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고, 그 역시 본국 선교부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는 사랑하는 교인들을 철수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계속 교회를 개척하였고,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선교하며, 신앙을 지켰다. 이는 인간적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요, 그 가운데 성령의 역사로 인한 부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판단된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 주권사상에 기초한 믿음이 그에게 있었으며, 날마다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와,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고백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제 중국 기간 21년 동안 다섯 번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앞으로의 어떤 희망을 세우고 산 것은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간 것뿐이다... (추방령을 받아) 내가 떠날 수 있기를 기도하는 이들이 수백 명에 달하였다. 그저 주님 사랑의 맛을 맛보게 하여 주셨다. 주 안에서 하나임을 더욱 절실하게 맛 보았다함이 21년간의 삶이라 하겠다.”

21년 동안 중국에서 숱한 고난의 연속가운데서도 그가 믿음을 지키고,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심령에 부흥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특히 9년 동안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믿었으며, 또한 말씀과 기도의 삶을 통해 항상 성령의 내주와 역사하심을 경험하면서 그는 주님 사랑의 맛을 경험하였던 것이다. 이는 먼저 중국교인들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들과 함께 있고자 하는 마음이 그에게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모든 사명이 끝나고,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그를 인도하사 한국으로 귀환하게 하셨다. 그리고 남은 생은 한국교회와 더 나아가 전세계 복음 증거 할 사명을 위하여 일하도록 섭리하셨음을 배우게 된다.

4. 계속되는 그의 사역

방지일 선교사는 주의 은혜로 1957년 9월 21일에 귀국하였다. 그는 공산체계에서 벗어나 자유가 무엇인지를 몸소 체험하였고, 영적 시험가운데서 성령의 부흥으로 승리하는 법을 경험적으로 배웠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방지일 목사는 영등포에 위치한 영등포교회에 부임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목회 방식으로, 즉 말씀과 기도, 심방 등의 목회를 통해 교인들을 사랑으로 품었고, 말씀으로 교인들을 꾸준히 가르치며, 기도의 본을 보이며, 목회를 감당하였다. 특히 장로교회 목회에 있어 중요한 기관은 당회인데, 말씀 강사를 제외하고는 당회장으로 사회만을 보았다. 즉 행정적인 일은 모두 장로들이 결정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교회는 안정적으로 성장하였고, 그 결과 영등포교회는 서울 강서지역에서는 당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그가 목회하는 동안 다양한 교계활동도 하였는데, 한남노회장 2회, 총회전도부장 17년, 헌법 재정위원, 재단이사, 재단이사장을 비롯해서 총회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상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그는 1979년 6월, 영등포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고, 원로가 되어도 국내외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특히 그가 목회하는 동안 당회원들과 마찰이 거의 없었으며, 그가 목회는 목사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목회자들이 가슴 깊이 간직해야 할 교훈이다.

“성역을 내가 하는 줄로, 내가 성역인 줄로 착오하는 가운데 사는 수가 많이 있다. 목회자의 어느 일이나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에 순종하는 일 뿐이어야 한다. 그가 타산하시고, 계획하시고 그대로 실천하시는 것이 성역이다. 내가 타산하고 설계한 것은 내일이 되는 것 뿐이다.”

그가 영등포교회에서 조기은퇴한 사실은 아름다운 미담이다. 그는 정년 2년 6개월을 앞에 두고 1979년 6월에 은퇴를 하였는데, 그가 그렇게 일찍 은퇴하는 이유는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 자신이 키워온 후진에게 목회권을 넘겨 마치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양하는 듯이 하는데 있는 것 같다.”라고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는 당시 정년 후에도 은퇴하지 않으려는 목회자들에게 도전을 주며,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을 일이라고 하였다. 그는 실로 교권에 욕심이 없었던 지도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였으며, 그는 어디서든지 불필요하게 논쟁하거나 경쟁하진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자원해서 교권의 자리를 얻고자 한 분이 아니셨다. 이 부분은 우리가 참으로 배워야 할 귀한 교훈이다.

목회하는 가운데서도 미담이 참 많았다. 교인들이 명절에 선물을 가지고 오면, 그것을 다 모아 두었다가 정말 어려운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또한 아무리 먼 곳에 있는 교인들이라도 필요하면 찾아가 심방을 하여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기도 하였는데, 한 교인은 말하길, “교인들이 가져다준 가래떡은 버리지 않고, 신문지에 꼭 싸두었다가 밥 대신 그것을 끓여 잡수셨어요.” “양복은 헤어질 때까지 입었고, 아니 헤어지면 기워서 다시 입으시곤 했지요.” 그는 참으로 검소함과 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던 영적 지도자였다. 그러기에 교인들은 그를 따랐고, 그의 설교에 감화, 감동을 받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에피소드가 어디 한두 가지 뿐이겠는가.

그는 목회에서 은퇴하였지만, 지금도 여전히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전에는 영등포교회를 중심으로 사역하였지만, 이제는 전세계적으로 그 폭을 넓혔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매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 기도와 집필, 그리고 새벽기도를 시작으로 하루를 연다. 그리고 영등포교회 부임하면서부터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월요성경공부”를 매주 월요일이면 어김없이 인도하기도 하고, 국내외적으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설교, 강연, 세미나를 통해 도전을 주기도 한다. 더욱이 그는 아직도 하나님이 주신 건강이 있어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기도하면서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로다”라는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가 장수하면서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 생각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가운데는 우연이라는 것이 없기에 그가 이와 같이 장수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축복이요, 자랑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지금 한국교회는 영적 혼란과 침체가운데 있는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 바른 지로를 제시하지 않으면 한국교회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방지일 목사는 한국교회의 산 증인이요, 역사이다. 우리는 그를 통한 역사적 교훈과 가르침을 귀담아 들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의 사역의 행적과 그 도상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부흥을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라 생각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위해 우리에게 부흥케 하시기 때문이다.

조경현 목사(세움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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