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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콥 최바울 대표 '하나님의 나라와 역사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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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ㆍ2013-03-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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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콥 최바울 대표는 지난 2월 14일(목) 뉴욕베데스다교회(김원기 목사)에서 "마지막시대 세계환경과 세계선교" 를 주제로 목회자 선교세미나를 인도했다. 최바울 대표는 '영적리더십과 글로벌리더십'와 '하나님의 나라와 역사운동'이라는 두개의 강의를 했는데 '하나님의 나라와 역사운동'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소개한다.

만물은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초역사적 및 몰역사적 존재는 없다. 인간도 역사적 존재이다. 어떤 사람은 과거가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우리 모두가 역사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각 개인은 과거 부모의 관계에 의한 역사적 산물이다. 예외가 없다. 인류 원사 최초의 사건 에덴의 아담과 하와의 타락의 사건에서 이후 지금까지 모든 사람이 절대 지배하에 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 누구가 죄를 싫어하는데 왜 다 죄를 짓는가. 그렇게 싫어하는 죄를 결국은 짓고 또 짓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유전적 죄의 인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디서 생겼는가. 이것의 유래를 자세히 적나라하게 설명하는 가장 오래된 문서는 구약성경 창세기 3장이다. 인류는 예외없이 다 그 사건의 절대적 영향 아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2천년 전 예수 사건이 오늘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항변한다. 그렇지 않다. 2천년 전 팔레스타인 예수 십자가 사건이 이후 모든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바꾼다. 믿는 자는 천국이요 믿지 않는 자는 지옥이다. 이 사건을 누가 부인한다고 해서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2천년 전 예수 십자가 사건은 당신이 인정하던 부정하던 관계없이 역사적 사실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사건은 지금 이 시간에도 인류 모든 각 개인의 영원한 운명을 바꾸고 있다.

과거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항변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라. 그 사람의 얼굴에 과거가 다 반영되어 있다. 어린 시절 성장과정에서 겪은 특수한 경험, 상처, 아픔이 다 얼굴과 표정과 생각과 표현방식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영향 아래 아파하고 고통하고 있지 않는가. 과거를 부인하려면 먼저 당신의 그 작은 과거에서부터 자유해 보아라. 결코 자유하지 못할 것이다. 예수의 피가 없이는 결코 과거로부터 자유하지 못한다. 세상의 상담전문가들도 과거로부터 시작하며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가. 누구도 과거에서 자유하지 못한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한민족은 역사적으로 매우 가난한 약소국으로 살았다. 대륙의 거대 중국과 해양세력 일본 사이에 반도국가에 놓은 한반도 민족은 지난 2천년 900회 이상의 내우외환을 겪으며 한많은 한민족으로 살았다. 그렇게 지금은 세계 12번째 경제대국이며 G20 의장국을 했으며 UN 사무총장을 하고 있는 나라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인구비례 면에서 가장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교회가 되었다. 한많은 우리 역사에 도대체 무슨 일이 었었는가. 130년 미국에서 20대 젊은 선교사 언더우드가 조선에 온 것이다. 이후 일제지배와 6.25의 역동적인 역사 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역사는 초고속 전진하며 상승했다. 포항제철 회장이던 박태준씨가 재직당시 직원들에게 과거 조선시대 경제성장률을 연구보고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 결과 매년 0% 성장률이라고 보고했다 한다. 조선시대 뿐이겠는가. 이전에도 크게 차이 없었을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사를 말하지 않고는 오늘의 코리아를 말할수 없다. 오늘의 우리는 과거의 산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 속에 겸손해야 하는 것이다.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알아야 한다. 역사를 알아야 시대를 감당하고 미래를 예언하는 선지자적 리더십을 발휘할수 있다.

