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선 목사 "머슴정신있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
페이지 정보
성회ㆍ2012-01-28 00:00관련링크
본문
뉴욕감리교회(심건식 목사)는 1월 28일(토) 오후 8시 송영선 목사(빌립보교회, 매릴랜드)를 초청하여 제직수련회를 열었다. 송 목사는 머슴론을 펼쳤다. 이어 송영선 목사는 주일예배에서 설교를 했으며, 송 목사와 동행한 권강현 장로는 국제적인 심리 검사 도구인 DISC 세미나를 인도했다.
▲심건식 목사/송영선 목사/권강현 장로
심건식 목사는 2010년 열린 빌립보교회 목회철학과 노하우를 나누는 머슴세미나에 참가함으로 송영선 목사와 관계를 맺었다. 송영선 목사는 "뉴욕감리교회에서 7명이나 머슴세미나에 참가했다. 심건식 목사는 존경할만한 분인데 와서 배우겠다고 하여 잔잔한 마음의 감동이 있었다. 가능한 외부집회에 안나가는데, 심 목사님 요청을 거절을 못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다음은 송영선 목사의 머슴론의 정신을 담은 강의 내용이다.
17살때 잘알지 못하면서 무신론을 주장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지금까지 예수님때문에 복된 자로 살았다. 저의 삶을 바꾸어 놓은 성경말씀이 있다. 빌립보서 2장 5-11절 말씀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장 5-11절)
이 말씀가운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 했다. 자기를 비우고 낮추셨다. 종의 모습이 되기까지 낮추셨다. 종이라는 뜻은 머슴이라는 뜻이다. 종보다 더 적절한 번역이 머슴이라고 본다. 머슴은 자기권리나 자기주장이 없이 주인이 시키는대로 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머슴이 되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 말씀이 내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제가 예수님을 믿게 된 동기는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기에 그렇다.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고, 나를 높이실분이고, 나를 구하게 하신 분이고, 나를 강하게 해주실 분이기에 믿게 됐다. 그것이 나에게 중요한 예수를 믿는 동기이다. 예수님이 전지전능하기에 그러한 것도 주신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깨닫고 난 다음 생각이 바뀌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 터닝포인트가 된 메세지가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것을 믿으면 우리도 다 예수님 처럼 놀랍게 된다. 예수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구원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여러분과 저를 섬기시는 머슴이시다. 말씀을 다시 한번 자세히 보라.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는데 사람중에서도 가장 인간사에서 멸시한 모습이 되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깨닫기 전까지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인상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며, 어마어마하신 분이다. 반면 우리는 티끌보다도 못한 작은 존재이다.
그런데 말씀에 의하면 우리의 모습이 되셨다.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하신 분이다.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는 나의 죄를 사하려 주시기 위해서이다. 나를 위해 머슴이 된것이다. 예수님을 전지전능하고 어머어마한 분이라서 처음에는 따랐지만 나중에는 달라졌다. 이 말씀을 보면서 신앙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이 세상에서 살동안 예수님의 참된 모습은 머슴이다.
그래서 이 사상의 깨달음과 정신이 내 마음에 들어오면서 다른 성경구절에서 같이 말하는지를 찾고자 했다. 중간에 갑자기 튀어나온 말씀이 아니어야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창세기에서도 흐름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머슴이 되셨다는 이 사상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고 생각도 못했다. 이 말씀에 만족못하고 창세기로 갔다.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종이 되신 흔적이 창세기에 있어야 한다.
성경은 신약과 구약으로 나뉜다. 그런데 성경을 잘이해하려면 인간이 타락하기 전과 타락한 후로 나누면 된다. 창세기 1-2장이 1편이고, 이후 요한계시록까지 2편으로 본다. 인류역사의 가장 큰 사건은 인간의 타락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해 회복시키셨다. 재림하면서 새하늘과 새땅이 올때 창조의 목적에 따라 우리가 회복이 된다. 우리안의 여러가지 문제의 답을 찾으려면 그렇게 보면 도움이 많이 된다.
빌립보서 2장에는 하나님을 머슴이라고 했기에 창세기를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 나타난것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기 시작했다. 내가 믿어왔던 하나님 기독교 교회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 사상을 발견했다. 하나님은 종이시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았느냐. 처음인 분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장 26-27절)
하나님이 창조하셨을때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졌다. 하나님과 우리는 같은 관계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안에 있다. 나에게 아들이 있는데 나와 닮았다. 아들이기에 열등한 녀석이라고 생각한적이 없다. 아들은 내 분신으로 나와 같다. 내 소유가 아니다. 내 형상이 아들이다.
이 말씀을 볼때 그것을 깨닫았다. 하나님이 나를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것은 당신과 동등한 관계를 만드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지극하게 높으신 분이다.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위대함을 저와 비교하면 저는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고 살아왔다. 그래서 하나님은 높임과 존귀와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머슴이라고 했다고 이것을 부인하면 큰일난다.
