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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수 감독 "21세기 목회,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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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09-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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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change)에 대한 직관의 요청

오늘 사랑하는 동역자들과 함께 21세기 목회에 대한 전망을 함께 하게 된 것을 기쁨으로 여깁니다. 함께 모였다는 거룩한 교제와 사귐에서 이번 모임의 큰 뜻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나누는 글은 단순하게 함께 논의하여 보자는 동기제안이라고 생각하십시오.

21세기는 실제로 변화라는 대명사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에 삽니다. 그 변화가 초래하는 현상들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하나의 과제이지요. 그런데 그게 목회 현장에서는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속한 그리스도교회가 변화를 적극적으로 맞이하는 전통이 아니기에 우선은 쉽지 않습니다.

변화는 진리의 한 단면입니다. 성서적인 이해도 그렇고 많은 종교는 변화라고 하는 자체를 하나의 진리현상으로 파악합니다. 교회가 다른 집단과 조직과는 달리 변화에 미온적이라는 것은 복음과 전통에 교회의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 아래에서 변화하지 않는 무변의 것들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드리는 것은 하나의 믿음의 내용일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제1차축 시대(Axial period)의 지평 안에 머물지 않고 제2의 차축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차축시대의 변화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정체성 추구에 만족하지 않고 우주적인 의식(global consciousness)을 탐색하는 현상으로 나타냅니다. 세계와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도전은 바로 인간의식의 변화와 요청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다양한 자기이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1차축시대는 이원적인 선명성의 논리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였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거룩함과 세속, 빛과 어둠 등으로 두개의 기둥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였고 그것이 오랫동안 진리추구에서 만족스러운 도구가 되었습니다. 세계 거대종교들은 일관적으로 이원성의 축으로 진리를 설명하였고, 그것은 오랜 세월동안 지혜의 전통으로 신앙공동체들을 지지하여 왔습니다.

제2차축시대는 다원성의 문법으로 변화의 축을 초래하였습니다. 인간과 하나님에 지구를 더하고, 몸과 마음에 영을 더하고, 생태학과 경제, 그리고 가난과 영성을 더하는 다원성을 그 지평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다원성은 중심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부여하고, 선명성보다는 혼잡함과 자기대조적인 복합성을 감내하도록 우리들을 도전합니다.

바로 우리들은 제2차축 변화시대를 살고 있고 그곳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는 자리확인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변화를 시대적인 영성의 언어로 받아드리게 됩니다. 변화는 어떤 영구적인 것의 고착성이 없기에 역동적인 가능성을 향하여 무한한 가능성으로 다가섭니다. 변화는 자기중심적인 논리를 초탈하여 타인중심, 타자 중심의 다양한 축 속에서 관계를 고백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변화는 대신 무엇인가 안정적으로 껴안고 뿌리를 내리는 삶의 가치추구보다는 늘 탈출과 탈향의 모험을 하나의 영성으로 살도록 합니다.

변화는 충분히 갈등(struggle)의 의미를 일상사에서 마주하도록 하기에, 제2차축시대의 영성은 인간의 무한한 갈등 속에서 피어나는 갈등의 영성(spirituality of struggl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희망과 중생의 체험은 정치 사회적인 것들과 문화사의 변동 속에서 도전받는 가지각색의 패러독스를 직면하면서 정직하게 갈등들을 대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목회는 바로 이런 갈등의 영성 속에서 이루어가는 상상력과 창조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포스트 모던시대의 한 복판에서 섬기는 목회는 혼돈과 다원적인 갈등 속에서 혼미하거나 역설적인 상처들을 안은 사람들을 목양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추구하는 다양한 종교적인 경험을 보듬으면서 조각난 영혼들을 돌보면서 원만한 인간의 재생과 구원을 체험하도록 조력하는 것이 목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회 리더십은 변화의 한 복판에서 늘 통합적인 온전함을 추구하고 우주에 편만한 신비를 탐닉하는 선견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리더십은 보이지 않은 것을 보는 자(seer of the unseen), 예측하지 못한 것을 예측하는 이들이라고 규정합니다. 우리가 함께 사역하면서 사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먼저 보아야 할 현상들을 어떤 것일까요?

