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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석 소장 “감격적인 위안부결의안 통과 막전막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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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07-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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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 손바닥에 어린 땀이 좀체 마르지 않는 긴박한 순간이었다. 일본 측의 치열한 막판 로비는 갈수록 강력해졌다. 8월 3일 의회 휴회를 앞둔 7월 중순 이후 분위기를 보면서 마지막 전체회의 표결이 다 무산된 줄 알 정도였다.

본래 잡았던 디데이는 7월17일이었다. 종군위안부결의안의 외교위원회 통과 기세를 그대로 이어가야 했다. 그러나 경제대국이자 국제사회에서 막강한 지분을 가진 일본의 로비력은 막강했다. 일본계 이노우에 상원의원은 미 의회 지도부에게 결의안을 처리하지 말 것을 잇따라 촉구했다. 또 상원에 대해 성명서 형태로 결의안 반대 입장을 배포해 결의안 반대 분위기 조성에 나섰다. 일본의 로비 그늘 아래 있는 많은 관계자들이 치밀하게 움직였고, 이노우에 상원의원의 성명서 배포가 한두번이 아니고 여러 차례 계속되는 상황이었다.

일본측 로비스트들은 사방을 가리지 않고 뛰었다. 종군위안부결의안이 일본의 참의원선거에 영향을 주게되면 결국엔 최고의 우방인 일본의 정국이 불안정해지면서 미국에도 도움이 될 것이 없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였다. 국익을 자극한 셈이다. 이들은 그런 논리를 동원해 강력하고 공격적인 마지막 로비를 집중포화처럼 퍼부었다.

물론 예상했던 일이었다. 스탠리 호이어 의원 사무실에서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런 귀띔 없이 당초 잡았던 디데이인 7월17일을 넘기고 말았다.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일본군과 일본정부에 의해 청춘과 인생을 짓밟힌 위안부할머니들을 위로해드려야 하는데, 시간은 내편이 아닌 것 같았다. 참담했다. 초조하고 답답한 생각이 뇌리를 엄습하고 있었다. 그때 혼다쪽의 연락이 왔다. ‘7월내 처리를 확신한다. 로비를 계속해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함께 고민했던 것은 한인을 포함해 미국시민들의 정의를 향한 목소리와 로비가 있으면 일본측의 저지 로비는 수그러든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의 성노예 만행에 대한 시민들의 요청이 와글와글하고, 비난과 규탄의 목소리가 높아야 했다. 미국의 선량한 시민들이 추구하는 인권 이슈가 다른 나라 정부인 일본의 로비스트들에게 방해를 받고있었고, 실제 이같은 이야기를 의회안에 퍼뜨려 기선을 잡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사력을 다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우선 이용수 할머니를 다시 미국으로 모셨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지역구인 샌프란시스코에 뉴욕과 워싱턴, LA의 우리 한인들이 다시 집결했다. 종군위안부결의안의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합세해 샌프란시스코를 뒤덮었던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시장을 감동시켜서 시장이 펠로시 하원의장에게 3회에 걸쳐서 결의안 처리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여성계를 움직였고, 이들은 위안부할머니들의 고통에 함께 분노해줬다.

이어 이용수 할머니를 워싱턴으로 모셨다. 스탠리 호이어 원내대표, 톰 랜토스 외교위원장,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을 방문했다. 간절한 요청이 담긴 이용수 할머니의 자필서신을 이들을 포함한 미 의원들에게 전달했다.

다시 한번 마지막 주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반드시 종군위안부결의안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을 갖지않을 한국인이 있었을까. 인간의 가치와 존엄, 인간성을 찾아야 한다는 할머니들의 절규를 무시할 지구상의 인류가 있을까. 우리는 만일에 대비해 결의안을 반대하는 입장을 갖는 의원들과 결의안에 아직까지 무관심한 의원들을 공략하는 대대적인 로비를 계획했다. 7월26일 목요일이 마지막 로비 데이였다. 뉴욕에서 대형버스 한대를 대절했다. 의원들을 만나 우리의 입장을 이야기하는 데 훈련된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그야말로 마지막 로비를 위한 워싱턴 방문단이 출발했다. 할머니들이 고통을 당한지 60여년만에 이들의 아픔과 한을 씻어드리기 위해 단행한 마지막 항해였던 셈이다.

