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일 목사 부부의 사랑이야기가 뉴욕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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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ㆍ2008-08-15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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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으로 헤이되어 있는 오늘날, 효도와 부부간의 사랑이라는 귀한 가치를 몸으로 실천하는 황경일 목사(계명장로교회)의 이야기가 뉴욕교계에 잔잔한 감동으로 퍼지고 있다.
황경일 목사와 결혼후 38년을 같이 살아 온 황연자 사모는 결혼후 3년만에 쓰러져 긴 투병생활을 계속해 왔다.
병이 악화된 황연자 사모는 1년전에는 합병증으로 병원에 입원해 이식수술등을 받고 사경을 헤매이기도 했다. 황 사모는 심장이 정지해 응급조치를 받기도 했으며, 의식이 없는 상태로 지내기도 했다. 고비를 넘긴 황 사모는 현재 부르클린 소재 재활원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합병증으로 오른쪽 다리 무릎 아래를 절단했다.
황 사모가 건강을 회복한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이시겠지만, 황경일 목사의 정성어린 사랑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8월 14일(목) 오후 만난 황연자 사모는 "우리목사님 같은 분은 없다. 너무 나에게 잘한다. 목사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 미안해서 몸둘바를 모르겠다. 목사님은 피곤한 가운데에서도 짜증한번 안낸다"라며 "재활운동할때 힘들지만 남편생각을 하고 한번 더한다"고 말했다.
황경일 목사는 30여년간 사모의 병뒤처리를 했지만 특히 아내가 생사의 위기에 있던 지난 1년간은 병원에서 자며 아내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밥도 먹여주고, 머리도 빚겨 주었다. 황 사모는 현재 4살짜리 체력에서 회복되고 있다.
황경일 목사는 "병원에서 직원들이 의무적으로 일을 하기에 환자들을 시원하게 보살펴 주지 못한다. 다이퍼 때문에 아내의 피부가 헌다. 그래서 10분이라도 더 병원에 있게 되고 결국 병원에서 자게된다"고 말했다. 아내에 대한 사랑이 깊이 담겨있다.
황 목사가 3개월간 의자에서 자며 아내를 지키는 모습을 본 병원직원들도 마음을 열었다. 간호사는 예외적으로 새벽에 황 목사를 위해 침대를 가져다 주는 편의를 주기도 했다.
30여년의 투병생활을 통해 14여번 수술을 한 황 사모는" 6백만불의 여자"라고 불린다. 황경일 목사는 "제발 아내를 환갑후에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는데 응답을 받았다"고 하나님께 감사를 돌렸다.
황경일 목사는 "아내를 중매로 만났다. 하지만 71년 결혼하고 겨우 몇년만에 아내는 쓰러졌다. 어린이날 아이들과 나들이를 하던 아내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았다. 회복되는가 했던 아내는 가을에 다시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약을 먹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알고보니 디스크였다. 일을 하고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아이들은 대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밥을 해서 애들을 먹이고 아내를 돌보는 일을 계속했다. 아내를 낮게 해주기 위해 유명하다는 모든 한약방을 다 뒤졌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지난날을 회고했다.
결혼할 당시 황연자 사모는 예수를 안믿었다. 하지만 투병중 예수를 믿게 된 황 사모는 택시를 타고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가서 기도를 받기도 했다. 반면 황 목사는 모태신앙이었다. 할아버지쪽 계보에는 목사와 장로도 있었다.
아내의 투병속에 황 목사의 어머니마저 쓰러졌다. 황 목사는 집에 들어가면 두사람의 변을 치우고 목욕을 시켰다. 목사의 집이니 누가 찾아올수도 있어 투정할 시간도 없이 빨리치워야 한다. 그렇게 두사람의 목욕과 변을 치우면 1시간 반이 걸린다. 황 목사는 매일 그렇게 지냈다. 하지만 이제 92세의 노모는 혼자 화장실에 다니며 건강이 회복된 상태이다.
황 목사는 당연히 해야 할일이지만 말대로 하기 힘든 일들을 어떻게 꾸준히 해 왔을까? 황 목사는 "내 아내이고 어머니이지만 원망하고 싶을때도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화를 내지 않고 사랑으로 돌볼수 있는 힘을 주님께서 주셨다"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황경일 목사는 자신의 과거때문에 두사람이 아프다는 생각을 하고 그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황 목사가 어렸을때 잘나가는 주먹이었다. 그런 어린시절을 보내고 친구형의 인도로 중앙정보부에 들어가 22년을 근무하며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수없이 경험하게 된다.
정보부를 다니며 신학공부를 했으며, 신우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김성광 목사와 같이 강남교회를 개척하기도 했으며, 마지막으로 개포동 동인교회 부목사로 있다가 청빙을 받아 LA로 가다고 잠시 들린 뉴욕에 자리를 잡게 됐다.
황경일 목사는 뉴욕에 온후 타고난 친화력과 남의 어려움을 내일같이 돌보는 인성으로 지지를 받아 뉴욕교협 회장과 목사회 회장을 지냈다.
병상에서 황연자 사모는 "병원에 나와 성지순례를 가고 싶다"고 희망을 나타냈다. 또 "목사님이 너무 잘해주어 짐이 무겁다. 어떤때는 점심과 저녁도 못 먹고 나를 지키는 경우도 있다. 가슴이 아프고 쓰린다. 우리 목사님 처럼 하는 분이 많지 않다"고 남편에게 감사를 돌렸다.
