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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엽 목사, 10만 번 읽은 후 전하는 시편 1편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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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6-04-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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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복음으로사는교회(김세중 목사)는 설립 4주년 기념 말씀 사경회를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라!”라는 주제로 4월 13일(수)부터 16일(토)까지 열었다. 강사 이정엽 목사는 현재 LA온누리교회 담임으로 한국 온누리교회 부목사를 하며 생명의 삶 편집장을 지냈다. 큐티와 관련한 <생명의 삶으로 이끄는 QT> <행복한 삶을 주는 큐티> 책을 내기도 했다. 대구 동신교회 대학부에 같이 신앙생활을 한 이정엽 목사를 강사로 초청한 김세중 목사는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나라는 복음이 핵심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다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라고 집회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

둘째 날 저녁집회에서 이정엽 목사는 설교의 상당부분을 예정된 설교가 아니라 시편 1편의 말씀을 본문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 목사는 항상 다이어리에 시편 1편의 말씀을 적어놓고 들고 다니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시편 1편 말씀을 다시 읽었는데 10만 번쯤 읽고 나니 1-2년 전에는 시편 1편 말씀이 스스로 움직여서 메시지를 주기 시작했다고 말하며 그 받은 말씀을 나누기 원했다. 다음은 말씀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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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전하는 이정엽 목사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이라고 시작한다. 하나님의 이분법 원리가 1-2절에서 발견된다.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반대로 말하면 복 없는 사람이다. 세상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눌 때 남녀 또는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으로 나눌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제일 중요한 기준점은 바로 복이다. 하나님은 이 땅의 당신의 자녀들을 복주시기를 원하신다. 젊은 목사가 복 이야기를 한다고 이상하게 여기시는 분들을 이전에 만난 적이 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이야기하니 "아니 그것은 부흥사나 하는 이야기이지 젊은 목사가 벌써부터 복이야기 하면 안된다. 기복주의 신앙은 나쁜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더 많은 복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시다. 더군다나 시편 1편을 시작할 때에도 ‘복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신다. 마태복음에서도 팔복의 귀한 메시지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다. 우리가 복을 제대로 몰라 복에 대한 정의를 잘못 내리고 엉뚱한 복을 찾아가는 것이 문제이지 하나님을 제대로 따르고 믿을 때 우리의 삶에 복이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하나님보다 앞서는 복이 되지 않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을 때 복은 우리의 삶에 열매로 주어진다.

그런데 1-2절에 과연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처음부터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생각하기 쉬운 오해를 3가지를 먼저 밝힌다. 세상사람들이 볼 때 이런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복 있는 사람이 아닌 예가 1절에 보면 3가지로 등장한다.

1.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세상가운데 살아가는 악인의 꾀를 쫓아서 행복하고 싶은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복을 받을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꾀는 언제 사용하는가. 뉴스를 보니 한 청년이 수능시험을 치면서 약시가 아닌데도 진단서를 떼서 남보다 1.5배 시간을 더 사용하고, 대학가서도 계속 편법을 쓰고, 공무원 시험을 칠 때도 편법을 사용했다. 심지어 관공서에 침입해서 시험 등수를 조작하고 시험문제를 내는 학원에 들어가 문제지를 훔친 일이 탄로가 났다. 꾀라는 것은 노력하지 않고 열매를 거두려고 했을 때 생기는 것이다. 꾀를 부리게 되면 불한당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수고하지 않고도 좋고 많은 열매를 거두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성경은 악인들의 꾀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서는 잠시 빛날 수 있으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결코 복 있는 사람이 아니다.

2.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죄인들이 서는 길은 굉장히 넓은 길이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라고 하셨다. 세상속에서도 성공의 공식이 있다. 한국 같으면 어떤 대학을 나오고 어떤 기업에 취직하면 성공한 것이라는 나름대로 정의가 있다. 그것을 위해 얼마나 자녀를 가르치는가. 그런데 죄인의 길에 서 있다보면 마냥 행복한 것 같아도 하나님이 보실 때 그 길은 결코 행복한 길이 되지 않는다.

