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신학세미나 “양 극단을 피하고 터부시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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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8-11-07 07:1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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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미스교회(허연행 목사) 이스라엘 신학세미나를 “이스라엘 역사, 그리고 교회의 사명”이라는 주제로 10월 30일(목) 열었다.
강사는 이스라엘과 한국에서 온 유대인과 이방인(한국인) 전문가이다. 메시아닉 주로 15년전 이스라엘에 성경대학을 세운 에레즈 쪼레프 총장(One for Israel)과 이스라엘 전문가 권혁승 교수(전 서울신대 부총장)이다. 두 강사는 오전과 오후 각 2번의 강의를 인도했다. 아멘넷은 몇 차례에 걸쳐 세미나의 내용을 소개한다.
1.
허연행 목사는 세미나를 시작하며 “프라미스교회는 지난 30여년 동안 거의 매년 특별한 사정을 빼놓고는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있다. 이번 세미나의 주제는 이스라엘과 교회이다. 이 주제만큼 목회자나 신학생들에게 큰 산은 없는 것 같다”고 말을 시작했다.
더 구체적으로 강의 책자에는 김남수 목사의 허연행 목사의 이름으로 “‘에레츠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매우 다양하다. 물론 그 다양함 속에는 역사와 신학적으로 균형잡힌 시각도 있지만, 백투예루살렘 운동으로 대표되는 세대주의적인 종말론과 ‘구약의 이스라엘이 신약의 교회로 대체되었다’는 대체신학 같은 양 극단에 치우친 입장도 있다. 여러 이단단체들이 이스라엘 문제와 종말론을 가지고 거룩한 땅을 오염시켜 이제는 복음의 소중한 부분인 이스라엘이라는 주제를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은연중 터부시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허연행 목사는 세미나에서 “모든 분들이 다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이해가 저마다 다른 것 같다. 그리고 그 이해마저도 성경적 신학적인 근거가 부실함을 저 자신부터 느끼고 있다. 부족함을 절감하는 이때에 전문가가 와서 이 문제를 잘 정리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세미나를 통해 희미한 분야들이 좀 더 명확해지며, 양 극단을 피하고 이단사설로부터 맡겨주신 양무리를 잘 보호하고 바른 진리로 인도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인사했다.
허연행 목사는 에레즈 쪼레프 총장을 소개하며 “전통적인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20대 초반까지 예수님에 대해 듣지 못했으나, 유럽여행 중에 전도를 받고 성령님이 마음을 여셔서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났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아내도 메시아닉 주로 5대째 믿음의 가정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세계에서 단 하나있는 특징은 유대인 혹은 아랍인 중에 예수님을 만난 2백 여명의 학생들이 한 캠퍼스 안에서 모여 히브리어로 공부하고 있는 대학이다. 젊은 사람들을 잘 가르치고 미디어를 통해 법적인 제약을 피해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며 현대판 사도 바울 같다고 소개했다.
에레즈 쪼레프 총장 구약과 신약에서 본 교회와 이스라엘의 상관관계, 현재 이스라엘과 유대인 사이에 일어나는 영적 부흥 등을 나누었다. 통역은 이스라엘에서 공부하고 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골든콘웰신학교 보스턴 캠퍼스 박성현 구약학 교수가 담당했다. 다음은 첫 강의내용이다.
2.
제가 지금까지 지내온 영적 여정을 살펴보면, 유대인들 가운데 저와 같은 경험이 많지 않겠지만 점점 많아 질 것이다. 지난 15년간 이스라엘 성경대학, 지금은 “원 포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을 바꾼 학교에서 총장으로 있다. 이 학교는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이 함께 힘을 합해서 그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믿는 믿음의 본질을 나누고자 설립됐다. 성경대학이기에 여러 컨퍼런스를 통해 신학분야 전문가들과 자주 접한다. 그런 만남을 통해 느끼게 된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한다.
먼저 복음주의교회가 이스라엘에 대한 특히 이스라엘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많이 아는 바가 없고, 그래서 이스라엘을 상대로 사역한다고 할 때 준비가 되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적인 이유를 들자면 지난 많은 세월동안 교회 특히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가지고 계신 계획은 이제 끝났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다.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몇 개월 전에 대만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참여했다. 강사중 한 분이 미국태생의 대만계였다. 그분의 전공은 선교학인데 특히 중국선교에 대한 선교이다. 선교학을 전공한 분들의 주된 관심사는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대사명을 어떻게 할당받은 구역에서 잘 감당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러 세션 중에 그분이 나누었던 내용 중에 관심을 끈 부분이 있었다.
