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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윤 사모 "이스라엘을 알아야 성경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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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2-10-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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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 한국총회(총회장 이광희 목사)는 9월 11일부터 21일까지 98명이 참가한 가운데 영성수련회를 동유럽에서 열었다. 다음은 프라미스교회 김남수 목사의 부인인 김도윤 전도사가 "이스라엘 역사와 땅"이라는 제목으로 한 강의내용이다.(편집자)

1. 이스라엘의 명칭

1) Israel, Israelite(형용사), Israeli(현대 형용사)=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후, 받은 이름으로 Babylon포로 이전 북 왕조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로 쓰인때가 있었으나, Israel전체를 묶어주는 의미의 명칭이다. Israel 12지파 전체를 묶어주는 신앙적인 공동체를 강조하는 명칭이라고 할수 있다

2) Jew, Jewish(형용사): 유대인=원래는 야곱의 네째 아들인 유다의 이름이나, 남 왕조 유다 왕국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유대인이라는 명칭은 Babylon 포로 귀환 이후 쓰기 시작한 말로 사마리아 사람과 유다 사람으로 갈라짐으로, 정통 유대인라는 분리적 개념이 Jew 란 명칭속에 들어있다.

3) Hebrew: 건너온 사람들, 강을 건너온 사람들=초기 Israel 민족의 조상을 가르키는 명칭으로 가장 오래된 Israel 사람에 대한 명칭이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빌립보 3:5)이라고 한 말은 자기의 근원을 가장 먼 초기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과 연결시킨 것이다.

2. 누가 유대인인가?

첫째, 혈통적인 유대인으로 양쪽 부모가 다 유대인이면 유대인이다. 둘째 만일 부모중 한쪽 뿐이라면 모성 위주의 혈통을 중시한다. 아버지가 유대인이고 어머니가 유대인이 아니면 그는 유대인이 아니다. 아버지가 유대인이 아니어도 어머니가 유대인아면 그는 유대인이다. 모성 위주의 혈통 중시는 디아스포라 2,000년 동안 생긴 관습이다. 어머니가 젖줄을 물리면서 유대인을 만든다는 뜻이다. 사람의 성품과 신앙의 성장은 4세 부터 5세까지 결정된다. 혈통이 흐려지면 교육을 통해서 유대인을 만든다는 개념인 것이다. 교육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유대인이 진정한 유대인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성 위주의 혈통을 중시하는 개념은 현재 유대인들간의 격론중이다.

3. 홀로코스트(Holocaust), 유대인 박해의 역사

이스라엘은 지역적인 크기에서는 규모가 아주 작은 나라로 남, 북한 면적의 약 1/10 정도이다 인구도 적은 소수 민족이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사상들이 이스라엘을 근거지로 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성서의 원천이 되는 곳으로 세계의 3대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작지만 큰 나라” 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계 역사는 유대인을 제외시키고는 역사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지정학적으로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등 3개 대륙이 교차하는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 땅은 세계 강대국의 융성과 몰락에 따라 지배자가 바뀌었다.

이스라엘은 앗수루-바벨론-메데, 파사-헬라-로마-비잔틴 제국-아랍-셀죽투르크–라틴 제국의 십자군–마메루크-오토만 터키-영국의 지베를 받았던 역사를 지니고 있다(마메루크는 전쟁에서 싸우기 위해 아랍인들이 소집한 노예들임. AD 1291년 예루살렘의 십자군을 전멸시킴) 예루살렘은 20번 포위당하고 10번 무너졌던 도시로 두번은 예루살렘 성전 바닥까지 파괴되었던 피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솔로몬이 건축한 제 1성전과 바벨론 포로에서 70년만에 돌아와 스룹바벨이 재건한 제2성전이 파괴된 날이 아이러니하게 8월9일 같은 달, 같은 일이었는데 이날은 “피샤 베아브” 라고 종교적인 날로 지금도 금식하며 지키고 있다.

그들은 전 세계로 이산되어 가는 곳마다 박해와 살육과 추방되었으나, 멸망되지 않는 민족으로 생명력을 보존하여 살아남아 그들을 지배하고 괴롭혔던 강력한 제국들의 멸망을 지켜보았고, 한때 위대한 문명의 힘과 영광을 자랑하던 민족들이 완전히 지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그들은 목격했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지구상에는 현재 70억이 약간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 중 약 1,500만명이 유대인이다. 1948년 독립을 전후하여 약 100여개국에서 유대인들이 2천년만에 고토에 돌아와서 현재(2012년 통계), 이스라엘에 740만명이 살고 있고(유대인 620만명, 이스라엘 시민권 가진 비 유대계 아랍인 120만명: West Bank와 Gaza지역의 아랍인 400만명). 그리고 해외에 유대인 약 750만명이 흩어져 살고 있다.

현대에도 유대인들은 지구의 두뇌의 주도적 역활을 감당하는 지적 엘리트로 노벨상 수상을 차지하는 유대인의 비율은 34%에 이르고, 경제학 부분에서는 65%, 약 3분의 2 가까이 유대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2천년 이산 역사를 통해 몸에 밴 처세술, 상술, 생활 능력과 국제적 감각으로 서구 세계의 물질 문명을 발전시키는 기본 토대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대인이 세계 역사에 공헌한것은 영적이며 구속사적인 차원에서의 그들의 역활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곧 구원의 메세지를 세상에 전달해 준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유대인으로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의 일생을 사셨고 우리 죄를 위한 구원의 십자가가 서신 곳도 예루살렘 성문밖 골고다 언덕이었다.