죄를 짓는 사람중에 공범이라는 개념이 있다. 죄를 같이 짓는 사람이다. 공범이 많을수록 죄책감은 줄어든다. 혼자서 누군가 나쁜 짓을 해서 사람을 죽였다면 죄책감을 혼자서 받지만, 나치 전범이나 일본 전범들은 공범으로 전범이 된 사람들이다. 혼자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무리져서 지었기에 누가 누구때문에 죽은지 모른다. 그러다보면 죄책감을 나누게 된다. 그래서 세상에서 악한 일을 하면서도 죄인의 길에 서있으면서도 그것이 행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

3.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사장의 의자는 높은 의자이다. 세상은 그 사람이 앉아있는 의자의 높이를 보고 출세했다 안했다를 판정한다. 군대에서 직급이 높아갈수록 명령하면 듣는 사람이 늘어난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만한 자리에 앉으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렇지 않다. 우리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가야 한다. 마태복음 4장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미혹할 때 예수님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시험을 이기신다. 여호와의 지혜가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좁은 길을 걸어가는 주님의 제자의 길에 있을 때, 세상의 성공의 길이 아니라 소명의 길에 서 있을 때 우리는 더욱 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오만한 자들이 앉는 높은 자리가 아니라 주님처럼 겸손한 자리이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위해 다락방에서 만찬을 하신다. 그때 제자들은 한껏 마음이 높아져 있었다. 예수님이 이제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니 자신들도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들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이 식사도중에 갑자기 일어나셔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셨다. 그날 방을 닦아 주신 사람중에는 곧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할 베드로도 있었고, 예수님을 판 가롯유다도 있었다. 주님은 배반한 제자까지 섬기셨다. 마가복음 10:45에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오만한 자의 자리, 명령할 수 있는 자리, 높은 자리가 아니라 섬길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성경적인 행복의 기준이 된다.

이처럼 세상이 가지고 있는 우리의 편견들을 거두어 내고 그러면 정말 누가 복 있는 삶인가에 메세지에 귀를 기울일 때 2절이 등장한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우리의 소유나 우리의 건강이나 우리의 자녀들의 진로의 문제가 우리의 행복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복 있는 사람은 오늘도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날마다 입술 속에 담고, 마음에 새기고, 그리고 율법의 길을 순종하며 걸어가는 사람임을 선포해주고 있다.

저는 말씀묵상을 대학 1년때 배웠다. 대학 선배들과 아침 캠퍼스 잔디밭에 모여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개인적으로 묵상하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나서 기도제목과 묵상한 내용을 나누고 같이 기도하고 그렇게 30-40분 정도 매일 큐티훈련을 받았다. 2-3달이 지나니 이제는 개인적으로 도서관에 가서 자리 잡아 혼자 큐티하라는 것이다. 배운 방법 그대로 혼자 앉아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말씀을 읽고 숙제로 대학노트 2페이지에 소감을 썼다. 설교자로 훈련받는 것도 아닌데 큐티 소감을 매일 써야 했다. 사실 저는 문과 출신이 아니다. 사범대 화학교육과를 다녔는데 생명의삶 편집장을 할 때 보니 다들 국문과 출신인줄 안다. 그 비결은 큐티 소감을 하루에 몇 페이지씩 계속해서 쓰다보니 글발이 좋아졌다. 그렇게 매일 두 장씩 계속 써 내려가니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할 때보다 글을 적을 때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상황에서는 이해가 안되지만 적기 시작하면서 부터 생각이 열리기 시작했다. 지금도 제일 소중한 가보는 그때 쓴 큐티노트이다.

