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진준 목사 "어떻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가?"
페이지 정보
성회ㆍ2013-04-06 00:00관련링크
본문
RCA 대뉴욕지구 한인교회협의회(회장 송흥용 목사)는 연례행사인 연합성회를 4월 4일(목)부터 4일간 뉴욕신광교회(한재홍 목사)에서 열었다. 강사 노진준 목사(LA한길교회)는 셋째날(토) 집회에서 마태복음 6:31-34을 본문으로 '고난과 믿음'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강사 노진준 목사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태복음 6:31-34)
어려운 행상을 하면서 힘들게 살던 한 집사님이 있었다. 믿음이 좋은 집사님은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행상을 하면서 힘들게 생활을 했다. 집사님이 가지고 있는 꿈은 돈을 좀 더 모아서 힘들게 행상을 하지 않고 시장 어귀에 자리를 잡아서 식당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식당을 운영할수 있도록 돈을 모으기 위해 열심히 성실히 일해서 어느정도 돈을 모을수가 있었다. 그런데 집사님이 다니던 교회에서 건축을 위한 부흥회가 있었다. 강사 목사님이 말씀하기를 하나님은 셋방살이를 하시는데 교인들은 좋은 집에서 살고 있다는 말씀을 들을때 마음에 찔림이 있었다.
피곤한 가운데 은혜를 사모하며 집회에 참가했는데 집회 마지막 날 강사 목사님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은 다른 것은 주신다. 그런데 교인들이 믿음이 적어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못하기에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사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하나님이 나머지는 다 알아서 해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집사님의 마음에 찔림이 있었다.
집사님은 많은 생각을 한 끝에 집회를 마치면서 10년동안 가게를 얻기위해 모아두었던 돈을 다 건축헌금으로 냈다. 보통 부흥성회 강사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면 그렇게 했더니 부모의 유산을 찾게되었다거나 어떤 사람이 가게를 무상으로 빌려주게 되었다는등으로 이야기가 끝이 난다. 그래서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은 다 주신다고 말씀한다.
저는 이런 일들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누가 그런 경험을 했다고 간증했다면 하나님앞에 건축헌금을 드렸더니 복을 주셔서 형통하게 해주시고 더 잘되게 해주셨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라든지 우연히 발생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교회가 교회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분이 과거에 어떤 경험이 있었는지 모르니까 저는 그것을 판단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인지는 동의할수 없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시겠다는 말씀이 과연 그렇게 건축헌금을 하거나 하나님앞에 먼저 헌금하면 하나님이 나머지를 다 해결해 주셔서 복을 주신다는 말씀인가 하는 점에는 동의를 못한다.
보편화와 공식화의 문제
첫째, 동의할수 없는 이유는 특별한 경우의 보편화가 문제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자꾸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에서 공식을 만들어 낸다. 공식을 만들어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고,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하나님은 자동적으로 이렇게 반응하셔야 되는 분이라고 이해하고 싶어한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공식화시켜서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가를 보려고 할때가 많다.
사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공식화할만큼 단순하게 우리를 인도해 가지 않으신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은 각자를 향한 계획이 다르고 각자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다 다르다. 내 경험이 무시되어서는 안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편화하여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는 공식이 되어서도 안될것이다.
간증을 듣고 느끼는 어려움의 중에 하나는 어떤 분들이 그렇게 은혜를 받고 어떤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경험한 다음에 그것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이 저에게 이렇게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이렇게 도와 주셨다고 간증을 하면 참 좋겠는데, 간증을 하고 난 다음에 여러분도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고 말하면 마음이 섬찟하다. 하나님께서 정말 언제나 그런 방법으로 인도하실까 하는 의문이 들기에 그렇다.
어떤 형제가 한 자매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할줄 몰라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응답을 주시기를 담대하라는 확신을 주셨다. 그래서 형제는 자매를 찾아가서 담대하게 좋아한다고 말하고 기도하며 확신을 가졌다고 말했더니 자매가 감동을 받아 결혼을 했다. 그리고는 모든 청년들에게 좋은 사람이 있으면 담대하게 생각하고 고백하면 하나님이 다 짝을 맺어줄것이라고 이야기를 한다면 우리의 경험이 귀한것이기는 하지만 정말 그랬다가 뺨 맞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공식적으로 하나님이 인도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비교를 찾기 좋아한다. 누가 일류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사생활 추적을 시작한다. 어떻게 대학에 합격하게 되었는지를 찾는다. 하루에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 어느 학원을 다녔는지, 참고서는 무엇을 사용했는지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지금은 모르지만 내가 학교를 다닐때만 해도 앙증맞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석을 하고 자기는 하루에 8시간 잠을 자고, 학원도 안다니고, 예습과 복습위주로 학교생활에 충실히 하여 수석합격을 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나도 그렇게 했는데 떨어졌다며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왜 나는 떨어졌을까. 수석 합격자와는 무엇이 달랐는가를 찾는다. 그리고 아침에 먹은 식사가 다른 것을 발견하고, 그 친구는 아침을 김치찌개를 먹어서 수석합격했고 나는 된장찌개를 먹어서 떨어졌다고 말한다면 맞는 것인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와같은 관계를 찾으려고 한다. 어디에 성공의 원인이 있을까, 어디에 형통의 원인이 있을까 찾으려고 하는 것은 너무 보편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이 각자를 인도하시는데 공식에 의해 인도하시는가. 하나님이 독특하게 인도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방법이 답답하니 공식을 찾기 원하고 비결을 찾기원하지만 하나님은 공식에 의해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는다면 그것을 의지하는 것이 더 낫다.
문제가 되는 것은 비결찾기의 문제중의 하나는 지나치게 기복적이다. 어떻게 하면 고난을 피하고 잘살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고 건강해질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인정을 받을 자리에 있을까가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면 우리는 비결찾기를 통해 우리의 가치관이 제대로 되어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하셨다. 그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대한 문제를 염려하기 보다는 우리 인생의 본질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씀을 읽으면서 어떻게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수있을까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리라는 방법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에 있으니 궁극적인 우리의 목적은 내손에 무엇이 쥐어지는가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것인가 하는가에 고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고, 그 부자가 될수 있는 비결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했으니 그렇게 구하면 내가 부자가 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함으로 그 궁극적인 삶의 목적과 의미가 변질되었다. 기복이다.
이원화의 문제
이런 경험이나 이야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과 속을 구분하는 이원화이기에 그렇다. 너무 많은 분들은 먼저 그의 나라를 의를 구하라고 말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언제나 종교적인 행위이다. 언제나 교회이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했을때 성경공부를 먼저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것이고, 교회봉사를 먼저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선교와 전도와 구제에 헌신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고 생각하고, 종교적인 행위나 교회적인 것들은 다 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외의 세상에 있는 것들은 속되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이원론이 우리안에 팽배해져 있다.
무엇이 거룩한 것인가. 목사가 성직자인가. 성직자이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사명을 주셨으니 성직자이다. 저는 이의가 없다. 문제는 그러면 목사만 성직자인가. 여러분이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직이 아닌가. 어떤 것을 성직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무엇을 하는가에 의해 성직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 하는가에 의해 성직이 결정되는 것이다.
