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감리교회 신년성회 “내 고백이 바뀌면 세상의 평가도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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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7-01-20 10:14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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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감리교회(강원근 목사)는 "거룩에로의 부르심"이라는 주제로 2017년 신년축복대성회를 1월 13일(금)부터 3일간 열었다. 강사는 이승우 목사(워싱턴 감리교회). 한편 강원근 목사는 1주일 뒤인 1월 20일(금)부터 3일간 휴스턴 순복음교회에서 "내 눈을 뜨게 하소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신년부흥집회를 인도했다.
뉴욕감리교회 신년성회 첫날 집회에서 이승우 목사는 누가복음 19:1-10을 본문으로 말씀을 전했다. 설교가 시작되고 불같이 전해지는 강력한 메시지 선포 그리고 잘 듣지 못하는 설교전개에 성도들은 집중하여 설교를 들었다.
이승우 목사는 성도라면 너무나 잘 아는 삭개오에 대한 내용의 설교를 하며, 예수님과 삭개오와의 만남과 변화에 대해 전하지 않았다. 만남이 이루어지기위해서 누군가 삭개오에게 예수님에 대해 전했을 것이고 그 전한 사람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그리고 오늘날 성도들이 교회에 대해 복음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전하고 있는 지를 물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하고 곱지 않는 눈으로 보는 것은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에게 교회를 전한 우리들의 전함이 혹시 잘못된 것이 아닌가를 물었다.
이승우 목사는 교회에 대해 세상이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교회를 어떻게 규정하느냐 하는 것이라며, 교회를 과연 제대로 알고 있는가를 물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의 본질을 전하기보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현상을 전하고 있다며, 제자의 고백이 바뀌어야 세상의 고백이 바뀌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성도들이 전해야 할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나누었다. 말씀으로 들어가 본다.
삭개오 이야기를 전하기 전에 사실은 이 이야기 속에 전재되어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어떻게 삭개오가 주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혹시 삭개오가 예수님과 약속을 했는가? 그렇다면 문장이 그렇게 흐를 수 없다. 약속은 안한 것은 고사하고 예수님은 삭개오가 사는 마을에 오신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났을까? 신비한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주 단순하지만 제게는 소중한 것들이 여기에 들어 있다.
누군가 삭개오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당연하다. 하지만 이것을 잊으면 안된다. 삭개오에게 예수님에 대해 무엇이라고 이야기했는지, 누가 이야기를 했는지, 어떤 기대를 가지고 했는지 대해서는 성경에 없다. 그러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났던 과정을 보면 적어도 누가 삭개오에게 예수님에 대해 매우 잘 말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만약에 그날 예수님이 지나가시는데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삭개오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예수님에 대해 삭개오에게 이야기를 했지만 진실함이 없었다면 이런 일들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세상이 교회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
세상에서 교회를 보는 눈이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고 말한다. ‘개독교’라고도 부르고 ‘먹사’라고도 많이 부르고 있다. “이것이 무슨 교회이냐”라며 교회를 보는 눈이 곱지 않다. 왜 그럴까? 세상이 다 교회를 알기 때문일까? 그것은 아니다. 누군가 이야기를 그렇게 했을 것이다. 누가 이야기를 했겠는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이야기 했을 것이다. 전에는 종교가 세상을 걱정했는데 이제는 세상이 종교를 걱정한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멋진 이야기 같지만 속지마라. 기독교는 세상을 걱정하기위해 있는 종교가 아니다. 또 세상은 교회를 걱정해 준 적이 없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내가 교회에 있으면서도 교회가 무엇인지를 잘 몰라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 전하고 있다. 그러니 들은 사람들은 잘못 들은 것 가지고 교회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만약 삭개오가 예수님에 대해 좋지 않게 잘못 들었다면 삭개오는 어떻게 되었을까?
교회에 대해 세상이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보느냐, 우리가 우리의 교회를 어떻게 규정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여러분들이 경험하고 있는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해 바르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주님께서 빌립보에 가셔서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는가 물으셨다. 그러자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 라고 한다고 답했다. 제자들 중에 물으시니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그것을 왜 물으셨을까? 세상이 당신에 대해 궁금히 여기는 것을 여론조사 하신 것일까? 그러면 제자들이 세상에서 “세례 요한”이라고 한다고 이야기했을 때 무슨 코멘트를 해주셔야 했을 것이다. 당시 세례 요한 같다는 말은 요즘으로 말하면 떴다, 대박이라는 말이다. 세례 요한은 성경에서만 아니라 역사에서 보면 당시 최고 인기였다.
예수님은 아무런 코멘트를 하지도 않으시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했다면 예수님은 박수치시고 “그래도 3년 가르친 보람이 있구나” 라고 코멘트를 해야 한다. 그런데 주님은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하셨다. 베드로가 잘 대답했는데 그것은 베드로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이 말씀의 포인트가 있는 것이다.
