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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목사 "흔들리는 예배, 흔들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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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5-0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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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인여성목회자협의회는 김진호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여 1월 27일(화) 뉴욕초대교회(김승희 목사)에서 예배세미나를 열었다. 김진호 목사(뉴저지 예수마을교회, 미국 다리놓는 사람들 대표)가 인도한 세미나의 주제는 "목회자가 예배자가 되면?"으로 지난해 11월 나온 김 목사의 신간인 <담임목사가 꿈꿔야 할 예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김진호 목사는 강의를 시작하며 한국교회에 어떻게 '예배자'라는 개념이 도입되었으며, 예상하지 못했던 목회를 시작하고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했다. 그리고 예배란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하여 개론적인 강의를 진행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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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김진호 목사

다음은 강의록 속에 든 참고자료중 "흔들리는 예배, 흔들리는 삶"의 내용이다. 김진호 목사는 글을 통해 오늘날 교회의 예배를 진단하고 그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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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11일 현지 시각 오후 4시 53분 9초, 아이티에 진도 7.0의 강진이 났다. 진원지는 수도 포르토프랭스 지표면으로부터 13 킬로미터 깊이였다. 깊은 곳으로부터 흔들린 것이다. 어이없는 장면은 대통령 궁이 붕괴된 모습이었다. 그때 나에게 스쳐지나가는 마음의 그림이 있었다. 그것은 그 때로부터 15년 전, 1995년 1월 16일 동이 틀 무렵, 일본 고베시를 강타한 거의 같은 강도의 지진 참사를 소개한 타임지의 사진이었다. 큰 건물들이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져 있거나 부분적으로 부셔져 있었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진이 언제 일어났는 냥 우뚝 서 있는 건물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확실한 기초와 중심 위에 내진(耐震)설계에 충실하게 건축하였기 때문이다. 지진이 많은 알류산(Aleutian) 열도에 속한 일본은 내진설계를 하고 그에 따른 건축 자재를 쓰지 않으면 건축허가를 받을 수 없다.

기초와 중심은 생명처럼 중요하다

우리의 인생도 마치 건축하는 것과 같다. 옛 어른들은 바른 삶의 가치관 위에 서서 정진하고 있지 못한 젊은이들을 향하여 따끔하게 “이 사람아, 중심 좀 잡게나”라고 일침을 가했다. 건물이든 인생이든 그 중심과 그것을 받쳐주는 기초는 매우 중요하다. 기초가 흔들리면 중심을 잃고, 중심을 잃으면 결국은 무너지고 만다. 흔들리는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다. 필리핀에서 선교할 때, 그리 강하지 않은 태풍이었는데도 흔들리다 못해 뿌리 채 뽑혀서 넘어져 있는 커다란 나무들을 보면서 현지인들에게 물어보았다.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였다. 나무는 큰데 뿌리가 깊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건물의 기초는 나무의 뿌리와도 같다. 뿌리 깊은 나무가 버티는 힘이 있다. 넘어지지 않는다. 인생도 그렇고 신앙도 만찬가지이다.

예배가 흔들리고 있다

예배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디자인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만남의 관계를 누릴 수 있도록 주셨다. 예배가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성령의 기름부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예배에 있어서 화려한 착각은 예배를 사람이 만드는 프로그램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만드신 것에 인간이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가 만든 예배라는 프로그램에 반응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넘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예배를 통하여 감동을 받아야 할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더 좋은 감동을 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예배 디자인을 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본주의적인 예배로 기우러지지 않도록 모세성막을 예배 디자인의 원론적인 틀로 제시하셨다. 건축으로 말하자면 빌딩이 올릴 때 세우는 철골과도 같다. 건축을 일컬어서 종합예술이라고 한다. 예배 역시 그렇다. 주님이 예배의 프레임(frame)을 쳐 주시고 우리가 주님이 주신 은사와 재능으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라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을 표현함으로서 예배라는 종합예술이 표현된 건축물을 창조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예배는 습관에 의한 반복되어지는 종교행위가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사랑과 생명이 흐르는 십자가의 도가 분명하게 표현된 철골구조(십자가의 만남들로서 형성된 구조)에 우리를 향한 십자가의 사랑에 감사와 찬양과 경배로 완성된 사랑의 건축물을 헌정해 드리는 종합예술이 예배이기에 예배드리는 자의 창의적인 표현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하나님을 향한 관심과 사랑으로 받으신다. 하나님을 지루하게 해드리는 예배는 결코 하나님을 감동시켜드릴 수 없다. 하나님은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시고 그 다양성을 통해서 드러나는 표현들을 기뻐하신다.

