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석호 목사 "기독교가 경계해야 할 3가지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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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3-12-13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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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원로성직자회 12월 예배 및 세미나가 12월 10일(화) 오전 뉴욕대한교회에서 열렸다. 강사로 문석호 목사(뉴욕효신장로교회)가 초대됐다. 문 목사는 설교에 이어 '목회와 영성'이라는 제목의 세미나가 따로 준비됐지만, 설교로 두 순서를 대신했다. 문 목사는 마가복음 5:1-20을 본문으로 "절망의 무덤에서 행복한 집으로"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귀신이 들린 청년, 군대라는 이름을 가진 귀신, 2천마리 돼지떼의 죽음, 청년의 치유, 예수님이 떠나시기를 간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긴 본문을 통해 문석호 목사는 이는 당시의 이야기만 아니라 오늘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면서 교훈적인 세미나를 인도했다. 특히 기독교가 경계해야 할 3가지 대상을 전했다. 그것은 사회의 세속성, 인간의 이기심, 사이비 신앙이다. 다음은 세미나 내용이다.
본문 내용은 점점 어두워져가는 오늘날의 영성의 현실, 어두운 사회, 사납게 되어가는 인간성의 상실을 말해준다. 서로 위로하고 도우며 하나님 곁으로 가야 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고, 사람과 사람사이를 갈라놓고, 인간의 심성을 찢어버린다. 예수님께 치유를 받고 한 영혼이 하나님앞에 돌아오는 것을 보고 너무 기쁘고 감사해도 모자랄 판국에 예수님께 어서 떠나라고 말하고 있다. 한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에 대한 고마움 보다는 2천마리나 되는 돼지떼가 몰살 당했으니 예수님 때문에 물질적 경제적인 손해를 보았다고 하는 이 시대의 물질주의의 극치를 보는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신나간 한 청년이 하나님앞에 돌아온 것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오늘 이 시대에 교회가 목회자가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돌아았을때 고마워하고 감사하기는 거녕 내쫓는 모습속에서, 하나님의 영성의 핵심이 무시되는 이러한 모습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목회를 해야 하는가. 또 인간성 상실과 영성이 무너지는 것을 어떻게 회복되어야 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나누겠다.
설교 제목은 "절망의 무덤에서 행복한 집으로"이다. 이렇게 제목을 정한 이유는 오늘 이 시대가 절망하는 무덤을 향하여 가고 있다. '절망의 무덤'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행복한 집'이란 무엇일까. 이것을 목회자의 막중한 사명과 함께 생각을 해보려고 한다.
기독교가 경계해야 할 대상 3가지
오늘날 기독교가 경계해야 할 대상은 무엇인가. 먼저 하나님을 떠난 사회의 세속성이다. 세속성이란 이 세계가 하나님의 만든 세계임을 부정한다. 인생의 근본성이 있어야 할 하나님이라는 근본의 자리를 뛰쳐 나간 모습을 우리는 세속성의 기초로 본다. 경제 세계 정치 사회의 현실속에 모든 가치관이 뒤바뀌는 것이다. 자식때문에 이민왔는다는 1세대는 돈을 벌게되면 분주해 지면서 자식과의 거리를 멀어지고 아예의 삶의 방향이 전혀 다른데로 가는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가치관의 전도이다. 둘째는 인간의 이기심의 극대화이다. 개인이든 단체이든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오는 이기심때문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아름다운 형상을 다 파괴한다.
다른 한가지는 진리를 행해야 할 교회와 신학교가 사이비 신앙으로 물든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최대의 적인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는 거짓 기독교요,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하버드에서 신학공부를 한 학생이 기독교를 포기하고 한국에 들어와서 불교의 중이 되어 버린 유명한 사람이 있다. 강의를 많이 다니면서 기독교를 아니 자기 자신이 이해하는 기독교로 폄하하는 모습을 보았다.
학교에서 그가 공부한 기독교는 사이비 기독교였다. 거짓 기독교였다. 개구리를 이해하기 위해 개구리를 해부하고 분석하여 이것이 개구리라고 하는 것은 개구리를 통채로 오해하는 것이다. 먹이감 앞에서 혀를 내미는 개구리의 모습, 알이 올챙이가 되고 개구리가 되는 자연순환속에서의 개구리의 모습등 자연현상의 전체를 볼때 개구리를 바로 이해할수 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예수가 누군가 할때 예수속에 들어있는 인간적인 모든 것을 분석하고 예수가 몇년을 살았고 무슨 말을 했고 아무리 연구해도 예수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잃어버리고, 인생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의 예수를 이해하지 못한채 예수의 인간성을 백번 천번 분석해도 바른 예수가 아니다. 자유신학을 가진 학교에서 아무리 많은 성경원어를 공부하고 문화를 다 연구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상실하면 성경을 이해하는 것도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도 예수를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자유신학의 극치는 이런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바른 모습을 위해서 예수에 대한 바른 이해,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 이 세계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해야만 한다. 바로 이런것들이 오늘날 교회를 위협하는 요소이다.
