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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원 목사 세미나 "진정한 전도는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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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8-05-09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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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원 목사를 강사로 뉴욕만나교회(담임 정관호 목사)와 조나단에드워즈아카데미(대표 정부홍 목사)가 공동주최하고, 미동부 총신대 신대원 총동문회(회장 박성원 목사)가 후원한 부흥사경회와 목회자세미나가 뉴욕만나교회에서 열렸다.   

 

김의원 목사는 뉴욕중부교회(현 뉴욕센트럴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하다 한국으로 들어가 30년 반을 교수로 사역하며 총신대학교 총장을 역임했으며, 3년 전에 은퇴하고 미국 워싱톤DC에 다시 역이민을 온 후 전세계를 다니면서 신학교 교육을 돕고 있다.

 

[관련기사] 김의원 목사 부흥사경회 “하나님의 언약 - 창조언약과 구속언약”

http://usaamen.net/bbs/board.php?bo_table=data&wr_id=8224

 

5월 4일 금요일부터 주일까지는 부흥사경회가 열렸으며, 7일(월)에는 목회자 세미나가 열렸다. 이번 집회의 주제는 “하나님의 언약(창조언약과 구속언약)”으로 부흥사경회와 목회자 세미나가 같은 교재와 주제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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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세미나에서 보수신학을 가르친다는 총신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김의원 목사가 전한 메시지중 “신학이 번성할 때 교회는 어려웠다”라며 “나이가 들수록 신학보다 성경 자체를 가르쳐야 되는데 거꾸로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하는 말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2시간여 진행된 세미나의 여운이 남아 자리를 뜨지 않고 후진 목회자들과 대담도 함께 했다. 대담에서 김의원 목사는 성경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성경을 읽고 성경을 가르치는 방법을 전하기도 했다. 특히 총신신학교를 80-90년대에 나온 사람들은 교회라고 하면 건물 개념이 강하지만 오늘날 교회형태도 많이 변한다며 새로운 교회의 경향을 소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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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원 목사는 부흥사경회처럼 3가지 질문을 하고 세미나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답변은 아래 요약들에 들어가 있다.

 

“첫째, 믿지 아니한 농사꾼이 농사를 짓는 것이 죄인가 아닌가. 창조와 구속을 연결하는 중요한 질문이다. 둘째, 신학교에는 율법을 지켜야하는가 지키지 않아야 하는가? 율법은 폐기된 것인가?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이야기하는 중요한 질문이다. 셋째, 섬기는 교회인가? 우리들의 교회인가 저들을 위한 교회인가? 교회론의 핵심에 대한 이야기이다.”

 

 

성경을 연구하는 두 가지의 방법

 

성경연구의 방법에는 2가지가 있다. 통시적인 방법과 동시적인 방법이다. 첫째, 통시적인 방법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어떻게 발전되어 가는가를 시간과 역사 속에서 연구한다. 성경신학은 역사규범이다. 창세기와 계시록의 하나님이 동일하시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시는 부분은 차이가 있는 것이고 그리고 점진적 발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둘째, 동시적인 방법이다. 성경전체를 하나로 보는 것이다. 시간으로 구분하지 않는 논리적인 연구이다. 성경신학과 달리 조직신학은 성경전체를 하나로 본다.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논리규범이기에 성경에 한번만 이야기하면 규범화할 수 있는 부분이다.

 

성경신학은 역사와 더불어 연구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조직신학은 논리적인 부분이기에 역사적인 검토를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둘은 상호보완적이다. 성경신학을 가르치는 사람은 항상 조직신학을 알고 있어야 하고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둘 중 하나만 가지고 연구하면 논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성경 연구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말씀이 연결되는 동일성으로 본다. 마치 봄철에 씨앗이 심어지고 싹이 나고 줄기가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 단계단계마다 완전해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마치 씨앗이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처럼 말씀이 마지막 단계를 향하여 달려간다는 사실들을 기억해야 특별히 구약을 해석할 때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많은 목사들의 설교를 듣다보면 구약이 예화집으로 전락할 때가 많다. 구약은 예화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고 전체 성경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해석하면 좋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요절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요절을 한 절만 뽑으라면 많은 분들은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을 뽑는다. 신약의 메시지이다. 신구약 전체에서 뽑으라면 많은 학자들은 창세기 1:26-28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이 땅을 다스리라 명령하신 말씀이다. 소수사람들, 유대인과 세대주의자들은 출애굽기 19:4-6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거룩한 백성을 삼는 이야기를 가지고 나오려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먼저 거론된 것은 구속 이전에 창조라는 틀이 먼저 주어졌다.

