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빛교회 안태호 목사 “나는 기적의 통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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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05-07-20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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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즈한인교회(고성삼 목사)가 여름을 맞이하여 2005년 7월 20일부터 8월 10일까지 매주 수요일마다 성령축제를 연다. 20일(수) 성령축제 첫날, 뉴저지 참빛교회 담임인 안태호 목사는 "기적의 통로가 되어라(마태복음 14장 13-21절)"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간증하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적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래는 간증내용이다.
나는 육이오 직전에 태어났다. 어린나이에 아파서 숨을 제대로 못 쉬었다. 아버지가 3대독자인 귀한 손이었다. 숨을 제대로 못 쉬고 넘어졌지만 의사가 다 피난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마침 아버지 친구인 의사가 치료를 하게 되었다. 방법을 찾지 못하고 목에 구멍을 내어 숨을 쉬게 했다. 아직도 목에는 그 상처가 있다. 다른 방식을 시도하려고 호스를 빼면 숨을 쉬지 못하고 힘들어 해 호스를 달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성대 아래에 구멍을 뚫어 숨을 쉬었기 때문에 말을 한마디도 못했다.
장장 8년을 그렇게 살았다. 초등학교도 가지 못하고 집에 있었다. 부모님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셨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담당 이비인후과 의사선생님은 “이렇게 목에 호스를 박고 평생 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당시 어머니의 소원은 초등학교라도 다니다가 졸업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매일 저녁 식사후 나를 데리고 교회에 가, 기도를 드렸다. 그러던 중 점점 입과 코로 숨을 쉬게 되는 기적이 일어나 병이 나았다.
뒤늦게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중고등학교를 잘 다녔다. 공부도 열심히 해서 고등학교 2학년에는 반장이 되었다. 당시 반 대항 농구대회가 있었는데 반장이니 더 열심히 늦게 까지 연습했다. 그러다 어느 날 다리에 쥐가 나고 아프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고통이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고통이 지속됐다. 다리가 붓고 쥐가 나면 각기병인데 그 병도 아니었다. 점점 아파서 걸을 수도 없었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대학 들어 갈 때부터 미국 올 때 까지 나를 돌보아 주신 한문식 교수는 더 이상 손쓸게 없으니 집에 돌아가서 맛있는 것 먹고 쉬라고 했다.
마디마디 관절이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는 데도 누워서 움직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입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파 몸무게가 29 킬로그램까지 내려갔다. 몸의 모든 관절에 염증이 있어 고통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이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어머니가 내 고통을 덜려고 별 방법을 다 동원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죽어가는구나 생각했다. 오랜 투병생활 끝에 대학교, 고등학교 친구들도 끓겼다. 어느 날 온가족이 다 모여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3번이나 임종의 위기를 넘긴 것이다. 집에서는 수의까지 준비해 놓은 상황이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물만 겨우 먹는 상황이 계속됐다.
어머님께서는 숨을 쉬지 못하고 죽어가던 애기 때 "우리 아들을 낮게 해주면 주의 종으로 바치겠다"는 서원기도를 드린 것이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과 협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넌지시 "넌 앞으로 교회의 성직자나 목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니?"하는 정도였다. 대학에 갈 때 어머니께서는 신학교가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강하게 반발했다. 나에게 목사라는 이미지가 너무 힘들고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사보다 더 쓰임 받는 교수가 되어 똑똑한 학생들을 크리스천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나는 교수의 꿈이 있었다. 교수도 구두로 약속했다. 아파서 누워있는데 다른 친구들은 교수가 되었다는 소식이 계속 들렸다. 나는 그렇게 7년을 병으로 보냈다.
결국 하나님은 내가 교수되려는 길을 막으시기 위해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나를 보고 답답해 하셨을 것이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 전화를 달라고 해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아버지 제가 병 나으면 신학교 갑니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도 아들을 살리는 마음에 "나으면 가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러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하루에 3~4번씩 오한이 오는데 한번으로 줄어들고 결국 오한이 멈추었다. 과학적이고 냉정하던 내 생각이 다 깨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았다. 열이 없어지고 고통이 많이 사라졌다.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대단했다. 그 주간에는 부축을 받고 처음으로 잔디밭에 나와 하늘을 보았다. 그렇게 눈이 부실수가 없었다. 몸이 고쳐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뼈들은 오랜 투병으로 굳어져 있었다. 손이 휘어지고 팔을 못 피게 되었다. 다 나아서 목사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몸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 병은 가장 자살할 확률이 높은 병이었다. 하나님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나를 인도하셨다. 그것이 축복이다. 결국 나를 포기하게 되고 주님을 향하게 되었다.
이런 시련없이 목사가 되었으면 틀림없이 기고만장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겸손하게 만드셨다. 그렇게 빠르게 달리던 내가 이제 아이들과 달리기해도 진다. 고난은 선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주님! 나를 사용하십시오"라는 말이 나왔다.
나는 두발로 서는 것을 감사한다. 음식을 씹을 수 있는 것을 감사한다. 숨 쉬는 것을 감사한다.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을 감사한다. 부족한데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니 감사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니 감사한다. 여러분과 가정도 이런 "기적의 통로"가 되기를 축원한다. 한인이민교회에 목회자를 존경하고 이상적인 교회의 상이 사라졌다. 여러분을 통해 교회의 모습이 회복되는 "기적의 통로"가 되기를 기원한다.