교회사는 500년 마다 하나의 영적인 청소의 시대를 통과한 것 같습니다. 영적인 갱신이나 종교혁명으로 하나의 정점을 초래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한 번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영적인 청결과 재생을 요구하는 시대를 당면하고 있다고 봅니다. 영적인 청소와 재생이 무엇을 말하는지 여러 면에서 근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예로 최근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교회 형태구성의 변화는 새롭게 구성되는 실험교회들로 특징을 말하기도 합니다. 전통적인 교회론의 틀을 초탈하여 운집하는 영혼들의 군상을 주목하게 됩니다.

교회들이 견고한 중심을 상실하는 불안 때문에 내면적인 진통을 겪기도 합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은 다원성의 격동과 다양한 선택의 기회들이 상존하는 현실을 삽니다. 견고한 중심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를 선도하는 적극적인 인간상을 구성하는 종교적인 의도에서 퇴행하게 하기에, 유동성과 창조성, 그리고 정직한 개방성의 인간을 구성하는 현실적 요구에 상대적으로 접근하게 됩니다. 그러니 견고한 중심이라는 말이 협소와 배타를 하나의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교회 자체가 사회구원의 역동성을 상실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견고한 중심 보다는 하나님 중심으로 삶을 정직하게 개방하는 제자도를 세워서 우주적인 구원을 폭넓게 구현하는 변혁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하는 요청이 제기 되는 것입니다.

성령론적 권위의 회복:

1. 새로운 창조:

새로운 밀레니엄으로 흘러가면서 그동안 마주 하지 않았던 다원적인 도전과 충격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성령의 역사는 새로운 밀레니엄 속에서 생동적인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로 함께 하십니다. 성령이 여시는 역사는 하나님이 21세기 우리들에게 부여하는 거시적인 삶의 현장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 받고 섬기는 아름다운 소명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성령의 충만한 임재와 지도가 이 시대를 옳게 살고 섬길 수 있는 본질적인 자리라고 상기시킵니다.

성령론적인 권위는 창조적인 하나님의 역사에 완전히 의존하고 영혼의 문을 여는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경험하는 중심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권위를 저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구성한 초기경험을 재생하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의 원경험(原經驗: ur-experience)을 재생되어 변화의 시대 속에서 성령의 거룩한 지시를 따르게 한다고 믿습니다. 저는 여기서 지난 역사 속에서 난삽하게 산적한 그리스도교 주변의 군더더기를 제하고 본래적인 경험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과 동기를 성령이 부여하기에 성령론적인 권위라고 칭하고자 합니다.

21세기에 임재하는 성령은 전적인 새로움으로 다가섭니다. 그것은 촌음을 헤아릴 수 없는 창조입니다. 그것은 또 다른 축의 변화와 함께 다가서는 빅뱅과 같은 것입니다. 그 개벽적인 창조의 현실에서 아직 교회가 성령의 역사를 그 그릇에 온전히 담고 있지 못합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섬기는 교회로서 담지 못하는 그릇은 일그러지거나 파손된 흠이 많은 그릇이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을 바로 담지를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성례전적인 거룩성을 교회가 온전치 못하여 파편화하였습니다. 교회는 내부적으로 자기 갈등과 쟁론으로 거룩한 권위를 손실하였습니다. 대외적으로는 교리 속에 포로화된 집단, 독백(monologue)이 가득한 자기중심적인 클럽이라고 비판받습니다. 교회가 내부적인 자화자찬과 고립적인 집단의식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를 이웃과 세계에 전하는 구원의 공동체 됨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요청 속에서 비역사적인 공동체로 지적 받기도 합니다.

성령론적인 권위는 창조적인 담론과 생명의 생성이 역동적으로 일어나는 생명 구원의 공동체로서의 환희를 사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사도행전의 기적담론과 오순절적인 생명사화(Pentecostal narrative)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역사변혁의 생명수가 지속적으로 흘러넘치는 거대담론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 현장은 성서적인 이상이 아무런 장애물과 격감 없이 삶의 현장과 역사에서 지속되고 계승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저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감격과 기쁨으로 철저하게 헌신하는 생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박해 속에서도 당당한 용기로 제자도를 살았습니다. 절망하였던 사람들이 희망을 되찾고, 세속에 묻혀서 의미 없이 방황하던 사람들이 거국적인 소명을 힘으로 발견하는 변혁이 그 다락방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선교는 구원의 소식으로 함께 하던 사도들을 통하여 사도적인 전통으로 역사 속에 파고들었습니다.