창세기를 보고 그렇게 광대하신 하나님이 나하고 같은 하나님임을 알았다. 전능하시고 비교할수 없는 위대함이 아니라 그 분의 인격과 그 분의 마음을 이야기 하는것이다. 이 이미지를 '섬김의 이미지'라고 말한다. 섬김은 사랑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섬김을 받기를 원치 않는다. 섬김을 받기 원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섬김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시려고 만드신 것이다. 우리를 창조하고 섬기려고 형상을 같게 만드셨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도 타락하기 전에는 섬김이 자연스러웠다. 창세기 3장은 타락의 장이다. 원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 사랑의 실제적인 모습은 섬김이다. 오랜 묵상가운데 나온 이야기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장 18절)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셨다. '다스리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다스리라는 말은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주권이다. 주권을 가진자만 다스릴수 있다. 사람을 만들어 놓고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사람에게 다스리라고 위임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신뢰하시고 인정하시는 것이다. 자기와 동등하게 취급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높은 곳에 앉으셔서 우리를 다스리고 우리는 숨도 못쉬게하려고 우리를 만드신 것이 아니다. 당신처럼 우리도 사랑을 가지고 다스리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다시 놀랐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세기 1장 31절)
놀라운 말씀이다. 6일만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전에도 좋았다고 하셨는데 6일째 되는 날 사람을 만드시고 '심히 좋았다'라고 하셨다. 히브리말로 좋았다를 반복한다. 좋았다는 단어를 두번 사용하면 사랑한다는 말이다. 좋아서 죽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보기만 해도 좋은 것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찬양)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어쩔줄을 몰라하신다. 이것이 사랑이다. 사람들은 남녀가 연애할때 이 맛을 약간 본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느끼는 마음과 비할바가 못된다. 하나님이 여러분 한명 한명을 사랑하여 주고 싶어서 어쩔줄을 모르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장 18절)
빌립보서 5장의 깨달음을 가지고 묵상했다. 이전에는 그냥 지나간 부분이다. 빌립보서 5장을 가지고 이해하고 보니 깨닫지 못하는 것이 튀어나왔다.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아 하나님은 아담을 위하여 배필을 지으리라 하셨다. '위하여'의 히브리어 뜻은 내가 그의 종이 되겠다는 뜻이다.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종은 아담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을 위해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팔을 걷어부치시고 섬기려 하셨다. 말씀만 하면 천지가 창조하시는 분인데도 이때는 그렇지 않았다. 이브를 만들기위해 아담의 갈빗대를 뽑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손에 피를 뭍히셨다는 것이다. 그 일을 하신 것은 종의 모습이다. 섬김의 모습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세기 2장 19절)
저는 이 말씀이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나님이 지루하셨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담에게 동물을 이끌어 가시면서 이름을 지으라 하셨다. 이 말씀이 왜 들어가 있는가. 그런데 빌립보서 5장을 통해서 보니 놀라운 비밀이 숨겨있다. 자고로 이름을 짓는 특권은 하나님에게 있다. 쉽게 말하면 자녀를 낳았다면 이름을 짓는 권한은 아버지에게 있다. 하나님이 창의력이 없어서 아담에게 이름을 대신 지으라 하신것이 아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동역자이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동역자이다.
하나님은 같은 모습을 가진 사람에게 다스리고 이름을 지으라고 하신다. 특권을 주는 것이 진짜 사랑이다. 딸이 처음 '대디'라고 했을때가 흥분되어 소리를 질렀다. 딸과 아무도 상관없는 사람은 즐겁지 않다. 기쁜 이유는 딸을 사랑하니까 그렇다. 아담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평가할수 밖에 없겠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정말 좋은 것이다. 그 하나님의 기뻐하는 모습이 종의 모습이다. 어마어마한 하나님이시지만 아담을 섬기는 종의 모습이시다. 가장 압권으로 너무나 놀라운 말씀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장 16-17절)
이 말씀은 내가 예수믿기전에 예수믿는자를 골탕먹이는데 사용한 말씀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줄 아셨는데도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시고 먹지말라 하시고 다 먹으니 죽게하시고 그것이 무슨 말이 안되는 소리인가. 아직도 사람들사이에 신학자들도 논란이 많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는가.
이 말씀을 해석하려면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보자. 그것은 이 부분을 푸는 비유의 말씀이다. 쉬운 비유이다.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아들은 아담이며 여러분과 저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탕자의 비유에서 선악과 나무는 탕자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다.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재산이 자식이 돌아갈텐데 아버지가 죽기도 전에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한다. 아버지에게 죽으라는 이야기이다. 엄청난 죄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자세가 더 이해가 안된다. 아무 소리안하고 둘째아들에게 재산을 준다. 아버지가 재산을 줄때 아들이 흥청망청 다 쓸줄 이미 알았다. 하나님도 선악과를 따먹을줄을 알았는데 주셨다.
