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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환 목사 “설교에 관한 몇 가지 다이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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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06-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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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넷은 뉴욕새빛교회 신석환 목사에게 설교에 대한 인터뷰를 요청했다. 기자는 행사를 통해 신 목사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많았다. 좋은 영화처럼 강한 메세지 전달과 함께 내용이 오래 남았다. 기자외에도 동료 목회자들의 평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용기를 얻은 기자는 신 목사에게 설교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었다. 나서는 것을 싫어하는 신 목사는 극구 사양했지만 기자의 끈질긴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다음은 신석환 목사가 이메일로 보내온 질문에 대한 답이다.

프롤로그

아멘넷 측으로부터 인터뷰 형식의 질문을 받고 잠시 망연한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부족한 종이 목회의 길에 들어 선 날과 시간이 그리 짧지 않은데도, 설교에 관한 질문을 본격적으로 받아본 것은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단답식 질문이라든지 오며 가며 묻고 답했던 기회는 있었지만 이렇게 문항(問項)을 열 손가락으로 꼽을 만치 적시하여 질문을 받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목사에게 설교란 어떤 의미에서 알파와 오메가일 것입니다. 목사의 목회 여정에 설교란 떼어 놓을 수 없는 연결고리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설교는 목사의 아킬레스건과도 같습니다. 목사는 저마다 설교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설교에 대해 은근히 자신감을 갖고 있는, 다소 모순 된 정서가 존재합니다. 심지어 가장 근접한 충고자인 사모(師母)의 지적조차 접수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여, 어떤 목사도 자신의 설교가 수준이하라든지 잘하지 못하는 설교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목사들은 “그래도 내 설교가 괜찮다”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래서 어디서든 설교할 기회가 오면 사양하지 않고 “순종하는 마음”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기꺼이 단에 서는지 모릅니다.

그런 자신감으로 오늘도 목사는 설교를 합니다. 목사로 부름을 받았다는 의미는 설교자로 등장한다는 또 다른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열심히 설교를 하고 때로는 자신의 설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교인들이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설교란 정말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미완성의 메시지일지 모릅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설교를 했어도 그때마다 미흡한 마음을 갖고 단에서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질문 1. 설교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문답형에서는 교과서적인 답변은 생략하겠습니다. "설교란 무엇이며 어떻게 설교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받고 그것에 대한 답을 드립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자 앞에 있는 “무리”들에게 듣기 쉬운 언어를 사용하여 전하는 수단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설교자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설교자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하나님의 주관적인 “그리스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는 말씀이므로 어떤 형식이든 설교자의 입을 통해 나간 하나님의 진리나 복음은 설교라는 통로를 통해 듣는 이를 향해 직선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설교는 말씀이라는 그리스도와 듣는 이의 관계가 되는 것이지요. 더 이상 기술하면 논문이 될 터이니 이쯤 생략하겠습니다.

질문 2. 현대교회의 설교를 비판해 주십시오.

저는 비판할만한 수준에 있지 못합니다. 다만 설교가 너무 과다하게 범람하는 시대임을 인정합니다. 아무튼 설교를 고전적 설교, 현대적 설교로 나눈다는 것도 무리가 있을 듯 합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한 무명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일화를 모으면 책 한 권이 되겠지만, 설교는 항상 전하는 자와 받는 자와의 교감이 문제일 것입니다. 시공(時空)의 문제가 아니지요.

항상 설교는 현대교회의 설교일 것입니다. 18세기는 18세기대로, 19세기는 19세기대로, 21세기인 오늘은 오늘 대로 항상 “그 시대”가 현대였을 테니까요. 현대라는 시대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어떤” 설교를 하느냐가 중요한 과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말한다면 현대교회의 설교는 너무 매끄러운 감이 없지 않습니다. “죄” “회개” “구원과 영생”같은 무겁고 진지한 톤이 주조를 이루었던 설교 대신 “소망” “처세” “성공” 같은 교양 쪽에 지나친 시선을 보내는 느낌이 있습니다.

질문 3. 어떻게 설교를 준비하십니까?

