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돈 목사 '성직자의 육신의 소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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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2-10-13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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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NCKPC. 총회장 임형태 목사)는 "성령과 목회"라는 주제로 5차 전국 목회자 컨퍼런스를 10월 8일부터 4일간 뉴저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에서 열었다. 2년마다 열리는 컨퍼런스는 그동안 셀목회, 설교, 예배, 교회성장을 주제로 열린바 있다.
주강사는 박영돈 목사. 박 목사는 현재 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로 있으면서 성령론에 대한 많은 저서를 냈다. 또 미국 칼빈신학대학원, 풀러신학대학원, 예일대학교, 웨스터민스터 신대원에서 성령론을 전공했으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영돈 목사는 개회예배 설교와 더불어 4번의 주제강의를 했는데 그 제목은 '성직자의 육신의 소욕',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 '성령과 기도'등이다. 다음은 '성직자의 육신의 소욕'이라는 첫번째 강의내용이다. 목회자 세미나이니 목회자를 대상으로 하는 통렬한 강의이다. 한국교회 목회자의 문제점과 방향성을 잘 설명해 냈다. 평신도라면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입하여 읽으면 은혜가 있을 것이다.
목회를 성공해서 유익을 누려야만 행복할수 있다면 우리는 육신의 소욕에 따라서 주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인정해주는 성공을 내가 성취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과 교인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체로 행복할수 있다면 그 사람은 성령을 받아서 주의 일을 하는 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 하늘의 영광과 위로가 함께 하실것이다.
육체의 소욕에 따라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영성에 치명적인 폐를 경험하게 될것이다. 우리들의 이기적인 야망은 우리의 영성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모든일이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에 있어서 순수하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갈망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사역의 필요에 의해서 강요된 갈망에 의해 은혜를 추구할때가 많다. 경건을 추구해도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하기보다는 경건의 유익과 명성을 더 원하기에 더 추구할수 있다. 경건하고 거룩해야 교인들에게 인정받고 성공적인 목회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충만을 원하지만 성령충만을 원하지 않는다?
성령충만을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 중에 성령충만을 원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간절히 구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는가. 성령으로 충만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을 아니다. 하나님께선 목마른자는 내게 나와 마시라고 하셨다. 나를 믿는자는 깊은 차원에서 생수가 성령의 은혜가 흐른다고 했다. 참으로 원하면 성령충만을 받을수 있다. 목마르면 마시면 된다. 성령충만은 간단하다.
그런데 왜 간절히 원하는데 성령충만하지 못할까. 성령충만을 간절히 원하는데 사실 우리는 성령충만 자체를 원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목마른 것은 성령충만 자체가 아니라 성령충만함으로 얻을수 있는 유익(능력, 은사, 목회성공)을 목말라 한다. 그래서 성령충만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 목사이면서 성령충만 받기 가장 힘든 사람도 목사이다.
성령충만에 대한 갈망이 많을수록 이 은혜를 받기가 어려워지게 된다. 성령충만을 원하면서도 내가 성령때문에 완전히 지배당하고 성령의 뜻에 온전히 굴복하는 삶을 살기는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성령충만함으로 기쁨과 평강으로 가득하고 목회의 능력이 나타나고 그래서 목회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욕망의 복잡한 미로속에서 방황하고 있기에 너무도 간단한 경건의 비결 성령충만의 길을 너무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 육적인 야망이 죽지않고 성령충만을 받으면 그 성령의 거룩한 능력을 욕망으로 자기의 세속적인 욕망을 성취하는 동력으로 남용하게 된다.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가 욕망거리로 변질될수는 없는 것이다.
자신을 기만하는 욕망
거룩한 것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마저도 속된 것이 될때가 많다. 육신의 야망과 이기심이 가장 절묘하게 발동하는 순간이 그 욕심이 무릎을 꿇을때이다.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을 이땅으로 끌어내려서 나의 욕망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게 되는 것이다. 기도속에서 우리의 욕망이 분해되고 소멸되어야 하는데 기도속에서 우리의 부패한 욕망이 더 뜨거워지게 된다.
