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모 목사, 지난 45년간의 목회를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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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05-07-03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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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넷은 2005년 7월 10일(주일) 오후 5시에 은퇴 및 원로목사 추대예배를 가지는 뉴욕한국인 그레잇넷교회 박성모 목사를 인터뷰하고 민주화 투쟁, 목회철학, 은퇴 후의 계획, 교회통합 등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1시간으로 예정된 인터뷰는 4시간동안 진행됐다. 인터뷰한 내용이 많아 은퇴회고, 이민교회에 충언, 통합이야기 등 3개 부분으로 기사를 나누었다. (교회: 715 Northern Blvd, Great neck, NY 11021 / 516-466-8063)
1968년 유학을 와서 1970년 뉴저지에서 뉴저지 최초의 한인감리교회인 유니온교회를 개척했다. 유신헌법이 제정되고 장준하씨 의문사 이후 독재반대 운동을 펼쳤다. 한국정보부가 교회의 분열을 획책했고 1976년 목회에 전념할 젊은 목사에게 담임을 물려주고 뉴욕으로 왔다. 뉴욕에서 새로운 교회를 찾다가 비어있는 교회를 발견했다.
1977년 당시 한국인교회 구입은 교계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세금도 없이 단돈 1불에 교회를 구입했다. 지금 이 교회부지는 2에이커 정도 되며 시가는 천만불 이상 된다. 교회가 노던 블러바드에 위치해 부동산업자로 부터 유혹을 많이 받았다. 자리를 내어주면 현대과학을 이용하여 교회를 그대로 다른 곳으로 옮겨준다고 했다.
우리가 교회를 구입할 당시에는 지역에 유태인이 늘어나서 개신교가 힘든 시기였다. 처음 UMC 교단에서 교회를 주기로 했지만 나중에 교단이 펜션을 사기 당해 재원이 필요하여 약속을 취소하려 했다. 하지만 끝가지 주장했다. 채근담을 읽으며 마음에 새겼다. "하나님의 뜻인가"하는 기도를 했다. 하지만 마이니리티가 사용하면 좋은 일이라고 교단과 6개월을 맞서 이겼다. 개인일이라면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의 후편에 커뮤니티를 위한 공원이 있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키를 주지 않았다. 어렵게 7년만에 키를 넘겨받았다. 현재는 다른 땅까지 합하여 크게 공원지역이 늘어났다. 공원에는 농구장까지 있다. 예배가 끝난 후 그곳을 이용한다.
이 지역은 당시에는 제일 동쪽에 위치한 교회였다. 어중중한 위치였지만 멀지 않아 중심이 되는 위치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개척후 6개월이 지나자 교인들이 늘어났다. 교회 사택에는 함석헌, 이문영, 김재준, 송건우, 김창국, 한완상에서 피코 노동자까지 많은 사람들이 머무른 역사의 현장이다.
이번 열리는 은퇴예배에서는 30여 년 동안 나와 사역을 해온 사람들이 순서를 많이 맡았다. 아내는 정신과 의사이다. 생활은 아내가 하고 나는 목회에만 전념했다. 10의 9조를 하며 교회에 헌신했다. 이제와 보니 나는 실패자 같다. 목회, 동포사회, 사회운동, 한민중, 사회신학 모든 것에 실패한 것 같다. 모든 것이 아쉽고 만족할 것이 없다.
은퇴후에는 이때까지 생각하여 중요하다는 일을 하고 싶다. 코리안 커뮤니티 카운실(Korea Community Council in America)등 그동안 해온 일들을 할 것이다. 이곳에 돈 번 사람들이 자금을 지원하고 우리는 조직화해서 후배를 위해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해야 한다. 2세들이 웰빙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이끌어 주고 싶다. 한국과 협조하여 인터넷 매거진을 통하여 정보를 나누고 교회갱신운동을 일으키겠다.
ⓒ 2005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1968년 유학을 와서 1970년 뉴저지에서 뉴저지 최초의 한인감리교회인 유니온교회를 개척했다. 유신헌법이 제정되고 장준하씨 의문사 이후 독재반대 운동을 펼쳤다. 한국정보부가 교회의 분열을 획책했고 1976년 목회에 전념할 젊은 목사에게 담임을 물려주고 뉴욕으로 왔다. 뉴욕에서 새로운 교회를 찾다가 비어있는 교회를 발견했다.
1977년 당시 한국인교회 구입은 교계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세금도 없이 단돈 1불에 교회를 구입했다. 지금 이 교회부지는 2에이커 정도 되며 시가는 천만불 이상 된다. 교회가 노던 블러바드에 위치해 부동산업자로 부터 유혹을 많이 받았다. 자리를 내어주면 현대과학을 이용하여 교회를 그대로 다른 곳으로 옮겨준다고 했다.
우리가 교회를 구입할 당시에는 지역에 유태인이 늘어나서 개신교가 힘든 시기였다. 처음 UMC 교단에서 교회를 주기로 했지만 나중에 교단이 펜션을 사기 당해 재원이 필요하여 약속을 취소하려 했다. 하지만 끝가지 주장했다. 채근담을 읽으며 마음에 새겼다. "하나님의 뜻인가"하는 기도를 했다. 하지만 마이니리티가 사용하면 좋은 일이라고 교단과 6개월을 맞서 이겼다. 개인일이라면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의 후편에 커뮤니티를 위한 공원이 있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키를 주지 않았다. 어렵게 7년만에 키를 넘겨받았다. 현재는 다른 땅까지 합하여 크게 공원지역이 늘어났다. 공원에는 농구장까지 있다. 예배가 끝난 후 그곳을 이용한다.
이 지역은 당시에는 제일 동쪽에 위치한 교회였다. 어중중한 위치였지만 멀지 않아 중심이 되는 위치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개척후 6개월이 지나자 교인들이 늘어났다. 교회 사택에는 함석헌, 이문영, 김재준, 송건우, 김창국, 한완상에서 피코 노동자까지 많은 사람들이 머무른 역사의 현장이다.
이번 열리는 은퇴예배에서는 30여 년 동안 나와 사역을 해온 사람들이 순서를 많이 맡았다. 아내는 정신과 의사이다. 생활은 아내가 하고 나는 목회에만 전념했다. 10의 9조를 하며 교회에 헌신했다. 이제와 보니 나는 실패자 같다. 목회, 동포사회, 사회운동, 한민중, 사회신학 모든 것에 실패한 것 같다. 모든 것이 아쉽고 만족할 것이 없다.
은퇴후에는 이때까지 생각하여 중요하다는 일을 하고 싶다. 코리안 커뮤니티 카운실(Korea Community Council in America)등 그동안 해온 일들을 할 것이다. 이곳에 돈 번 사람들이 자금을 지원하고 우리는 조직화해서 후배를 위해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해야 한다. 2세들이 웰빙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이끌어 주고 싶다. 한국과 협조하여 인터넷 매거진을 통하여 정보를 나누고 교회갱신운동을 일으키겠다.
ⓒ 2005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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