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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준 목사 "고난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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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3-04-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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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CA 대뉴욕지구 한인교회협의회(회장 송흥용 목사)는 연례행사인 연합성회를 4월 4일(목)부터 4일간 뉴욕신광교회(한재홍 목사)에서 열었다. 협의회내에는 14개 교회가 속해있으며 성회의 각 순서를 나누어 담당했다. 강사 노진준 목사(LA한길교회)는 "고난중에 있는 성도들에게"라는 주제로 '고난과 하나님의 뜻', '고난과 교회'. '고난과 믿음', '고난과 기도'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첫날 저녁 성회에서 노진준 목사는 고난중에 있는 성도들의 기도응답에 대해서 말씀을 전했다. 노 목사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기도가 응답이 안되는 이유는 우리가 기도할때 정욕으로 기도해서, 정성이 부족해서, 믿음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지 않았기에 등등의 이유들을 말하고 있다"고 흔히 실수하기 쉬운 잘못된 기도응답에 대해 지적했다.

노진준 목사는 "기도를 해서 무엇을 얻느냐 받아내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내 삶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믿고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걸음을 지키시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기필코 선한일을 이루실것이라는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선함의 증거는 더 이상 재물도 아니고 더 이상 건강도 아니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말씀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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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노진준 목사

여러분은 정말 기도의 응답을 믿는가.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정말로 그대로 된다고 여러분은 믿는가. 힘들것이다. 여러분은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말씀을 믿기는 하는데,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믿는데도 불구하고 사실은 우리가 구하는대로 안된다. 구하는대로 응답되지 않고, 그렇게 찾아도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지 않으신다. 고난가운데 있으면서 많이 기도하고 환란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에 부르짖고 매달려 기도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생각이 들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지체하신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그러나 경건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분명히 구하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구하는대도 주지 않으셨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기도가 문제가 있기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지 않으시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생각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틀림없어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실것인데 구해도 응답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할것이다. 사람들은 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들을 하고 많은 답을 제시한다.

믿음이 부족하기에 기도의 응답이 없다?

왜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을까 말할때 어떤 분들은 기도할때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기에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도대체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는가. 사람들이 믿음이 부족해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생각될때 자주 사용되는 성경구절은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야고보서 1:6)"이다.

이 말씀을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시는데, 기도할때 의심하는 자는 마치 요동하는 바닷물결같아서 두마음을 품은 자이기에 하나님이 결코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믿음으로 구한다는 의미는 의심하지 않고 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믿음으로 구하는 것은 의심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실줄 믿고, 내 기도를 응답하실 줄을 믿는다고 간절히 기도하다가도 마음속에 의심이 생긴다. 혹시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들어 주신다면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을 하면 응답을 못받는 것이다. 그때는 의심 마귀를 쫓아내고 다시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의심하지 않는 믿음이라는 것은 결국은 정신통일이다. 내 마음속에 분산되고 분리된 마음이 없이 하나님이 반드시 주실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야고보서 1:6에서 말하는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구하든지 구하는 것이 응답될것을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1-2절과 연결시켜 생각해보면 고난중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앞에서 간절하게 기도할때 주님이 말씀하신 구하라는 것은 지혜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 이 지혜를 구할때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구하라고 말씀하셨으니, 의심하지 말라는 것은 내가 기도한것이 그대로 응답될것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환란중에 고난중에 기도할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하실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선하게 인도하실 것이라는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들지 아니하면 그 기도가 빨리 응답안되고 넘어질수 있다. 그러니 결국은 믿음으로 구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고 붙들고 기도하라는 이야기인데, 우리는 마치 기도하면서 정신통일하면 되는 것 처럼 생각한다. 내가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는데 그 기도중에 조금이라도 의심하면 하나님이 안들어 주실 것 처럼 생각한다면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태복음 17:20)"라는 목사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마음속에 감동이 있었다. 집에 와서 사과나무를 옮겨달라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집앞에 사과나무가 있었는데 풍경을 가리고 있어 뒤뜰로 옮겨갔으면 좋겠다고 믿음으로 기도했다. 기도후 아침에 일어나 집앞으로 나가보니 나무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기분이 안좋아진 할머니는 목사님에게 찾아가 기도했는데도 왜 나무가 옮겨가지 않았는가를 물었다. 목사님이 말하기를 아침에 일어나 사과나무를 보기위해 집앞으로 갔는가 아니면 뒤뜰로 갔는가를 물었다. 할머니가 앞으로 갔다고 하자, 목사님은 옮겨진 사과나무를 보고싶으면 뒷뜰로 가야했는데 집앞으로 갔으니 그것은 의심하는 것이므로 응답이 안되었다고 대답했다. 이것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믿음이다.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의심하지 말라는 것은 내가 기도하면 된다고 믿는 어떤 확신과 심지어는 정신통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청년들이 "하나님, 저 자매를 저에게 주시옵소서, 주신줄 믿습니다"라고 기도하면서도 자신이 없다. 마음속에 정말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실까 또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하는 생각이 들면 "의심 마귀 물러갈지어다. 하나님이 그 자매를 저에게 주신것을 믿습니다. 주신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고 자매를 찾아가서 "그대는 내것입니다. 내가 기도했기에 하나님이 반드시 나에게 주실것입니다"라고 하면 아마도 뺨을 맞을 것이다.

