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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장로교 동부한미노회, 고 이승만 목사 추모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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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ㆍ2015-0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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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승만 목사 추모예배가 1월 25일(주일) 오후 5시 뉴저지 필그림교회(양춘길 목사)에서 열렸다. 추모예배는 아시아인으로 최초로 총회장을 역임한 미국장로교(PCUSA) 한인교회 전국총회가 후원하고 동부한미노회가 주관했다. 고 이승만 목사의 소천후 고인이 살던 아틀란타에서 가족 추모예배가 열렸으며, 통합교단의 주최로 한국에서도 추모예배가 열린 바 있다.


▲동영상 / 고 이승만 목사 추모예배

이승만 목사는 미국 주류교단인 미국장로교 총회장과 미국교회협의회(NCCC) 회장 등 어쩌면 한인목사로서는 다시는 보기 힘들 신기원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런 자리의 명예보다 이승만 목사는 순교자 아버지 목사와 어머니의 육신이 묻힌 북한을 넘나들며 남북화해의 전도자로 살았던 수고를 높이 평가받았다.

동부한미노회가 주관한 추모예배에서는 노회를 은퇴한 4명의 목사가 예식을 주도했다. 김관선 목사의 기도, 조덕현 목사의 설교, 윤명호 목사와 김용주 목사의 추모사를 통해 이승만 목사의 생애를 조명했다. 특히 70년 친구인 윤명호 목사는 눈물로 친구를 추억했다.

조덕현 목사는 고린도후서 5:17-19를 본문으로 "화해의 순교자"라는 제목의 말씀을 통해 진정한 화해자 였던 예수님과 바울의 생을 조명했다. 그리고 흑백 화해의 삶을 산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남북한의 화해의 삶은 산 이승만 목사를 조명했다. 조 목사는 이승만 목사가 북한을 방문하고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모두에게 비난을 받았던 사실을 소개하며, 화해의 복음을 결고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승만 목사가 뿌린 씨는 언젠가는 거두는 날이 올 것이다고 강조했다.

동부한미노회의 노회장이자 영적 알람인 김진호 목사는 "이승만 목사의 추모모임이 단순한 추모가 아니라 그 어른이 미국장로교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흘려보내주소서"라는 마음으로 기도했다며, "미국장로교 전체 흐름과 노회의 흐름안에 이런 화해의 역사, 복음안에 있는 타협의 아름다운 공간이 보여지는 그런 열림이 오늘 추모예배를 통해서 열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고인과 70년 친구 윤명호 목사가 "나의 친구, 승만!"이라는 제목으로 한 추모는 구체적이었다. 15살부터 평양 성문밖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했으며, 당시 사모 이혜선 장로는 주일학교 학생이었다. 전쟁중 B29가 폭격을 받고 윤 목사가 위기에 처했을때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 이승만 목사라고 말했다. 2000년 미국장로교 총회에 총회장으로 당선되었을때 정견발표를 통해 "우리가 받은 복음의 능력을 우리가 믿는 복음의 진리를 오늘 세상의 교회가 아무리 변한다 하더라도 그 진리를 찾자, 그리고 지키고 보호하고 전하자"라고 전했다고 기억했다. 윤 목사는 "그는 갔지만 사랑하는 친구의 남겨진 뜻을 받들어 우리 모두가 교리나 이데올르기 다 잊고 오직 한가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안에서 화해하고 하나가 되었으면 한다"고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동영상 / 추모 1 윤명호 목사 "나의 친구, 승만!"

김용주 목사는 "화해를 위한 삶!"이라는 추모사를 통해 목회 초기 시정부와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는데 이승만 목사의 도움을 받은 이야기를 기억했다. 그리고 1993년 백악관에서 열린 종교인 모임에 참가했는데 미국교회협의회(NCCC) 회장을 맡고 있던 이승만 목사가 사회를 보았을때 일화를 기억했다. 이승만 목사는 클린톤 대통령에게 지난해 있었던 LA 폭동의 한인들의 피해를 언급하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데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들이 자행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클린톤 대통령에게 묻고 대답을 요구했다고 기억했다.

