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월스트리트 증권분석가, 신순규 집사의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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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0-05-13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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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필그림교회(양춘길 목사)는 5월 12일(수) 수요예배에 신순규 집사를 초청하여 간증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예배는 <소망의 언덕>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양춘길 목사의 질문에 신 집사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간증 중간에는 찬양을 통해 은혜를 더했다.
신 집사는 시각장애인으로 15살때 유학을 와서 하버드와 MIT등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월스트리트에서 증권분석가로 일하고 있다. 현재 뉴저지 중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에 출석하고 있으며 담임목사의 권유로 간증사역을 시작했다.
신 집사는 집회를 마치고 "하나님은 나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에 역사하고 싶으시다. 혹시 하나님을 못만난 분들은 만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양춘길 목사와 신순규 집사와의 대화 내용이다.
본인을 소개해주세죠
찬양교회 집사이다. 사랑하는 아내 그레이스와 최고선물 아들 데이빗이 있다. 어릴때 시력을 잃었다. 태어날때 부터 눈이 안좋았다. 8살까지 기억하는 수술의 횟수만 22번이다. 수술하려면 전신마취를 해야 하는데 의사가 저능아가 된다고 반대했다. 부모님은 집 몇개를 살돈을 들였지만, 9살때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
기억나는 수술횟수만 22번으로, 일년에 3-4번 수술을 한셈인데 고통이 컸겠다
어려서인지 실명이 큰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각막수술을 하면 당시에는 병원침대에서 2-3개월 움직이지 않고 누워있어야 했다. 그러면 근육이 없어지고 다시 걷는 연습부터 해야 했다. 수술을 여러번 하는것이 힘들었으며, 의사도 8살때 포기하라고 했다.
당시 눈이 좋고 안좋은것을 반복해서 특별히 언제 실명을 했는지 기억이 안난다. 십대일때는 반항심이 강해 실명했다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텐데 어려서 잘 몰랏다. 하나님이 쉽게 하시려고 시간을 잡으셨다. 그러나 부모님이 고생이 심하셨다.
부모님은 고통스럽고 힘들어 했을텐데
부모님이 아파하던 기억이 많다. 당시 한국에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안좋았다. 한국의 택시는 재수가 없다고 아침에 장애자를 안태워주었다. 부모님은 직업과 결혼을 걱정하셨다. 당시 시각장애자는 마사지와 침술을 배워 먹고 살았는데 부모님은 절대로 반대하며 열심히 공부하도록 인도했다. 참고서를 구해 점자로 찍어주고, 독립심을 키우기 위해 어릴때부터 기숙사에 넣었다. 또 피아노를 가르쳐 음악선생이 되기를 원하셨다.
부모님이 아들이 장애인임에도 포기하지 않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다. 어떻게 미국에 오게되었나
어머니가 강제로 가르친 피아노가 계기가 되어 미국에 오게되었다. 소질이 별로 없었는데 어머니는 점자를 된 악보를 일본 출판사에서 구입해서 가르쳤다. 5학년때 선교회가 주최하는 캠프를 가게되었는데 한 선교살를 만난것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남성4중창이 펀드레이징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는데 나는 반주자로 참가했다. 그리고 필라의 맹인학교에 알게되었고 학교추천으로 1982년 15살때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는가?
불교집안이다. 할머니는 절을 지을정도였다. 학교에서 일주일에 한번 예배를 보고 예수님의 이야기가 듣기 좋았다. 불교는 장애를 전쟁에 무슨 죄가 많아서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요한복음 9장에는 제자들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냐고 묻자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다.
그것을 듣고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본격적인 신앙생활은 유학을 결심하고 나서이다. 붙잡을 것이 오직 예수하나였다. 언어도 문제이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신앙에 집중하고 세례를 받고 새벽예배와 철야에배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어려워서 할수없이 시작한 신앙생활을 통해 나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었다.
하나님은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주신다. 불교이고 시각장애라서 말씀을 더욱 강하게 듣고 하나님만 주인이심을 고백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다. 유학생활이 어땠는가.
