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은 목사 "개척목회-교회성장과 원칙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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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ㆍ2010-04-04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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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몸으로 담아 썩어져 가는 세상, 그 본래의 맛을 잃어가는 세상, 어둠의 세력에 의해 참 생명을 잃어버린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며, 되살리는 일이 소금된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뉴욕소금교회 홈페이지)"
2010년 부활절을 앞두고 뉴욕소금교회 한종은 목사를 인터뷰하고, 교회의 빛과 소금된 사명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 목사는 3년전인 2007년 1월 뉴욕소금교회를 개척했으며, 현재 조직교회에 한걸음 성큼 다가서 있다.
소금으로서 교회의 사명, 생명과 사랑, 나눔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목회관, 교회의 부흥과 목회적 원칙을 지키려는 개척교회 목회자로서의 갈등, 개척과정에서의 간증, 별세목회자 고(故) 이중표 목사와의 일화까지 두시간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한종은 목사는 한 가지 고민을 밝혔다. 한 목사는 "옳은 말을 하고, 옳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옳은 사람이 아니라, 옳은 일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옳은 사람"이라며, “늘 강단에서 옳은 말을 해야만 하는 목회자로서 스스로 행하지 못하는 진리를 선포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때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다”며 “진리대로 살기위한 끊임없는 성화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또한 "행동하는 신앙양심을 가진 목회자라야 진실한 목회자라고 생각한다. 바른 이야기를 많이 하는 목회자보다 바른 삶을 살아가는 목회자들이 많아 질 때 교회의 건강성을 회복하고, 교회가 시대를 밝히는 횃불의 역할을 감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한종은 목사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본인을 소개해주시죠.
한신대 신학과와 동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2001년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한신교회(故 이중표 목사) 부목사로 사역했다. 2003년 뉴욕으로 건너와 NYTS(MPS)를 졸업했으며, 풀러신학원에서 선교학을 공부했고, 논문만 남겨놓고 있다. 뉴욕에 와서는 롱아일랜드 한인교회 교육목사로 3년을 섬겼고, 2007년 뉴욕소금교회를 개척했다.
오래전 작고하신 아버지는 장로님이셨는데, 겸손한 신앙인격으로 섬김의 본을 보이셨던 존경받는 분이었다. 부모님의 서원으로 목사가 되었고, 어린 시절부터 목사가 되야한다는 세뇌(?)를 받으며 자랐다.
교회이름을 '소금'이라고 지었는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소금은 생명을 살리고 부패를 방지하며, 음식의 맛을 결정짓는 인간의 삶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물질이다. 소금교회는 예수님의 생명을 삶으로 담아 썩어져 가는 세상, 그 본래의 맛을 잃어가는 세상, 어둠의 세력에 의해 참 생명을 잃어버린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며, 되살리는 일을 성도의 사명으로 믿고, 소금의 삶을 살아내고자 한다.
그러나, 소금이 적당한 양이 들어가면 좋은 결과를 만들지만, 사해에 생물이 살 수 없는 것처럼, 과하면 생명을 죽이기도 한다. 염분은 적당해야지, 지나치게 많으면 폐단이 있다. 소금은 항상 발란스가 중요하다. 신학교 시절부터 건강한 영성에 대한 많은 고민을 했다. 그 결과 내린 결론은 해방의 영성과 복음의 영성의 균형이다. 당시 신학생들의 이슈는 개인구원이 먼저냐, 사회구원이 먼저냐 하는 것이었다. 해방의 영성이 사회구원이라면, 복음의 영성은 개인구원이다.
사회구원이나, 개인구원의 양 극단에 치우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균형과 조화를 이룰때 건강한 영성, 건강한 교회가 세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교회에는 예언자적인 사명과 제사장적인 사명이 있다. 불의에 저항하는 것이 예언자적 사명이라면, 돌봄과 치유 그리고 회복은 제사장의 사명이다. 이 두가지의 사명역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본다.
(기자: 예수님은 극단적인 분이시기도 하셨다.)
그것은 성경해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실 오늘날 신학은 바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본다. 복음서에서 그려지는 역사적인 예수의 모습을 통해 복음을 정의하기 보다, 바울이 전하는 고백적인 복음을 통해 예수를 보게되니, 결과적으로 역사적인 예수를 놓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복음서를 통해 보는 예수가 역사적인 예수이다.