제자의 고백이 바뀌어야 세상의 고백이 바뀌는 것
왜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세례 요한이라고 하고 선지자라고 하는가? 당시 세상 사람들은 다 주님을 만났는가? 아니다. 누가 그렇게 이야기 한 것을 들은 것이다. 누가 이야기를 했는가? 주님을 만난 사람들과 제자들이 아직도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기에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같은 선지자라고 아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이나 제자들은 모르는데 수제자이니 정답을 맞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자라면 해야 될 고백을 베드로의 입술에 붙였다는 것이다. 이유는 무엇인가? 제자의 고백이 바뀌어야 세상의 고백이 바뀌는 것이다.
세상이 교회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성질을 내지 말라. 내 고백이 바뀌면 세상의 고백은 바뀌게 된다. 삭개오에게 들려진 예수에 대한 고백을 누가했는지 모른다.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소리가 외쳐졌다는 것이다.
교회의 현상보다 본질을 전하라
여러분들은 교회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우리교회 교인 중에 다른 주에서 살다가 친구를 찾아 이사 온 분이 있었다. 그러면 당연히 친구가 다니는 교회에 다녀야 한다. 그 친구가 다니는 교회는 참 좋은 교회이다. 그런데 비교하여 좀 모자라는 우리 교회에 왔다. 왜 왔을까? 친구가 “이 교회는 골치 아픈 교회야. 나는 어떻게 하다 보니 다니기 시작했는데 너는 다른 데에서 신앙생활을 해”라고 해서 좋은 교회에 못 다니고 그보다 못한 우리 교회에 왔다. 그 교회는 난리 나는 교회가 아니다. 자기의 경험이었다.
우리는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교회에서 일어나는 현상 때문에 교회의 본질을 착각할 때가 많다. 주의하라.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교회에 대해 말하는 것이 교회에 일어나는 것 중에 한 현상인지 아니면 교회의 본질인지 판단할 능력이 없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교회에 일어나는 현상을 교회의 본질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이 있다. 만약 그것을 구분시켜 상대에게 이해시킬 수 있으면 그렇게 하라. 그렇게 하려면 교회 안에서 연연하게 이어오는 이 교회가 어떤 교회라고 하는 것에 대해 우리들 속에서 그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여러분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교회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많이 싸운다. 그런데 예수가 그리스도인가 아닌가 해서 싸운 적이 있는가? 우리 교회는 없다. 본질은 같다고 본다. 교회에서 싸우는 이유들은 대부분 사소한 것들이다. 오히려 우리는 큰 것은 다 수용한다. 그런데 작은 것은 그렇게 안된다. 그런 경험 때문에 교회가 골치 아픈 데라고 말한다. 문제가 많다고 한다. 과연 교회가 문제가 많은 곳인가? 그러나 교회는 문제만 많은 사람들만 모인 곳이 아니다. 문제는 있어 살지만 문제의 해결에 대한 소망과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교회란 과연 어떤 곳인가?
요한복음 5장을 보면 베데스다 연못에 각색 병자들이 다 모였다고 했다. 그곳에 가면 병이 낫는다고 했다. 그런데 과연 그곳에 가기만 하면 병이 낫기에 모였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성경을 보면 가끔 어쩌다 한번 천사가 내려와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들어간 자는 낫는다고 했다. 그렇게 나을 확률이 얼마나 되는가? 언제 동할지를 알고 언제 들어가는가? 그런데 묘하다. 사람들은 모여 든 것이다. 왜 그런가? 그곳은 병이 낫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모였기 때문이다. 그 말이 거짓말인가? 아니다. 병이 낫는다. 그리고 병이 낫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환자들이 모였지만 그 곳은 병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언젠가는 내게도 병이 나을 기회를 주어진다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교회는 그런 곳이다.
하나님의 기적을 언제 경험할지 모른다. 물이 동한 다는 말이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성령이 임재하신다고 볼 수도 있고, 하나님이 직접 하신다고 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모인 사람은 한사람이 어쩌다 고쳐졌다고 하는 것 때문이 비판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게도 주어질 것이라고 소망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그것이 주어졌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해 돌아서지 않는다. 그때 또 나았다고 소문이 난다.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데 그것이 내게 일어나면 너무 좋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도 동일한 하나님의 역사이다.
2천년 교회역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역사가 일어났는데 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여기 지금 나에게 일어나야 능력이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인가?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다.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 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누가 뭐라고 한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삭개오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한 예수의 본질을 건드렸을 것이다.
