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년 맞은 뉴욕샘솟는교회 노기명 목사 파워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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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06-09-14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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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넷은 오는 9월 17일 1주년을 맞는 뉴욕 샘솟는 교회 노기명 목사(47)를 인터뷰했다. 노기명 목사는 노기송 목사(뉴욕새예루살렘교회)의 친동생이다.
방황의 세월을 보내던 노기명 목사에게 하나님은 강권하심으로 노 목사를 신학교로 보내고 교회를 개척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다. 비록 학원건물을 사용하는 어려움은 있지만 노 목사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기도한다.
다시 태어나도 고생하는 아내와 결혼하고 싶다는 노기명 목사의 간증과 목회이야기를 들어 보자.
본인을 소개해주시죠?
동부개혁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새문침례교회(백창건 목사)에 출석할 때 신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뉴욕에는 침례교 신학교가 없어서 침례신학교에서 인정하는 동부개혁신학교에 1991년 들어가 대학과 대학원을 8년간 공부했다. 그리고 2001년 11월 안수를 받았다. 92년부터 안수를 받을 때까지 새문침례교회, 퀸즈한인교회, 뉴욕새예루살렘교회 등에서 전도사 생활을 했다.
어떻게 신앙인이 되었으며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까?
사실 어머니 뱃속에서 교회를 다닌 셈이다. 하지만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교회를 습관적으로 다녔으며 미국에 오기 전 한국에서 죄를 많이 지었다. 나는 축구선수로 대성하고 싶었다. 당시 형은 야구를 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고 덩치도 형이 더 좋아 아버지는 형을 밀어주고 나는 축구를 하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에게 축구공을 뺏기니 공부에 흥미를 잃고 고등학교는 졸업했지만 4수를 해도 대학교는 가지 못했다. 당시 아버지의 소원은 내가 대학에 가는 것이었다. 마침내 대전 목원대에 들어갔다.
하지만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군대나 가자는 마음으로 군대에 입대했다. 군대생활은 너무 좋았다. 행군 구보 등이 적상에 맞았으며 무엇보다 축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제대를 앞두고 복학보다는 적성에 맞는 군 장기지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계셨다. 제대를 앞두고 79년 미국에서 작은 아버지가 오셔서 나의 진로를 걱정하시고 미국에 와서 돈을 벌라고 말씀해 주셨다. 하지만 당시 나의 환경에서 미국비자를 받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당시 소망교회에 다니시던 아버지께서 "하나님에게 의지하라"며 새벽기도를 추천했다. 비자 인터뷰하기로 한 날 술을 먹은 상태에서 교회에 나와 새벽기도를 했다.
그때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니 "네가 가라" "내가 함께 할테니 네가 가라"라는 미세한 말씀을 들었다. 비자를 받자 "직원은 기적이다"라고 말했다. 83년 미국비자를 받고 미국으로 왔다. 당시 한국에 있었으면 방황한 생활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수 없었을 것이고 더우기 목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 와서도 신앙적인 범죄를 계속했다.
나의 방황에 답답하셨던 하나님은 84년 추수감사절을 통해 다시 나에게 오셨다. 내가 가장 자신있는 것은 체력이다. 군대에 있을 때는 한 번도 쉬지 않고 578개나 윗몸 일으키기를 해 화제를 받았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에 터키를 먹고 체한 일이 일어났다. 6살때 감을 먹고 체한 후 처음 일어나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자 188파운드의 몸무게가 일주일 만에 37파운드가 빠졌다. 병원에서는 만성위염이라고 했지만 치유가 되지 않고 바싹 마르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죽음의 공포가 왔다. 두려웠다. 브롱스장로교회(유태영 목사)에서 금요철야 기도를 하면서 간절하게 기도를 했다.
그때 하늘의 문이 열리고 환상을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지었던 죄를 보여주시고 회개하게 만드셨다. 1시간여 눈물 콧물을 흘리고 울었다. 옆에서 형님이 같이 기도를 해주셨다.
