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봉 목사 ① 오늘날의 한국 개혁교회의 현황과 교회의 개혁
페이지 정보
성회ㆍ2017-04-20 21:08관련링크
본문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KAPC)가 주최하는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컨퍼런스가 "이 시대의 종교개혁"이라는 주제로 4월 6일부터 2일간 필라 기쁨의 교회에서 열렸다. 주강사 김성봉 목사(한국개혁주의장로교연구소장)는 “종교개혁의 내용과 의의 그리고 이후 500년”과 “오늘날의 한국 개혁교회의 현황과 교회의 개혁”라는 주제의 두 강의를 했다.
다음은 “오늘날의 한국 개혁교회의 현황과 교회의 개혁”이라는 주제의 강의내용이다. 김 목사는 먼저 한국 개혁교회, 장로교의 전래와 성장 그리고 분열을 소개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여러 문제 현상들을 소개했는데 △개신교 특히 장로교내에 과도한 분열 △신학적인 풍요 그럼에도 빈곤 △목회현장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 △성경해석에 있어 공교회성 약화 등이다. 이어 종교개혁 당시인 500년 전과 달라진 영적 분위기에 대해 언급하며 △전반적인 무신론 분위기 △성경에 대한 신뢰의 감소 △성경을 비판하는 기독교 신학 △크게 벌어진 기독교 신학내의 간격 △교회 내에 깊숙이 들어 와 있는 무속종교적인 요소 등을 언급했다. 다음은 강의 내용이다.
▲주강사 김성봉 목사 ⓒ KimDongWook500.Com
오늘날 한국개혁교회, 즉 장로교회 현황에 대해 먼저 말하고 개혁을 말하겠다. 한국 개혁교회 현황에 대해서는 먼저 개신교회의 전래와 장로교회의 성장, 신앙의 미숙함 가운데 분열된 장로교회, 그리고 개혁신학이 어떻게 한국교회에 소개되었는지 그러면서도 오늘날 문제라고 여겨지는 다양한 현상에 대해 말하겠다.
한국 개혁교회, 장로교의 전래와 성장
한국의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침례교, 오순절, 순복음 등 개신교회는 다양하게 소개되었지만 정작 개혁교회는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한국에 소개된 장로교회는 짧은 기간이지만 규모 있게 성장했다. 1907년 9월 조선예수교 장로교 동노회가 조직되었고 2년 뒤에 한국 개신교 선교 25주년이 되던 해 3회 동노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가 동노회장에 피선되었고, 1912년 9월 선교사 44분을 포함해서 목사 46명, 장로 125인 등 221분이 참석한 가운데 제1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그곳에서 한국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한국장로교에서 반세기 이상 목회자를 독점했던 것은 평양 장로회신학교였는데 한국장로교회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선교 초반부터 반세기 가까이 한국장로교 지도자를 배출한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평양신학교는 설립, 운영, 교수진, 건물, 건축에 이르기까지 매코믹 신학교 출신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움직여졌다. 결국 매코믹신학교 출신 한국선교사들의 신학이 한국 장로교의 신학이 된 것이다.
한국장로사를 700페이지 이상 쓴 양낙훈 교수의 평가에 의하면 초기 한국장로교 선교사들의 교파적인 배경은 장로교였지만 신학적으로는 엄격한 칼빈주의라기보다는 보수적인 복음주의자에 가깝다고 했다.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설립시 채택된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아니라 인도 장로교회에서 채택한 12개 신조였다. 기초부터 잘못 놓이기 시작했다. 선교지에서 어려운 것 보다는 간단하게 하자는 의도였다. 12개 신조의 내용은 좋은 것이다. 장로교적인 교리를 요약한 것이었지만 엄격한 이중예정론 등의 칼빈주의적인 교리라기보다는 포괄적인 복음주의의 핵심들을 망라한 것이었다.
