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권 목사 "삼손의 이야기가 어떻게 복음과 연결되나"
페이지 정보
성회ㆍ2014-05-10 00:00관련링크
본문
믿음으로 사는 교회(노진산 목사)는 제 6회 말씀이 있는 복음축제를 5월 9일(금) 부터 3일간 열었다. 강사는 최정권 목사(필라델피아 챌튼햄 장로교회). 최 목사는 첫 날 "삼손의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자라는 은혜가 무엇인지, 둘째날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이 땅에 종말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은혜가 무엇인지, 마지막 날에는 복음이 우리에 임재해서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떻게 나야 하는가 몸으로 지는 은혜를 나누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말씀 사경회를 통해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3일간 전할 말씀의 방향을 소개했다.
▲강사 최정권 목사
첫 날 최정권 목사는 사사기 16:18-22의 삼손의 이야기를 담은 본문으로 "다시 자라는 은혜"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삼손의 이야기가 21세기에 사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많은 기대속에 태어난 삼손은 나실인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했고,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라는 마지막 본문 말씀에서 복음의 메세지를 발견하게 된다. 특히 최 목사는 모태 신앙인들, 신앙의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삼손의 이야기는 큰 도전으로 다가온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첫 날 설교내용이다.
솔개는 70년정도 장수한다. 솔개는 40세가 되면 이대로 살지 새로워져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나이가 들면서 부리와 발톱이 둔해지고 깃털이 무거워서 날기가 어려워 진다. 그래서 40세가 정도 되면 적당하게 살든지 새롭게 되든지 결정해야 한다. 솔개는 높은 산에 올라가 바위에다 쪼아 부리를 깨고 새로나도록 한다. 새로난 부리로 발톱을 쪼아 뽑고 발톱이 다시 나면 무거워진 깃털을 뽑아낸다. 솔개는 자신을 새롭게 해서 가볍게 한 다음에 남은 30년을 제대로 사냥하고 산다고 한다.
우리의 문제는 내가 스스로 노력하면 되는가, 솔개처럼 스스로 결정해서 스스로 나를 변화시킬수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솔개와 우리가 다른 것은 우리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된다. 목회도 목회자가 아무리 애쓰고 힘써도 하나님이 받으시고 붙잡지 않으시면 아무 소용없다. 마찬가지도 내가 나를 아무리 변화할려고 노력해도 변화가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사모할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은혜없이 스스로 변화할 수 없다. 정말 하나님이 은혜주셔야 그 변화가 일어난다.
삼손의 이야기는 우리에 어떤 은혜가 있는가. 사사기에 나오는 12명의 사사중에 삼손의 이야기는 3가지 면에서 특징이 있다. 첫째, 길이가 가장 길다. 사사기 21장인데 12명의 사사로 나누어도 2장이 안된다. 삼손 이야기는 13-16장까지 4장이다.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 이야기중에 삼손의 이야기가 가장 길다. 잘 알려진 기도온의 이야기도 3장이다. 사사기에서 삼손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둘째, 삼손은 태어나기 전에 부름을 받았다. 사사기에 나오는 모든 사사들은 청년시절이나 중년에 사사로 부름을 받았는데, 삼손은 부모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이름까지 지어준 가장 깨끗하고 가장 순수하게 태에서 부터 지정받아서 낳은, 하나님이 리더로서 흠이 없이 부름을 받은 사람이 삼손이다. 이렇게 기대받고 태어난 사람이 삼손이다. 삼손은 태어나기 전 부름을 받았다. 셋째, 사사 시대에서 최초로 복을 받은 사람이다. 사사 시대에 최초로 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맨 마지막까지 복을 받은 사람은 삼손이다. 사사기를 보면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사기를 읽으면 마음이 굉장히 무거워질 정도이다. 저주와 심판이 가득한 책중에 유일하게 하나님이 복을 주셨던 사람이 있다.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13:24)" 사사기에서 복을 받은 유일한 케이스이다. 그것도 복을 구해서 받은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서 복을 받은 사람이 삼손이다. 마침 온 세상이 캄캄한데 한 사람만 하늘의 빛이 비추는 것 처럼, 온 사람이 어둠속에서 있고 저주속에 있는데 한 사람 삼손만 하나님의 환한 빛을 받고 자라고 있다. 