오늘날의 예배현장을 돌아보면 여러 가지 모습을 만나게 된다. 특별히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중요한 가치로 받아드리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팽배된 시대 속에서는 흔들릴 수 없는 복음적 관점을 중심삼고 다양한 형태의 창조적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동화되지 않으면서 시대를 이해하고 끌어않을 수 있는 포용성이 있는 창조적 예배를 드릴 수 있다.

특별히 예배의 초점은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의 소원인 영혼을 구원하데 목적을 둔 구도자 예배에는 구도자들의 눈높이에서 창조적으로 디자인 된 예배 순서는 그 자체가 구도자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영과 진리로 예배가 되어 올려 지도록 기도하며 드려질 때에 주님은 위로부터 기름을 부으셔서 영혼이 주의 나라로 돌아오도록 역사하신다. 예배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를 들여다보면 문제가 심각하다. 그 문제의 대부분의 원인은 건강한 교회보다는 성장하는 교회에 초점을 두고 예배드리기 때문이다. 예배 내적인 요소보다는 예배 외적인 요소에 공을 들이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시대감각을 가진 건축물과 시대의 흐름을 담아내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많이 약화되거나 상실된 예배가 흐르기 시작한다. 이러한 예배는 마치 기초와 중심이 부실한 건물과도 같다. 예배의 기초에 균열이 생겼다. 이로 인하여 조그만 문제가 발생되어도 교회의 중심이 흔들리기 쉽다. 예배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힘과 성품이 메말랐기 때문이다. 예배가 삶이되고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할 예배의 중심이 흔들리면 삶의 중심 역시 흔들린다. 교회의 건강모드보다는 성장모드에 중심을 내리고 세워지고 있는 예배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그 근본 원인을 진단해 본다.

1. 신념과 믿음을 혼동하다.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신앙인의 기초가 흔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반석으로 비유한다. 그 이유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사람의 내면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 아니다.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신념은 다르다. 그 문자적 의미부터가 그렇다. 신념(信念)은 믿을 신(信), 생각할 념(念)이다. 그러니까 신념이란 자신이 생각한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념이 믿음보다 강조되어지는 예배는 폭탄 같은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데”(롬 1:17) 드려지는 예배가 믿음보다 신념이 강하게 흐른다면 낭패이다. 이런 예배에는 복음은 악세사리가 되어 등장한다. 악세사리는 두드러지게 나타는 나지만 핵심과 본질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므로 악세사리화 된 복음은 표면적인 프로그램처럼 드러난다. 그러므로 선교는 전시효과같이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예배의 중심은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용기를 북돋아주고, 정신적 육체적 치유를 보장해 주기도 한다. 사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로서의 복음과 진실로 연합된 예배에는 자신이 영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짐으로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어나는 부분들이지만, 이렇듯 사람의 신념에 의해서 조정되어지는 흔들린 예배로 인하여 생긴 균열 사이로 세상의 누룩과 가치가 들어간 것이다.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d로 충만한 예배와는 달리 신념으로 충만된 예배는 예배를 건축으로 비유할 때에 시멘트에 소금기 있는 바다모래를 썩은 것과 같다. 이러한 아파트들은 건축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건물에 금이 가고 안전에 위협을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신념이 믿음보다 강하게 나타나는 예배는 이미 복음에서 벗어난 흔들린 예배이다. 예배가 흔들리면 삶이 흔들린다. 그러한 예배로 세워진 교회는 세상이 그 결과를 박혀주는 뉴스거리를 만드는 아픈 결과를 만들어낸다.