역사는 무엇인가

첫째, 역사는 목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어떤 목적 어떤 뜻을 가지고 창조하셨을 것이다. 인격이신 하나님께서 의지를 가지고 역사를 시작하신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역사는 목적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역사가 목적이 있다고 하면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도 정신 나갔다고 생각할 것이다. 많은 사람은 역사는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흘러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흘러가는 역사, 흘러가는 세월, 흘러가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인이나 학자들은 역사는 어떤 법칙에 의해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만물이 법칙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연계를 보라. 물리학, 기하학, 생물학 등 자연법칙에 의해 작동한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기계적 및 반복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가장 작은 원자에도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돌면서 작동 반복한다. 자연계 만물이 기계적으로 작동 반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도 법칙에 의해서 작동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지연계는 법칙에 의해서 작동하지만 인간계는 하나님의 의지가 작용한다. 하나님께서 자연계는 법칙에 의해 작동하도록 하셨다. 이것을 과학적 법칙이라고 한다. 창조질서이다. 그러나 인간계는 직접 개입하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신다. 따라서 역사는 하나님의 의지, 목적에 따라 전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역사는 전진한다.

둘째, 역사는 끝이 있다. 시작이 있으니 끝이 있는 것이다. 유한(finite)에서 무한(infinite)이 나올 수 없다.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영원에서 영원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래서 유한한 역사 속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없다(요한복음 3:3). 그러면 언제 역사가 끝나는가. 성경은 이에 대하여 분명히 하고 있다 "모든 민족에 천국복음이 증거되어야 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태복음 24:14). 놀라운 계시의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모든 민족으로 가라"고 유언을 주셨다. 이를 위해서 오순절에 성령께서 불과 바람으로 임하시어 모든 민족의 방언과 언어로 증거하셨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은 선교의 영이시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증인이 되리라"의 키워드는 모든 민족이다. 지상명령도 오순절의 성령의 사역도 역사 완성을 위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러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으로 복을 받게 하라"고 하셨다. 성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으로", 성자 예수께서 유언으로 "모든 민족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오순절에 임하시어 "모든 민족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마다 강조하신 것은 "모든 민족"이다. 이유는 무엇인가. 역사의 완성,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다. 오순절 이후 역사운동은 "모든 민족으로" 급진전한다. 따라서 역사운동의 중심축은 선교이다.

역사는 전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역사운동에 헌신해야 한다. 역사운동의 중심에 서야 한다. 이것이 영적 리더십이다. 역사와 시대를 고려하지 않는 메세지는 영향력이 없다. 종교인은 만들어도 세상을 변혁하는 영적 지도자를 만드는 메세지가 되지 않는다. 역사적 사명과 시대를 향한 비전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의 기법이 역사서라 할 수 있다. 구약은 이스라엘의 역사이며, 복음서의 예수님의 생애역사이고 사도행전은 제자들의 역사이다. 서신서는 역사를 성령께서 이해할수 있도록 실제적으로 조명하신 것이고 계시록이나 구약의 예언어 역시 미래 역사이다. 하나님께서 계시의 말씀을 주시면서 역사적 관점에서 계시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역사의식을 가지고 역사적 통찰력을 가지며 역사분석을 통해 시대를 정확히 분석하고 하나님의 역사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헌신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제사장, 왕, 선지자 등 3중 리더십을 통해서 역사를 이끌어 오셨다. 하나님은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셨으며, 왕의 통치권력을 통해 역사하시고, 선지자를 통해 세상을 경고하고 장차 전개될 일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제사장, 왕, 선지자 세가지 리더십이 통합된다. 우리는 왕이요, 제사장이며, 당연히 선지자이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우리는 제사장, 왕, 선지자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전도와 선교를 통해 구원과 회복의 역사를 이루며 왕의 통치권력으로 마귀의 권세를 제어하고 눌린 자들을 자유케하며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시대를 분석하여 미래를 예측하며 교회와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야 한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는 제사장적 리더십은 현저히 상실하여 전도하고 선교하는데 매우 인색하다. 또한 왕의 통치권력, 즉 예수 이름의 권세도 희미해져 있다. 선지자적 리더십은 거의 소멸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오히려 세상의 미래학자들이 더 인기를 누린다. 다니엘 벨, 피터 드러커, 프란시스 후쿠야마, 폴 케네디, 사무엘 헝틴턴 등 세상의 역사학자 및 사회과학자들이 얼마나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는가. 물론 9.11 사태이후 미래학자들이 꼬리를 감추고 사려졌으나 1980-1990년대는 미래학자들의 전성시대였다.