모두가 없는 돈을 털어 모았다. 사실 미국 땅에서 돈이 없이 어떻게 로비를 하고 활동하고 의원들을 설득해 내겠는가. 그래서 탈탈 털어모으니 1만2천달러가 만들어졌다. 그날자에 모든 의원실이 보는 의회 전문 소식지인 <더 힐(The Hill)>에 광고를 냈다. 그리고 뉴욕이 지역구이면서 가장 적극적으로 이 결의안을 후원해온 게리 애커멘, 조 크라울리, 찰스 랭글, 스캇 가렛 등 의원들에게 이 사실을 미리 알렸다. 지역구민들이 대거 워싱턴을 방문한다는 이야기에 이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 리 없었다.

우리는 종군위안부의 상징이 된 이용수 할머니를 앞세워 워싱턴으로 진군했다. 그날 하루종일 2백30여명의 대상의원들의 사무실을 돌았다. 준비된 홍보물과 자료들, 그리고 그날자 <더 힐>에 난 전면 광고문을 들고 다니면서 각 의원사무실을 돌아다녔다. 아니 의원들의 집인 의사당을 휩쓸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뉴욕서 워싱턴으로 가는 버스안에서 4시간 동안 다짐했다. ‘종군위안부결의안을 꼭 관철시켜야 한다. 전 세계가 지금 뉴욕서 올라가는 이 버스를 주목하고 있다. 오늘 로비를 성공하는가에 종군위안부결의안의 통과가 달려있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로비 참가자들의 얼굴과 꽉 쥔 주먹에서도 결의가 넘쳐났다. 그리고 일본의 돈 때문에 결의안 저지에 나서고 있는 일본 로비스트들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며 이들이 결의를 다지도록 격려했다. 대개 한인들이 영어의 서툰 것 때문에 직접 위원들이나 보좌관들을 만나면 소극적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들의 결의를 다져 의원들에게 과감하게 용기를 내 이 결의안의 인권과 인류사적인 의미를 설명할 수 있도록 서로가 용기를 북돋은 셈이다.

이용수 할머니는 27일과 28일 이틀 동안 버지니아 지역구를 방문하고 의원들을 만나셨다. 그런데 금요일 의회 게시판을 확인하니 종군위안부결의안이 다음주인 7월 마지막주의 처리사안으로 올라가 있지 않았다. 전날인 목요일에 결의안 처리를 위해 핵심관계자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만나 ‘이들을 입이 부르트도록 설득했는데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물론 공지에 빠지더라도 당일 의장 직권으로 처리할 가능성에 대해 들었지만, 당장 눈앞에 처리 가능성이 높아져야 한다는 생각에 의장 직권 처리 가능성은 자꾸 흘려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의회 처리사안에서 빠졌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미국내는 물론이고 전세계와 한국내에서 이를 걱정하는 이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그렇게 되면 8월3일 휴회와 함께 올 전반기에 처리가 불가능할텐데, 자꾸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이번 회기에서도 실패하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식은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동안 한국에선 절대로 관여를 하지 않아야 된다는 한국측의 불관여 전략을 고수해왔다. 이는 한인을 중심으로 한 미국시민운동만이 미국 의회에서 목소리가 통하기 때문에 선택한 방식이었다. 그래서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일본에 비해 왜 한국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라는 비판도 나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돈과 권력과 미일동맹을 이용한 로비를 이기기 위해서는 그길 뿐이었다. 워싱턴 정치의 작동방식을 아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이해해줬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런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일부는 국민들 사이에 불만이 나오는 가운데에서도 당신의 입장을 존중하느라 나서지 않았는데, 당신이 통과 안되면 책임질 수 있겠는가라는 추궁의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금요일, 토요일, 한 숨의 잠도 잘 수 없는 악몽의 시간들이 흘러갔다.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하신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과연 내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 지 좀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워싱턴 DC에 전국에서 결의안 추진연대의 핵심활동가들이 속속 집결했다. 나는 미리 ‘월요일에 분명히 처리된다. 그 역사적인 순간을 직접 지켜보자’고 이들에게 이미 제안했었다. 금요일 의회 게시판에 공지가 안된 사실 때문에 모두가 불안해했다. 이번에 그 많은 의원들의 지지를 확보하고도 전체회의 통과가 수포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하나라는 우울한 표정들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동안 펠로시 의장의 의지를 볼 때에 처리를 분명하게 확신한다고 말했다.

고집을 부리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종군위안부결의안의 인권과 역사적 의미를 믿었고 동시에 인권문제에 헌신해온 펠로시 의장에 대한 신뢰도 컸기 때문에 나는 태연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솔직히 겉으론 확신한다고 했지만, 불안한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의회 게시판에 공지가 안됐고, 만일 상정이 안될 경우에 대한 우려가 먹장구름처럼 뒤덮어오기 시작했다.