ⓒ 2005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나는 육이오 직전에 태어났다. 어린나이에 아파서 숨을 제대로 못 쉬었다. 아버지가 3대독자인 귀한 손이었다. 숨을 제대로 못 쉬고 넘어졌지만 의사가 다 피난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마침 아버지 친구인 의사가 치료를 하게 되었다. 방법을 찾지 못하고 목에 구멍을 내어 숨을 쉬게 했다. 아직도 목에는 그 상처가 있다. 다른 방식을 시도하려고 호스를 빼면 숨을 쉬지 못하고 힘들어 해 호스를 달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성대 아래에 구멍을 뚫어 숨을 쉬었기 때문에 말을 한마디도 못했다.
장장 8년을 그렇게 살았다. 초등학교도 가지 못하고 집에 있었다. 부모님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셨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담당 이비인후과 의사선생님은 “이렇게 목에 호스를 박고 평생 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당시 어머니의 소원은 초등학교라도 다니다가 졸업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매일 저녁 식사후 나를 데리고 교회에 가, 기도를 드렸다. 그러던 중 점점 입과 코로 숨을 쉬게 되는 기적이 일어나 병이 나았다.
뒤늦게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중고등학교를 잘 다녔다. 공부도 열심히 해서 고등학교 2학년에는 반장이 되었다. 당시 반 대항 농구대회가 있었는데 반장이니 더 열심히 늦게 까지 연습했다. 그러다 어느 날 다리에 쥐가 나고 아프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고통이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고통이 지속됐다. 다리가 붓고 쥐가 나면 각기병인데 그 병도 아니었다. 점점 아파서 걸을 수도 없었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대학 들어 갈 때부터 미국 올 때 까지 나를 돌보아 주신 한문식 교수는 더 이상 손쓸게 없으니 집에 돌아가서 맛있는 것 먹고 쉬라고 했다.
마디마디 관절이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는 데도 누워서 움직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입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파 몸무게가 29 킬로그램까지 내려갔다. 몸의 모든 관절에 염증이 있어 고통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이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어머니가 내 고통을 덜려고 별 방법을 다 동원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죽어가는구나 생각했다. 오랜 투병생활 끝에 대학교, 고등학교 친구들도 끓겼다. 어느 날 온가족이 다 모여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3번이나 임종의 위기를 넘긴 것이다. 집에서는 수의까지 준비해 놓은 상황이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물만 겨우 먹는 상황이 계속됐다.
어머님께서는 숨을 쉬지 못하고 죽어가던 애기 때 "우리 아들을 낮게 해주면 주의 종으로 바치겠다"는 서원기도를 드린 것이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과 협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넌지시 "넌 앞으로 교회의 성직자나 목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니?"하는 정도였다. 대학에 갈 때 어머니께서는 신학교가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강하게 반발했다. 나에게 목사라는 이미지가 너무 힘들고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사보다 더 쓰임 받는 교수가 되어 똑똑한 학생들을 크리스천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나는 교수의 꿈이 있었다. 교수도 구두로 약속했다. 아파서 누워있는데 다른 친구들은 교수가 되었다는 소식이 계속 들렸다. 나는 그렇게 7년을 병으로 보냈다.
결국 하나님은 내가 교수되려는 길을 막으시기 위해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나를 보고 답답해 하셨을 것이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 전화를 달라고 해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아버지 제가 병 나으면 신학교 갑니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도 아들을 살리는 마음에 "나으면 가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러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하루에 3~4번씩 오한이 오는데 한번으로 줄어들고 결국 오한이 멈추었다. 과학적이고 냉정하던 내 생각이 다 깨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았다. 열이 없어지고 고통이 많이 사라졌다.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대단했다. 그 주간에는 부축을 받고 처음으로 잔디밭에 나와 하늘을 보았다. 그렇게 눈이 부실수가 없었다. 몸이 고쳐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뼈들은 오랜 투병으로 굳어져 있었다. 손이 휘어지고 팔을 못 피게 되었다. 다 나아서 목사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몸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 병은 가장 자살할 확률이 높은 병이었다. 하나님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나를 인도하셨다. 그것이 축복이다. 결국 나를 포기하게 되고 주님을 향하게 되었다.
이런 시련없이 목사가 되었으면 틀림없이 기고만장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겸손하게 만드셨다. 그렇게 빠르게 달리던 내가 이제 아이들과 달리기해도 진다. 고난은 선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주님! 나를 사용하십시오"라는 말이 나왔다.
나는 두발로 서는 것을 감사한다. 음식을 씹을 수 있는 것을 감사한다. 숨 쉬는 것을 감사한다.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을 감사한다. 부족한데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니 감사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니 감사한다. 여러분과 가정도 이런 "기적의 통로"가 되기를 축원한다. 한인이민교회에 목회자를 존경하고 이상적인 교회의 상이 사라졌다. 여러분을 통해 교회의 모습이 회복되는 "기적의 통로"가 되기를 기원한다.
ⓒ 2005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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