유대인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3:1-2)”라고 했다. 그들은 신구약 성경을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기록하였고 그 말씀을 보존하여 세계 만민에게 전달하였는데 이것이 인류를 위해 유대인이 세계에 공헌한 최대의 봉사이며 그들의 위대한 역할이다. 또한 육신으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는 통로로(롬9:5) 쓰임받았고 하나님을 온 세상에 나타내는 증인으로서의 민족적인 쓰임을 받았다.

1948년 5월 14일 신생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인 벤 구리온은 독립 선언서를 텔아비브에서 낭독할때에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서 영원한 말씀을 받아 온 세계에 전달하였다”는 글귀가 들어있었다. 성경 자신이 하나니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하고 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하셨다. 신구약 성경에는 이스라엘 혹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단어가 약 2,300번 기록되었고, 신약에서만 77회 나타난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전 인류를 향해 일관성있게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최초의 유대인이었던 아브라함에서 시작되어 이삭, 야곱-야곱의 12아들들과 그 가족 70인이 애굽으로 이주-4대만에 출애굽-시내산에서 율법(토라) 수여로 하나님과의 언약이 이루어진다-가나안 정복-사사시대-이스라엘 역사의 황금기였던 다윗, 솔로몬의 통일 왕국새대-솔로몬 사후 남북 분열시대-먼저 북 왕국 이스라엘이 BC 722 년 앗수루에 멸망-그 후 남 왕국 유다도 BC 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의 침공으로 멸망, 솔로몬이 지은 제 1성전 파괴-바벨론 70년 포로 시대-바사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예루살렘 귀환 제 2 성전(스릅바벨 성전) 재건–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점령, 지배당함-헬라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의 유대 종교 탄압으로 마카비 혁명(하스모니안 왕조 시대)-BC 63년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 점령으로 로마의 속국이 됨. AD 70 년 유대 반란으로 제 2 성전 파괴-디아스포라로 고국을 떠나 온 세계에 흩어져 유대인 공동체 형성-기독교 세계로부터 홀로코스트 박해-1948년 5월 14일 현대 유대 국가가 독립한 그날부터 5차례의 중동전쟁을 치루고 오늘에 이르렀다.

유대 민족이 세계 여러 제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세계에 알려지고 구약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어(70인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 세계로 전해 질수 있게 되었다.

유대인의 중심권 이동

유대인이 디아스포라로 본격적으로 전 세계에 흩어지게 된것은 AD 70년로마에 대한 반란 결과로 제 2성전 파괴 이후이다. 남쪽 방향으로는 이집트를 중심하여 북 아프리카로 흩어졌다. 북서 방향으로는 대부분이 유럽과 러시아에 정착했다. 동북 방향으로는 중동의 여러나라, 심지어 실크로드에 따라 인도와 중국, 일본까지 이다.

처음에는 이집트-스페인-유럽/러시아-미국으로 유대인의 중심권이 이동됐다. 이동의 원인은 박해와 다른 민족과 동화되지 않는 민족 정신과 그들의 신앙 떄문이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이주와 정착과 박해와 추방의 2,000년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통하여 유대인의 중심지는 계속 이동하였다. 현재 디아스포라로 흩어진 유대인의 해외의 중심지는 “유대인의 제 2 의 가나안”이라고 불리워지는 미국이다.

유대인 이동 역사

미국으로의 유대인의 이민 역사는 1840년~1885년까지 약 45년에 걸쳐서 30여만명의 독일계 유대인이 미국으로 이민하였으므로 유대인 미국 이민의 역사는 5대~6대를 넘지 못하는 짧은 이민 역사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와 동유럽 지역의 ‘포그럼(Pogrom: 1881~1921 년 까지 조직적인 유대인 습격과 박해)을 피해 19세기말부터 1917년까지 러시아와 동유럽 출신 약 260만명의 유대인들이 미국의 당시 이민 관문인 뉴욕의 ‘엘리스 아일랜드’를 통해 들어왔다. 그들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더러워서 이민 관리들이 놀랐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는데 그들은 주로 뉴욕 맨하튼의 로우 이스트 사이드에 정착했다. 가난했지만 높은 교육열로 자녀들을 의사, 변호사, 교수, 경제 금융인등 전문직에 취업시켜 곧 자립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미국 이민은 유럽에서 독일 나치의 박해를 피해 1935~1945년까지 약 10년간 유럽 각 지역의 유대계 최고 지식인들과 두뇌들(아인슈타인 등)이 약 10만명이 유럽의 발달된 학문과 과학 기술, 예술등 모든것을 미국에 이식시켜 오늘날 미국 발전에 큰 역활과 밑거름이 되었다.

AD 313 년,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서 공인된 이래, 기독교화한 서구 국가들과 교회로부터 유대인들은 2등 국민으로 취급받으면서 많은 핍박을 받았다.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황제가 수도를 동방의 콘스탄틴노플로 옮기고, 그후 로마 제국이 동서로 갈라지면서 AD 476년 서로마가 멸망함으로 그 공백을 카톨릭 교황권이 기독교한 서구 유럽 사회를 지배함으로 점점 세력을 얻게되었다.

