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훈 목사 "부활이 없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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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4-04-20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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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고린도전서 15:1-12
제목: 부활이 없다고요?
지난 16일 승객 수백 명을 태운 대형 페리 ‘세월호’가 제주도로 향하던 중 갑자기 전남 진도 부근 해역에서 침몰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수학여행을 떠났던 고등학생들이 많이 목숨을 잃었는데요. 아마도 이 소식에 모두가 무거운 마음으로 한 주간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저 역시 어찌나 가슴이 아픈지 때를 가리지 않고 기도하며, 모든 것을 절제해야하는 사순절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혹시라도 모르는 구조소식을 기대하며 수시로 뉴스를 검색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물론 이번 사고는 매우 민감한 것이고 또한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기에 어떤 식으로든 언급은 피하는 게 좋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활의 아침에 제가 끔찍한 사고 소식으로 오늘 말씀을 시작하는 이유는 개인적으로 사고를 바라보며 떠나지 않는 질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크리스천들은 저처럼 끔직한 사고를 어떻게 대하고 바라보아야할까?’ 입니다. 물론 이번 사고는 여러 부분에 있어서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이 빚어낸 인재라는 것이 속속히 밝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앞둔 시점에서 일어났다는 데에서 사고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함께 생각해보고 또 분별해보자는 것입니다. 특별히 한 가지만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번 사고에 대한 오늘 이 아침의 생각들은 지극히 저의 개인적인 고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니 어떤 오해나 지나친 해석을 덧붙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대신 어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지에 집중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번 사고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메시지가 몇 가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우리 사회 가운데 ‘생명 경시 풍조’가 가득했습니다. 그 예로, 지난달 대구에서 비정한 아버지가 게임방에 가야하는데 아이가 잠들지 않고 보챈다는 이유로 28개월 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코와 입을 손으로 막아 살해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경북 칠곡에서는 계모에 의해서 학대받은 아이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고, 사회의 무관심 속에 세 모녀가 동반 자살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한국과 미국 공통적으로 총기난사와 같은 각종 묻지마 살해사건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로인해 너무나도 안타까운 생명들이 꺼져갔습니다. 그뿐인가요? 우리는 얼마나 자주 또 쉽게 ‘죽음’이란 말을 사용합니까? “더워 죽겠다. 추워 죽겠다. 좋아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 그런가하면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해서 “죽고 싶다. 죽여 버린다. 나가 죽어라”와 같은 말도 농담반 진담반으로 자주 사용합니다. 이처럼 한국인들이 죽음이란 말과 동고동락한 탓인지 높은 범죄율과 자살률 이란 세계적 불명예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통해 온 국민들은 단 한 명이라도 살아 돌아왔으면 하는 애타는 마음으로 소망하고, 기대하며, 기도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배우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 번째로 깨닫게 되는 건, 우리 인생의 유한함입니다. 즉, 우리 인생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번 사고로 안타깝게 생명을 잃은 사람들 중에 그날이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요? 오히려 다들 수학여행, 새로운 도전, 휴식 등 저마다 여러 가지 부푼 꿈과 소망 그리고 계획 가운데 배를 탔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자신들의 앞날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오늘도 각종 사건사고와 질병을 죽음을 맞이하여야 하는 이들도 오늘이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떠나보내는 가족들은요? 아무도 모릅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땅에 올 때는 순서를 따라 왔지만 떠날 때와 떠나보내야 할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즉, 언젠가 우리 인생의 끝이 있고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수없이 그 인생의 유한함을 ‘안개나 들의 꽃’과 같이 쉽게 깨달아 알 수 있는 것들로 설명해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앞에 두 가지 깨달음으로 또 얻게 되는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내 인생이 영원하지 않고 끝이 있는 유한한 인생이기에 지금 생명이 붙어 있을 때 헛되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올바르고 바른 길, 가치 있고 뜻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지요. 내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면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을 먼저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이는 흔히 철학자 ‘스피노자’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종교개혁자 ‘루터’가 먼저 한 말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살아가야할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 한정된 인생의 시간 가운데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일까요? 그 지혜를 성경에 나오는 한 사건을 통해서 발견합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시면,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충격적인 재난 사고를 이야기합니다. 바로,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건입니다. 망대는 쉽게 생각해서 ‘탑’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쨌든 그 사고로 당시에는 엄청난 숫자에 해당하는 인명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무엇이든 죄와 연관 지어 해석을 했습니다. 그 덕분에 사람들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 죄가 커서 죽었다고 쉽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반문하셨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그리고 질문에 당황하는 이들을 향해 곧 대답해 주셨습니다.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즉, 우리가 안타까운 사고를 보면서 해야 하는 일이란, 죽은 사람들에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나는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 저들보다 조금은 의롭다라고 평가하고, 아주 나쁘게만 살지 않으면 되겠지라며 반복되는 죄악 가운데 살기보다 그것을 자기 인생의 거울로 삼아야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유한함과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알아 참되고 올바른 길 가길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참되고 올바른 길의 시작점이 어디입니까? ‘회개’입니다.