장로교의 분열과 개혁신학의 소개
개신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는 장로교회는 즉 개혁교회로 분류할 수 있는 장로교회는 길지 않는 역사 속에서 분열에 분열을 거듭했다. 장로교 내에 4차에 걸친 분열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교회는 한국에서 가장 크고 교인수가 많은 교파가 되었다. 하지만 양적인 팽창이 교회분열을 정당화할 수 없을 것이다. 먼저 분열현실을 보면 교회분열에 대한 칼빈의 기준이 있다. 칼빈도 의견이 조율되지 않아서 동역자간에 나누어지는 그런 일들이 있었다. 교회분리가 정당화된다고 칼빈이 인정한 유일의 경우는 기독교의 죽고 사는 것이 걸린 핵심교리가 부정당할 때이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유일신 사상,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메시아 됨의 교리,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있다는 오직 은혜로 라는 교리 등이 부정당할 때이다.
그렇다면 한국장로교회는 나누어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기준과는 상관없이 한국장로교회는 과도할 정도로 분열에 분열을 거듭했다. 이러한 과도한 분열에 적지 않은 원인으로 신학의 미천함을 들 수 있다. 양낙훈 교수는 한국장로교의 주요 분열들이 발생하던 당시 일제시대 후기와 해방직후 갈등 등은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학적인 깊이가 너무 약했던 때였는데, 개혁신학의 원천을 배울 수 있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조차 제대로 번역되지 않았던 때이다. 양낙훈 교수는 당시 한국장로교 지도자들은 개혁주의 교회와 특히 교회일치와 분열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알 길이 없었을 것이라고 변호하듯이 서술했다.
이 땅에 장로교 신학자를 중심으로 개혁신학이 조금 소개되는 듯 하다가 자유주의 신학과 다양한 현대신학과 은사주의 운동에 의해서 제대로 꽃 피우지 못하게 되었다. 개혁신학을 소개하기에 힘쓴 분들을 열거해보면 박형룡 박사의 루이스 벌코프 신학의 소개, 박윤선 박사의 개혁주의 주경신학의 소개, 차영배 박사의 헤르만 바빙크 신학의 소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총신대만이 아니라 장신대 이종성 교수도 약간 성질이 다른 개혁주의이다. 그리고 독일에서 신학공부를 한 김영한 박사의 독일개혁신학의 소개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개혁신학이 제대로 소개되기도 전에 이에 대한 비판이 먼저 들어오게 되고 스스로 기복신앙과 영성신학에 그 자리를 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의 문제 현상들
문제라고 여겨지는 다양한 현상들이 한국교회에 있다. 개신교 특히 장로교내에 과도한 분열, 신학적인 풍요 그럼에도 빈곤, 목회현장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 그리고 성경해석에 있어 공교회성 약화에 대해 말하겠다.
①개신교 특히 장로교내 과도한 분열 = 교파분열 현상이 세계교회 축소판 형태로 한국교회내에 자리하게 되었다. 개신교에는 다양한 교파들이 있고 특히 개혁교회 전통을 잇는다고 자부하는 장로교회 분열은 가히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과도한 현상이다.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닌 것들이 있다. 나이가 그렇고 한국장로교의 수도 그렇다. 100개가 넘는다는 것이 자랑이 아니다.