4세기 이후, 교회 지도자들은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이 받았던 영적 이스라엘로서의 지위를 교회가 물려 받았다고 하며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저주스러운 민족이라고 주장하며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교황 우르반 2세에 의하여 시작된 8차에 걸친 십자군 전쟁의 원정 (AD 1096~ AD 1291년까지 200년 동안)이 시작되면서 십자군들은 유럽에 거주하며 유대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유대인 거주 지역을 통과하면서 유대인들을 색출하여 남자들은 죽이고 여자들은 겁탈을 당하고 재산을 탈취하며 살아남은 사람들을 노예로 팔아넘겼다.

AD 1146년 제 2차 십자군 원정때에는 유대인들은 엄청난조공을 바치면서 유럽의 봉건 제후들의 성으로 피신하여 생명을 유지하여야 했다. 중앙 아시아에서 AD 1334년에 처음 시작된 흑사병이 중세 유럽 각국으로 퍼지게 되면서 AD 1348~ 1350년 사이에 유럽에서 흑사병(페스트)으로 죽은 사람들이 대략 2,500만명에서 3,500만명에 도달했다. 이것은 당시 전체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반 유대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흑사병의 원인은 유대인들에게 돌려졌고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덮친 유대인 학살을 피해 이때에 많은 유대인들이 러시아로 도주를 했다. 13세기에 들어서서 유대인들은 의무적으로 노란별을 가슴에 달아야 했고, 공직에 오르는 것이 금지되고 땅을 소유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13세기 중세 유럽에서는 어느 도시에서나 종교 재판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단을 심판하는 재판소였는데, 주로 강제적으로 기독교에 개종한 유대인들이 비밀리에 유대교 신양을 지키는 자들을 대상으로 한것이었다. 가장 심한곳이 스페인이었다. 유대인들은 재산 몰수, 강제 세례, 테러등을 당했다.

스페인에서는 종교 재판을 통해 유대인 4만명이 재판을 받았고 그중 3만명이 광장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1492년,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그 해에 철저한 카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은 유대인들에게 개종을 강요하거나 아니면 스페인에서 강제 추방하였다. 당시 스페인에 거주하던 유대인 중에서 5만 여명이 카톨릭으로 개종하였고, 나머지는 유럽 여러나라로 흩어져 떠났다. 러시아와 주변의 동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포그럼(Pogrom)이라고 하여 조직적인 유대인 박해와 습격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절정을 이루었다.

AD 1179년에 열린 제 3차 ‘카톨릭 라테란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들을 악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구별하여 격리된 구역에 그들을 살게하여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유대인들에 대한 강제 격리 구역에 대한 대명사인 ‘게토(Getto)’라는 명칭은 1516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처음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Getto’는 유대인만 따로 거주하도록 만든 도시의 특정 거리,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14세기~15세기에는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강제 격리(Getto) 정책이 실시되었다.

유럽 전역에 걸친 ‘게토’는 게토 주위에 담이 쳐져 있었고, 보초가 철문을 지켰으며 밤이 되면 출입이나 통행이 금지되었다. 게토는 항상 지역이 협소하고 열악했고 복잡했다. 그러나, 게토에서는 공동체가 자치로 이루어져 랍비들로 구성원 지도부가 질서를 위한 재판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중세 유럽을 거쳐 오면서 유대인들은 조롱과 멸시와 학대를 받았고 게토는 유대인들을 억압하는 장치였으나 다른면에서 보면 게토는 그들의 신앙인 유대교를 보존하고 발전시켜준 안전 장치이기도 했다.

유대인들의 삶에서 토라와 미쉬나 그리고 탈무드는 유대교이 중요한 경전인데 그것을 연구하는 전통은 그들을 지식인으로, 학자로 만들어왔다. 보편화된 그들의 강제 교육때문에 유대인들은 문맹인이 없으며 그들의 지적 능력이 계속 발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동질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살아갈수 있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과 그 후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과 그 군대는 전 유럽에 걸쳐 평등과 시민권 사상을 퍼트렸다. 1870년대에 이르러 사실상 중부 유럽과 서유럽의 모든 유대인들은 게토에서 해방되어 근대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된다. 그 후로 게토가 유럽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들은 2천년의 그들의 이산 역사를 통해 몸에 밴 처세술과 국제적 감각, 상술과 생활 능력으로 서양 세계의 물질 문명을 발전시키는 기본 토대를 구축하였다.

독일 나치 히틀러 정권에 의한 홀로코스트

유대인의 홀로코스트를 대표하는 독일 나치 히틀러 정권에 의해 세워진 강제 수용소의 실태는 2차 대전이 끝나고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생존자들에 의해 증언되었다. 강제 포로 수용소의 노동 시간은 하루에 16시간씩, 쉬는 날도 없었다. 노동 시간에는 아무리 더운 날씨에도 물을 마실수 없었다. 들키면 25대의 채찍을 맞는데, 특별히 감시받는 유대인은 60대를 때려 기절하게 만든다.

식사는 새벽녘에 주는 약한 커피 한잔, 점심에는 썩은 야채로 만든 스프 한 리터 정도, 그리고 하루 250g의 빵이 전부였다. 캠프 주위에는 1,000볼트의 고압 전류가 흐르는 가시 철망을 둘러 놓았다. 1933년 히틀러의 독일 총통 취임부터 1945년 제 2차 세계 대전이 종전때까지 히틀러가 통치한 12년 4개월 동안 유럽의 아리안화라는 납득이 안되는 이유로 유대인 600 만이 학살 당한 홀로코스트는 크게 3 단계로 진행되었다.