9.11 사태가 발발하자 대부분의 미래학자들은 당황해 했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은 인류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적 비전을 제시하고 미래의 청사진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이 주목하지 않고 오히려 무시했던 것이 종교였다. '지금같은 초과학시대에 원시개념의 종교는 이제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제 과학을 발전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면 우리가 위대한 인류공동체를 건설할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찬양하며 과학과 인간이 통합된 새로운 인간사회의 도래를 설파했다. 그러나 9.11테러가 발생하자 세계지식사회, 특히 사회과학계에 공황이 왔다. 세계에 종교갈등의 구조가 드러나고 미국을 위시한 강대국들은 이 문제를 제어하지 못하면서 윈시 고대 개념의 종교의 위력을 보게된 것이다. 9.11 이후 전개되는 지구적 종교문명의 갈등은 기존 사회과학 이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기존 사회과학 이론의 근본틀을 바꾸던가 아니면 폐기처분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4천년 전에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시작된 이삭과 이스마엘의 형제갈등의 지구적 팽창을 사회과학자들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이것은 문명사적 사건이요 또한 영적인 메카니즘이 작동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세계교회도 세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과학 등 세상과 세계를 분석하고 성경말씀으로 조명하며 세상과 세계를 향한 선지자적 메세지를 선포하고 선지자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능력이 현저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9.11 이후 미국과 세계가 당황하고 고통하며 세계 정치지도자들이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동분서주할때 미국과 한국 등 세계교회 영적 지도자들은 무엇을 기도하고 어떤 메시지를 전하며 무엇을 했는가를 보면 잘알수 있다.

세계교회 안에 성령의 카리스마도 점점 사라져 간다. 계몽주의 이후 계몽주의자와 그들의 후예들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카라스마를 제거하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다. 하나님의 존재와 성경말씀을 과학으로 증명해보라며 교회를 윽박질렀다. 어떻게 물이 포도주가 되며 사람이 물 위를 걸을수 있느냐고 비아냥거렸다. 그들은 과학에 과도하게 권위를 부여하면서 과학적이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라고 큰소리쳤다. 그들은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모든 현상을 과학으로 설명하려면 카리스마가 존재해서는 안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모든 신비스런 현상들을 과학으로 재단하는 방법으로 모든 성역을 해체하고 교회의 카리스마를 제거해버렸다. 교회를 거세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는 인본주의적인 크리스찬 지성인들과 신학자들도 가세하여 적극적으로 역할을 했다. 결국 성령의 카라스마가 제거된 교회는 거세되어 영적 리더십을 상실한 종교집단으로 전락해 갔다. 이것이 현대교회 문제의 핵심이다. 이렇게 하여 교회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통치, 성령의 역사와 기적, 성도들의 진정한 회개와 감동과 헌신은 점점 사라져 간 것이다. 우리는 과학과 과학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이 말씀의 영역을 지배하려는 시도에 강력히 저항해야 한다. 과학의 세계와 하나님의 나라가 작동하는 원리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위대한 선교사 언더우드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첫째는 선교사는 위대하다는 것이다. 어둠 속에 죽어가는 한 민족의 운명을 놓고 도전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선교사이다. 둘째는 20대 중반의 젊은 크리스찬이 우리 민족의 운명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20대 중반의 젊은이가 한국에 와서 코리아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 젊은이는 아직 부족하고 성숙하지 않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한 민족의 운명을 위해 헌신한다. 왜 나이가 들면 열정에도 죽어가고 헌신도 하지않으려 하는가. 늙은이들은 미래의 꿈을 꾸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날 장인 어른을 따라 노인들 모임에 간 적이 있다. 장인어른이 대한민국 군대 창립멤버이기 때문에 가끔 용산 전쟁기념관 내 창군동우회 사무실에서 원로 전역 장군들이 모이곤 했다. 옆에 앉아서 담소가 끝나기를 기다리는데 깜짝 놀랐다. 이분들이 과거 이야기만 하시는 것이었다. 두시간 대화가 온통 과거 이야기였다. 미래를 얘기해야 하는데 '당신 무덤 준비해놨느나'는 것이었다. 노인들은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문밖에서 나는 늙어서 결코 저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한국에 큰 교회 목회하는 친구가 있다. 오래만에 만났는데 매우 늙어 보였다. 젊은 목사가 당회에서 노인 장로들과 회의하다 보니 노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생각도 노인이고 표정도 노인이고 행동도 노인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결코 새로운 역사에 믿음으로 도전하거나 헌신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에 헌신해야한다. 십자가를 지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되어 목숨을 다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야한다. 그런데 처음에서 'mission(사명)'으로 시작한 교회가 'mission'을 잃으니 'management(관리)'하다가 'mannerism(매너리즘)'에 빠지고 마침내 'musium(박물관)'으로 변한다. 이것이 유럽교회의 현실이 아닌가. 목회자가 사명을 잃으면 교회는 죽는다. 목회자가 꿈과 비전을 상실하고 교회를 '관리'하기 시작하면 교회는 결국 생명력을 잃고 죽게 된다. '관리'를 하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고 역사의 유물, 즉 문명의 시체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권능으로 임하시니 요엘서의 말씀대로 어린이들이 예언하며 젊은이들이 비전을 보며 노인들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것이 성령충만한 살아있는 교회이다. 목회자는 젊은이들이 시대에 도전하며 고통하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최전방 개척선교지로 헌신하여 나가는 것을 감사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130년 전 언더우드 선교사가 헌신하여 갔던 우리나라 코리아도 비슷한 처지였다. 목회자는 늙은이들이 미래의 새로운 꿈을 꾸고 아브라함과 모세처럼 헌신하게 해야한다. 아브라함은 74세에 갈바를 알지 못하고 순종하여 새로운 땅으로 나갔고 모세는 80세에 세계절대제국 이집트에 도전했다. 은퇴를 영어로 'retire'라고 한다. 타이어 갈아끼고 다시 달리자는 것이다. 은퇴하면 쉬고 논다는 것은 우리 크리스찬들에게는 맞지않는 말이다. 새롭게 무장하여 남은 삶을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군사로 헌신하여 부르시고 모집하신 분을 기쁘게 해야할 것이다.