삼손은 이런 특징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렇게 위대한 기대를 받은 삼손은 들릴라라는 여자 집에서 잠을 자다 머리를 깍히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서 두 눈이 뽑히고 그리고 맷돌에 쇠사슬이 묶여서 맷돌을 갈고 있다.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이다. 어떻게 삼손이 이럴수 있는가. 기대를 받았고, 사사기에서 분량이 가장 많고, 태어나기 전에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삼손이 어떻게 이럴수 있는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온 기대를 받었던 삼손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재미있는 것은 사사기 저자가 사용하는 워드 프레임이다. 저자는 복합적으로 재미있게 단어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삼손'은 태양이라는 뜻이다. '들릴라'는 깊은 어둠이라는 뜻이다. 어둠과 태양이 만나면 누가 이기는가. 태양이 이긴다. 캄캄한 어둠속에 촛불이라도 하나있으면 환해진다. 태양이 비추면 어둠을 물리치고 환한 빛이 들어온다. 자연의 세계에서는 그렇지만 영적인 세계에서는 깊은 어둠이 태양을 감싸고 있어서 태양이 빛을 못내는 것이다. 들릴라의 깊은 어둠이 태양을 감싸고 빛을 못내게 한다. 영적 어둠은 그런것이다. 영적 어둠이 밀려오면 빛을 못낸다. 삼손이 영적 어둠에 갇혀서 빛을 못낸다. 더 무서운 것은 삼손이 사사기에서 여자 스캔들이 가장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앞에 있던 창녀나 아내이름이 없지만 들릴라만 이름이 있다. 그 말은 들릴라의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깊은 어둠이 빛을 내려는 삼손을 꽉 묶어서 빛을 못내게 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삼손이 갇혀있는 감옥이 '가사'로 나온다. 원래 블레셋은 해안의 5개 도시국가들의 연합이다. 블레셋의 5개 도시중에 가장 으뜸되는 큰 곳이 가사이다. '가사'의 뜻은 강한 곳이라는 것이다. 삼손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가. 삼손이 사사기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유일하게 동물을 이용해서 전쟁을 승리한 사람이다. 삼손이 여우 3백마리를 잡아 꺼리에 횃불을 묶어서 블레셋을 물리쳤다. 삼손은 힘과 함께 지략이 뛰어났다. 그런 삼손을 가둔 것이 '가사'이다. '가사'의 뜻은 강한 곳이다.
그리스도인이 강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잡아주는 세상은 더 강할수 있다. 삼손의 이야기속에서 저자는 워드 프레임을 사용한다. 그래서 영적인 세계가 무엇인가를 삼손의 이야기를 통해 가르쳐 준다. 삼손이 이렇게 하나님께 복을 받았는데 다 잃어버리고, 그렇게 하나님께 받은 지혜와 힘을 다 잃어버리고 눈이 뽑혀져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공부를 잘할수 있도록 지혜를 주셨는데 지혜를 세상에서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경제적인 능력을 주시고 이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시는데 세상에서 다 잊어버린 모습이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볼 수 있는 눈을 다 뽑혔다. 더 강한 자에 의해 더 강한 곳에 갇혀있다. 그것이 삼손의 이야기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삼손이 나실인으로 안살았기 때문이다. 삼손 이야기중 중요한 키워드는 나실인이다. 삼손의 이야기에서 나실인을 이해하지 않으면 삼손의 이야기는 풀리지 않는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났다. 삼손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는데, 삼손에게는 나실인으로 살아야 할 책임이 주어졌다. 나실인의 책임은 구별된 삶이다. 구별이라는 것은 따로 떼어 놓았다는 것이다. 사용하시려고 따로 떠어 놓았다. 떼어놓았다는 것은 구별했다는 같은 말이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려고 구별하셨다. 하나님이 특별한 일을 위해 준비한 사람이 나실인인데, 나실인에게는 구별된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책임이 주어졌다. 그러나 삼손은 구별되게 살지 않았다. 하나님이 삼손에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르쳐 주셨다. 삼손이 나실인으로서 하지말아야 할 것은 3가지 밖에 없다. 독주를 마시지 마라, 죽은 것을 만지지 마라, 머리를 깍지마라 등이다. 삼손에게 하나님이 하지말라고 하신 3가지이다. 대신 삼손에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무엇인가. 사사기 전체에서 유일하게 삼손은 복을 받았다. 지혜롭고 강력한 힘이 있었다. 그렇게 삼손에게 많은 축복과 은혜를 주시고 딱 3가지 개인적으로 경건생활을 하라는데 못한 것이다.