1단계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세 관원의 아들인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1933년부터 세계 제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1939년까지였다. 이때에는 50만의 독일 거주 유대인들과 40만의 오스트리아 거주 유대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2단계는 히틀러가 유럽 대륙을 휩쓸었던(1939년~ 1941년) 시기에 독일의 다카우, 폴랜드의 아우슈비치, 트레불린카 등의 수없는 집단 수용소가 유럽 전역에 세워져 유대인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다. 동 유럽의 새로운 거주지를 주겠다는 거짓말로 유대인들을 강제로 기차에 태워온후 지식인, 의사들이 분류하여 건강한 사람은 강제노동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개스실로 직접 보내어져 학살하였다.

3단계는 1941년부터 “최후 해결책”이라는 명목으로 저질러진 대학살은 폴랜드에서만 한해의 300만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폴랜드에는 2차 대전 직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1941년~1945년까지 진행된 홀로코스터에서 네델란드 유대인 75%, 그리고 발트 3개국에 있는 유대인의 90%가 학살되었다.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교회와 세계 국가들은 방관 내지는 구경만 했으며 홀로코스트를 피해오는 유대 피난민들에게 문을 걸어 잠갔다. 역사학자로서 이스라엘의 외상을 지냈던 ‘아바 예만’은 그의 저서인 <유산: 문명과 유대인>에서 “홀로코스트와 이 일에 대한 기타 세계의 반응으로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덕 과목에서 역사상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고 썼다.

홀로코스트(Holocaust)! 인류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이 일을 통해 우리는 어떠한 역사적인 교훈을 얻어야하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해 달라는 탄원을 빌라도에게 하면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 27:24-25)라고 하였다. 마침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게 하였으므로 다른 민족들이 겪지 않은 고난을 그들이 당하여야 함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벌하기 위해서 나치가 아닌 누구를 사용해서라도 유대인들에게 죄를 물었을 것이다.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 하였음이라.”(스가랴 1: 15)

지난 1966년 카톨릭의 수장인 로마 교황이 바티칸 회의를 통해 유대인들에게 정식으로 사과한 일이 있다. 1994년 초 유대인 영화 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쉰들러 리스트’ 라는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 영화는 독일 법랑 그릇 공장을 운영하였던 체코 출신 독일인인 쉰들러는 인간적으로는 별로 선하지도 않았던 협잡꾼이며 사기꾼에 가까왔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홀로코스트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치의 눈을 피해 1,200여명의 유대인 생명을 구해낸 감동적인 내용을 다룬 영화이다.

신 예루살렘에 있는 ‘야드바셈’기념관(어린이를 제외한 600먄 유대인이 학살당한 홀로코스트 기념관) 옆의 정원 사이로 “의인들의 길”이라고 불리는 길이 나 있다. 2차 세계 대전중인 나치때에 생명을 걸고 사랑으로 유대인의 목숨을 숨겨주고 구해준 사람들을 찾아내어 기념 식수를 하고 그 나무 밑에 의인들의 이름과 국적이 적혀 있는 팻말이 있다. 그들중에는 특히 기독교인들이 제일 많다고 한다. 지금도 그 사람들을 찾으면 기념 식수를 한다고 한다. ‘의인들의 길’ 좌우에 기념 식수로 선택되어 심겨진 나무들이 쥐엄 나무이다. 그 열매의 모양은 딱딱하고 보잘것 없으나 열매 껍질 속에 들어 있는 알맹이는 보석과 같이 빛나는 모양이라고 한다.(쥐엄 나무 열매는 0.2 캐롯 다이아몬드의 무게이다)

‘야드바셈’이라는 말은 이사야 56장 5절에서 나온 말로 "기념물과 이름" 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반유대주의(Anti-Semitsm)의 여파로 죽어간 유대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마련한 곳으로 특히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유대인들을 기념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만들어졌다. 유대인들을 숨겨주고 그 생명을 구해준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보잘것이 없는 것 같지만 그들의 속에는 빛나는 보배를 지닌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그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유일하게 덴마크왕이 유대인을 보호하여 유럽에 거주했던 많은 유대인들은 덴마크를 통해 영국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유대인 박해의 이유

유대인 받해의 이유는 첫째 유대인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했으며, 둘째 게르만 민족(아리안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유대인을 열등민족으로 인종청소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 박해의 먼이유는 첫째 반유대주의로 제 1호는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이며, 카톨릭과 기독교의 반유대적 성격을 들수가 있다. 우리는 사랑의 교리 이외에는 그 어떤것도 앞세울수 없다. 다른 어떤것이라고 내세우거나 앞세우면 사랑이 설자리가 없어진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지혜와 교훈을 찾는 일이다.

역사를 가리키는 영어의 "History" 어원자체가 "지혜"를 의미하는 유럽어에서 나왔다고 한다. '야드바셈'을 돌아보고 나오는 마지막 출구에 '발셈토부' 라는 유대랍비의 글이 다음과 같은 글이 벽에 붙여져 있다. "잊어버리는 것은 우리가 또 다시 방황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는 것은 구원받는 비결이다.”