1910년 스코틀랜드 에딘버르에서 선교대회가 열렸다. 그때 세계의 기라성 같은 선교학자들이 모여서 예수님의 지상대명령의 현주소를 나누었다. 그로부터 100년 후인 2010년 동경에서 세계선교 석학들이 모여 동일한 주제로 컨퍼런스가 열렸다. 2010년 컨퍼런스의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910년 당시에는 세계인구의 90%에 해당하는 인구들이 아직 복음을 듣지 못했다. 1백년이 지난 2010년에는 세계 인구의 25%만이 아직도 토착화된 교회를 가지지 못한 상태이다. 20세기 단 한세기 동안 복음을 접했던 수자가 지난 2천년동안 복음을 들었던 사람의 수를 넘는다. 다시 말해, 주후 1900여년 동안 걸쳐서 우리가 접근했던 선교대상이 세계인구의 10%에 불과했는데, 1백년 동안에는 65%에 해당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었다.
그것을 듣고 강사에게 이런 컨퍼런스에서 얼마나 자주 유대인 선교에 대해 거론이 되는지를 물었다. 그는 죄송하지만 중국은 10억 인구가 넘는데 전세계 1,300만에 불과한 소수민족 유대인에게 어떻게 관심을 집중할 수 있겠냐고 대답했다. 그래서 로마서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물었다. 처음에는 복음에 대한 정의가 나오고, 후반에는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전략에 대해 나온다. 그 전략은 우선 유대인에게 그 다음에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안타깝게도 그분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숫자적으로 보면 유대인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들에게 질문한다. 역사의 어느 시대보다 오늘날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고 접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에게 던지는 질문은 바로 이러한 사실이 예수그리스도의 대사명, 그리고 다시 오시게 될 예수그리스도와 얼마나 상관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유대인 가운데 지금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이 예수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연관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좀 더 개인적인 차원으로 접근하면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그리고 제자로서 살아가는데 있어 이러한 대강령이 여러분들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질문을 받을 때 답을 또 다른 질문으로 하는 습관이 있다. 답에 해당되는 질문을 드린다. 구약은 여러 군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때를 알라고 하신다. 쉽게 말하면 때를 알라고 하는 것은 지금 시간이 몇시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어느 단계에 처해 있는가 물으시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때에 대해 특별히 다루고 있는 성경부분이 있다면 예언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언서는 자주 공부하지 않는 것으로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때를 알라는 질문을 받고 있다. 하나님의 때를 진단할 때 중요한 척도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깨닫는 것이다.
3.
이제 유대민족과 교회의 상관관계에 대해 나누고자 한다. 먼저 구약에서 출발해서 이 부분을 다루고자 한다. 스가랴서 4장 말씀에서 보도록 하겠다.
스가랴는 바벨론 1차 포로로 끌려갔다. 그리고 바벨론에서 풀려나 4만2천 명과 같이 유대 땅으로 돌아온다. 그때 소수가 유대 땅에 거주했고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유대땅 밖에 기거했다. 시대적으로 보자면 예수님의 시대보다 400년 앞선 시대이다. 그때 이들에게 가장 큰 과제는 제2차 성전을 짓는 것이었다. 스가랴는 1차 성전을 보았던 사람이다. 여기서 지어지는 2차 성전이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들리셨던 그 성전의 원형이 되는 것이다. 스가랴는 모든 선지서의 종합이라고 일컬어진다. 성령께서 스가랴를 통해 그동안 선지자를 통해 예언되었던 여러가지 주제들을 집중적으로 전달하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내용으로 전개해 가신다.
스가랴서의 첫 절반은 어느 날 저녁에 받았던 8가지 환상에 대한 내용이다. 4장은 스가랴가 받았던 묵시의 내용으로 8개의 비전 중에 5번째에 해당된다. 순금 등잔대에 대한 내용이다. 순금 등잔대 위에 기름 그릇이 있고 기름 그릇 위에 7개의 등잔이 있다. 기름의 역할은 곧 불을 태우는 역할을 한다. 등잔대는 순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시내산 언약 맥락에서 본다면 순금 등잔대는 곧 지성소의 위치해 있었을 것이다. 지성소를 밝히는 불빛이 유일하게 순금 등잔대에서 나온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했을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뜻하며, 그리고 이스라엘이 온 세상을 향하여 가져야 하는 세상의 빛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시내산 언약의 관점에서 볼 때 독특한 부분이 있다. 그 기름의 출처가 어디이어야 하는가? 기름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에 그 출처가 있다. 그러나 스가랴가 보는 비전에는 기름의 출처가 다르다. 등잔대 곁에 감람나무가 있다. 그리고 두 그루의 감람나무로부터 직접 등잔에 기름이 공급된다. 독특하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앞으로 치리하시는데 있어 색다른 경제학적인 측면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향한 빛의 역할이라는 부분을 살펴보면서, 신명기 32:8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라는 말씀을 본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역할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부분을 본다. 선지서를 보면 동일한 내용이 여러군데 반복된다. 쉽게 풀자면 모든 민족들이 자기들의 위치를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 할 때, 하나님이 정하신 민족 이스라엘에서부터 발하는 빛을 보고 자기 위치를 깨달으라고 하신 말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나오는 절들을 보면, 이스라엘이 그 빛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실제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 부활후 얼마 후에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그리고 지성소에 있었던 순금 등잔대는 로마인에 의해 탈취된다. 이런 배경에서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앞으로 이러한 때가 올 것이다. 옛 언약과 같이 아니하고 등잔대에 공급되는 기름이 백성에게서 오지도 아니하고 온전히 성령으로부터 직접 기름이 공급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등잔대는 교회를 상징한다. 현재 교회를 상징하는 등잔대가 언젠가는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갈 때가 있으리라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7교회는 바로 이 등잔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선지서에서 누누이 말한 대로 이스라엘을 통해 만방에 빛을 비추신다는 내용이다.