삼손의 이야기는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이 하지말라고 하신 것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삼손은 커서 제일 먼저 한 것은 디나에 가서 이방 여자와 결혼한다. 디나는 포도의 대표적인 산지이다. 포도원에서 사자를 죽이고 그 몸에서 난 꿀을 자기도 먹고 부모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러니 삼손은 하나님이 하지말라고 하신 3가지중 2가지를 디나에서 했다. 마지막 남은 머리를 깍지말라는 것을 어떻게 깍히는지 적어놓은 책이 사사기 삼손 이야기이다. 삼손이 머리를 깍히는 16장을 읽어보면 전체에서 사사 삼손의 입에서 공통된 말이 나오는데 "나는 다른 사람과 같이 된다" 것이다. 삼손을 결박하거나 머리를 짜를때 계속 반복되는 내용이다. 기독교인이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사는 것이 큰 죄악이다. 구별된 삶을 못살고, 하나님이 정하신 나실인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못살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것이 삼손의 이야기이다.
삼손의 이야기는 전통적인 신앙의 가문에서 난 자녀들의 이야기이다. 그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세상사람과 똑같이 살고있다. 그것에 대한 경고이다. 사기기는 예수 오래믿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날카로운 지적이다. 너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너의 위치는 무엇인가, 너의 아버지의 기도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너의 어머니의 눈물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라고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반문하시는 모습이 사사기의 이야기이다. 삼손이 하나님 앞에서 받은 나실인으로서 사명을 다 잊어버리고, 머리깍이면 나도 똑같아진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16장의 메세지이다.
또 하나는 특징은 삼손은 잠을 많이 잔다. 삼손이 마지막으로 머리가 깎이기 전에 블레셋 사람이 삼손을 3번이나 결박한다. 하지만 삼손은 자신이 결박당한 것도 모르고 깊은 잠에 잔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머리를 깍힌다. 결박을 하는데도 머리를 깍는데도 삼손은 잠을 잔다. 삼손의 잠은 정상적인 잠이 아니라 영적으로 깊은 잠을 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태 신앙자에게 스스로 오래된 신앙의 가문에서 낫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집안에 수많은 문제를 일으키신다. 깨라고 하시고, 그대로 있으면 안된다고 하나님이 그토록 사인을 보내셔도 깊은 잠에 잔다. 하나님의 사인인줄 모르고 머리깍이는 것을 모르고 잔다. 그래서 삼손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된다는 메세지와 머리깍이고 잠자는 이야기가 같이 묶여서 간다. 삼손이 잠자는 것과 결박당하는 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삼손이 깨어있다면 절대로 결박당하지 않는다. 문제는 삼손이 잠을 자니 결박을 당한다. 자꾸 묶인다. 신앙의 잠을 자는 사람의 특징은 자꾸 묶인다. 누가 한마디 하면 묶이고, 어떤 일이 생기면 묶여서 못벗어난다. 결박한 이면에서 신앙의 잠이 자기에 힘을 못쓴다. 염려 걱정 근심으로 묶여서 못벗어난다. 그것은 신앙이 바닥에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묶인다. 그렇게 해서 무슨 능력을 받겠는가.
교회안에서 구별되게 선택받았고, 하나님이 주신 복과 은혜를 받았는데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꾸 그것때문에 묶인다. 그것때문에 신앙생활이 묶인다. 차리라 돈이 없으면 하나님께 간구하고 매달릴텐데, 경제적인 능력때문에 교만해지고 돈에 묶여서 신앙은 팽겨치고 더 모으겠다고 뛰어다닌다. 그것이 삼손의 이야기이다. 모태신앙이나 오래믿는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계속된 메시지이다. 그래서 더이상 묶이지 말고 풀어야 한다.
삼손 이야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다른 메세지는 '네 능력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들릴라와 블레셋 사람이 삼손에게 가장 많이 물어본 말은 네 능력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힘의 능력을 상실한 비참한 삼손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비참함은 눈이 뽑히거나 쇠사슬에 매인것이 아니다. 삼손의 진짜 비참함은 하나님이 떠나셨는데도 아직도 자기 몸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앙인의 비참함은 나실인으로 안사는데 여전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삼손은 자기 자신이 비참하게 되었다는 것을 몰랐다. 그것이 비참한 것이다. 영적으로 얼마나 바닥인데 그것을 모르고 사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가 메말라서 나의 영혼속에 아무것도 없다. 내 영혼이 얼마나 불쌍한데, 내가 가진것이 영적으로 아무것도 없는데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전처럼 힘을 사용하려고 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것이 삼손의 비참함이다. 그것이 신앙인의 비참함이다. 그래서 결국 삼손은 사람들의 놀림감이 그것도 이방인들의 놀림감이 된다.
