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남자, 아름다운 성공" 차인홍 교수 연주 및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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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2-01-15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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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사는교회(담임 노진산 목사, 전임 김성민 목사)는 1월 15일(주일) 오후 4시 차인홍 교수의 간이 콘서트를 열었다.
차인홍 교수는 소아마비로 인해 9살의 어린 나이에 재활원에 버려져야 했고, 지독한 가난과 불구의 몸으로 24세 이전까지 한번도 정규 교육을 받아보지 못했던 과거를 지닌 인물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오하이오 라이트(Wright) 주립대학 종신교수 겸 대학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었고, 세계 각지를 누비며 연주 활동을 하는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차인홍의 하나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차교수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돌이켜보면….”
약 한 시간 동안 바이올린 선율과 함께 관객은 ‘9살 차인홍의 슬픔과 좌절’을 같이 되돌아 보았다. 차인홍은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2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걷지 못했다. 어려운 형편은 그를 9살 때 재활원으로 내몰고 상처나 슬픔이라는 단어조차 사치에 가까운 힘든 유년시절을 보낸다.
그리고 24세.
2년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패스한다. 그의 재능을 아쉬워한 서울대 어느 여교수는 그를 신시네티 대학으로 유학을 주선해 준다. 그 누구도 유학이라는 단어를 실감할 수 없는 형편에 여교수만 애를 태우며 그를 미국으로 보냈다. 장학금을 받아 학비는 해결을 했고, 생활비 역시 여교수가 아산사회복지 재단의 도움을 받도록 알선을 해주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뉴욕 땅을 밟는다. 지금도 뉴욕은 흔쾌히 품에 안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고생을 선물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다시 영주권이라는 걸림돌에 멈추게 된다. 캘리포니아의 한 작은 교회에서 지휘자로 1년간 생활을 하지만 작은 교회의 주급으로 생활이 어려웠다. 그때도 지금도 알 수 없는 어느 한 분이 매월 천불이라는 생활비를 보내주셨다.
생활고로 인해 치과 기공사를 하기로 결심을 하기도 했고, 영주권이라면 신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갈등이 생길 무렵, 우연히 지금 몸담고 있는 대학의 교수 청빙 공고를 접했다. 인생에 처음 써보는 이력서인데 이것이 마지막 이력서가 된 셈이다. '8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교수가 되었고 지금은 종신교수로 임명되었다. 그 사이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고, 아내는 늘 그와 함께하고 있다.
누군가는 대학교수라는 직업을 가볍게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에게 교수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과 동일하다. 그는 장애가 있지만 장점이 많다고 말한다. 아마 다리가 불편하지 않았다면 키가 186센티 정도 되는 훈남(?)이었을 것이다.
여지껏 감기약 조차 먹어 본적이 없을 체력을 주셨다. 피곤을 모른다. 폐활량도 마라톤 선수급이다. 그리고 좌절하지 않는 의지력을 주셨다. 그는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휠체어 마라톤 세계대회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따는등 육체의 한계를 뛰어난 정신력으로 극복하였다.
왜 세상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공평해야만 하는지 억울하기도 했었다. 하나님이 약자를 세상에 두신 이유는 약자를 봄으로서 겸손해 지라는 뜻일 거라 생각했다. 과거의 상처는 이제 주님이 주신 사랑의 고백이 되었다. 언제나 ‘오늘이 어제보다 나은 삶을 주셨음’에 감사한다.
차 교수는 여지껏 하나님이 자신을 밀고 오셨다는 표현을 했다. 하나님께 밀려서 이 불공평한 세상에서 ‘아름다운 남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행복한 약자’의 이야기. 듣는 사람과 말하는 자가 함께 감사의 은혜로 과거가 치유되는 시간이었다.
차인홍 교수는 자서전 "아름다운 남자, 아름다운 성공" 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을 구한다."
"가슴 가장 밑바닥에 있던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어렵게 살아가는 동안 견뎌내고, 꿈꿀수 있게했다"며
그의 신앙관을 고백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차인홍 교수는 소아마비로 인해 9살의 어린 나이에 재활원에 버려져야 했고, 지독한 가난과 불구의 몸으로 24세 이전까지 한번도 정규 교육을 받아보지 못했던 과거를 지닌 인물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오하이오 라이트(Wright) 주립대학 종신교수 겸 대학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었고, 세계 각지를 누비며 연주 활동을 하는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차인홍의 하나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차교수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돌이켜보면….”
약 한 시간 동안 바이올린 선율과 함께 관객은 ‘9살 차인홍의 슬픔과 좌절’을 같이 되돌아 보았다. 차인홍은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2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걷지 못했다. 어려운 형편은 그를 9살 때 재활원으로 내몰고 상처나 슬픔이라는 단어조차 사치에 가까운 힘든 유년시절을 보낸다.
그리고 24세.
2년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패스한다. 그의 재능을 아쉬워한 서울대 어느 여교수는 그를 신시네티 대학으로 유학을 주선해 준다. 그 누구도 유학이라는 단어를 실감할 수 없는 형편에 여교수만 애를 태우며 그를 미국으로 보냈다. 장학금을 받아 학비는 해결을 했고, 생활비 역시 여교수가 아산사회복지 재단의 도움을 받도록 알선을 해주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뉴욕 땅을 밟는다. 지금도 뉴욕은 흔쾌히 품에 안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고생을 선물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다시 영주권이라는 걸림돌에 멈추게 된다. 캘리포니아의 한 작은 교회에서 지휘자로 1년간 생활을 하지만 작은 교회의 주급으로 생활이 어려웠다. 그때도 지금도 알 수 없는 어느 한 분이 매월 천불이라는 생활비를 보내주셨다.
생활고로 인해 치과 기공사를 하기로 결심을 하기도 했고, 영주권이라면 신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갈등이 생길 무렵, 우연히 지금 몸담고 있는 대학의 교수 청빙 공고를 접했다. 인생에 처음 써보는 이력서인데 이것이 마지막 이력서가 된 셈이다. '8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교수가 되었고 지금은 종신교수로 임명되었다. 그 사이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고, 아내는 늘 그와 함께하고 있다.
누군가는 대학교수라는 직업을 가볍게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에게 교수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과 동일하다. 그는 장애가 있지만 장점이 많다고 말한다. 아마 다리가 불편하지 않았다면 키가 186센티 정도 되는 훈남(?)이었을 것이다.
여지껏 감기약 조차 먹어 본적이 없을 체력을 주셨다. 피곤을 모른다. 폐활량도 마라톤 선수급이다. 그리고 좌절하지 않는 의지력을 주셨다. 그는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휠체어 마라톤 세계대회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따는등 육체의 한계를 뛰어난 정신력으로 극복하였다.
왜 세상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공평해야만 하는지 억울하기도 했었다. 하나님이 약자를 세상에 두신 이유는 약자를 봄으로서 겸손해 지라는 뜻일 거라 생각했다. 과거의 상처는 이제 주님이 주신 사랑의 고백이 되었다. 언제나 ‘오늘이 어제보다 나은 삶을 주셨음’에 감사한다.
차 교수는 여지껏 하나님이 자신을 밀고 오셨다는 표현을 했다. 하나님께 밀려서 이 불공평한 세상에서 ‘아름다운 남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행복한 약자’의 이야기. 듣는 사람과 말하는 자가 함께 감사의 은혜로 과거가 치유되는 시간이었다.
차인홍 교수는 자서전 "아름다운 남자, 아름다운 성공" 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을 구한다."
"가슴 가장 밑바닥에 있던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어렵게 살아가는 동안 견뎌내고, 꿈꿀수 있게했다"며
그의 신앙관을 고백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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