오순절의 메세지는 분명하다. 성령께서 불과 바람으로 임하시어 모든 민족의 방언과 언어로 증거하셨다. 모든 민족을 향한 축복의 역사, 즉 선교를 시작하신 것이다. 바로 이때 오순절을 경험한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생각나게하신 구약 예언의 말씀은 요엘서 28장이었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모든 세대가 일어나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에 자매 간사님이 나에게 어린이들도 선교할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해외선교를 어린이들이 어떻게 하겠냐 선교사들에게 짐만된다고 반대했다. 그런데 그 간사님이 어린이들에게 선교비전을 나누고 모아서 팔레스타인으로 단기선교를 갔다. 팔레스타인 어린이들과 2주간 놀이하며 교제하며 지냈는데 그곳 여성들과 어른들이 이 광경을 보고 연일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더라는 것이다. 총소리와 분쟁의 갈등으로 얼룩진 팔레스타인의 어린이들은 외국에서 온 한국의 어린이들의 해맑고 발랄한 모습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게 되며 그렇게도 기뻐한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본 어른들이 더 감동하여 크라스찬 한국 어린이들의 찬송과 예수를 따라하며 즐거워한 것이다. 이후로 한국인 크리스찬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얼마나 환영을 받았는지 모른다. 누가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에게 소망을 가져다 줄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녀들을 통해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다.