그러면서도 왜 재산을 나누어 주셨을까. 나같으면 안준다. 탕자의 아버지는 이해가 안될 행동을 했다. 뻔히 방탕하고 탕진할줄 알았는데 왜 재산을 주었는가. 아버지는 아들이 다시 돌아올줄 알았다. 아버지에게 중요한것은 돈이 아니라 사랑이다. 아들이 집을 떠나 돈을 낭비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아무소리도 안하고 용서하고 아들로 삼아주었는데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이 아니면 받으실수 없다. 아담을 만든후 하나님의 딜레머는 나는 창조주이고 아담은 피조물이기에 아담이 보여주는 사랑에 만족을 못하신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주시고 자유의지를 주셨다. 탕자 아버지도 머슴의 노릇을 하고 있다. 아들이 시키는대로 재산을 주고 아들이 떠나니 동구밖에서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가다리고 있다. 그것이 머슴의 모습이다. 주인을 잘못만난 머슴의 모습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장 16-17절)
하나님의 말씀이 '먹지마라'라고 명령적으로 나온다. 명령은 자고로 높은 사람이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주인이 종에게 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시비를 건다. 나도 그런 의문이 있었다. 하나님은 다른데는 인격적으로 섬기는 모습인데 여기서는 명령하니 이해를 못했다. 그 의문을 신학교 다닐때 풀었다. 지도교수는 명령형이 아니라 선언문이라고 말해 놀랐다.
선언문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알리는 것이다. 페인트가 칠해져 있으면 붙여놓는 'Wet-Painting'이나 고장나면 붙여놓는 'Out of Order' 같은 사인이 선언문이다. 그렇게 선언을 했는데도 하는 것은 하는 사람의 책임이다. 인격적으로 대해 주는 것이다. 십계명도 선언문이다. 단지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그 선언을 지키면 복을 받고 안지키면 저주받는다. 그것은 다 내 책임이다. 그 것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모습을 볼수가 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장 5절)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를 시기하던 사탄이 인간에게 간교한 말을 한다. 창세기 1-2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담을 대우하는지 보았다. 절대 수하로 부리지 않으시고 정말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셨다. 사탄은 거짓말을 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하로 비인격적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이간질을 했다.
욕심이 잉태한 것이 죄이다. 그러나 죄의 뿌리는 비교해서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올려놓는것이다. 더 올라가려는 짓이다. 사단이 그 짓을 먼저하고 타락했다. 사단은 교만한 영이다. 교만중에서 가장 큰 교만은 하나님없이 완전해지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비교하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사단이 자기가 실패한것을 아담과 이브를 통해 회복하려고 하니 같은 전략을 사용할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권세를 주셨다. 그런데도 아닌것처럼 사단은 아담을 속인것이다. 그때부터 우리에게는 "높아지고 강해져야 한다", "머슴이 아니라 왕이 되어야 한다"라는 욕심으로 죄를 낳고 온 인류가 죄의 포로가 되어서 서로 싸운다.
그때 하나님은 가만히 안계시고 대책을 내놓으셨는데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빌립보서 5장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낮추시고 머슴이 되셨다. 원래 그것이 하나님의 모습이다. 그래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은 권위있는 사자로 오지 않으시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으로 오셨다. 주인을 위해 죽는 종의 모습이다.
강한자가 종이 되는것은 사람이 보기에는 어리석다. 경쟁하고 비교하여 강해지고 똑똑해져야 한다. 권력잡고 돈을 벌어야 한다.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한다. 그런 가치관으로 사니 사람들은 서로 경쟁의 대상이다. 상대가 안죽이면 내가 죽는다. 그러니 비참하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힘겨루기를 한다. 직장과 학교에서도 싸운다. 교회에서도 그런 짓을 한다. 그런데 현대교회에서 시작한것이 아니라 예수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다. 강한자로 오실수 있었다. 귀족의 집안이나 명문가에서 태어날수도 있었는데 가장 약한 목수의 아들로, 그것도 마굿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죽을때는 죄인중의 죄인으로 몰려 가장 힘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그것은 머슴의 모습이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태복음 20장 20-21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기위해 올라가신다. 가장 비참한 모습이다. 제자들의 눈치가 뻔하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인 세베대가 치마바람을 일으키고 두아들을 예수님의 좌우에 앉히려고 했다. 그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영이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도 그랬다. 현대교회에서 이런일이 많다. 목사와 장로가 힘겨루기를 한다. 머슴의 영은 없고 교만의 영만 가지고 교회를 섬기는 것이 큰일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은 마귀의 영이라고 하셨다.