모든 설교자의 준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설교의 대전제(大前提)는 기도와 성경입니다. 기도 없는 말씀 준비, 성경을 숙독(熟讀)하지 않은 설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영감”(靈感)이 설교의 주제를 정하도록 반드시 묵상을 시작합니다. 예컨대 설교의 주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그것을 고민하기 시작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결코 쉬운 시작이 아닙니다. 어느 날은 순간에, 어느 날은 하루 종일, 또는 이틀 사흘이 걸릴 때도 있습니다. 일단 주제가 정리 되면 그 주제와 관련 된 성경을 찾아 읽기 시작합니다. 설교는 이미 반 이상 준비 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를테면 지난 10월 8일 있었던 효성교회 이전 감사예배의 설교를 부탁받고, 하나님은 새로운 장소로 이전한 교회 공동체에게 무슨 말씀을 주실 것인가 기도하고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관점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전하는 어려움,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부담이 될 새 장소로 이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일이시니 하나님이 하시겠지"라는 마음은 있어도 그래도 여러 가지 무거운 짐을 진 목회자와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말씀은 무엇일까 묵상하다가, 결국은 끝까지 완성을 향해 가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어렵게 시작했는데 흐지부지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뜻을 설교의 주제로 택한 것입니다.
그 후 그 말씀의 요절로 누가복음 14장 25절 이하의 말씀을 주셨는데, 그것은 주님이 지적하신 미완성의 망대 비유였습니다. 이런 패턴이 보통 제가 준비하는 설교의 순서입니다.

그로부터 몇 주 전 말씀을 증거 했었던 샘솟는교회 설립1주년 감사예배에서도 먼저 그 교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주제가 무엇일까 묵상했습니다. 교회가 시작 된지 1년이면 어려운 시기입니다. 그러나 도약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기도 1년입니다. 더불어 호사다마(好事多魔)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시험과 환난이 시작하는 때도 역시 1년을 전후해서 가장 극성을 부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 시기에는 모든 교우들이 자기를 버리고 교회를 세우고 지키는 일에 주력해야 합니다. 저는 그 주제를 택했고, 자연히 요나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요절과 골격이 단숨에 정리 되지 않습니까?

“버리게 하자, 요나처럼 바다에 자기를 던지는 도전을 주자, 심청이처럼 임당수 푸른 물에 자기를 버려 상황을 반전시키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도록 격려하자,” 라는 내용이 떠오르게 됩니다. 물론 이런 식으로만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방법은 너무도 다양하여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를 표현한 것뿐입니다. 또 제목(주제)설교와 강해설교의 차이와 선호도에 관한 문제도 대두되겠지만 그 분야는 오늘 논지에서 제외하겠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 개인이 갖고 있는 순발력입니다. 그것은 설교자 개인과 교감하는 하나님의 은혜일 것입니다.

질문 4. 예화는 어떻게 준비하십니까?

"설교에서의 예화가 그날 설교의 승패를 가름한다"고 까지 말 할 수 있습니다. 설교에서 예화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목사님도 있긴 있습니다. 또 어떤 교인은 예화를 아주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런 특별한 분을 제외하고는 설교에서의 예화는 은혜의 수단임을 부정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수많은 예화(비유)를 사용하여 이해를 돕지 않았습니까?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5분 이상 경청하기란 어렵습니다. 짧은 기도 시간이나 찬송가를 부르면서도 딴 생각을 하는 게 인간입니다. 목사는 설교를 위하여 풍부한 독서량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목사의 서재에는 설교에 동원할 수 있는 예화 메모가 나름대로 상당량이 구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화를 모으는 일이 아니라 비치된 예화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입니다. 방금 읽은 책에서 뽑아낸 주옥같은 글귀를 언제 어떻게 적용하느냐 입니다. 다른 왕도(王道)는 없습니다. 부단히 정리하고 기억하여 실제 설교에 사용하는 방법 말고는 길이 없습니다. 갖가지 예화를 머리 속에 잘 저장했다가 타이밍 맞게 꺼내 쓰는 것뿐입니다.