 

 

교회는 XX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신 이유가 신명기 4:5-8에 나온다. 또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가 창세기 18:18-19에 나온다. 신약으로 오면 하나님이 왜 우리를 믿게 하시는 부르신 이유는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나온다.

 

신구약 전체 동일한 이야기로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부르시는 것은 결국 교회라는 것은 세상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끼리끼리 노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옆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나도 저들이 있는 교회 안에 들어가고 싶다. 나도 저들처럼 살고 싶다. 저들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하나님이 계시는 구나” 라는 이야기가 들려지는 - 쉬운 말로 하면 백화점의 쇼윈도우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이 땅에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천국 사무소를 세우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통해 천국 비자를 발행하게 하시는 것이다. 신구약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부르신 이유이다.

 

 

6일간의 삶이 XX가 되어야

 

노동의 의미를 재화의 의미로 바꾼 사람이 칼빈이다. 그래서 칼빈을 자본주의의 효시로 본다. 성경에 주어진 노동은 섬김과 축복이다. 창세기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에서 ‘경작’은 히브리어로 ‘아바드’라는 말이다. 영어로 말하면 서버 - 서번트 - 서비스로 발전한다. 서비스, 예배가 나온다. 모세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하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해 달라는 말은 예배보고 오겠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시고 살겠다는 것이다. 사사기 2:7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에서 ‘섬긴다’는 말도 아바드이고 72인 번역은 종이 주인을 섬기는 단어로 번역한다.

 

히브리 사람의 눈에는 장사를 하든지 농사를 하든지 예배를 드리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맡기신 일을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우리 삶 전체를 예배로 보는 것이다. 삶으로서 예배가 개혁주의적인 개념이다. 우리가 모이는 주일은 공적예배이다. 삶 자체 예배 속에 공적 예배가 있는 것이다. 삶의 예배에 대한 좋은 정의는 고린도전서 10:31에 나온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재미난 것은 성경에 공적예배를 정의한 구절은 없다. 그래서 일부 진보적인 사람은 기독교는 제의 종교가 아니라 삶의 종교이라고 하지만 잘못된 이야기이다. 서신서에는 예배드리라는 말이 강조가 안되고 삶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유는 공적인 예배는 진행되고 있는데 삶이 깨져있기에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가 주어진 것이지 공적예배를 뺀 것은 아니다. 잘 아는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에서 영적 예배라는 단어가 우리교회 11시 예배라고 해석안하고 삶 자체를 설명한 단어이다.

 

오히려 예배를 더 잘 설명한 것이 히브리서 12:27-13:16에 나온다. 사랑하고 대접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13:16에는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라고 하신다. 13:15에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는 부르는 찬송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고 도와주니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받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구나” 하는 찬송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말한다. 한국교회는 주일예배 모임을 매우 강조하지만 6일간의 삶의 부분이 약화된 것을 인식해야 한다.

 

제가 어렸을 때, 한국 초대교회 때는 지금과 달랐다. 무엇을 빌려달라고 하면 교회 다니느냐 물어보았다. 교회에 다니면 빌려주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안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 초대교회 때와 똑같은 일이 오늘날 중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중국에서 교회를 다니면 양심적이고 믿을만 하다고 생각하니 물건을 사준다. 그런 일이 한국교회에서도 다시 한 번 일어나야 한다. 화려한 예배를 드릴 때 불신자들이 교회에 찾아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삶으로 아름다운 예배를 드릴 때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날 때 예수를 찾아온다. 교인들이 옆에 있는 안 믿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진정한 기독교인의 전도는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빛이 되라고 한 적이 없다. 이미 빛이라고 선포되어 있다. 소금이라고 했지 소금이 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되어져 있는 것이다. 이미 세상으로부터 구분되어진 하나님의 선물들이다.