회개는 영어로 ‘Repentance’라고 하는데 사실 그 정도의 후회나 뉘우침이 회개의 참 된 의미가 아닙니다.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참 된 회개는 ‘돌아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내가 어딘가 차를 몰고 목적지를 향해서 갈 때 길을 잘 못 들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럼 곧 내비게이션의 친절한 여인의 ‘유턴하세요.’라고 안내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내에 따라 차를 돌려 다시 바른 길을 가듯이 / 내가 인생길을 갈 때 내 안에 지금 가는 길이 뭔가 잘 못된 길이다 정직하지 못하다 옳지 못하다라는 깨달음이 있으면 그 길에서 완전히 돌아서는 것 그것이 참 된 회개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 회개의 길을 열어주시고 올바른 인생길의 안내자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번 ‘세월호 사고’로 고등학생 자녀를 잃은 부모들이 그렇게 가슴 아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을 예쁘다’는 말처럼 내게 귀하고 사랑스럽지 않은 자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핵가족 시대라 대부분 한자녀 가정인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 자녀하나 희망으로 삼고 열심히 일하며 고단 삶을 이겨내며 살아왔는데 잃었으니 어찌 그 아픔을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삶의 희망이나 소망을 잃어본 적이 있습니까? 딱 바로 그런 심정입니다. 과연 그들을 어떤 말로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픔과 슬픔과 절망이 얼마나 크던지 하나님께서 겪으신 것에 감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들을 향한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에베소서 1장 3-4절에서는 그것이 ‘창조이전’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죄 많은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신 죗값을 치러야하는 ‘희생제물’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희생제물을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독자 예수 그리스도로 정하시고 그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당하는 사고와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자기가 죽어야할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은 아들의 죽음을 알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신 것입니다. 마치 시한부 인생을 사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헤매는 우리를 품으시기 위해서 그리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기 위해서 감당하신 엄청난 고통과 희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깊으신 사랑과 뜻을 깨닫지 못하고 욕하고, 저주하고, 핍박하고, 때리고, 침 뱉고, 모욕하고, 배반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향한 사랑을 끝까지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 졌고, 죄의 문제를 아뢰고 용서 받을 수 있는 참 된 회개의 길을 열어주셨고, 화평의 길을 열어주셨고, 구원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죽음 가운데 머물러 계시지 않고 오늘 이 아침에 부활하심으로 우리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영원히 살아갈 그곳 하나님 나라 / 천국의 시민이 된다는 구원의 참 된 의미와 축복을 깨달아 알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짧은 3년 반의 공생애 기간을 통해서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참되고 올바른 길인지를 가르쳐주셨고, 또 지금도 살아서 우리 곁에 계셔서 그 길의 안내자 되시며, 때론 힘들고 고된 인생 길 가운데 위로 자와 도움 자가 되어 주시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에게 주시는 부활의 참 된 기쁨인줄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2절을 보니,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부활을 믿지 못하며,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라고 주장하던 이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유는 자신들이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의 참됨을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참되다는 근거로 크게 세 가지로 제시하는데요.