예화는 설교자의 것으로 완전하게 소화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육화(肉化)된다는 의미입니다. 예화를 소개하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그 이야기 안에 들어가 설교자와 교인이 함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화를 잘 각색하고, 전개에 따른 감정 변화, 억양 등이 하모니를 이루어야 하겠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질문 5. 교인이 좋아하는 설교는 무엇이고 목사는 어떻게 설교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교인이 좋아하는 설교는 단순한 설교입니다. 저는 대지를 나누고 소제목을 부치고, 하나, 둘, 셋, 나누지 않습니다. 제 설교의 특징은 주제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만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할 날이 많은데 오늘 다 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교인이 좋아하는 설교는 짧은 설교입니다. 목사는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것도 길게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목사의 함정입니다. 제가 방송에서 5분 설교를 하는데 사실 예배 설교도 5분이면 족합니다. 그러나 주일날 말씀 듣기 위해 온 교인들에게 5분만 듣고 가도록 하는 게 야박한듯하여 제 설교는 통상 20분에서 25분 정도를 지킵니다. 길게 해야 되겠다는 목사님은 소신껏 하셔도 됩니다.

질문 6. 설교를 듣고도 성도들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많이 쓰는 용어 가운데 하나가 “변화”입니다. 그러나 “변화”에 지나친 기대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목사가 자신의 설교로 어떤 인간을 변화시킨다는 생각에 집착하면 교만이 됩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전할 뿐, 변화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일단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어떤 중년 신사가 몇 십 년 만에 우연히 친구를 만났습니다. 한참 서로 손을 잡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친구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는데 입을 열자 2초도 안 되서 고함을 지릅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이 사람 그 친구를 보며 “여전하다”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소년시절에도 화를 잘 냈던 친구였는데 30년 만에 보는 그는 여전히 화를 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 요체(要諦)는 조정하고 절제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 내재된 근본적 성품이나 성질의 변화를 아예 바꿀 것으로 기대해서는 곤란합니다. 일생을 설교만 하면서 사는 목사는 변합니까? 그렇게 성경 읽고 기도하고 말씀을 준비하는 목사가 자기가 외치는 설교처럼 변화 되었다면 그들 모두가 천사가 되고 성자가 될 일입니다. 뉴욕에만 해도 주일날 설교하는 목사가 한국인을 비롯하여 몇 천 명은 될 터인데, 그 숫자가 변화 된 인간이라면 뉴욕은 아마 천국을 방불한 도시가 되었을 것입니다.

말씀 드렸듯이 성령의 열매로 본래적 자기를 조금이라도 극복하며 살려는 노력이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교인들의 변화에 대한 눈높이를 낮춰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받은 생명이 된 것, 그게 변화라면 가장 큰 변화입니다. 설교는 한 순간이나마 그런 변화에 도전을 주고 자극을 주는 것입니다. 목사가 자기 설교에 도취되어 변화를 주도(主導)하려고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역사는 줄어들지 모릅니다.

질문 7. 왜 다른 사람들이 설교를 잘한다는 말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참으로 난감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교만의 죄를 짓도록 하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은 목사에게 던지지 않는 것이 예의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목사는 1년에 다섯 번 정도 은혜를 끼칠 수 있는 설교를 한다면 풍작(豊作)이다.” 설교의 수준이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명 설교는 있겠지요. 요즘 뜨는 조엘 오스틴목사님을 보면 “정말 잘하시는구나!” 생각합니다. 한국의 조용기 목사님, 김삼환 목사님, 이동원 목사님, 그리고 몇 십 년을 계속하여 부흥회를 인도하시는 부흥사들, 다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설교자들입니다. 그러나 설교를 “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단코 “잘하는 것”은 자랑이 아닙니다. 은혜로운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말씀하셨지요. “설교는 편집이다.” 동의하는 명제입니다. 설교는 창작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용하는 텍스트도 성경이라는 책을 똑같이 사용하고 예화도 거의 다 통용되었던 내용들을 여기저기서 다시 사용하지 않습니까? 어느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다른 분 설교를 표절했다고 아우성을 쳐서 문제를 일으킨 적도 있다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설교의 내용이 대부분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복음이나 진리의 핵심이 다 거기서 거긴데 새로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2천년 이상을 외치고 또 외친 내용이 아닙니까? 새롭다면 이상할 일입니다. 설교는 “또” 하고 “다시” 하고 “반복하며”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일 뿐입니다.