내가 목회를 하고 설교를 하고 있지만, 설교를 하는 제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 오늘 설교를 통해 어떻게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어서 내가 얼마나 잘나가는 목사인가 그리고 괜찮은 목사인 것을 보여주고 어떻게 하든지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어서 모든 교인들이 나를 기억하고 좋아하도록 만들겠다고 설교한다면 어떻게 성직이라고 부르겠는가. 이것보다 더 세속적인 것이 어디에 있는가. 순전히 저의 영광과 저의 나라를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성직이 되겠는가.
어떤 분이 기도를 하는데 기도를 하는 이유가 하나님앞에 온전히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기 위해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기도를 통해 내가 얼마나 거룩한 사람인가를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 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며 교만함과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기도한다면 그 기도를 어떻게 거룩한 일이라고 할수있겠는가.
전도를 하는 목적이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교세를 확장시켜 내가 조금 더 잘살겠다는 목적으로 한다면, 목회의 궁극적인 목적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서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교회를 키워서 어떤 사람보다 더 부귀영화를 누리고 떵떵거리며 살겠다고 한다면 그 목회를 누가 성직이라고 부르겠느냐. 그것은 더할수 없이 세속적인 것이다.
무엇을 하는가에 의해 성직이 결정되기 보다는 어떤 마음으로 누구를 위해 하느냐에 의해 성직이 결정된다. 그러니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고자 하는 것이 성직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상의 일들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맡기신 거룩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삶을 전인적으로 주님앞에 드릴수 없다.
요즘은 그렇게 기도하는 분은 없겠지만 처음 미국에 왔을때 그렇게 기도하는 분이 가끔 있었다. "지난 6일동안 썩어져 가는 육신을 위해 죄만 짓고 살다가 오늘 거룩한 주일에 주님앞에 예배하러 나왔습니다. 지난 6일동안 썩어져 갈 육신을 위해 죄를 지은 저를 주님께서 용서해주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세요"라고 기도하고 다음날 다시 썩어질 육신을 위해 죄를 지은 것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렇게 하여 거룩하게 살겠는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일이니 내게는 고달픈 일이지만 그로서리를 하는 일도 세탁소를 하는 일도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이라 이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게 하시고 제가 이곳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도록 해주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부름에 따라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런것들은 다 세속적이고 썩어져 가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오직 교회 일만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교회에 나오는 일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우리의 삶이 온전히 주님앞에서 거룩해질수 있겠는가.
여러분은 주일이 주님의 날이라고 믿는가. 그러면 월요일은 무슨날인가. 내 날인가. 월요일도 주님의 날이다. 십일조가 주님의 것인가. 당연히 주님의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는 우리의 것인가. 아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 부터 왔고 모든 것이 주님을 향하여 간다는 그 믿음의 고백으로 십일조를 주님앞에 드림으로 내 모든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 "십일조를 드렸으니 나머지는 생각도 마세요. 정말 필요하시면 좀 더 드릴게요. 나머지는 내 것입니다. 내 것은 건들지 마세요" 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십의 일은 주님께 드리지만 십의 구로는 여러가지 죄를 지어도 문제로 생각안한다. 어차피 내것이며 드릴것을 드렸으면 나머지는 어떻게 하더라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이 이원화는 굉장한 위험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에 열심을 내도록 하기위해 선한 의도이지만 궁극적으로 변질되어서 사람들은 두개가 분리되어서 교회일은 거룩한 일이고 종교적인 행위는 거룩한 것이고 그 외의 일상적인 일은 세속적인 일이라서 어쩔수 없이 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제가 한번은 교회 복도를 지나가는데 초등학생 하나가 욕을 하니 다른 아이가 "오늘은 주일인데 왜 욕들 하는가"라고 말했다. 하루라도 거룩하게 살자는 그 말이 상당히 유혹적이다. 그래서 웃으면서 그 아이에게 "너는 월요일은 욕을 하느냐"고 물으니 머슥해 했다. 사실 그렇다. 하루도 잘못살바에는 하루라도 잘키자고 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말인 것 같지만 그것은 아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일주일의 7일을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주님인 것을 교회에서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삶가운데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의 의미가 먼저 교회에 봉사하고 충성하면 하나님이 나머지 것을 알아서 해결해 주실것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가?
이 말씀은 사실은 염려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자주하는 말이지만 그럼에도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는 말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라는 것이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너무 걱정하지 마세여. 잘 될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는데 참 힘이 없는 말이다.
고난과 슬픔중에 있는 사람에게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괜찮아질 것입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라고 말을 하기는 하지만, 저는 한번도 내가 그렇게 말하기에 믿음이 좋은 집사가 내 말 때문에 염려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는 염려하지 말라고 하지만 내가 더 걱정이 된다. 실직한 집사님, 사업이 망해서 집에서 쫓겨나게 된 집사님, 병원에서 얼마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고 어쩔줄 몰라하는 장로님 - 그 가족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위로할때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도와주실것입니다" 라는 말을 하면서 마음속에는 '어떻게 하면 좋지. 큰일났네. 어떻게 하면 도울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교인들 중에도 "집사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면 그 말때문에 걱정하지 않는 분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교회다닌지 얼마안된 솔직한 어떤 분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분이 "빈말이라도 고맙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솔직히 목회하면서 "아니 걱정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잊어버리세요. 하나님이 도와주실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신경쓰지 마세요. 잘될것입니다"라고 농담할 여유가 없다. 저는 그렇게 힘든 분들을 찾아가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탁 막힌다. 저 집사님이 어떻게 살지 라는 그런 걱정이 된다. 걱정하는 집사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야단을 치거나 하나님이 알아서 해결해 주실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초월하듯이 대할수가 없다.
물론 우리의 걱정중에는 쓸데 없는 걱정도 있고, 사서하는 걱정도 있다. 사람들이 하는 걱정들중에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기우도 있고 사소한 걱정도 있지만 여러분들의 대부분의 걱정은 진지한것들이다. 그렇게 진지하고 불가피한 걱정을 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사실은 이해가 잘 안된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말씀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어떻게 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인가. 우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의도하지 않는 것이 두가지 있다.
첫째, 아무 생각없이 살라는 말씀은 아니다. 진지하게 사고하지 않는 삶에는 고민이 없고, 진지하게 사고하는 삶에는 항상 염려가 따라오고 깊은 고민이 따라온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초월하듯이 아침에 일어나면 그냥 손에 잡히는대로 아무 옷이나 입고 없으면 안입는 그런 삶을 권장하는 것도 아니고, 주부들에게 식단의 염려로 부터 해방해 주어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고 있는대로 먹으라는 말이 아니다.