귀신을 좇아내고 마귀를 몰아내는 축사(逐邪)의 이적이 일어나고, 가난과 속박 속에서 굶주리던 영혼들이 해방을 경험하는 다락방이 성령의 역사와 임재였습니다. 바로 그것은 사람들이 상상하였던 것과는 전적으로 다는 초월적인 담론이었고,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고,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개벽의 역사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서있는 자리를 바로 그런 개벽의 역사 속에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곳으로 보아야 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현재화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생명 현상의 지속적인 선에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이해하고 우리들이 참여하는 목회의 현실을 이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어제의 다락방이 오늘의 재현되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철저한 새로움을 성령은 우리들의 목회현장에서 이루시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목회에서 성령론적인 권위를 회복하는 것은 깊은 영적인 전쟁을 통과하면서 회복하여야 할 용기와 힘인 것 같습니다. 현대문명은 수많은 비생명적인 것에 인들이게 만든 현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치 마약에 노예가 된 것처럼, 마치 마귀들의 놀음에 잡힌 영혼처럼 수다한 것들에 잡혀서 순수한 영과 제자도를 살지 못하도록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이 현대문명의 어두운 모습이 아닌가 생각하여 봅니다. 바로 이런 현장에서 성령론적인 권위를 회복하는 것은 절실한 요청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영맥으로 우리들이 영적인 청소를 다부지게 하는 일이 권위를 바로 획득하는 길일 것입니다.

2. 성령론적 성서해석의 복신화:

창조적인 성령의 역사는 21세기 복신화적인 상상력으로 다시 체험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복신화화(復神話化)는 바로 성령론적 권위를 교회와 목회의 현장에서 수용하고 살아내는 갱신의 역사라고 믿습니다.

비신화화를 통하여 성서적인 본문을 다양하게 독서하던 전통은 지난 세기의 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21세기 세계 현장에서 재생하여 할 종교체험과 영성회복은 비신화화의 지평에서 키를 돌려서 다시 복신화로 회향(廻向)하도록 요구한다고 믿습니다. 성서연구를 비판적인 방법으로 역사적 배경을 정직하게 접근하는 은총으로 지난 수세기 교회의 담론을 구성하여왔습니다. 이성주의적 비판학은 중세기적인 경전우상화를 벗어나는 선명한 공헌으로 선물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이성주의적 비판학의 날개를 타고 날아온 성서해석학은 생명사화에 대한 이해를 경홀히 여기는 결과를 낳았다는 생각입니다. 다시 복신화화의 원경험 재생으로 기선을 바꾸어서 종교적 체험을 구성할  때에 그리스도인의 경험이 힘 있고 능력이 있게 된다는 생각입니다. 비판학의 적극적인 공헌을 감사하면서도, 그것의 극대화로 성서 속에서 재현되어야 할 생명의 신화가 약소화 되었다는 반성입니다. 비판적 도구화를 우상화하여 신학의 무오류성 우상을 절대화하였기에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적 체험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살지 못하지 않았는가하는 반성입니다.