2. 믿음은 긍정이지만 긍정은 믿음이 아니다.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에서부터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로 이어지면서 긍정신학의 타당성을 성장과 성공과 번영으로 확인하려했던 이들의 끝을 보면, 주님이 그렇게도 보기를 원하시는 열매를 보기가 어렵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에서 위대한 일을 하였어도 주님의 관심은 일이나 공적이 아니라 열매에 있다. 그날,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에 열매가 없어서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나이다”(마7:22) 변명 할지라도 돌아오는 것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는 책망뿐 주님의 교회는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는 고백을 반석 삼아 그 위에 세워졌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태복음 16:17).

그러므로 베드로의 고백은 베드로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 고백을 알게 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알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반석’ 위에 세워졌기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이 말씀의 실체는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신의 이념과 철학을 중심으로 뽑아낸 자기복음 안에서 세워진 신념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믿음의 주님이 주신 믿음을 선물로 받은 신자에 의해서 세워진 믿음의 공동체이어야만 한다.

로버트 슐러가 세운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 Ministries)는 적극적인 사고를 통한 긍정신학의 바람을 일으켰고 TV설교 방송 프로그램인 'Hour of Power'은 고정 시청자만 2,000만인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그 긍정신앙, 번영신앙은 그 기반을 적극적인 사고인 신념에 두었기에 재정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법정에 파산보호신청을 내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 건물은 케톨릭 제단에 매각되었다. 믿음이 결핍된 신념의 한계는 가족 간의 불화와 교회의 분열을 일으켰다. 자아가 중심에 흐르는 신념은 믿음, 소망, 사랑을 담기에는 이미 용량이 부족했던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가장 강력한 적이 오늘의 바알임을 깨닫지 못한 긍정신앙과 번영신앙의 중심에 웅크리고 있는 바알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신념은 믿음으로 반응을 하여야 할 신자들에게 믿음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될 수 있어도 믿음과는 결코 대치될 수 없는 것이다. 믿음보다 신념이 강조되는 예배 속에는 포스트 모던이즘이 만든 신흥종교와 같은 뉴에이지 정신이 들어와서 누룩처럼 퍼지기 쉽다. 경계하여야 한다. 알고보면 긍정신앙의 논리는 기복신앙보다 강하다. 자신의 혼적인 신념이 자신 안에 내재된 영적인 믿음을 앞서있는 것도 모를 정도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원하는 기준에 따른 긍정적인 생각들을 입으로 선포하고 그 씨앗 같이 선포된 말대로 열매를 맺을 것에 대한 긍정적인 신념으로 달려간다. 문제는 그 중심에 보이지 않게 꿈틀거리는 것의 실상인 욕심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욕심이 만들어낸 빛 좋은 개살구 같은 비전들 속에는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로 끌어 올리려는 뉴에이지 영성이 강하게 흐르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을 대체시킨 신념이 춤을 추는 예배에는 하나님의 초유의 관심인 영혼이 주님께 돌아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알고 그 삶의 변화를 통하여 다른 사람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사랑과 생명에 의한 재생산의 역사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기란 그 영성의 본질상 기대하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예배하여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복음이 회복되면 성령의 역사는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구하기 전에 복음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복음은 예배의 뿌리이자 그 프레임(frame)이기 때문이다.

3. 기복(祈福)신앙이 형통신앙을 대신하다

어느 문화권이든지 기독교가 뿌리내리는 과정에는 복음의 다림줄이 흔들리지 않는 범주 안에서 기복이 강조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빈곤에 찌든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고난을 이야기 하기란 쉽지 않다. 우선 그들에게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산과 들에 날아다니는 새도 먹이시고 아름다운 꽃들도 자라게 하신답니다.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당신의 이름을 아셨던 하나님은 당신의 삶에 필요를 아시고 채우시는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자녀도 잘됩니다. 장사도 잘됩니다. 행복해 집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삶에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당신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정도로 나누어야 한다. 이것이 영혼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성품 안에 나오는 눈높이 전략이다.