 

 

믿지 아니하는 농사꾼이 농사를 짓는 것이 죄인가 아닌가?

 

타락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다. 방향성을 상실한 것이다. 타락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로마서 1장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피창조된 존재이기에 뭔가 의존해야 한다. 우상이나 명예나 돈을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과 만물과의 관계를 바꾸지 않았다. 다음에 주님으로 오심으로 인해 큰 변화가 생긴다. 인간은 그대로인데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꾸어진다. 방향성이 회복된다. 제가 자주 쓰는 예화중 하나가 개미이다. 개미가 먹이를 물고 집에 가는데 안테나를 떼어도 개미가 금세 죽지 않는다. 먹이를 버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걸어 가는데 안테나가 없어 집에는 못 간다. 지금 많은 인간들의 모습은 안테나를 잃어버린 모습이다.

 

아까 믿지 않는 농사꾼이 농사짓는 것이 죄인가 아닌가를 물었는데, 농사를 묻는 것이 아니라 농사를 짓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안테나가 있는가를 물은 것이다. 안테나가 없으면 농사를 짓는 이유를 모른다. 삶을 사는 이유를 모른다. 자기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배부르면 인간이 행복한 것처럼 생각한다. 성경은 안테나가 회복되어지면 농사짓는 의미를 발견한다고 말한다. 비니지스를 하는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왜 하나님이 자신에게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주셨는지 알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삶의 의미를 찾아 나가는 것이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창조가치는 가지고 있다. 하지만 믿는 사람은 창조가치만 아니라 구속가치도 말한다. 

 

 

‘미니스트리’를 목회가 아니라 'XX'으로 번역해야

 

평신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목사 5천명이 하는 것 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평신도가 자기 삶의 거처에서 주님을 높이는 것이 아름다운 부분이다. 우리는 교회 내에서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리고 종종 하나님의 영광을 말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린다고 이야기를 한다. 자신이 영광을 만들어 하나님께 영광을 바치는 것인가? 가장 좋은 해석은 거울이다. 거울로 반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우리의 삶속에서 말과 행위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냈더니 사람들이 거울 속에 비친 주님을 보고 “정말 주님이 계신가 보다. 저 사람을 보니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그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목사가 주일에 성도들을 가르치고 6일 동안 세상에 파송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교인 모두가 선교사이고 사명자이다. 저는 ‘미니스트리’를 ‘목회’로 번역하지 말고 ‘사역’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말한다. 목회로 번역하다보니 목사님만 이야기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은 교회당 안에서만 주어지는 것 같아서 적절하지 않다. 주일은 모였기에 주일학교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여러 가지 부서사역도 하지만, 나머지 6일은 하나님의 선물을 주어진 자기 삶속에서 주님을 드러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 목회자의 직분으로 보아야 한다.

 

 

구세주라는 고백과 더불어 XX이시라는 고백이 있어야

 

종종 교회에서 십일조 이야기를 할 때 말라기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 것을 도둑질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십의 일조가 아니라 십의 십조이다. 로마서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십의 구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 10개가 내 것인데 1개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 아니라, 10개가 다 하나님의 것인데 나에게 9개를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더 적절한 해석이다. 어머니가 사과를 냉장고에 넣어두시고 동생들과 나누어 먹으라고 하셨다면 냉장고 속 사과는 어머니 것이다. 우리들을 위해 나누어 주신 것이다. 그것이 로마서 가르침이다.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신 것이다. 정말 ‘주님’에 주어진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할 때 구세주라는 고백은 반절밖에 안된다. 사도행전에는 구세주는 2번밖에 안 쓰였다. 30번 넘게 사용한 것은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세주이시다. 그 순서가 바뀌면 안된다. 한국교회는 구세주라는 말은 강조하는데 주인이라는 말은 강조하지 못한다.

 

제자들이 중국에서 학교들을 많이 만들고 지하 사역을 많이 한다. 그들중 자매 한분이 30-40개를 교회를 개척했다. 동기들이 모여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물으니, 자매가 가르치는 과정중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가르치고, 마지막에 “십자가를 너도 졌느냐?”는 질문을 한다. “예”라고 하면 다음 질문이 이어진다. “예수님이 너의 삶의 주인이시냐?”고 묻는다. 그러면 얼른 답을 못한다. 중국 사람은 돈이 힘이다. 자신이 가진 모든 물질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예수님 것이냐, 예수님이 삶의 주인이시냐고 묻는 것이다.