15년전에 임이스마엘 선교사가 청소년들을 미래 세계선교의 일꾼으로 키워야한다고 했다. 나는 한국이 입시전쟁이라 청소년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와 학원에서 분주한데 무슨 선교훈련이냐고 했다. 결국 공부 못하는 아이들만 모일 것이다고 했다. 그랬더니 공부 못하니까 선교라도 해야한다고 반문했다. 결국 청소년 비전스쿨을 시작했는데 말 그대로 말썽쟁이들과 문제아들만 왔다가 단기선교에서 변화됐다. 부모들이 몰려 왔다. 그런데 그들이 훈련받고 방학때 단기선교 다녀오더니 완전히 변했다, 부모들이 고마워했다. 목회자 자녀들 중 특히 상처 갚은 아이들이 많다. 부모님 목회에 소외되고 상처받은 목회자 자녀들이 비전스쿨에서 회복된 것이다. 목사님들이 고마워했다. 이렇게 청소년 비전스쿨이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모이기 시작하고 수천명씩 모여들었다. 대부분 부모들이 보낸 것이다. 선교지 현장에 가서 현지 청소년들을 만나고 고난 속에 믿음을 지키는 현지 지하교회의 크리스찬들을 보고 현지인들의 아픔을 현장에서 보고 경험한 우리 아이들이 문제아에서 리더로 자라나는 것이다.

요즈음 가정은 여성 중심이다. 여성들이 은혜를 받고 회복되어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일어나면 아이들이 변화되고 남편도 변화되고 시부모들도 변화된다. 가정의 핵심이 여성이다. 여성들이 회복되면 가족 전체가 회복된다. 그래서 여성들이 중보기도자로 서야한다. 여성들의 영적 리더십이 회복되면 가정이 일어나고 교회가 부흥한다.

예수님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기 위해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서야 끝이 오리라(마태복음 24:14)"고 하셨다. 역사는 종말을 항해 전진한다. 역사는 종말을 향하 전진하는 구속사이다. 따라서 역사 전진의 중심축은 선교이다. 오순절 이후 역사운동의 중심축은 선교였다. 주님은 천국복음을 말씀하셨다. 요즈음은 영혼구원의 전도와 선교를 금지하고 사회복음으로 대체하려는 세력들의 압력도 엄청나다. 머지않아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며 전도하는 선교는 법적으로 제제하는 것이 지구적으로 보편화될 것이다. 이렇게 마지막 환란은 지구적으로 엄습하는 것이다. 벌써 이러한 조직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천국복음을 주장해야하며 천국복음을 땅끝 모든 민족에게까지 전파해야 한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께서 마지막 시대를 말씀하시면서 그냥 '복음'이라 하지 않으시고 '천국복음'이라고 하신 것은 마지막 시대의 세계 영적 상황을 미리 아시고 말씀하신 것이다. 최근에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안티 기독교운동의 목표는 개종전도를 못하게 국제규범화하려는 것이다.

지금 세계선교는 마지막을 향해 달리고 있다. 지난 20여년 동안 복음화된 종족이 과거 200여년 동안 복음화된 종족과 유사하다. 이 속도라면 머지않아 세계복음화는 완성될 것이다. 아직 복음을 듣지 않는 미전도종족의 90%가 10/40창(10/40 Window), 즉 북위 10도와 북위 40도에 집중 포진되어 있다. 이들은 중동, 북부아프리카,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카프카즈, 터키 등 이슬람권이 대부분이며 주변 소수민족들이다. 지난 20년 동안 세계선교지도자 랄프 윈터 박사와 루이스 부시가 주창한 대로 미전도종족과 10/40창 선교는 세계교회의 집중화한 선교대상지역이었다. 덕분에 10/40창에 빠른 속도로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이란 등 페르시아창에는 놀라운 부흥이 있었다. 1990년초에 이란에 2천5백여명의 크리스찬이 있었는데 지금은 1백만명의 크리스찬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이는 1백50만명을 말하기도 한다. 중동 아라비아 반도에도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복음의 진보를 주시고 계신다. 이스라엘에서는 소련해체 이후 러시아에서 온 1백만명의 유대인들 중 많은 수가 이미 러시아에서 크리스찬이 된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통해 이스라엘에 놀라운 복음운동을 전개하고 계신다. 유대인들이 과거와 달리 열린 마음으로 천국복음을 듣고 있으며 수많은 유대인들이 주님께 돌아오고 있다.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다. 그리고 역사는 운동성 및 역동성이 있다. 자연시간에는 역동성이 없다. 기계적으로 째깍째깍 작동할 뿐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역동성이 있다. 왜 그럴까. 역사 저항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에 저항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시간(Chronos)에는 역동성이 없으나 하나님의 시간(Kairos)에는 역동성과 영적 긴장이 있다. 그래서 역사는 운동성이 있고 역사운동이 계속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에덴에서 사단이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저항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때 로마의 정치 권력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수많은 아이들을 집단 살육했다. 이후 정치권력은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교의 종교 권력과 연맹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라 죽였다. 이때 "죽여라"라고 소리치는 천박한 민중, 즉 사회권력까지 동원되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역사저항은 주님의 재림까지 계속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저항으로 인해 역사의 운동성은 갈수록 증폭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열두제자 대부분이 순교했으며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토마스 선교사도 목이 짤려 순교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셨고, 또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 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역사의 운동성은 종말을 향할수록 갈수록 증폭되며 마지막에는 마태복음 24:21-22에서 말씀하신 것 같이 강력한 지구적 저항, 즉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는 대환난을 예고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종말론적 구속사이다. 역사 운동은 오순절 성령의 임하심으로 본격 시작 되었다. 그러므로 오순절에 마지막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지금은 임박한 마지막 때이다. 그것은 현재 복음화의 속도와 남아있는 미전도 종족의 수를 불 때 짐작할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를 경영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세계를 경영하시는가. 경영단위는 언어와 문화가 다른 종족(ethnic group), 즉 민족(ethnos)이다. 세계에는 수많은 민족들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들을 유대인과 이방인, 두 그룹으로 나누신다. 이방인은 유대인이 아닌 나머지 민족들이다.