②한국장로교의 신학적인 풍요와 빈곤 = 100여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각 교단교파들에서 수많은 신학자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신학자의 수가 많다고 한다. 인구비례로는 세계에서 가장 최고가 될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 장로교 신학자들이 다수를 이룰 것은 자명한 일이다. 세계 최첨단의 신학이론이 한국교회 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신학적인 풍요함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외적 풍요함이 반드시 내적 부유함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개혁교회의 유서 깊은 신학유산들이 재대로 전수되지도 못했는데 이런 유산이 채 전수되기 전에 이미 그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들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특유의 분열은 바로 이러한 신학적인 충격으로 일단의 원인이 있다고 여겨진다. 독일 같은 경우 국가교회 형태를 취하는데 다양한 신학자들이 함께 있다. 신학교수 정도가 주장하면 뭔가 뜻이 있겠지 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신학적인 성숙함이 없을 때 선교사들이 가르쳐 준 소리를 반복하고 있는데 조금만 다른 소리를 하면 이단이라면서 죽이라고 한다. 싸우면 피 흘리기까지 싸운다. 남을 수가 없다. 한국교회의 특유의 분열은 이러한 신학적인 충격에도 원인이 있다고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분별력도 없다. 이단들이 발원하여도 어떻게 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 오늘날 이단들이 기성교회를 자기 놀이터로 삼고 있다. 얼마나 교회를 업신여기면 이런 태도를 취할까? 더욱이 오늘날 염려스러운 것은 건전한 개혁교회 신학적 유산이 한국에 채 소개되기도 전에 현대적인 영성운동에 그 자리를 내주는 일이다. 소위 관상기도 운동은 성경에서 명제적인 진리를 얻기를 포기하고 감성적인 느낌과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운동이다. 명제적인 진리를 포기하는 순간, 타 종교와의 관계도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소위 관상기도 훈련장이 어떠한 곳인지 확인해 보기를 바란다. 힌두교 등 다른 종교 지도자들이 훈련을 받는 곳에 개신교 목사들이 왔다 갔다 한다.
③목회현장에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 = 각 목회현장마다 목회자의 개인적인 능력에 다른 결과도 있겠고 지역적인 특색이 있을 것이다. 목회성과에 따른 결과를 각 개인적으로 감당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겨진다. 목회자와 관련된 온갖 병적 현상들이 이러한 현실과 깊이 결부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이러한 문제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한국에서 한 젊은 신학자의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프랑스 파리에서 신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소장파 교수는 시간강사로 10년째 있다 생활고로 물류회사 트럭을 몰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별세했다. 최첨단의 신학학문을 하고도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 트럭운전사로 일하다 죽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④성경해석에 있어 공교회성의 약화 = 성경해석에 있어 공교회성이 약화되고 사사로운 성경해석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동료교수 이성구 교수는 종교개혁이 무엇인가를 묻고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믿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예배드리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사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지금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핵심인 오직 믿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마저 흔들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교회는 루터를 비롯해 교회개혁가들이 목숨 바쳐 이룩한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의 핵심들이 흔들리고 있으며 이에 따라 예배도 삶도 성경이 아닌 자기 소견의 좋은 대로 행동하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 개신교 역사의 짧은 기간 내에 수많은 신학자들이 양산되어 각자 나름대로 권위를 주장하면서 정통적인 교리에 매이지 않고 각자 나름대로 성경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전에 들어보지 못한 소리를 들으니 신선하고 좋다. 그러나 교회 교사라면 염려스러운 일이 적지 않다. 오전 예배 설교 다르고 오후 예배 설교 다르면 교인들은 각자 알아서 살아야 한다. 이미 신학교에서는 이런 현상이 들어와 있다. 구약 교수 강의가 다르고, 신약 교수 강의가 다르고, 조직신학 교수 강의가 다르다. 그래서 제가 말하기를 신학교수는 역할이 N분의 1이라고 한다. 20명의 교수가 있으면 내 역할은 20분의 1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목이 터지라 외치는 것은 본래 20명의 교수가 있을지라도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신학교이다. 20명의 목회자가 있더라도 설교하면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제대로 된 교회이다. 한마디 더하면 참으로 기독교라면 성도수가 아무리 많아도 그 마음의 소원이 하나여야 그것이 기독교이다. 주님의 소원이 내 소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기독교는 1천이면 1천, 1만이면 1만 각 성도들이 각자 소원을 예수 이름으로 이루려고 한다. 이런 모습은 본래 성경에서 가르치는 기독교와 상당히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밖에도 성경의 종교가 노래하고 춤추는 것으로 바뀐 현실이라든가, 개신교 목사들을 포함해서 목사들의 교권주의가 문제이다. KNCC에서 최근이 발표한 94개 조항에 목사에 대해 과격할 정도로 지적했다. 종교개혁 당시에는 교황이 하나였으나 오늘날은 각 교회마다 교황이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세습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머슴목회를 말씀하던 분이 어느 날 황제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장로직의 발견은 대단히 귀한일이지만 오늘날 자칫 목사와 함께 장로직도 교권화 되고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교회를 나오면서 여전히 이원론적인 사고에 빠져 “목사님, 저는 언제 주의 일을 합니까?”라고 묻는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주의 일이 아닌가?