한반도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의 사진을 보면 매우 가난한 조선이었다. 그 당시 조상님들께 빌고, 정한수 떠놓고 신령님께 빌던 기복신앙(祈福信仰)에 물들어 있던 조선인들에게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는 메시지는 영혼구원을 위한 성육신적인 눈높이 메시지였다. 만약에 한국기독교 초기의 선교사들이 세례요한처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쳤다면 “미친 코쟁이들의 기분 나쁜 소리한다”고 수군거리면서 복음에 등을 돌렸을 것이다. 세례요한이 400년간의 영적인 암흑기 속에서 종교적인 잠을 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을 깨웠던 메시지를 조선 사람들에게 외치기에는 삶의 상황(Context)이 달랐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복(祈福)신앙적인 눈높이 복음이었지만 미개한 조선 땅에 들어와서 확실한 복음적 삶을 살았던 초대교회 선교사들의 삶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었기 때문에 강력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다. 복음은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삶의 나눔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파편으로 동방예의지국 조선 땅에 떨어졌지만 그들을 통해 드러나는 삶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문화적인 장벽을 넘기에 충분한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그러한 선교사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워진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이웃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 거룩한 산 제물로 자신을 드리는데 있어서 자연스러운 고백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던 민족대표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이 복음의 사회적 책임을 자각하는 성숙한 신자들이 세워졌다는 것에 대한 실증이다. 이는 십자가 복음 안에는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강력한 믿음을 생성시키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의(義)가 진리와 만날 때, 성령께서는 그 진리로 하여금 성도 자신을 풀고 이웃과 세상을 풀 수 있는 믿음의 힘을 뿜어내는 주기 때문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17)

한반도에 기독교가 이러한 눈높이 전략 안에서 전래되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복음의 능력으로 인하여 오늘날 세계 기독교가 주목하는 경이적인 성장을 하였다.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나 기독교 문화가 뿌리내려지는 속도에 비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더욱 빠르게 성장됨으로 인하여 삶의 방식(ways of life)으로서의 문화에 의해서 맺혀져야 할 복음의 열매가 극상품으로 맺혀지기보다는 상품으로서 환영받지 못하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는 부족한 기독교로 드러나게 되었다.

세상이 선교의 과제를 던져준다는 말이 있듯이 세상이 던져주는 교회를 향한 말들을 겸손히 경청한다면 그들의 강한 비판의 소리들의 내면에 흐르는 영혼의 부르짖음인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소리, 바울이 환상 속에서 보고 들었던 마게도니아 인의 영혼의 부르짖는 소리로 들려져야 한다. 이렇게 들을 수 있는 성숙된 귀가 열려진다면 이미 흔들렸던 예배의 중심이 잡혀지기 시작할 것이다. 교회갱신은 예배갱신에서 시작되며 예배갱신은 교인갱신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성장에서 성숙으로 가는 첩경을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기복중심의 신앙에 물든 한국 기독교는 교회건강 보다는 교회성장에 쏟는 열심히 특심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 안에 연필심과 같은 진정한 복음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로인하여 드러날 수 밖에 없는 현상들은 교회를 향해 기대치를 가졌던 세상이 교회를 오히려 염려하는 형국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들 속에서 성경이 말하는 형통이 과용(過用) 또는 오용(誤用)된 언어로 비판의 화두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형통이다. 이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형통에 해당하는 사전적 의미를 알아야 한다. 히브리어로 형통 즉 ‘사칼’의 의미는 “‘깨닫다, 지혜롭게하다, 신중하다’라는 뜻으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어떠한 외부의 압력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한 상태를 말한다”(두란노 비전 성경사전)고 한다. 이 점에서,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선교의 핵심 주제인 평강(Shalom)과 같은 통(通)이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는 우리의 영혼이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세워지기를 원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계시다. 이것이 영혼이 잘된 상태이고 축복의 통로로 세울 수 있는 강건한 모습이고 성숙된 모습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말이다.