세계교회 복음운동은 예루살렘을 향해 서진

한편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말씀하신다. 유대민족 교회와 이방세계 교회에 말씀하시고 또 성취하시는 것이다. 이방 세계교회를 향한 말씀은 단순하고 분명하다. 모든 민족에 천국복음이 증거되면 세상의 끝이 온다는 것이다. 유대민족 교회에 대해서는 유대민족의 역사가 비교적 길기 때문에 예언하시고 성취하신 말씀이 적지않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리라 그러나 다시 모으리라"는 말씀이다. 실제로 유대 민족이 흩어졌으나 1948년 다시 본래의 땅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귀환은 에스겔서 36장, 예레미야 16장 등 구약성경에 나타난 예언의 성취이다. 에스겔서 36:24-28에는 흩어진 유대인들의 고토로의 귀환를 예언하면서 귀환 후에 백성들의 마음을 정결케하며 또한 새영(new spirit), 새마음(New heart), 내영(my spirit)을 주시겠다고 하신다. 이러한 것들은 신약시대에 속한 것으로 히브리서가 강조하고 있는 주제이다. 신약시대에 유대인들이 고토, 즉 본래의 땅으로 돌아온 것은 1948년이다. 유대인들은 2천년 전에 메시야를 죽이고 전세계로 흩어졌다가 1948년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