내 입에서는 "주님 저를 건강하게 해주시면 방황을 끝내고 주님의 길을 가겠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고백을 하자 갑자기 마음에 평화가 왔다. 바로 그때가 나의 변화의 시기였다. 다음날부터 죽을 먹을 수 있었고 회복이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술과 담배도 몸에서 받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주님의 은혜로 결혼하기로 하고 아내가 출석하던 한빛교회 정승일 목사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정 목사는 나를 처음보고 "자네 신학교 가서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하겠어"라는 이야기를 했다. 처음본 나에게 별소리를 다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목사님을 시작으로 가족, 교인, 친구들이 나보고 신학교에 가라는 이야기를 했다.
하나님은 나를 너무 모르신다고 나를 부인하고 뉴저지로 도망을 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10개월 만에 나를 내치시고 더 이상 도망갈수 없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그리고 91년 하나님의 강권으로 신학교에 가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내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에 의지할 뿐이다. 동기들은 이미 몇년전 교회를 개척한 상태였는데 안하려고 하다가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다. 그러면 적어도 열심히 예배는 드릴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심정으로 교회를 설립했다.
형님이 목회자 이신데 어떤 영향을 받았습니까?
내가 신학교에 갈려고 할때 형님은 큰 세탁소를 운영하던 잘 나가던 사업가였다. 그래서 내가 신학교에 가면 물질적으로 도와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다 형님도 자신도 신학교에 가기로 하고 형수님 몰래 신학교에 가게 되었다. 나의 신학교 진학에 도전을 받아 형님도 같이 신학교에 가게 된셈이었다. 형님은 어릴때부터 한가지에 만족하지 않고 일을 크게 벌리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사람이 몰려들고 일의 열매가 있다. 그런 특별한 탈렌트가 있다.
교회개척 하기전 어떤 것을 가장 염려했습니까?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특별한 은혜와 능력을 주신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특별한 능력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래서 교회설립을 망설였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하나님은 나에게 기회를 주신 것을 믿는다.
신학교 다닐때 막내를 주셔서 아내도 일을 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이 빚을 많이 지게 되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오직 하나님에게만 의지를 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한 것 같다. 빚을 정리하기 위해 7년간 일본 콜택시를 하며 빚을 갚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늘어났다.
목회관은 무엇입니까?
예배를 중심으로한 목회를 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잘나가는 교회의 예배방식을 한달에 한번씩 바꾸어 보기도 했다. 지금와서 깨닫는 것은 예배방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예배를 하는 동안 최선을 다해 찬송하고 말씀을 나눈다.
개척교회의 사모가 고생을 많이 하는데?
아내는 나보다 믿음이 좋다. 나는 계산적이며 현실적이라 무엇이 보이고 나타나야 감사를 드리는데 아내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일을 벌여놓고 시작하자는 스타일이다. 나보다 믿음이 10배는 낮다. 오히려 내가 아내에게 핀잔을 받는다. 신학교 다니던 8년 동안 아내가 고생을 많이했다. 아내는 모르겠지만 나는 다시 태어나도 아내와 결혼하겠다.
아무래도 성도들의 부흥을 고려했을텐데?
숫자에 연연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동역자이시다. 내 영역이 있고 하나님의 영역이 있다고 믿는다. 부흥은 하나님이 하신다. 내가 준비하면 하나님께서는 보내주신다. 나는 예배에만 전념하겠다.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방문하시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정착하신 분들은 비교적 많지 않다. 개척교회로서 학원 건물을 사용하니 교회건물에 대한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 보니 예배당만 마련되면 사람을 보내주실 것만 같기도 하다. 사실 우리에게는 불편하지는 않지만 처음 오시는 분들에게는 불편한 것 같다.
10년뒤 어떤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까?
