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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모 목사 "방지일 목사가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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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4-10-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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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방지일 목사의 추모예배가 한국에 이어 뉴욕에서 10월 14일(화) 오전 11시 뉴욕효신장로교회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조진모 목사(필라연합교회)는 "고인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이라는 제목으로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조진모 목사는 고 방지일 목사의 삶을 복음, 소명, 그리고 사명이라는 세 단어로 함축하여 회고했다. 다음은 이날 발표된 내용을 중심으로 업데이트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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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하는 조진모 목사(필라연합교회).

고 방지일 목사님께서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한국에서는 방지일 목사의 천국환송예배를 ‘한국 기독교회장’으로 드렸다. 교파를 초월하여 존경받던 지도자를 잃은 아픔에 온 교회가 동참하고 있다. 방 목사는 한국교회사의 산 증인이시다. 한 세기가 넘는 긴 세월동안 하나님 앞에 신실한 신학도, 선교사, 목회자, 설교자, 신학자, 성경교사, 복음전도사, 교계 지도자, 그리고 한 가족의 어른이자 성도로서 남긴 영적 유산은 매우 방대하고 다양하다. 방 목사의 삶을 세 단어로 함축하여 회고하고자 한다. 복음, 소명, 그리고 사명이다.

1. 복음

방 목사의 삶과 사역의 중심에는 '피의 복음'이 있었다. 이는 그가 가장 선호하였던 부흥회 주제였다. 같은 제목으로 책이 출판되었는데, 중국어 번역본은 가정교회의 주요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피의 복음'의 요지는, 신앙의 깊이만큼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는 신앙이 더 요구된다는 것이다. 2013년 한국교회 부활절연합예배의 행한 설교에서도 변함없이 원색적인 '피의 복음'을 외쳤다. 이 복음은 오로지 성령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복음이요, 우리가 그로부터 받은 복음이다.

방 목사는 성경에 능통하였다. 그는 조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성경을 많이 읽고 암송하였다. 66권 성경에 기록된 상세한 내용까지라도 통달하였다. 그러나 성경에 관하여 그에게 가장 독특한 점은, 성경을 바라보는 분명한 시각이 그로 하여금 '피의 복음'을 붙들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된 구속역사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방 목사가 외쳤던 설교의 주제는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은혜였다. '피의 복음'은 방 목사의 신앙 자체였다.

그의 가슴에는 언제나 복음의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어떤 환경에든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조부의 권유로 ‘어린이 전도협회’에 가입해서 복음을 전한 일, 대학생 시절 20리 떨어진 곳에서 야학을 가르쳤던 일, 겨자씨 월간 전도지를 만들어 배포한 일, 평양 전차와 시내 전선주에 전도문을 부착하는 일, 노방전도, 심방전도, 문서전도 등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선교사로 사역할 때는 물론 목회자로서 왕성하게 사역을 할 때에도, 월요일 마다 후배 목사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때에도, 세계 각국에서 초청을 받아 강단에 설 때에도, 언제나 그리스도의 피가 뭍은 복음을 선포하였다.

방 목사는 이성과 경험에 근거한 인본주의적 복음의 출현에 대하여 끊임없이 경고하였다. 복음이 빠진 다양한 교회의 프로그램을 지향하는 현대교회에 대해서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현재 총체적인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한국 교회는 그가 외쳤던 ‘피의 복음’에 계속 귀를 기울여야 한다.

2. 소명

1911년에 태어난 방지일 목사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불안한 국제 정세의 강한 영향을 받았던 근대 한국사의 격동기를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청년시절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기로 작정하였다. 그 후로 줄곧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소명, 즉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자신을 복음전파를 위해 부르셨다는 확신을 놓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라면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가든지 마다하지 않았다. 남다른 소명 의식이 그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환경을 이기게 하였다.