발란스의 시각으로 예수의 삶을 보자. 당시 예수님은 종교적 권력과 충돌하고, 가진자들, 배운자들과 부딪치시면서, 복음의 본질을 깨우치기 위한 거침없는 투쟁을 하셨으므로, 극단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반면에 예수님은 없는자, 못배운자, 천한자와 같은 정치,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위로자셨다. 사회적인 약자와 소외된 자의 편에서 서서, 그들의 편이 되어주시는 예수님의 삶을 통해 참된 위로와 돌봄, 치유의 예수님, 사랑의 예수님을 발견할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을 경험한다.
발란스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치우치지 않는 것이 때로는 기회주의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항상 기본적인 자리는 진리의 편에 서 있어야 한다. 진리의 편에 서서 생각이 다르고, 신념이 달라도 사랑안에서 상대를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갖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종종 마치 편을 가르듯,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사람을 본다. 중요한 것은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품는 큰 마음이 필요하다고 본다. 내가 좋아하는 말중에 “다양성속에 일치”라는 표현이 있다. 서로의 다름을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큰 뜻을 위해 연합하고 일치된 힘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목회관은 무엇인가?
교회를 '생명과 사랑, 나눔의 공동체'라고 본다. 이것이 교회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본질이자 핵심가치이다. 교회는 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행동해야 하며 노력해야 한다.
우리 교회는 생명가치의 실현을 위한 '비전 2030'을 세웠다. 2030년까지 지구촌의 가난한 사람들의 교육을 위한 20개의 학교와, 생명살림을 위한 30개의 병원을 세워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고자 한다.
우리사회가 풍족함속에서 잘먹고 잘사는 동안에도 지구촌에는 여전히 기아와 질병, 재난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이웃들이 있다. 2030 비전은 생명의 가치를 가장 소중하다고 보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해 의료 선교사업으로 생명을 구하고, 나눔의 빵을 통해 구제하며, 궁극적으로 교육사업을 통해 그들 스스로 가난한 환경을 이겨내고, 좋은 사회적 환경을 조성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민사회의 인권문제도 고민하고 있다. 마이너리티로 살고 있는 한인들의 인권이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얼마전 한분이 투신자살을 했다. 경찰은 이분의 연고자가 없다는 이유로 기본적인 사고경위조차 수사를 하지 않고, 빠른시간에 사건을 종결했다. 과연 미국인이라면 그렇게 쉽게 종결이 됐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이민사회의 한인들 가운데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이웃들이 존재한다. 위의 예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생각한다. 언어소통의 문제, 인종과 문화의 차이때문에 고통받는 이웃이 많다. 교회가 한인들의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가 독립적으로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없다면, 교회간 연대나, 한인 인권단체, 미국 주류사회의 인권단체들과 같이 제휴해서 한인 이민자들의 인권문제를 돕기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기자: 한신대 출신이라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한신대 출신이라고 그런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웃의 아픔을 아픔 그대로 느낄 수 있느냐 이다. 신학적 배경이나,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냐를 떠나서 이웃들이 실제로 당하고 있는 아픔을, 가슴깊이 아픔으로 느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예수가 말한 복음의 핵심은 사랑이다. 사랑은 긍휼의 마음을 품는 것이며, 함께 아파하고, 그 아픔에 동참하는 일이다.
교회는 나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교회가 재산을 축적하면 안된다고 본다. 물질을 축복의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 은사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물질을 축복으로 이해하면 축적하게 되고, 결국 나를 위해 사용하게 된다. 그렇지만 물질을 은사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나누게 된다. 은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물질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나가는 도구로 보아야 한다.
은사로서 물질을 받으면 이웃과 사회를 돕고, 하나님을 위해 어떻게 선하게 사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교회는 주신 물질로 사회와 이웃을 위해 나누어야 한다. 성도들 또한 물질에 대한 은사적 관점의 신앙관이 정립될때 기복주의를 극복하고, 진정한 나눔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으로 믿는다.
오늘날 교회에 대한 반기독교적인 정서가 생기는 이유는 교회마저 물질주의 가치관으로 대형화되고, 물량주의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세속적 성공의 가치관을 교회가 강조할 때 신앙이 병들게 되고 교회도 부패된다. 이 사회의 물질주의가 신앙과 교회를 깊이 병들게 한다.
신앙인의 바른 물질관을 정립하지 않으면, 물질이 많은 사람이 복받은 사람으로 인식되는 일이 우스운 일이 벌어진다. 출세하고 사회적 성공을 거둔 사람만을 복받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욕망을 비우고, 세속적인 가치가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가치들로 그 빈마음에 채워야 한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축복이다.