비판적인 의식은 학문성과 정직한 인생을 도모하는 좋은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냥 그것을 절대화하는 오류를 신학사가 범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제 지구 2/3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 요지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성령의 변혁을 만나면서 유럽과 미주 중심에서 좌장이 되었던 학문성의 양면성을 반성하여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비판학이 우리도 모르게 통합보다는 조각과 파편화를 선물하였고, 통전적인 화합과 거대담론 보다는 사회정치사적인 편견에 성서을 국한하는 오류를 선물한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영적인 구도를 순례길이라고 합니다. 그 순례길인 영적인 여정은 집에서 떠나서 훌쩍 먼 세상을 체험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원형적인 깨달음의 여정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는 집을 떠나는 것은 횡초(橫超:crossing over)이고 다른 하나는 다시 고향으로 복귀하는 귀향(coming home)입니다. 저는 요사이 성서 해석의 방법에서도 바로 횡초와 귀향을 반복하는 창조성과 유동성이 요청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경험을 위해서 우리는 영과 문자 사이를 횡초와 귀향의 해석학으로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으면 합니다. 비신화와 탈신화화를 통하여 역사성을 되찾았던 여정이 집을 떠나는 횡초라면 이제 다시 원래의 경험으로 찾아드는 환원적인 작업이 필요하지 않는가 하는 제안입니다. 성서를 통하여 떨림을 회복하고, 성서를 통하여 소명의 단순성을 회복하고, 성서를 통하여 희생적인 사랑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하는 소망입니다. 그냥 성서로 돌아가자는 말과는 달리 그 대화론적인 장으로의 성서에 다시 기어들어가 생명의 신화적 힘을 재생하여 보자는 제안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결단을 통하여 원경험을 다시 껴안는 직접적인 체험을 설교자의 틀과 해석학으로 사용할 수 있기에 복신화라고 칭하여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서의 목회는 통전적인 종교 경험을 확산하는 일을 통하여 그 나라를 확장하여 가는 것입니다. 목회의 해석학은 바로 횡초와 귀향의 반복을 통하여 영혼을 돌보는 일입니다. 탈신화에서 복신화로 지경을 넘나들면서 성서를 가르치고 체험을 재생하는 사명이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그러기에 소명은 이제 더 이상 메마른 고목과 같고 사막에서 물 없어 절규하는 그런 척박한 장이 목회가 아닙니다. 더 이상 조직 교회를 관리하고 반쯤 죽어있는 고사 상태에서 전전긍긍하는 인간적인 모험도 아닌 것입니다. 성서를 반신반의 하면서 적절하게 대하는 이성만능적인 탈신화화의 경향으로만 소명의 열정과 사랑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복신화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에게로 돌아갑니다. 거기서 참된 구원을 경험하고, 생명을 체득하고, 정의를 위한 철저한 순종의 길을 제자도로 재생하는 것입니다. 복신화는 탈신화를 지속적으로 재현하는 회복의 과정이고 부분이 아니라 전과정이라고 변론하고 싶습니다.

성서의 원자리에 되돌아가려면 여행을 떠나는 비판의식을 통과하여 또 다시 원자리로 되돌아가는 신화적인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 현실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신화 상실의 허무를 삽니다. 복신화를 통하여 삶의 의미와 창조적인 원형의 이미지를 회복하여 힘을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복신화는 문자주의로 복귀하는 파괴적인 편향주의가 아닙니다. 성서로만(sola scriptra)로 견고히 하는 파괴적인 절대적인 경향이 결코 아닙니다. 복신화는 비이성적이거나 탈이성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자주의 고식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삶을 신화적인 힘과 꿈으로 재구성하여 성서적인 세계현상을 다시 영적인 호흡과 리듬으로 마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원형경험으로 재생하여 변형적인 삶을 충만하게 공유하자는 것입니다.

21세기 목회현장에서 우리는 다시 요단강의 세례를 받고 심기충천하고 생명력과 성령충만의 창조적인 여정을 가도록 재심을 받습니다. 새로 여시는 현장을 탐닉하면서 성령론적인 권위를 사는 것은 배타적인 인성과 교리를 통하여 타인들과의 관계를 거절하는 자기단절이 아닙니다. 교파적인 독선으로 하나인 교회(ecclesia una)를 지파적으로 절락시키는 분파주의도 아닙니다.