아내는 주일아침이 되면 교회에 입고 갈 옷이 없다고 한다. 내가 보면 옷장에 옷이 많은것 같은데 옷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에게 항의하는 것 같이 벗고 갈것이라고 말한다. 아내에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옷장에 있는 아무 옷이나 입고가라고 만일 그렇게 말하면 다음날 식사는 김치에 물을 말아서 먹어야 한다. 그때 아내에게 항의하면 아내는 주님이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것을 염려하느냐고 탓할것이다. 그래서 아내가 교회갈때 입을 옷이 없다고 하면 늘 미안하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무엇을 입든지 먹든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런 관심을 안가지고 살수도 있지만 '아무거나 주세요', '아무거나 입죠' 라는 것이 좋은 신앙인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모습은 다른일때문에 너무 바쁘고 귀찮아서 그럴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삶에 대한 관심이 없기에 그럴수 있다. 바른 신앙의 자세라고 말할수는 없다.
둘째,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불성실한 삶을 권장하는 말씀이 아니다. 우리들의 염려는 대부분 책임에서 부터 비롯된다. 자녀들의 건강, 가족들의 건강, 공동체의 건강함, 교회에 대한 걱정들은 모두 책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느때는 믿음이라는 이유로 불성실한 모습을 합리화시키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이 알아서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말은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안하게 만드는 말이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을텐데, 우리가 해야 할일이 있을텐데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얼마나 불성실하게 들리는지 모른다.
아픈 교인이 있다고 하자. 병원에 입원하여 상태가 안좋다. 장로가 전화하여 "목사님이 한번 심방가시죠"라고 말했다. 그때 만약에 내가 "장로님, 제가 간다고 낫겠어요. 때가 되면 낫는 것이고 아니면 하나님이 데리고 가시면 좋은 곳에 갈텐데 그런것을 가지고 걱정하십니까. 너무 걱정마세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것이다"라고 했다고 하자. 장로는 "목사님, 걱정도 없고 믿음이 좋아서 좋겠습니다. 다음주부터 교회에 나오지 마시고 집에서 푹 쉬세요"라고 말한다. 그때 나는 "그런것을 가지고 다 걱정합니까. 제가 나갈때가 되면 나가고 안나갈때면 안나갈텐데. 하나님이 다 인도하실테니 장로님은 그런것을 걱정마세요"라고 하다가 교회에서 쫓겨난다.
그렇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것이니 하나님이 알아서 인도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믿음이 적은 아내가 조급해서 "통장에 돈이 떨어졌다", "쌀이 떨어졌다"고 걱정한다. 아내에게 "뭐 그런것을 걱정해. 아무것도 걱정하지마. 무엇을 입을끼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아내는 너무 걱정이 되어 아이들 학비가 걱정되어 파타임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런 아내를 보고 나는 "저렇게 믿음이 없어서야. 하나님께 맡기고 살면 되는데..."라고 했다면 이 모습이 좋은 신앙인의 모습으로 보이는가. 아니면 불성실한 자의 모습으로 보이는가. 당연히 불성실한 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이런 모습으로 합리화시키고 있다. 이것이 마치 좋은 믿음인것 처럼.
주님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그런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시면서 제자들을 염려하시고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를 너무 걱정하여서 아테네에서 선교하다가 더 이상 선교를 할수가 없어서 아테네를 떠난 이유도 고린도 교회에 대한 걱정때문이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때 교인들이 모여서 베드로를 위해 간절하게 기도했는데 그 기도가 걱정에 대한 표현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께 제발 베드로를 지켜주시기를 바란다고 간절한 마음으로 걱정하고 기도하지 않았겠는가.
우리의 모든 기도는 결국 염려와 걱정에 대한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가 마치 초월하듯이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구체적인 관심은 염려라는 행위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의식주 대한 관점을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생각하면 마태복음 6장 전체가 위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행위가운데 중요한 3가지는 기도, 금식, 구제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종교적인 예식으로 기도 금식 구제를 귀한 경건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하는 것임에도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했다. 그래서 그것이 위선이 되었다. 기도할때 그들은 큰소리로 회당앞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기에 주님은 너희가 기도할때 하나님앞에 드리는 기도임에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기에 차라리 골방에서, 은밀한 곳에 가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금식할때에는 머리에 기름을 발라서 금식하는 것을 표내지 말라고 하셨고, 구제할때는 나팔을 불지말라고 하셨다. 나팔을 불지 말라는 의미는 당시의 구제함이 나팔관처럼 되어있고 공개되어 있어서 부자들이 자루에다 동전을 가지고 와서 쏫아 부으면 모든 사람들이 쳐다보았고, 불쌍한 과부가 동전 두개를 떨어뜨리면 사람들이 쳐다보고 어떤 인간이 구제헌금를 저렇게 밖에 안하는거야 라고 욕했다. 누구나 볼수있게 되어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자루에다 붓는 것을 주님을 나팔을 불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주님은 구제할때 나팔을 불지말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너희가 모든 일들을 사람에게 보이려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행위임에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했다.
사람에게 보이는 것의 반대는 사람에게 안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에게 안보이려고 하는 것 만큼 사람을 의식한다. 아무도 모르게 기도하겠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의식하는가. 구제를 할때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하면서 자신이 대단한 의인처럼 생각할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 우연히 알게되어 훌륭한 일을 했다는 칭찬을 하면 화를 내고 떠들어 오히려 사람들이 더 알게 된다. 내가 지금 사람에게 알리려고 했는가 안알리려고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기도하면서 사람들이 몰라야 한다며 몰래 예배당에 들어와서 은밀하게 기도한다.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만 들리면 벌떡 일어나 청소하는 것 처럼 하여 나는 절대로 기도를 안한 사람인 것을 보여주면 그것이 경건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잘못된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사람에게 안보이려고 하여 내 의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함에 있어 사람이 보든지 안보든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이 볼수도 있고 안볼수도 있고, 사람이 알아줄수도 안알아줄수도 있는데 나는 기도할때 하나님에게 하며, 구제할때 하나님앞에서 하며, 금식기도를 하나님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의식하라는 말이다. 그것이 경건의 모습이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 경건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경건의 모습이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이 경건의 모습인데, 너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은채 기도하고 구제하고 금식하면서 사람을 의식했다. 이것이 하나의 우상된 모습이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또 다른 하나의 우상의 형태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의식주 문제이다. 여기에도 사람들의 위선이 나타난다.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니 교회와서 찬양드리고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과 선하심을 너무 진실하게 찬양을 한다.
하지만 문을 나가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능하심이 잊혀진다.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능하심과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이 전혀 의식되지 않고 내가 알아서 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문제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과 동행하심을 인정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교회에서 찬양하고 기도할때 내 삶을 주관하시고 내 삶을 지키시고 나의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이라고 진실되게 기도했는데 그럼에도 삶의 현장에서는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주님은 먹고 마시는 문제에 있어서도,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염려하는 행위를 하면 그것이 죄가 된다는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도 하나님이 지키시고 해결하시니 너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의식주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때가 많다. 여러분은 어떤가.