 

빠른 사람은 한 달, 늦는 사람은 6개월 뒤쯤이면 주인이시라고 고백하는데 그때야 세례를 준다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세례를 안준다. 그렇게 주님이 주인이시라고 고백된 사람이 주님이 내게 주신 은총을 알고 교회를 개척하다보니 수십개의 교회들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세례를 너무 쉽게 준다, 세례는 주인을 바꾸는 예식이다. 사단의 종 된 우리가 이제 사단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완전한 삶의 변혁이 주어지는 엄청난 일들인데 단지 물로만 하다 보니 생기는 문제부분이 있다.

 

세례의 의미를 중국에 가서 많이 깨달았다. 물이 귀한 서북지역에 가서 지하교회 세례를 참관했다. 물이 없는데 새벽미명에 동네 사이로 흐르는 도랑에서 세례식을 하는데 밤새 물이 가라앉아 깨끗해 보일 뿐이다. 20대 청년이 물에 들어가고 집례자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고 선포했다. 그런데 청년이 일어나서 뒤를 만져보고 덜 죽었다고 다시 물속에 들어갔다. 우습기도 하지만 진짜 세례이다. 세례를 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원리는 동일하다. 내 옛사람이, 내 옛 가치관이 죽었다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새 가치관으로 새 비전과 미래를 가지고 산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음에는 공동체에 들어왔다는 표시로 세례를 베풀고 강단에 올라가 세례교인임을 선포한다. 미국의 큰 침례교회 예배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마침 침례를 주는데 “아이 킬 유”라고 물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살려낸다고 꺼집어냈다. 한국에서 너를 죽인다고 하면 노회에 불려간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너를 죽이고 내가 다시 살린다”라는 정확한 신학적인 의미가 주어지면 기독교는 바뀐다. 우리 한국교회는 그런 부분이 약하다.

 

 

율법의 이야기를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XXX가 크게 드러나

 

은혜를 받은 자가 어떻게 살 것인가 주어진 것이 율법이다. 율법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은혜 받은 자에게 주어진 삶의 지침서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가르치시는 것은 내가 율법을 지켰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려고 할수록 지킬 수 없다는 고백을 가르쳐 주신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세상의 틀 속에 들어가지 말고 날마다 예수님의 틀 속에 들어가라는 것이다. 많은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Doing의 행위목록으로 만들었다. 진정한 적용은 Doing이 아니라 Being의 이야기이다. 많은 분들이 Doing을 이야기하다 보니 문제가 생긴다. 항상 옆의 사람과 비교한다. 나는 성경을 3번 읽었는데, 나는 예배에 참가했는데 하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 전부 Doing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보니 자기는 잘 믿고 다른 사람은 덜 믿는다고 생각한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Doing이 아니라 Being이다.

 

날마다 100%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주님께 붙잡혀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율법이다. 율법에서 하지 말라는 말은 쉽게 보인다. 안하면 된다. 그런데 하라는 것, 긍정적인 것은 어렵다. 얼마만큼 해야 하는가? 부모를 얼마만큼 공경해야 하는지, 이웃을 얼마만큼 사랑해야 하는지 제한이 없다. 부정적인 것도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하기에 사람들은 칼로 안 죽이면 되는 것으로 아는데 미워하는 것, 욕하는 것도 살인 계명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율법에 벗어날 자가 없다. 율법을 지기면 지킬수록 “나는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주님의 공로가 아니었다면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비교하기를 좋아하니 비교대상을 주셨다. 산상수훈을 보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다. 하나님과 비교 앞에 넘어설 자가 없다. 신학교 교수, 목사들이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 자신은 “오호라 저는 죄인입니다” 한마디이다. 주님의 공로가 아니었다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내가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주님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의 고백이다. 날마다 넘어지고 율법을 지키기 못하는 그 속에 은혜가 있고 감동이 있는 것이다. 내가 이만큼 했으나 너도 이만큼 하라는 것이 아니다. 좋은 가르침은 모델링이다. 많이 알아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모델을 통해 모범을 통해 그 사람을 따라오게 하는 것이다. 계명의 이야기를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주님의 십자가가 크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 건축도 한때 하나님이 XX하시던 방법