성령론적인 권위를 사는 것은 소위 문자주의라는 근본주의로 돌아가서 다양한 문화와 인간적인 경험들을 초탈하는 복귀주의적 근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적인 권위를 화육과 재생의 원리로 구속된 공동체에서 함께 실천하여 예수운동의 구체적인 경험을 말합니다. 말씀 그대로 사는 긴급성을 신화로 보지 않고, 속화된 자신을 재생하면서 예수의 해방 복음을 살고 생명의 사역을 통한 성십자가를 우리들의 여정에서 재현하는 것입니다. 탈신화화는 지난 세기의 경계초월(crossing over)을 위해서 공헌하였지만, 이제 예수복음의 권위 회복(coming home)은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회복되는 영성의 통전화이고 성서적 담론이 우리들의 역사적인 담론으로 회복되는 생명의 사건을 말합니다. 성서는 이미 그 자체로 대화론적인 담론입니다. 본문에 로기아가 있고 그 말씀이 성취되는 회중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문자의 숲만 있는 것이 아니고 생이 있고, 이야기가 있고, 소통되는 공동체적인 경험이 있습니다. 바로 그 원경험으로 돌아가서 text와 context, reader와 seer/knower의 사이에 우리들이 현재적인 참여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복신화는 힘을 주고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권위를 회복시켜 주어서 하나님을 철저하게 따르게 하는 지혜를 허락한다고 믿습니다. 그 권위의 장에서 돌아가서 하나님과 맘몬의 양자택일에서 하나님을 택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더 이상 입에 풀칠하는 일에 노예가 되지 않고, 한치의 생명도 감소하거나 첨부할 수 없는 인생의 성서적인 진리를 살아내서 근심 없이 하나님께 의존하는 제자의 능력 있는 길을 섬김의 원리를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 성령이 여시는 새로운 터전, 새로운 영의 장으로 환희의 노래를 부르면서 가는 것이 소명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복음의 권위를 살기에 퇴근심의 현재(non-anxious presence)를 리더십으로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성령론적 권위 회복:

성령론적인 권위는 탈경계의 해석학을 하나의 생명논리로 파악하게 합니다. 탈경계는 바로 21세기의 세계현상입니다. 한 부족이나 민족, 그리고 국적으로는 거시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꿈은 다민족, 다인종, 교차인종, 교차문화의 싱그러운 바람으로 이미 온 세상에 불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거기서 신앙은 새로운 형태로 재 구상되어야 하고, 거기에서 권위 있는 고백을 창출하게 됩니다. 성령의 창조적인 역사는 바로 이 다문화 교차현장에서 간격을 없애는 역할로 역사하십니다. 성령이 간격을 없애는 영으로 역사하시는 것은 바로 사도행전의 다락방 사건입니다. 각자가 방언으로 소통하고 서로 다른 언어를 통역하는 은사가 주어진 것입니다.

공교회는 바로 이런 탈경계적인 복음으로 출발하여 역사를 변혁하여왔습니다. 오랫동안 그 공교회의 역사는 성령을 부족적이고 인종적인 협소한 해석학의 공간에 가두었습니다. 헤브라이즘이 헬레니즘의 틀로 전형되고, 로마를 통하여 유럽의 콘스탄틴 문화로 구축되었습니다. 그것은 루터와 캘빈을 중심으로 프로테스탄트를 형성하고 오랜 동안 유럽제국주의의 문화적인 형식으로 교회와 신학이 발전하여 왔습니다. 아직도 칼 야스퍼스가 말한 것처럼 첫 차축문화권 안에서 유럽중심의 신학적인 틀이 성령의 역사를 국한하였습니다. 프리탄니즘과 함께 미국을 중심한 새로운 축의 변화를 경험하기는 하였지만, 이런 변천은 성령의 통전적인 역사를 다 담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간격을 연결하는 화해의 영으로서의 성령은 인종적 민족주의의 희생물이 되어서 차선으로 물러섰습니다. 성령론적인 권위는 바로 그 차별과 경계를 허물고 간격을 좁히고 없애는 거룩한 영으로 역사하십니다. 간격을 연결하는 영(bridging gap spirit)이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께서 폭발적으로 역사하시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지구촌 남부에서 거국적으로 일으키셨습니다. 2050년이 되면 그리스도인의 전체가 2.1 Billion이 되고 지구촌 1/3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예측합니다. 그중에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가 가장 많은 그리스도인으로 편재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운동이 지구 남부로 움직여 가서 폭발적인 증가율을 보인다는 예측과 저들이 기독교 문화를 어떻게 재편할 것인지를 주목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글로벌 사우스는 신선하게 성서시대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글로벌 사우스는 세계관에서 서구적인 신학적 범주에서는 보수적인 도덕적인 규범을 지향합니다. 그것이 북유럽의 그리스도교에 주는 충격이 긴장을 더하게 된다는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에서 성령이 우주적인 성화를 주도할 것이고, 창조적인 통합의 과정을 성령론적으로 주도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현실에서 우리는 더 탈신화하여야 할 주제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동시에 거기서 불어오는 영적인 열광적인 열정이 복신화의 바람을 가져올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영적인 축복을 얻는 것이 실제현상이 되고, 저들이 우주구원의 매체가 됩니다. 양식이 없으면 주님께 가고, 병든 자가 있으면 예수님께 달려가는 성서시대가 사회경제적인 여건 속에서 현실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수 진보, 또는 보수 자유주의라는 해석학적인 틀로는 국한 할 수 없는 성서적 현실화의 카리스마가 실제로 구원의 복음이 됩니다. 성서를 성서로 믿고 성서 속에서 거룩한 춤을 추며, 성서적인 나라를 구축하려는 성령의 운동이 강력한 현실로 들어납니다.

