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말리아 유일의 한국 선교사는 여성 조성득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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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ㆍ2013-11-10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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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MC(기독교 한인세계선교협의회) 26차 전국 년차총회가 11월 4일(월)부터 3일간 일정으로 프라미스교회에서 열렸습니다. 여러 선교사들의 선교도전이 진행됐는데, 특히 3명의 여성 선교사들의 도전이 말그대로 도전적이었습니다.
특히 첫 간증을 한 조성득 소말리아 선교사는 작은 거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작은 체구와 까맣게 탄 얼굴 자체가 하나의 간증이었습니다. 소말리아는 한국에서 여행금지국가로 정했을 정도로 위험한 지역입니다. 그런 곳에서 한국 선교사가 그것도 여성 선교사가 사역을 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공개된 기독교인이 50명에 불과한 나라에서 유일한 한국인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는 조성득 선교사의 간증은 큰 도전으로 남았고 폐회예배에서 기도한 남궁전 목사는 찬시로 조 선교사의 사역을 축복했습니다. 이어 탄자니아 10년째 사역하고 있는 이경희 선교사의 도전이 이어졌습니다. 다음은 도전 내용입니다.
▲선교도전 조성득 소말리아 선교사
소말리아 조성득 선교사
사람들은 1990년 전쟁이 일어나 유엔군이 활동할 때의 소말리아를 기억한다. 지금은 조용하니까 괜찮구나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소말리아는 지금도 전쟁 중인 나라이다. 아침이면 정부군이 지배를 하고, 저녁이 되면 알샤바브라가 지배하는 나라이다. 그들의 보복이 두려워서 신고 할 수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면적은 우리나라 보다 2.5배가 크지만 거의 100%가 무슬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인구가 9백만, 내란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빠져 나갔지만 그들중 기독교인은 50명에 불과하다. 그 기독교 인들 조차 떨어져 있어 교류가 어렵다. 기독교 인들 마저 서로 경계하기 일쑤다.
1990년 말에 케냐에서 소말리아로 들어갔는데 이틀 뒤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다음해 3월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적십자의 구호 물품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유니세프에서 사람을 찾았고 그것이 기회가 되어 소말리아에 들어가게 되었다.
소말리아의 북쪽은 그나마 좀 안전한 곳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신분을 숨기고 봉사를 하다 우연한 인터뷰 기사로 인해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목숨을 위협하는 협박을 당하기도 하고, 구호품들을 도난 당하고 말할 수 없는 위협이 있었다.
이곳에 복음이 전해 질 수 있을지 수없는 좌절에 힘들었다. 아이들이 눈이 멀어가고 눈 수술을 하기 위해 케냐 나이로비에서 의사를 찾아 나섰다. 아무도 소말리아에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눈 수술이 어려우면 점자를 가르쳐서 독립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생각에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아이들이 동네의 자랑거리가 될 정도로 교육이 진행 될 무렵, 순조로움도 잠시 2008년에 우간다 선교사가 피살 되는 바람에 다시 케냐로 철수하게 되었다. 지금 소말리아는 한국 사람이 들어갈 수 없게 되어있다. 그곳에는 그들의 눈물만이라도 같이 닦아 줄 사람이 필요한데 말이다.
그리고 지금은 소말리아 아이들을 지부티로 데려와서 교육을 시키고 있다. 지부티는 안정되고 위험한 지역이 아니었다. 여름에 너무 더워 힘들지만 여름엔 케냐 나이로비에 나가 있기도 한다. 하지만 선교사가 없다. 누구도 이곳으로 오려 하지 않는다. 유니세프에서도 사람을 찾지만 오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다.
지금 교육하고 있는 아이들은 빠른 흡수력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 아이들이 소말리아로 돌아가서 이 아이들을 통해 전해질 예수님을 생각하면 기대가 크다. 소말리아 선교에 관심을 보여주길 간절히 소원한다. 비교적 지원이 풍족한 곳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열정과 기술력을 합해서 소말리아의 변화를 꿈꿔주길 부탁한다.
▲선교도전 이경희 탄자니아 선교사
탄자니아 이경희 선교사
탄자니아에서 10년 째 먀샬 부족을 위해 사역하고 있다. 10년의 세월은 다른 선배 선교사에 비해 짧다는 것을 안다.