명석한 두뇌를 지녔던 방 목사는 어려서부터 철저한 학문교육을 받았다. 특히 수학에 뛰어났다. 당연히 온 가족은 방 목사가 세브란스에 입학하여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장래의 삶을 결정짓는 갈림길에서 그는 숭실대학에 진학하였다. 목회자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주위 사람들에게는 실망을 안겨줄지언정, 복음의 일꾼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1937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선교사역을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그 당시 상황을 이해한다면, 소명에 대한 방 목사의 진지함을 엿볼 수 있다. 소명을 선택하는 것은 곧 개인의 꿈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또한 가장 어려운 것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방 목사는 평양신학교에서 만나 평생 친한 친구로 지낸 박윤선과 김진홍과 함께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유학하기로 하였다. 이미 수속절차가 마쳐진 상태에 있었던 상황에서 방 목사는 과감하게 유학을 포기하였다. 총회로부터 중국 선교사로 헌신하도록 권유받았기 때문이다. 숭실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방 목사가 활짝 열려진 미국 유학의 길을 포기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중국 선교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소명이란 확신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선교사가 헌신하였다. 결국 유학의 목적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방 목사가 세 아이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산둥성에 도착하였다. 미국 북장로회가 1861년부터 선교를 주도하던 곳이었다. 네비우스 선교방법(삼자-자립, 자전, 자치)으로 한국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북장로교회 대표 선교사 리빙스톤 네비우스의 사역지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그곳은 방 목사의 부친 방효원목사가 상해에 있는 교회로 옮기기 전까지 20여년간 선교 활동하였던 곳이다. 방효원목사도 인간적으로 보면 대책이 없던 인물이었다. 총회가 선교사로 그를 파송한 후 방지일 목사는 조부의 품에서 성장하였다. 방 목사는 방효원 목사를 자주볼 기회가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중국선교사 아버지를 두었던 방지일 목사는 선교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하지만, 함께한 가족이 경험해야 하는 아픔과 고통의 무게가 어떠한지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방 목사가 선교사로 헌신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총회의 권유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소명을 확신하고 부친이 먼저 걸어간 같은 길을 선택하였다.

방 목사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쉽게 포장하려는 현대교회 지도자들을 바라보면서 걱정해 왔다. 일약 스타가 되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지는 수많은 일들을 접하며 안타까워했다.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겸손한 순종으로 반응하였던 방 목사의 모습으로부터 큰 교훈을 얻는다.

3. 사명

방지일 목사도 한 시대의 아들이었다. 그가 선교사로 헌신할 수 있었던 간접적인 동기는 한국 장로교회가 초기부터 선교 지향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는1907년 독노회를 설립하면서 1912년 첫 총회로 모이면서 강조했던 점이다. 1913년 처음 중국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선교사는 박태로목사이다. 총회가 황해도에서 1000명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그를 엄선한 것이다. 선교지에서 병을 얻은 박태로목사는 1918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방 목사의 부친 방효원 목사는 1917년부터 산둥성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자신은 물론 온 가족이 온갖 병과 싸워야만 했다. 심지어 그의 아내는 9번이나 수술을 하였다고 한다. 선교사들이 경험하는 자녀교육과 주거문제를 피해갈 길이 없었다.

대를 이어 중국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은 방지일 목사는 사명을 완수하려는 결단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방 목사가 사역을 할 당시 중국의 상황은 문자 그대로 최악이었다. 그는 중국시대, 일제시대, 미군정시대, 국민당시대, 그리고 공산당 시대 등 모두 다섯 번의 큰 사회적 변화 속에서 사역하였다. 중국 교회 교인들은 그에게 언제나 호의적이었다. 부친이 미리 많은 덕을 쌓기도 하였지만, 방 목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한 가족으로 품으로 섬겼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와 공산당으로부터 온갖 협박과 위협을 받아야만 했다. 중국 교인으로부터 많은 사랑과 보호를 받았지만, 사역 자체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방 목사는 이런 상황 속에서 하루를 지낸다는 것을 기적적인 일로 생각했다. 1949년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후의 시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힘들었다고 회고한다. 결국 모든 선교사들이 일찍 중국을 떠났다. 남은 선교사들도 모두 추방되었다. 방지일 목사는 중국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선교사의 사명을 다했다. 결국 그도 1957년 추방되었다.

방 목사는 어려서부터 모든 일을 성실하게 대하였고 열심을 다했다. 그 성품이 중국 선교의 현장에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명을 감당하게 한 것은 순교의 각오였다. 그는 살아있는 순교자였다. 삶과 죽음이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확신이 그를 강하고 담대하게 만들었다.

방 목사를 바울과 같은 인물로 회고하는 경우가 많다. 바울과 닮은 점이 참으로 많다. 방 목사는 선교사, 목회자, 순회전도자, 집필가였다. 그러나 방 목사는 자신이 욥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욥과 같이 온갖 고난을 잘 이겨낸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자화자찬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정반대이다. 자신도 욥과 같이 비록 심한 고통 속에서 살았지만, 욥이 경험했던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붙잡아주었다고 확신한 것이다. 방 목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노라고 증언한다.

방 목사는 귀국 후 영등포교회에서 20여년 담임목회를 하였다. 한 교회를 넘어 교계의 어른, 나아가서는 한국 기독교회의 지도자의 사명을 다하였다. 그는 현대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존하려는 태도를 저버리고 시스템과 심리학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후배들에게 어떻게 사명에 다할 것인지를 자신의 삶으로 가르쳤다.

방지일 목사. 그는 한국 교회의 큰 별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는 평생 자기의 자리를 신실하게 지키는 작은 별로 살다가 가기를 원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품에 안긴 그를 아쉬워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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