이제 성령의 역사를 21세기에서 운행하는 종들은 다언어의 능력을 은사로 받게 됩니다. 두개 세 개의 언어와 문화적인 개방성으로 통하여 우주적인 의식을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서 받는 영성훈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언어의 은사요 방언의 은사로 나타나는 것은 능력 있는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공적인 담론(public discourse)라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의 축은 우주적인 구원의 대단원을 열기 위해서 역사하십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성령의 역사 파트너가 되어서 선교에 대한 섬김의 열정으로 다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타문화에 대한 대화론적인 개입과 배움이 창조적인 성령의 역사입니다. 종교간의 대화는 성령론적인 권위를 살기 위해서 아주 당연한 주제이며, 거기에서 우리는 새로운 우주적인 비전을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에 대한 상호적인 관계를 성령의 역사라고 부르면 무리가 있어 보입니까? 아닙니다.

성령이 주시는 권위로 열린 대화와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구원의 도구가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주적인 구원완성을 하나의 문법으로 여긴다면, 하나님은 이웃이 어떤 종류의 문화와 종교적인 고백을 가지고 살던지 상관없이 마주하고 사랑하고 서로 배우는 열린 신앙이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성령론적인 권위는 타인에 대한 절대적인 변형적 인정(transformative YES)을 실천하게 합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현실화일 것입니다.

목회적인 현실을 영성적인 자유로

21세기 교회 현실이 목회자의 지도력을 재검토하도록 요청합니다. 시대적인 현실에서 교회의 쇠퇴를 영적인 지도력의 감소라고 책임을 물어옵니다. 어쩌면 성령이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감흥과 기쁨을 상실하고 있어서 더욱 리더십에 문제가 됩니다.

성장하는 교회는 무엇보다도 교회로서의 선명한 선교의 방향과 목적을 가지고 , 감동과 기쁨이 있는 예배를 드리며, 새로운 교인들을 전도하는 구체적인 전략이 주어진 교회입니다. 그리고 성장하기 위해서 창조적인 변화와 위험을 무릅쓴 교회변신이 아니고 구속적인 공동체로서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자기 변혁을 시도하는 교회들이 매력적이고 역동적인 성장을 가져옵니다. 섬기기 위해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목회자의 각성과 교회의 존재이유는 이 시대에 생명적인 목회자 리더십의 본적지라고 믿습니다.

목회자들이 복음으로 영성을 강화하지 않으면 교회의 미래는 어두운 것 같습니다. 복신화적인 설교를 통하여 종교적 신성을 재현하고 감격의 생을 축하하도록 기쁨의 사제가 돼야 합니다. 성서의 이야기 속에 함몰하여 변형사화가 우리들의 고백이 되도록 일상의 사제(everydayly priest)가 돼야 합니다. 성서사화가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게 하고, 소명의 권위를 가지고 치병(治病)하고, 항마(抗魔)하고, 축사(逐邪)를 시도하는 설교자들이 이제 하나님이 허락한 카리스마적인 목회를 감당할 수 있다고 봅니다.