이런것을 좋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말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이 구하는 것이 반드시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내가 지금 구하고 있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가를 생각해야 하는데, 무조건 기도하며 달라고 하면서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주실것은 아닐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통일된 마음이 없기에 분산된 생각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지 않는 것은 아니시다.

정성이 부족하기에 기도의 응답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기도가 정성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어느때는 기도의 때가 되지 않아서 하나님이 응답해주지 않으신다고 말하기도 한다. 정성이 부족하기에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크게 기여한 말씀이 있다면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악한 재판장과 불쌍한 과부의 일화일 것이다. 한 마을에 악한 재판장과 불쌍한 과부가 있었다. 과부는 억울한 일이 있어서 재판장을 찾아갔다. 원한을 풀어달라고 간청했는데 재판장이 안들어 주었다. 여러번 찾아간 것 같은데 한번도 안들어 주었다. 그러다가 악한 재판관이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지만 억울한 과부의 원한을 들어주지 않으면 자꾸 나를 찾아와서 괴롭게 할 것이니 들어주리라 하고 불쌍한 과부의 원한을 들어주었다.

주님은 그 비유를 말씀하면서 주님은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의 원한을 들어주시지 않겠는가 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그렇게 악한 재판관이라 할지라도 불쌍한 과부가 자꾸 간청해서 기도를 하니 그 기도를 듣고 귀찮아서라도 들어준 것 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자꾸 기도하면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악한 재판관과 하나님을 비교해서 우리 주님도 악한 재판관 처럼 자꾸 구하면 주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 것 같다. 제가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악한 재판관은 너무 악하기에 귀찮아서 들어주는 것이다.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의 원한을 즉각 들어주어야 하는데 안들어주다가 귀찮아서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이 악한 재판장과 다르시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드리는 모든 기도를, 우리의 신음소리 조차 주님이 안들어시겠는가.

주님은 악한 재판관과 다르시다.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다 듣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기에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안듣고 계시다가, 우리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는가를 세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주님이 악한 재판장 처럼 간청하면 들어주신다고 하면 하나님이 악한 재판관보다 더 악해진다. 우리중에 10년을 기도하고 있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 기도해도 안들어주시는 경우가 있다.

주님이 기도응답을 안주시는 이유가 아직도 우리의 기도가 부족하기에 그런가. 간청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아서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면서 기도의 수를 세고 계시는 것인가. 이제 한번만 더 기도하면 들어주시겠다고 하시는데 이제는 주님의 뜻이 아니구나 하고 우리가 기도를 멈추기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인가.

이런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 마저 우리의 신음소리 조차도 들으신다. 하나님이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운데 한 기도라도 떨어뜨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다 응답하시지 기도가 수가 찰때까지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성경적인 입장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기에 기도의 응답이 없다?

어떤분들은 말하기를 기도가 응답이 안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응답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할때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모른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응답이 되겠지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모른채 기도할때가 많다.