이런 삼손에게 마지막 말은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라는 것이다. 삼손의 이야기가 두 눈이 뽑히고 맷돌을 갈고 있었다고 끝났다면 복음이 아니다. 그런데 사사기 저자는 삼손의 비참함을 묘사한뒤에 영적으로 눈이 뜨여진 사람만 알 수 있게 그의 머리가 다시 자라기 시작다는 말을 살짝 스치고 지나간다. 그것이 우리에게 복음이고 소망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저자는 시작한다는 단어를 이미 앞에서 사용했다. 하나님의 사자가 삼손 부모에게 나타나 이 아이가 태어나면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예언하면서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13:5)"라고 말한다. 삼손이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고, 그가 해야 할 사명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한다는 위함이라는 그 '시작한다'이라는 단어가 삼손에 인생의 밑바닥, 다른 사람이 삼손이 끝났다고 이야기 하는 순간에 삼손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주신 '시작한다'는 단어가 다시 쓰인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사사기의 비밀이다.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13:25)"에도 나온다. 인생의 밑바닥에 아무것도 없는 삼손에게 그 옛날 하나님이 삼손을 시작하게 하실때 삼손을 붙잡고 움직임이 시작했던 그 은혜로운 역사가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진 삼손에게 하나님이 그냥 두시지 아니하시고 다시 찾아오셔서 눈이 뽑힌 삼손에게 하나님의 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밑바닥에 떨어지고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고 다시 붙잡아 주신다는 복음의 메세지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이것이 놀라운 사건이다.
여기서 우리는 삼손이 가장 비참한 순간에 저자가 어린시절에 붙잡아 주었던 '시작'이라는 단어를 다시 사용하면서 우리에게 알려준 메세지 '머리가 다시 자란다'는 말은 단순히 신체적인 현상이 아니라 영적인 메세지이다. 삼손이 다시 머리털이 자라기 시작했다는 말은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하나님이 다시 새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삼손이 다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없이 다시 시작할수 없다. 회복은 언제 시작되는가. 회복은 내가 내 잘못을 뉘우치고 나를 채찍질하는데서 일어나지 않고,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을 생각할때 일어난다. 그 분이 누구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영적으로 회복된다. 두 눈이 뽑힌 자기를 보고 내가 왜 옛날에 그랬을까 하며 가슴을 치는 것이 회복이 아니다.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다시 회복된 것은 언제인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했을때 회복이 시작됐다. 그래서 우리의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에서 온다. 그 분을 다시 바라보고 그 분에게 돌아가는 것이 회개이고, 그 분을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회복이다. 하나님없이는 회복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고, 그 하나님을 찾는 것이 영적인 회복이다.
그래서 한 주석가는 삼손이 가장 비참한 시기에 한 기도에 주목한다. 삼손이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면서 삼손의 회복이 시작된다. 한 주석가는 원래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하는데, 두 눈이 없는 삼손의 기도를 하나님이 받아주셨다는 것이다. 삼손은 여기서 비로서 나실인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전부 드렸다. 진정한 나실인의 역사가 이루어 진것이다. 원래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때는 흠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삼손은 두 눈이 뽑이고, 묶이고, 머리가 깍히고 흠이 많았지만, 삼손이 나실인으로서 역사를 제대로 할때는 가장 흠이 많을때 였다. 하나님은 흠많은 삼손을 받아주셨다. 결과는 삼손이 죽을때 죽인자가 살았을때 죽인자보다 더 많다고 했다.
저는 모태 신앙인들, 신앙의 가문에서 태어난 장점은 끝까지 가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시작하는 것이 모태신앙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사사기 저자는 삼손이 살아서 두 눈이 있고 힘이 있었을때 보다 가장 밑바닥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을때 더 역사가 많았다고 했다. 그것이 하나님이 삼손을 나실인으로 받으신 순간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나실인으로 부르셨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나실인으로 사용하실것이다. 비록 밑바닥에 아무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사용하실 것이다.
중요한 마지막 질문을 해야 한다. 삼손의 이야기가 가진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복음과 연결되는 것인가.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스토리 라인이 있는데 그 지향점은 신약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킨다. 삼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의문은 삼손은 왜 혼자인가 하는 것이다. 기드온도 3백명이 있었다. 사사 시대에 삼손외에 혼자 역사한 사람은 없었다. 삼손은 단독으로 유다를 구원한다. 핵심은 삼손의 단독 사역속에는 앞으로 홀로 구원을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담겨있다. 예수님이 십자가가 혼자 죽으심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이야기가 삼손의 이야기속에 담겨있다. 삼손의 단독 사역의 이야기가 앞으로 예수님이 홀로 이루실 그 구원의 역사를 그림자 처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삼손이 신전에서 죽을때 더 많은 적을 죽였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단번에 온 인류를 구원할수 있는 위대한 죽음으로 묘사하고 있다.