흔들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
그러므로 상실한 세상속에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 교리의 순수성을 그대로 지녀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와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해가고 있다다. 기독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못할때 교회의 사명은 사라진다. 정체성을 상실한 사회의 모습을 보자.
크리스마스(Christmas)라는 개념을 우리가 잘알듯이 Christ+mas 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크리스마스이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습이 거의 다 사라졌다. 16세기 청교도들은 아예 교회가 크리스마스를 절대로 지키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린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없는, 구원이 없는, 구세주가 없는 크리스마스는 차리라 없는 것이 낫다는 교회의 결정을 통해 청교도들은 크리스마스에 어떤 행사를 하지 못하도록 명을 받았다.
오늘날 기독교 정체성의 상실시대에 사는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이 사회를 어떻게 진단해야 할 것인가. 절망의 무덤에서 행복한 집으로, 마치 절망의 무덤을 향하여 달려나가는 듯한 오늘의 시대상황속에서 하나님이 행복한 구원의 집을 향해 사람들을 인도해야 하는데, 절망의 늪을 극대화하던가 인간이 가야할 행복하고 따스한 집이 없는 듯한 착각을 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잘못된 공동체속의 모습
본문에 나오는 청년은 지금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무덤사이에 있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가족이 있는 곳이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자리매김을 잘못하고 있다. 청년의 이름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있는데 '군대'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영성을 상실하는 오늘날 시대에 흐름과 같다. 한 젊은이의 위기이지만 그뿐만 아니라 오늘 이 시대의 교회의 위기라고 볼 수 있다. 계시된 성경의 가르침을 쫓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야 할 젊은이가 자신의 자리를 잘못잡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자리를 마땅히 차지해야 할 자리인 것으로 알고 있는 그와, 그 사람을 부추기는 주변의 모습이다.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한다. 세상의 습관, 권력지향적, 명예중심적인 모습을 물리치면서 하늘나라에 가는 날까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 청년은 아름다운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뛰쳐나와 혼자 사탄의 앞잡이가 되어서 자신을 상실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 올바른 공동체성을 파괴하려는 집단적인 개인적인 이기주의 모습을 볼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공동체의 현실을 직시하고 아름다워야 할 공동체성을 파괴하는 빗나간 것에 대한 경고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한자는 가르칠 교(敎), 모일 회(會)이다. 무엇을 가르치는 것인가. 교리의 순수성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모임의 아름다운 모습을 가르친다. '커뮤니티'라는 단어는 함께 일치라는 뜻을 가진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일치를 이루어야 할 교회와 사회가 각 단의 집단적인 이기심의 발로로서 보수와 진보를 가른다. 말씀중심의 보수이냐, 정말 이 사회를 개혁해서 하나님앞에 드려야 할 그런 가치관을 위한 진보인가. 혹시 아름다운 공동체의 선과 공동의 가치관을 무시하는 보수가 아닌가. 진보로 가장해서 인간속에 들어있는 인간의 죄성, 그리고 있어야 할 하나님의 비밀을 강조하지 못하면 진보도 거짓이 될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보나 보수나 우리는 먼저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선과 공동의 가치관을 가지고 인간속의 죄성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은혜가 복음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청년안에 든 귀신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라고 말한다. 이 세상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교회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내가 복음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나님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며 독립적인 외침을 지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분명한 사명은 빗나간 청년을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게하는 것이다. 빗나간 인생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데려와 관계맺게 해야 한다.
