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윤 목사 "교회의 비리와 덕과의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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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0-03-10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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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있어서 덕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베드로 사도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세워야 한다고 말씀해 주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덕은 복음의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신앙의 실천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서 아름다운 소식으로 전파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 범죄와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기독교계에서는 덕을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문제를 덮어 두기에 급급한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한 번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담임 목사님이 교회의 공적 자금인 헌금을 사사로이 유용하고, 아무에게도 통보하지도 않고, 허락도 받지 않은체 본인 마음대로 사용했다고 가정을 해 보자. 이런 경우에 지금까지는 거의 대부분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렇다. 반면 같은 경우를 일반 회사로 바꾸어서 생각해 보자.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경우라면 몰라도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곧바로 법적인 처벌을 받게 된다. 많은 경우에 회사의 CEO들이 감옥에 가는 이유가 바로 이런 죄를 범했기 때문인 것을 우리는 신문이나 TV 뉴스를 통해서 자주 접하고 있다.
또 다른 예로 담임 목사님이 교회를 다니는 성도를 상대로 해서 십계명의 7계명에 해당되는 간음의 죄를 범했다고 가정하자. 그것도 한 번의 실수로 그친 것이 아니라 2-3번, 10 번, 20번으로 상습적인 죄로 발전했다고 치자, 이런 경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를 되돌아보면, 교계는 감추고, 숨기는 것이 최고의 일인양 묻어 버리기 일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세상으로 바꿔서 생각해 보자. 회사의 사장이 직원을 상대로 간음을 하거나 고급 공무원이나 국회의원, 장관 등과 같은 정치인들이 똑같은 죄를 범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국의 경우에는 실정법에 저촉이 되어 감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여론의 물매를 맞고 다시는 공직에 나서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교계에서는 이런 범죄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눈감아 주는 형편이지 않은가? 이미 잘 알려진 예로 뉴욕 장로교회를 섬겼던 L 목사님의 경우, 노회의 징계가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새로이 교회에 부임하여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고, 노회원들은 그런 범죄자를 회복시키고자 투표하여 근소한 차이로 복권을 시키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세상은 냉철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것을 외면하고서는 결코 기독교의 미래는 밝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예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주의 종이 상습적인 거짓말을 계속해서 한다고 가정 할 때, 이런 사람에게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강단권을 계속해서 맡겨야 하는지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정도의 일은 별로 문제 되지가 않는 것이 현실이지 않는가? 실로 통탄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서 충청권 지역에서 선거 공약으로 약속한 것을 번복함으로 인해서 온갖 공세와 압박을 다 받고 있는 형편이다.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른 것 같다. 엄격히 이야기 해서 정치인들의 공약이야말로 빈껍데기 약속이었던 적이 불과 얼마 전의 이야기였지 않는가? 그러나 이제는 선거 공약의 실천 여부를 꼼꼼히 점검하는 시민 단체들이 있어서 어떤 정치인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공약을 남발 했다가는 다음 번 선거에서 혹독한 댓가를 치러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진리의 말씀을 진실로 증거 해야만 하는 주의 종들의 입술이 더 이상 부끄러워 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고 간절하다.
덕을 세운다는 이유로 문제를 덮어 주는 관행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자. 교회에 문제가 발생했다. 그리고 이 문제에는 목사나 장로와 같은 교회를 책임지는 직분에 있는 중직자들이 관계 되어져 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한다면 이 문제는 더 이상 덕을 세울 수 있는 종류의 사항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상태에서 복음의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일들이 덕을 세우는 것이지 문제가 발생한 일을 통해서 어떻게 덕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문제를 덮어주고, 가려주면 덕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에는 더 이상, 덕을 세울 수 있는 사안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이것이 더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를 잘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목사님과 장로님 등과 같은 교회의 중직자들에게 요구되는 사회적인 도덕의 기준은 세상 보다도 훨씬 더 엄격하고 높다. 그렇기 때문에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교계는 더욱 엄정하게 벌을 물어서 죄를 회개할 수 있도록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죄의 값을 다 치룬 후에 다시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 주는 것이 옳은 처리일 것이다. 죄는 미워하지만 사람은 미워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이미 영적인 싸움에서 사단에게 진 것이 된다. 그러나 죄는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하고 대적해야 하고, 미워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소중하다고 해서 죄까지 그냥 덮어 둘 수는 없는 것이다. 반드시 철저하고도 진정성이 있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맺혀져야 한다.