한편 많은 뉴욕의 목회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병원을 방문하여 황 사모를 격려하기도 했다. 황경일 목사: 917-332-7332
ⓒ 2008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황경일 목사와 결혼후 38년을 같이 살아 온 황연자 사모는 결혼후 3년만에 쓰러져 긴 투병생활을 계속해 왔다.
병이 악화된 황연자 사모는 1년전에는 합병증으로 병원에 입원해 이식수술등을 받고 사경을 헤매이기도 했다. 황 사모는 심장이 정지해 응급조치를 받기도 했으며, 의식이 없는 상태로 지내기도 했다. 고비를 넘긴 황 사모는 현재 부르클린 소재 재활원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합병증으로 오른쪽 다리 무릎 아래를 절단했다.
황 사모가 건강을 회복한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이시겠지만, 황경일 목사의 정성어린 사랑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8월 14일(목) 오후 만난 황연자 사모는 "우리목사님 같은 분은 없다. 너무 나에게 잘한다. 목사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 미안해서 몸둘바를 모르겠다. 목사님은 피곤한 가운데에서도 짜증한번 안낸다"라며 "재활운동할때 힘들지만 남편생각을 하고 한번 더한다"고 말했다.
황경일 목사는 30여년간 사모의 병뒤처리를 했지만 특히 아내가 생사의 위기에 있던 지난 1년간은 병원에서 자며 아내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밥도 먹여주고, 머리도 빚겨 주었다. 황 사모는 현재 4살짜리 체력에서 회복되고 있다.
황경일 목사는 "병원에서 직원들이 의무적으로 일을 하기에 환자들을 시원하게 보살펴 주지 못한다. 다이퍼 때문에 아내의 피부가 헌다. 그래서 10분이라도 더 병원에 있게 되고 결국 병원에서 자게된다"고 말했다. 아내에 대한 사랑이 깊이 담겨있다.
황 목사가 3개월간 의자에서 자며 아내를 지키는 모습을 본 병원직원들도 마음을 열었다. 간호사는 예외적으로 새벽에 황 목사를 위해 침대를 가져다 주는 편의를 주기도 했다.
30여년의 투병생활을 통해 14여번 수술을 한 황 사모는" 6백만불의 여자"라고 불린다. 황경일 목사는 "제발 아내를 환갑후에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는데 응답을 받았다"고 하나님께 감사를 돌렸다.
황경일 목사는 "아내를 중매로 만났다. 하지만 71년 결혼하고 겨우 몇년만에 아내는 쓰러졌다. 어린이날 아이들과 나들이를 하던 아내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았다. 회복되는가 했던 아내는 가을에 다시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약을 먹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알고보니 디스크였다. 일을 하고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아이들은 대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밥을 해서 애들을 먹이고 아내를 돌보는 일을 계속했다. 아내를 낮게 해주기 위해 유명하다는 모든 한약방을 다 뒤졌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지난날을 회고했다.
결혼할 당시 황연자 사모는 예수를 안믿었다. 하지만 투병중 예수를 믿게 된 황 사모는 택시를 타고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가서 기도를 받기도 했다. 반면 황 목사는 모태신앙이었다. 할아버지쪽 계보에는 목사와 장로도 있었다.
아내의 투병속에 황 목사의 어머니마저 쓰러졌다. 황 목사는 집에 들어가면 두사람의 변을 치우고 목욕을 시켰다. 목사의 집이니 누가 찾아올수도 있어 투정할 시간도 없이 빨리치워야 한다. 그렇게 두사람의 목욕과 변을 치우면 1시간 반이 걸린다. 황 목사는 매일 그렇게 지냈다. 하지만 이제 92세의 노모는 혼자 화장실에 다니며 건강이 회복된 상태이다.
황 목사는 당연히 해야 할일이지만 말대로 하기 힘든 일들을 어떻게 꾸준히 해 왔을까? 황 목사는 "내 아내이고 어머니이지만 원망하고 싶을때도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화를 내지 않고 사랑으로 돌볼수 있는 힘을 주님께서 주셨다"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황경일 목사는 자신의 과거때문에 두사람이 아프다는 생각을 하고 그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황 목사가 어렸을때 잘나가는 주먹이었다. 그런 어린시절을 보내고 친구형의 인도로 중앙정보부에 들어가 22년을 근무하며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수없이 경험하게 된다.
정보부를 다니며 신학공부를 했으며, 신우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김성광 목사와 같이 강남교회를 개척하기도 했으며, 마지막으로 개포동 동인교회 부목사로 있다가 청빙을 받아 LA로 가다고 잠시 들린 뉴욕에 자리를 잡게 됐다.
황경일 목사는 뉴욕에 온후 타고난 친화력과 남의 어려움을 내일같이 돌보는 인성으로 지지를 받아 뉴욕교협 회장과 목사회 회장을 지냈다.
병상에서 황연자 사모는 "병원에 나와 성지순례를 가고 싶다"고 희망을 나타냈다. 또 "목사님이 너무 잘해주어 짐이 무겁다. 어떤때는 점심과 저녁도 못 먹고 나를 지키는 경우도 있다. 가슴이 아프고 쓰린다. 우리 목사님 처럼 하는 분이 많지 않다"고 남편에게 감사를 돌렸다.
한편 많은 뉴욕의 목회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병원을 방문하여 황 사모를 격려하기도 했다. 황경일 목사: 917-332-7332
ⓒ 2008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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