첫 번째, 부활은 성경대로 이뤄진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곳곳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어떤 모습으로 오실 것이며 또한 어떻게 죽으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사야 53장 4-6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항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런가하면 예수님께서는 사역 기간 중 자신의 부활에 대해서도 수차례 예고하셨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마태복음 16장 21절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서 가르치시니"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로 한 것이 그분의 계획 가운데 펼쳐졌듯이 그분의 죽으심도 부활도 모든 것이 계획 가운데 이뤄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3절과 4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사실이라면 부활도 사실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부활이 참되다는 증거는 수많은 증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증인이란 사건을 목격하고 경험함으로 그 일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민법에도 판사나 검사 변호사처럼 ‘사건의 책임자가 증인의 증언을 지지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증인의 역할이 사건을 판단하는데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경험하고 목격한 증인들이 참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5-8절까지를 통해서 ‘부활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예수님의 부활은 ‘베드로, 12제자, 500여 형제, 그 후에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그리고 바울 자신 등등 많은 증인들이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증언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혹시 누군가 거짓말을 지어냈다고 한들 여전히 살아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들이 있으니 어찌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반문하며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그것을 목격하고 경험한 수많은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의 참되다는 증거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앞서 바울은 부활의 증인들 가운데 자신을 포함시켰습니다. 그러나 본래 바울은 잘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과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놀랍게 변화하여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가 사도행전 9장에서 믿는 자들을 핍박하러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때 만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다시 사신 주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8절에서 그날의 감격을 추억하며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 보이셨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바울이 10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조산아’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도대체가 자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신을 찾아와주시고, 만나주시고, 용서하시고, 주의 일꾼 삼아주신 은혜가 너무 크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번 세월호 사고와 관련해서 승객들을 버리고 먼저 탈출한 선장과 승무원들이 잘 못됐다고 욕을 많이들 하지요. 또 왜 구조를 빨리 하지 않냐고 분노합니다. 저는 그들을 두둔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도 인간적으로는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어느 누가 생명의 위협 앞에 담대할 수 있을까요? 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 아닙니까? 그러기에 또한 누가 누구에게 당신은 죽었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런 강요가 교감의 자살과 같은 또 다른 안타까운 희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를 비롯한 여기에 계신 분들 중에 어느 누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마땅하다 당연하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그런 은혜를 받을 만 하다고 주장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기꺼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복음의 실체이자 내용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며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나와 함께하시며 기쁘고 즐거울 때는 함께 웃어주시고, 내가 힘들고 괴로울 때는 함께 울어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 안에 존재하고 있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참 된 증거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죽어간 사람들에겐 감사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나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경배하는 일에는 그토록 무관심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로 그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체험했다면 오히려 10절의 바울처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고백해야합니다. 그리고 더욱 그분을 참되고 올바르게 찬양하고 예배해야할 것입니다.
한 독실한 교인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해 있는 어떤 건설회사와 용역계약을 맺고 출장 근무를 갔습니다. 거기서 일하면서 같은 직장에 있는 '모슬렘교도'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 모슬렘교도는 자기가 믿는 회교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며, 엄한 규율대로 살아야 하고, 메카를 순례해야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우리 회교의 큰 자랑거리는 메카에 있는 모하메드의 무덤이야. 너희 기독교의 교주인 예수의 무덤은 비어 있지만 우리 교주의 무덤은 아주 웅장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모하멧의 아름다운 분묘, 이것이 우리 회교의 유일한 자랑거리야." 이 말을 듣고 있던 교인이 재빠르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참 감동적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기독교와 회교의 차이점이다. 모하멧이나 다른 종교의 교주는 모두 죽어 무덤에 묻혀 썩어 버렸지만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하셨다.”라고 당당하게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고린도교회 일부 성도들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부정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현대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직접적인 부정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십자가의 못 박히신 예수님만을 기억하며 부활의 주님의 인도하심을 쫓아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부활의 아침에 두 가지만 기억하길 원합니다. 먼저는 우리 생명의 소중함과 인생의 유한함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소중한 생명을 살리고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겪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부활의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서 유한한 인생 가운데 참되고 올바르고 바른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한 증인들이 보여야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박시훈 목사(뉴욕초원교회)
https://www.facebook.com/NYChowonChurch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제목: 부활이 없다고요?