500년 전과 다른 한국교회의 영적 분위기
위의 지적한 환경위에서 오늘 한국 개혁교회의 개혁을 말하겠다.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우리시대에서 불가능하다. 우리가 어떻게 이 시대의 모든 종교를 개혁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말은 그렇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시대에 있어 기독교는 종교들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독교 개혁이지 종교개혁이 되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는 다원주의 시대, 다종교 시대, 상대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미국은 그러한 정신이 지구상에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는 곳이다.
한국개혁교회의 개혁을 말하기 전에 먼저 500년 전과 달라진 영적 분위기에 대해 먼저 언급하고 이어서 한국개혁교회 개혁에 대해 말하겠다. 달라진 영적 분위기에 대해 말하겠다. 전반적인 무신론 분위기, 성경에 대한 신뢰의 감소, 성경을 비판하는 기독교 신학, 크게 벌어진 기독교 신학내의 간격, 교회 내에 깊숙이 들어 와 있는 무속종교적인 요소가 그것들이다.
①전반적인 무신론 분위기 = 종교 자체가 상대화되었다. 더 이상 기독교를 가르켜 종교라고 하지 않는다. 200년 전 만해도 미국의 종교는 기독교였다. 그런데 지금 미국에서 그렇지 못하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의 하나님을 가르켜 그 하나님 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다. 당연히 종교는 기독교이고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그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미국에서도 더 이상 통용되지 않고 그리고 미국에서 보낸 선교사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교회 현실도 그러하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일부 기독교인들의 신앙신조에 불과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다수의 사람들이 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 현실이다.
②성경에 대한 신뢰의 감소 = 성경에 대해 신뢰도 떨어졌다. 종교개혁 직전에는 성경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데 의문을 붙인다. 성경을 인용하며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 않는다. 신학논문에 있어서도 성경을 인용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성경 동시대에 희랍문서나 라틴어 문서를 인용하면 더 권위있게 인정받는 희안한 시대를 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기독교 신학은 성경외의 자료로 성경이 믿을만 하다는 것을 증거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에서도 성경을 정독하는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다. 혹 성경을 읽고 자기 생활에 적용한다고 해도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고 일방적이다.
젊은 신학자 조재천 교수는 최근에 히브리서 주석을 쓰면서 서문에서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역설적이게도 성경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잘못된 성경해석에 노출된다는 사실이다. 성경을 소중히 여기는 분위기가 있는데 그 것 때문에 잘못된 성경해석에 노출된다는 것. 문맥과 상관없이 한 구절만 떼어서 묵상하고 적용하려고 하는 것은 전형적인 큐티 방식이다. 성경 저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의미를 영해라고 하면서 풀어서 설명한다.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는 내용임에도 자기의 교파나 전통에 맞지 않으면 못 본 척 하는 것을 젊은 신약학 교수가 지적했다. 성경을 안 믿는 나라에서는 성경을 가지고는 이단도 설 자리가 없지만 성경을 잘 믿는 나라에서는 이단이 굉장히 많다. 세계에서 기독교 이단이 가장 많은 나라가 한국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다.
③성경을 비판하는 기독교 신학 = 기독교의 신학 내부에서 성경의 상대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소위 역사 비평학에 기반한 자유주의적인 성경연구의 흐름에서 시작되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합신 구약학 김진수 교수는 현대 구약학의 동향을 말하면서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가지 구약학계에서 구약 성경을 가르켜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어색하고 곤란한 지경이 되었다고 말했다. 구약학계에서는 구약 성경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 또는 계시라고 하면 상대를 안해준다는 것. 그래서 구약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충격적이다.