유승준과 박재범 케이스
대한민국의 정서는 곧 한국 사람의 일반적인 정서는 그렇게 관대하지 못하다. 예를 들어서 20대의 혈기를 지닌 가수 유승준이라는 청년이 군입대를 기피하기 위해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자 국민들은 온갖 비난을 다 쏟아 부었고 젊은 청년의 가슴을 시커멓게 만들었다. 그 결과로 유승준씨는 대한민국 입국 자체를 거부당했고, 가수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한국에서는 음반을 제작하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공인으로써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말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다. 젊은 청년이 얼마든지 실수 할 수 있지 않은가? 그가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을 했다면 다시금 활동할 수 있도록 사회는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국인의 정서는 아직 그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닌 것 같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한국인의 정서를 어떻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무시할 수 없기에 가수 유승준은 한 번의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고, 전혀 다른 인생으로 혹독한 죄의 값을 치러야만 한 것이다.
최근에 일로 현재 최고 정상급의 그룹인 2PM의 박재범이라는 젊은 가수는 연습생 시절, 친구들과 나눴던 이야기 속에서 한국을 비하 했다는 이유로 가수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자.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어린 청소년이 안보는 곳에서는 임금님 욕도 한다고 하는데, 연습생 시절에 했던 말실수 하나 때문에 최고 정상급의 가수가 되기까지 흘렸던 땀과 노력이 일순간에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가야만 하는가? 어느 정도 나무라고 책망하고 말았으면 좋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대통령을 가지고도 얼마나 많은 험담과 욕을 쏟아 붇지 않는가? 때로는 즐기기까지 하지 않는가?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노무현 대통령을 NO 대통령이라고까지 비하하지 않았던가? 젊은 청년의 실수를 가지고 가수 생활을 접게까지 할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가슴아프고 안타까운 또 하나의 일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국인의 정서는 이런 실수까지도 공인들에게 있어선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정서를 초월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말이다.
유승준씨와 박재범씨 같은 어린 10대 후반 또는 20대 초반의 가수들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과 사소한 말실수를 한 것을 가지고도 가수 생활을 중지해야 했고, 지금까지도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최고의 도덕적인 기준에 적용을 받는 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의 경우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자명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죄의 문제에 대한 접근
필자는 죄의 문제에 대한 접근을 2가지로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고 본다. 먼저는 성도들의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철저하게 영혼들을 품어 주어야 한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조차도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 회복을 시켜 주셨던 것처럼 성도들의 범죄는 끝까지 품어주는 관용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목회자의 경우는 다르다. 범죄의 주체가 교회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자라고 한다면 철저하고도 엄중하게 처벌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고,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외식하는 지도자들이었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거침없는 독설을 퍼부으셨다.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저주의 말씀도 서슴치 않고 담대하게 선포하셨다. 뿐만 아니라 채찍을 휘둘리시면서까지 성전을 깨끗이 하고자 하셨다. 예수님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사도성에 의문을 달고 다녔던 마지막으로 사도가 된 바울은 당시 예수님의 수제자로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문제로 외식을 하게 되자 대면하여서 크게 책망하였고, 그것도 모든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거침없이 면박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성경에 기록하여 후세 대대로 읽을 수 있도록 기록으로까지 남긴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갈 2:11-16).