유대인들이 온 세계에 흩어졌다가 2천년만에 돌아 온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어떤 민족이 어떤 연유로 다른 곳으로 집단 이주하였다가 2백년 또는 3백년만에 다시 집단적으로 귀환한다는 것은 상상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그런 사례는 없다. 그런데 전세계로 흩어졌다가 2천년만에 돌아와서 민족공동체를 복원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것은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한 일이다. 이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시간(Kairos)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인 사건이다. 이것은 임박한 종말의 서막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유대인의 역사운동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1930-40년대 유럽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라는 복귀운동을 전개하더니 1948년 돌아와서 국가를 세웠다. 1960년대에 북아프리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2차 귀환이다. 이후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 러시아에서 지난 20여년 동안 유대인들이 대거 귀환하였다. 3차귀환이다. 이렇게 유대인들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는 민족운동은 마무리됐다. 이제 이방 세계교회의 역사운동이 빠르게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다. 2천년전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복음운동은 아프리카, 인도, 유럽 등 전세계 사방팔방으로 전개됐다. 그러나 복음운동의 중심축은 북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 동아시아, 중국으로 서진에 서진을 거듭해왔다. 그리고 지금 세계교회 복음운동은 실크로드와 아세안 하이웨이를 따라 빠르게 예루살렘을 향해 서진하고 있다. 이것이 2006년 한국교회 선교지도자들이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에서 선언한 "복음의 서진"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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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서진운동은 역사적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운동을 이해한 것으로 우리에게는 하나의 선교운동내지 선교비전의 역사성 및 연속성을 부여한 것으로 매우 중요하다. 결과적으로 지난 2천년 역사적 복음운동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으로 전진해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민족에 천국복음이 증거될 때 세상의 끝이 오리라(마태복음 24:14)는 말씀과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주께 돌아오고 이후 마지막으로 유대인이 돌아오리라는 로마서 11장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이방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되고 마지막 구원받은 민족은 유대인인 것이다. 요약하면 유대인의 역사운동이나 이방 세계교회의 역사운동 모두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역사운동의 시작과 끝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을 주목하게 된다. 지금 세계복음화 상황과 복음에 대한 저항성을 동시에 고려하여 세계를 거시적으로 맵핑(mapping)해 보면 매우 특이한 현상이 나타난다. 그것은 2천년 동안 복음이 유럽, 아프리카, 남미, 북미, 아시아, 오세아니아 등 전세계에 대략 다 전해졌는데, 북부아프리카 마그렙창, 아라비아의 아랍세계, 이란, 파키스탄, 터키, 카프카스, 북인도 등 예루살렘과 3-5천 평방 키로미터의 그 주변이 복음을 강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즈음 선교계에서 말하는 마그렙창, 아랍창, 페르시아창, 터키창, 카프가스창, 북인도창 등이 이슬람의 거대 블럭을 형성하며 유별나게 복음에 강하게 저항하고 있다. 마치 예루살렘을 포위하듯 그곳를 둘러싸고 라운드 벨트를 형성하며 강한 어둠의 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실재하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모든 민족에 천국복음이 증거되어야 하나님의 역사는 완성된다. 어느 한 민족이라도 복음전파에 무시되면 주님은 오시지 않을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유대인이나 이방 민족에 차별이 없으며, 큰 민족이나 작은 민족, 지배민족이나 피지배민족, 부유한 민족이나 가난한 민족, 결코 차별이 없다. 또한 마지막 땅끝이라고 할 수있는 예루살렘과 그 주변 민족들에도 복음이 편만히 증거되어야 한다. 그런데 예루살렘 주변에 거대 블럭을 형성하며 강한 영적 저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재하는 이러한 영적 현상은 전통적인 신학의 페러다임으로는 설명하기 쉽지않다. 전통 신학에서는 역사운동이 고려되어 있지 않으며 역동적인 지구 영적 전쟁에 관점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운동성과 역사의 역동성을 인식한다면 이것은 충분히 이해될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운동성이 있다. 예수님의 첫번째 메세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였다. 저 멀리 있는 하나님의 나라도 맞는 말이지만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가 있다"고 하셨다. 권능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간구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로 시작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운동과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의 운동성의 역학관계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운동에 있어서 유대민족의 특수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의 특수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이 이와같이 말씀하셨다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누가복음21:24).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운명에 대하여 말씀하시다가 주어를 예루살렘으로 바꾸셨다. 예루살렘의 운명에 대하여 특별히 따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이후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였으며 AD 70년 로마군대가 몰려와서 성전을 파괴하였고 유대민족 공동체를 해체시키며 전세계로 흩어지게 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방인에 둘려싸여 지금까지 밟히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주변에 거대한 영적 어둠의 진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으며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언제까지 이러한 상황은 계속될 것인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이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로마서 11:25).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는 같은 말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어야 하리니"(마태복음 24:14)이다. 지금 천국복음의 역사는 모든 이방민족들을 넘어서 유대인과 그 주변으로 향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지금은 역사의 임박한 마지막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고 할 수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의 운명을 특별히 따로 언급하셨는가. 여기서 우리는 예루살렘의 특수성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는 예루살렘에 대하여 매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열상11:36 그의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거기에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 / 열하21:7 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을 성전에 세웠더라 옛적에 여호와께서 이 성전에 대하여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이 성전과 예루살렘에 내 이름을 영원히 둘지라