 

모세 언약의 두 번째 약속은 예배처소이다. 한국교회가 80~90년대 하나님의 은총으로 건물을 짓는 기독교 역사속 유례없는 엄청난 일을 벌렸다. 그렇기에 건물을 비난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이었다. 문제는 21세기로 넘어오면서 미국도 교회를 못짓는다. 돈이 없다. 한국도 젊은 친구들이 문화비용이 크지 헌금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다보니 교회형태가 바뀌어진다. 한동안은 하나님께서 건물 교회를 사용하신 것은 사실이다. 절대로 건물 교회에 대한 잘못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적절한 신학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인데 이 시대에 잘 안 맞는 부분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교회에 대해 박수를 쳐주고 이제는 변화 속에서 새로운 형태 이야기를 꺼집어 낼 때이다. 전체에서 주어진 먼저 것을 인정하고 들어갈 필요가 있다.

 

 

율법도 XX이다. 성경은 율법의 폐기를 말하지 않는다.

 

율법도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지침을 주셨는데 지킬 수 없는 부분이 율법이다. 마지막에 지킬 수 없음을 고백하고 주님의 은혜로 용서받는다. 우리말로는 제사를 드린다고 번역한다. 히브리어는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오시게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체가 되신다. 우리가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가 되셔서 우리를 가까이 오도록 당신의 방법대로 하면 용서하겠다는 약속을 성취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이다. 이미 옛사람은 사라졌다. 우리가 육체의 몸은 부활의 몸을 입지 않기에 자주 넘어지지만 마지막 승리부분은 예수님이 이미 하셨다. 이미 예수님이 승리하신 출발점에서 연습하는 것이다.

 

다른 축복은 완전 속죄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완전 속죄되었다.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많은 교인들은 목회자를 중보적인 개념으로 많이 이해하려 하는데 목회자만 중보자가 아니라 모두 중보자이다. 목사는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좋은 구절은 에베소서 4:11~12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이다. ‘온전’은 의학 용어인데 팔이 빠지면 역할을 못한다. 목사는 빠진 팔을 제 위치에 넣어주면 이제 팔이 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교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가 된 그분 지체 속에 넣어주는 작업이 목사의 사역이고 모델링이다.

 

교인들의 기도내용을 듣다보면 완전속죄가 아니다. 잘못해서 감옥에 들어가 나오려면 가석방이 있고 완전석방이 있다. 여러분은 어떤 석방자인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단숨에 석방되었다. 우리의 속죄는 단번에 이루어진 주님의 큰 은혜이다. 이미 옛사람은 사라졌다. 우리에게 거룩하라 하셨지만 육신의 몸을 담고 있다 보니 자주 넘어진다. 그러나 일으켜 세우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잘못되면 회개케 하신다. 내가 하는 부분도 있지만 성령님께서 강압케 하시는 부분도 많다. 우리들은 성령님이 아니고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을 못한다. 일단 고백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주시는데 성숙치 못해 고슴도치가 많다. 그렇지만 성령님이 간섭하심으로 성화의 단계에 올라가도록 우리를 사용해주신다. 이미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부분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미 내 옛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성화이야기를 꺼집어 낼 수 있다. 

 

성경은 율법의 폐기를 말하지 않는다. 지금도 율법은 존속되지만 구약이나 신약이나 율법으로 이루어갈 자는 없다는 것이다. 많은 분들은 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동양적인 개념으로 행위적인 개념으로 다가와 있다.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한다. 성경에서 죄와 의의 개념은 관계적인 개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테나가 없으면 어떤 행위도 죄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메이저리그 투수가 던지는 1백마일 빠르기의 공을 치려고 하면 우리들은 1천개중 실수로 1-2개 안타칠 수 있다. 그런데 타율이 3할이면 대단하다. 1000개중 300개 안타를 친다는 것이다. 3백개 안타를 때리는 사람은 1백개 안타를 때리는 사람보고 그것밖에 못하냐고 말한다. 그것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죄이다. 300개 안타를 때려도 주님이 보시는 것은 못친 700개이다. 설령 999개를 치고 하나를 못쳐도 우리에게는 대단한 사람이지만 주님 보시기에 야고보서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말씀하신다. 결국 죄의 부분에 있어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다. 주님이 다 하신다는 고백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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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원 목사와 후진과의 대담

 

1.