어떤분들은 "하나님, 남편의 좋은 직장에 갈수있도록, 아들이 좋은 대학을 갈수있도록, 사업이 잘되도록, 가족의 건강을 지켜주시고, 교회가 부흥하게 해주세요..."등등의 기도제목으로 1시간동안 간절하게 기도하고 난 다음 "그러나 내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하며 기도를 마친다. 그것이 바른 기도인가. 그냥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해달라고 하면 10초면 될 기도를 1시간 기도한 다음에 마지막에 암호처럼 붙인다. 아버지의 원하심이 내 삶을 통해서 이루어 지기를 원한다는 간절한 소원과 고백을 가지고 내가 있는 형편과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라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1시간 동안 했던 기도가 응답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 뜻대로 하시라는 것을 암호처럼 사용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는데도 안들어 주시면 곤란하죠. 이제는 기도한 것을 다들어 주셔야죠. 그렇게까지 기도했는데 안들어주시면 섭섭해요" 라는 생각을 하게되면, 아버지의 뜻대로는 하옵소서 라는 그 기도는 내 원함이 이루어 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잘못 구하기에 기도의 응답이 없다?

잘못 구하기 때문에 응답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야고보서 4장에 보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라는 내용이 있다. 도대체 정욕으로 구한다는 것이 무슨말인가. 어떤 기도들이 정욕적인 기도인가. 야고보서의 문맥을 보면 당시 교회는 분쟁가운데 있었다. 교회가 분열이 생겨서 싸우는 가운데 사람들이 자신들의 독선적인 자세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하는 기도를 가지고 야고보 사도는 정욕적인 마귀적인 기도라고 말했다. 기도를 하면서 그 기도를 통해서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기도하지 않고 나의 고집스럽고 악한 마음을 합리화 시켜서 다른 사람을 쫓아내거나 꺽기위해서 분쟁가운데 기도하면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 가운데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을 정욕적인 기도라고 할 수 없다. 필요에 따라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을 어떻게 정욕적인 기도라 하겠는가. 사람들은 자기의 필요를 위해서 구하는데 하나님앞에서 내 필요에 따라 기도하면서 정욕적인 기도가 아닌것 처럼 하나님앞에 드리고 싶을때가 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앞에 기도하면서 "아들/딸이 좋은 대학 가게 해주세요" 라는 기도도 맞는 기도라 생각한다. 하지만 "좋은 대학을 가게 해주시면 아들/딸을 일년 단기선교 가게 하겠다"고 기도한다면 정욕적인 기도가 안되게 하려고 불필요한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사업을 번창하게 해주시면 건축헌금을 할것입니다, 축복해주시면 더 순종하겠습니다"라는 기도들을 통해 하나님 앞에 순종하겠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니 정욕적인 기도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라는 원함이 우리 마음속에 은연중에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야고보서 4장에 있는 정욕이라는 것이 분쟁의 상황에서 하고 있는 말씀이기에 일생생활에서 "하나님, 너무 사업이 안됩니다. 사업잘되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기도가 정욕적인 기도라 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기도가 응답이 안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우리가 기도할때 정욕으로 기도해서, 정성이 부족해서, 믿음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지 않았기에 등등의 이유들을 말하고 있다. 저는 생각하기에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든지 나에게 구하라는 주님의 말씀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돌을 달라고 기도해도 떡을 주시는 하나님

오히려 기도에 대한 오해때문에 많은 분들은 기도의 주권과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험하는 일이지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얻어내는 수단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비유를 한번 생각해보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태복음 7:9-11)"

주님이 하신 약속이다. 아무리 악한 아비라 할지라도 자식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줄 아버지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것까지 문제가 없다. 어떤 아버지도 안그럴것이다. 어린아이들이 보기에는 '떡'과 '돌'이 모습이 비슷하다. 분별을 못하는 어린아이가 만일 떡을 달라고 하면 아버지는 당연히 떡을 준다. 아이들은 분별이 안되어서 돌을 떡이라고 달라는 경우가 있을수 있다. 만약에 아이가 잘몰라서 돌을 달라고 하면 아버지는 무엇을 주겠는가. 좋은 아버지라면 아이가 돌을 달라고 해도 떡을 준다. 돌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는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가 아니다. 구하는 것을 다주는 나이스한 이미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버지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목회를 하면서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다. 아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상당히 컸다. 아이들이 어렸을때 같이 시간을 보낼때가 있으면 아들을 위해 모든것을 다해주고 싶었다. 샤핑을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하면 다 사주고 싶은 마음이다.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기에 내가 너희를 여전히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아들이 원하는 것은 다사주고 싶었다. 집에 돌아가면 아내가 야단을 친다. 아이가 사달라는대로 아이스크림을 다 사주면 되겠는가. 원하는대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아이는 어떻게 되겠는가. 아이들에게 나이스한 아버지이다. 나는 이미지가 중요했다. 하지만 만약 아이들을 생각했다면 아내처럼 막 사줄수 없었다.