추모예배를 통해 통일의 염원을 담은 고인의 생전 설교와 고인의 동생 이승규 장로의 인사도 영상으로 소개됐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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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승만 목사 추모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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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노회장 김진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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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김관선 목사

예수믿는 죄로 중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어렵게 신학교에서 배움을 이어갔지만 그 신학교마저 폐교당하고 1950년 전쟁으로 교회에 대한 박해속에서 사랑하는 아버지 이태석 목사 체포와 순교라고 하는 죽음을 경험했다. 전쟁중에 용케 살았으며,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에 진주하여 안도했지만, 한달만에 유엔군의 후퇴로 모친과 네 여동생을 뒤에 두고, 동생 이승규 장로와 함께 두 형제가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얼어붙은 산하를 갈 바를 모르고 밟은 땅이 부산이었다. 고인은 무슨 영감을 받았는지 해병대에 자원입대했지만 향학열정을 이기지 못해 탈영하고 헌병대에 붙잡혔다. 사랑하는 주님, 저들을 그토록 어려운 고난의 길을 가게하셨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순교자의 자손을 기억하시고 미국유학길을 열어주시고 학업도 마치고 목사로 교수로 미국장로교 중동아시아 선교총무로 직분을 주셔서 동분서주하는 중에 엉뚱하게 북한에 뛰어 들어가 아버지를 죽인 공산당과 손을 잡고 남북의 화해와 통일의 꿈을 품고 북한선교를 도모했으나 양쪽에서 오해를 받았다. 고인은 끝내 화해의 손길을 거두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교훈을 실천했다. 하나님은 모세를 40년간 광야에서 키워주시듯이 고인을 철저하게 키우시더니 끝내 미국장로교 총회장과 미국교회협의회 회장으로 귀한 직분을 잘감당하게 하셨다. 모든 한인교회와 동료목사들에게 위로가 되고 자랑이었는데 동분서주하다가 병을 얻어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병중에서도 강의를 맡아서 하다가 육신의 장막이 무너져서 주님의 영원한 집으로 떠나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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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봉독 남후남 장로(직전 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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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그림교회 남성중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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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조덕현 목사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로서 공산치하에서도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미래의 꿈을 가지고 목사로서의 소명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다. 그 가운데도 이승만 목사는 남북화해를 위해 분단의 조국이 평화적인 통일을 이루기위해 외로운 길을 한평생 가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남북 통일의 화해의 선구자로서 그리고 주님의 복음의 사역을 위해 혼신을 다했다.

이승만 목사는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화목의 사명을 우리들에게 말씀해주고 있다. 그는 화해를 위해 곧은 길을 갔고 변함이 없는 길을 갔다. 이 목사님은 조국 분단의 아픔속에서 남북을 20여차례 왕래하면서 좌우로 치우지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서 통일의 역사를 이루어지기를 소망했다. 북한을 내왕하면서 이승만 목사가 말하면 북한을 찬양한다고 소위 보수주의자들은 그를 용납하지 아니하고 반공주의자들은 그를 배척했다. 반면 소위 종북이나 친북이나 과격한 진보주의자들도 이 목사가 너무 온건하다고 용납하지 않았다. 이 목사는 설자리를 잃어버렸다.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생각해 본다. 그는 흑인으로서 흑인의 아픔과 혹독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고도 그는 평화를 주장했다. 어느 쪽에도 서지 않았다. 과격한 사람들에게는 연약한 사람으로 온건한 사람에게는 격려하기 원했다. 그리스도 복음적인 것에 있어서 공존하는 길만이 사는 길인데 공존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끝내는 자기의 희생을 통해 흑과 백이 융합하는 역사를 이루었다. 하나님이 킹 목사를 사용하셨다.