지난 16일 승객 수백 명을 태운 대형 페리 ‘세월호’가 제주도로 향하던 중 갑자기 전남 진도 부근 해역에서 침몰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수학여행을 떠났던 고등학생들이 많이 목숨을 잃었는데요. 아마도 이 소식에 모두가 무거운 마음으로 한 주간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저 역시 어찌나 가슴이 아픈지 때를 가리지 않고 기도하며, 모든 것을 절제해야하는 사순절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혹시라도 모르는 구조소식을 기대하며 수시로 뉴스를 검색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물론 이번 사고는 매우 민감한 것이고 또한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기에 어떤 식으로든 언급은 피하는 게 좋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활의 아침에 제가 끔찍한 사고 소식으로 오늘 말씀을 시작하는 이유는 개인적으로 사고를 바라보며 떠나지 않는 질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크리스천들은 저처럼 끔직한 사고를 어떻게 대하고 바라보아야할까?’ 입니다. 물론 이번 사고는 여러 부분에 있어서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이 빚어낸 인재라는 것이 속속히 밝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앞둔 시점에서 일어났다는 데에서 사고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함께 생각해보고 또 분별해보자는 것입니다. 특별히 한 가지만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번 사고에 대한 오늘 이 아침의 생각들은 지극히 저의 개인적인 고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니 어떤 오해나 지나친 해석을 덧붙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대신 어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지에 집중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번 사고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메시지가 몇 가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우리 사회 가운데 ‘생명 경시 풍조’가 가득했습니다. 그 예로, 지난달 대구에서 비정한 아버지가 게임방에 가야하는데 아이가 잠들지 않고 보챈다는 이유로 28개월 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코와 입을 손으로 막아 살해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경북 칠곡에서는 계모에 의해서 학대받은 아이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고, 사회의 무관심 속에 세 모녀가 동반 자살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한국과 미국 공통적으로 총기난사와 같은 각종 묻지마 살해사건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로인해 너무나도 안타까운 생명들이 꺼져갔습니다. 그뿐인가요? 우리는 얼마나 자주 또 쉽게 ‘죽음’이란 말을 사용합니까? “더워 죽겠다. 추워 죽겠다. 좋아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 그런가하면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해서 “죽고 싶다. 죽여 버린다. 나가 죽어라”와 같은 말도 농담반 진담반으로 자주 사용합니다. 이처럼 한국인들이 죽음이란 말과 동고동락한 탓인지 높은 범죄율과 자살률 이란 세계적 불명예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통해 온 국민들은 단 한 명이라도 살아 돌아왔으면 하는 애타는 마음으로 소망하고, 기대하며, 기도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배우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 번째로 깨닫게 되는 건, 우리 인생의 유한함입니다. 즉, 우리 인생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번 사고로 안타깝게 생명을 잃은 사람들 중에 그날이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요? 오히려 다들 수학여행, 새로운 도전, 휴식 등 저마다 여러 가지 부푼 꿈과 소망 그리고 계획 가운데 배를 탔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자신들의 앞날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오늘도 각종 사건사고와 질병을 죽음을 맞이하여야 하는 이들도 오늘이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떠나보내는 가족들은요? 아무도 모릅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땅에 올 때는 순서를 따라 왔지만 떠날 때와 떠나보내야 할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즉, 언젠가 우리 인생의 끝이 있고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수없이 그 인생의 유한함을 ‘안개나 들의 꽃’과 같이 쉽게 깨달아 알 수 있는 것들로 설명해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앞에 두 가지 깨달음으로 또 얻게 되는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내 인생이 영원하지 않고 끝이 있는 유한한 인생이기에 지금 생명이 붙어 있을 때 헛되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올바르고 바른 길, 가치 있고 뜻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지요. 내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면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을 먼저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이는 흔히 철학자 ‘스피노자’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종교개혁자 ‘루터’가 먼저 한 말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살아가야할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 한정된 인생의 시간 가운데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일까요? 그 지혜를 성경에 나오는 한 사건을 통해서 발견합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시면,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충격적인 재난 사고를 이야기합니다. 바로,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건입니다. 망대는 쉽게 생각해서 ‘탑’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쨌든 그 사고로 당시에는 엄청난 숫자에 해당하는 인명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무엇이든 죄와 연관 지어 해석을 했습니다. 그 덕분에 사람들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 죄가 커서 죽었다고 쉽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반문하셨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그리고 질문에 당황하는 이들을 향해 곧 대답해 주셨습니다.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즉, 우리가 안타까운 사고를 보면서 해야 하는 일이란, 죽은 사람들에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나는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 저들보다 조금은 의롭다라고 평가하고, 아주 나쁘게만 살지 않으면 되겠지라며 반복되는 죄악 가운데 살기보다 그것을 자기 인생의 거울로 삼아야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유한함과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알아 참되고 올바른 길 가길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참되고 올바른 길의 시작점이 어디입니까? ‘회개’입니다.
