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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일 목사의 긍정적인 눈으로 C. S. 루이스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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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2-0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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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KAPC) 동부지역 목사장로 기도회가 2월 6일(월)부터 3일간 필라 벅스카운티장로교회에서 열렸다. 둘째날 박성일 목사(필라 기쁨의교회)는 "C. S. 루이스가 사랑을 논하다. 목회적 Insight"라는 제목의 특강을 통해 루이스를 재해석 소개했다.

박성일 목사는 웨스터민스터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했다. 학교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루이스 사상에 대한 연구를 학교에서 허락하여 루이스에 대한 논문을 마치고 졸업했다. 현재는 14년전 개척한 기쁨의 교회의 담임목사이며, 웨스트민스터에서 파타임으로 변증학을 가르친다

박성일 목사는 "신학교에서는 루이스를 강의할때는 비판적으로 강의한다. 학교 분위기도 그렇고 전제주의적인 변증학에서 볼때 루이스가 부족한 부분도 있으므로 루이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분위기에서 강의한다. 하지만 신학교가 아니라 일반적인 자리에서는 좋은 분위기로 긍정적으로 루이스를 이야기한다. 루이스에게 배울점도 있다"고 강의의 방향을 소개했다.

박성일 목사는 20세기 대표적인 기독교 지성인 루이스가 쓴 "네가지 사랑"이라는 책을 중심으로 강의를 전개했으나, 여기서는 루이스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만 편집하여 소개한다. 다음은 강의 내용이다.

천재 C. S. 루이스의 고민

루이스에 대해 긍정적으로 들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부정적으로 들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루이스가 귀신을 섬기거나, 캐톨릭 교인이라는 소문도 있다. 그런 칼러가 뭍어나는 부분도 있어 혹시라도 루이스를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수정했으면 좋겠다. 그 분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존중하는 자세에서 들어주었으면 한다.

루이스는 1898년에서 북부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20세기에 들어 영문학의 중심지가 영국에서 아일랜드로 옮겨간다. 루이스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지만 배경은 다르다. 어머니는 스코드랜드 장로교 목사의 딸이다. 할아버지때 부터 웨일즈 지역에 살았다. 할아버지는 스팀엔진을 만들어 돈을 많이 벌고 루이스 아버지를 잘 교육시켜 변호사로 만들었다. 그래서 루이스는 부유한 유아기를 보냈다.

루이스는 단순히 부유할뿐만 아니라 대단한 지각의 소유자이다. 루이스에 대한 기사를 읽고 나도 루이스처럼 될수 없음에 3번을 절망했다.

루이스는 9살에 실락원을 읽고 독후감을 썼다. 그리고 16살때 헬라어를 고전으로 읽기 시작했으며, 헬라어를 6개월동안 공부한후 헬라어로 사고할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옥스포드 교수일때 커리큘럼으로 학생들을 개인교습했다. 공부하다 심심하고 졸리면 게임을 했다. 학생이 루이스의 서재안에서 어느 책이던지 선택하고 아무 페이지의 한 부분을 읽으면 나머지는 루이스를 외워 읽었다. 거짓말같은데 그것을 읽고 나는 루이스가 아님을 알았다.

루이스가 10살때 어머니가 죽었다. 이후 루이스의 인생에는 안정감이 없어졌다. 루이스 아버지는 이후 독신으로 살았는데 성격적으로 문제있어 아들과 대화가 안되었다. 루이스가 1차대전 당시 프랑스에 전투하러 갔다가 부상을 당해 런던으로 와 병원에 입원했다. 루이스는 병원에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아버지는 한번도 면회를 안왔다.

루이스는 16살이 될때까지 6년간 학교를 4군데나 옮겼다. 천재적인 아이임에도 학교에서 여러사람과 공부하는 것을 적응을 못했다. 2년반동안 아버지를 어릴때 과외한 개인교습 선생에게서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할수 있도록 교육을 받았다. 그 선생이 무신론자이자 이성주의자이며 자유주의자였다. 이 사람의 영향으로 루이스의 신앙이 다 버려졌다.

루이스가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시험에서 수학을 낙방함으로 입학을 거절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상이군인이었다는 이유로 입학이 가능했다. 그리고 옥스포드에서 철학과 영문학을 공부했다. 철학쪽에 능력을 발휘하여 철학교수가 안식년을 떠난 1년동안 학부의 철학강의를 맡았다.

하지만 루이스는 철학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고민하고 1년이 끝나자, 영문학 강사로 취직했다. 이후로 거의 인생의 마지막까지 옥스포드에서 살았다. 그는 미국에 간적이 한번도 없을정도로 외국여행을 별로 안했다. 죽기전에 그리스를 방문했지만, 루이스는 옥스포드라는 지적인 마을에서 평생을 살았다.