하나님이 좋은 이미지를 생각하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더라도 달라는대로 다 주실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미지를 생각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들의 필요를 생각하시기에 그렇게 하실수 없다. 떡을 달라고 하시면 떡을 주실 것이고 돌을 달라고 해도 떡을 주신다. 그러면 구하지 않아도 주실것인가. 저는 주신다고 믿는다. 저는 배우자를 위해 한번도 기도를 안했다. 그럼에도 좋은 아내를 주셨다. 제가 누리고 있는 것 들이 다 기도응답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제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인데도 하나님은 나에게 필요한것을 다 주셨다. 돌아보면 제가 기도해서 받은 것들이 아니다. 기도를 안했어도 하나님이 저에게 필요한것을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을 저의 걸음을 인도하셨다.

기도에 대한 오해

여기까지 말하면 굉장히 혼란해진다. 기도할때 떡을 구하면 떡을 주시고, 돌을 구해도 떡을 주시고, 안구해도 떡을 주신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기도에 대한 오해가 있다고 본다. 주님이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하는가 하는 것이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종종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씨 좋은 아저씨 처럼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창고문을 열어 쏫아부어 주실까, 어떻게 하면 내가 그 아버지 마음에 꼭 들어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채워주실가 하는 것에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이 있음을 본다. 그래서 기도가 응답이 되는 비결, 기도가 응답이 안되는 이유, 기도를 어떻게 응답하게 하는가 하는 질문들이 나오게 된다.

신학교를 다닐때 교수님이 한번은 기도에 대해 말씀해주면서 이런 간증을 했다. 자신이 멕시코 선교사로 12년 있었는데 하루는 늦은 시간에 누가 문을 두들겨 나가보니 10살쯤 되는 불쌍하고 두려움에 찬 보이는 여자아이가 서있었다. 알고보니 엄마는 아이가 4살때 죽었고 알콜중독자인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샷건으로 자기를 죽이려해서 집을 나와 거지처럼 구걸하며 살다가 선교사의 집인줄을 알고 저녁을 얻어먹으려고 문을 두들긴 것이었다. 교수는 이미 딸이 4명이나 있었는데도 그 여자아이를 입양했다. 교수는 그 아이에게 "이제 너는 내 딸이다. 집에 있는 것은 원하는대로 사용하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여자아이는 학교에 돌아와도 부모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기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항상 눈치를 보았다. 두려움에 가득차고 불안한 눈으로 부모를 바라보았다. 한번도 필요한것을 사달라고 요청을 안했다. 그 아이의 심정을 이해할수 있겠는가. 평생 사랑을 받아본적이 없는 아이이다. 그리고 처음 사랑을 받으면서 그 사랑을 잃어버릴까 두려운 마음으로 있었다. 부모와 자녀간 관계는 무엇이든지 요청할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한번도 구하지 않았다.