신학적 배경에 따라 목회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이 다를 수 있다.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수 도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대의에 뜻을 같이 할 때, 신앙배경과 무관하게 건강한 교회를 위해 연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함께 일치된 목소리로 교회건강을 회복하는 일에 뜻을 모으는 교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교회의 비전중에 '끊임없이 갱신되는 교회'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이 시대의 문화속에서 막강한 도전을 받고 있다. 시대와 문화의 요구속에서 교회가 세상속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복음의 영향력과 도전을 주기 위해서는 교회의 문턱을 낮추는 것이 필요하다. 전통적인 교회특성에 갇히면 세상과 교회가 분리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가치인 진리와 생명, 사랑의 가치가 왜곡되거나, 훼손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세상을 향해 교회가 열린 모습으로 다가가야 한다.
문화적인 콘텐츠로 나갈수 있다고 본다. 친구중에 영화설교를 하는 친구가 있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영화속에서 설교테마를 찾아내어 영화를 같이 감상을 하면서 그곳에서 복음의 메세지를 찾아내고 설교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그런 측면도 문화선교적인 측면에서 좋다고 본다. 맨하탄의 정원교회도 카페를 열어 누구나 손쉽고 부담없이 교회를 찾을 수 있도록 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교회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가 있다. 모이는 교회는 우리가 아는 전통적인 교회 공동체지만 흩어지는 교회는 개인의 삶이다. 성도들 각자가 흩어지는 교회이다. 삶의 현장 어느 자리이든지 그 가운데 사랑과 생명인 복음의 진리가 적용될 때 그곳이 교회가 된다. 구원이란 교회밖에서도 일어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건이다. 성도들이 제한된 교리의 틀속에서 사고하지 않고, 삶의 자유함속에서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실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복음의 역사는 교회라는 틀안에서만 아니라 세상 어디곳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기위해서 세상문화를 잘 이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선교라는 확장된 개념으로 이해가 가능하다. 선교지에 교회를 세우는 일만이 선교가 아니라, 우리가 속한 어떤 삶의 현장이든지 하나님의 선교를 성취할 수 있는 자리이다.
소금교회는 개척교회입니다. 교회부흥을 위한 노력속에서 원칙을 지키기위한 싸움이 있을텐데.
뉴욕소금교회는 2007년 1월 첫 예배를 드렸다. 나는 진정한 부흥이란 세속적인 욕망의 껍질을 벗겨내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신앙양심이 깨어나는 일이다. 그것이 내적부흥이다. 개척교회이지만 믿는 구석은 성도들 개개인에게 이런 내적각성과 부흥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생명의 역동성이 일어나고, 성장이 있다고 본다.
그것이 폭발적인 양적성장으로 드러나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진리를 깨우치고, 참여하고, 함께하는 가운데 생명의 공동체는 점점 자라나게 된다. 시간이 많이 걸릴수는 있지만 생명과 진리가 살아있는 공동체는 반드시 자란다는 믿음이 있다.
목회를 하면서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렸던 유혹이 있었다. 그것은 외부의 유혹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유혹이었다. 사실 개척목회를 하면서 일을 하다보니 생각보다 돈이 잘 벌렸다. 그때 내안에서는 '힘든 목회를 왜 하느냐. 목회를 그만하고 돈이나 벌라'는 유혹도 있었다.
사례비도 안나오는 개척교회 목사가 돈버는 일에 신경쓰다보니 자연스럽게 설교준비에 소흘하게 되었다. 성도들에 대한 관심도 상대적으로 줄었다. 돈이 벌리니 돈을 쫓아가게 되었다. 그것이 물질의 힘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목사도 돈맛을 보니 정말 힘들었다. 한동안 목회를 소홀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결국 개척 2년차에 몸이 심하게 아파 한국에 치료차 다녀오면서 하나님께서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셨다.
목회에 올인할테니 먹고 사는 문제를 책임져 달라고 기도했다. 전에는 토요일 늦게까지 일하고, 주일에는 은혜없이 출석부에 체크하는 기분으로 교회에 갔다. 그러나,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담대함으로,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목회에 전념했을 때 한 사람 한 사람 성도가 모이기 시작했다. 설교 CD와 전도지를 들고 노방전도를 나섰고, 말씀전하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지난 한해동안 작은 성장을 했고, 교회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은 나의 간증이기도 하다.
별세신앙 이중표 목사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1999년부터 2001년까지 한신교회에서 전도사와 부목사로 이중표 목사님의 목회를 도왔다. 이중표 목사님은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는 분이다. 그분은 주님을 너무 사랑해서 설교 때마다 자주 우셨다.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 눈물의 종이었다.