삼손은 흠이 많은 나실인으로 살았지만, 예수님은 나실인으로 오셔서 흠이 없으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모든 매인것을 풀어주셨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영적 나실인이다. 절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삼손의 이야기속에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신 구속의 하나님을 우리는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영원한 복음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우리는 다시 자라나야 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신다. 집회를 통해 다시 은혜가 회복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축원한다.
믿음으로 사는 교회(1901 NORTHERN BLVD MANHASSET, NY 11030, 516-321-9696 교통편 필요하신 분 문의)
ⓒ 아멘넷 뉴스(USAamen.net)
▲강사 최정권 목사
첫 날 최정권 목사는 사사기 16:18-22의 삼손의 이야기를 담은 본문으로 "다시 자라는 은혜"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삼손의 이야기가 21세기에 사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많은 기대속에 태어난 삼손은 나실인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했고,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라는 마지막 본문 말씀에서 복음의 메세지를 발견하게 된다. 특히 최 목사는 모태 신앙인들, 신앙의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삼손의 이야기는 큰 도전으로 다가온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첫 날 설교내용이다.
솔개는 70년정도 장수한다. 솔개는 40세가 되면 이대로 살지 새로워져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나이가 들면서 부리와 발톱이 둔해지고 깃털이 무거워서 날기가 어려워 진다. 그래서 40세가 정도 되면 적당하게 살든지 새롭게 되든지 결정해야 한다. 솔개는 높은 산에 올라가 바위에다 쪼아 부리를 깨고 새로나도록 한다. 새로난 부리로 발톱을 쪼아 뽑고 발톱이 다시 나면 무거워진 깃털을 뽑아낸다. 솔개는 자신을 새롭게 해서 가볍게 한 다음에 남은 30년을 제대로 사냥하고 산다고 한다.
우리의 문제는 내가 스스로 노력하면 되는가, 솔개처럼 스스로 결정해서 스스로 나를 변화시킬수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솔개와 우리가 다른 것은 우리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된다. 목회도 목회자가 아무리 애쓰고 힘써도 하나님이 받으시고 붙잡지 않으시면 아무 소용없다. 마찬가지도 내가 나를 아무리 변화할려고 노력해도 변화가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사모할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은혜없이 스스로 변화할 수 없다. 정말 하나님이 은혜주셔야 그 변화가 일어난다.
삼손의 이야기는 우리에 어떤 은혜가 있는가. 사사기에 나오는 12명의 사사중에 삼손의 이야기는 3가지 면에서 특징이 있다. 첫째, 길이가 가장 길다. 사사기 21장인데 12명의 사사로 나누어도 2장이 안된다. 삼손 이야기는 13-16장까지 4장이다.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 이야기중에 삼손의 이야기가 가장 길다. 잘 알려진 기도온의 이야기도 3장이다. 사사기에서 삼손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둘째, 삼손은 태어나기 전에 부름을 받았다. 사사기에 나오는 모든 사사들은 청년시절이나 중년에 사사로 부름을 받았는데, 삼손은 부모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이름까지 지어준 가장 깨끗하고 가장 순수하게 태에서 부터 지정받아서 낳은, 하나님이 리더로서 흠이 없이 부름을 받은 사람이 삼손이다. 이렇게 기대받고 태어난 사람이 삼손이다. 삼손은 태어나기 전 부름을 받았다. 셋째, 사사 시대에서 최초로 복을 받은 사람이다. 사사 시대에 최초로 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맨 마지막까지 복을 받은 사람은 삼손이다. 사사기를 보면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사기를 읽으면 마음이 굉장히 무거워질 정도이다. 저주와 심판이 가득한 책중에 유일하게 하나님이 복을 주셨던 사람이 있다.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13:24)" 사사기에서 복을 받은 유일한 케이스이다. 그것도 복을 구해서 받은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서 복을 받은 사람이 삼손이다. 마침 온 세상이 캄캄한데 한 사람만 하늘의 빛이 비추는 것 처럼, 온 사람이 어둠속에서 있고 저주속에 있는데 한 사람 삼손만 하나님의 환한 빛을 받고 자라고 있다. 삼손은 이런 특징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렇게 위대한 기대를 받은 삼손은 들릴라라는 여자 집에서 잠을 자다 머리를 깍히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서 두 눈이 뽑히고 그리고 맷돌에 쇠사슬이 묶여서 맷돌을 갈고 있다.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이다. 어떻게 삼손이 이럴수 있는가. 