4. 현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1948년 5월 14일, AD 70년에 일어난 로마에 대한 반란으로 성전과 예루살렘은 철저히 파괴되고 전세계에 디아스포라로 흩어진지 약 2,000년만에 신생 이스라엘은 주권을 회복하고 독립하였다.

현대 이스라엘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현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독립이전의 시온주의, 곧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운동과 독립이후에 5차례에 걸친 아랍과의 전쟁과 갈등의 역사로 나뉠수있다. 팔레스틴 땅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중동의 화약고이며 이땅에 살고 있는 아랍인과 유대인의 갈등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UN은 회기중의 30%와 특히 의결안의 3분의 1을 예루살렘 문제에 할애하고 있다. 1948년 독립을 위해 60~70년동안 독립할수 있는 정치적 배경을 형성하였다.

국가를 건설할수 있었던 요인

이스라엘이 국가를 건설할수 있었던 요인은 시온주의 운동과 히브리어의 회복이라는 언어적인 측면이다. 공식적으로 시온주의 운동은 1880년대말이며 유럽을 중심으로 하여 해외에 흩어진 유대인사이에 일어난 새로운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정신적 지주는 시온주의의 창시자이며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인 데오도르헤르츨에 의해서이다. 그가 시오니즘(Zionism) 운동을 일으키게 된 계기의 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유대계 불란서 육군대위였던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군사기밀을 독일군에게 팔아넘겼다는 죄목으로 군사재판을 받았으나 실제로는 유대인을 군부에서 추방하려는 불란서 군부의 음모에 의해 누명을 쓴 것이었다. 이때 프랑스의 소설가 에밀졸라는 "나는 고발한다" 라는 글을 발표하여 진실을 폭로하였으나 프랑스의 여론은 "유대인은 배신자다. 그를 죽여라"고 들끓었다. 마침내 그는 무죄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급장을 박탈당하고 모욕을 공개적으로 당하고 추방되었다.

드레퓌스의 계급박탈과 추방을 지켜보던 한 젊은 저널리스트가 있었는데 그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출생하였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변호사와 신문기자로 활동하였던데 오도르헤르출은 그때까지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며 동족인 유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 추방자리에서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으로 들끓고 있는 군중들의 여론을 지켜보면서 "유대인에게는 나라가 있어야겠구나,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유대인은 지상에서 말살되고 말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데오도르헤르츨은 1896년에 "유대국가" 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여 시오니즘의 불을 당겼다. 1898년 스위스 바젤에 있는 음악당에서 '제 1차 세계시온주의회의'를 개최하여 앞으로 50년내에 시온에 유대국가가 탄생할것이라고 포부를 말했고, 그는 독립을 보지못하고 1904년 44세의 나이에 사망했으나 그의 비전은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졌다.

데오도르헤르츨의 이 비전은 세계각처에 흩어져 있는 유대민족에게 큰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오토만터키가 Israel 땅인 팔레스틴을 지배하고 있었으나 시온주의 운동가들은 돈을 모아 부패하고 타락한 터키관리들로부터 팔레스틴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유럽의 유대재벌 로스촤일드(Rothchild)는 독일 프랑크프르트에서 태어나 유대랍비로 교육을 받았지만 그는 대금업자로 성공하여 국제적인 금융재정가가 되었다. 그의 다섯아들은 모두 세계 첫번째 금융회사들을 세웠다. 팔레스틴 땅을 사들일때 이들은 많은 협조를 했다고 한다.

시온주의: 이스라엘 귀환운동의 배경

첫째, 반유대주의(Anti- Samitisum)이다. 러시아의 짜르알렉산더 2세가 1881년에 암살되었을때 유대인들이 암살배후로 의심받았고 피의 학살이 러시아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의 삶과 재산을 위협했다. 포그럼(Pogrom: 1881~1921년까지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조직적으로 유대인들을 습격하고 박해함). 결과적으로 상당히 많은 수의 러시아 유대인들이 유럽과 미국으로 이민했고 또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한후, 학살의 위협속에서 많은 유대 젊은이들이 팔레스틴으로 이주했다.

둘째, 유대인의 인구급증이다. 18세기에는 유럽의 유대인 인구가 200만에 불과했으나 19세기초에는약 850만으로 급증했다. 시온주의 운동에 참여할 인적자원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이스라엘로의 이민

1차이민은 1882 년부터 1900년까지 적은 숫자이며 러시아와 동유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2차이민자들은 이스라엘 독립운동의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1904년부터 1914년까지 10년동안 이민온 사람들은 이상주의자로 땅회복을 위해 계곡을 따라 농촌지역에 정착하였는데 이들이 이스라엘 건국을 주도한 사람들이다.

벤구리온(David Ben-Guri)은 폴란드 출신 이민자로 이스라엘 독립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이스라엘 시민권 제 1호이며 초대수상이다. 에스콜, 골다 메이어 등이 제 2차 이민자들이다. 그들은 함께 공동생활을 하면서 조직을 갖게 되었는데 이것이 ‘기브츠’가 되었고 후에 정부 조직과 군대 조직도 이 2차 이민자들에 의해 씨가 뿌려졌다. 이 기브츠가 이스라엘 독립운동의 본산지가 되었다.

2차 이민 이후부터 계속하여 3차, 4차, 5차로 계속 알리야(히브리어로 이민자를 뜻함)가 들어왔다. 1930년부터 1936년까지 가장 많은 이민자들이 팔레스틴 땅에 들어왔다.