설교를 잘한다는 말을 듣는 것은 그날 그때의 상황에 맞는 설교를 적절하게 선택했다는 의미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하나 더 부연하자면 그 설교에 대한 자기의 분명한 이해와 확신이 표현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설교자도 분명 존재하니까요.

“무정설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위도 허공도 물도 설법을 한다는 뜻입니다. 항차 목사의 설교이겠습니까? 목사의 설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 믿음으로 입을 열어 외칠 때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이 있을 것입니다.

질문 8. 강대상에 설 때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설교를 오래 했어도 아직 단에 서기 전에는 긴장합니다. 부족한 종을 사용해달라고 간구하며 다만 도구로서 소임을 다하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아직 주님 앞에 선 어린아이”라는 자아비판입니다. 절대로 겸손하게 보이려는 표현이 아님을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질문 9.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전하는 방법이 중요하다고 보는데?

어느 목사님이 신문에 글을 썼는데 제목이 좋아서 소개합니다. “기질대로 설교하라.” 이 말은 자기 특성을 개발하라는 것입니다. 아류(亞流)에 머물지 말라는 뜻입니다. 물론 목사는 설교 말고도 할 일이 많습니다. 설교 외에 성경공부도 시켜야 하고, 상담도 잘해야 하고, 음악에 대한 조예도 깊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이 목회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설교입니다. 그 모든 툴(Tool)이 설교자의 설교로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설교하는 것이 효과적일까, 모든 목사의 과제입니다.

설교자의 설교 전달 방법의 독특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방법을 개발하고 연구하고 연습합니다. 사실 그렇게 해서 얼마만큼 발전하고 성장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다소의 진보를 위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가수 조용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수는 무대에서 노래하는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더 많이 알려지면 안 된다.” 참으로 설교자인 우리 목사들이 음미할만한 뜻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자력(自力)을 다했을 때 타력(他力)이 온다.”는 격언이 아니더라도 부지런히 갈고 닦으면 좋으신 하나님이 설교자의 설교를 빛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다른 이론은 생략하고 강대상에 올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제 경우를 예로 간략하게 설명하며 오늘의 글을 맺겠습니다. 설교 하는 방법을 분류하자면 원고 설교를 하는가, 메모설교를 하는가, 그리고 작성한 원고를 통째로 다 외워서 설교를 하는가로 나눕니다.

저는 주일 예배시의 설교는 원고설교를 합니다. 외워서 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하는 경우, 자꾸만 암기에 매달려 실수하게 됩니다. 즉흥적인 설교로 볼 수 있는 메모설교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설교를 한다고 강변하지만, 자칫 중언부언설교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저도 목사가 된 초창기 약 5-6년은 원고 없는 설교를 했습니다. 교인들이 신기하게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간단한 메모지만 달랑 한 장 갖고 올라가서 설교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낯이 조금 뜨거운 설교시기였습니다. 그 설교는 예정한 설교시간을 넘기기 일쑤였고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도 튀어 나와 설교하는 자신도 놀랄 때가 많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성경공부나 교육은 원고 없이 하면서 자유로운 말씀 전달로 색다른 은혜를 끼치지만 모든 설교의 꽃인 주일 예배의 설교는 철저한 원고설교입니다.

원고는 토씨, 접속사, 물음표 같은 기호까지 완벽하게 작성합니다. 원고설교는 시간을 지킬 수 있고, 엉뚱한 말을 자제시키고, 그날 설교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합니다. 이미 그 주제와 내용에 관하여 몇 번의 수정 작업을 거쳤으므로 말씀의 흐름을 꿰뚫을 수 있고, 말씀을 주신 하나님과도 그 주제를 놓고 영적으로 소통한 결과이므로 말씀에 대한 신뢰를 교인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에필로그

부끄러운 글로 지면만 어지럽힌 감을 갖습니다. 아직도 배워야할 부분이 많은 말석의 종이 분명치 못한 내용을 그저 느낌대로 적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부족한 사람을 목사로 삼아 설교를 하도록 하셨다는 믿음입니다. 설교야말로 목사에게 주신 은혜요 축복입니다.

“하늘의 별이 되지 못하면 가정의 등불이라도 되어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교회, 큰 목사님들이 많은 세상에 작은 교회라도 맡겨주신 주님의 의도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말씀을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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