기대를 받았고, 사사기에서 분량이 가장 많고, 태어나기 전에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삼손이 어떻게 이럴수 있는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온 기대를 받었던 삼손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재미있는 것은 사사기 저자가 사용하는 워드 프레임이다. 저자는 복합적으로 재미있게 단어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삼손'은 태양이라는 뜻이다. '들릴라'는 깊은 어둠이라는 뜻이다. 어둠과 태양이 만나면 누가 이기는가. 태양이 이긴다. 캄캄한 어둠속에 촛불이라도 하나있으면 환해진다. 태양이 비추면 어둠을 물리치고 환한 빛이 들어온다. 자연의 세계에서는 그렇지만 영적인 세계에서는 깊은 어둠이 태양을 감싸고 있어서 태양이 빛을 못내는 것이다. 들릴라의 깊은 어둠이 태양을 감싸고 빛을 못내게 한다. 영적 어둠은 그런것이다. 영적 어둠이 밀려오면 빛을 못낸다. 삼손이 영적 어둠에 갇혀서 빛을 못낸다. 더 무서운 것은 삼손이 사사기에서 여자 스캔들이 가장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앞에 있던 창녀나 아내이름이 없지만 들릴라만 이름이 있다. 그 말은 들릴라의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깊은 어둠이 빛을 내려는 삼손을 꽉 묶어서 빛을 못내게 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삼손이 갇혀있는 감옥이 '가사'로 나온다. 원래 블레셋은 해안의 5개 도시국가들의 연합이다. 블레셋의 5개 도시중에 가장 으뜸되는 큰 곳이 가사이다. '가사'의 뜻은 강한 곳이라는 것이다. 삼손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가. 삼손이 사사기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유일하게 동물을 이용해서 전쟁을 승리한 사람이다. 삼손이 여우 3백마리를 잡아 꺼리에 횃불을 묶어서 블레셋을 물리쳤다. 삼손은 힘과 함께 지략이 뛰어났다. 그런 삼손을 가둔 것이 '가사'이다. '가사'의 뜻은 강한 곳이다.
그리스도인이 강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잡아주는 세상은 더 강할수 있다. 삼손의 이야기속에서 저자는 워드 프레임을 사용한다. 그래서 영적인 세계가 무엇인가를 삼손의 이야기를 통해 가르쳐 준다. 삼손이 이렇게 하나님께 복을 받았는데 다 잃어버리고, 그렇게 하나님께 받은 지혜와 힘을 다 잃어버리고 눈이 뽑혀져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공부를 잘할수 있도록 지혜를 주셨는데 지혜를 세상에서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경제적인 능력을 주시고 이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시는데 세상에서 다 잊어버린 모습이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볼 수 있는 눈을 다 뽑혔다. 더 강한 자에 의해 더 강한 곳에 갇혀있다. 그것이 삼손의 이야기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삼손이 나실인으로 안살았기 때문이다. 삼손 이야기중 중요한 키워드는 나실인이다. 삼손의 이야기에서 나실인을 이해하지 않으면 삼손의 이야기는 풀리지 않는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났다. 삼손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는데, 삼손에게는 나실인으로 살아야 할 책임이 주어졌다. 나실인의 책임은 구별된 삶이다. 구별이라는 것은 따로 떼어 놓았다는 것이다. 사용하시려고 따로 떠어 놓았다. 떼어놓았다는 것은 구별했다는 같은 말이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려고 구별하셨다. 하나님이 특별한 일을 위해 준비한 사람이 나실인인데, 나실인에게는 구별된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책임이 주어졌다. 그러나 삼손은 구별되게 살지 않았다. 하나님이 삼손에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르쳐 주셨다. 삼손이 나실인으로서 하지말아야 할 것은 3가지 밖에 없다. 독주를 마시지 마라, 죽은 것을 만지지 마라, 머리를 깍지마라 등이다. 삼손에게 하나님이 하지말라고 하신 3가지이다. 대신 삼손에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무엇인가. 사사기 전체에서 유일하게 삼손은 복을 받았다. 지혜롭고 강력한 힘이 있었다. 그렇게 삼손에게 많은 축복과 은혜를 주시고 딱 3가지 개인적으로 경건생활을 하라는데 못한 것이다.
삼손의 이야기는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이 하지말라고 하신 것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삼손은 커서 제일 먼저 한 것은 디나에 가서 이방 여자와 결혼한다. 디나는 포도의 대표적인 산지이다. 포도원에서 사자를 죽이고 그 몸에서 난 꿀을 자기도 먹고 부모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러니 삼손은 하나님이 하지말라고 하신 3가지중 2가지를 디나에서 했다. 마지막 남은 머리를 깍지말라는 것을 어떻게 깍히는지 적어놓은 책이 사사기 삼손 이야기이다. 삼손이 머리를 깍히는 16장을 읽어보면 전체에서 사사 삼손의 입에서 공통된 말이 나오는데 "나는 다른 사람과 같이 된다" 것이다. 삼손을 결박하거나 머리를 짜를때 계속 반복되는 내용이다. 기독교인이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사는 것이 큰 죄악이다. 구별된 삶을 못살고, 하나님이 정하신 나실인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못살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것이 삼손의 이야기이다.