전도는 무엇인가? 바로 그것이다. 교회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이, 예수가 내 삶의 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경험해도 그렇고 다른 사람이 경험한 한 것도 그렇다. 베드로전서를 보면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가려다 못간 지금으로 말하자면 터키 맨 위에 있는 지역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곳에 있는 성도들에게 ‘너희가 참 귀하다’고 하면서 ‘보지 않은 예수를 그렇게 믿고 사랑하는가’ 라고 한다. 어떻게 그렇게 사랑하는가? 자기가 보면 더 좋지만 본 사람들이 경험한 것들이 자기들이 주님을 사랑하는데 넉넉하다는 것이다.
교회의 역사는 만만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하시는 일들은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엄청나다. 그러니 사람들은 교회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건다. 이 교회로 인해 자신들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드린다. 정신없이 바쁜 사람들이 모여서 정신없는 사람들처럼 찬양한다. 왜 그런가? 복음의 본질 때문에 그런 것이다. 바꾸었다는 사실이 나도 바뀔 것이라는 소망, 내 속에서 역사하였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좋은 평가 뒤에는?
데살로니가 서를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한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가 있었다. 그런 소문이 각처에 퍼져서 바울은 갈 때마다 데살로니가 교회 이야기를 하면 더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아무한테도 이야기해도 다 안다고 했다. 생각해 보라. 여러 곳에 초대교회들이 많은데 데살로니가 교회만 하나님의 역사가 유별해서 그렇게 소문이 났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면 어디든지 동일하다. 교회 규모에 따라 지역에 따라 혹은 인종에 따라 하나님의 역사가 달라지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고백하는 자에게 동일한 역사가 나타난다. 그런데 왜 데살로니가 교회를 다르게 이야기하는가?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 교회를 일으킨 하나님의 역사가 다른 것이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회의 고백이 다른 것이었다.
묘하다.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날 때는 사단도 동일하게 역사한다. 예수님이 시험을 받았을 때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는데 그곳에 사단이 있었다. 동일하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막으려 한다. 하나님의 일에 쓰이려 하면 그 꼴을 못 본다. 아무 일도 안하고 있으면 사단은 시험을 안한다. 그렇게 놓고 보면 그것으로 인해 슬퍼하고 화를 내는 일을 사단은 좋아한다. 영적인 문제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어떻게 하시든지 회복하려고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다고 해서 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주의 뜻대로 사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주어진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한다면 훼방하는 역사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여기는 아니다. 그러니 힘들다.
그래서 우리가 추슬러야 할 것이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다른 교회에 없는 하나님의 성령님의 역사가 유별났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본 것이다. 저는 오늘날 교회도 동일하다고 본다. 양적 성장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정말 귀하게 사는 모습들로 회자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사단의 역사들로 회자되는 교회가 분명히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의 차이가 아니다. 무엇을 보느냐 관점의 차이이고 고백의 차이이다. 저는 뉴욕감리교회가 교회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고 그 성령님의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로 고백하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한다.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우리가 그렇게 고백하는 일들은 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다. 만약에 삭개오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전한 자가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자기의 경험으로만 가지고 있었다면 삭개오에게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여러분들에게 정말로 상관있고 사랑하는 사람들, 스쳐 지나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적어도 복음이 무엇인지, 예수가 누구인지, 신앙이 무엇인지, 적어도 내가 경험한 것이 없다면 객관적인 데이터라도 내밀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가져야 할 매우 소중한 짐이다. 우리는 고백으로 구원함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면 고백만 하면 아무렇게나 살면 되는가? 안된다. 내가 하는 고백이 나를 구원하는데 부족하기에 나의 어떤 행실들을 그 위에 챙겨서 얹어 놓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구원은 나의 고백을 통해서만 온전해 진다. 단 내가 바르게 살지 못하면 내 입술에서 그 고백에 떠나 버린다. 더 나아가서 내가 바르게 살지 못하면서 그 이야기를 하면 고백을 듣는 사람이 듣는 것을 믿지 않는다. 내가 바르게 살아야 하는 것은 내 고백이 내 입술에서 떠나지 않도록 그리고 나의 고백이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역사를 가져올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한 가지만 기억하라. 누군지 모르지만,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모르지만 누군가 삭개오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했다. 어떤 기대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말을 했다. 적어도 말은 해야 한다. 기대가 없어도 확신이 없어도 말은 해야 한다. 적어도 내가 예수를 만났으면, 적어도 복음을 들었다면 말을 해야 한다. 그것이 전도이다. 우리 교회도 매주 마켓으로 전도를 나간다. 전도하다 보면 필요 없다고 성질내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수고한다고 떡과 마실 것을 주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 보람이 있다고 말한다. 수고한다고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사람들은 전도가 필요 없는 사람들이다. 보람은 바로 전도할 때 막하는 사람들이다. 교회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 누군가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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