일요일 오후 4시10분. 핸드폰 전화벨이 울렸다. 밝힐 수 없는 의회 핵심관계자로부터 드디어 운명의 전화 한 통이 걸려온 것이다. "지금 스탠리 호이어 원내대표 웹사이트에서 추가 공지를 확인하라"라는 전화였다.

아! 퍼뜩 머리에 마이크 혼다 의원과 펠로시 의장 측의 전략이 머리에 스쳐갔다. 금요일에 공지했어야 할 것을 일요일로 미룬 것은 일본측 로비스트들이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도록 '기습상정 전략'이었던 것이다. 일요일에 이렇게 상정을 시킨 뒤 상대와 일본 측이 반격할 틈을 주지 않고 월요일 개회와 함께 처리한다는 펠로시 의장의 결단이었다고 판단됐다. 본인은 그 순간 종군위안부결의안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했다. 아! 이 종군위안부결의안이 의장이 기습상정의 방식을 취할 정도로 이렇게 크고 어려운 문제라는 ‘국제정치학적 지형도’의 성격을 깨달은 것이다. 스스로도 놀랍고 경이로웠다.

드디어 긴장이 가득한 방청석에 들어섰다. 1백여명에 달하는 ‘121결의안’으로 불리는 종군위안부결의안 관계자들이 속속 입장했다. 곳곳에 낯익은 얼굴들이 포진했고, 나를 경계하는 일본측 로비스트들의 긴장감 어린 눈길도 포착됐다. 의원회관 지하 카페테리아에 상황실을 설치하고, 오전 10시에 그곳에 대부분의 참관단이 집결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랜토스 외교위원장 사무실을 방문, 랜토스 의원의 부인과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가지실 수 있도록 했다. 랜토스 위원장이 워낙 무게가 있는 분이고, 또 회의 진행에 있어서는 외교위원장이 펠로시 의장만큼 중요한 위치에서 주도를 하기 때문에 랜토스 위원장께 이용수 할머니가 방청석에 앉아 상황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란 사실을 알려주어야 했다. 그리고 랜토스 의원의 보좌관에게 부탁을 해서 그런 사실이 의원들 간에 입소문으로 퍼지도록 했다.

이럴 경우 의원들이 회의실에 입장을 할 때, 외교위원장 사무실에서 광고문을 돌릴 수 있고 사안의 중대성을 다시 의원들에게 주지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보좌관 중의 한 사람이 '회의 중간에 의원들이 방청석의 할머니를 주목했으면 정말 큰 도움이 되겠다', '반대의견을 할머니를 통해서 저지할 궁리를 해보라'라는 내용의 귀띔이 있었다. 결의안의 중요성이 미국 의회내에 알려지면서 곳곳에 우리 편이 포진한 덕을 단단히 보는 셈이었다.

회의 도중 단 한 사람의 반대의견이 있어도 이것은 오후 늦게 전체의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롤콜 방식으로 진행된다. 롤콜 방식은 의원 한 사람 한 사람 의견을 묻고, 그 사안에 대해 충분히 토론하기 때문에 최소한 3, 4시간 이상 걸리는 방식으로 반대의견이 나올 경우 롤콜방식으로 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가능한 롤콜 방식의 회의 진행으로 연결되지 않고 속전속결로 끝내야 했다.

가장 불안했던 것은 11시가 넘어서는 데도 우리가 가장 큰 역할을 해줄 것으로 믿고 있는 랜토스 위원장이 아직 오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랜토스 위원장은 백악관 회의에 참가했다가 시간이 걸리면서 회의 출석이 늦어지고 있었다. 회의가 시작했고 121결의안 순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태환경소위원장과 마이크 혼다 의원이 보였다. 그리고 지지발언을 약속했던 의원들과 반대의견을 낼 가능성이 있는 공화당 의원들도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 순서는 되고 있는데 정작 가장 큰 버팀목이 될 랜토스 위원장이 나타나질 않고 있었다.