기도라는 탱크로 천국을 밀고 들어가 천국의 축복을 점령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기도가 우리에게 성화의 방편이 되지 못한다. 그렇게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변화가 없고 새로워 지지가 않는다. 육체의 소욕에 따라서 사역을 하면 자신의 성화와 영적인 성숙을 위해 사용되어어야 할 모든 정신적인 힘과 영적인 에너지가 자신의 이기적인 야망을 성취하는데 다 소모되는 것이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많은 것을 성취하는 것 같지만 내면세계는 점점 황폐해지게 된다. 성공에 대한 야망은 끝이 없고 만족이 없다. 미국에서 같은 신학교를 졸업한 어떤 목사는 이민교회에서 사역하다가 소망대로 한국에서 몇만명이 모이는 유명한 교회 담임이 되었다. 그 정도면 만족될것인데 내가 보기에는 만족을 못한다.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추구하고 원하던 것을 성취해도 만족은 잠시이고 더 큰 공허감이 몰려올수가 있다. 영적인 공허감 가운데 우리가 살아갈때 죄에 대한 저항력이 약화되고 죄의 유혹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져서 자극적인 죄, 음란의 죄 같은 것에 빠질 위험성이 크지게 된다. 그래서 헛된 야심과 음란은 대개 비례한다. 심리학적으로 야망이 클수록 음욕이 커진다는 말이 있다. 종교적인 야망이 많은 사람은 부도덕한 음란의 죄에 빠질수 있는 확율이 높다.
목회의 은사는 있지만 열매가 없는 목사
목사가 육신의 소욕을 쫓게되면 그의 내면 세계는 그 안에 계신 성령과 날카로운 긴장과 대립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러면 성령으로 부터 풍성한 생명력의 공급이 차단되고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자아로서 성숙하는데 필요한 영적인 자원이 우리안에 고갈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성화가 진행되지 아니하고 성령의 열매가 우리안에서 산출되지 않는다. 목회의 은사는 있지만 열매가 없는 목사가 되는 것이다.
뛰어난 설교와 목회의 은사는 있지만 좋은 인격의 열매는 없는 목사가 될 수 있다. 설교와 영성은 꼭 비례하지 않는다. 특별한 말씀의 은사를 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참된 영성을 소유했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설교의 은사가 남다르게 뛰어날수록 그 은사의 위력과 탁월함때문에 아주 고차원적으로 자신이 깊은 영성의 사람, 은혜로운 사람으로 위장하기가 쉽다. 자기도 그렇게 착각하기가 쉽다.
사실 설교가 유창할수록 그 표현이 화려할수록 그 설교대로 사는 실천할수 있는 확률은 적은 경우가 많다. 설교를 탁월하게 하느라고 온 힘과 에너지를 다 소진해서 말씀대로 살 여력이 남아있지 않게된다. 물론 영성과 설교는 비례한다. 깊은 영성에서 우러나오는 메세지가 감동이 있고 은혜가 있는 것이다. 목사가 설교의 은사를 성령을 따라서 겸손하게 사랑의 원리와 동기를 가지고 활용하게 될때 목회의 열매를 맺는 훌륭한 목사가 될수가 있다.
그러나 설교에 뛰어난 은사를 자기의 야망의 성취를 위해 활용하면 은사가 그를 변화시키는 인격을 세우게 하는 성화론적 기능을 그 안에서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사역과 목회는 아주 성공적인데 성화에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목사를 보게된다.
자신을 속이는 목회의 모습
이런 목회자의 문제가 한국교회 전반적인 문제와 맞물려있다. 한국교회가 양적 팽창에 비해 성화가 심히 부진하여 성화적인 면이 저조한 편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들을 변화시키는데는 즉 성화시키는데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은사와 열매, 사역과 성화가 조화롭게 통합되지 않으면 목회자의 영적 성숙은 불가능해진다.
설교는 잘하지만 인격에는 문제가 있고, 강대상 위에서와 아래에서의 모습이 다른 이중적인 분열적인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목회자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모순된 모습을 감추기위해 노력하며 자기를 좀 더 솔직하며 괜찮은 목사처럼 꾸미기 위해 애를 쓴다. 교인들이 기대하는 목회자상으로 자기를 맞추어 가거나 자기가 가장 되고 싶어하는 모습을 따라가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다. 자신의 자신의 참된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고 사역하려고 하니 얼마나 힘들고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겠는가.
그렇게 애써서 자아낸 경건의 모습은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만 가능한 자율성 그리고 창의성이 결의되어 있기에 그 모습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경직되어 있고 가식적으로 보인다. 경건의 핵심은 자유함이다. 꾸밈없는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가 은혜스러워야 참된 경건이다. 목회자가 이런 가식에 익숙해져서 가면이 자기에게 완전히 굳어지게 되면 가면 쓴 자기와 참된 자기를 혼돈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참된 자아를 잃어버릴수 있는 위기에 직면한다. 열심과 헌신은 종교적인 가면을 더 보강하여 참된 자아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고, 이렇게 종교적인 외식과 가면으로 완고해진 종교적인 자아는 변화되고 깨지기가 가장 어렵다.