주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저에게 굉장한 위로의 말씀이다. 그 문제도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주님이 하신 약속이기에 이것은 위로의 말씀이고,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자이고 죄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천로역정을 보면 순례자가 여행을 하는 중에 굉장히 지쳐있었다. 그런데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집앞에 왔다. 그때 안에있는 정원사가 순례자에게 들어오라고 한다. 고마운 마음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사자가 입구에 있었다. 사자가 있는 것을 보고 순례자는 들어가지를 못한다. 정원사는 사자가 사슬에 묶여 있으니 들어오라고 한다. 하지만 무서워서 못간다. 정원사가 아무 걱정을 하지 말고 들어오라고 했다. 순례자가 용기를 내어 들어가는데 사자가 깨어서 으러렁 거리며 달려들려고 한다. 그러자 순례자는 사자때문에 멈추고 만다. 그렇게 계속 하다가 결국 집안으로 들어간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보면 사자가 묶여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겠지만, 그 앞을 지나갈때 사자를 보고 당당히 지나갈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묶여 있는 것을 알겠지만 두렵다. 금방이라도 달라들것 같아서 두려워 못가고 있는데 안에서 괜찮아 들어오라는 말을 듣고 두려움과 염려와 불안가운데도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한걸음씩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모습이다.
주님께서 기대하고 있으신 믿음이 있는 사람의 모습은 사자의 앞을 춤을 추며 지나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주위에 그런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 두렵고 불안하다. 고난을 당하면 불안하고, 먹을것이 없으면 불안하고, 사업이 안되면 걱정이 되어 견딜수 없다. 힘이 들어 정말 한걸음도 움직이기 힘든데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지켜주시겠다고 하시고 걱정말고 오라고 하시면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상황은 정말 어려운데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한걸음 한걸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믿음의 모습이고, 따라오라고 말씀하는 것이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니 염려는 행위가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아가라는 말씀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
내가 너를 지켜줄테니, 세상에 폭풍이 불고 견딜수 없는 일때문에 불안하겠지만 너를 불안하게 만들고 두렵게 만드는 그 상황에서도 절대로 멈추지 말고 가자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야말로 길을 막고 싶고 머리를 파묻고 싶은 충동을 느낄만큼 말할수 없는 불안함속에서도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한걸음씩 움직이는 우리를 향하여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따라오라고 하신다. 이것이 위로가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이 은혜의 말씀을 자꾸 율법으로 듣는다.
율법으로 읽어서 우리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염려하는 행위를 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염려를 하면 안된다는데 나도 모르게 염려가 된다. 염려와 불안은 우리에게 위험이 닥쳤다는 자연스러운 신호이다. 연기가 나면 화재 감지기가 울리는 것 처럼 위험이 다가오기에 눈물을 흘린다. 우리의 삶속에서 위험한 일이 닥치면 우리도 모르게 운다. 울고있는 감지기의 모습이 바로 두려움과 염려이다. 그때 주님이 우리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주님이 말씀하시고 우리는 주님의 다스림을 믿고 가고 있는 것, 조심스럽게 한걸음 한걸음 주를 붙들고 따라가고 있는 모습이 믿음의 모습이다.
주님이 지금 그것을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시면 그의 나라는 무엇인가. 내가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내 삶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안계신 것 처럼 그렇게 살지말라고 주님이 말씀하고 계시다.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킨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힘들때 마다 어렵고 고난과 환란가운데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실까, 내가 왜 이런 어려움속에 있을까, 내가 어떤 죄를 지은것이 아닐까 하는 두렵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증이 없어서 힘들때 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증거는 재물이나 건강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확증해 주셨기에 우리는 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지키실것임을 우리가 죄인이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실 것임을 예수 그리스도때문에 알게 된다.
그래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삶을 지키신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의 삶가운데에서 인정하라는 말씀이지 결코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교회를 먼저 생각하라는 말슴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교회를 위해 먼저 투자하면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에 의한 만족,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만족 나는 이것을 자족이라고 부르고 싶다.
주님은 들에 핀 백합이 솔로몬이 입은 옷보다 더 귀하다고 하셨다. 여러분은 어떤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힘들 것 같다. 백합화 보다 솔로몬의 옷이 더 좋다. 주님은 공중의 새도 말씀하시는데 나는 새보다는 더 인간적으로 살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공중을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가 어떤것 보다 더 낫다고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족은 여기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만족하는가, 자족하는가. 상태에 대한 자족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많은 분들이 자족을 상태에 대한 만족을 말하지 않는다. 상태에 대한 만족을 이야기한다면 우리에게 발전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현재의 교인의 수에 만족하는가, 지금 살고있는 아파트를 충분히 만족하는가, 건강에 만족하는가, 자녀들의 성적에 만족하는가.
자족은 내게 주어진 상태에 만족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만족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족하는 것을 배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은 부자도 지키시고 가난해도 나를 지키시니 나의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이 내 거룩을 인도하시고 있는한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나는 만족할수가 있다. 비록 그것이 어려움이고 가난일지라도 나는 그것에서 만족할수 있다고 하는 것이 자족하는 일이다. 이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다스리심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만족하기 보다는 세상가치에 의해 만족을 찾으려고 하기에 힘을 구하고 있는 것 같다. 좀 더 강해야 만족할수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이 형통해야만 만족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저는 생후 8개월부터 소아마비를 앓으면서 마음속에는 항상 강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장애를 가지고 있기에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보다 더 공부잘하고, 성격이 좋고, 운동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했다. 아이들하고 친하게 지내지 않으면 장애때문에 성격이 못났다고 할까봐 노력을 많이 했다. 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에게 굉장히 컸다.
고등학교 1학년때 처음 교회를 나가고, 2학년대 주님을 영접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목사가 되겠다고 헌신했다. 헌신하면서 했던 기도는 강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결국 기도내용은 다리를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그 기도를 4년동안 했다. 하나님께 "험악한 세상에서 장애를 가지고 목회를 못합니다. 목회를 할수있도록 강하게 해주세요"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4년동안 기도한후 어느날 미국에서 한교회 신유집회 참가했다가 강사목사를 통해 하나님은 큰 깨달음을 주셨다. 깨닫게 해주신 주님의 음성은 "나는 절대로 너를 강하게 해주지 않겠다. 내가 너의 강함이 되어 주겠다"이었다. 주님은 "너는 여전히 약해서 나없이 살수없을 것이다. 너는 여전히 약해서 나를 매일 붙들고 동행하여야 한다"라고 하시며 주님은 저를 강하게 해주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주님 자신이 저의 강함이 되겠다 하셨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과연 만족할수 있겠는가. 주님이 나를 강함을 주시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강함이 되신 주님이 내곁을 지켜주신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할수 있는가. 여전히 불안하다. 부자, 건강, 명성등 내가 무엇인가 힘을 가졌으면 세상에서 멸시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말할수 없이 불안했다.
주님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의미는 삶의 현장에서 마치 돈이 있어야지 성공할수 있을것 같고, 크게 잘되어야만 형통할수 있을 것 같은 상황에서, 강함을 구할수 밖에 없는 그런 연약함 가운데에서 우리는 비록 지금 연약하고 힘이 없지만 그럼에도 "나의 강함이 되신 주님이 나의 길을 인도하신다면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그날까지 저는 주님의 손을 붙들고 갑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제게 주신 사명을 살아갈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내삶을 지켜주실 것임을 인정합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강함을 붙들고 한걸음씩 나가고 있는 모습이 바로 믿는 자의 모습이다.