삼손의 이야기는 전통적인 신앙의 가문에서 난 자녀들의 이야기이다. 그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세상사람과 똑같이 살고있다. 그것에 대한 경고이다. 사기기는 예수 오래믿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날카로운 지적이다. 너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너의 위치는 무엇인가, 너의 아버지의 기도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너의 어머니의 눈물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라고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반문하시는 모습이 사사기의 이야기이다. 삼손이 하나님 앞에서 받은 나실인으로서 사명을 다 잊어버리고, 머리깍이면 나도 똑같아진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16장의 메세지이다.
또 하나는 특징은 삼손은 잠을 많이 잔다. 삼손이 마지막으로 머리가 깎이기 전에 블레셋 사람이 삼손을 3번이나 결박한다. 하지만 삼손은 자신이 결박당한 것도 모르고 깊은 잠에 잔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머리를 깍힌다. 결박을 하는데도 머리를 깍는데도 삼손은 잠을 잔다. 삼손의 잠은 정상적인 잠이 아니라 영적으로 깊은 잠을 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태 신앙자에게 스스로 오래된 신앙의 가문에서 낫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집안에 수많은 문제를 일으키신다. 깨라고 하시고, 그대로 있으면 안된다고 하나님이 그토록 사인을 보내셔도 깊은 잠에 잔다. 하나님의 사인인줄 모르고 머리깍이는 것을 모르고 잔다. 그래서 삼손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된다는 메세지와 머리깍이고 잠자는 이야기가 같이 묶여서 간다. 삼손이 잠자는 것과 결박당하는 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삼손이 깨어있다면 절대로 결박당하지 않는다. 문제는 삼손이 잠을 자니 결박을 당한다. 자꾸 묶인다. 신앙의 잠을 자는 사람의 특징은 자꾸 묶인다. 누가 한마디 하면 묶이고, 어떤 일이 생기면 묶여서 못벗어난다. 결박한 이면에서 신앙의 잠이 자기에 힘을 못쓴다. 염려 걱정 근심으로 묶여서 못벗어난다. 그것은 신앙이 바닥에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묶인다. 그렇게 해서 무슨 능력을 받겠는가.
교회안에서 구별되게 선택받았고, 하나님이 주신 복과 은혜를 받았는데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꾸 그것때문에 묶인다. 그것때문에 신앙생활이 묶인다. 차리라 돈이 없으면 하나님께 간구하고 매달릴텐데, 경제적인 능력때문에 교만해지고 돈에 묶여서 신앙은 팽겨치고 더 모으겠다고 뛰어다닌다. 그것이 삼손의 이야기이다. 모태신앙이나 오래믿는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계속된 메시지이다. 그래서 더이상 묶이지 말고 풀어야 한다.
삼손 이야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다른 메세지는 '네 능력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들릴라와 블레셋 사람이 삼손에게 가장 많이 물어본 말은 네 능력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힘의 능력을 상실한 비참한 삼손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비참함은 눈이 뽑히거나 쇠사슬에 매인것이 아니다. 삼손의 진짜 비참함은 하나님이 떠나셨는데도 아직도 자기 몸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앙인의 비참함은 나실인으로 안사는데 여전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삼손은 자기 자신이 비참하게 되었다는 것을 몰랐다. 그것이 비참한 것이다. 영적으로 얼마나 바닥인데 그것을 모르고 사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가 메말라서 나의 영혼속에 아무것도 없다. 내 영혼이 얼마나 불쌍한데, 내가 가진것이 영적으로 아무것도 없는데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전처럼 힘을 사용하려고 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것이 삼손의 비참함이다. 그것이 신앙인의 비참함이다. 그래서 결국 삼손은 사람들의 놀림감이 그것도 이방인들의 놀림감이 된다.