회개는 영어로 ‘Repentance’라고 하는데 사실 그 정도의 후회나 뉘우침이 회개의 참 된 의미가 아닙니다.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참 된 회개는 ‘돌아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내가 어딘가 차를 몰고 목적지를 향해서 갈 때 길을 잘 못 들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럼 곧 내비게이션의 친절한 여인의 ‘유턴하세요.’라고 안내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내에 따라 차를 돌려 다시 바른 길을 가듯이 / 내가 인생길을 갈 때 내 안에 지금 가는 길이 뭔가 잘 못된 길이다 정직하지 못하다 옳지 못하다라는 깨달음이 있으면 그 길에서 완전히 돌아서는 것 그것이 참 된 회개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 회개의 길을 열어주시고 올바른 인생길의 안내자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번 ‘세월호 사고’로 고등학생 자녀를 잃은 부모들이 그렇게 가슴 아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을 예쁘다’는 말처럼 내게 귀하고 사랑스럽지 않은 자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핵가족 시대라 대부분 한자녀 가정인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 자녀하나 희망으로 삼고 열심히 일하며 고단 삶을 이겨내며 살아왔는데 잃었으니 어찌 그 아픔을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삶의 희망이나 소망을 잃어본 적이 있습니까? 딱 바로 그런 심정입니다. 과연 그들을 어떤 말로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픔과 슬픔과 절망이 얼마나 크던지 하나님께서 겪으신 것에 감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들을 향한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에베소서 1장 3-4절에서는 그것이 ‘창조이전’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죄 많은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신 죗값을 치러야하는 ‘희생제물’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희생제물을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독자 예수 그리스도로 정하시고 그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당하는 사고와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자기가 죽어야할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은 아들의 죽음을 알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신 것입니다. 마치 시한부 인생을 사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헤매는 우리를 품으시기 위해서 그리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기 위해서 감당하신 엄청난 고통과 희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깊으신 사랑과 뜻을 깨닫지 못하고 욕하고, 저주하고, 핍박하고, 때리고, 침 뱉고, 모욕하고, 배반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향한 사랑을 끝까지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 졌고, 죄의 문제를 아뢰고 용서 받을 수 있는 참 된 회개의 길을 열어주셨고, 화평의 길을 열어주셨고, 구원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죽음 가운데 머물러 계시지 않고 오늘 이 아침에 부활하심으로 우리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영원히 살아갈 그곳 하나님 나라 / 천국의 시민이 된다는 구원의 참 된 의미와 축복을 깨달아 알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짧은 3년 반의 공생애 기간을 통해서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참되고 올바른 길인지를 가르쳐주셨고, 또 지금도 살아서 우리 곁에 계셔서 그 길의 안내자 되시며, 때론 힘들고 고된 인생 길 가운데 위로 자와 도움 자가 되어 주시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에게 주시는 부활의 참 된 기쁨인줄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2절을 보니,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부활을 믿지 못하며,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라고 주장하던 이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유는 자신들이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의 참됨을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참되다는 근거로 크게 세 가지로 제시하는데요.