그렇게 훈련받고 말씀을 적다보니 점점 더 하나님에 대한 배고픔이 목마름이 더 깊어졌다. 말씀을 알기시작하면서 부터 그 말씀이 제 삶을 인도해갔다. 중요한 순간마다 말씀이 마치 길을 걸어갈 때 이정표처럼 작용하여 어떤 한 말씀을 가지고 어느 기간을 살다보면, 또 다른 말씀이 제 인생길을 인도하는 새로운 이정표가 되어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가정배경도 학문도 없지만 이 자리까지 왔다. 남들은 신앙의 3-4대라고 한다면 저도 4대라고 이야기한다. 제가 중 3때 교회를 처음 나갔는데 남들은 내리 3-4대인데 저희 집은 거꾸로 4대이다. 제가 믿고 부모님이 믿게 되고 외할머니가 믿으시고 아이들이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고 거꾸로 4대가 되었다. 남들은 모태신앙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저는 변태신앙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주님 모르고 있다가 변태해서 신앙을 알게 되었고 늦은 출발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전하는 종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은 제가 다른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시편 2절의 복을 받은 것이다. 오직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삶을 살았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전체는 사실 하나님을 믿고 복 받은 사람, 예수 믿고 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복 받은 것이 아니라 중간의 중요한 것이 들어간다. 예수 믿고 말씀에 순종할 때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비결들을 성경 몇 군데에서 찾아보도록 하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세기 1:9-10)

하나님이 매일마다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을 정리할 때 도표를 만들 수 있는데 있는데 하나님 쪽에서 액션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즉 하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행동이셨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피조물의 리액션이 나타나는데 9절에 보니 "그대로 되니라" 다르게 이야기하면 순종이다. 말씀으로 소통하는 것이 하나님의 액션이라면 피조물의 리액션은 순종으로 "그대로 되니라"라고 나온다. 그때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는 소감은 10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고 피조물은 순종하는 존재라는 관계가 성립될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는 관계가 형성된다. 더군다나 여섯째 날에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신다. 인간을 창조한 다음에 다른 피조물에게 보여주지 않는 하나님의 극찬이 이루어지게 된 비결은 사람을 흙으로 빚어서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만들어낸 사람이 다른 피조물 보다 아름답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겠는가.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저는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나누어질 대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유일한 존재로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하나님이 어떤 의도로 저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자연만물은 사실은 순종하는 존재가 아니라 복종하는 존재이다. 생각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에 인격을 가진 존재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가르치면서 따 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셨다. 자발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인생들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책임이다. 그런 인격적인 존재, 로봇으로 만들어놓지 않으시고 살아 움직이고 생각하고 알아서 순종하는 존재를 만들어 놓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보실 때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는 삶, 다르게 이야기하면 복 받는 삶을 살기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인격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정확히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덮어놓고 믿어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다. 성경을 펼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여호수아 1:8)

창세기에서는 "복"이라는 단어 대신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단어가 나왔다면, 여기에는 "복"이라는 단어 대신에 "형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8절은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에 광야 40년을 살아오면서 모세에게 인도함을 받아서 가나안 땅 직전까지 오게 되었는데 그 리더십을 여호수아가 물려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지금까지 40년간 모세의 비서를 했던 사람이다. 비서는 최고 리더의 고민을 같이 하는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은 리더가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때 리더가 얼마나 떨리는지 모른다.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순종하고 모세를 욕하고 험담하는 상황에 대해 여호수아가 알고 있었다. 얼마나 그 리더십의 자리가 힘든지 여호수아는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모세만큼 탁월한 능력을 갖지 못한 여호수아가 모세 다음으로 리더십의 자리에 선다는 것이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6절에서 부터 보면 "강하고 담대하라"에서 시작해서 계속 담대하라는 말이 나온다. 성경에서 담대하라는 말이 나올 때 마다 그 옆에는 두려워 떨고 있는 인생의 모습이 있다. 여호수아가 얼마나 두렵고 떨고 있으면 하나님이 구절구절마다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을 주실까.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에게 있는 능력될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그것이 8절의 말씀이다. 율법의 책을 입에서 떠나지 말고 밤낮으로 묵상하고 기록된 대로 지키고 행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꾸불꾸불할 수밖에 없는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고 네가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신다.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열왕기상 2:1-3)