어려운 시대이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도 마음속의 갈등이 있으며 하나님이 강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한다. 주님은 야속하시게도 강하게 해주지 않으신다. 내가 강함이 되어줄께 하신다. 그때 주님앞에 내가 강하지 않지만 주님이 나의 강함이 되어주시면 그 은혜가 내게 족합니다 라고 고백할수 있어야 한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강사 노진준 목사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태복음 6:31-34)
어려운 행상을 하면서 힘들게 살던 한 집사님이 있었다. 믿음이 좋은 집사님은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행상을 하면서 힘들게 생활을 했다. 집사님이 가지고 있는 꿈은 돈을 좀 더 모아서 힘들게 행상을 하지 않고 시장 어귀에 자리를 잡아서 식당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식당을 운영할수 있도록 돈을 모으기 위해 열심히 성실히 일해서 어느정도 돈을 모을수가 있었다. 그런데 집사님이 다니던 교회에서 건축을 위한 부흥회가 있었다. 강사 목사님이 말씀하기를 하나님은 셋방살이를 하시는데 교인들은 좋은 집에서 살고 있다는 말씀을 들을때 마음에 찔림이 있었다.
피곤한 가운데 은혜를 사모하며 집회에 참가했는데 집회 마지막 날 강사 목사님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은 다른 것은 주신다. 그런데 교인들이 믿음이 적어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못하기에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사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하나님이 나머지는 다 알아서 해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집사님의 마음에 찔림이 있었다.
집사님은 많은 생각을 한 끝에 집회를 마치면서 10년동안 가게를 얻기위해 모아두었던 돈을 다 건축헌금으로 냈다. 보통 부흥성회 강사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면 그렇게 했더니 부모의 유산을 찾게되었다거나 어떤 사람이 가게를 무상으로 빌려주게 되었다는등으로 이야기가 끝이 난다. 그래서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은 다 주신다고 말씀한다.
저는 이런 일들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누가 그런 경험을 했다고 간증했다면 하나님앞에 건축헌금을 드렸더니 복을 주셔서 형통하게 해주시고 더 잘되게 해주셨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라든지 우연히 발생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교회가 교회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분이 과거에 어떤 경험이 있었는지 모르니까 저는 그것을 판단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인지는 동의할수 없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시겠다는 말씀이 과연 그렇게 건축헌금을 하거나 하나님앞에 먼저 헌금하면 하나님이 나머지를 다 해결해 주셔서 복을 주신다는 말씀인가 하는 점에는 동의를 못한다.
보편화와 공식화의 문제
첫째, 동의할수 없는 이유는 특별한 경우의 보편화가 문제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자꾸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에서 공식을 만들어 낸다. 공식을 만들어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고,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하나님은 자동적으로 이렇게 반응하셔야 되는 분이라고 이해하고 싶어한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공식화시켜서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가를 보려고 할때가 많다.
사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공식화할만큼 단순하게 우리를 인도해 가지 않으신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은 각자를 향한 계획이 다르고 각자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다 다르다. 내 경험이 무시되어서는 안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편화하여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는 공식이 되어서도 안될것이다.
간증을 듣고 느끼는 어려움의 중에 하나는 어떤 분들이 그렇게 은혜를 받고 어떤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경험한 다음에 그것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이 저에게 이렇게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이렇게 도와 주셨다고 간증을 하면 참 좋겠는데, 간증을 하고 난 다음에 여러분도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고 말하면 마음이 섬찟하다. 하나님께서 정말 언제나 그런 방법으로 인도하실까 하는 의문이 들기에 그렇다.
어떤 형제가 한 자매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할줄 몰라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응답을 주시기를 담대하라는 확신을 주셨다. 그래서 형제는 자매를 찾아가서 담대하게 좋아한다고 말하고 기도하며 확신을 가졌다고 말했더니 자매가 감동을 받아 결혼을 했다. 그리고는 모든 청년들에게 좋은 사람이 있으면 담대하게 생각하고 고백하면 하나님이 다 짝을 맺어줄것이라고 이야기를 한다면 우리의 경험이 귀한것이기는 하지만 정말 그랬다가 뺨 맞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공식적으로 하나님이 인도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비교를 찾기 좋아한다. 누가 일류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사생활 추적을 시작한다. 어떻게 대학에 합격하게 되었는지를 찾는다. 하루에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 어느 학원을 다녔는지, 참고서는 무엇을 사용했는지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지금은 모르지만 내가 학교를 다닐때만 해도 앙증맞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석을 하고 자기는 하루에 8시간 잠을 자고, 학원도 안다니고, 예습과 복습위주로 학교생활에 충실히 하여 수석합격을 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나도 그렇게 했는데 떨어졌다며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왜 나는 떨어졌을까. 수석 합격자와는 무엇이 달랐는가를 찾는다. 그리고 아침에 먹은 식사가 다른 것을 발견하고, 그 친구는 아침을 김치찌개를 먹어서 수석합격했고 나는 된장찌개를 먹어서 떨어졌다고 말한다면 맞는 것인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와같은 관계를 찾으려고 한다. 어디에 성공의 원인이 있을까, 어디에 형통의 원인이 있을까 찾으려고 하는 것은 너무 보편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이 각자를 인도하시는데 공식에 의해 인도하시는가. 하나님이 독특하게 인도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방법이 답답하니 공식을 찾기 원하고 비결을 찾기원하지만 하나님은 공식에 의해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는다면 그것을 의지하는 것이 더 낫다.
문제가 되는 것은 비결찾기의 문제중의 하나는 지나치게 기복적이다. 어떻게 하면 고난을 피하고 잘살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고 건강해질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인정을 받을 자리에 있을까가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면 우리는 비결찾기를 통해 우리의 가치관이 제대로 되어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하셨다. 그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대한 문제를 염려하기 보다는 우리 인생의 본질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씀을 읽으면서 어떻게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수있을까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리라는 방법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에 있으니 궁극적인 우리의 목적은 내손에 무엇이 쥐어지는가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것인가 하는가에 고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고, 그 부자가 될수 있는 비결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했으니 그렇게 구하면 내가 부자가 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함으로 그 궁극적인 삶의 목적과 의미가 변질되었다. 기복이다.
이원화의 문제
이런 경험이나 이야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과 속을 구분하는 이원화이기에 그렇다. 너무 많은 분들은 먼저 그의 나라를 의를 구하라고 말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언제나 종교적인 행위이다. 언제나 교회이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했을때 성경공부를 먼저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것이고, 교회봉사를 먼저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선교와 전도와 구제에 헌신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고 생각하고, 종교적인 행위나 교회적인 것들은 다 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외의 세상에 있는 것들은 속되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이원론이 우리안에 팽배해져 있다.
무엇이 거룩한 것인가. 목사가 성직자인가. 성직자이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사명을 주셨으니 성직자이다. 저는 이의가 없다. 문제는 그러면 목사만 성직자인가. 여러분이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직이 아닌가. 어떤 것을 성직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무엇을 하는가에 의해 성직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 하는가에 의해 성직이 결정되는 것이다.