목회자의 건강은 소명의식에 있습니다. 소명의식이 견고한 사람들은 시험을 받는 어려운 목회현장에서도 당당하게 살아남습니다. 복음으로 살고, 현실에서 실천하는 삶으로 다져지니 목회는 그 단련된 영성의 연장이며 공동체적인 표현이 되며, 지도력은 하늘의 기운, 성령의 감동으로 단단하여 지니 영혼구원에 쓸모 있는 전도자로 헌신하게 됩니다. 성서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영적인 건강을 찾고, 겸허와 우리 몸을 낮추는 저자세 해석학(lowering hermeneutics)을 통하여 목양에서 만나는 모든 영혼들을 보위하고 존중하여 섬기는 사제로서의 삶을 헌신하십시다. 교회가 피차간에서 일어나는 변혁적인 수용과 영접, 그리고 조건 없는 환대의 기적으로 충만하도록 저희가 먼저 그 영적인 건강을 되찾아야 합니다.

목회자가 약해지면 교회가 권위를 상실하고 교회가 부여하는 변혁적인 변형의 가능성이 약화되는 것 같습니다. 성령론적 권위를 회복하여 어둠을 빛으로 바꾸고, 폭력을 평화로 바꾸며,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혁신을 위해서 복신화적인 리더십으로 강화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자의 힘은 성령론적인 권위를 회복하고 상상력과 창조적인 거동에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꿈으로 다시 거듭나서 아직 계시되지 않은 영역으로 거룩한 날갯짓을 하는 것이 우리들의 생명입니다. 성령론적인 권위는 진리의 영으로 자유를 우리들의 목회에 풀어줍니다. 자유의 영으로 변경을 넘어서서 아직 만나보지 못한 영혼들을 만나고 그리워하는 천국확장의 매혹 속에서 건강한 목회자상을 살아가게 합니다.

오늘 교회의 제2의 회생은 2세 목회의 현장과 가능성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젊은 차세대의 목회에 가능하면 50%이상의 정력을 투자하고 거기서 영적인 부흥의 가능성을 보고, 교회는 놀라운 자기 갱신을 경험하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미래에 정성을 쏟고 교회론적인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세대적(multi-generational)인 공동체를 통하여 생명이 체험되고 그리스도교적 원경험이 확산되는 것입니다.

젊 은 세대들의 자생적이고 토착적인 지도자들을 육성하여서 바로 교회에 속한 2세들 속에서 자연적으로 생출하는 지도자들을 의도적으로 찾고 저들을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좋겠습니다. 교인들이 목회자의 기도와 우선적인 목회의 비전을 젊은 세대와 2세들을 키우고 저들이 미국사회에서 main stream에 들어가도록 문을 여는 일에 열정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면 교회는 미래를 구축하는 하나님 나라의 전조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자유로 제자의식과 소명의 근본을 다하는 뜨거움을 허락하기를 기도합니다. 복신화적인 카리스마의 회복을 위해서 우리들은 함께 결집하고 공동의 성숙을 영적인 분위기로 삼아가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성령의 바람이 21세기를 선도하는 목회 속에서 아직 성취하지 못한 소망과 꿈을 매개화하기를 바랍니다.

성령론적인 충격으로 21세기가 재생되고 재창조되고 있습니다. 그 충격은 하나님 편에서 거대하게 주도하는 대속과 구속의 긴밀한 운동일 것입니다. 시대의 징조들이 세상을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로 다시 재편하고 계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징조들이 때로는 우리에게 어떤 현실적인 어려움을 초래할 지 불안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파국도 우주재생과 우주적인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개입하신 거룩한 굴곡이라고 이해하면 어떨지요.

지구중심을 편재된 곳에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흩으시는 것입니다. 빈부의 격차와 1세계 3세계의 차별이 너무 많은 영혼들을 어둠에서 울게 하는 현실입니다. 그러니 성만찬적인 나눔의 경제를 다시 배설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성만찬적인 경제는 모든 영혼들이 공평하게 나누어 먹고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우주공동체적인 혁명의 모델입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목회자상은 바로 거룩한 하나님의 침노와 통치를 이 시대의 다양한 징조에서 뵈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가오는 시대를 능동적으로 열고 선도하는 꿈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새롭게 도래하는 나라의 신실한 종들이 되게 하소서.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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