어떤 목사는 이 가식의 무거운 짐을 성령의 은혜로 해소하지 아니하고 인간의 솔직함으로 벗어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가식이 없이 솔직한 것 같지만 그것이 더 교묘한 고단수의 위선이 될 경우가 많다. 우리는 자신안에 깊은 마음의 동기와 욕망을 살피는 것을 소흘히 하고 꺼려하고 두려워한다. 자기마음속에 추한 욕망이 꿈틀거리며 용솟음 치는 것을 직시하는 자아성찰을 우리는 최대한 회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은 점검되지 않은 욕망에 의해 지배를 받고 은밀하게 주관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안에 심히 간교하고 그리고 추한 욕망이 무섭게 역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통절한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그 욕망의 희생물이 될 확률이 높다.
육신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아라
목회자에게는 항상 개인적인 야망과 주님에 의한 열망사이에 날카로운 긴장이 존재하며 욕심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치열하게 싸움을 계속한다. 그래서 목회자의 심령은 가장 격렬한 영적전쟁터라고 할 수 있다. 교회성쇠는 이 싸움의 결과에 달려있다. 목회자가 육신의 소욕에 굴복하여 순수성을 잃어버릴때 그의 세속적인 욕망은 교회안에 세속의 물결이 밀려들어오는 통로역할을 하게된다. 반대로 육신을 쳐서 복종시킬때 그의 영혼은 교회에 충만한 성령의 은혜가 밀려오게 하는 은혜의 채널이 된다.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우리들의 육신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이렇게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는 것 즉 죽이는 것은 욕망자체를 말살해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육체의 욕망이 많은 것도 문제이지만 욕망이 없거나 적은것도 신앙의 무서운 적이다. 육신적인 동기부여가 없으면 도무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자극되지 않는 영적인 냉담함과 나태 또한 거짓된 육신의 또다른 얼굴이라 할수있다.
자신에게 크게 성공할만한 목회의 잠재력과 설교의 은사가 별로 없고 그런 현실적인 가능성이 희박해보이면 성공의 야먕을 접고 그저 현상화에 안주하려는 무사안일주의에 빠지게 된다. 자기가 목회와 설교의 은사가 뛰어나면 그 은사를 백분발휘해서 성공해보려는 야망에 사로잡힐 학률이 많은 반면에 그런 은사가 그다지 없는 사람은 성공의 야망이 없는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사역을 열정과 성의없이 적당하게 감당하는 안일함에 빠지게 된다.
이와같이 육신의 욕망으로 주의일을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열망과 열정을 의무감으로 죽이고 종교적이며 직업적인 타성에 젖어서 안일하게 주의 일을 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거룩한 욕망을 추구하라
그러므로 목회자는 육적인 욕망을 비운 우리들의 마음에 새로운 영과 더 순고하고 격렬한 욕망으로 가득채워야 한다. 기독교는 절대 욕망을 부인하는 종교가 아니다. 참된 욕망으로 우리를 초청하여 그 욕망으로 충만케 하는 종교이다. 거룩한 욕망이 영성과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욕망이 영성의 질을 결정한다. 이런 욕망이 없이 성령을 따라서 살수없고 하나님을 바로 섬길수 없다. 성령은 강렬한 열정과 욕망의 영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하면 하나님에 대한 욕망과 열정으로 불타오르게 된다. 이 열망이 열렬한 기도를 만들어 낸다.
이런 열망이 없는 사람은 주를 위해 아무런 위대한 일도 할수없다. 교회의 역사속에서 신앙의 거장들은 모두 열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 욕망을 죽이는 것은 영적인 자살행위와 같고 영적이 거장이 될수있는 원동력을 버리는 것과 같다.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욕망은 세상에서 성공한 목사로 알려지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목사가 되기위한 그런 열망, 하나님에게만 영광이 돌아간다면 나는 잊혀질지라도 행복할수 있는 목사가 되는 열망일것이다.
욕망이 거듭날 필요가 있다. 욕망이 회개해야 한다. 지성만 회개하면 안되고 욕망이 회개해야 삶이 변화된다. 욕망이 우리의 삶을 운전해 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교인들의 변화가 없는 근본이유는 마음의 중심, 욕망이 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교인들의 욕망이 세상사람들의 욕망과 근본적으로 다른것이 별로 없다. 교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세상에서 편안함, 형통함, 성공, 잘되는 것이다.
그래도 세상사람들과 좀 다른것은 그런 강한 욕망 플러스 하나님에 대한 희미한 관심과 열망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세상사람들과 다르다는 긍지와 구별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니 우리들 욕망이 둘로 나뉘게 되면 자아된 욕망은 더 큰 욕망, 하나님에 대한 작은 욕망은 세상을 향한 더 큰 욕심을 이루는 역할을 한다. 기독교 신앙을 이용해서 이 세상의 번영을 이루려 하며 욕망을 성취하려고 한다. 그런것이 기복신앙, 번영신앙, 웰빙신앙이다. 이런 신앙이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다.