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지도자들의 외식과 범죄에 대해서 취한 자세가 이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입장도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교계를 통해서는 성전을 깨끗이 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이나 사도 바울과 같은 모습을 찾아 보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더욱이 성적인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에는 다윗왕의 예를 들면서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또 그의 남편까지도 살인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용서해 주셨다고 하면서 범죄자를 감싸는 행위는 지극히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 이렇게 적용해 보자. 과연 이 일이 오늘날에도 가능한 일인지 생각해 보자. 대한민국의 최고 통치권자인 이명박 대통령께서 데리고 있는 장관의 아내를 청와대로 데려다가 간음의 죄를 범하고, 첩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장관을 이라크 최고 위험 지역으로 보내서 죽을 수밖에 없도록 고의적으로 만들었다면 국민들과 교계는 그가 눈물로 시편 51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회개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대통령으로 계속해서 인정해 주고, 나라를 통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비유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림도 없는 이야기이다. 만일 그런 일이 실제로 생긴다면 즉시로 사임하고 대한민국을 떠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탄핵되어 역사에 죄인으로 두고, 두고 후세에 치욕스런 일로 전해지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일부 공직 후보자들은 부동산 투기나 위장전입, 논문 중복 기재 등과 같은 이유로도 장관이나 국무총리를 위한 인사 청문회에서 전국적인 개망신을 당하면서 중도에 사퇴해야 했고, 현직에서도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문제를 덮으면 덕이 되는가?
문제를 덮으면 덕이 되는가? 덕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문제를 무조건 덮고자 하는 태도는 복음 전파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지금까지 교계가 취한 그런 결과가 기독교가 아닌 개독교가 된 원인 중에 하나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히려 일벌백계의 자세로 철저하고도 엄중하게 처리한다면 이런 문제의 발생은 급감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는 스스로 뼈를 깎는 것과 같은 자기 개혁을 이루어야만 한다.
한국은 요즘 교육계의 비리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교육감을 비롯하여 장학사, 일선 교장들이 뇌물을 주고, 받으면서 인사 청탁을 한 일로 시끄러운 것이다. 한 번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교육계만 이렇게 썩은 것인가? 종교계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학처럼 고고하게 청렴결백하게 목회 사역을 감당해 왔는가 말이다. 들쳐 내고 밝히지 않아서 그렇지 얼마나 많은 비리와 부정, 불법과 탈법과 편법들이 난무하고 있지 않은가?
필자가 알고 있는 중요한 범죄의 경우만 하더라도 엄청나게 많다. 교역자 생활 15년 동안 들은 이야기만 하더라도 수없이 많고 이 가운데는 확실한 범죄의 경우도 적지 않게 있었다. 필자 역시도 덕을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하였으나 20년 동안 이민교회를 지켜보면서 발견하게 된 것은 그런 범죄의 인사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고 계속해서 제2, 제3의 범죄들을 끊임없이 중지하지 않고 계속 자행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죄의 삯이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더 높은 차원의 청렴성과 더 높은 기준의 도덕성을 가져야 할 기독교가 세상 보다도 못한 처사를 계속 한다면, 덕을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모르쇠, 숨기쇠로 일관한다면 젊은이들을 계속해서 교회를 향해서 등을 돌리고 기독교의 복음을 외면할 것이다. 진정한 덕이란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일들이 숨길 수 없도록 자연적으로 알려져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철저한 징계와 처벌이 오히려 덕을 세우는데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세상을 초월해서 존재할 수 있는가? 세상에서도 간음을 하면 한국의 경우에는 실정법으로 감옥에 가야하고, 회사의 돈을 유용하거나 공금을 횡령하거나 비자금을 만든 경우에는 그룹의 총수라고 하더라도 감옥에 가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교회의 장로님으로 섬기시는 분이 그룹의 총수로 비자금 문제로 감옥에 가게 될 때, 교회는 덕을 세우고, 덕이 안 된다는 일이라고 해서 계속해서 감추고, 덮어줘야만 하겠는가?
목사님께서 범한 7계명은 선악과처럼 아예 입도 뻥끗하지 말아야 될 일인가? 아니면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는 징계를 받음으로 하나님과 세상에 대해 진실로 참회함으로 복음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다시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보며 토론을 해야 할 때인 것 같다.