한신교회에서 찬양사역을 하던 어느날 이중표 목사님은 찬양을 어떻게 인도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래서 선곡을 잘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대답을 했다. 그러자 이 목사님은 "아냐, 예수가 생각나는 찬양을 해야 해"라고 말했다. 지금도 마음속에 그분의 가르침이 내맘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예수가 생각나는 찬양을 해야 하고, 예수가 생각나는 설교를 해야 하고, 예수가 생각나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늘 마음에 다짐을 하곤한다. 어떤 분은 내 설교가 좀 강하다는 분도 있지만 예수가 생각나는 설교자가 되자는 마음을 가지고 하고 있을 뿐이다.
이중표 목사님은 청빈했다. 평생동안 교회 옆, 20여평짜리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본인의 사례의 대부분이 다시 헌금으로 들어갔다. 소유한 재산이 없으신 분이다. 이 목사님의 청빈의 삶에 깊은 도전을 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중표 목사님은 신앙생활을 누구보다 행복하게 했다. 사모님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부부가 둘만 있을때 사모님 앞에서 알몸으로 춤을 추기도 한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그러면 사모님은 민망해 하면서도 배꼽을 잡고 웃으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천진난만한 분이기도 했고, 솔직하고, 유머가 넘치는 분이셨다.
롱아일랜드한인교회 교육목사로 섬겼는데, 최근 그 교회가 문을 닫았다. 그 사건에서 얻을 교훈은 무엇입니까?
롱아일랜드 한인교회에서 교육목사로 3년을 섬겼다. 교회가 속했던 미국장로교는 굉장한 법치교단이다. 자칫 교회가 추구해야 할 사랑이라는 가치보다, 법이 위에 있을 수 있는 함정이 있다. 법으로 정의를 세우는 것은 필요하지만, 정의를 실현하다가 사랑의 가치가 소멸될 가능성도 있다. 기독교는 화해와 평화의 종교이다. 법적인 부분에 잘못이 있어도 서로 사랑안에서 용서할수 있을 때, 서로 한걸음 물러나는 양보와 배려가 있을 때 그것이 화해와 평화로 가는 좋은 방법이라고 믿는다.
많은 경우 교회분쟁을 보면서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사라져 간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있다면 성전안에서 무절제한 언행으로 싸울수는 없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회복할 때 피할 수 없는 갈등이라도 평화로운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설교를 들으면 한국교회와 이민교회에 던지는 개혁적인 메세지가 많습니다. 교회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종교는 질(質)의 세계이지 양(量)의 세계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물량주의와 대형화이다. 이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교회는 희망이 없다. 큰교회만 추구하고 작은교회를 추구하지는 않는것이 현재 기독교의 현실이다. 대형화속에는 맘모니즘과 세속주의의 함정이 있다. 결국 대형화는 성공주의와 물질주의를 교회안으로 들여오고, 이것은 인간의 욕망을 부추긴다.
큰 교회 목사는 성공한 목사, 작은 교회 목사는 실패한 목사라는 그릇된 인식은 오늘날 물질주의가 낳은 가장 큰 병폐이다. 작은 것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작고 보잘것 없는 자를 통해 화려하고 유명한 사람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했다. 크고 작은 것을 가지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잘못된 물질주의적인 신앙관은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는 일없이 교회의 건강성을 말할 수 없다. 교회는 스스로 가난해 지기를 선택해야 한다. 스스로 비우고 가난해질때 비로서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된다. 그때야 비로서 성도들은 진리안에서 건강한 신앙관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부자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너는 나를 쫓으라고 했을때 부자청년이 근심하고 돌아간 것이 오늘날의 대형교회 모습일수도 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동일하게 대형교회들에게 물으신다면 가진 것이 너무 많아 같은 근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대형교회가 운영비외에 나머지를 세상을 위해 사용한다면 우리 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주님을 위해 포기할때 참된 제자가 될 것이다. 대형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들은 물질을 축척해서는 안 된다. 교회마저 물질주의의 노예가 되면 결국 교회가 부패하고 세속화되는 원인이 된다.
평신도 사역 시대입니다. 교회내 성도들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사실 평신도와 목회자를 구별하는 것은 개혁신앙에 관점에서는 의미가 없다. 목회자는 성격적으로 보면 교사요, 가르치는 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는 전하며 은혜를 받고, 평신도는 들으며 은혜를 받는 자이므로,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이다.
아직은 미조직상태이지만, 조직교회가 되면 나는 초대교회의 사도들처럼 오직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고, 목양하는 일외에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머지 교회의 행정과 인사권, 그리고 재정권은 평신도 중심으로 일을 감당케 할 것이다. 비록 지금 소금교회는 작은 공동체지만 누룩과 같이 자라나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소금교회의 건강함이 세상의 희망을 주고, 좋은 영향력을 끼치기를 소망한다.