"걸어 다니는 성경, 찬송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만큼 성경과 찬송에 능통한 사람이 되고 싶다. 또 교회를 통해 신학교를 세우고 선교를 많이 하는 교회가 되고 싶다. 나는 믿음으로 벌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그 안에 집어넣어 감당하게 하는 스타일이다. 언젠가는 나의 비전이 이루어질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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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샘솟는 교회
252-24 Northern Blvd ,Little Neck, NY 11362
718-631-4245/516-439-8735
ⓒ 2006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방황의 세월을 보내던 노기명 목사에게 하나님은 강권하심으로 노 목사를 신학교로 보내고 교회를 개척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다. 비록 학원건물을 사용하는 어려움은 있지만 노 목사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기도한다.
다시 태어나도 고생하는 아내와 결혼하고 싶다는 노기명 목사의 간증과 목회이야기를 들어 보자.
본인을 소개해주시죠?
동부개혁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새문침례교회(백창건 목사)에 출석할 때 신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뉴욕에는 침례교 신학교가 없어서 침례신학교에서 인정하는 동부개혁신학교에 1991년 들어가 대학과 대학원을 8년간 공부했다. 그리고 2001년 11월 안수를 받았다. 92년부터 안수를 받을 때까지 새문침례교회, 퀸즈한인교회, 뉴욕새예루살렘교회 등에서 전도사 생활을 했다.
어떻게 신앙인이 되었으며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까?
사실 어머니 뱃속에서 교회를 다닌 셈이다. 하지만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교회를 습관적으로 다녔으며 미국에 오기 전 한국에서 죄를 많이 지었다. 나는 축구선수로 대성하고 싶었다. 당시 형은 야구를 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고 덩치도 형이 더 좋아 아버지는 형을 밀어주고 나는 축구를 하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에게 축구공을 뺏기니 공부에 흥미를 잃고 고등학교는 졸업했지만 4수를 해도 대학교는 가지 못했다. 당시 아버지의 소원은 내가 대학에 가는 것이었다. 마침내 대전 목원대에 들어갔다.
하지만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군대나 가자는 마음으로 군대에 입대했다. 군대생활은 너무 좋았다. 행군 구보 등이 적상에 맞았으며 무엇보다 축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제대를 앞두고 복학보다는 적성에 맞는 군 장기지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계셨다. 제대를 앞두고 79년 미국에서 작은 아버지가 오셔서 나의 진로를 걱정하시고 미국에 와서 돈을 벌라고 말씀해 주셨다. 하지만 당시 나의 환경에서 미국비자를 받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당시 소망교회에 다니시던 아버지께서 "하나님에게 의지하라"며 새벽기도를 추천했다. 비자 인터뷰하기로 한 날 술을 먹은 상태에서 교회에 나와 새벽기도를 했다.
그때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니 "네가 가라" "내가 함께 할테니 네가 가라"라는 미세한 말씀을 들었다. 비자를 받자 "직원은 기적이다"라고 말했다. 83년 미국비자를 받고 미국으로 왔다. 당시 한국에 있었으면 방황한 생활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수 없었을 것이고 더우기 목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 와서도 신앙적인 범죄를 계속했다.
나의 방황에 답답하셨던 하나님은 84년 추수감사절을 통해 다시 나에게 오셨다. 내가 가장 자신있는 것은 체력이다. 군대에 있을 때는 한 번도 쉬지 않고 578개나 윗몸 일으키기를 해 화제를 받았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에 터키를 먹고 체한 일이 일어났다. 6살때 감을 먹고 체한 후 처음 일어나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자 188파운드의 몸무게가 일주일 만에 37파운드가 빠졌다. 병원에서는 만성위염이라고 했지만 치유가 되지 않고 바싹 마르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죽음의 공포가 왔다. 두려웠다. 브롱스장로교회(유태영 목사)에서 금요철야 기도를 하면서 간절하게 기도를 했다.
그때 하늘의 문이 열리고 환상을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지었던 죄를 보여주시고 회개하게 만드셨다. 1시간여 눈물 콧물을 흘리고 울었다. 옆에서 형님이 같이 기도를 해주셨다.