욕망의 회개와 욕망의 좌절
욕망이 회개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하는데 우리 목회자안에서 부터 일어나냐 한다. 욕망이 회개해야 하는데 가장 어렵다. 욕망은 회개를 모른다. 욕망에는 종말이 없다. 욕망은 끝이 없다는 말이 있다. 욕망의 특성은 갈때까지 가는 것이다. 욕망의 사로잡힌 삶은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가 고장난 버스와 같은 것이다. 야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무리 이런 설교와 강의를 들어도 자신의 길을 그대로 갈 것이다. 눈하나 깜짝 안할것이다.
우리안 성령님의 독특한 사역중의 하나는 육신의 욕망을 따라서 사는 우리의 삶에 제동을 걸어주신다. 우리 육신이 추구하는 것을 좌절되게 하시고 시들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를 오히려 처참하게 실패의 자리로 내려가게 하신다. 육신의 야망을 따라사는데 성공되고 잘되면 큰일이다. 그러면 우리는 영원히 망하게 된다. 하나님은 영원히 망할사람은 계속 성공하게 하신다. 어떤 사역에 계속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면 하나님이 이미 떠나셨을지라도 은혜를 받고 있는 것 처럼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하나님은 충격요법으로 많은 실패와 좌절과 아픔을 공유해서 육신의 욕망을 쫓는 우리의 삶에 제동을 걸어주신다.
성령께 우리가 완전히 굴복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신실하게 괴롭히실 것이다. 천국의 사냥꾼처럼 우리를 집요하고 끈질기게 쫓아와서 우리를 괴롭히실 것이다. 이것이 아무리 괴로울지라도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의 사인이요 손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교회에서 목회하지만 사실 하나님이 우리의 목회를 통해 우리를 먼저 목회하신다. 교회에 골치아픈 문제들, 가시와 같은 교인들, 죽고싶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사건들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목회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동원하신 것이다. 저는 목회를 열심히 하다가 너무 어려워서 자살이 죄만 아니라면 죽고싶다고 말하는 목회자들을 만나보았다. 저도 그런것을 많이 경험했기에 그분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가시와 같은 교인을 통해 목회하시는 하나님
어떤 한국의 유명한 목사가 이민교회에서 목회할때 자기를 괴롭히는 교인이 있었다. 그 교인을 다른교회로 옮겨주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더니 정말 그 교인이 떠났다. 그러니 숨어있던 더 힘든 교인이 나타났다.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니 그 교인도 떠났다. 이번에는 더 심하게 자신을 괴롭히는 교인이 나타났다. 가시와 같은 교인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목회하신다. 우리의 완고한 자아를 깨뜨리시고 성령에 온전히 사로잡힌 사람이 되게하신다.
이런 훈련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광야로 내모신다. 광야는 자기발견의 장소이다. 우리들의 처절한 무력함과 우리들의 부패함을 발견하게 되고 더 이상 이런 자아로는 살아갈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하시는 광야는 자신이 죽고 매장되는 장소이다. 자기가 죽고 그리고 광야는 그곳에서 하늘문이 열려서 새로운 비전과 소망이 주어지는 곳이다.
찔레꽃을 부른 장사익이 있다. 그가 인생의 밑바닥에 내려왔을때 그 노래를 불러 유명해졌다. 그가 하루는 자신의 신세가 장미꽃 옆에 가려진 가련한 찔레꽃 같이 보여 펑펑 울었다. 그리고 후에 그에게 새로운 인생의 장이 열렸다. 그래서 혼이 담긴 노래를 신명나게 부르는 사람이 되었다. 고난을 통해 처절한 실패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께서 연단하신 후에 영이 깃든 목회사역과 설교를 하는 사람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고난은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한다. 고난과 징계 자체가 우리의 옛 자아를 죽게하거나 변화시키지 못한다. 아무리 고난과 징계가 있어도 우리의 자아는 안죽는다. 오직 십자가 위에서만 처리가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다. 고난과 징계는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해서 옛 자아의 욕망을 따라 더 이상 살아갈수 없게 만든다. 옛 자아의 삶과 사역에 종지부를 찍게하는 것이다. 이제 이대로 살수 없다며 내가 죽겠다는 자아의 죽음을 승인하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들이 옛 자아가 처리되는 삶을 살게된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하는 삶을 살게된다. 육신의 소욕을 쫓아서 육신의 힘, 육신의 열정, 육신의 지혜를 짜내서 힘겹게 사역하던 옛 자아는 죽고 이제 성령을 따라서 성령의 능력과 은혜에 사로잡혀 사역하는 목회자로 부활하게 된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목사님들에게 있기를 바란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주강사는 박영돈 목사. 박 목사는 현재 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로 있으면서 성령론에 대한 많은 저서를 냈다. 또 미국 칼빈신학대학원, 풀러신학대학원, 예일대학교, 웨스터민스터 신대원에서 성령론을 전공했으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영돈 목사는 개회예배 설교와 더불어 4번의 주제강의를 했는데 그 제목은 '성직자의 육신의 소욕',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 '성령과 기도'등이다. 다음은 '성직자의 육신의 소욕'이라는 첫번째 강의내용이다. 목회자 세미나이니 목회자를 대상으로 하는 통렬한 강의이다. 한국교회 목회자의 문제점과 방향성을 잘 설명해 냈다. 평신도라면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입하여 읽으면 은혜가 있을 것이다.