내가 목회를 하고 설교를 하고 있지만, 설교를 하는 제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 오늘 설교를 통해 어떻게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어서 내가 얼마나 잘나가는 목사인가 그리고 괜찮은 목사인 것을 보여주고 어떻게 하든지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어서 모든 교인들이 나를 기억하고 좋아하도록 만들겠다고 설교한다면 어떻게 성직이라고 부르겠는가. 이것보다 더 세속적인 것이 어디에 있는가. 순전히 저의 영광과 저의 나라를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성직이 되겠는가.
어떤 분이 기도를 하는데 기도를 하는 이유가 하나님앞에 온전히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기 위해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기도를 통해 내가 얼마나 거룩한 사람인가를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 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며 교만함과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기도한다면 그 기도를 어떻게 거룩한 일이라고 할수있겠는가.
전도를 하는 목적이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교세를 확장시켜 내가 조금 더 잘살겠다는 목적으로 한다면, 목회의 궁극적인 목적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서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교회를 키워서 어떤 사람보다 더 부귀영화를 누리고 떵떵거리며 살겠다고 한다면 그 목회를 누가 성직이라고 부르겠느냐. 그것은 더할수 없이 세속적인 것이다.
무엇을 하는가에 의해 성직이 결정되기 보다는 어떤 마음으로 누구를 위해 하느냐에 의해 성직이 결정된다. 그러니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고자 하는 것이 성직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상의 일들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맡기신 거룩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삶을 전인적으로 주님앞에 드릴수 없다.
요즘은 그렇게 기도하는 분은 없겠지만 처음 미국에 왔을때 그렇게 기도하는 분이 가끔 있었다. "지난 6일동안 썩어져 가는 육신을 위해 죄만 짓고 살다가 오늘 거룩한 주일에 주님앞에 예배하러 나왔습니다. 지난 6일동안 썩어져 갈 육신을 위해 죄를 지은 저를 주님께서 용서해주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세요"라고 기도하고 다음날 다시 썩어질 육신을 위해 죄를 지은 것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렇게 하여 거룩하게 살겠는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일이니 내게는 고달픈 일이지만 그로서리를 하는 일도 세탁소를 하는 일도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이라 이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게 하시고 제가 이곳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도록 해주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부름에 따라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런것들은 다 세속적이고 썩어져 가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오직 교회 일만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교회에 나오는 일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우리의 삶이 온전히 주님앞에서 거룩해질수 있겠는가.
여러분은 주일이 주님의 날이라고 믿는가. 그러면 월요일은 무슨날인가. 내 날인가. 월요일도 주님의 날이다. 십일조가 주님의 것인가. 당연히 주님의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는 우리의 것인가. 아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 부터 왔고 모든 것이 주님을 향하여 간다는 그 믿음의 고백으로 십일조를 주님앞에 드림으로 내 모든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 "십일조를 드렸으니 나머지는 생각도 마세요. 정말 필요하시면 좀 더 드릴게요. 나머지는 내 것입니다. 내 것은 건들지 마세요" 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십의 일은 주님께 드리지만 십의 구로는 여러가지 죄를 지어도 문제로 생각안한다. 어차피 내것이며 드릴것을 드렸으면 나머지는 어떻게 하더라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이 이원화는 굉장한 위험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에 열심을 내도록 하기위해 선한 의도이지만 궁극적으로 변질되어서 사람들은 두개가 분리되어서 교회일은 거룩한 일이고 종교적인 행위는 거룩한 것이고 그 외의 일상적인 일은 세속적인 일이라서 어쩔수 없이 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제가 한번은 교회 복도를 지나가는데 초등학생 하나가 욕을 하니 다른 아이가 "오늘은 주일인데 왜 욕들 하는가"라고 말했다. 하루라도 거룩하게 살자는 그 말이 상당히 유혹적이다. 그래서 웃으면서 그 아이에게 "너는 월요일은 욕을 하느냐"고 물으니 머슥해 했다. 사실 그렇다. 하루도 잘못살바에는 하루라도 잘키자고 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말인 것 같지만 그것은 아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일주일의 7일을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주님인 것을 교회에서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삶가운데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의 의미가 먼저 교회에 봉사하고 충성하면 하나님이 나머지 것을 알아서 해결해 주실것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가?
이 말씀은 사실은 염려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자주하는 말이지만 그럼에도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는 말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라는 것이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너무 걱정하지 마세여. 잘 될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는데 참 힘이 없는 말이다.
고난과 슬픔중에 있는 사람에게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괜찮아질 것입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라고 말을 하기는 하지만, 저는 한번도 내가 그렇게 말하기에 믿음이 좋은 집사가 내 말 때문에 염려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는 염려하지 말라고 하지만 내가 더 걱정이 된다. 실직한 집사님, 사업이 망해서 집에서 쫓겨나게 된 집사님, 병원에서 얼마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고 어쩔줄 몰라하는 장로님 - 그 가족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위로할때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도와주실것입니다" 라는 말을 하면서 마음속에는 '어떻게 하면 좋지. 큰일났네. 어떻게 하면 도울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교인들 중에도 "집사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면 그 말때문에 걱정하지 않는 분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교회다닌지 얼마안된 솔직한 어떤 분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분이 "빈말이라도 고맙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솔직히 목회하면서 "아니 걱정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잊어버리세요. 하나님이 도와주실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신경쓰지 마세요. 잘될것입니다"라고 농담할 여유가 없다. 저는 그렇게 힘든 분들을 찾아가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탁 막힌다. 저 집사님이 어떻게 살지 라는 그런 걱정이 된다. 걱정하는 집사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야단을 치거나 하나님이 알아서 해결해 주실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초월하듯이 대할수가 없다.
물론 우리의 걱정중에는 쓸데 없는 걱정도 있고, 사서하는 걱정도 있다. 사람들이 하는 걱정들중에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기우도 있고 사소한 걱정도 있지만 여러분들의 대부분의 걱정은 진지한것들이다. 그렇게 진지하고 불가피한 걱정을 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사실은 이해가 잘 안된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말씀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어떻게 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인가. 우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의도하지 않는 것이 두가지 있다.
첫째, 아무 생각없이 살라는 말씀은 아니다. 진지하게 사고하지 않는 삶에는 고민이 없고, 진지하게 사고하는 삶에는 항상 염려가 따라오고 깊은 고민이 따라온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초월하듯이 아침에 일어나면 그냥 손에 잡히는대로 아무 옷이나 입고 없으면 안입는 그런 삶을 권장하는 것도 아니고, 주부들에게 식단의 염려로 부터 해방해 주어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고 있는대로 먹으라는 말이 아니다.
아내는 주일아침이 되면 교회에 입고 갈 옷이 없다고 한다. 내가 보면 옷장에 옷이 많은것 같은데 옷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에게 항의하는 것 같이 벗고 갈것이라고 말한다. 아내에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옷장에 있는 아무 옷이나 입고가라고 만일 그렇게 말하면 다음날 식사는 김치에 물을 말아서 먹어야 한다. 그때 아내에게 항의하면 아내는 주님이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것을 염려하느냐고 탓할것이다. 그래서 아내가 교회갈때 입을 옷이 없다고 하면 늘 미안하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무엇을 입든지 먹든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런 관심을 안가지고 살수도 있지만 '아무거나 주세요', '아무거나 입죠' 라는 것이 좋은 신앙인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모습은 다른일때문에 너무 바쁘고 귀찮아서 그럴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삶에 대한 관심이 없기에 그럴수 있다. 바른 신앙의 자세라고 말할수는 없다.