내 입에서는 "주님 저를 건강하게 해주시면 방황을 끝내고 주님의 길을 가겠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고백을 하자 갑자기 마음에 평화가 왔다. 바로 그때가 나의 변화의 시기였다. 다음날부터 죽을 먹을 수 있었고 회복이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술과 담배도 몸에서 받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주님의 은혜로 결혼하기로 하고 아내가 출석하던 한빛교회 정승일 목사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정 목사는 나를 처음보고 "자네 신학교 가서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하겠어"라는 이야기를 했다. 처음본 나에게 별소리를 다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목사님을 시작으로 가족, 교인, 친구들이 나보고 신학교에 가라는 이야기를 했다.
하나님은 나를 너무 모르신다고 나를 부인하고 뉴저지로 도망을 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10개월 만에 나를 내치시고 더 이상 도망갈수 없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그리고 91년 하나님의 강권으로 신학교에 가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내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에 의지할 뿐이다. 동기들은 이미 몇년전 교회를 개척한 상태였는데 안하려고 하다가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다. 그러면 적어도 열심히 예배는 드릴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심정으로 교회를 설립했다.
형님이 목회자 이신데 어떤 영향을 받았습니까?
내가 신학교에 갈려고 할때 형님은 큰 세탁소를 운영하던 잘 나가던 사업가였다. 그래서 내가 신학교에 가면 물질적으로 도와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다 형님도 자신도 신학교에 가기로 하고 형수님 몰래 신학교에 가게 되었다. 나의 신학교 진학에 도전을 받아 형님도 같이 신학교에 가게 된셈이었다. 형님은 어릴때부터 한가지에 만족하지 않고 일을 크게 벌리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사람이 몰려들고 일의 열매가 있다. 그런 특별한 탈렌트가 있다.
교회개척 하기전 어떤 것을 가장 염려했습니까?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특별한 은혜와 능력을 주신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특별한 능력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래서 교회설립을 망설였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하나님은 나에게 기회를 주신 것을 믿는다.
신학교 다닐때 막내를 주셔서 아내도 일을 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이 빚을 많이 지게 되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오직 하나님에게만 의지를 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한 것 같다. 빚을 정리하기 위해 7년간 일본 콜택시를 하며 빚을 갚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늘어났다.
목회관은 무엇입니까?
예배를 중심으로한 목회를 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잘나가는 교회의 예배방식을 한달에 한번씩 바꾸어 보기도 했다. 지금와서 깨닫는 것은 예배방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예배를 하는 동안 최선을 다해 찬송하고 말씀을 나눈다.
개척교회의 사모가 고생을 많이 하는데?
아내는 나보다 믿음이 좋다. 나는 계산적이며 현실적이라 무엇이 보이고 나타나야 감사를 드리는데 아내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일을 벌여놓고 시작하자는 스타일이다. 나보다 믿음이 10배는 낮다. 오히려 내가 아내에게 핀잔을 받는다. 신학교 다니던 8년 동안 아내가 고생을 많이했다. 아내는 모르겠지만 나는 다시 태어나도 아내와 결혼하겠다.
아무래도 성도들의 부흥을 고려했을텐데?
숫자에 연연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동역자이시다. 내 영역이 있고 하나님의 영역이 있다고 믿는다. 부흥은 하나님이 하신다. 내가 준비하면 하나님께서는 보내주신다. 나는 예배에만 전념하겠다.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방문하시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정착하신 분들은 비교적 많지 않다. 개척교회로서 학원 건물을 사용하니 교회건물에 대한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 보니 예배당만 마련되면 사람을 보내주실 것만 같기도 하다. 사실 우리에게는 불편하지는 않지만 처음 오시는 분들에게는 불편한 것 같다.
10년뒤 어떤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까?
"걸어 다니는 성경, 찬송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만큼 성경과 찬송에 능통한 사람이 되고 싶다. 또 교회를 통해 신학교를 세우고 선교를 많이 하는 교회가 되고 싶다. 나는 믿음으로 벌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그 안에 집어넣어 감당하게 하는 스타일이다. 언젠가는 나의 비전이 이루어질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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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샘솟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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