김진수 교수는 이전 시대부터 급진적인 태도를 취하는 두 가지 흐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문의학적 연구방법과 코펜하겐 학파의 연구방법이다. 문의학적 연구방법은 구약은 더 이상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는 역사기록이 아니라 작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문학적 수사적 기교를 들을 동원해서 창작해낸 문학작품이라고 한다. 코펜하겐 학파는 성경에서 최소한의 것을 제외하면 구약에서 역사적으로 믿을만한 사실을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구약에 기록된 대로의 이스라엘과 다윗 왕국은 없었다는 것이다. 심각하다. 이것이 현대 구약 학자들의 시각이다. 조계사나 해인사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성경을 훼손시키고 있고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키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한철하 박사가 서양신학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기독교는 본래 죄인을 불러서 의인으로 변화시키는데 전 관심이 있었는데 서양신학이 중심을 놓쳐 버렸다는 것. 그래서 구속의 종교를 다른 여러가지의 종류의 가르침으로 변질시켜 버렸다고 지적했다. 신학이 해야 할일이 예수 믿고 구원 얻게 하는 일임에도 서양신학이 이 본래의 임무에서 떠나버렸다고 노신학자가 지적했다. 오늘날 서양에서 공부한 저처럼 독일에서 신학을 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음의 빚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저는 한국 보수적인 교회 목사의 아들이며, 보수적인 교회 출신이며, 보수적인 신학교 출신으로 독일로 간 것이다. 독일에서 공부하다 동료들과 이러다가 잘못하면 개종하겠다고 염려하기도 했다. 우리가 적어도 개종의 순간이 오면 목사직을 한국에 반납을 하던지, 이만큼 했으면 자료를 충분히 구했으니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돌아가겠다고 수도 없이 고민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끝까지 공부했다.
④크게 벌어진 기독교 신학내의 간격 = 문서를 보면 기독교 신학 내에도 간격이 벌어져 있다. 2014년 독일에서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신학자들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미리 내다보면서 루터를 본받아 오늘날 형편에서 94개 조항을 발표했다. 조항을 읽으면 같은 기독교인데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기독교내에 더 나아가 개신교에 신학적인 입장 차이는 심각하게 벌어져 있다. 같은 성경본문을 두고 한쪽에서는 하늘을 가르키고 다른 쪽에서는 땅을 가르키는 격이다. 지난 3월 24일자로 한국교회개혁 94조 선언이 KNCC와 한국교회연구원을 통해 나왔다. 이 문서 역시 신학적인 간격을 깊이 느끼게 한다.
⑤교회 내에 깊숙이 들어 와 있는 무속종교적인 요소 = 그리고 교회 내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무속종교적인 요소들이다. 전통종교에서의 행습이 기독교회의 문턱에서 제대로 걸러지지 않고 교회 안에 들어와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이 점집인지 절간인지 교회인지 구분되지 않을 다양한 기도 행태들이 이미 교회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결국은 자기 성공, 자기 소원성취에 대한 기대이다. 자기 성공과 자기 소원성취를 위해서 예수이름을 부르고 하나님 이름을 부른다. 심지어 신을 대하는 종교행위조차도 자기 소원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었다.
앞서 언급한 21세기 초반 현대 기독교회가 가지는 거의 모든 형상들을 이미 한국교회에 나타나고 있다. 이런 면에서 한국 개혁교회들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 말씀드린 전반적인 무신론의 분위기, 성경에 대한 신뢰 감소, 성경을 비판하는 기독교 신앙, 기독교 신학내의 간격, 교회 내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무속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우리들은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 개혁교회의 개혁에 대한 2편이 이어집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댓글목록
더스틴 호프만님의 댓글
더스틴 호프만 ()동감이 갑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