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철 목사 "직업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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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08-07-02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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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9일(주일)부터 7월 2일(수)까지 펜실바니아 컨벤션센터에서 2008년 자마(JAMA)대회가 열리고 있다. 대회 셋째날인 7월 1일(화) 오전에는 장동찬 목사(베다니교회)와 김춘근 교수(자마대표)가 한국어권 전체집회를 인도했다.
오후 1시 40분에는 1시간씩 3차례의 트랙이 진행됐다. 아멘넷은 1일 세션은 목회자 트랙으로 나구용 목사 "1세, 2세, 3세의 공동광장", 황인철 목사 "직업과 신앙", 김은애 "큐티리더 나도 잘할수 있다"을 취재했다.
황인철 목사 (아름다운교회)
"직업과 신앙"
유대인의 한 책에는 예루살렘 시장에서 열심히 일한 상인의 부탁이 나온다.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것. 아무리 거절해도 상인이 물러서지 않자 3년간 지성소를 청소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상인은 3년간 일을 하고 드디어 성소에서 지성소를 통하는 또 하나의 문을 보았다. 상인은 떨리는 손으로 지성소를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문득 생선냄새가 왔다. 문을 통해 상인은 자신이 일하던 시장이 나왔다. 일터가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이다. 내가 일하는 일터, 가정이 지성소이다. 교회는 바로 지성소의 문이다.
대학때 친구들과 기도모임을 했다. 기도모임은 결혼한 후에도 계속됐다. 나중에 직업이 결정되고 보니 목사나 선교사로 헌신하지 않은 사람이들이 떳떳하지 못함을 고민했다. 자기들이 2등신자라는 생각을 했다. 제가 볼때 평신도인 그들이 훨씬 더 헌신적인 사람이다. 평신도로서 물질과 시간을 바쳐가면서 헌신하지 않는가?
일이 인생에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설문조사를 하니 두가지의 극단적인 대답이 나왔다. 일을 인생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필요악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월스트릿저널 조사에 의하면 일에 대한 크리스찬과 비크리스찬과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교회가 노동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주었기 때문이다. 성어거스틴은 "노동은 죄의 결과"라고 보았다. 상당히 노동에 대해 부정적이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노동은 범죄이전에 하나님이 명령하셨다. 하나님이 인간을 청지기로 만드셨다. 범죄이전에도 일하라고 창조하셨다.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이었다. 아담은 동물과 새에 이름을 붙이는 일을 주셨다. 즐거움인 일이 죄때문에 어려워 졌다. 하지만 노동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귀한 것이다.
부정적인 노동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계급주의 = 하는일로 직분에 따라 구분하게 됐다. 종교적이면 성스럽고 종교와 상관없으면 천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삭개오가 구원을 받은 다음 직업을 바꾸었나? 성경에 안나오지만 세리라는 직업을 바꾸지 않았다고 본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변했다. 삭개오가 자신이 있는 곳을 성스럽게 민들었다.
마틴루터는 수도원을 비판했다. 수도원은 종교적인 생활이 우수한것의 상징이었다. 그것을 비판한 루터는 가정생활이 교회생활 만큼 성스럽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수녀와 결혼을 했다. 루터는 종교와 일반직종을 구분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관점에서 모든 직업은 성직이다. 만인제사장설이다. 문제는 교리의 개혁이 불과했다.
아직도 성직자와 교인을 구분한다. 김동호 목사는 둘은 같지만 교인이 매주 번갈아 가며 설교는 하자고 하는 것은 일반인이 수술하겠다는 것과 같다고 했다. 전문성의 차이라는 것. 그래서 김 목사는 차별은 없지만 구별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리 중심과 하나님 중심은 다르다. 교회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가 있다. 한국교회는 모이는 교회이다. 교회생활을 중요시 한다. 하지만 흩어지는 교회가 중요하다. 세상의 주인은 교인이다. 목사는 조연이다. 반면 교회의 주인은 목사가 되어야 한다. 목사는 세상을 변화시키지는 못하지만 성도들을 변화시켜 그들이 세상에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게 한다.
2. 자아가치 상실 = 부정적인 노동관은 자아가치를 상실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를 받아 일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부정적인 노동관 때문에 마지 못해서 일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유산가운데 창조의 비밀스러운 모습을 상실해 나가고 있다.
3. 안식일이 도피일로 전락
4. 일은 필요악 = 일을 생존을 위한 필요악으로 보니 교회에서 머무르는 것이 영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직장은 전도의 수단으로만 보는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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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구원과 관계없는 일도 성스러울수 있다. 성서적인 노동관은 다음과 같다.
1. 노동은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은 원하시는대로 하는 가운데 하나님에 영광을 돌리도록 우리에게 대사의 역할이 주어졌다. 일을 통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
2. 죄로 인한 선한 목적 상실 = 죽음은 분리(소외)이다. 인간, 자연의 소외로 나타난다. 노동까지 소외의 영역에 들어간다. 죄로 인해 노동이 오염되었다. 노동자체는 선한 것인데 죄로 인해 고통이 들어간다.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은 죄가 없다면 고통이 없을 것이다. 노동은 착취와 억압하고 경쟁으로 인한 소외현상이다. 하나님이 원하신 노동이 변해졌다. 직장에서 크리스찬이 왜 저런가 하는 불평을 듣는다. 또한 자연계는 계속 파괴된다. 원래 노동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3. 예수그리스도께서 저주 받은 노동을 회복하심 = 죄 이전의 세상으로 회복시키는 의도가 있다. 만물을 회복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전인적인 구원이 있다. 3가지 전인적 구원은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다. 완전은 이룰수 없지만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4. 주님에게 드리는 봉사=충성되게 하면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 되고 상급이 있다.