ⓒ 2010 아멘넷 뉴스(USAamen.net)
한 번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담임 목사님이 교회의 공적 자금인 헌금을 사사로이 유용하고, 아무에게도 통보하지도 않고, 허락도 받지 않은체 본인 마음대로 사용했다고 가정을 해 보자. 이런 경우에 지금까지는 거의 대부분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렇다. 반면 같은 경우를 일반 회사로 바꾸어서 생각해 보자.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경우라면 몰라도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곧바로 법적인 처벌을 받게 된다. 많은 경우에 회사의 CEO들이 감옥에 가는 이유가 바로 이런 죄를 범했기 때문인 것을 우리는 신문이나 TV 뉴스를 통해서 자주 접하고 있다.
또 다른 예로 담임 목사님이 교회를 다니는 성도를 상대로 해서 십계명의 7계명에 해당되는 간음의 죄를 범했다고 가정하자. 그것도 한 번의 실수로 그친 것이 아니라 2-3번, 10 번, 20번으로 상습적인 죄로 발전했다고 치자, 이런 경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를 되돌아보면, 교계는 감추고, 숨기는 것이 최고의 일인양 묻어 버리기 일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세상으로 바꿔서 생각해 보자. 회사의 사장이 직원을 상대로 간음을 하거나 고급 공무원이나 국회의원, 장관 등과 같은 정치인들이 똑같은 죄를 범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국의 경우에는 실정법에 저촉이 되어 감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여론의 물매를 맞고 다시는 공직에 나서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교계에서는 이런 범죄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눈감아 주는 형편이지 않은가? 이미 잘 알려진 예로 뉴욕 장로교회를 섬겼던 L 목사님의 경우, 노회의 징계가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새로이 교회에 부임하여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고, 노회원들은 그런 범죄자를 회복시키고자 투표하여 근소한 차이로 복권을 시키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세상은 냉철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것을 외면하고서는 결코 기독교의 미래는 밝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예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주의 종이 상습적인 거짓말을 계속해서 한다고 가정 할 때, 이런 사람에게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강단권을 계속해서 맡겨야 하는지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정도의 일은 별로 문제 되지가 않는 것이 현실이지 않는가? 실로 통탄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서 충청권 지역에서 선거 공약으로 약속한 것을 번복함으로 인해서 온갖 공세와 압박을 다 받고 있는 형편이다.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른 것 같다. 엄격히 이야기 해서 정치인들의 공약이야말로 빈껍데기 약속이었던 적이 불과 얼마 전의 이야기였지 않는가? 그러나 이제는 선거 공약의 실천 여부를 꼼꼼히 점검하는 시민 단체들이 있어서 어떤 정치인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공약을 남발 했다가는 다음 번 선거에서 혹독한 댓가를 치러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진리의 말씀을 진실로 증거 해야만 하는 주의 종들의 입술이 더 이상 부끄러워 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고 간절하다.
덕을 세운다는 이유로 문제를 덮어 주는 관행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자. 교회에 문제가 발생했다. 그리고 이 문제에는 목사나 장로와 같은 교회를 책임지는 직분에 있는 중직자들이 관계 되어져 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한다면 이 문제는 더 이상 덕을 세울 수 있는 종류의 사항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상태에서 복음의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일들이 덕을 세우는 것이지 문제가 발생한 일을 통해서 어떻게 덕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문제를 덮어주고, 가려주면 덕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에는 더 이상, 덕을 세울 수 있는 사안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이것이 더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를 잘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목사님과 장로님 등과 같은 교회의 중직자들에게 요구되는 사회적인 도덕의 기준은 세상 보다도 훨씬 더 엄격하고 높다. 그렇기 때문에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교계는 더욱 엄정하게 벌을 물어서 죄를 회개할 수 있도록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죄의 값을 다 치룬 후에 다시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 주는 것이 옳은 처리일 것이다. 죄는 미워하지만 사람은 미워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이미 영적인 싸움에서 사단에게 진 것이 된다. 그러나 죄는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하고 대적해야 하고, 미워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소중하다고 해서 죄까지 그냥 덮어 둘 수는 없는 것이다. 반드시 철저하고도 진정성이 있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맺혀져야 한다.