AD 70년 이후,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에 의해 전 세계로 이산된 이후 팔레스타인 땅은 오랜세월동안 황폐된채로 방치되었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아랍인들이 이땅에 들어와 살게되었다. 아랍사람들은 처음에는 유대인 이민자들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으나 유대 이민자들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긴장과 적대감정이 확산되어 경계하기시작했다. 그래서 1930년대부터 아랍사람들이 유대인 이민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집단학살이 시작되어 유대이민자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초기 이민자들은 러시아와 유럽쪽에서 악조건의 환경과 환영하지 않는 아랍인들이 살고있는 위험한곳으로 왔다. 그들은 땅을 회복해야 한다는 이상주의 사상을 품고 주로 황폐하고 버려진 농촌지역에 정착하여 험한땅에서 농사를 하며 말라리아에 걸려죽은 희생자들이 많았다.

기브츠 운동의 배경

아랍인들의 대학살의 위협과 공격을 받으면서 혼자는 농사를 지을수 없는 상황이었다. 낮에는 일을 하면서 아랍인들의 공격에 경비를 해야하는 상황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또한 그들은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민족 정신과 단결력을 지닌 정신적 자세를 지녔다.

기브츠(집단 공동체)는 갈릴리 호수 남쪽 근방 드가니아(Degania)에서 1906년 시작하여 지금은 약 250 개의 공동체가 있다. 여기서는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으며 공동생활로 공동 관리, 분배 등을 한다.

모샤브(집단 협력체)는 기브츠가 생긴 10년 후, 1921년에 일어난 수정 공동체이다. 공동체는 기브츠와 별 차이가 없으나 사유 재산을 인정했다. 농산물 판매, 기계 도입등은 협동(농협 같은것)으로 이권 보호등 모샤브가 기브츠보다 인기가 더 있어 모샤브 공동체가 더 많다. 나할라(Nahala)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약 400개가 있다.

모샤브 쉬루피(공동과 협력의 혼합체)는 1936년에 시작됐다. 케파 힛팀(Kafar Hittin)에서 시작했으며 약 30개가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아무도 혼자서는 농사를 짓지않는다. 보통 300~500명 정도, 크게는 1,000 명 정도로 공동체를 이루어 같이 짓는다.

기브츠 운동의 성공 원인과 기부츠의 교훈

초기 이민 온 사람들 단 하나의 이상과 꿈을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잃어버린 고토 땅을 찾아 회복한다는 일념으로 그들은 무엇을 먹고 어떻게 잘 살아보겠다는 생각보다는 나라 회복을 위하여 자기 욕심을 버릴수 있는 정신적 무장이 된 사람들이다

신앙적인 차원에서 기부츠를 이해할때 하나님의 부름받은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모두 이상주의 자들이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으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부름 받았을때는 개인 구원이다. 신앙은 개인적이나 부름받은 그 후에는 공동체이다.

개인적으로 부름받았으나 후에는 반드시 교회라는 공동체로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가운데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도록 부르셨다. 교회 생활은함께 나누는 생활을 해야한다. 인사만 나누는 교제가 아니라 마음과 물질을 나누는 깊은 의미의 교제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1880연대에 일어난 시온주의 운동으로 1948년 독립하였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당시 이민자는 60만이었다. 세계 1차 대전으로 터키가 패전하여 팔레스틴 땅에서 떠난후 이 땅은 약 30년 동안 영국의 통치하에 있게 되었다.

아랍 사람들은 이 땅에 들어와 살아온 기득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했고 유럽에서 일어난 반유대주의(Anti-Semitism) 특히 독일의 나치의 학살과 죽음을 피하여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는 아닌자들과의 끊임없는 갈등과 싸움으로 영국은 마침내 팔레스타인 땅의 통치권을 포기하고 UN에 일임하게 되었다.

UN은 팔레스타인 땅안에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 두 나라의 창설을 인정하기로 하고 동 예루살렘은 국제 도시화 한다는 것이 당시 UN의 결정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모든 각국의 이스라엘 주재 대사관들이 텔아비브(Tel-Aviv)에 있는 이유이다. 아랍 사람들은 이스라엘과는 팔레스틴 땅을 나누어 가질수 없다고 주장하며 이 UN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스라엘 측에서만 받아들여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스라엘 독립 이후의 역사

독립 선언하는 날인 1948년 5월 14일 남쪽에서 포가 날라와 전쟁이 시작된 후 이스라엘은 독립 이후 5번의 전쟁의 역사를 갖게됐다.

1) 1948년 : 독립 전쟁(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락크, 레바논의 공격
2) 1956년 : 시나이 전쟁(스에즈 운하 전쟁)
3) 1967년 : 6일 전쟁(전면전으로 가장 큰 전쟁이었다)
4) 1973년 : 속죄일 전쟁(Yom Kippur War)
5) 1982년 : 레바논 전쟁

6일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이스라엘의 영토 면적은 20,700 제곱키로미터였는데 6일 전쟁 이후 점령지의 총 면적은 64,410 제곱키로미터를 차지하게 되어서 약 3배가 더 늘어나는 결과가 되었다. 6일 전쟁에서 점령한 지역은 팔레스틴 사람들과의 분쟁 지역이 되었고 현재 점령지의 아랍 인구는 약 400만명이 된다. 이 6일 전쟁으로 말미암아 PLO, 하마스 헤즈볼라 등 테러리스트 집단이 생기기도 했다.