우리가 스가랴서만 가지고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들을 해석하는데 무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6-7절 내려가며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라고 하신다. 그리고 10절에 가면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라고 하신다. 작은 시작은 하나님 앞에 중요하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일을 맡기겠다고 하셨다. 독특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구약에서 우리에게 그려주고 있는 그림이다.
세상을 향해서 빛을 비추는 등잔의 역할을 하는 기름이 잠시 동안 이스라엘에서부터 옮겨질 것이라고 구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바로 이렇게 서로 상반된 내용을 동시에 보기에 교회사를 통해 교회가 그동안 이스라엘의 역할에 대해 오해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런 내용을 우리가 지상명령이라고 붙잡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교회가 맡은 지상명령은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이제 신약을 통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4.
신약의 중심에 로마서가 있다. 다른 서신들과 다르게 로마서는 어떤 특정한 문제나 상황에 대해 답을 하는 형식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로마서를 통해 바울은 좀 더 조직적이며 체계적인 방식으로 신학적인 내용들을 정리해 가고 있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교리를 찾을 수 있다. 성령께서 내주하심, 예수를 따르는 사람의 자세 등을 조직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도 독특한 것이 있는데 신학적 내용의 중간에 무려 3장에 걸쳐 이스라엘에 대해 할애하고 있다.
저는 로마서를 매우 사랑한다. 로마서 주석도 여러 편 접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기라성 같은 석학들이 주석에서 로마서를 해석하는 중에 9-11장에 오면 별 말 없이 그냥 지나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바울이 이스라엘에 대해 3장을 할애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피해갈 수 없다. 이방인을 위해서 임명된 사도인 바울이 왜 이스라엘에 대해 3장에 걸쳐 내용을 할애했는지 집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로는 바울은 이방인이 이스라엘과 관계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이스라엘에 대한 내용이 여러 오해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바울이 목도했다고 관주할 수 있다. 교회사적으로 보았을 때 바울 시대를 얼마 지나 교회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에 대한 가르침들이 여러 다양한 각도로 나누어질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주후 2세기에 보면, 초대 여러 교구들 그리고 중세로 넘어가면서 칼빈에서 루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주석가들이 이 부분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그러한 여러 주석가들의 말하는 공통적인 내용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멀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여러 형태로 가르쳐 왔다. 때로는 이러한 것을 ‘대체신학’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교회로 대체했다는 것이다. 때로는 교회가 이스라엘을 능가했으며, 교회가 모든 것을 성취했으며, 이스라엘이 감당해야 하는 내용을 교회가 대신 성취했다는 신학이다.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안타깝게도 대다수 민족의 교회들은 다양한 신학적인 입장을 통해 그동안 이스라엘을 박해해 왔지만 한국교회가 유일하게 이스라엘을 박해하지 않았다.
로마서 9-11장을 보면, 그 시대에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11장 1,11절에서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두 번 동일한 답을 한다. 헬라어 원전을 보면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면서 굉장히 감정적으로 극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을 버렸냐는 질문에 바울은 감정에 격해져서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3가지 이유를 댄다.
첫째, 바울 자신이 증거라고 한다. 바울은 현재형로 이야기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는 이스라엘인이었다가 현재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자신이 이스라엘인이라고 말한다. 만약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밀쳐내셨다면 나 같은 자가 지금 예수를 따르는 자리에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예수를 따르게 되는 많은 유대인들이 동일하게 고백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둘째, 역사를 통해 항상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남겨 두신다는 것이다. 로마서 11장 2-4절의 내용이다. 엘리야 시대같이 바울 시대에도 동일하게 하나님이 남겨두신 신실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에 가주에 있는 대학에서 강연하는 유대인 랍비가 저술한 책이 출판되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전통적인 유대인 랍비 역사학자인데 책의 제목은 “메시아닉 유대주의”이다. 그분이 연구를 통해 밝혀낸 흥미로운 것은 역사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유대인 중에는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이 끓임없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었던 유대인들의 수는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바울 시대에 급격하게 늘었다가 급격하게 줄었다가 다시 급상승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셋째, 하나님의 속성으로 인한 이유이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생각을 바꾸지 아니하신다고 하셨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사람이 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을 나중에 이스라엘의 행동에 따라 생각을 바꾸시고 언약을 거두신다면 어떻게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로마서 11:25의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를 통해 제가 지금까지 스가랴서와 로마서를 통해 나눈 내용을 엮어보려고 한다.