교회와 사회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정치와 복음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 라고 세속 사회는 자꾸 이분법을 이야기 한다. 복음과 나는 관계없고, 하나님과 정치는 관계없고, 사회가 교회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고 말한다. 그러나 복음은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세계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에 속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와 관련짓는 일이 하는 것이 믿는 자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
예수님이 청년에게 이름을 물으니 정신나간 이 청년은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고 말한다. 집단의 힘은 무섭다. 혼자는 다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것 같지만, 모이면 악한 일들을 벌인다.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라는 책이 있다. 도덕적인 인간이 모인 것이 사회인데 왜 사회는 비도덕적인가. 하나님과의 실존적인 관계에서 혼자는 굉장히 희망적인데, 사람들이 모이면 못할일도 한다. 학생들을 개인적으로 상대하면 아주 착하다. 아주 훌륭한 목사가 될것이라는 기대가 있는데, 모이면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시고 데모도 한다.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이름이 무엇이라고 할때 이름에 대한 정체성을 잘 드러내야 한다. 청년의 이름은 군대가 아니라 원래 이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를 부추기는 집단적인 단체가 있다. 그 사람이 홀로 무덤사이에 있을때 아무도 도운 사람이 없다. 하지만 주님이 그를 치유하셨다. 그러면 사람들은 박수를 쳐야 한다. 한 영혼이 따스한 가정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볼때 사회는 놀라운 주님을 찬송해야 할텐데 그것이 아니다.
스데반이 극심한 박해때문에 순교를 했다. 그러면 스데반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사도행전을 보면 스데반은 선한 일과 설교를 한다. 그 설교에 잘못된 내용이 없었다. 잘못된 것이 없는 이야기가 유대인에게는 돌을 맞는 일로 변했다. 한 청년이 주님에게 돌아왔다면 동네사람들은 박수치고 환영해야 하는데 예수님을 내쫓으려고 했다. 예수님을 내쫓고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청년이 무덤속에 있든지 없든지 상관을 안했다.
집단적인 이기심으로 한 영혼의 가치를 내몰라하는 사회에서 주님은 청년의 영혼의 가치를 회복시키셨고, 그 영혼의 회복이 2천마리의 돼지를 희생하게 했다. 사람들이 보는 가치는 영혼의 가치보다는 물질의 가치를 더 중요시한다. 이로한 물질적인 가치관때문에 오늘날 사회에서 비난을 받고 전도하는데 방해를 받는다.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고치시는 주님, 어떤것에도 관심을 두시고 관여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교회는 복음이다. 모든 믿음의 사업을 이러한 모습의 복음을 들고 가야 한다. 복음서의 내용을 볼때 무관심한 사회에 예수님 오셔서 말씀하시고 회복하셨다. 그런데 영혼회복의 가치관보다는 물질의 손해때문에 예수님을 또 다시 배척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예수님 당시만이 아니라 어두워져 가는 오늘날의 시대의 모습과 같다고 생각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당부하신 말씀의 교훈을 따라야 한다. 크리스찬은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이 청년은 이름을 회복하게 하셨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에 속한 교회의 성도들의 집단이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분명한 사명을 가지고 일을 끓임없이 지속해야 한다. 인정하든 안하든, 왜곡과 비난을 받더라도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귀신이 들린 청년, 군대라는 이름을 가진 귀신, 2천마리 돼지떼의 죽음, 청년의 치유, 예수님이 떠나시기를 간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긴 본문을 통해 문석호 목사는 이는 당시의 이야기만 아니라 오늘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면서 교훈적인 세미나를 인도했다. 특히 기독교가 경계해야 할 3가지 대상을 전했다. 그것은 사회의 세속성, 인간의 이기심, 사이비 신앙이다. 다음은 세미나 내용이다.
본문 내용은 점점 어두워져가는 오늘날의 영성의 현실, 어두운 사회, 사납게 되어가는 인간성의 상실을 말해준다. 서로 위로하고 도우며 하나님 곁으로 가야 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고, 사람과 사람사이를 갈라놓고, 인간의 심성을 찢어버린다. 예수님께 치유를 받고 한 영혼이 하나님앞에 돌아오는 것을 보고 너무 기쁘고 감사해도 모자랄 판국에 예수님께 어서 떠나라고 말하고 있다. 한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에 대한 고마움 보다는 2천마리나 되는 돼지떼가 몰살 당했으니 예수님 때문에 물질적 경제적인 손해를 보았다고 하는 이 시대의 물질주의의 극치를 보는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신나간 한 청년이 하나님앞에 돌아온 것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오늘 이 시대에 교회가 목회자가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돌아았을때 고마워하고 감사하기는 거녕 내쫓는 모습속에서, 하나님의 영성의 핵심이 무시되는 이러한 모습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목회를 해야 하는가. 또 인간성 상실과 영성이 무너지는 것을 어떻게 회복되어야 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나누겠다.
설교 제목은 "절망의 무덤에서 행복한 집으로"이다. 이렇게 제목을 정한 이유는 오늘 이 시대가 절망하는 무덤을 향하여 가고 있다. '절망의 무덤'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행복한 집'이란 무엇일까. 이것을 목회자의 막중한 사명과 함께 생각을 해보려고 한다.