6일 전쟁 점령지

요단강 서안 지역(West Bank)은 요르단으로부터 빼앗은 지역으로서 동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다, 사마리아 지역이며 여리고는 1994년 7월부터 자치 지구가 되었다. 골란고원(Golan Hights)지역은 시리아의 땅을 점령했으며 갈릴리 호수 동편의 고지대를 차지했다. 이 지역은 전략 안보상 군사적인 요지이므로 1982년 이스라엘 땅으로 합병했다.

가자 지구(gaza Stripes)는 남서의 지중해 해변이며 이집트로부터 점령했다. 시나이 반도(Sinai Peninsula)는 이집트로 부터 점령했으나 ‘Camp David Accords(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의해 1979년 이집트에 도로 반환했다. Camp David는 미국 대통령의 전용별장이며, 이스라엘의 베긴총리와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미국의 카터대통령의 중재로 메릴랜드주에 있는 대통령의 캠프 데이비드 휴양지에서 협상했기때문에 그러헥 이름이 붙여졌다.

이스라엘이 전쟁에 승리한 이유

첫째는 미국의 전쟁 물자 원조이며, 둘째는 이스라엘이 지니고 있는 기술과 지식의 축적으로 이스라엘은 독립후 모든 무기 자체를 생산하는 무기 수출국이다. 셋째는 민족 정신과 단결력으로 아랍과의 전쟁에 이겨나가는 원인은 민족 정신과 단결력이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100 여개국에서 모여온 유대인 이민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이며 1990년부터 구 소련에서 120-130 만의 러시안 유대인들이 대거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다. 각양의 언어, 배경, 풍습등으로 분열의 요인이 많으나 하나로 뭉쳐 나가는 것이 이스라엘의 정신이고, 또 역사적으로 주위 아랍 국가와의 대치가 있기 때문에 분열할수 없는 상황이다.

그들은 온 세계에 흩어져 박해를 받으면서 없어지지 않는 민족으로 살아왔다. 이 땅을 다시는 어느 누구 에게도 내어 줄 수 없다는 역사적 정신 무장을 한 민족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내부적인 갈등이 있다.

유럽과 미국 계통의 유대인 아쉬캐나짐(Ashkenazim)과 아랍, 스페인, 아시아, 아프리카계통 유대인인 스파라딤(Sephardim)이 있다. 리쿠드당과 노동당, 보수와 진보 사이의 첨예한 대립이 있다. 이스라엘은 모자이크와 같다고 한다. 그들의 의견이 갈라졌으나 하나로 뭉쳐 있는 이유는, 이땅을 다시는 내어 줄수 없다는 역사적 교훈 앞에 있기 때문이다.

현대 이스라엘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 이스라엘의 독립과 전쟁의 승리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의 촛점은 이스라엘 민족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역사를 끌고 나가신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이스라엘은 일반 역사의 공식에 넣으면 살아 남을 수 없는 민족으로 마치 역사의 쓰레기 같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 그 백성을 섭리하시고 이끌고 나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주고 있는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5. 히브리어 재생 운동

데오도르 헤르츨 한 사람의 꿈과 비전이 시온주의 운동을 일으켜 마침내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립하였다. 다른 또 한사람의 꿈과 비전이 이스라엘 민족의 흐름을 돌려 놓았다. 언젠가 독립이 이루어지면 조상들이 사용하던 히브리어 언어를 써야한다는 꿈을 가지고 히브리어 재생 운동을 일으킨 사람이 있다. 그는 제 1차 이민자로 러시아 출신인 ‘엘리에젤 벤 야후다’이다.

히브리어는 에수님 당시에도 일상 용어로서의 의미를 상실해가고 있었다. 히브리어는 기원전 3세기부터 아람어에게 밀려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쓰는 일상 언어는 아람어였다고 본다. 유대인들이 전 세계로 이산했을때 히브리 언어는 오직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에만 사용하고 일상 생활에서는 거의 죽은 언어였다.

유럽(독일, 러시아, 동유럽)에 살고있던 유대인들은 그들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새로운 언어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이디쉬(Yiddish, 히브리어에 독일어 단어와 러시아어, 폴란드어를 섞어 만든 것)이다. 이 이디쉬는 국경을 초월해 유대인들이 사용할수 있는 언어였다.

엘리에젤 벤 야후다는 일찍 팔레스틴 땅으로 이민해서 예루살렘에 정착한후, 그는 언젠가 독립이 이루어지면 이디쉬가 아니라 일상 용어로 히브리어를 사용하여야만 한다는 강한 사명감으로 히브리어 재생 운동을 벌였다. 자기 재산을 들여 히브리어로 신문을 만들고 개발했으며 히브리어의 가장 중요한 소스인 구약 성경과 유대교의 경전인 미쉬나와 탈무드에서 뽑아왔다. 문법 구조도 구약에서 취하고 부족한 현대 언어는 아람어에서 따오고 독일어와 영어에서 보충하였다. 구약 언어의 약점인 현대 언어들을 보충하였다.