뉴욕소금교회 안내
35-56 159 St Flushing NY 11358
347-320-2889 / saltchurch@hotmail.com
홈페 이지: http://nysaltchurch.com
ⓒ 2010아멘넷 뉴스(USAamen.net)
2010년 부활절을 앞두고 뉴욕소금교회 한종은 목사를 인터뷰하고, 교회의 빛과 소금된 사명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 목사는 3년전인 2007년 1월 뉴욕소금교회를 개척했으며, 현재 조직교회에 한걸음 성큼 다가서 있다.
소금으로서 교회의 사명, 생명과 사랑, 나눔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목회관, 교회의 부흥과 목회적 원칙을 지키려는 개척교회 목회자로서의 갈등, 개척과정에서의 간증, 별세목회자 고(故) 이중표 목사와의 일화까지 두시간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한종은 목사는 한 가지 고민을 밝혔다. 한 목사는 "옳은 말을 하고, 옳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옳은 사람이 아니라, 옳은 일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옳은 사람"이라며, “늘 강단에서 옳은 말을 해야만 하는 목회자로서 스스로 행하지 못하는 진리를 선포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때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다”며 “진리대로 살기위한 끊임없는 성화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또한 "행동하는 신앙양심을 가진 목회자라야 진실한 목회자라고 생각한다. 바른 이야기를 많이 하는 목회자보다 바른 삶을 살아가는 목회자들이 많아 질 때 교회의 건강성을 회복하고, 교회가 시대를 밝히는 횃불의 역할을 감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한종은 목사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본인을 소개해주시죠.
한신대 신학과와 동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2001년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한신교회(故 이중표 목사) 부목사로 사역했다. 2003년 뉴욕으로 건너와 NYTS(MPS)를 졸업했으며, 풀러신학원에서 선교학을 공부했고, 논문만 남겨놓고 있다. 뉴욕에 와서는 롱아일랜드 한인교회 교육목사로 3년을 섬겼고, 2007년 뉴욕소금교회를 개척했다.
오래전 작고하신 아버지는 장로님이셨는데, 겸손한 신앙인격으로 섬김의 본을 보이셨던 존경받는 분이었다. 부모님의 서원으로 목사가 되었고, 어린 시절부터 목사가 되야한다는 세뇌(?)를 받으며 자랐다.
교회이름을 '소금'이라고 지었는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소금은 생명을 살리고 부패를 방지하며, 음식의 맛을 결정짓는 인간의 삶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물질이다. 소금교회는 예수님의 생명을 삶으로 담아 썩어져 가는 세상, 그 본래의 맛을 잃어가는 세상, 어둠의 세력에 의해 참 생명을 잃어버린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며, 되살리는 일을 성도의 사명으로 믿고, 소금의 삶을 살아내고자 한다.
그러나, 소금이 적당한 양이 들어가면 좋은 결과를 만들지만, 사해에 생물이 살 수 없는 것처럼, 과하면 생명을 죽이기도 한다. 염분은 적당해야지, 지나치게 많으면 폐단이 있다. 소금은 항상 발란스가 중요하다. 신학교 시절부터 건강한 영성에 대한 많은 고민을 했다. 그 결과 내린 결론은 해방의 영성과 복음의 영성의 균형이다. 당시 신학생들의 이슈는 개인구원이 먼저냐, 사회구원이 먼저냐 하는 것이었다. 해방의 영성이 사회구원이라면, 복음의 영성은 개인구원이다.
사회구원이나, 개인구원의 양 극단에 치우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균형과 조화를 이룰때 건강한 영성, 건강한 교회가 세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교회에는 예언자적인 사명과 제사장적인 사명이 있다. 불의에 저항하는 것이 예언자적 사명이라면, 돌봄과 치유 그리고 회복은 제사장의 사명이다. 이 두가지의 사명역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본다.
(기자: 예수님은 극단적인 분이시기도 하셨다.)
그것은 성경해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실 오늘날 신학은 바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본다. 복음서에서 그려지는 역사적인 예수의 모습을 통해 복음을 정의하기 보다, 바울이 전하는 고백적인 복음을 통해 예수를 보게되니, 결과적으로 역사적인 예수를 놓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복음서를 통해 보는 예수가 역사적인 예수이다.
발란스의 시각으로 예수의 삶을 보자. 당시 예수님은 종교적 권력과 충돌하고, 가진자들, 배운자들과 부딪치시면서, 복음의 본질을 깨우치기 위한 거침없는 투쟁을 하셨으므로, 극단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반면에 예수님은 없는자, 못배운자, 천한자와 같은 정치,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위로자셨다. 사회적인 약자와 소외된 자의 편에서 서서, 그들의 편이 되어주시는 예수님의 삶을 통해 참된 위로와 돌봄, 치유의 예수님, 사랑의 예수님을 발견할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을 경험한다.