기독교가 경계해야 할 대상 3가지
오늘날 기독교가 경계해야 할 대상은 무엇인가. 먼저 하나님을 떠난 사회의 세속성이다. 세속성이란 이 세계가 하나님의 만든 세계임을 부정한다. 인생의 근본성이 있어야 할 하나님이라는 근본의 자리를 뛰쳐 나간 모습을 우리는 세속성의 기초로 본다. 경제 세계 정치 사회의 현실속에 모든 가치관이 뒤바뀌는 것이다. 자식때문에 이민왔는다는 1세대는 돈을 벌게되면 분주해 지면서 자식과의 거리를 멀어지고 아예의 삶의 방향이 전혀 다른데로 가는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가치관의 전도이다. 둘째는 인간의 이기심의 극대화이다. 개인이든 단체이든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오는 이기심때문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아름다운 형상을 다 파괴한다.
다른 한가지는 진리를 행해야 할 교회와 신학교가 사이비 신앙으로 물든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최대의 적인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는 거짓 기독교요,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하버드에서 신학공부를 한 학생이 기독교를 포기하고 한국에 들어와서 불교의 중이 되어 버린 유명한 사람이 있다. 강의를 많이 다니면서 기독교를 아니 자기 자신이 이해하는 기독교로 폄하하는 모습을 보았다.
학교에서 그가 공부한 기독교는 사이비 기독교였다. 거짓 기독교였다. 개구리를 이해하기 위해 개구리를 해부하고 분석하여 이것이 개구리라고 하는 것은 개구리를 통채로 오해하는 것이다. 먹이감 앞에서 혀를 내미는 개구리의 모습, 알이 올챙이가 되고 개구리가 되는 자연순환속에서의 개구리의 모습등 자연현상의 전체를 볼때 개구리를 바로 이해할수 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예수가 누군가 할때 예수속에 들어있는 인간적인 모든 것을 분석하고 예수가 몇년을 살았고 무슨 말을 했고 아무리 연구해도 예수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잃어버리고, 인생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의 예수를 이해하지 못한채 예수의 인간성을 백번 천번 분석해도 바른 예수가 아니다. 자유신학을 가진 학교에서 아무리 많은 성경원어를 공부하고 문화를 다 연구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상실하면 성경을 이해하는 것도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도 예수를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자유신학의 극치는 이런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바른 모습을 위해서 예수에 대한 바른 이해,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 이 세계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해야만 한다. 바로 이런것들이 오늘날 교회를 위협하는 요소이다.
흔들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
그러므로 상실한 세상속에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 교리의 순수성을 그대로 지녀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와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해가고 있다다. 기독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못할때 교회의 사명은 사라진다. 정체성을 상실한 사회의 모습을 보자.
크리스마스(Christmas)라는 개념을 우리가 잘알듯이 Christ+mas 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크리스마스이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습이 거의 다 사라졌다. 16세기 청교도들은 아예 교회가 크리스마스를 절대로 지키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린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없는, 구원이 없는, 구세주가 없는 크리스마스는 차리라 없는 것이 낫다는 교회의 결정을 통해 청교도들은 크리스마스에 어떤 행사를 하지 못하도록 명을 받았다.
오늘날 기독교 정체성의 상실시대에 사는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이 사회를 어떻게 진단해야 할 것인가. 절망의 무덤에서 행복한 집으로, 마치 절망의 무덤을 향하여 달려나가는 듯한 오늘의 시대상황속에서 하나님이 행복한 구원의 집을 향해 사람들을 인도해야 하는데, 절망의 늪을 극대화하던가 인간이 가야할 행복하고 따스한 집이 없는 듯한 착각을 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잘못된 공동체속의 모습
본문에 나오는 청년은 지금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무덤사이에 있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가족이 있는 곳이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자리매김을 잘못하고 있다. 청년의 이름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있는데 '군대'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영성을 상실하는 오늘날 시대에 흐름과 같다. 한 젊은이의 위기이지만 그뿐만 아니라 오늘 이 시대의 교회의 위기라고 볼 수 있다. 계시된 성경의 가르침을 쫓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야 할 젊은이가 자신의 자리를 잘못잡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자리를 마땅히 차지해야 할 자리인 것으로 알고 있는 그와, 그 사람을 부추기는 주변의 모습이다.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한다. 세상의 습관, 권력지향적, 명예중심적인 모습을 물리치면서 하늘나라에 가는 날까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 청년은 아름다운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뛰쳐나와 혼자 사탄의 앞잡이가 되어서 자신을 상실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 올바른 공동체성을 파괴하려는 집단적인 개인적인 이기주의 모습을 볼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공동체의 현실을 직시하고 아름다워야 할 공동체성을 파괴하는 빗나간 것에 대한 경고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한자는 가르칠 교(敎), 모일 회(會)이다. 무엇을 가르치는 것인가. 교리의 순수성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모임의 아름다운 모습을 가르친다. '커뮤니티'라는 단어는 함께 일치라는 뜻을 가진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일치를 이루어야 할 교회와 사회가 각 단의 집단적인 이기심의 발로로서 보수와 진보를 가른다. 말씀중심의 보수이냐, 정말 이 사회를 개혁해서 하나님앞에 드려야 할 그런 가치관을 위한 진보인가. 혹시 아름다운 공동체의 선과 공동의 가치관을 무시하는 보수가 아닌가. 진보로 가장해서 인간속에 들어있는 인간의 죄성, 그리고 있어야 할 하나님의 비밀을 강조하지 못하면 진보도 거짓이 될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보나 보수나 우리는 먼저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선과 공동의 가치관을 가지고 인간속의 죄성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은혜가 복음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청년안에 든 귀신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라고 말한다. 이 세상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교회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내가 복음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나님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며 독립적인 외침을 지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분명한 사명은 빗나간 청년을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게하는 것이다. 빗나간 인생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데려와 관계맺게 해야 한다.