결론은 예수님이 인자가 오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고 섬기려고 오셨다. 가장 최고의 섬김은 자기 목숨을 대신 내놓는 것이다. 그것이 만사(만나며 사랑하며 과정의 약자)의 정신이다. 그것을 모르면 단지 제자훈련의 교재라고 생각할수 있다. 제자훈련을 하는데 왜 안변하는가. 이 사상을 이해를 못하기에 그렇다. 만사를 하려면 머슴될 각오를 해야 한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에베소서 4장 11-16절)
섬김의 머슴이 있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교회 직분을 세운 이유는 교회의 주인이 되어 교회를 군림하라는 것이 아니다. 목사와 교사가 하는 일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라는 것이다. 성도가 예수답게 되려면 목사와 교사는 머슴이 되어야 한다. 성도를 머슴되게 하려면 목사는 상머슴 마당쇠가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 문제는 목사를 신접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기도를 받아도 심방도 목사에게만 하려고 한다. 목사 한사람의 섬김만 받으려면 잘못된것이다. 목사와 교사는 성도를 예수의 머슴이 되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그래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한다. 봉사의 번역이 잘못됐다. 원래는 디아코니아, 영어로 미니스터이다. 나는 직업을 말할때 미니스터라고 쓴다. 목사라는 뜻이다.
봉사의 의미는 목사가 머슴이 되어 다른 머슴을 만들어 미니스터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뉴욕감리교회 미니스터는 심건식 목사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다 미니스터이라는 뜻이다. 이래야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는 것이다. 목사만 거룩하고 기도많이 하고 심방가야 하고 사역해야 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잘못가르친 목사들의 책임이다. 목사는 왕이 아니라 머슴이다. 자기같은 머슴을 계속해서 생산하여 머슴이 교회를 세우는 일이 하도록 하는 사람이다.
현실은 많은 교회들이 속임수에 빠져서 교회가 종교단체로 전락했다. 목사에게 무당이 신접하는 것을 요구한다. 무당불러 굿하는 식으로 목사를 모셔다 기도받는다. 왜 여러분이 신령하면 안되는가. 하루아침에 머슴이 안된다. 세상이 한번에 놓아주지 않는다. 한사람 한사람이 머슴으로 섬김을 감당하지 못하면 교회가 문제가 생긴다. 완전한 교회는 없지만 이런 머슴정신으로 무장된 교회는 건강한교회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설교하는 강사 송영선 목사. 송 목사는 강의식으로 하기위해 USB에 프리젠테이션 파일을 가져왔는데 뉴감의 기기에 호환되지 않아 설교형식으로 말씀을 전했다. 설교가 끝나고 심건식 목사는 오히려 더 큰 은혜를 받았다고 말했다.
매릴랜드의 빌립보교회 송영선 목사(55세)는 자신의 목회철학을 머슴론으로 나타내고 ‘머슴교회’(두란노)란 책도 내기도 했다. 머슴교회와 열가지 가치 “머슴교회”론이 무엇인가.
1.‘오직예수’ ; 예수님 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지만 그것이 복음의 중심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믿고 바로 사는 신앙으로 돌아가는 운동입니다.
2.‘머슴의 도’ - 복음은 예수의 삶입니다. ‘머슴의 도’는 그 분이 이 땅에서 사신 삶의 길 입니다. 그분의 삶은 무슨 삶이며 어떻게 사셨습니까? 하나님의 머슴으로, 사람의 머슴이 되어 사셨습니다(빌 2:5-8). 이 삶을 실천하는 운동입니다. 빌립보교회를 비롯한 한국교회와 디아스포라 교회가 교회의 이런 본질적인 모습을 다시 회복하여야 합니다.
3.‘한 영혼의 귀중성’ - 오늘날 세상의 풍습은 사람을 무리로 대하고,’“부귀영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귀중하게 여김을 받습니다. 그것이 없는 ‘한 영혼’은 멸시하는 문화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물가의 버림 받은 한 여자’(요4)가 누구보다도 중요했습니다. 이 영성을 회복하는 운동입니다.
4. '목양우선’ - 교회의 본업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영혼을 구원하고 저들로 예수를 닮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목양이라고 합니다. 이 교회의 본질에 최우선의 가치를 두고 성도가 목양을 담당하게 하는 운동입니다.
5.‘과정 중시’ - 과정을 무시한 삶은 십자가의 삶이 아닙니다. 무엇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 뒤의 희생과 섬김 그리고 인내와 성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를 낳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아이를 올바로 양육하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 교회가 이 원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6.‘평신도 사역’ - 교회의 목양사역은 우선은 평신도가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코치입니다(엡 4:11-12). 한영혼을 귀중히 여기려면 목사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서로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7.‘본질과 비본질의 경중 배려’; 교회의 본질은 생명입니다.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조직이 생명을 죽이는 경우가 허다 합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교회운영을 배려하는 운동입니다.
8.‘두 날개의 교회’ ; 초대 교회는 전체 회중이 모여 드리는 예배와 집에서 모이는 가정 교회의 두 날개로 비상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모델입니다. 이 모습을 회복하는 운동입니다.
9.‘안팎이 똑같게’ - 신행일치의 삶을 말합니다. 믿음과 행동이 함께하는 신앙생활을 살기 위함입니다. 완전한 삶보다는 정직한 삶, 인테그리티가 있는 삶을 말합니다.