똑 같은 내용의 예가 여기 있다. 성경에 나와 있는 형통이라는 단어를 다 찾아보니 항상 형통이 등장할 때마다 말씀을 지키라는 명령이 나온다. 형통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지킬 때 주어진다는 것이다. 열왕기상 2:1-3의 내용은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윗은 절대로 죽어서는 안되는 사람이었다. 다윗의 리더십은 너무나 탁월하고 완벽했다. 그런 다윗도 죽는 날이 임박해지고 있었다. 그때 아들 솔로몬을 불러서 명령, 즉 유언을 한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어떤 유언을 하는가? 너는 행정을 잘하라, 군사력을 키우라, 누구를 숙청하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이 이제 가게 되었으니 자신이 없더라도 너는 대장부가 되라고 말하고 있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상황이다. 그런데 3절에 보니 여호수아 1:8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말씀에 대한 4가지 표현을 하고 있다. 결국 말씀을 알고 그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이 인생길을 인도하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말씀이 성경에 참으로 많다. 요한계시록 1: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또한 시편 1:2 말씀과 너무나 비슷한 말씀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다시 시편 1편으로 돌아가자. 묵상하는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는가가 3절에 나와 있다. 복이라는 단어가 형통이라는 단어와 교차적으로 계속해서 쓰이고 있다. 우리의 인생이 나무라면, 허허벌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냇가에 심겨져 있는 나무라면 다른데 있는 나무는 다 메말라도 시냇가에 옆에 심겨진 나무는 시내로 부터 물을 끌어올리고 땅에서 부터 영양분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봄이 되면 새로운 가지가 뻗어나기 시작한다. 새로운 잎사귀와 꽃들이 만발하고, 꽃이 떨어진 자리마다 다시 열매가 맺히는 것이 주목해야 할 형통의 모습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하는 일이 잘되면 형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일이 잘되는 것으로 형통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형통은 우리가 하는 일들이 잘되어서 열매가 맺히고 꽃이 피어지는 것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고 선한 영향력이 있는 것을 말한다. 나무가 과실이 많아지고 잎사귀가 많아지면 누가 행복한가. 나무 자체가 행복한가. 보기에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면 나무의 주인인 농부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그리고 지나가는 나그네가 그늘에 쉴 수가 있다. 짐승들은 나무에다 둥지를 틀 수 있어 좋은 것이다. 성경적인 형통이라는 것이라는 것은 형통의 열매를 나만 다 먹는 것이 아니라 내가 형통과 축복의 통로가 되어 나를 통해 하나님의 복이 흘러가는 것임을 3절이 말씀해주고 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반대로 악인은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나중에 영적으로 남겨진 것이 없는 모습이 4절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그래서 5-6절에서 정리하면서 선언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의인과 악인은 누구인가. 우리가 생각하기에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으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편 1편의 문맥을 따라 읽다보면 여기 등장하는 의인과 악인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구분되어진다. 다윗의 인생을 생각해보라. 다윗이 평생 동안 의인이었는가? 아니다. 다윗이 가난하고 겸손한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그의 입술 속에 있었다. 그래서 시편 말씀의 3분의 2를 다윗이 지을 정도로 말씀이 나오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밧세바를 범한다. 아니 그 직전부터 다윗은 타락의 길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장수를 보내 전투를 치르게 하고 자기는 늦잠자고 일어나 테라스를 거닐다가 목욕하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 정욕이 발동되어 결국은 권력으로 충신의 아내를 범하고 충신을 전쟁터에서 죽게 만든다.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은 저자이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 부터 떠나있는 순간 악인의 삶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과거에 어땠는지를 떠나서 지금 내가 하나님 말씀 앞에 서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지금도 여호수아 1:8과 열왕기상 2:3에 나오는 것처럼 마치 모세의 유언과도 같고 다윗의 유언처럼 말씀을 내 입술에 두라는 것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호수아가 모세 다음으로 가나안 전쟁을 할 때 늘 묵상하고 붙잡혀있던 말씀은 여호수아 1:8의 말씀일 것이다. 6-8절까지 말씀을 날마다 되새기면서 하나님이 나한테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셨구나. 내가 이처럼 이길 수 있는 힘은 육체의 힘과 군사력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내가 붙잡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율법에 있는 말씀을 찾아가면서 날마다 말씀을 입술에 두기위해 애를 쓰다 보니 전략과 전술이 다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복음을 날마다 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복음 앞에 다시 새겨져서 우리 심령에 심을 수 있는 말씀의 씨앗들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한 사람으로 우리가 풍성해 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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