목회를 성공해서 유익을 누려야만 행복할수 있다면 우리는 육신의 소욕에 따라서 주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인정해주는 성공을 내가 성취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과 교인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체로 행복할수 있다면 그 사람은 성령을 받아서 주의 일을 하는 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 하늘의 영광과 위로가 함께 하실것이다.
육체의 소욕에 따라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영성에 치명적인 폐를 경험하게 될것이다. 우리들의 이기적인 야망은 우리의 영성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모든일이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에 있어서 순수하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갈망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사역의 필요에 의해서 강요된 갈망에 의해 은혜를 추구할때가 많다. 경건을 추구해도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하기보다는 경건의 유익과 명성을 더 원하기에 더 추구할수 있다. 경건하고 거룩해야 교인들에게 인정받고 성공적인 목회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충만을 원하지만 성령충만을 원하지 않는다?
성령충만을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 중에 성령충만을 원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간절히 구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는가. 성령으로 충만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을 아니다. 하나님께선 목마른자는 내게 나와 마시라고 하셨다. 나를 믿는자는 깊은 차원에서 생수가 성령의 은혜가 흐른다고 했다. 참으로 원하면 성령충만을 받을수 있다. 목마르면 마시면 된다. 성령충만은 간단하다.
그런데 왜 간절히 원하는데 성령충만하지 못할까. 성령충만을 간절히 원하는데 사실 우리는 성령충만 자체를 원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목마른 것은 성령충만 자체가 아니라 성령충만함으로 얻을수 있는 유익(능력, 은사, 목회성공)을 목말라 한다. 그래서 성령충만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 목사이면서 성령충만 받기 가장 힘든 사람도 목사이다.
성령충만에 대한 갈망이 많을수록 이 은혜를 받기가 어려워지게 된다. 성령충만을 원하면서도 내가 성령때문에 완전히 지배당하고 성령의 뜻에 온전히 굴복하는 삶을 살기는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성령충만함으로 기쁨과 평강으로 가득하고 목회의 능력이 나타나고 그래서 목회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욕망의 복잡한 미로속에서 방황하고 있기에 너무도 간단한 경건의 비결 성령충만의 길을 너무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 육적인 야망이 죽지않고 성령충만을 받으면 그 성령의 거룩한 능력을 욕망으로 자기의 세속적인 욕망을 성취하는 동력으로 남용하게 된다.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가 욕망거리로 변질될수는 없는 것이다.
자신을 기만하는 욕망
거룩한 것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마저도 속된 것이 될때가 많다. 육신의 야망과 이기심이 가장 절묘하게 발동하는 순간이 그 욕심이 무릎을 꿇을때이다.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을 이땅으로 끌어내려서 나의 욕망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게 되는 것이다. 기도속에서 우리의 욕망이 분해되고 소멸되어야 하는데 기도속에서 우리의 부패한 욕망이 더 뜨거워지게 된다.
기도라는 탱크로 천국을 밀고 들어가 천국의 축복을 점령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기도가 우리에게 성화의 방편이 되지 못한다. 그렇게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변화가 없고 새로워 지지가 않는다. 육체의 소욕에 따라서 사역을 하면 자신의 성화와 영적인 성숙을 위해 사용되어어야 할 모든 정신적인 힘과 영적인 에너지가 자신의 이기적인 야망을 성취하는데 다 소모되는 것이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많은 것을 성취하는 것 같지만 내면세계는 점점 황폐해지게 된다. 성공에 대한 야망은 끝이 없고 만족이 없다. 미국에서 같은 신학교를 졸업한 어떤 목사는 이민교회에서 사역하다가 소망대로 한국에서 몇만명이 모이는 유명한 교회 담임이 되었다. 그 정도면 만족될것인데 내가 보기에는 만족을 못한다.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추구하고 원하던 것을 성취해도 만족은 잠시이고 더 큰 공허감이 몰려올수가 있다. 영적인 공허감 가운데 우리가 살아갈때 죄에 대한 저항력이 약화되고 죄의 유혹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져서 자극적인 죄, 음란의 죄 같은 것에 빠질 위험성이 크지게 된다. 그래서 헛된 야심과 음란은 대개 비례한다. 심리학적으로 야망이 클수록 음욕이 커진다는 말이 있다. 종교적인 야망이 많은 사람은 부도덕한 음란의 죄에 빠질수 있는 확율이 높다.