교회와 사회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정치와 복음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 라고 세속 사회는 자꾸 이분법을 이야기 한다. 복음과 나는 관계없고, 하나님과 정치는 관계없고, 사회가 교회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고 말한다. 그러나 복음은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세계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에 속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와 관련짓는 일이 하는 것이 믿는 자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
예수님이 청년에게 이름을 물으니 정신나간 이 청년은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고 말한다. 집단의 힘은 무섭다. 혼자는 다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것 같지만, 모이면 악한 일들을 벌인다.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라는 책이 있다. 도덕적인 인간이 모인 것이 사회인데 왜 사회는 비도덕적인가. 하나님과의 실존적인 관계에서 혼자는 굉장히 희망적인데, 사람들이 모이면 못할일도 한다. 학생들을 개인적으로 상대하면 아주 착하다. 아주 훌륭한 목사가 될것이라는 기대가 있는데, 모이면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시고 데모도 한다.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이름이 무엇이라고 할때 이름에 대한 정체성을 잘 드러내야 한다. 청년의 이름은 군대가 아니라 원래 이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를 부추기는 집단적인 단체가 있다. 그 사람이 홀로 무덤사이에 있을때 아무도 도운 사람이 없다. 하지만 주님이 그를 치유하셨다. 그러면 사람들은 박수를 쳐야 한다. 한 영혼이 따스한 가정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볼때 사회는 놀라운 주님을 찬송해야 할텐데 그것이 아니다.
스데반이 극심한 박해때문에 순교를 했다. 그러면 스데반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사도행전을 보면 스데반은 선한 일과 설교를 한다. 그 설교에 잘못된 내용이 없었다. 잘못된 것이 없는 이야기가 유대인에게는 돌을 맞는 일로 변했다. 한 청년이 주님에게 돌아왔다면 동네사람들은 박수치고 환영해야 하는데 예수님을 내쫓으려고 했다. 예수님을 내쫓고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청년이 무덤속에 있든지 없든지 상관을 안했다.
집단적인 이기심으로 한 영혼의 가치를 내몰라하는 사회에서 주님은 청년의 영혼의 가치를 회복시키셨고, 그 영혼의 회복이 2천마리의 돼지를 희생하게 했다. 사람들이 보는 가치는 영혼의 가치보다는 물질의 가치를 더 중요시한다. 이로한 물질적인 가치관때문에 오늘날 사회에서 비난을 받고 전도하는데 방해를 받는다.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고치시는 주님, 어떤것에도 관심을 두시고 관여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교회는 복음이다. 모든 믿음의 사업을 이러한 모습의 복음을 들고 가야 한다. 복음서의 내용을 볼때 무관심한 사회에 예수님 오셔서 말씀하시고 회복하셨다. 그런데 영혼회복의 가치관보다는 물질의 손해때문에 예수님을 또 다시 배척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예수님 당시만이 아니라 어두워져 가는 오늘날의 시대의 모습과 같다고 생각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당부하신 말씀의 교훈을 따라야 한다. 크리스찬은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이 청년은 이름을 회복하게 하셨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에 속한 교회의 성도들의 집단이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분명한 사명을 가지고 일을 끓임없이 지속해야 한다. 인정하든 안하든, 왜곡과 비난을 받더라도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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