건강한 예배, 성숙한 예배에는 자신의 전부를 산 제물로 드리는 헌신이 있다. 이 헌신은 하나님과 의에 대해서는 살고 자신과 세상과 사단에 대해서는 죽었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보면 복에 대하여서는 죽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것을 말한다. 복은 따라오는 것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복을 따라가면 그 복이 우상이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다. 복은 복받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면 기독교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물론,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었듯이 믿음의 이스라엘인 우리도 복을 받을 특권이 있다. 하나님 또한 복주기를 기뻐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받은 복에 눌리지 않고 누리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갈릴리 바다와 같이 헬몬 산에서 흘러내리는 정갈한 물을 요단강으로 흘러보내는 나눔이 있다. 그것이 갈릴리가 생명력이 풍성한 비밀이다. 사해는 위로부터 받아서 흘려보낼 수 없는 호수가 되었다. 그래서 죽은 바다(Dead Sea)라고 부른다. 갈릴리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축복의 통로이다. 형통의 주인공이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생각은 형통한 삶을 누리는 존재로 세워지는 것이다. 그 존재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예배자이다.

내가 사는 미국 뉴저지 포트리(Fort Lee)는 뉴저지와 뉴욕 맨해튼을 잇는 조지워싱턴 다러를 당하여 끊어진다면 맨해튼은 물론 뉴 잉글랜드 쪽 주민들은 엄청난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 물류의 흐름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다리와 같은 사명을 받은 예배자이다. 라틴어에서 제사장을 폰티펙스(Pontifex)라고 하는데 이는 영어에서 Bridge Builder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세상 간에, 사람과 사람 간에 다리를 놓는 사람이다. 그 다리 위로 하나님의 복이 유통되어지는 왕권을 가진 제사장, 예배가 삶이되고 삶이 예배가 된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예배자를 찾으신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2-3).

문제는 번영신학이나 긍정신학의 초점이 물질로 기우러 져있다는 점이다. 복이 초점이 되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는 신부가 신랑의 재산이 좋아서 결혼하려는 것과 같다. 그러나 복음이 말하는 복은 예수의 피로 인하여 오는 것이다. 앵그로섹선 언어에서 피(Blood)의 어원적인 기원은 복(Blessed)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고전 10:16) 예수는 흘리신 보혈로 인하여 우리가 저주로부터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 예수의 피로 인하여 막혔던 관계가 회복되어졌다. 이것이 보혈로 인한 관계의 회복으로서 영이신 하나님과 영통하면 사람과 인통(人通)하고 물질과 물통(物通)하게 되는 형통(亨通)의 은혜이다. 요셉은 형통의 대표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그 당시, 세상의 중심을 상징했던 애굽 사람들의 눈에도 여호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을 알았다. 그리고 그가 그 나라에 없어서는 안될 축복의 통로임을 인정하였다. 그 이유는 요셉의 예배가 삶이되고 삶이 예배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창 39:2-3).

참된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서 예배를 통하여 온다. 성경에 나오는 복(베라카)은 "바라크"에서 온 말로 예배, 찬송, 기도, 감사에 동일한 단어가 사용된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복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인 우리가 예수의 피 공로를 의지하고 복받는 자리에 들어가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bless the Lord)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 땅의 인생들을 축복하는 축복의 통로로 세움을 받은 그 자체가 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은 예배자인 우리가 복음에 의해서 복덩이가 된 것이다. 자신이 복덩이 임을 진실로 알면 복을 따라가지 않는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만 바로 알면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기 12장 1절에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될지라”고 하셨던 것이다. 내가 복이 되면 복덩이가 된 것이다. 이것이 형통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형통보다 복 혹은 축복을 강조한다면 이는 존재의 변화가 없이 소유하고 싶은 욕심에서 복을 물질로 한정하여 생각하는 가치가 그 마음에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를 기복주의에 빠지게 하는 함정이다. 기복신앙이 형통신앙을 대체시키면 사단의 대체전략에 넘어간 것이다. 복음을 상실한 예배에서는 사단이 대체전략으로 들어와 사람들의 눈에 좋은 짝퉁들을 이 짝퉁들은 시대를 따라 옷을 갈아 입니다. 21세기 포스트 모던시대가 낳은 뉴에이지 종교는 이 시대에 새로운 옷을 갈아 입은 무속의 영이 흐른다. 그것이 오늘날 물질에 초점을 둔 번영 신앙이나 자기 신념에 기반을 둔 긍정신앙 안에는 뱀이 꽈리를 틀고 공격할 자세로 앉아있다.