선교사님이 친구를 소개해주어 그분댁에서 6개월 홈스테이를 했다. 그리고 학교를 다녔는데 먼저 언어문제가 있었다. 대화는 한두가지 단어로 대충 알수 있는데 학업은 어려웠다. 특히 말하는 사람의 표정과 몸짓을 모르니 더 그랬다. 또 미국의 특수학교는 환경에 적응이 어려워 우울증이 걸릴 정도였다. 상담교사는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견딜수 없었다. 1년동안 학교를 다니다가 방학때 선교사님 친구를 다시 만나 그집에 머무르며 시골의 일반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분들은 내가 낯선자이고 장애인이고 자신들도 좋은 환경이 아니었지만 기꺼이 그렇게 했다. 그분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그렇게 한것이다. 인도하신 하나님게 감사드린다.
감사한일이다. 동양인이고 시각 장애인을 크리스찬의 사랑으로 한가족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진정한 크리스찬이었다. 나외에도 교회문제가 있는 아이를 집에 데려와 돌보았으며 교회를 떠난사람도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도와주었다, 하나님에 은혜받은자의 행동이다. 사람이 간사해서 처음부터 그렇게 인도해주시지 하는 생각도 났다.
시골학교였는데 교사들이 정열과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었다. 그때 느낀것은 특수학교에서 보낸 지난 1년이 준비기간이었다. 처음 이곳에 왔다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내 시기보다 하나님의 시기가 더 나은 것을 알았다. 교사의 인도로 뮤지컬등 특별활동도 하는등 풍성한 고교생활을 했다. 이것이 나중에 대학에 입학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하나님의 때를 안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어떻게 하버드에 입학했나.
입학원서를 작성할때 생각도 못한 일이 발생했다. 유학생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재정증명 서류가 필요했다. 그래서 영주권을 얻기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런데 학교 진학담당자의 조언으로 아이비리그에 진학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들 학교에는 재정증명 서류가 필요하지 않았다. 당시 학교에서 250명중 3등으로 공부했고 특별활동도 많이하여 원서를 낸 아이비리그 학교 4곳에서 동시에 합격연락을 받았다.
어머니가 강제로 가르친 피아노로 유학을 오고, 특수학교에서 어려운 환경을 통해 일반학교에 적응하게 되고, 특별활동을 한것이 대입에 도움이 되었다. 하나님이 마치 스토리를 쓰신것 같다. 하나님의 계획은 위대하다.
증권분석가라는 직업을 선택했는데
하바드에 입학을 하니 학생들의 수준이 높았다. 내가 있어야 할곳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점자책도 없어서 녹음에 의지하여 공부를 했다. 처음에는 정신과 의사가 되려고 했다. 그것이 안되고 진로를 고민하다가 증권회사의 일을 하게 되었다.
70년대에 템플대를 나와 정신과 의사가 된 시각장애인이 있엇다. 나도 정신과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버드를 다니면서 2년동안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의대준비를 했다. 그런데 법이 바뀌어 의사는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 진단을 가능해야 했다. 그래서 의사가 되기가 어려웠다.
자포자기가 되었다. 시간낭비를 한것 같아 하나님에 원망도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무 정교하시다. 2003년부터 제약회사를 다루게 되었는데 의대공부를 2년 공부한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하나님의 실력은 대단하시다.
사실 내가 의사가 되려고 한것은 세상이 못하는 것을 하겠다는 욕심이었다. 욕심으로 의사가 되었다면 환자가 고생을 했을 것이다,.
증권분석가가 무슨 일을 하나
기관이나 회사가 맡긴 돈으로 증권과 채권을 구입하여 이익을 내는 것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여러정보를 통해 언제 증권을 팔고 살것인가를 결정한다. 일이 참재미가 있다. 증권을 팔고 사기위해 정보를 검색하고 계산을 한다. 컴퓨터는 자료를 점자로 만들거나 들을수 있게하여 시각장애인에게 이상적인 직업이다.
교회사역은 어떻게 하는가.
특별히 하는 것은 없다. 축복을 많이 받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되는지를 담임목사님에게 물어 보았다. 목사님의 추천으로 믿지 않는 분들에게 하나님이 존재하고 역사하는 것을 전하고, 믿는 분에게는 힘이 되는 간증사역을 시작한지 얼마안되었다.
모든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계획이시다. 그러나 잘못하면 나태해지고 무기력해질수도 있다. 그동안 어떻게 신앙훈련하고 극복했나.