목회의 은사는 있지만 열매가 없는 목사
목사가 육신의 소욕을 쫓게되면 그의 내면 세계는 그 안에 계신 성령과 날카로운 긴장과 대립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러면 성령으로 부터 풍성한 생명력의 공급이 차단되고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자아로서 성숙하는데 필요한 영적인 자원이 우리안에 고갈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성화가 진행되지 아니하고 성령의 열매가 우리안에서 산출되지 않는다. 목회의 은사는 있지만 열매가 없는 목사가 되는 것이다.
뛰어난 설교와 목회의 은사는 있지만 좋은 인격의 열매는 없는 목사가 될 수 있다. 설교와 영성은 꼭 비례하지 않는다. 특별한 말씀의 은사를 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참된 영성을 소유했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설교의 은사가 남다르게 뛰어날수록 그 은사의 위력과 탁월함때문에 아주 고차원적으로 자신이 깊은 영성의 사람, 은혜로운 사람으로 위장하기가 쉽다. 자기도 그렇게 착각하기가 쉽다.
사실 설교가 유창할수록 그 표현이 화려할수록 그 설교대로 사는 실천할수 있는 확률은 적은 경우가 많다. 설교를 탁월하게 하느라고 온 힘과 에너지를 다 소진해서 말씀대로 살 여력이 남아있지 않게된다. 물론 영성과 설교는 비례한다. 깊은 영성에서 우러나오는 메세지가 감동이 있고 은혜가 있는 것이다. 목사가 설교의 은사를 성령을 따라서 겸손하게 사랑의 원리와 동기를 가지고 활용하게 될때 목회의 열매를 맺는 훌륭한 목사가 될수가 있다.
그러나 설교에 뛰어난 은사를 자기의 야망의 성취를 위해 활용하면 은사가 그를 변화시키는 인격을 세우게 하는 성화론적 기능을 그 안에서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사역과 목회는 아주 성공적인데 성화에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목사를 보게된다.
자신을 속이는 목회의 모습
이런 목회자의 문제가 한국교회 전반적인 문제와 맞물려있다. 한국교회가 양적 팽창에 비해 성화가 심히 부진하여 성화적인 면이 저조한 편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들을 변화시키는데는 즉 성화시키는데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은사와 열매, 사역과 성화가 조화롭게 통합되지 않으면 목회자의 영적 성숙은 불가능해진다.
설교는 잘하지만 인격에는 문제가 있고, 강대상 위에서와 아래에서의 모습이 다른 이중적인 분열적인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목회자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모순된 모습을 감추기위해 노력하며 자기를 좀 더 솔직하며 괜찮은 목사처럼 꾸미기 위해 애를 쓴다. 교인들이 기대하는 목회자상으로 자기를 맞추어 가거나 자기가 가장 되고 싶어하는 모습을 따라가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다. 자신의 자신의 참된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고 사역하려고 하니 얼마나 힘들고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겠는가.
그렇게 애써서 자아낸 경건의 모습은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만 가능한 자율성 그리고 창의성이 결의되어 있기에 그 모습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경직되어 있고 가식적으로 보인다. 경건의 핵심은 자유함이다. 꾸밈없는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가 은혜스러워야 참된 경건이다. 목회자가 이런 가식에 익숙해져서 가면이 자기에게 완전히 굳어지게 되면 가면 쓴 자기와 참된 자기를 혼돈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참된 자아를 잃어버릴수 있는 위기에 직면한다. 열심과 헌신은 종교적인 가면을 더 보강하여 참된 자아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고, 이렇게 종교적인 외식과 가면으로 완고해진 종교적인 자아는 변화되고 깨지기가 가장 어렵다.