“주님을 찾는 사람은 복이 있어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시 34:10, 새번역)

날마다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믿고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는 십자가가 형통의 지름길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4. 치유를 구원으로 오해하다

누가복음 17장 11절 이하를 보면, 나병 환자 열 명이 고침주심을 바라고 주님께 긍휼을 구하였다. 주님은 율법에 기록된 절차를 존중히 여기시며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그들이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에게로 가는 도중에 깨끗함을 받았다.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대부분은 제 갈 길로 갔다. 오직 한 사람만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서 주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드렸다. 그 때 주님은 물으셨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 온 자가 없느냐”하시면서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선포해 주셨다. 육신의 치유를 넘어선 영혼의 치유인 거듭남을 선포해 주셨다.

치유에는 육신의 치유와 정신의 치유와 상한 감정의 치유와 인생관계의 치유가 있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치유가 있다. 죽어 있는 영혼을 살리는 영혼의 치유이다. 구원이다. 예수께서도 이 땅에서 가장 핵심을 두고 사역하신 것이 영혼을 살리는 전도였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마가복음1: 38)

자신의 병만 낫고 자기 갈 길로 간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은 육은 구원받았으나 그 영혼은 구원받지 못했다. 이와 같이 치유가 구원보다 강조되는 예배에는 이러한 아쉬운 현상이 일어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8:22-23)

이 말씀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8:20)는 말씀 이후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면에서 심각한 메시지가 흐르고 있다. 오늘날 능력대결(Power Encounter)의 역사 속에는 죽음을 앞에 둔 환자들이 치유되고, 청각 시각 장애인들이 장애에서 풀려나고, 정신적으로 눌려 있는 자들이 해방을 얻기도 하는 예배현장들이 여기저기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는 일어난다 할지라도 영혼의 열매가 맺혀지지 않는 예배나 집회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불법집회라고 엄중히 선포하셨다. 그 이유는 그 모임이 주의 이름으로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났어도 영혼이 돌아오는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집회나 예배가 하나님의 관심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사람의 관심과 필요를 채우는 데에 초점을 맞출 때 그것이 불법집회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목적으로 하는 집회인가? 하나님을 수단으로 하는 집회인가? 라는 질문에서 하나님 보다 치유가 앞서있다면 그 집회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불법집회이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열매는 크게 영혼의 열매와 성품의 열매로 보면 된다. 치유의 은사가 넘쳐나는 집회라고 할지라도 그 집회에 하나님의 임재의 여부를 알 수 있는 기준은 그 집회에서 치유를 받은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되어지는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분명할 수 있다.

오늘날 마지막 때에 성행하는 이단이나 이단성이 있는 예배나 집회에는 초자연적인 역사는 일어나지만 하나님의 성품에 흐르는 가치와 정신은 찾아볼 수 없다. 더욱이 주님이 오신 목적인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 단체의 목적이나 집회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사회봉사나 선교는 긍정적인 여론과 선전효과를 위한 수단으로 소통되기도 한다. 이단도 열매의 중요성은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겉과 속이 다른 짝퉁 열매이다.