둘째,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불성실한 삶을 권장하는 말씀이 아니다. 우리들의 염려는 대부분 책임에서 부터 비롯된다. 자녀들의 건강, 가족들의 건강, 공동체의 건강함, 교회에 대한 걱정들은 모두 책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느때는 믿음이라는 이유로 불성실한 모습을 합리화시키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이 알아서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말은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안하게 만드는 말이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을텐데, 우리가 해야 할일이 있을텐데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얼마나 불성실하게 들리는지 모른다.
아픈 교인이 있다고 하자. 병원에 입원하여 상태가 안좋다. 장로가 전화하여 "목사님이 한번 심방가시죠"라고 말했다. 그때 만약에 내가 "장로님, 제가 간다고 낫겠어요. 때가 되면 낫는 것이고 아니면 하나님이 데리고 가시면 좋은 곳에 갈텐데 그런것을 가지고 걱정하십니까. 너무 걱정마세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것이다"라고 했다고 하자. 장로는 "목사님, 걱정도 없고 믿음이 좋아서 좋겠습니다. 다음주부터 교회에 나오지 마시고 집에서 푹 쉬세요"라고 말한다. 그때 나는 "그런것을 가지고 다 걱정합니까. 제가 나갈때가 되면 나가고 안나갈때면 안나갈텐데. 하나님이 다 인도하실테니 장로님은 그런것을 걱정마세요"라고 하다가 교회에서 쫓겨난다.
그렇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것이니 하나님이 알아서 인도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믿음이 적은 아내가 조급해서 "통장에 돈이 떨어졌다", "쌀이 떨어졌다"고 걱정한다. 아내에게 "뭐 그런것을 걱정해. 아무것도 걱정하지마. 무엇을 입을끼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아내는 너무 걱정이 되어 아이들 학비가 걱정되어 파타임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런 아내를 보고 나는 "저렇게 믿음이 없어서야. 하나님께 맡기고 살면 되는데..."라고 했다면 이 모습이 좋은 신앙인의 모습으로 보이는가. 아니면 불성실한 자의 모습으로 보이는가. 당연히 불성실한 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이런 모습으로 합리화시키고 있다. 이것이 마치 좋은 믿음인것 처럼.
주님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그런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시면서 제자들을 염려하시고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를 너무 걱정하여서 아테네에서 선교하다가 더 이상 선교를 할수가 없어서 아테네를 떠난 이유도 고린도 교회에 대한 걱정때문이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때 교인들이 모여서 베드로를 위해 간절하게 기도했는데 그 기도가 걱정에 대한 표현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께 제발 베드로를 지켜주시기를 바란다고 간절한 마음으로 걱정하고 기도하지 않았겠는가.
우리의 모든 기도는 결국 염려와 걱정에 대한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가 마치 초월하듯이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구체적인 관심은 염려라는 행위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의식주 대한 관점을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생각하면 마태복음 6장 전체가 위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행위가운데 중요한 3가지는 기도, 금식, 구제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종교적인 예식으로 기도 금식 구제를 귀한 경건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하는 것임에도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했다. 그래서 그것이 위선이 되었다. 기도할때 그들은 큰소리로 회당앞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기에 주님은 너희가 기도할때 하나님앞에 드리는 기도임에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기에 차라리 골방에서, 은밀한 곳에 가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금식할때에는 머리에 기름을 발라서 금식하는 것을 표내지 말라고 하셨고, 구제할때는 나팔을 불지말라고 하셨다. 나팔을 불지 말라는 의미는 당시의 구제함이 나팔관처럼 되어있고 공개되어 있어서 부자들이 자루에다 동전을 가지고 와서 쏫아 부으면 모든 사람들이 쳐다보았고, 불쌍한 과부가 동전 두개를 떨어뜨리면 사람들이 쳐다보고 어떤 인간이 구제헌금를 저렇게 밖에 안하는거야 라고 욕했다. 누구나 볼수있게 되어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자루에다 붓는 것을 주님을 나팔을 불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주님은 구제할때 나팔을 불지말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너희가 모든 일들을 사람에게 보이려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행위임에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했다.
사람에게 보이는 것의 반대는 사람에게 안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에게 안보이려고 하는 것 만큼 사람을 의식한다. 아무도 모르게 기도하겠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의식하는가. 구제를 할때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하면서 자신이 대단한 의인처럼 생각할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 우연히 알게되어 훌륭한 일을 했다는 칭찬을 하면 화를 내고 떠들어 오히려 사람들이 더 알게 된다. 내가 지금 사람에게 알리려고 했는가 안알리려고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기도하면서 사람들이 몰라야 한다며 몰래 예배당에 들어와서 은밀하게 기도한다.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만 들리면 벌떡 일어나 청소하는 것 처럼 하여 나는 절대로 기도를 안한 사람인 것을 보여주면 그것이 경건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잘못된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사람에게 안보이려고 하여 내 의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함에 있어 사람이 보든지 안보든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이 볼수도 있고 안볼수도 있고, 사람이 알아줄수도 안알아줄수도 있는데 나는 기도할때 하나님에게 하며, 구제할때 하나님앞에서 하며, 금식기도를 하나님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의식하라는 말이다. 그것이 경건의 모습이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 경건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경건의 모습이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이 경건의 모습인데, 너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은채 기도하고 구제하고 금식하면서 사람을 의식했다. 이것이 하나의 우상된 모습이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또 다른 하나의 우상의 형태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의식주 문제이다. 여기에도 사람들의 위선이 나타난다.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니 교회와서 찬양드리고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과 선하심을 너무 진실하게 찬양을 한다.
하지만 문을 나가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능하심이 잊혀진다.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능하심과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이 전혀 의식되지 않고 내가 알아서 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문제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과 동행하심을 인정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교회에서 찬양하고 기도할때 내 삶을 주관하시고 내 삶을 지키시고 나의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이라고 진실되게 기도했는데 그럼에도 삶의 현장에서는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주님은 먹고 마시는 문제에 있어서도,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염려하는 행위를 하면 그것이 죄가 된다는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도 하나님이 지키시고 해결하시니 너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의식주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때가 많다. 여러분은 어떤가.
주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저에게 굉장한 위로의 말씀이다. 그 문제도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주님이 하신 약속이기에 이것은 위로의 말씀이고,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자이고 죄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천로역정을 보면 순례자가 여행을 하는 중에 굉장히 지쳐있었다. 그런데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집앞에 왔다. 그때 안에있는 정원사가 순례자에게 들어오라고 한다. 고마운 마음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사자가 입구에 있었다. 사자가 있는 것을 보고 순례자는 들어가지를 못한다. 정원사는 사자가 사슬에 묶여 있으니 들어오라고 한다. 하지만 무서워서 못간다. 정원사가 아무 걱정을 하지 말고 들어오라고 했다. 순례자가 용기를 내어 들어가는데 사자가 깨어서 으러렁 거리며 달려들려고 한다. 그러자 순례자는 사자때문에 멈추고 만다. 그렇게 계속 하다가 결국 집안으로 들어간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보면 사자가 묶여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겠지만, 그 앞을 지나갈때 사자를 보고 당당히 지나갈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묶여 있는 것을 알겠지만 두렵다. 금방이라도 달라들것 같아서 두려워 못가고 있는데 안에서 괜찮아 들어오라는 말을 듣고 두려움과 염려와 불안가운데도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한걸음씩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모습이다.