10.‘그럴 수도 있지’ ; 용서의 삶을 말합니다. 은혜는 용서입니다. 우리의 죄를 예수께서 자기 핏값으로 용서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첫째도 용서 둘째도 용서 셋째도 용서입니다.
▲심건식 목사/송영선 목사/권강현 장로
심건식 목사는 2010년 열린 빌립보교회 목회철학과 노하우를 나누는 머슴세미나에 참가함으로 송영선 목사와 관계를 맺었다. 송영선 목사는 "뉴욕감리교회에서 7명이나 머슴세미나에 참가했다. 심건식 목사는 존경할만한 분인데 와서 배우겠다고 하여 잔잔한 마음의 감동이 있었다. 가능한 외부집회에 안나가는데, 심 목사님 요청을 거절을 못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다음은 송영선 목사의 머슴론의 정신을 담은 강의 내용이다.
17살때 잘알지 못하면서 무신론을 주장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지금까지 예수님때문에 복된 자로 살았다. 저의 삶을 바꾸어 놓은 성경말씀이 있다. 빌립보서 2장 5-11절 말씀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장 5-11절)
이 말씀가운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 했다. 자기를 비우고 낮추셨다. 종의 모습이 되기까지 낮추셨다. 종이라는 뜻은 머슴이라는 뜻이다. 종보다 더 적절한 번역이 머슴이라고 본다. 머슴은 자기권리나 자기주장이 없이 주인이 시키는대로 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머슴이 되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 말씀이 내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제가 예수님을 믿게 된 동기는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기에 그렇다.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고, 나를 높이실분이고, 나를 구하게 하신 분이고, 나를 강하게 해주실 분이기에 믿게 됐다. 그것이 나에게 중요한 예수를 믿는 동기이다. 예수님이 전지전능하기에 그러한 것도 주신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깨닫고 난 다음 생각이 바뀌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 터닝포인트가 된 메세지가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것을 믿으면 우리도 다 예수님 처럼 놀랍게 된다. 예수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구원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여러분과 저를 섬기시는 머슴이시다. 말씀을 다시 한번 자세히 보라.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는데 사람중에서도 가장 인간사에서 멸시한 모습이 되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깨닫기 전까지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인상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며, 어마어마하신 분이다. 반면 우리는 티끌보다도 못한 작은 존재이다.
그런데 말씀에 의하면 우리의 모습이 되셨다.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하신 분이다.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는 나의 죄를 사하려 주시기 위해서이다. 나를 위해 머슴이 된것이다. 예수님을 전지전능하고 어머어마한 분이라서 처음에는 따랐지만 나중에는 달라졌다. 이 말씀을 보면서 신앙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이 세상에서 살동안 예수님의 참된 모습은 머슴이다.
그래서 이 사상의 깨달음과 정신이 내 마음에 들어오면서 다른 성경구절에서 같이 말하는지를 찾고자 했다. 중간에 갑자기 튀어나온 말씀이 아니어야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창세기에서도 흐름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머슴이 되셨다는 이 사상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고 생각도 못했다. 이 말씀에 만족못하고 창세기로 갔다.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종이 되신 흔적이 창세기에 있어야 한다.
성경은 신약과 구약으로 나뉜다. 그런데 성경을 잘이해하려면 인간이 타락하기 전과 타락한 후로 나누면 된다. 창세기 1-2장이 1편이고, 이후 요한계시록까지 2편으로 본다. 인류역사의 가장 큰 사건은 인간의 타락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해 회복시키셨다. 재림하면서 새하늘과 새땅이 올때 창조의 목적에 따라 우리가 회복이 된다. 우리안의 여러가지 문제의 답을 찾으려면 그렇게 보면 도움이 많이 된다.
빌립보서 2장에는 하나님을 머슴이라고 했기에 창세기를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 나타난것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기 시작했다. 내가 믿어왔던 하나님 기독교 교회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 사상을 발견했다. 하나님은 종이시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았느냐. 처음인 분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장 26-27절)
하나님이 창조하셨을때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졌다. 하나님과 우리는 같은 관계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안에 있다. 나에게 아들이 있는데 나와 닮았다. 아들이기에 열등한 녀석이라고 생각한적이 없다. 아들은 내 분신으로 나와 같다. 내 소유가 아니다. 내 형상이 아들이다.
이 말씀을 볼때 그것을 깨닫았다. 하나님이 나를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것은 당신과 동등한 관계를 만드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지극하게 높으신 분이다.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위대함을 저와 비교하면 저는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고 살아왔다. 그래서 하나님은 높임과 존귀와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머슴이라고 했다고 이것을 부인하면 큰일난다.