처음 탄자니아에 들어갔을 때 가능할까 의심되던 땅에 학교와 병원을 짓겠다고 선배 선교사가 말했다. 일년 후에 그 의심이 사실로 이루어 졌지만 내겐 뭔가 석연치 않은 게 늘 존재 했다. 재정적인 어려움도 한몫을 했고, 그 이유가 아니어도 그 비전에 대한 의심이 날 힘들게 한 것 같았다. 건축이 완성된 상태에서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을 지어 가면서 교육을 하고 있었다. 그 건물이 다 완성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 기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크리스찬도 도둑질을 하는 이 탄자니아에서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실현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나의 새로운 비전이 되었다. 여기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탄자니아 곳곳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실현하게 된다면 탄자니아는 어떻게 변화 될 것인가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는 일이기도 하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특히 첫 간증을 한 조성득 소말리아 선교사는 작은 거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작은 체구와 까맣게 탄 얼굴 자체가 하나의 간증이었습니다. 소말리아는 한국에서 여행금지국가로 정했을 정도로 위험한 지역입니다. 그런 곳에서 한국 선교사가 그것도 여성 선교사가 사역을 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공개된 기독교인이 50명에 불과한 나라에서 유일한 한국인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는 조성득 선교사의 간증은 큰 도전으로 남았고 폐회예배에서 기도한 남궁전 목사는 찬시로 조 선교사의 사역을 축복했습니다. 이어 탄자니아 10년째 사역하고 있는 이경희 선교사의 도전이 이어졌습니다. 다음은 도전 내용입니다.
▲선교도전 조성득 소말리아 선교사
소말리아 조성득 선교사
사람들은 1990년 전쟁이 일어나 유엔군이 활동할 때의 소말리아를 기억한다. 지금은 조용하니까 괜찮구나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소말리아는 지금도 전쟁 중인 나라이다. 아침이면 정부군이 지배를 하고, 저녁이 되면 알샤바브라가 지배하는 나라이다. 그들의 보복이 두려워서 신고 할 수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면적은 우리나라 보다 2.5배가 크지만 거의 100%가 무슬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인구가 9백만, 내란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빠져 나갔지만 그들중 기독교인은 50명에 불과하다. 그 기독교 인들 조차 떨어져 있어 교류가 어렵다. 기독교 인들 마저 서로 경계하기 일쑤다.
1990년 말에 케냐에서 소말리아로 들어갔는데 이틀 뒤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다음해 3월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적십자의 구호 물품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유니세프에서 사람을 찾았고 그것이 기회가 되어 소말리아에 들어가게 되었다.
소말리아의 북쪽은 그나마 좀 안전한 곳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신분을 숨기고 봉사를 하다 우연한 인터뷰 기사로 인해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목숨을 위협하는 협박을 당하기도 하고, 구호품들을 도난 당하고 말할 수 없는 위협이 있었다.
이곳에 복음이 전해 질 수 있을지 수없는 좌절에 힘들었다. 아이들이 눈이 멀어가고 눈 수술을 하기 위해 케냐 나이로비에서 의사를 찾아 나섰다. 아무도 소말리아에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눈 수술이 어려우면 점자를 가르쳐서 독립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생각에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아이들이 동네의 자랑거리가 될 정도로 교육이 진행 될 무렵, 순조로움도 잠시 2008년에 우간다 선교사가 피살 되는 바람에 다시 케냐로 철수하게 되었다. 지금 소말리아는 한국 사람이 들어갈 수 없게 되어있다. 그곳에는 그들의 눈물만이라도 같이 닦아 줄 사람이 필요한데 말이다.
그리고 지금은 소말리아 아이들을 지부티로 데려와서 교육을 시키고 있다. 지부티는 안정되고 위험한 지역이 아니었다. 여름에 너무 더워 힘들지만 여름엔 케냐 나이로비에 나가 있기도 한다. 하지만 선교사가 없다. 누구도 이곳으로 오려 하지 않는다. 유니세프에서도 사람을 찾지만 오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다.
지금 교육하고 있는 아이들은 빠른 흡수력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 아이들이 소말리아로 돌아가서 이 아이들을 통해 전해질 예수님을 생각하면 기대가 크다. 소말리아 선교에 관심을 보여주길 간절히 소원한다. 비교적 지원이 풍족한 곳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열정과 기술력을 합해서 소말리아의 변화를 꿈꿔주길 부탁한다.
▲선교도전 이경희 탄자니아 선교사
탄자니아 이경희 선교사
탄자니아에서 10년 째 먀샬 부족을 위해 사역하고 있다. 10년의 세월은 다른 선배 선교사에 비해 짧다는 것을 안다.
처음 탄자니아에 들어갔을 때 가능할까 의심되던 땅에 학교와 병원을 짓겠다고 선배 선교사가 말했다. 일년 후에 그 의심이 사실로 이루어 졌지만 내겐 뭔가 석연치 않은 게 늘 존재 했다. 재정적인 어려움도 한몫을 했고, 그 이유가 아니어도 그 비전에 대한 의심이 날 힘들게 한 것 같았다. 건축이 완성된 상태에서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을 지어 가면서 교육을 하고 있었다. 그 건물이 다 완성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 기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크리스찬도 도둑질을 하는 이 탄자니아에서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실현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나의 새로운 비전이 되었다. 여기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탄자니아 곳곳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실현하게 된다면 탄자니아는 어떻게 변화 될 것인가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는 일이기도 하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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