발란스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치우치지 않는 것이 때로는 기회주의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항상 기본적인 자리는 진리의 편에 서 있어야 한다. 진리의 편에 서서 생각이 다르고, 신념이 달라도 사랑안에서 상대를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갖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종종 마치 편을 가르듯,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사람을 본다. 중요한 것은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품는 큰 마음이 필요하다고 본다. 내가 좋아하는 말중에 “다양성속에 일치”라는 표현이 있다. 서로의 다름을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큰 뜻을 위해 연합하고 일치된 힘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목회관은 무엇인가?
교회를 '생명과 사랑, 나눔의 공동체'라고 본다. 이것이 교회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본질이자 핵심가치이다. 교회는 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행동해야 하며 노력해야 한다.
우리 교회는 생명가치의 실현을 위한 '비전 2030'을 세웠다. 2030년까지 지구촌의 가난한 사람들의 교육을 위한 20개의 학교와, 생명살림을 위한 30개의 병원을 세워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고자 한다.
우리사회가 풍족함속에서 잘먹고 잘사는 동안에도 지구촌에는 여전히 기아와 질병, 재난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이웃들이 있다. 2030 비전은 생명의 가치를 가장 소중하다고 보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해 의료 선교사업으로 생명을 구하고, 나눔의 빵을 통해 구제하며, 궁극적으로 교육사업을 통해 그들 스스로 가난한 환경을 이겨내고, 좋은 사회적 환경을 조성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민사회의 인권문제도 고민하고 있다. 마이너리티로 살고 있는 한인들의 인권이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얼마전 한분이 투신자살을 했다. 경찰은 이분의 연고자가 없다는 이유로 기본적인 사고경위조차 수사를 하지 않고, 빠른시간에 사건을 종결했다. 과연 미국인이라면 그렇게 쉽게 종결이 됐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이민사회의 한인들 가운데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이웃들이 존재한다. 위의 예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생각한다. 언어소통의 문제, 인종과 문화의 차이때문에 고통받는 이웃이 많다. 교회가 한인들의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가 독립적으로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없다면, 교회간 연대나, 한인 인권단체, 미국 주류사회의 인권단체들과 같이 제휴해서 한인 이민자들의 인권문제를 돕기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기자: 한신대 출신이라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한신대 출신이라고 그런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웃의 아픔을 아픔 그대로 느낄 수 있느냐 이다. 신학적 배경이나,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냐를 떠나서 이웃들이 실제로 당하고 있는 아픔을, 가슴깊이 아픔으로 느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예수가 말한 복음의 핵심은 사랑이다. 사랑은 긍휼의 마음을 품는 것이며, 함께 아파하고, 그 아픔에 동참하는 일이다.
교회는 나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교회가 재산을 축적하면 안된다고 본다. 물질을 축복의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 은사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물질을 축복으로 이해하면 축적하게 되고, 결국 나를 위해 사용하게 된다. 그렇지만 물질을 은사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나누게 된다. 은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물질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나가는 도구로 보아야 한다.
은사로서 물질을 받으면 이웃과 사회를 돕고, 하나님을 위해 어떻게 선하게 사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교회는 주신 물질로 사회와 이웃을 위해 나누어야 한다. 성도들 또한 물질에 대한 은사적 관점의 신앙관이 정립될때 기복주의를 극복하고, 진정한 나눔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으로 믿는다.
오늘날 교회에 대한 반기독교적인 정서가 생기는 이유는 교회마저 물질주의 가치관으로 대형화되고, 물량주의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세속적 성공의 가치관을 교회가 강조할 때 신앙이 병들게 되고 교회도 부패된다. 이 사회의 물질주의가 신앙과 교회를 깊이 병들게 한다.
신앙인의 바른 물질관을 정립하지 않으면, 물질이 많은 사람이 복받은 사람으로 인식되는 일이 우스운 일이 벌어진다. 출세하고 사회적 성공을 거둔 사람만을 복받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욕망을 비우고, 세속적인 가치가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가치들로 그 빈마음에 채워야 한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축복이다.
신학적 배경에 따라 목회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이 다를 수 있다.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수 도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대의에 뜻을 같이 할 때, 신앙배경과 무관하게 건강한 교회를 위해 연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함께 일치된 목소리로 교회건강을 회복하는 일에 뜻을 모으는 교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교회의 비전중에 '끊임없이 갱신되는 교회'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이 시대의 문화속에서 막강한 도전을 받고 있다. 시대와 문화의 요구속에서 교회가 세상속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복음의 영향력과 도전을 주기 위해서는 교회의 문턱을 낮추는 것이 필요하다. 전통적인 교회특성에 갇히면 세상과 교회가 분리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가치인 진리와 생명, 사랑의 가치가 왜곡되거나, 훼손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세상을 향해 교회가 열린 모습으로 다가가야 한다.