그리고 충고를 받은 대로 의원들의 주의와 이목을 끌어야 했다. 이용수 할머니 옆 자리에 앉아서 크게 소리도 내보고 의자를 삐걱거려오고 기침도 일부러 크게 내고 안간힘을 썼다. 우리 쪽에서 자꾸 소리가 나면서 의사장 질서를 유지하는 데 엄격하기로 안전요원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결국 안전요원으로부터 경고를 들을 정도로 ‘작은 소음’을 만들어낸 끝에 의원들이 우리쪽의 이용수 할머니를 조금씩 쳐다보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의원들, 특히 공화당쪽 의원들이 서로 귓속말로 소곤대면서 우리쪽의 이용수 할머니를 손으로 가리키며 쳐다보고 있었다. 일단은 성공이었다. 드디어 우리 결의안 순서가 되는 동시에 랜토스 위원장이 입장했다. 그때만큼 "안도감"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몸속에 절실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의원들의 종군위안부결의안 지지발언 도중에 양측의 수석보좌관들이 양당의 의원들을 넘나들며 귓속말로 부지런히 합의를 하고 있었다. 이미 만장일치 처리를 합의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렇게 보좌관들의 움직임이 많아지자 또 서서히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결의안을 저지하기 위한 일본의 입김이 반대쪽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충분히 알 수가 있었다.

텍사스의 흑인 여성의원인 잭슨 여사가 아주 강하고 분노에 찬 톤으로 일본의 입장을 비난하는 발언을 시작했다. 잭슨 의원의 발언 도중에 랜토스 위원장이 의사봉이 있는 테이블을 오갔다.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발언이 끝나고 “반대의견이 있는가?”란 의장의 물음이 나왔다. 의사당 내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고 있었다. 의장은 그렇게 물은 뒤 “찬성하면 '아이' 하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큰 목소리의 “아이”란 소리가 터져나왔다. 의장은 다시 “반대하면 '노' 하시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나가는 일초의 순간은 마치 한 시간도 넘는 긴 시간으로 느껴졌다.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다. 분명한 것은 '노'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노’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롤콜방식’으로 가지 않은 채 ‘보이스보트(Voice Vote)’ 방식으로 만장일치 통과가 이뤄진 것이다. 그토록 치열한 반대로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만장일치 통과라는 좀체 믿기지 않았다.

사람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눈물을 감추느라 정말 애를 먹었다. 밤낮없이 1년2개월 동안 뉴욕과 워싱턴, LA와 미 전역을 오가며 조마조마했던 그런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미 의회에서 국가간 역사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있는 사안이 결의안으로 통과되기 쉽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완전하고 완벽하게 해결이 되는 순간이었다. 감동이 밀물처럼 가슴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이용수 할머니를 모시고 전체회의장을 나왔더니 혼다 의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차 하면 할머니가 그냥 주저앉으실 찰나였다. 할머니를 부축했다. 순간 의외로 침착함을 금새 되찾은 할머니를 혼다 의원이 또 위로하고 격려했다. 할머니는 혼다 의원의 손을 잡은 채 절절한 감사의 마음을 혼다 의원에게 전했다.

결의안 통과 직후 낸시 펠로시 의장은 우리 대표단 가운데 몇 사람을 의사당 내의 작은 회의실로 초청했다. 혼다 의원이 펠로시 의장에게 그동안 로비활동을 해온 유권자센타의 나와  이용수 할머니를 특별하게 소개해 주었다. 펠로시 의장은 할머니와 나를 감싸 안았고, 이어 악수를 한 뒤 결의안 통과에 대해 우리보다 훨씬 더 기뻐하고 감격스러워 했다. 펠로시 의장은 “이용수 할머니가 미국정치권을 올바른 리더십으로 가도록 하셨다. 정의는 이렇게 이기고, 늘 살아있다. 정의가 이기는 것은 우리 모두의 신념이다. 한인들의 풀뿌리 운동이 이렇게 셀 줄은 정말 몰랐다”고 감동에 가득 찬 표정으로 우리들을 격려했다. 그는 이어 “이제 동김(김동석의 미국식 표현)도 편안한 마음을 가져도 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지난 1년2개월 많은 이들이 이 결의안 통과를 위해 몸을 던져 도왔고, 오늘까지 인고의 세월을 보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과 아픔과 함께 정대협 등 많은 시민단체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뉴욕과 워싱턴을 오갈 차비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할머니들을 뵙거나 그들의 아픈 과거를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줄줄 흘리던 시간들이 결국은 미국 의회에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낸 것 같다. 특히 세계 정치의 한복판인 워싱턴의 정치광장에서 기적적으로 만들어낸 역사적인 결의안이 위안부로 끌려가 고초를 겪으신 할머니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일본정부의 진실한 각성으로 보상으로 연결됐으면 좋겠다. 참여해주고 격려해주신 많은 분들과 고국 동포들의 따뜻한 애정과 헌신, 그리고 관심에 감사드린다.

ⓒ 2007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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