우리는 여기서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영원히 택하신 거룩한 도성이라는 사실을 알수 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보좌을 세우시고 세계를 통치하셨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어떤 지리적 영역이나 어떤 특정 공간의 영적 특수성이 더 이상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건물로서 성전은 더 이상 없으며 예배하는 장소로서 예배당일 뿐이다. 교회는 예배당이 아니라 에클레시아, 즉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이다. 또한 성지라는 개념은 사라졌으며 따라서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의 의미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비록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신약시대에도 예루살렘은 모종의 영적 특수성이 여전히 부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마태복음 5:34). 하늘은 웅장하며 땅은 거대하다. 그런데 주님은 예루살렘을 하늘과 땅의 수준에서 취급하신다. 이유는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예루살렘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계신다. 누가복음 19:41-42에는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다가가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며 "예루살렘의 평화"에 대해 안타까이 말씀하셨다. 인류구원의 절대적인 사명을 앞에 두고 예수님은 왜 엉뚱한 주제에 대해 눈물로 슬퍼하시는가. 도대체 예루살렘의 평화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통회하시는가. 우리는 다 이해할 수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전히 "예루살렘의 평화"는 당시 뿐만 아니라 지금도 세계 최대의 주제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1948년 유대인들이 귀환한 이후 중동문제, 즉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다른 말로 하면 "예루살렘의 평화" 문제는 지금까지 국제정치의 중심주제가 되어 있다. 지난 70여년 동안 미국 대통령, 즉 실질적인 세계대통령의 대부분의 운명이 바로 이 문제에 의해 좌우되었다. 예루살렘이 고통하면 세계가 고통한 것이다. 예루살렘의 운명이 세계의 운명인양 그렇게 세계가 예루살렘 중심으로 작동했다.

1940대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까무러치게 놀랐다. 성전 안에 이슬람 모스크, "황금사원"이 들어서 있는 것이었다. 그 오랜 세월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리라 기대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 사원을 제거하고 성전을 재건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못하고 있다. 이 사원은 전세계 무슬림들이 메카사원과 함께 가장 거룩한 사원으로 믿고 있다. 만약 이 사원을 제거하면 58개 이슬람국가에서 군대가 몰려올 것이다. 이것은 세계가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전 벽에서 밤낮 울고 있는 것이다. 바로 "통곡의 벽"이다. 황금사원 제거는 이스라엘도 감당 못하겠지만 유럽도 미국도 이스라엘의 시도를 막고 있다. 황금 모스크는 성전 안에 세워졌는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바로 그 바위를 중심에 두고 세워졌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친 것은 독생자 예수의 십자가 희생을 의미한다. 매우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이 이곳에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마치 거룩한 신탁을 훼방하듯이 바로 그곳 중심에 황금사원이 세워진 것이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평화"의 핵심이다.

이것은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건으로 최근 9.11 사태를 계기로 이삭과 이스마엘 갈등의 지구적 팽창으로 나타났다. 고대 문제의 지구적 팽창이요 오랜 영적 전쟁의 메카니즘이 표출된 것이다. 유대인들이 성전 재건을 포기하겠는가. 세계 무슬림들이 황금사원을 포기하겠는가. 이것은 세계 최대의 딜레마이다. 누가 이 예루살렘 성전의 딜레마를 해결하겠는가. 지난 70년 수많은 정치인, 학자, 지성인들이 아이디어를 냈으나 다 작동하지 못하고 무위로 돌아갔다. 요즈음은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도 없다. 포기한 것이다. 머지않아 이 문제를 해결하는 자가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세계의 추앙을 받을 것이다. 그가 바로 거룩한 곳에 선 가증한 것, 적그리스도이다(마태복음 24:15). 최근 전개되는 중동 민주화는 바로 "예루살렘의 평화(Peace of Jerusalem)"을 위해 추진된 프로젝트이다. 짐승 적그리스도는 정치적 평화(Peace)만을 추구한다. 그러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는 샬롬(Shalom)을 원하신다. 적그리스도는 세계통합 제국을 추구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한 예루살렘, 즉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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