문화적인 콘텐츠로 나갈수 있다고 본다. 친구중에 영화설교를 하는 친구가 있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영화속에서 설교테마를 찾아내어 영화를 같이 감상을 하면서 그곳에서 복음의 메세지를 찾아내고 설교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그런 측면도 문화선교적인 측면에서 좋다고 본다. 맨하탄의 정원교회도 카페를 열어 누구나 손쉽고 부담없이 교회를 찾을 수 있도록 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교회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가 있다. 모이는 교회는 우리가 아는 전통적인 교회 공동체지만 흩어지는 교회는 개인의 삶이다. 성도들 각자가 흩어지는 교회이다. 삶의 현장 어느 자리이든지 그 가운데 사랑과 생명인 복음의 진리가 적용될 때 그곳이 교회가 된다. 구원이란 교회밖에서도 일어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건이다. 성도들이 제한된 교리의 틀속에서 사고하지 않고, 삶의 자유함속에서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실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복음의 역사는 교회라는 틀안에서만 아니라 세상 어디곳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기위해서 세상문화를 잘 이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선교라는 확장된 개념으로 이해가 가능하다. 선교지에 교회를 세우는 일만이 선교가 아니라, 우리가 속한 어떤 삶의 현장이든지 하나님의 선교를 성취할 수 있는 자리이다.
소금교회는 개척교회입니다. 교회부흥을 위한 노력속에서 원칙을 지키기위한 싸움이 있을텐데.
뉴욕소금교회는 2007년 1월 첫 예배를 드렸다. 나는 진정한 부흥이란 세속적인 욕망의 껍질을 벗겨내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신앙양심이 깨어나는 일이다. 그것이 내적부흥이다. 개척교회이지만 믿는 구석은 성도들 개개인에게 이런 내적각성과 부흥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생명의 역동성이 일어나고, 성장이 있다고 본다.
그것이 폭발적인 양적성장으로 드러나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진리를 깨우치고, 참여하고, 함께하는 가운데 생명의 공동체는 점점 자라나게 된다. 시간이 많이 걸릴수는 있지만 생명과 진리가 살아있는 공동체는 반드시 자란다는 믿음이 있다.
목회를 하면서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렸던 유혹이 있었다. 그것은 외부의 유혹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유혹이었다. 사실 개척목회를 하면서 일을 하다보니 생각보다 돈이 잘 벌렸다. 그때 내안에서는 '힘든 목회를 왜 하느냐. 목회를 그만하고 돈이나 벌라'는 유혹도 있었다.
사례비도 안나오는 개척교회 목사가 돈버는 일에 신경쓰다보니 자연스럽게 설교준비에 소흘하게 되었다. 성도들에 대한 관심도 상대적으로 줄었다. 돈이 벌리니 돈을 쫓아가게 되었다. 그것이 물질의 힘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목사도 돈맛을 보니 정말 힘들었다. 한동안 목회를 소홀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결국 개척 2년차에 몸이 심하게 아파 한국에 치료차 다녀오면서 하나님께서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셨다.
목회에 올인할테니 먹고 사는 문제를 책임져 달라고 기도했다. 전에는 토요일 늦게까지 일하고, 주일에는 은혜없이 출석부에 체크하는 기분으로 교회에 갔다. 그러나,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담대함으로,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목회에 전념했을 때 한 사람 한 사람 성도가 모이기 시작했다. 설교 CD와 전도지를 들고 노방전도를 나섰고, 말씀전하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지난 한해동안 작은 성장을 했고, 교회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은 나의 간증이기도 하다.
별세신앙 이중표 목사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1999년부터 2001년까지 한신교회에서 전도사와 부목사로 이중표 목사님의 목회를 도왔다. 이중표 목사님은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는 분이다. 그분은 주님을 너무 사랑해서 설교 때마다 자주 우셨다.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 눈물의 종이었다.
한신교회에서 찬양사역을 하던 어느날 이중표 목사님은 찬양을 어떻게 인도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래서 선곡을 잘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대답을 했다. 그러자 이 목사님은 "아냐, 예수가 생각나는 찬양을 해야 해"라고 말했다. 지금도 마음속에 그분의 가르침이 내맘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예수가 생각나는 찬양을 해야 하고, 예수가 생각나는 설교를 해야 하고, 예수가 생각나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늘 마음에 다짐을 하곤한다. 어떤 분은 내 설교가 좀 강하다는 분도 있지만 예수가 생각나는 설교자가 되자는 마음을 가지고 하고 있을 뿐이다.