주님께서 기대하고 있으신 믿음이 있는 사람의 모습은 사자의 앞을 춤을 추며 지나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주위에 그런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 두렵고 불안하다. 고난을 당하면 불안하고, 먹을것이 없으면 불안하고, 사업이 안되면 걱정이 되어 견딜수 없다. 힘이 들어 정말 한걸음도 움직이기 힘든데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지켜주시겠다고 하시고 걱정말고 오라고 하시면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상황은 정말 어려운데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한걸음 한걸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믿음의 모습이고, 따라오라고 말씀하는 것이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니 염려는 행위가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아가라는 말씀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
내가 너를 지켜줄테니, 세상에 폭풍이 불고 견딜수 없는 일때문에 불안하겠지만 너를 불안하게 만들고 두렵게 만드는 그 상황에서도 절대로 멈추지 말고 가자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야말로 길을 막고 싶고 머리를 파묻고 싶은 충동을 느낄만큼 말할수 없는 불안함속에서도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한걸음씩 움직이는 우리를 향하여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따라오라고 하신다. 이것이 위로가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이 은혜의 말씀을 자꾸 율법으로 듣는다.
율법으로 읽어서 우리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염려하는 행위를 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염려를 하면 안된다는데 나도 모르게 염려가 된다. 염려와 불안은 우리에게 위험이 닥쳤다는 자연스러운 신호이다. 연기가 나면 화재 감지기가 울리는 것 처럼 위험이 다가오기에 눈물을 흘린다. 우리의 삶속에서 위험한 일이 닥치면 우리도 모르게 운다. 울고있는 감지기의 모습이 바로 두려움과 염려이다. 그때 주님이 우리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주님이 말씀하시고 우리는 주님의 다스림을 믿고 가고 있는 것, 조심스럽게 한걸음 한걸음 주를 붙들고 따라가고 있는 모습이 믿음의 모습이다.
주님이 지금 그것을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시면 그의 나라는 무엇인가. 내가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내 삶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안계신 것 처럼 그렇게 살지말라고 주님이 말씀하고 계시다.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킨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힘들때 마다 어렵고 고난과 환란가운데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실까, 내가 왜 이런 어려움속에 있을까, 내가 어떤 죄를 지은것이 아닐까 하는 두렵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증이 없어서 힘들때 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증거는 재물이나 건강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확증해 주셨기에 우리는 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지키실것임을 우리가 죄인이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실 것임을 예수 그리스도때문에 알게 된다.
그래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삶을 지키신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의 삶가운데에서 인정하라는 말씀이지 결코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교회를 먼저 생각하라는 말슴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교회를 위해 먼저 투자하면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에 의한 만족,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만족 나는 이것을 자족이라고 부르고 싶다.
주님은 들에 핀 백합이 솔로몬이 입은 옷보다 더 귀하다고 하셨다. 여러분은 어떤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힘들 것 같다. 백합화 보다 솔로몬의 옷이 더 좋다. 주님은 공중의 새도 말씀하시는데 나는 새보다는 더 인간적으로 살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공중을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가 어떤것 보다 더 낫다고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족은 여기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만족하는가, 자족하는가. 상태에 대한 자족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많은 분들이 자족을 상태에 대한 만족을 말하지 않는다. 상태에 대한 만족을 이야기한다면 우리에게 발전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현재의 교인의 수에 만족하는가, 지금 살고있는 아파트를 충분히 만족하는가, 건강에 만족하는가, 자녀들의 성적에 만족하는가.
자족은 내게 주어진 상태에 만족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만족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족하는 것을 배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은 부자도 지키시고 가난해도 나를 지키시니 나의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이 내 거룩을 인도하시고 있는한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나는 만족할수가 있다. 비록 그것이 어려움이고 가난일지라도 나는 그것에서 만족할수 있다고 하는 것이 자족하는 일이다. 이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다스리심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만족하기 보다는 세상가치에 의해 만족을 찾으려고 하기에 힘을 구하고 있는 것 같다. 좀 더 강해야 만족할수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이 형통해야만 만족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저는 생후 8개월부터 소아마비를 앓으면서 마음속에는 항상 강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장애를 가지고 있기에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보다 더 공부잘하고, 성격이 좋고, 운동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했다. 아이들하고 친하게 지내지 않으면 장애때문에 성격이 못났다고 할까봐 노력을 많이 했다. 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에게 굉장히 컸다.
고등학교 1학년때 처음 교회를 나가고, 2학년대 주님을 영접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목사가 되겠다고 헌신했다. 헌신하면서 했던 기도는 강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결국 기도내용은 다리를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그 기도를 4년동안 했다. 하나님께 "험악한 세상에서 장애를 가지고 목회를 못합니다. 목회를 할수있도록 강하게 해주세요"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4년동안 기도한후 어느날 미국에서 한교회 신유집회 참가했다가 강사목사를 통해 하나님은 큰 깨달음을 주셨다. 깨닫게 해주신 주님의 음성은 "나는 절대로 너를 강하게 해주지 않겠다. 내가 너의 강함이 되어 주겠다"이었다. 주님은 "너는 여전히 약해서 나없이 살수없을 것이다. 너는 여전히 약해서 나를 매일 붙들고 동행하여야 한다"라고 하시며 주님은 저를 강하게 해주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주님 자신이 저의 강함이 되겠다 하셨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과연 만족할수 있겠는가. 주님이 나를 강함을 주시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강함이 되신 주님이 내곁을 지켜주신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할수 있는가. 여전히 불안하다. 부자, 건강, 명성등 내가 무엇인가 힘을 가졌으면 세상에서 멸시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말할수 없이 불안했다.
주님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의미는 삶의 현장에서 마치 돈이 있어야지 성공할수 있을것 같고, 크게 잘되어야만 형통할수 있을 것 같은 상황에서, 강함을 구할수 밖에 없는 그런 연약함 가운데에서 우리는 비록 지금 연약하고 힘이 없지만 그럼에도 "나의 강함이 되신 주님이 나의 길을 인도하신다면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그날까지 저는 주님의 손을 붙들고 갑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제게 주신 사명을 살아갈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내삶을 지켜주실 것임을 인정합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강함을 붙들고 한걸음씩 나가고 있는 모습이 바로 믿는 자의 모습이다.
어려운 시대이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도 마음속의 갈등이 있으며 하나님이 강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한다. 주님은 야속하시게도 강하게 해주지 않으신다. 내가 강함이 되어줄께 하신다. 그때 주님앞에 내가 강하지 않지만 주님이 나의 강함이 되어주시면 그 은혜가 내게 족합니다 라고 고백할수 있어야 한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