창세기를 보고 그렇게 광대하신 하나님이 나하고 같은 하나님임을 알았다. 전능하시고 비교할수 없는 위대함이 아니라 그 분의 인격과 그 분의 마음을 이야기 하는것이다. 이 이미지를 '섬김의 이미지'라고 말한다. 섬김은 사랑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섬김을 받기를 원치 않는다. 섬김을 받기 원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섬김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시려고 만드신 것이다. 우리를 창조하고 섬기려고 형상을 같게 만드셨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도 타락하기 전에는 섬김이 자연스러웠다. 창세기 3장은 타락의 장이다. 원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 사랑의 실제적인 모습은 섬김이다. 오랜 묵상가운데 나온 이야기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장 18절)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셨다. '다스리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다스리라는 말은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주권이다. 주권을 가진자만 다스릴수 있다. 사람을 만들어 놓고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사람에게 다스리라고 위임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신뢰하시고 인정하시는 것이다. 자기와 동등하게 취급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높은 곳에 앉으셔서 우리를 다스리고 우리는 숨도 못쉬게하려고 우리를 만드신 것이 아니다. 당신처럼 우리도 사랑을 가지고 다스리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다시 놀랐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세기 1장 31절)
놀라운 말씀이다. 6일만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전에도 좋았다고 하셨는데 6일째 되는 날 사람을 만드시고 '심히 좋았다'라고 하셨다. 히브리말로 좋았다를 반복한다. 좋았다는 단어를 두번 사용하면 사랑한다는 말이다. 좋아서 죽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보기만 해도 좋은 것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찬양)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어쩔줄을 몰라하신다. 이것이 사랑이다. 사람들은 남녀가 연애할때 이 맛을 약간 본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느끼는 마음과 비할바가 못된다. 하나님이 여러분 한명 한명을 사랑하여 주고 싶어서 어쩔줄을 모르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장 18절)
빌립보서 5장의 깨달음을 가지고 묵상했다. 이전에는 그냥 지나간 부분이다. 빌립보서 5장을 가지고 이해하고 보니 깨닫지 못하는 것이 튀어나왔다.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아 하나님은 아담을 위하여 배필을 지으리라 하셨다. '위하여'의 히브리어 뜻은 내가 그의 종이 되겠다는 뜻이다.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종은 아담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을 위해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팔을 걷어부치시고 섬기려 하셨다. 말씀만 하면 천지가 창조하시는 분인데도 이때는 그렇지 않았다. 이브를 만들기위해 아담의 갈빗대를 뽑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손에 피를 뭍히셨다는 것이다. 그 일을 하신 것은 종의 모습이다. 섬김의 모습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세기 2장 19절)
저는 이 말씀이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나님이 지루하셨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담에게 동물을 이끌어 가시면서 이름을 지으라 하셨다. 이 말씀이 왜 들어가 있는가. 그런데 빌립보서 5장을 통해서 보니 놀라운 비밀이 숨겨있다. 자고로 이름을 짓는 특권은 하나님에게 있다. 쉽게 말하면 자녀를 낳았다면 이름을 짓는 권한은 아버지에게 있다. 하나님이 창의력이 없어서 아담에게 이름을 대신 지으라 하신것이 아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동역자이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동역자이다.
하나님은 같은 모습을 가진 사람에게 다스리고 이름을 지으라고 하신다. 특권을 주는 것이 진짜 사랑이다. 딸이 처음 '대디'라고 했을때가 흥분되어 소리를 질렀다. 딸과 아무도 상관없는 사람은 즐겁지 않다. 기쁜 이유는 딸을 사랑하니까 그렇다. 아담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평가할수 밖에 없겠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정말 좋은 것이다. 그 하나님의 기뻐하는 모습이 종의 모습이다. 어마어마한 하나님이시지만 아담을 섬기는 종의 모습이시다. 가장 압권으로 너무나 놀라운 말씀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장 16-17절)
이 말씀은 내가 예수믿기전에 예수믿는자를 골탕먹이는데 사용한 말씀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줄 아셨는데도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시고 먹지말라 하시고 다 먹으니 죽게하시고 그것이 무슨 말이 안되는 소리인가. 아직도 사람들사이에 신학자들도 논란이 많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는가.
이 말씀을 해석하려면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보자. 그것은 이 부분을 푸는 비유의 말씀이다. 쉬운 비유이다.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아들은 아담이며 여러분과 저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탕자의 비유에서 선악과 나무는 탕자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다.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재산이 자식이 돌아갈텐데 아버지가 죽기도 전에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한다. 아버지에게 죽으라는 이야기이다. 엄청난 죄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자세가 더 이해가 안된다. 아무 소리안하고 둘째아들에게 재산을 준다. 아버지가 재산을 줄때 아들이 흥청망청 다 쓸줄 이미 알았다. 하나님도 선악과를 따먹을줄을 알았는데 주셨다.