이승만 목사는 평생을 화해의 복음을 위해 길을 갔다. 평양을 다녀오는데 비난을 받았다. 그것이 이승만 목사가 갈 수 있는 길, 이승만 목사 답게 사는 길, 이 목사를 잊을 수 없는 길이고 화해의 사건은 언젠가는 하나님이 열매를 거두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신앙이라고 믿는다. 과격한 위치에 선다는 것은 정치의 문제이다. 정치는 변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에 반공소리가 점점 없어진다. 반공을 사용하면 촌스러운 사람으로 취급된다. 뿐만 아니라 평양의 역사도 변하는 조짐이 오고 있다. 이승만 목사는 외길을 갔다. 그것은 화해를 위해 자신을 우리들에게 바쳤다. 그는 성공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주어진 일을 열심히 살아갔다.

이승만 목사에게서 조국통일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내용이 담긴 카드를 매년 받았다. 끝나지 않은 길을 갔다. 그러나 뿌려진 씨는 언젠가는 우리들이 거두는 날이 올 것이다. 화해의 복음을 결고 쉬운 것은 아니다. 신념적인 것이기에 인간의 힘으로서는 화해의 역사는 결코 성취될 수 없다. 화해의 길은 고독한 길이고, 비난을 받는 길이고, 어쩌면 성공할 수 없는 길이다. 복음을 위해 외로운 길을 가야 한다. 우리가 그 길을 가는 이유는 부활의 사건을 통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평화의 복음, 화해의 복음을 이룬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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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약력 소개 사무총장 조문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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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승만 목사 약력 및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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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찬양 참가한 노회 목사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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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1 윤명호 목사 "나의 친구, 승만!"

70년 친구이다. 고향친구이자 교회친구로 15살부터 같이 평양 성문밖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우리 둘은 학교가 끝나면 교회에 같이가서 찬양하고 기도했다. 공산당의 감시와 핍박이 심할때면 우리는 담요를 뒤집어 쓰고 기도하고 찬양했다. 전쟁이 나고 10월 평양에 매일 B29가 맹폭을 가할때 어느 날 뒤에 있는 교회가 폭파되고 우리 집 담벼락이 무너져 폭풍속에 사경을 헤맬때 내 이름을 부르며 찾아들어온 것이 승만이다. 승만이는 친구이자 내 생명의 은인이다.

전쟁이 나고 이남에서 다시 만났다. 승만이가 56년 1월 여의도 공항을 떠날때 동대문 옆 시온감리교회에서 환송예배를 드렸는데, 고 박태선 박사가 설교했다. 승만이가 마지막 답사를 하면서 뜨겁게 부른 찬송이 "내 주 예수 주신 은혜"이다.

미국에서 다시 만났다. 승만이가 맨하탄에서 미국장로교 총회 세계선교부 중동지역 총무를 하고 있을때 만났는데 78년 이북에 다녀왔다고 했다. 이집트에서 모스코바에 있는 강양호 서기장을 통해 방북을 청원했더니 그가 주선해서 평양에 28년만에 들어가 가족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 묘에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당시는 이북을 생각하지 못할때이다. 그런면에서 승만이는 남북소통의 물고를 턴 사람이다. 정부도 사회도 생각을 못할때 남북의 물고를 턴 사람이 승만이다. 봉수교회 지은 것도 승만이 역할이 컸다.

2000년 6월 미국장로교 212차 총회에 총회장으로 출마했다. 사변이 일어난지 50년후 고향을 떠난 실향민 소년이 미국장로교 총회장으로 당선됐다. 당시 5명이 총회장 후보가 나왔다. 당시 승만이는 무슨 정견을 발표했는가 하면 "우리가 뿌리를 찾자. 그리고 뿌리를 지키자. 그리고 뿌리를 전하자"라는 정견을 발표하고 총회장으로 당선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가 받은 복음의 능력을 우리가 믿는 복음의 진리를 오늘 세상의 교회가 아무리 변한다 하더라도 그 진리를 찾자, 그리고 지키고 보호하고 전하자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친구의 일념이었다.