 

90년대 아틀란타에 안식년 왔을때 미국장로교 목사들이 부탁하여 연장교육으로 1주일내내 성경을 가르친 적이 있다. 그분들은 자신들이 신학은 배웠지만 성경을 그렇게 많이 안 배웠다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신학보다 성경 자체를 가르쳐야 되는데 거꾸로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서 목사를 잘 훈련하는 몇 개 신학교가 있다. 어느 신학교는 입학하고 성경 200독을 안하면 신학을 안가르치는 학교가 있다. 중국에 있는 어느 탈북자 신학교는 1만절을 외워야 신학을 가르친다. 김인환 목사가 그곳에 갔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하니 신학교 책임을 맡은 분이 무작위로 학생을 선택하여 무작위로 성경을 몇장 몇절을 외워 보라고 하니 다 외우는 것을 보고 놀라 열심히 탈북자 신학교육을 시키러 중국에 다닌 적도 있었다.

 

성경을 외우기 전에 저는 헬라어와 히브리어 그리고 고대 언어들도 공부했다. 언어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모르는 것이다. 성경을 몰라서 큰 학자가 못 된다는 생각을 했다. 한글 성경을 먼저 많이 읽으라. 다음에 히브리 성경을 읽으라. 그리고 외우라. 유대인들은 성경을 외우려고 외운 것이 아니다. 3살부터 유대인들이 말하는 기도를 하는데 우리들처럼 마음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시편을 읽는 것이 기도이다. 유대인들은 초등학교때 벌써 시편을 다 외운다. 지금도 안 늦었다고 본다. 성경을 읽는 영업 비밀을 소개한다. 유대인들의 방법이다. 성경 1절을 외우고 2절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1절을 다시 외우고 2절을 외운다. 1절, 1,2절, 1,2,3절, 1,2,3,4절 이렇게 외운다. 성경의 장도 1장 읽고 2장을 읽는 것이 아니라 1장, 1,2장, 1,2,3장, 1,2,3,4장 그렇게 읽는다. 그렇게 하다보면 요한복음을 다 읽으면 1장을 21번 읽게 된다. 그렇게 읽고 나면 눈을 감으면 성경 스토리가 쭉 흘러간다.

 

다른 방법을 소개한다. (쉽지 않는 방법이다.) 존 로스가 쓴 창세기에 대한 좋은 책이 있다. (보통 책의 5분의 1 두께) 이것 하나를 놓고 그대로 타이핑을 친다. 토씨도 하나 안 빼고 친다. 타이핑을 하면 눈으로 보고 글로 쓰니 2-3번 머리에 그려진다. 그리고 책을 덮고 컴퓨터로 친 것을 프린트해서 놓고 내 말로 바꾸는 것이다. 바꾸고 또 바꾼다. 3-4번 정도 바꾼후 5번째쯤 바꿀 시기에 교인들과 성경공부를 한다. 교인들이 이해 못하는 부분은 빼고 질문이 나오면 추가한다. 신뢰있는 저자가 쓴 틀을 기반으로 하기에 중요한 것은 창세기 주석의 틀은 안 바뀌고 적용이 많아진다. 2기 교육을 할 때 또 바꾸고, 3기 교육을 할 때 또 내용을 바꾼다. 5기생 교육을 할 때쯤 되면 교재로 묶는다. 성도들은 자기가 배운 내용과 다르기에 우리 목사님이 계속 연구한다고 생각한다.

 

2.

 

(김의원 목사와 대담에서 후진 목사들은 목회의 어려움과 목회 외에 다른 복음 전파사역에 대해 나누었다. 참가자중 일부 목사는 교회 목회를 그만두고 복음 전도자 사역을 하고 있다.)   