바울은 사도들이 씨를 쁘리고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다고 하셨다. 구원도 은혜이고 축복도 은혜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원하는 삶을 살기위한 방법이다. 우리도 기도와 묵상등의 훈련을 통해 성장한다. 성령의 나무가 주렁주렁 열리는 하나님의 나무가 되고 싶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신 집사는 시각장애인으로 15살때 유학을 와서 하버드와 MIT등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월스트리트에서 증권분석가로 일하고 있다. 현재 뉴저지 중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에 출석하고 있으며 담임목사의 권유로 간증사역을 시작했다.
신 집사는 집회를 마치고 "하나님은 나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에 역사하고 싶으시다. 혹시 하나님을 못만난 분들은 만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양춘길 목사와 신순규 집사와의 대화 내용이다.
본인을 소개해주세죠
찬양교회 집사이다. 사랑하는 아내 그레이스와 최고선물 아들 데이빗이 있다. 어릴때 시력을 잃었다. 태어날때 부터 눈이 안좋았다. 8살까지 기억하는 수술의 횟수만 22번이다. 수술하려면 전신마취를 해야 하는데 의사가 저능아가 된다고 반대했다. 부모님은 집 몇개를 살돈을 들였지만, 9살때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
기억나는 수술횟수만 22번으로, 일년에 3-4번 수술을 한셈인데 고통이 컸겠다
어려서인지 실명이 큰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각막수술을 하면 당시에는 병원침대에서 2-3개월 움직이지 않고 누워있어야 했다. 그러면 근육이 없어지고 다시 걷는 연습부터 해야 했다. 수술을 여러번 하는것이 힘들었으며, 의사도 8살때 포기하라고 했다.
당시 눈이 좋고 안좋은것을 반복해서 특별히 언제 실명을 했는지 기억이 안난다. 십대일때는 반항심이 강해 실명했다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텐데 어려서 잘 몰랏다. 하나님이 쉽게 하시려고 시간을 잡으셨다. 그러나 부모님이 고생이 심하셨다.
부모님은 고통스럽고 힘들어 했을텐데
부모님이 아파하던 기억이 많다. 당시 한국에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안좋았다. 한국의 택시는 재수가 없다고 아침에 장애자를 안태워주었다. 부모님은 직업과 결혼을 걱정하셨다. 당시 시각장애자는 마사지와 침술을 배워 먹고 살았는데 부모님은 절대로 반대하며 열심히 공부하도록 인도했다. 참고서를 구해 점자로 찍어주고, 독립심을 키우기 위해 어릴때부터 기숙사에 넣었다. 또 피아노를 가르쳐 음악선생이 되기를 원하셨다.
부모님이 아들이 장애인임에도 포기하지 않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다. 어떻게 미국에 오게되었나
어머니가 강제로 가르친 피아노가 계기가 되어 미국에 오게되었다. 소질이 별로 없었는데 어머니는 점자를 된 악보를 일본 출판사에서 구입해서 가르쳤다. 5학년때 선교회가 주최하는 캠프를 가게되었는데 한 선교살를 만난것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남성4중창이 펀드레이징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는데 나는 반주자로 참가했다. 그리고 필라의 맹인학교에 알게되었고 학교추천으로 1982년 15살때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는가?
불교집안이다. 할머니는 절을 지을정도였다. 학교에서 일주일에 한번 예배를 보고 예수님의 이야기가 듣기 좋았다. 불교는 장애를 전쟁에 무슨 죄가 많아서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요한복음 9장에는 제자들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냐고 묻자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다.
그것을 듣고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본격적인 신앙생활은 유학을 결심하고 나서이다. 붙잡을 것이 오직 예수하나였다. 언어도 문제이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신앙에 집중하고 세례를 받고 새벽예배와 철야에배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어려워서 할수없이 시작한 신앙생활을 통해 나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었다.
하나님은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주신다. 불교이고 시각장애라서 말씀을 더욱 강하게 듣고 하나님만 주인이심을 고백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다. 유학생활이 어땠는가.
선교사님이 친구를 소개해주어 그분댁에서 6개월 홈스테이를 했다. 그리고 학교를 다녔는데 먼저 언어문제가 있었다. 대화는 한두가지 단어로 대충 알수 있는데 학업은 어려웠다. 특히 말하는 사람의 표정과 몸짓을 모르니 더 그랬다. 또 미국의 특수학교는 환경에 적응이 어려워 우울증이 걸릴 정도였다. 상담교사는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견딜수 없었다. 1년동안 학교를 다니다가 방학때 선교사님 친구를 다시 만나 그집에 머무르며 시골의 일반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분들은 내가 낯선자이고 장애인이고 자신들도 좋은 환경이 아니었지만 기꺼이 그렇게 했다. 그분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그렇게 한것이다. 인도하신 하나님게 감사드린다.