사모 이혜선 장로는 평양에서 이웃에서 살았다. 당시 혜선 사모는 주일학교 학생이었다. 친구가 소천한 후 지난 월요일 통화하는데 "승만 목사는 욕심장이야요"라고 말했다. 무슨 욕심이 많았느냐고 물으니 병원에 입원하기 직전까지 여러 교회에서 설교하고 가르치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28일부터 열이나서 대학병원에 입원했는데 급성골수암으로 진단을 받았다. 승만이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내에게 "여보, 냉수 한그릇을 큰 그릇에 가져와"라고 했다. 마시는 줄 알았는데 손을 넣으며 당신도 손을 넣어라고 해서 서로 손을 잡고 "당신은 나의 영원한 부부야"라고 말했다.

승만이는 매년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왔는데 날이 갈수록 통일이 요원한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지난 1월 2일에는 입원해서 정중하게 세배한다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이 연초에 화해의 순교자, 화해꾼 승만이는 갔다. 그는 갔지만 사랑하는 친구의 남겨진 뜻을 받들어 우리 모두가 교리나 이데올르기 다 잊고 오직 한가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안에서 화해하고 하나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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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2. 김용주 목사 "화해를 위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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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목사가 언급한 1993년 백악관 모임 사진, 왼쪽 중간 끝이 고 이승만 목사

1985년 3월, 뉴저지 레코드지에 보도가 되었지만, 초기 목회를 시작할때 잉글우드 클립에 초등학교 건물을 85년 초에 인수했다. 계약할 때 시장과 마주앉아서 계약하고 돈을 지불했다. 건물을 수리하려고 하니 주민들이 나서 건물에 손을 못댄다고 막는다. 지역에 교회가 하나도 없으며, 교통난이 생긴다고 반대했다. 황당한 일이 벌어졌으며 뉴욕의 일간지들이 보도했다. 특별한 대안이 없어 기도하는 가운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뒤에서 힘이 강한 법인이 나타나 우리를 도왔다. 그리고 시로 부터 건물구입비등 모든 비용을 다 받아냈다. 알고보니 미국장로교 동북부대회가 뒤에서 해 낸 것이다. 한참후에 사랑하는 이승만 목사님이 이 일을 주도한 것을 알게 되었다.

1993년 제가 북남미 한인장로교단 교단장을 맡고 있을때, 이승만 목사님은 미국교회협의회(NCCC) 회장을 맡고 있었다. 백악관에서 3월 4일 백악관에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많은 미국대표 목사들과 대형버스를 타고 백악관에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클린톤 대통령 옆에 이승만 목사가 앉아 있었다. 이 목사가 사회를 하면서 회무를 인도했다. 이승만 목사는 클린톤 대통령에게 지난해 있었던 LA 폭동의 한인들의 피해를 언급하며 "약한 자가 조건도 죄목도 아무 이유도 없이 저렇게 처참하게 당했다. 왜 한국사람을 말살하는 직업을 하도록 정부가 그대로 두는가" 하면서 답변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클린톤 대통령은 대단히 미안하고 괴로운 표정으로 이를 설명했다.

오늘 여러 목사님들이 이승만 목사님의 조국의 화해를 말씀했다. 그런데 이 목사는 이날 백악관에서 미국의 화해를 이야기했다. 조지아에 가보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무덤이 있는데, 물속에 무덤이 있다. 물은 언덕이 없다. 어디에 갔다 놓아도 물은 평행이다. 물속에 킹의 관을 놓았는데 하얀 백색이다. 부활의 모습을 그리면서 관을 하얀 색으로 한 것 같다. 하나님의 나라의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은 고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속에 관을 놓았다. 그러나 땅에서는 인간의 조건을 가지고 표를 달고 계급사회를 만들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때에 저렇게 아름다운 부활의 색을 입을 것을 예견하면서 관을 그렇게 놓은 것 같다.

이승만 목사님이 그런 의미를 담고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데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들이 자행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클린톤 대통령에게 물었다. 대통령은 구구한 설명을 하면서 죄송한 생각을 담아 알려주는 것을 듣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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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김상수 장로(필그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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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 양춘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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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승만 목사 추모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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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기도 정영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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