5. 찬양보다 음악에 집중한다

찬양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지으신 목적 중에 하나이다(사43:21). 찬양에는 노래도 있고, 악기 연주도 있고, 선포(proclaim)도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찬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역사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라면 예배는 하나님의 성품에 초점을 두고 그분을 높혀드리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찬양은 예배로 이어주는 다리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시편 111:9)

특히 시편 111편 9절을 통해서 보면 찬양과 예배가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그림처럼 보게된다. 찬양의 가장 위대한 테마는 십자가에서 인류를 구속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이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고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라고 노래하였다. 주님이 세우신 피의 언약으로 인하여 지성소에 들어가 보좌로 임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발등상 앞에 업드려 예배하기를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라고 경배하였다. 이와 같이 찬양과 예배의 차이를 이해하고 그 안에 들어가는 음악적 요소와 더불어 표현되어지는 노래와 춤과 악기들의 위상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배보다 음악이 높혀진 예배는 음악이 사람들에게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예배가 아니라 공연이되고 주 안에서의 즐거움이 넘치는 예배가 아니라 사람을 즐겁게 하는 엔터테인먼트(유흥)로 기우러진다. 그야말로 예배는 전인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지 사람을 즐겁게 하는 쇼가 아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디자인된 열린 예배의 경우는 다르다. 불신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동원되는 눈높이 예배의 내용들은 사람들에게 많이 맞추어져 있다. 그들의 마음을 주님께로 끌어올리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예배를 다스리시고 받으시는 하나님은 그 눈높이 내용 자체를 영혼사랑을 위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시기에 그 예배를 기뻐하시고 그 전체를 받으신다. 그러므로 열린 예배 위에 주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다.

그러나 음악이 찬양보다 높아진 예배를 보게 될 때가 있다. 음악은 있는데 찬양이 없는 경우가 바 로 그렇다. 최고의 하나님께 최고의 예술을 드리는 것은 주님을 향한 집중된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예배보다 예술에 무게가 실린 음악적 표현이 찬양으로 드려진다면 그 안에 기름 부으심이 제한되거나 없는 경우도 있다. 찬양 그 자체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보좌임을 항상 기억한다면(시 22:3) 하나님은 음악적인 예술성을 보시기 이전에 찬양하는 이들의 마음을 보신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마음과 예배자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합일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음악적으로는 놀라운 예술성을 지녔다 하더라도 마음은 하나님과 합일이 안 된 이가 찬양을 드린다면 하나님은 감동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감동하지 않으시는 예배는 사람이 감동될 수 없는 예배이다. 예배의 감동의 시작은 하나님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찬양과 경배 운동이 한창 일어날 때에 각 교회들은 앞 다투어서 찬양 팀을 만들었다. 그리고 기름 부으심이 있는 찬양과 경배의 현장에 가서 견학하면서 예배의 디자인과 악기의 구성과 예배 인도자의 멘트까지도 카피해서 자신의 교회에 심는 경우들을 보았다. 심지어는 악기의 브랜드까지 동일한 것으로 구비하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되면 찬양보다 음악이 강조되는 예배를 만들어 가는 위험이 수반된다. 사실상 예배로 연결되지 않는 찬양은 음악적인 표현일 뿐이다. 기름부으심이 없다. 왜 그런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찬양은 하나님의 역사(God’s works)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예배(경배)는 하나님의 성품(God’s characters)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찬양인도자(Praise leader)라는 말보다는 예배인도자(Worship leader)라는 말이 성경적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으면 음악이 찬양보다 강조가 된 예배를 드리게 된다.

6. 은혜와 진리사이에 균형을 잃다

예배는 은혜와 진리라는 실을 날줄과 씨줄삼아서 옷감을 짜는 것과 같다. 만약 날줄과 씨줄의 굵기가 다르다면 짜여진 천이 어떠할까? 그것으로 옷을 해 입으면 쉽게 찢어질 것이다. 온전한 예배자의 모델이셨던 그리스도께서 입으셨던 의(義)의 옷은 은혜의 날줄과 진리의 씨줄이 균형이 잡힌 굵기로 짜여 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누가복음 2:52).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예배에 은혜가 강조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은혜가 강조되는 만큼이나 진리 역시 강조되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귀한 은혜가 값싼 은혜(cheap grace)로 전락되기 쉽다. 오늘날, 기독교의 생명력이 약화되면서 종교화되어가는 이유 중에 하나는 모두가 은혜는 사모하되 진리는 사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받은 은혜가 이웃을 향하여 흐르지 않는다. 흐르지 않는 물이 변질되듯이 은혜역시 그렇게 된다. 가두어진 은혜는 더 이상 새롭지가 않다. 은혜에 익숙해지는 만큼 감동은 사라진다. 더 강력한 은혜가 와야 감동을 느낄뿐이다. 은혜중독이다.