C. S. 루이스는 무신론자인가

루이스의 특이한 점은 어렸을때는 신앙이 있었다. 개신교 신앙이 있는 부모밑에서 살았다. 잘못된 선생을 만나 신앙을 상실했을때 옥스포드에서 공부하고 교수직을 하면서 좋은 동료들을 만난다. 당시에 유명한 교수들은 크리스찬이었다. 당시 옥스포드 대학교는 후기독교적인 학문으로 변화되고 있었다. 종교적인 과거를 다 버리고 철학과 과학으로 새로운 시대로 간다는 사상이다. 그래서 신앙을 이야기 하면 뒤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주변인이 몇명있었다. 반지의 제왕을 시리즈로 쓴 존 로널드 루엘 톨킨이 그랬다. 그는 루이스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언어학자인데 소설안에 새로운 언어와 문법을 만들었다. 그는 캐톨릭이지만 그리스도 중심적인 역사관은 재미있다. 이런 분등을 통해 루이스는 지식적인 것을 받게된다.

결국은 루이스는 30세에 자신이 무신론자가 아니라 유신론자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었다는 내용이 자서전에 있다. 2년후에 삼위일체론에 대한 인식이 루이스에게 들어오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루이스는 자신을 크리스찬이라고 설명하고 학교주위에 있던 성공회 교회 교인이 되어 평생을 조용하게 살았다.

루이스는 영문학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크리스찬이 된 후 자신의 변화에 대해 글을 쓰고 변증적인 책을 냈는데 "고통의 문제"이다. 당시로서는 너무 신선했다. 루이스는 성공회 교회를 나갔으나 신부가 설교를 하는 내용이 이해가 안갔다. 그 이유는 교회가 전통주의에 빠져있었다. 성공회의 중요가치가 이성, 전통, 성경순이다. 이런것들이 언어에서부터 매너리즘에 빠져 20세기 사람과는 소통이 안되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전통을 버리고 무조건 신식사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루이스가 회심하게된 중요 이유는 시대적인 우월의식, 무엇이던지 업그레이드 된 것이 좋다는 생각이 잘못된것을 발견하고 기독교를 다시 찾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루이스가 원한것은 교회가 현대감각에 맞게 가라는 것이 아니었다. 교회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학세계속에 빠져 평신도와는 전혀 다른 생각에 들어가 있다. 그것이 전통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의 교회가 자유주의 신학에 깊이 빠져있었다.

성도들은 전쟁중에 너무 불안했다. 성도들은 자기 삶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고민하는데, 성직자들은 성경비평이나 하고 있는 것을 루이스는 너무 답답하게 생각했다. 기독교의 초자연주의가 어디에 있는가. 목사나 신학자마저도 자연주의에 빠져 기독교 심리는 없어지고 메마른 이성만 가지고 영감없는 설교를 한다. 이것을 두고 루이스는 고민했다.

성직자들은 노동자 계층에서 들으면 이해가 안되는 언어를 사용했다. 루이스는 신학자에게도 강의하면서 당신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재정리하여 오늘날의 말로 바꾸어 사용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루이스는 2천년 역사속에 흘러온 역사적인 기독교안에서 진정한 크리스찬이라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냄새가 있다고 했다. 그것을 초자연주의 그리고 오직 은혜로 인한 구원이라는 두가지 원리에서 찾았다. 물론 루이스가 오해를 조성할 부분도 있었지만 기본적인 줄기에 있어서 중요한 기독교의 핵심을 붙잡았다.

C. S. 루이스의 부정적인 면

루이스의 부정적인 면이 있다. 가장 중요한것은 신학적인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루이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나는 신학자가 아니다'는 말을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우리보다 루이스가 더 훌륭한 신학자이다. 이유는 루이스는 중세기 기독교문화의 대가이다. 중세기 기독교의 문화가 꽃핀 시대를 섭렵했다. 신학적인 지식이 높았고 성경을 꾸준히 읽었다.

성경의 절대권위 우월성에 대한 개념이 우리와 다르다. 루이스는 성례적으로 성경을 보았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도구로 보았으며, 성경자체가 절대적인 권위와 무오한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복음주의로 나누는 중요한 요소는 성경관인데. 대부분의 복음주의자 신학자들은 루이스의 성경관에 대해 지적했다. 루이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복음주의자가 아니다.

서강대 강영한 철학교수가 강의하는 것을 들었다. 강 교수는 복음주의라 생각했던 선교학의 거장을 만나, 복음주의냐고 물으니 아니라 해서 놀랐다. 왜 스스로 아니라 하는가. 그는 "복음주의자는 성경을 읽지 않는다. 성경에서 자기가 원하는 좋은 구절만 빼내 이용한다"고 대답했다. 루이스는 적어도 성경을 이용하지 않고 성경을 읽었다. 성경을 흐름을 알아 전체적으로 싸움을 할 수 있었다. 성경에 대한 입장은 달랐지만 성경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했다.

성경의 무오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초자연주의나 기적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다. 루이스는 저서에서 동정녀에서 예수탄생이나 예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루이스는 당시 '공룡'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어떤 사람은 루이스가 예수를 믿었느냐고 묻는다. 루이스의 책을 읽어 보면 안다. 예수를 믿는다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만 루이스는 아주 훌륭한 예수님의 제자였다.

학자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나누고 좋은 사람 책만 읽으면 된다는 사고는 안된다. 루이스를 나쁘고 좋은 사람으로 구분하지 않고, 루이스의 장점을 통해 배울것이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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