유승준과 박재범 케이스
대한민국의 정서는 곧 한국 사람의 일반적인 정서는 그렇게 관대하지 못하다. 예를 들어서 20대의 혈기를 지닌 가수 유승준이라는 청년이 군입대를 기피하기 위해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자 국민들은 온갖 비난을 다 쏟아 부었고 젊은 청년의 가슴을 시커멓게 만들었다. 그 결과로 유승준씨는 대한민국 입국 자체를 거부당했고, 가수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한국에서는 음반을 제작하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공인으로써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말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다. 젊은 청년이 얼마든지 실수 할 수 있지 않은가? 그가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을 했다면 다시금 활동할 수 있도록 사회는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국인의 정서는 아직 그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닌 것 같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한국인의 정서를 어떻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무시할 수 없기에 가수 유승준은 한 번의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고, 전혀 다른 인생으로 혹독한 죄의 값을 치러야만 한 것이다.
최근에 일로 현재 최고 정상급의 그룹인 2PM의 박재범이라는 젊은 가수는 연습생 시절, 친구들과 나눴던 이야기 속에서 한국을 비하 했다는 이유로 가수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자.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어린 청소년이 안보는 곳에서는 임금님 욕도 한다고 하는데, 연습생 시절에 했던 말실수 하나 때문에 최고 정상급의 가수가 되기까지 흘렸던 땀과 노력이 일순간에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가야만 하는가? 어느 정도 나무라고 책망하고 말았으면 좋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대통령을 가지고도 얼마나 많은 험담과 욕을 쏟아 붇지 않는가? 때로는 즐기기까지 하지 않는가?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노무현 대통령을 NO 대통령이라고까지 비하하지 않았던가? 젊은 청년의 실수를 가지고 가수 생활을 접게까지 할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가슴아프고 안타까운 또 하나의 일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국인의 정서는 이런 실수까지도 공인들에게 있어선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정서를 초월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말이다.
유승준씨와 박재범씨 같은 어린 10대 후반 또는 20대 초반의 가수들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과 사소한 말실수를 한 것을 가지고도 가수 생활을 중지해야 했고, 지금까지도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최고의 도덕적인 기준에 적용을 받는 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의 경우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자명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죄의 문제에 대한 접근
필자는 죄의 문제에 대한 접근을 2가지로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고 본다. 먼저는 성도들의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철저하게 영혼들을 품어 주어야 한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조차도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 회복을 시켜 주셨던 것처럼 성도들의 범죄는 끝까지 품어주는 관용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목회자의 경우는 다르다. 범죄의 주체가 교회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자라고 한다면 철저하고도 엄중하게 처벌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고,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외식하는 지도자들이었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거침없는 독설을 퍼부으셨다.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저주의 말씀도 서슴치 않고 담대하게 선포하셨다. 뿐만 아니라 채찍을 휘둘리시면서까지 성전을 깨끗이 하고자 하셨다. 예수님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사도성에 의문을 달고 다녔던 마지막으로 사도가 된 바울은 당시 예수님의 수제자로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문제로 외식을 하게 되자 대면하여서 크게 책망하였고, 그것도 모든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거침없이 면박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성경에 기록하여 후세 대대로 읽을 수 있도록 기록으로까지 남긴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갈 2:11-16).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지도자들의 외식과 범죄에 대해서 취한 자세가 이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입장도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교계를 통해서는 성전을 깨끗이 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이나 사도 바울과 같은 모습을 찾아 보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더욱이 성적인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에는 다윗왕의 예를 들면서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또 그의 남편까지도 살인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용서해 주셨다고 하면서 범죄자를 감싸는 행위는 지극히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 이렇게 적용해 보자. 과연 이 일이 오늘날에도 가능한 일인지 생각해 보자. 대한민국의 최고 통치권자인 이명박 대통령께서 데리고 있는 장관의 아내를 청와대로 데려다가 간음의 죄를 범하고, 첩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장관을 이라크 최고 위험 지역으로 보내서 죽을 수밖에 없도록 고의적으로 만들었다면 국민들과 교계는 그가 눈물로 시편 51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회개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대통령으로 계속해서 인정해 주고, 나라를 통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비유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림도 없는 이야기이다. 만일 그런 일이 실제로 생긴다면 즉시로 사임하고 대한민국을 떠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탄핵되어 역사에 죄인으로 두고, 두고 후세에 치욕스런 일로 전해지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일부 공직 후보자들은 부동산 투기나 위장전입, 논문 중복 기재 등과 같은 이유로도 장관이나 국무총리를 위한 인사 청문회에서 전국적인 개망신을 당하면서 중도에 사퇴해야 했고, 현직에서도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문제를 덮으면 덕이 되는가?