주님은 은혜만 충만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진리만 충만하지도 않으셨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다. 우리의 모델이신 그분이 우리 안에서 살아계신다는 확실한 증거는 우리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네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바로 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할 때 우리 안에 성령과 말씀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은혜로 되어지고 진리로 살아지는 것이다. 능동이 아니라 피동이다. 내가 죽고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사는 바꾸어진 삶이다. 외국 공항에 가면 환전소(Foreign Currency Exchange)가 있다. 그곳에서 환전을 해야 그 나라에서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다.

우리가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왕국이 우리 마음에 세워졌을 때 바로 그분께서 왕으로 다스리실 수 있도록 내가 주인으로 앉아있던 자리를 주님의 보좌로 내어드려야 하듯이 그 중심이 바꾸어진 삶인 것이다. 이것이 은혜를 받은 이가 은혜를 주신 분에 대한 자연스러운 도리이다. 그리고 그분이 그 인생의 중심에서 진리로 다스릴 때 그 다스림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삶을 살 때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가 그 내면에서부터 흘러 나온다. 그 삶 자체가 예배이고 그 삶 자체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선교이다. 또한 이것이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열매 맺는 삶이다.

오늘날의 예배현장을 돌아보면, 복음이 사라져 버린 것만 같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예배를 삶으로 풀어나가야 할 예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배가 복음 안에서 풀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삶을 예배로 풀어나가야 할 삶의 현장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배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이 말라있어서 예배와 삶에 이원화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까 지친 영혼의 모습으로 예배현장을 찾는다. 은혜로 힘받고 진리로 살아갈 때에 승리한 이들이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드리기 위해서 주님의 전을 기쁨으로 찾는 이들이 줄어들고 있다. 그러니까 예배를 ‘드리기 보다는 받으려는 자세’로 나온다. 십자가가 강조되는 복음을 선포하면 부감을 느끼고 스트레스만 가중된다는 불평을 털어놓는 이들이 늘어간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선포되는 신언성을 가진 말씀이 선포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말을 설교자들을 통해서 들을 수 있는 실정이다. 그러니까 설교자 역시 편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양가 없는 예화만 늘어놓게 된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찾는 자는 결코 그분을 발견할 수 없다”라고 한 토저(A. W. Tozer)의 말처럼, 오늘날의 예배현장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과 상관없이 예배하기에 진정한 은혜로 충만해져서 강력한 사랑이 흐르는 진리로 자신을 풀고 세상을 풀어가는 축복의 통로의 사명을 감당하는 이들이 줄어들고 있다. 은혜와 진리에 균형이 깨어졌고 그 자체에 대한 복음적 이해에 변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배갱신을 해야 교인갱신이 되고, 교인갱신이 되어야 교회갱신이 되고, 교회갱신이 되어야 사회갱신이 되어짐을 알고 복음을 잃어버린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예배가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것은 마치 건축에 철골구조를 사단이 빼어가기 때문이다. 복음을 도적질해가는 사단이 마지막 때가 오는 것을 입증하는 최후적인 발악인 것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동영상 / 여성 목회자들의 찬양실력은?


▲동영상 / 김진호 목사 세미나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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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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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열렸다. 첫강의를 시작하기전 김수경 안경순 권케더린 목사가 찬양을 인도했으며, 사회 장경혜 목사(부회장), 기도 이승진 목사(교육분과), 특송 뉴저지 여성 목회자들, 강사소개 전희수 목사(회장), 강의 김진호 목사, 합심 통성기도. 오찬기도 이종명 목사의 순서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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