어떤 목사는 이 가식의 무거운 짐을 성령의 은혜로 해소하지 아니하고 인간의 솔직함으로 벗어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가식이 없이 솔직한 것 같지만 그것이 더 교묘한 고단수의 위선이 될 경우가 많다. 우리는 자신안에 깊은 마음의 동기와 욕망을 살피는 것을 소흘히 하고 꺼려하고 두려워한다. 자기마음속에 추한 욕망이 꿈틀거리며 용솟음 치는 것을 직시하는 자아성찰을 우리는 최대한 회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은 점검되지 않은 욕망에 의해 지배를 받고 은밀하게 주관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안에 심히 간교하고 그리고 추한 욕망이 무섭게 역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통절한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그 욕망의 희생물이 될 확률이 높다.
육신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아라
목회자에게는 항상 개인적인 야망과 주님에 의한 열망사이에 날카로운 긴장이 존재하며 욕심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치열하게 싸움을 계속한다. 그래서 목회자의 심령은 가장 격렬한 영적전쟁터라고 할 수 있다. 교회성쇠는 이 싸움의 결과에 달려있다. 목회자가 육신의 소욕에 굴복하여 순수성을 잃어버릴때 그의 세속적인 욕망은 교회안에 세속의 물결이 밀려들어오는 통로역할을 하게된다. 반대로 육신을 쳐서 복종시킬때 그의 영혼은 교회에 충만한 성령의 은혜가 밀려오게 하는 은혜의 채널이 된다.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우리들의 육신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이렇게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는 것 즉 죽이는 것은 욕망자체를 말살해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육체의 욕망이 많은 것도 문제이지만 욕망이 없거나 적은것도 신앙의 무서운 적이다. 육신적인 동기부여가 없으면 도무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자극되지 않는 영적인 냉담함과 나태 또한 거짓된 육신의 또다른 얼굴이라 할수있다.
자신에게 크게 성공할만한 목회의 잠재력과 설교의 은사가 별로 없고 그런 현실적인 가능성이 희박해보이면 성공의 야먕을 접고 그저 현상화에 안주하려는 무사안일주의에 빠지게 된다. 자기가 목회와 설교의 은사가 뛰어나면 그 은사를 백분발휘해서 성공해보려는 야망에 사로잡힐 학률이 많은 반면에 그런 은사가 그다지 없는 사람은 성공의 야망이 없는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사역을 열정과 성의없이 적당하게 감당하는 안일함에 빠지게 된다.
이와같이 육신의 욕망으로 주의일을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열망과 열정을 의무감으로 죽이고 종교적이며 직업적인 타성에 젖어서 안일하게 주의 일을 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거룩한 욕망을 추구하라
그러므로 목회자는 육적인 욕망을 비운 우리들의 마음에 새로운 영과 더 순고하고 격렬한 욕망으로 가득채워야 한다. 기독교는 절대 욕망을 부인하는 종교가 아니다. 참된 욕망으로 우리를 초청하여 그 욕망으로 충만케 하는 종교이다. 거룩한 욕망이 영성과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욕망이 영성의 질을 결정한다. 이런 욕망이 없이 성령을 따라서 살수없고 하나님을 바로 섬길수 없다. 성령은 강렬한 열정과 욕망의 영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하면 하나님에 대한 욕망과 열정으로 불타오르게 된다. 이 열망이 열렬한 기도를 만들어 낸다.
이런 열망이 없는 사람은 주를 위해 아무런 위대한 일도 할수없다. 교회의 역사속에서 신앙의 거장들은 모두 열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 욕망을 죽이는 것은 영적인 자살행위와 같고 영적이 거장이 될수있는 원동력을 버리는 것과 같다.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욕망은 세상에서 성공한 목사로 알려지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목사가 되기위한 그런 열망, 하나님에게만 영광이 돌아간다면 나는 잊혀질지라도 행복할수 있는 목사가 되는 열망일것이다.
욕망이 거듭날 필요가 있다. 욕망이 회개해야 한다. 지성만 회개하면 안되고 욕망이 회개해야 삶이 변화된다. 욕망이 우리의 삶을 운전해 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교인들의 변화가 없는 근본이유는 마음의 중심, 욕망이 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교인들의 욕망이 세상사람들의 욕망과 근본적으로 다른것이 별로 없다. 교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세상에서 편안함, 형통함, 성공, 잘되는 것이다.
그래도 세상사람들과 좀 다른것은 그런 강한 욕망 플러스 하나님에 대한 희미한 관심과 열망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세상사람들과 다르다는 긍지와 구별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니 우리들 욕망이 둘로 나뉘게 되면 자아된 욕망은 더 큰 욕망, 하나님에 대한 작은 욕망은 세상을 향한 더 큰 욕심을 이루는 역할을 한다. 기독교 신앙을 이용해서 이 세상의 번영을 이루려 하며 욕망을 성취하려고 한다. 그런것이 기복신앙, 번영신앙, 웰빙신앙이다. 이런 신앙이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다.