5.
오늘 핵심적인 말씀이다. 스가랴가 보았던 시내산 언약으로 주어졌던 순금 등잔대는 이스라엘 백성에서부터 교회로 옮겨졌다. 그래서 등잔대를 넘겨받은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온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증거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고, 지금이 그때라 할 수 있다. 바울이 이렇게 로마서에서 여러 장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분명한 이해를 가지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지금은 마음이 우둔해지고 강팍한 상태에 있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심령이 둔해져 있는 지금에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교회이다. 교회는 그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중요한 한 단어가 있다. “~까지(until)”이다. "들어오기까지"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우리가 맡은 사명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의 자녀가 이스라엘 군대에서 복무하고 있다. 뉴욕에 올 때 아이에게 자동차 열쇠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 얼마든지 자동차를 사용해도 좋은데 “내가 돌아올 때까지” 라고 말해 주었다. 동일한 원리로 하나님께서 하시고 계신 말씀이 그것이다. 등잔대를 이방교회가 넘겨받고 그리고 지금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데, 그것은 언제까지인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이다. 신구약이 동일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눈이 가려졌다는 것을 집고 넘어가자. 기독교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은 유대인들은 구약을 많이 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해이며 사실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을 읽지 않는다. 제가 성장하면서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쳐 주었지만 메시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예언서를 읽으라고 한 번도 지시를 받지 않았다. 뉴욕의 정통파 유대인들이 때로는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열심히 읽고 기도하는데 그들이 읽는 것은 구약 성경이 아니다. 그들이 읽는 것은 유대인들의 지혜가 담긴 문헌들로 분명하게 예수가 유대인들이 메시아가 아님을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눈이 멀었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성경을 보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미 2천년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메시아가 아니라고 결정한 바가 있기에 오늘날 유대인들은 그 결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유대 공동체의 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랍비들이다. 교회사를 통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못쓸 짓을 많이 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갇힌 게토 공동체에 살았다. 그리고 특히 종교개혁 이후에는 개신교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려 해다. 전도를 받은 유대인들이 랍비에게 가서 예수가 메시아라는 들은 이야기를 묻는다. 그러면 랍비가 교인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기독교 선교사들은 유대 역사와 문화와 그리고 히브리어도 모르는 가운데 세뇌교육을 하려는 것이니 이야기를 듣지도 말라고 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복음을 접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5년 사이에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유대인, 저와 같은 유대인 가운데 이방인을 통해 예수를 메시아로 소개받은 사람들이 많아졌다. 복음을 전해들은 유대인들이 이제는 스스로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깨달아 알게 된 내용들을 가족과 이웃들에게 나누기 시작했다. 물론 가족들이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럼에도 색다른 다이나믹이 생기기 시작했다.(다음 강의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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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멘넷 뉴스(USAamen.net)
댓글목록
산 믿음님의 댓글
산 믿음 ()
누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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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정통신학에서 '대책신학' 이라는 말은 보편적인 신학용어가 아니다. 일단의 세대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이 언약적 신학체계를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낸 왜곡된 용어다. - 구약에서 신약에로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 -
그리고 대체의 의미가 무엇인가? A가 B로 대체되었으면 A는 더 이상의 의미가 없어져야 하지 않는가? 유대인의 존재가 그러하다고 개신교에서 주장하는 교리가 어디있는가?
구약의 민족적 이스라엘이 신약교회(영적 이스라엘)로의 점진적 계시에 따른 성경 해석적 이해가 있을 뿐이다.
생각해 보시라. 문자적인 이스라엘이 영적 이스라엘이 되어서 더 이상은 이스라엘(유대인)에겐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지 않는가? 지상의 민족적, 국가적 이스라엘 회복도 중요하지만 예수 믿는 일이 더 시급한 과제다. 메시아닉 주들 가운데 아직도 많은 경우 성경적인 예수를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은 당신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유대인이기에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 다는 진리는 기독교의 핵심적 가치이기에 복음전도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지는 당신들이 말하는 대체신학이란 말은 그 자체에 모순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유대인의 자격을 잃은 것이 아니듯 지금도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유대인이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