문제를 덮으면 덕이 되는가? 덕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문제를 무조건 덮고자 하는 태도는 복음 전파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지금까지 교계가 취한 그런 결과가 기독교가 아닌 개독교가 된 원인 중에 하나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히려 일벌백계의 자세로 철저하고도 엄중하게 처리한다면 이런 문제의 발생은 급감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는 스스로 뼈를 깎는 것과 같은 자기 개혁을 이루어야만 한다.
한국은 요즘 교육계의 비리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교육감을 비롯하여 장학사, 일선 교장들이 뇌물을 주고, 받으면서 인사 청탁을 한 일로 시끄러운 것이다. 한 번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교육계만 이렇게 썩은 것인가? 종교계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학처럼 고고하게 청렴결백하게 목회 사역을 감당해 왔는가 말이다. 들쳐 내고 밝히지 않아서 그렇지 얼마나 많은 비리와 부정, 불법과 탈법과 편법들이 난무하고 있지 않은가?
필자가 알고 있는 중요한 범죄의 경우만 하더라도 엄청나게 많다. 교역자 생활 15년 동안 들은 이야기만 하더라도 수없이 많고 이 가운데는 확실한 범죄의 경우도 적지 않게 있었다. 필자 역시도 덕을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하였으나 20년 동안 이민교회를 지켜보면서 발견하게 된 것은 그런 범죄의 인사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고 계속해서 제2, 제3의 범죄들을 끊임없이 중지하지 않고 계속 자행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죄의 삯이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더 높은 차원의 청렴성과 더 높은 기준의 도덕성을 가져야 할 기독교가 세상 보다도 못한 처사를 계속 한다면, 덕을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모르쇠, 숨기쇠로 일관한다면 젊은이들을 계속해서 교회를 향해서 등을 돌리고 기독교의 복음을 외면할 것이다. 진정한 덕이란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일들이 숨길 수 없도록 자연적으로 알려져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철저한 징계와 처벌이 오히려 덕을 세우는데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세상을 초월해서 존재할 수 있는가? 세상에서도 간음을 하면 한국의 경우에는 실정법으로 감옥에 가야하고, 회사의 돈을 유용하거나 공금을 횡령하거나 비자금을 만든 경우에는 그룹의 총수라고 하더라도 감옥에 가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교회의 장로님으로 섬기시는 분이 그룹의 총수로 비자금 문제로 감옥에 가게 될 때, 교회는 덕을 세우고, 덕이 안 된다는 일이라고 해서 계속해서 감추고, 덮어줘야만 하겠는가?
목사님께서 범한 7계명은 선악과처럼 아예 입도 뻥끗하지 말아야 될 일인가? 아니면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는 징계를 받음으로 하나님과 세상에 대해 진실로 참회함으로 복음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다시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보며 토론을 해야 할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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