이중표 목사님은 청빈했다. 평생동안 교회 옆, 20여평짜리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본인의 사례의 대부분이 다시 헌금으로 들어갔다. 소유한 재산이 없으신 분이다. 이 목사님의 청빈의 삶에 깊은 도전을 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중표 목사님은 신앙생활을 누구보다 행복하게 했다. 사모님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부부가 둘만 있을때 사모님 앞에서 알몸으로 춤을 추기도 한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그러면 사모님은 민망해 하면서도 배꼽을 잡고 웃으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천진난만한 분이기도 했고, 솔직하고, 유머가 넘치는 분이셨다.
롱아일랜드한인교회 교육목사로 섬겼는데, 최근 그 교회가 문을 닫았다. 그 사건에서 얻을 교훈은 무엇입니까?
롱아일랜드 한인교회에서 교육목사로 3년을 섬겼다. 교회가 속했던 미국장로교는 굉장한 법치교단이다. 자칫 교회가 추구해야 할 사랑이라는 가치보다, 법이 위에 있을 수 있는 함정이 있다. 법으로 정의를 세우는 것은 필요하지만, 정의를 실현하다가 사랑의 가치가 소멸될 가능성도 있다. 기독교는 화해와 평화의 종교이다. 법적인 부분에 잘못이 있어도 서로 사랑안에서 용서할수 있을 때, 서로 한걸음 물러나는 양보와 배려가 있을 때 그것이 화해와 평화로 가는 좋은 방법이라고 믿는다.
많은 경우 교회분쟁을 보면서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사라져 간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있다면 성전안에서 무절제한 언행으로 싸울수는 없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회복할 때 피할 수 없는 갈등이라도 평화로운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설교를 들으면 한국교회와 이민교회에 던지는 개혁적인 메세지가 많습니다. 교회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종교는 질(質)의 세계이지 양(量)의 세계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물량주의와 대형화이다. 이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교회는 희망이 없다. 큰교회만 추구하고 작은교회를 추구하지는 않는것이 현재 기독교의 현실이다. 대형화속에는 맘모니즘과 세속주의의 함정이 있다. 결국 대형화는 성공주의와 물질주의를 교회안으로 들여오고, 이것은 인간의 욕망을 부추긴다.
큰 교회 목사는 성공한 목사, 작은 교회 목사는 실패한 목사라는 그릇된 인식은 오늘날 물질주의가 낳은 가장 큰 병폐이다. 작은 것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작고 보잘것 없는 자를 통해 화려하고 유명한 사람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했다. 크고 작은 것을 가지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잘못된 물질주의적인 신앙관은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는 일없이 교회의 건강성을 말할 수 없다. 교회는 스스로 가난해 지기를 선택해야 한다. 스스로 비우고 가난해질때 비로서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된다. 그때야 비로서 성도들은 진리안에서 건강한 신앙관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부자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너는 나를 쫓으라고 했을때 부자청년이 근심하고 돌아간 것이 오늘날의 대형교회 모습일수도 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동일하게 대형교회들에게 물으신다면 가진 것이 너무 많아 같은 근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대형교회가 운영비외에 나머지를 세상을 위해 사용한다면 우리 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주님을 위해 포기할때 참된 제자가 될 것이다. 대형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들은 물질을 축척해서는 안 된다. 교회마저 물질주의의 노예가 되면 결국 교회가 부패하고 세속화되는 원인이 된다.
평신도 사역 시대입니다. 교회내 성도들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사실 평신도와 목회자를 구별하는 것은 개혁신앙에 관점에서는 의미가 없다. 목회자는 성격적으로 보면 교사요, 가르치는 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는 전하며 은혜를 받고, 평신도는 들으며 은혜를 받는 자이므로,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이다.
아직은 미조직상태이지만, 조직교회가 되면 나는 초대교회의 사도들처럼 오직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고, 목양하는 일외에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머지 교회의 행정과 인사권, 그리고 재정권은 평신도 중심으로 일을 감당케 할 것이다. 비록 지금 소금교회는 작은 공동체지만 누룩과 같이 자라나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소금교회의 건강함이 세상의 희망을 주고, 좋은 영향력을 끼치기를 소망한다.
뉴욕소금교회 안내
35-56 159 St Flushing NY 11358
347-320-2889 / saltchurch@hotmail.com
홈페 이지: http://nysaltchur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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