욕망의 회개와 욕망의 좌절
욕망이 회개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하는데 우리 목회자안에서 부터 일어나냐 한다. 욕망이 회개해야 하는데 가장 어렵다. 욕망은 회개를 모른다. 욕망에는 종말이 없다. 욕망은 끝이 없다는 말이 있다. 욕망의 특성은 갈때까지 가는 것이다. 욕망의 사로잡힌 삶은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가 고장난 버스와 같은 것이다. 야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무리 이런 설교와 강의를 들어도 자신의 길을 그대로 갈 것이다. 눈하나 깜짝 안할것이다.
우리안 성령님의 독특한 사역중의 하나는 육신의 욕망을 따라서 사는 우리의 삶에 제동을 걸어주신다. 우리 육신이 추구하는 것을 좌절되게 하시고 시들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를 오히려 처참하게 실패의 자리로 내려가게 하신다. 육신의 야망을 따라사는데 성공되고 잘되면 큰일이다. 그러면 우리는 영원히 망하게 된다. 하나님은 영원히 망할사람은 계속 성공하게 하신다. 어떤 사역에 계속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면 하나님이 이미 떠나셨을지라도 은혜를 받고 있는 것 처럼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하나님은 충격요법으로 많은 실패와 좌절과 아픔을 공유해서 육신의 욕망을 쫓는 우리의 삶에 제동을 걸어주신다.
성령께 우리가 완전히 굴복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신실하게 괴롭히실 것이다. 천국의 사냥꾼처럼 우리를 집요하고 끈질기게 쫓아와서 우리를 괴롭히실 것이다. 이것이 아무리 괴로울지라도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의 사인이요 손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교회에서 목회하지만 사실 하나님이 우리의 목회를 통해 우리를 먼저 목회하신다. 교회에 골치아픈 문제들, 가시와 같은 교인들, 죽고싶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사건들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목회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동원하신 것이다. 저는 목회를 열심히 하다가 너무 어려워서 자살이 죄만 아니라면 죽고싶다고 말하는 목회자들을 만나보았다. 저도 그런것을 많이 경험했기에 그분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가시와 같은 교인을 통해 목회하시는 하나님
어떤 한국의 유명한 목사가 이민교회에서 목회할때 자기를 괴롭히는 교인이 있었다. 그 교인을 다른교회로 옮겨주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더니 정말 그 교인이 떠났다. 그러니 숨어있던 더 힘든 교인이 나타났다.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니 그 교인도 떠났다. 이번에는 더 심하게 자신을 괴롭히는 교인이 나타났다. 가시와 같은 교인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목회하신다. 우리의 완고한 자아를 깨뜨리시고 성령에 온전히 사로잡힌 사람이 되게하신다.
이런 훈련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광야로 내모신다. 광야는 자기발견의 장소이다. 우리들의 처절한 무력함과 우리들의 부패함을 발견하게 되고 더 이상 이런 자아로는 살아갈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하시는 광야는 자신이 죽고 매장되는 장소이다. 자기가 죽고 그리고 광야는 그곳에서 하늘문이 열려서 새로운 비전과 소망이 주어지는 곳이다.
찔레꽃을 부른 장사익이 있다. 그가 인생의 밑바닥에 내려왔을때 그 노래를 불러 유명해졌다. 그가 하루는 자신의 신세가 장미꽃 옆에 가려진 가련한 찔레꽃 같이 보여 펑펑 울었다. 그리고 후에 그에게 새로운 인생의 장이 열렸다. 그래서 혼이 담긴 노래를 신명나게 부르는 사람이 되었다. 고난을 통해 처절한 실패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께서 연단하신 후에 영이 깃든 목회사역과 설교를 하는 사람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고난은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한다. 고난과 징계 자체가 우리의 옛 자아를 죽게하거나 변화시키지 못한다. 아무리 고난과 징계가 있어도 우리의 자아는 안죽는다. 오직 십자가 위에서만 처리가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다. 고난과 징계는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해서 옛 자아의 욕망을 따라 더 이상 살아갈수 없게 만든다. 옛 자아의 삶과 사역에 종지부를 찍게하는 것이다. 이제 이대로 살수 없다며 내가 죽겠다는 자아의 죽음을 승인하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들이 옛 자아가 처리되는 삶을 살게된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하는 삶을 살게된다. 육신의 소욕을 쫓아서 육신의 힘, 육신의 열정, 육신의 지혜를 짜내서 힘겹게 사역하던 옛 자아는 죽고 이제 성령을 따라서 성령의 능력과 은혜에 사로잡혀 사역하는 목회자로 부활하게 된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목사님들에게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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