감사한일이다. 동양인이고 시각 장애인을 크리스찬의 사랑으로 한가족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진정한 크리스찬이었다. 나외에도 교회문제가 있는 아이를 집에 데려와 돌보았으며 교회를 떠난사람도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도와주었다, 하나님에 은혜받은자의 행동이다. 사람이 간사해서 처음부터 그렇게 인도해주시지 하는 생각도 났다.
시골학교였는데 교사들이 정열과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었다. 그때 느낀것은 특수학교에서 보낸 지난 1년이 준비기간이었다. 처음 이곳에 왔다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내 시기보다 하나님의 시기가 더 나은 것을 알았다. 교사의 인도로 뮤지컬등 특별활동도 하는등 풍성한 고교생활을 했다. 이것이 나중에 대학에 입학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하나님의 때를 안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어떻게 하버드에 입학했나.
입학원서를 작성할때 생각도 못한 일이 발생했다. 유학생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재정증명 서류가 필요했다. 그래서 영주권을 얻기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런데 학교 진학담당자의 조언으로 아이비리그에 진학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들 학교에는 재정증명 서류가 필요하지 않았다. 당시 학교에서 250명중 3등으로 공부했고 특별활동도 많이하여 원서를 낸 아이비리그 학교 4곳에서 동시에 합격연락을 받았다.
어머니가 강제로 가르친 피아노로 유학을 오고, 특수학교에서 어려운 환경을 통해 일반학교에 적응하게 되고, 특별활동을 한것이 대입에 도움이 되었다. 하나님이 마치 스토리를 쓰신것 같다. 하나님의 계획은 위대하다.
증권분석가라는 직업을 선택했는데
하바드에 입학을 하니 학생들의 수준이 높았다. 내가 있어야 할곳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점자책도 없어서 녹음에 의지하여 공부를 했다. 처음에는 정신과 의사가 되려고 했다. 그것이 안되고 진로를 고민하다가 증권회사의 일을 하게 되었다.
70년대에 템플대를 나와 정신과 의사가 된 시각장애인이 있엇다. 나도 정신과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버드를 다니면서 2년동안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의대준비를 했다. 그런데 법이 바뀌어 의사는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 진단을 가능해야 했다. 그래서 의사가 되기가 어려웠다.
자포자기가 되었다. 시간낭비를 한것 같아 하나님에 원망도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무 정교하시다. 2003년부터 제약회사를 다루게 되었는데 의대공부를 2년 공부한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하나님의 실력은 대단하시다.
사실 내가 의사가 되려고 한것은 세상이 못하는 것을 하겠다는 욕심이었다. 욕심으로 의사가 되었다면 환자가 고생을 했을 것이다,.
증권분석가가 무슨 일을 하나
기관이나 회사가 맡긴 돈으로 증권과 채권을 구입하여 이익을 내는 것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여러정보를 통해 언제 증권을 팔고 살것인가를 결정한다. 일이 참재미가 있다. 증권을 팔고 사기위해 정보를 검색하고 계산을 한다. 컴퓨터는 자료를 점자로 만들거나 들을수 있게하여 시각장애인에게 이상적인 직업이다.
교회사역은 어떻게 하는가.
특별히 하는 것은 없다. 축복을 많이 받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되는지를 담임목사님에게 물어 보았다. 목사님의 추천으로 믿지 않는 분들에게 하나님이 존재하고 역사하는 것을 전하고, 믿는 분에게는 힘이 되는 간증사역을 시작한지 얼마안되었다.
모든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계획이시다. 그러나 잘못하면 나태해지고 무기력해질수도 있다. 그동안 어떻게 신앙훈련하고 극복했나.
바울은 사도들이 씨를 쁘리고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다고 하셨다. 구원도 은혜이고 축복도 은혜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원하는 삶을 살기위한 방법이다. 우리도 기도와 묵상등의 훈련을 통해 성장한다. 성령의 나무가 주렁주렁 열리는 하나님의 나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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