그 당시 아무도 히브리어를 일상 언어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던 종교적 유대인들은 거룩한 언어인 성서 히브리어를 들었다는 이유로 3년에 한번쌕 회당 곁에 살고 있는 개들을 죽였다. 지나친 히브리어 경외 사상을 가진 분위기 속에서 그는 히브리어 재생 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10명의 자녀들을 낳아 그 자녀들의 외출을 금지시키고 집에서 부인과 함께 가족들이 히브리어만 사용하였다. 그에 대한 한 일화가 있다. 어느날 그의 아들이 사랑하는 개와 함께 무단으로 집 밖으로 외출하였다. 동네 아이들이 거룩한 히브리어를 알아듣는 개라고 하면서 돌을 던져 죽였다. 아이는 깊은 상처를 입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듯이 자기 가족을 희생하면서 그는 히브리어를 일상 용어로 사용하는 일 세대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노력은 처음에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으나 결국 이 운동은 유대인 사이에 번져 이 히브리어 재생 운동을 시작한지 30-40년 만에 공식적으로 정착되었다. 드디어 1930년대에 히브리어는 일상 용어로 정착하여 사용되었다. 지금도 예루살렘의 메아쉬아림에 사는 정통파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않고 이디쉬어를 사용한다.

이스라엘이 1948년 독립했을때, 이디쉬와 히브리어가 독립 이스라엘의 공식 용어 후보로 올라왔으나 히브리어가 선택되었다. 독립후 100여개국의 나라에서 각기 다른 언어 사용하던 사람들이 모여왔다. 이스라엘은 울판이라는 언어학교를 만들어 이민자들은 무조건 3개월 동안 집단 숙식하며 언어를 가르쳤다. 주로 여 교사들이 언어를 가르쳤다.

서투른 히브리어지만 일상 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이 울판에서 훈련 받으면서 서로 마음이 모아지는 모국어로 만들어 주게되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히브리어를 사랑한다. 스포츠 중계 아나운서도 영어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다 히브리어로 바꾸어 쓰고 있다. 2천년 이상 죽은 언어를 끌어내어 살아있는 언어로 만들겠다는 한 사람의 꿈이 이스라엘 민족의 흐름을 돌려 놓았다. 데오도르 헤르츨의 비전과 엘리에젤 벤 야후다의 꿈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졌다.

6. 에렛츠 이스라엘(Eretz: The Land of Israel)

땅을 표현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두가지가 있다. 첫째, 아다마(Adama)는 붉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좋은 땅은 산과 산 사이에 돌이 부서져서 계곡으로 좋은 흙이 흘러내려 쌓이는 흙을 가리켜서 “테라 롯사”라고 부르는 붉은 흙 그리고 비옥한 땅을 가리킨다. 아다마는 좋은 질의 땅, 곧 기름진 토양을 말한다. 이 좋은 흙은 곡식이 잘 자라고 사람이 거주할수 있는 땅 자체를 가리킨다.

둘째, 에레츠(Eretz)는 아다마처럼 좋은 땅이냐, 나쁜 땅이냐를 구별하는 땅이 아니라 에레츠 그 땅은 비옥한 땅 뿐만 아니라 산과 들, 그리고 거친 사막까지도 포함하는 땅이며 비단 땅 뿐만 아니라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낸 정신적인 유산과 영적 유산을 포함하고 있는 땅의 의미이다.

이스라엘은 전 국토 면적의 반이상이 거칠고 메마른 네게브(Dry Land, 남방) 광야이다. 브엘세바 이후부터 홍해 해변 도시 에일랏까지 삼각형의 광야이다. 이러한 거친 광야가 아다마의 질 좋은 땅이 아닐지라도 그 땅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앙과 관련이 있으면 그들은 에렛츠 이스라엘로 받아들이고 있다.

세계에 흩어져 2000년동안 그들은 마치 우리가 기도의 마지막을 ‘아멘’으로 마치는것 같이 ‘내년에는 예루살렘에 있게 해주십시요” 이렇게 기도해왔다. 20세기 초 팔레스틴 땅을 영국이 관활하고 있을떄 영국 정부에서 독립 국가를 염원하는 시온주의자들에게 아프리카 우간다 땅을 대신 주겠다고 제안해 왔을때 그것을 거절한 이유는 그 땅이 아무리 기름지고 아름다워도 그것은 에렛츠 이스라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만큼 끈질기게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과 후손들에게 주신 자기 땅을 사모하는 ‘시온’에 대한 깊은 소망과 사랑으로 자기 민족성을 지켜온 민족은 아무 누구도 없다. 오로지 이스라엘 민족뿐이다. 그들은 마치 땅에 미친 사람들 같다. 첫째는 이집트에서 가나안 땅으로, 둘째는 바벨론 포로 해방되어 시온땅으로, 셋째는 전 세계의 디아스포라들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것이 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땅이기에 그 땅이 비록 거친 들과 가시덤불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돈으로 바꿀수 없는 가치와 소중한 땅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에레츠는 신앙의 눈으로만 볼수 있는 땅이다.

이것을 우리의 삶과 신앙에 적용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인 가정, 목회지인 교회, 또 내게 주신 은사 이것이 우리의 에렛츠의 땅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환경은 물량적인 가치 기준에서 비교한다면 다른 사람의 것보다 훨씬 못한 조건의 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우리의 사랑과 애정과 기도와 섬김을 쏟는다면 더 할것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우리 각자에게 있다. 이것은 물질적인 기준으로 보면 보잘것 없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내게 주셨기 때문에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품고 안아서 피와 땀을 흘려 꽃을 피어야할 “에렛츠(Eretz)” 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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