그러면서도 왜 재산을 나누어 주셨을까. 나같으면 안준다. 탕자의 아버지는 이해가 안될 행동을 했다. 뻔히 방탕하고 탕진할줄 알았는데 왜 재산을 주었는가. 아버지는 아들이 다시 돌아올줄 알았다. 아버지에게 중요한것은 돈이 아니라 사랑이다. 아들이 집을 떠나 돈을 낭비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아무소리도 안하고 용서하고 아들로 삼아주었는데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이 아니면 받으실수 없다. 아담을 만든후 하나님의 딜레머는 나는 창조주이고 아담은 피조물이기에 아담이 보여주는 사랑에 만족을 못하신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주시고 자유의지를 주셨다. 탕자 아버지도 머슴의 노릇을 하고 있다. 아들이 시키는대로 재산을 주고 아들이 떠나니 동구밖에서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가다리고 있다. 그것이 머슴의 모습이다. 주인을 잘못만난 머슴의 모습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장 16-17절)
하나님의 말씀이 '먹지마라'라고 명령적으로 나온다. 명령은 자고로 높은 사람이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주인이 종에게 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시비를 건다. 나도 그런 의문이 있었다. 하나님은 다른데는 인격적으로 섬기는 모습인데 여기서는 명령하니 이해를 못했다. 그 의문을 신학교 다닐때 풀었다. 지도교수는 명령형이 아니라 선언문이라고 말해 놀랐다.
선언문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알리는 것이다. 페인트가 칠해져 있으면 붙여놓는 'Wet-Painting'이나 고장나면 붙여놓는 'Out of Order' 같은 사인이 선언문이다. 그렇게 선언을 했는데도 하는 것은 하는 사람의 책임이다. 인격적으로 대해 주는 것이다. 십계명도 선언문이다. 단지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그 선언을 지키면 복을 받고 안지키면 저주받는다. 그것은 다 내 책임이다. 그 것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모습을 볼수가 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장 5절)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를 시기하던 사탄이 인간에게 간교한 말을 한다. 창세기 1-2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담을 대우하는지 보았다. 절대 수하로 부리지 않으시고 정말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셨다. 사탄은 거짓말을 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하로 비인격적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이간질을 했다.
욕심이 잉태한 것이 죄이다. 그러나 죄의 뿌리는 비교해서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올려놓는것이다. 더 올라가려는 짓이다. 사단이 그 짓을 먼저하고 타락했다. 사단은 교만한 영이다. 교만중에서 가장 큰 교만은 하나님없이 완전해지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비교하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사단이 자기가 실패한것을 아담과 이브를 통해 회복하려고 하니 같은 전략을 사용할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권세를 주셨다. 그런데도 아닌것처럼 사단은 아담을 속인것이다. 그때부터 우리에게는 "높아지고 강해져야 한다", "머슴이 아니라 왕이 되어야 한다"라는 욕심으로 죄를 낳고 온 인류가 죄의 포로가 되어서 서로 싸운다.
그때 하나님은 가만히 안계시고 대책을 내놓으셨는데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빌립보서 5장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낮추시고 머슴이 되셨다. 원래 그것이 하나님의 모습이다. 그래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은 권위있는 사자로 오지 않으시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으로 오셨다. 주인을 위해 죽는 종의 모습이다.
강한자가 종이 되는것은 사람이 보기에는 어리석다. 경쟁하고 비교하여 강해지고 똑똑해져야 한다. 권력잡고 돈을 벌어야 한다.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한다. 그런 가치관으로 사니 사람들은 서로 경쟁의 대상이다. 상대가 안죽이면 내가 죽는다. 그러니 비참하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힘겨루기를 한다. 직장과 학교에서도 싸운다. 교회에서도 그런 짓을 한다. 그런데 현대교회에서 시작한것이 아니라 예수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다. 강한자로 오실수 있었다. 귀족의 집안이나 명문가에서 태어날수도 있었는데 가장 약한 목수의 아들로, 그것도 마굿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죽을때는 죄인중의 죄인으로 몰려 가장 힘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그것은 머슴의 모습이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태복음 20장 20-21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기위해 올라가신다. 가장 비참한 모습이다. 제자들의 눈치가 뻔하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인 세베대가 치마바람을 일으키고 두아들을 예수님의 좌우에 앉히려고 했다. 그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영이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도 그랬다. 현대교회에서 이런일이 많다. 목사와 장로가 힘겨루기를 한다. 머슴의 영은 없고 교만의 영만 가지고 교회를 섬기는 것이 큰일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은 마귀의 영이라고 하셨다.
결론은 예수님이 인자가 오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고 섬기려고 오셨다. 가장 최고의 섬김은 자기 목숨을 대신 내놓는 것이다. 그것이 만사(만나며 사랑하며 과정의 약자)의 정신이다. 그것을 모르면 단지 제자훈련의 교재라고 생각할수 있다. 제자훈련을 하는데 왜 안변하는가. 이 사상을 이해를 못하기에 그렇다. 만사를 하려면 머슴될 각오를 해야 한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에베소서 4장 11-16절)
섬김의 머슴이 있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교회 직분을 세운 이유는 교회의 주인이 되어 교회를 군림하라는 것이 아니다. 목사와 교사가 하는 일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라는 것이다. 성도가 예수답게 되려면 목사와 교사는 머슴이 되어야 한다. 성도를 머슴되게 하려면 목사는 상머슴 마당쇠가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 문제는 목사를 신접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기도를 받아도 심방도 목사에게만 하려고 한다. 목사 한사람의 섬김만 받으려면 잘못된것이다. 목사와 교사는 성도를 예수의 머슴이 되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그래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한다. 봉사의 번역이 잘못됐다. 원래는 디아코니아, 영어로 미니스터이다. 나는 직업을 말할때 미니스터라고 쓴다. 목사라는 뜻이다.