 

목회현장이 빠르게 변한다. 교회형태도 많이 변한다. 총신신학교를 80-90년대에 나온 사람들은 교회라고 하면 건물 개념이 너무 강하다 보니 오늘날 이러한 교회의 경향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건물이 있어야만 교회가 된다고 생각한다. 21세기 이후로는 그런 개념이 약화되었다.

 

이제는 사례받기가 힘들기에 목사도 이중 직업을 가져야 하는 실정이다. 지덕 목사에게 대리 운전을 하면서 손님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목사 이야기를 듣고 도전을 받았다. 그 목사는 대리운전을 하며 술에 취한 손님을 업고 안방에 까지 들어가 전도했다. 그러다 보니 60개의 안방에 들어가 계속 복음을 전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고 교회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했다. 교회라는 개념을 연구해야 한다. 지금은 교회개념이 바뀌어졌다. 직장이 교회이다. 구원론은 이미 잘 아니 지금은 교회론과 인간론을 연구해야 할 때이다. 교회형태가 빨리 바뀐다. <오가닉 처치>에서 닐 콜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옥토를 설명하며, 술집에서 마약하는 사람들이 예수가 필요하지만 많은 교회들이 넥타이 중산층을 바라보는데 그들은 하나님 없이도 산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라고 하셨다. 교회를 세우는 주체가 예수님이시다. 많은 목사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교회를 세우는 것으로 안다. 아니다. 예수님이 나를 통해 교회를 세우시는 것이다. 한국의 어떤 목사는 식당에서 혼자 밥 먹는 사람을 자주 만나 전도를 한다. 한두 명 전도해서 서너 명이 되면 그룹으로 묶어 성경공부를 시킨다. 그룹이 늘어나고 공원에서 바베큐를 하면서 서로 만난다. 그러자 사람들이 앞장서 교회를 하나 세우자고 해서 자기들이 나서 김포에다 지하방을 얻어 교회를 세우고 전도를 했다. 그 목사가 하는 말이 안디옥교회를 보면 교회는 목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세우고 목사가 불려간 것이락 했다.

 

교회개념을 바꾸어야 한다. 지금은 가정교회, 영국은 가든 처치, 아프리카는 스트릿 처치가 일어난다. 무슬림 속에서 어마어마한 운동들이 일어난다. 평신도 리더들을 키워야 한다. 교회를 건물이라는 개념을 깨트리기 어렵지만 깨트리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 갇히면 못 본다. 많은 기성교회는 구역이나 목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괜찮은 방법이다. 앞서가는 교회는 부목사를 안세우고 평신도 지도자를 세운다. 부목사를 세우면 숫자는 늘어날지 몰라도 교인들이 힘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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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나그네님의 댓글

나그네 ()

성경공부님 같은 분들이 뉴욕지역에 계시다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말씀에 목말라하는 자들이 구원받은 백성인 것이지요. 기근이 창궐하지만 기근으로 여기지 못하고 씨를뿌리는 자가 없는데 씨 뿌리는 자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혼란의 시대에 삽니다.

영적기근으로 배고픔을 깨달아 말씀으로 충만하길 간절히 소망하는 분들이 있으니, 이민사회는 소망이 있는 것이겠죠. 요즘 교회마다 그나마 진행하는 성경공부는 안타깝게도 교회성장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경향이 짙어갑니다. 말씀의 진수, 말씀의 엑기스를 경험해야 하는 모든 분들이 성장의 도구가 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모두가 말씀 안에서 힘내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요나님의 댓글

요나 ()

귀한 말씀에 은혜받고 감사드립니다.

성경공부 않하는교회도 문제이거니와 이상한 성경공부로 고심하고 있습니다. 예컨데 기도를 주문외우듯 하는 방법도있고 기도할때 손바닥을 위로 손바닥을 아래로 하기도 하며 홀로서기라나 침묵훈련이라나  사람들과 말도 않하기도하고.. 예배에 황홀경이라든지 예언을 한다든지 ..저자는 거룩한웃음도 사모하는듯...세상책을 많이 읽고 중국의 노자의책도 읽기를 권하기도하며 예문을 외경에서,교황의 말 또는 신사도의 피터 와그너의 글을 인용 한다던지...아무튼 이해되지않고 받아드리기 힘든 성경과 다른 내용들을 인하여 고심하며 혼란을 격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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