5. 노동의 유익
ⓒ 2008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오후 1시 40분에는 1시간씩 3차례의 트랙이 진행됐다. 아멘넷은 1일 세션은 목회자 트랙으로 나구용 목사 "1세, 2세, 3세의 공동광장", 황인철 목사 "직업과 신앙", 김은애 "큐티리더 나도 잘할수 있다"을 취재했다.
황인철 목사 (아름다운교회)
"직업과 신앙"
유대인의 한 책에는 예루살렘 시장에서 열심히 일한 상인의 부탁이 나온다.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것. 아무리 거절해도 상인이 물러서지 않자 3년간 지성소를 청소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상인은 3년간 일을 하고 드디어 성소에서 지성소를 통하는 또 하나의 문을 보았다. 상인은 떨리는 손으로 지성소를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문득 생선냄새가 왔다. 문을 통해 상인은 자신이 일하던 시장이 나왔다. 일터가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이다. 내가 일하는 일터, 가정이 지성소이다. 교회는 바로 지성소의 문이다.
대학때 친구들과 기도모임을 했다. 기도모임은 결혼한 후에도 계속됐다. 나중에 직업이 결정되고 보니 목사나 선교사로 헌신하지 않은 사람이들이 떳떳하지 못함을 고민했다. 자기들이 2등신자라는 생각을 했다. 제가 볼때 평신도인 그들이 훨씬 더 헌신적인 사람이다. 평신도로서 물질과 시간을 바쳐가면서 헌신하지 않는가?
일이 인생에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설문조사를 하니 두가지의 극단적인 대답이 나왔다. 일을 인생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필요악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월스트릿저널 조사에 의하면 일에 대한 크리스찬과 비크리스찬과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교회가 노동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주었기 때문이다. 성어거스틴은 "노동은 죄의 결과"라고 보았다. 상당히 노동에 대해 부정적이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노동은 범죄이전에 하나님이 명령하셨다. 하나님이 인간을 청지기로 만드셨다. 범죄이전에도 일하라고 창조하셨다.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이었다. 아담은 동물과 새에 이름을 붙이는 일을 주셨다. 즐거움인 일이 죄때문에 어려워 졌다. 하지만 노동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귀한 것이다.
부정적인 노동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계급주의 = 하는일로 직분에 따라 구분하게 됐다. 종교적이면 성스럽고 종교와 상관없으면 천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삭개오가 구원을 받은 다음 직업을 바꾸었나? 성경에 안나오지만 세리라는 직업을 바꾸지 않았다고 본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변했다. 삭개오가 자신이 있는 곳을 성스럽게 민들었다.
마틴루터는 수도원을 비판했다. 수도원은 종교적인 생활이 우수한것의 상징이었다. 그것을 비판한 루터는 가정생활이 교회생활 만큼 성스럽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수녀와 결혼을 했다. 루터는 종교와 일반직종을 구분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관점에서 모든 직업은 성직이다. 만인제사장설이다. 문제는 교리의 개혁이 불과했다.
아직도 성직자와 교인을 구분한다. 김동호 목사는 둘은 같지만 교인이 매주 번갈아 가며 설교는 하자고 하는 것은 일반인이 수술하겠다는 것과 같다고 했다. 전문성의 차이라는 것. 그래서 김 목사는 차별은 없지만 구별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리 중심과 하나님 중심은 다르다. 교회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가 있다. 한국교회는 모이는 교회이다. 교회생활을 중요시 한다. 하지만 흩어지는 교회가 중요하다. 세상의 주인은 교인이다. 목사는 조연이다. 반면 교회의 주인은 목사가 되어야 한다. 목사는 세상을 변화시키지는 못하지만 성도들을 변화시켜 그들이 세상에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게 한다.
2. 자아가치 상실 = 부정적인 노동관은 자아가치를 상실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를 받아 일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부정적인 노동관 때문에 마지 못해서 일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유산가운데 창조의 비밀스러운 모습을 상실해 나가고 있다.
3. 안식일이 도피일로 전락
4. 일은 필요악 = 일을 생존을 위한 필요악으로 보니 교회에서 머무르는 것이 영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직장은 전도의 수단으로만 보는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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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구원과 관계없는 일도 성스러울수 있다. 성서적인 노동관은 다음과 같다.
1. 노동은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은 원하시는대로 하는 가운데 하나님에 영광을 돌리도록 우리에게 대사의 역할이 주어졌다. 일을 통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
2. 죄로 인한 선한 목적 상실 = 죽음은 분리(소외)이다. 인간, 자연의 소외로 나타난다. 노동까지 소외의 영역에 들어간다. 죄로 인해 노동이 오염되었다. 노동자체는 선한 것인데 죄로 인해 고통이 들어간다.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은 죄가 없다면 고통이 없을 것이다. 노동은 착취와 억압하고 경쟁으로 인한 소외현상이다. 하나님이 원하신 노동이 변해졌다. 직장에서 크리스찬이 왜 저런가 하는 불평을 듣는다. 또한 자연계는 계속 파괴된다. 원래 노동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3. 예수그리스도께서 저주 받은 노동을 회복하심 = 죄 이전의 세상으로 회복시키는 의도가 있다. 만물을 회복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전인적인 구원이 있다. 3가지 전인적 구원은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다. 완전은 이룰수 없지만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4. 주님에게 드리는 봉사=충성되게 하면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 되고 상급이 있다.
5. 노동의 유익
ⓒ 2008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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