봉사의 의미는 목사가 머슴이 되어 다른 머슴을 만들어 미니스터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뉴욕감리교회 미니스터는 심건식 목사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다 미니스터이라는 뜻이다. 이래야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는 것이다. 목사만 거룩하고 기도많이 하고 심방가야 하고 사역해야 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잘못가르친 목사들의 책임이다. 목사는 왕이 아니라 머슴이다. 자기같은 머슴을 계속해서 생산하여 머슴이 교회를 세우는 일이 하도록 하는 사람이다.
현실은 많은 교회들이 속임수에 빠져서 교회가 종교단체로 전락했다. 목사에게 무당이 신접하는 것을 요구한다. 무당불러 굿하는 식으로 목사를 모셔다 기도받는다. 왜 여러분이 신령하면 안되는가. 하루아침에 머슴이 안된다. 세상이 한번에 놓아주지 않는다. 한사람 한사람이 머슴으로 섬김을 감당하지 못하면 교회가 문제가 생긴다. 완전한 교회는 없지만 이런 머슴정신으로 무장된 교회는 건강한교회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설교하는 강사 송영선 목사. 송 목사는 강의식으로 하기위해 USB에 프리젠테이션 파일을 가져왔는데 뉴감의 기기에 호환되지 않아 설교형식으로 말씀을 전했다. 설교가 끝나고 심건식 목사는 오히려 더 큰 은혜를 받았다고 말했다.
매릴랜드의 빌립보교회 송영선 목사(55세)는 자신의 목회철학을 머슴론으로 나타내고 ‘머슴교회’(두란노)란 책도 내기도 했다. 머슴교회와 열가지 가치 “머슴교회”론이 무엇인가.
1.‘오직예수’ ; 예수님 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지만 그것이 복음의 중심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믿고 바로 사는 신앙으로 돌아가는 운동입니다.
2.‘머슴의 도’ - 복음은 예수의 삶입니다. ‘머슴의 도’는 그 분이 이 땅에서 사신 삶의 길 입니다. 그분의 삶은 무슨 삶이며 어떻게 사셨습니까? 하나님의 머슴으로, 사람의 머슴이 되어 사셨습니다(빌 2:5-8). 이 삶을 실천하는 운동입니다. 빌립보교회를 비롯한 한국교회와 디아스포라 교회가 교회의 이런 본질적인 모습을 다시 회복하여야 합니다.
3.‘한 영혼의 귀중성’ - 오늘날 세상의 풍습은 사람을 무리로 대하고,’“부귀영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귀중하게 여김을 받습니다. 그것이 없는 ‘한 영혼’은 멸시하는 문화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물가의 버림 받은 한 여자’(요4)가 누구보다도 중요했습니다. 이 영성을 회복하는 운동입니다.
4. '목양우선’ - 교회의 본업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영혼을 구원하고 저들로 예수를 닮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목양이라고 합니다. 이 교회의 본질에 최우선의 가치를 두고 성도가 목양을 담당하게 하는 운동입니다.
5.‘과정 중시’ - 과정을 무시한 삶은 십자가의 삶이 아닙니다. 무엇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 뒤의 희생과 섬김 그리고 인내와 성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를 낳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아이를 올바로 양육하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 교회가 이 원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6.‘평신도 사역’ - 교회의 목양사역은 우선은 평신도가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코치입니다(엡 4:11-12). 한영혼을 귀중히 여기려면 목사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서로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7.‘본질과 비본질의 경중 배려’; 교회의 본질은 생명입니다.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조직이 생명을 죽이는 경우가 허다 합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교회운영을 배려하는 운동입니다.
8.‘두 날개의 교회’ ; 초대 교회는 전체 회중이 모여 드리는 예배와 집에서 모이는 가정 교회의 두 날개로 비상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모델입니다. 이 모습을 회복하는 운동입니다.
9.‘안팎이 똑같게’ - 신행일치의 삶을 말합니다. 믿음과 행동이 함께하는 신앙생활을 살기 위함입니다. 완전한 삶보다는 정직한 삶, 인테그리티가 있는 삶을 말합니다.
10.‘그럴 수도 있지’ ; 용서의 삶을 말합니다. 은혜는 용서입니다. 우리의 죄를 예수께서 자기 핏값으로 용서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첫째도 용서 둘째도 용서 셋째도 용서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