첫 번째, 부활은 성경대로 이뤄진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곳곳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어떤 모습으로 오실 것이며 또한 어떻게 죽으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사야 53장 4-6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항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런가하면 예수님께서는 사역 기간 중 자신의 부활에 대해서도 수차례 예고하셨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마태복음 16장 21절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서 가르치시니"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로 한 것이 그분의 계획 가운데 펼쳐졌듯이 그분의 죽으심도 부활도 모든 것이 계획 가운데 이뤄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3절과 4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사실이라면 부활도 사실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부활이 참되다는 증거는 수많은 증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증인이란 사건을 목격하고 경험함으로 그 일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민법에도 판사나 검사 변호사처럼 ‘사건의 책임자가 증인의 증언을 지지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증인의 역할이 사건을 판단하는데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경험하고 목격한 증인들이 참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5-8절까지를 통해서 ‘부활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예수님의 부활은 ‘베드로, 12제자, 500여 형제, 그 후에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그리고 바울 자신 등등 많은 증인들이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증언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혹시 누군가 거짓말을 지어냈다고 한들 여전히 살아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들이 있으니 어찌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반문하며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그것을 목격하고 경험한 수많은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의 참되다는 증거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앞서 바울은 부활의 증인들 가운데 자신을 포함시켰습니다. 그러나 본래 바울은 잘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과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놀랍게 변화하여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가 사도행전 9장에서 믿는 자들을 핍박하러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때 만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다시 사신 주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8절에서 그날의 감격을 추억하며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 보이셨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바울이 10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조산아’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도대체가 자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신을 찾아와주시고, 만나주시고, 용서하시고, 주의 일꾼 삼아주신 은혜가 너무 크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번 세월호 사고와 관련해서 승객들을 버리고 먼저 탈출한 선장과 승무원들이 잘 못됐다고 욕을 많이들 하지요. 또 왜 구조를 빨리 하지 않냐고 분노합니다. 저는 그들을 두둔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도 인간적으로는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어느 누가 생명의 위협 앞에 담대할 수 있을까요? 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 아닙니까? 그러기에 또한 누가 누구에게 당신은 죽었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런 강요가 교감의 자살과 같은 또 다른 안타까운 희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를 비롯한 여기에 계신 분들 중에 어느 누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마땅하다 당연하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그런 은혜를 받을 만 하다고 주장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기꺼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복음의 실체이자 내용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며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나와 함께하시며 기쁘고 즐거울 때는 함께 웃어주시고, 내가 힘들고 괴로울 때는 함께 울어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 안에 존재하고 있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참 된 증거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죽어간 사람들에겐 감사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나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경배하는 일에는 그토록 무관심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로 그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체험했다면 오히려 10절의 바울처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고백해야합니다. 그리고 더욱 그분을 참되고 올바르게 찬양하고 예배해야할 것입니다.
한 독실한 교인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해 있는 어떤 건설회사와 용역계약을 맺고 출장 근무를 갔습니다. 거기서 일하면서 같은 직장에 있는 '모슬렘교도'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 모슬렘교도는 자기가 믿는 회교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며, 엄한 규율대로 살아야 하고, 메카를 순례해야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우리 회교의 큰 자랑거리는 메카에 있는 모하메드의 무덤이야. 너희 기독교의 교주인 예수의 무덤은 비어 있지만 우리 교주의 무덤은 아주 웅장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모하멧의 아름다운 분묘, 이것이 우리 회교의 유일한 자랑거리야." 이 말을 듣고 있던 교인이 재빠르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참 감동적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기독교와 회교의 차이점이다. 모하멧이나 다른 종교의 교주는 모두 죽어 무덤에 묻혀 썩어 버렸지만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하셨다.”라고 당당하게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고린도교회 일부 성도들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부정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현대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직접적인 부정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십자가의 못 박히신 예수님만을 기억하며 부활의 주님의 인도하심을 쫓아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부활의 아침에 두 가지만 기억하길 원합니다. 먼저는 우리 생명의 소중함과 인생의 유한함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소중한 생명을 살리고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겪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부활의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서 유한한 인생 가운데 참되고 올바르고 바른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한 증인들이 보여야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박시훈 목사(뉴욕초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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