나는 그 여자아이의 심정을 이해할수 있다. 우리집에는 아이가 3명이 있다. 막내아들이 지금 13살인데 한살때 한국에서 입양했다. 1살이 넘어서 왔는데 얼마나 순한지 안울고 말썽도 안부렸다. 너무 조용하고 얌전했다. 속으로 좋은 아이를 보내주셨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한살 갓 넘은 아이인데도 눈치를 볼수있음을 알았다. 우리집에 오기전에 보모를 3번 바꾸었는데 어쩌면 본능적으로 아이는 자기는 울면 안된다는 것을 느꼈는지 모른다. 울지도 않고 얼마나 순한지. 3살쯤되어서 순한것이 아니라 눈치를 보고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표현도 안하고 내성적이어서 자폐검사를 받기도 했다. 일반가정에서는 형이 동생의 장난감을 뺏어가면 동생이 울면서 부모에게 이른다. 하지만 5살 많은 형이 막내아들을 괴롭혀도 그냥 쳐다보고 자기방에 들어가 혼자 운다. 한번도 나를 찾아와서 어떻게 해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4년쯤 한국에 가면서 막내아들에게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해도 필요한것이 없다고 했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당시 유행이었던 아이팝을 사다주라고 했다. 여행에서 돌아오며 아이팝을 사다주니 막내가 좀 이상했다. 막내는 너무 좋아서 아이팝을 품고 잤다. 그리고 손에서 아이팝을 놓지 않는다. 좋아서 어쩔줄 몰라하는 막내아들을 보면서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좋으면 사달라고 하지 말을 안하고 참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괜찮다고 말하는 아이의 심정을 이해할수 있는가.

한번은 교수가 서재에 있었는데 입양한 여자아이가 들어와 서있었다. 무엇이 필요한가를 물어 보았다. 아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운동화 끈이 하나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날 입양한 딸이 처음으로 필요한것을 사달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동스러워했다고 한다. 그 교수님이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기도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우리의 삶을 지키시고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것,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을 알게되고, 그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지키시고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심을 이제는 믿을수가 있어서 너무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순간에서도 하나님앞에 찾아가서 아버지라고 부를수 있는 것이 기도이다.

기도를 해서 무엇을 얻느냐 받아내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무엇을 받아낼수 있을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내 삶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믿고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걸음을 지키시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기필코 선한일을 이루실것이라는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선함의 증거는 더 이상 재물도 아니고 더 이상 건강도 아니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무엇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알겠는가. 재물이 많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인가. 건강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 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과 화목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시고 그 하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고 내가 너의 좋은 아버지이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안되는 것 같아도 우리는 바로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는 아버지이심을 경험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무엇을 받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 보다 더 확실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큰아들이 어릴때 토이저러스에 같이 갔다. 뭐든지 사준다고 하니 아들이 좋아했다. 신나서 장남감을 가져왔는데 비싼 것으로 가져왔다. 다른것을 찾아보라고 하자 이번에는 지나치게 큰 것을 가져왔다. 다음에는 너무 위험한 것을 가져와 다른것을 고르게 했다. 마침내 적당해 보이는 것을 골라 사주었다. 아들은 고마워 했다. 만일 어떤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제 아들에게 뭐든지 사줄테니 고르라고 이야기를 했다면 어린 아들은 머리속에 계산할 것이다. 무엇을 어느 정도를 가져오면 아저씨가 사줄것인가를 고민할것이다. 그때 아저씨가 비싸다고 말하면 아버지가 아니기에 아이는 상처를 받는다.

고난과 환란가운데 하나님앞에 기도하면서 구할것은, 내머리로는 하나님이 그 문제만 풀어주시면 그 돈만 해결해주시면 될 것 같아서 간절하게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구해야 하는 것은 바로 내 삶을 지키고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을 구한다면 우리가 원하는대로 안되고 힘들더라도 낙심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을 마음씨 좋은 아저씨 정도로 생각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기도 끝에 실망하고 기도에 대한 기대감이 없다. 그래서 기도를 잘하지 않는다.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두려움으로 부터 시작된 기도이다. 우리는 결국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 되어서 내 걸음을 인도하시고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이 땅에 살아가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때문에 나에게 있는 소망은 영원한 하늘나라이고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이라는 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보면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내가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받아냄으로 내 삶을 내가 주관하려고 하는 수단이 기도가 된 것 같다.

그래서 기도응답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이, 어떻게 기도가 응답할수 있을까 하는 것과 모든 답들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기도는 그런것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험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이미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심을 고백한바 그 주님을 우리의 삶속에서 경험하는 것이 바로 기도이다. 그러면 이 기도는 특권이다. 우리는 정말 무엇이든지 구할수 있어야 한다. 미리 계산할 필요가 없다. 이 정도면 들어주시겠지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필요와 모든 연약을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고 구할때 기도를 듣고 계신분은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여러분들을 위해 영원한 생명을 주신 아버지임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그 기도가 살아있는 기도이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있는 기도가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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