이런 삼손에게 마지막 말은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라는 것이다. 삼손의 이야기가 두 눈이 뽑히고 맷돌을 갈고 있었다고 끝났다면 복음이 아니다. 그런데 사사기 저자는 삼손의 비참함을 묘사한뒤에 영적으로 눈이 뜨여진 사람만 알 수 있게 그의 머리가 다시 자라기 시작다는 말을 살짝 스치고 지나간다. 그것이 우리에게 복음이고 소망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저자는 시작한다는 단어를 이미 앞에서 사용했다. 하나님의 사자가 삼손 부모에게 나타나 이 아이가 태어나면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예언하면서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13:5)"라고 말한다. 삼손이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고, 그가 해야 할 사명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한다는 위함이라는 그 '시작한다'이라는 단어가 삼손에 인생의 밑바닥, 다른 사람이 삼손이 끝났다고 이야기 하는 순간에 삼손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주신 '시작한다'는 단어가 다시 쓰인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사사기의 비밀이다.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13:25)"에도 나온다. 인생의 밑바닥에 아무것도 없는 삼손에게 그 옛날 하나님이 삼손을 시작하게 하실때 삼손을 붙잡고 움직임이 시작했던 그 은혜로운 역사가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진 삼손에게 하나님이 그냥 두시지 아니하시고 다시 찾아오셔서 눈이 뽑힌 삼손에게 하나님의 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밑바닥에 떨어지고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고 다시 붙잡아 주신다는 복음의 메세지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이것이 놀라운 사건이다.
여기서 우리는 삼손이 가장 비참한 순간에 저자가 어린시절에 붙잡아 주었던 '시작'이라는 단어를 다시 사용하면서 우리에게 알려준 메세지 '머리가 다시 자란다'는 말은 단순히 신체적인 현상이 아니라 영적인 메세지이다. 삼손이 다시 머리털이 자라기 시작했다는 말은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하나님이 다시 새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삼손이 다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없이 다시 시작할수 없다. 회복은 언제 시작되는가. 회복은 내가 내 잘못을 뉘우치고 나를 채찍질하는데서 일어나지 않고,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을 생각할때 일어난다. 그 분이 누구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영적으로 회복된다. 두 눈이 뽑힌 자기를 보고 내가 왜 옛날에 그랬을까 하며 가슴을 치는 것이 회복이 아니다.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다시 회복된 것은 언제인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했을때 회복이 시작됐다. 그래서 우리의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에서 온다. 그 분을 다시 바라보고 그 분에게 돌아가는 것이 회개이고, 그 분을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회복이다. 하나님없이는 회복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고, 그 하나님을 찾는 것이 영적인 회복이다.
그래서 한 주석가는 삼손이 가장 비참한 시기에 한 기도에 주목한다. 삼손이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면서 삼손의 회복이 시작된다. 한 주석가는 원래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하는데, 두 눈이 없는 삼손의 기도를 하나님이 받아주셨다는 것이다. 삼손은 여기서 비로서 나실인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전부 드렸다. 진정한 나실인의 역사가 이루어 진것이다. 원래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때는 흠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삼손은 두 눈이 뽑이고, 묶이고, 머리가 깍히고 흠이 많았지만, 삼손이 나실인으로서 역사를 제대로 할때는 가장 흠이 많을때 였다. 하나님은 흠많은 삼손을 받아주셨다. 결과는 삼손이 죽을때 죽인자가 살았을때 죽인자보다 더 많다고 했다.
저는 모태 신앙인들, 신앙의 가문에서 태어난 장점은 끝까지 가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시작하는 것이 모태신앙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사사기 저자는 삼손이 살아서 두 눈이 있고 힘이 있었을때 보다 가장 밑바닥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을때 더 역사가 많았다고 했다. 그것이 하나님이 삼손을 나실인으로 받으신 순간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나실인으로 부르셨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나실인으로 사용하실것이다. 비록 밑바닥에 아무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사용하실 것이다.
중요한 마지막 질문을 해야 한다. 삼손의 이야기가 가진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복음과 연결되는 것인가.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스토리 라인이 있는데 그 지향점은 신약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킨다. 삼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의문은 삼손은 왜 혼자인가 하는 것이다. 기드온도 3백명이 있었다. 사사 시대에 삼손외에 혼자 역사한 사람은 없었다. 삼손은 단독으로 유다를 구원한다. 핵심은 삼손의 단독 사역속에는 앞으로 홀로 구원을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담겨있다. 예수님이 십자가가 혼자 죽으심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이야기가 삼손의 이야기속에 담겨있다. 삼손의 단독 사역의 이야기가 앞으로 예수님이 홀로 이루실 그 구원의 역사를 그림자 처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삼손이 신전에서 죽을때 더 많은 적을 죽였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단번에 온 인류를 구원할수 있는 위대한 죽음으로 묘사하고 있다.
삼손은 흠이 많은 나실인으로 살았지만, 예수님은 나실인으로 오셔서 흠이 없으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모든 매인것을 풀어주셨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영적 나실인이다. 절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삼손의 이야기속에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신 구속의 하나님을 우리는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영원한 복음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우리는 다시 자라나야 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신다. 집회를 통해 다시 은혜가 회복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축원한다.
믿음으로 사는 교회(1901 NORTHERN BLVD MANHASSET, NY 11030, 516-321-9696 교통편 필요하신 분 문의)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