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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억 목사 "Feel필 通통 함께 웃고 함께 우는 Homema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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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4-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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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는 5월 9일(금)부터 3일간 이상억 목사(한국 장신대 목회상담학 교수)를 초청하여 "Feel필 通통 함께 웃고 함께 우는 Homemaking"이라는 제목의 특별집회를 열었다. 이상억 목사는 3일동안 '사랑이 이끄는 가정'(시편 145:8-9), '가정을 세우는 영성'(누가복음 18:9-14), '건강한 가정을 위한 삶의 자세'(누가복음 10:25-37), 'Feel이 통하는 가정'(로마서 12:15)등 4번의 말씀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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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교회 이상억 목사 초청 특별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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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이상억 목사는 한국 장신대 목회상담학 교수, 장신대 학생생활상담소 소장, 미목상담연구소 소장, 한국목회상담협회 감독회원, 한국가족상담학회 임상감독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토요일 저녁, 이상억 목사는 '건강한 가정을 위한 삶의 자세'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설교를 듣고 혼란에 빠졌다. 이런 전개의 설교를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날 본문은 누가복음 10:25-37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이다. 신자라면 많이 접하는 본문 말씀이라 먼저 설교의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억 목사의 설교는 뭔가 달랐다. 먼저 너무 상세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비유에서 "내려가는" 강도만난 사람, 제사장, 레위인에 대비하여, "여행하는 중"인 사마리아 인을 대비시킨다. 감성적이었다. 그리고 이상억 목사는 여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4개의 시를 읽어 표현했다.

이어 여행하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나누었다. 이상억 목사는 "여행하며 산다는 것은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바라보는 것들과 교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여행하듯 살아가는 사람의 태도라고 생각한다"라며 "여러분은 하늘에 떠 가는 구름의 이야기를 듣는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게 먼 나라의 이야기를 듣는가, 꽃들의 향기를 통해 이야기를 들으시는지요"라고 묻는다.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꽃은 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든가.

그리고 이상억 목사는 주제를 가정으로 옮겨 온다. 감동을 잃은 삶, 소통, 위로, 눈높이 만남등의 주제가 이어졌다. 그리고 다시 마무리로 돌아가 성경말씀을 읽고 들을때 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떨려오는지를 묻고 있다. 여행하며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꽃을 볼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닐까? 다음은 설교내용이다.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

이 비유에는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한 당시의 정황이 잘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났다. 이것은 그 당시에 비일비재한 일중 하나였다. 시온산 위에 위치한 예루살렘은 해발 900여미터이고 여리고는 해수 300미터 아래로 높이의 차이가 1200여 미터가 된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 험했다. 그래서 그 지역을 관장했던 로마 관리는 그 길을 '붉은 피가 흐르는 골짜기'라고 했다. 돌들과 흙들이 붉었으며, 당시에 그 길에는 떼강도가 출몰을 많이 했기에 붉은 피가 흐르는 골짜기라고 불렀다.

역사가들이 흥미롭게 분석하는 내용이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성결케 하셨다. 그런데 왜 그렇게 성전에 장사치가 많았느냐 하면,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장사치와 결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제물로 소 양 염소 비둘기도 가지고 오는데, 제물들을 가지고 올때마다 성전을 들어가기를 허락하는 레위인들은 제물에 흠이있다고 다 돌려 보냈다. 그리고 성전앞에서 산 제물만 인정했다. 그렇게 함으로 착복한 많은 물질을 가지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갈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 길에 떼강도들이 많이 출몰을 했다고 한다.

여리고는 신약성경에 예수님이 삭개오를 만나신 곳이다. 구약성경을 살펴보면 엘리사 시절에 여리고에 선지자 학교를 세웠다. 오늘날 신학교이다. 레위지파만 입학이 가능했다. 레위지파가 순번에 따라 제사장직을 해야 하는데, 여리고 성에 레위인 제사장이 많이 거주했다. 이들이 직무를 위해 시온산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간다. 그곳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여리고성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착복한 물질들을 가지고 내려올때가 많았기에 그것을 노린 떼강도들이 당시 비일비재했다는 것이다.

첫번째 등장한 강도를 만난 사람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강도를 만나 얻어 맞았다. 저항을 해서 맞았을 것이다. 저항한 이유는 손에 든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추측할수 있는 단어가 30절을 보면 "내려가다가"라는 단어가 있는데, 헬라어로 재미있다. 그냥 내려갔다는 단어가 아니라, 어떤 의도를 가지고 서둘러 내려가고 있는 형국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이 사람은 아마 손에 귀한 것을 들고 내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서둘러 내려가고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더 재미있는 것은 31절을 보면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라는 30절과 같은 '내려가다"라는 단어가 적혀있다. 제사장은 왜 그 길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내려가고 있었던 것일까. 제사장은 예배드리러 간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집으로 가는 길이다. 제사를 다 지내고 할 일을 끝내고 집으로 내려가는 사람이 급할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데 서둘러 내려갔다. 이것을 보고 역사가들은 제사장에게 손에 가진 것이 많았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 가진 것은 성전앞에서 물건팔던 사람들에게 받았던 세금이었을 것이라고 역사가는 분석했다.

32절을 보니 "이와 같이"가 받는 단어는 내려간다는 것이다. 한 레위인도 같이 내려가고 있었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진정한 이웃을 물어보았는데 예수님이 뚱딴지 같은 조금은 이상한 비유를 들고 계신다. 당시 시대적인 정황을 담고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다. 질문을 한 율법교사도 역시 레위인중 하나였을 것이다. 아마 제사장 직분자중 하나일수도 있다. 이 사람일수도 있는 사람이 손에 착복한 돈을 들고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다는 것을 예수님이 꼬집어서 이야기 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재미있는 말이 다음 33절에 적혀있다. "여행하는 중"이라는 재미있는 단어가 등장한다. "여행하는 중"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내려가다"라는 헬라어 단어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 내려가기는 하는데 앞에는 이야기 한 '내려간다'는 의도를 가지고 서둘러 내려가는 것이고, '여행하는 중'이라는 것은 내려가기는 하는데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내려가는 형국을 말한다. 재미있다. 예수님은 지금 워드 플레이를 하고 계신다. 앞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서둘러서 내려간다. 이 서둘러 내려가는 형국은 강도만나 거의 죽어가는 사람이 내려가는 형국과 같았다. 그런데 이들과 다르게 사마리아 사람은 그 길을 여행하듯 내려가고 있었다.

사마리아인이 여기에 등장하는것은 당시 시대정황을 본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예루살렘에 살았던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자신들을 괴롭힌 사마리아 인을 보면 치를 떨 정도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비유이니 예수님이 말씀을 하고 계시지, 실제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마리아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등장한다. 아마 이 사마리인은 예루살렘에 들렀다 오는 길인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갔다가 비아냥을 당하거나 봉변을 당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인은 그곳을 지나 붉은 피가 흐르는 골짜기로 내려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목적지는 여리고이다. 여리고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도시이다. 그곳에 갔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수도 있다.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으로 갈때 그 길로 가지 않고 다른 쪽 길을 택해서 갔다. 그쪽 길은 제사장과 레위인 등 정통 유대인들이 사는 지역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뜻밖의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 그런데도 사마리아인이 그길로 여행을 했다는 것이다. 대단한 것이다. 그런 상황속에서 사마리인이 그 길을 내려가며 여행을 했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여행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시를 읽어드린다,

1. 어떤 성서 / 정현종

등에 지고 다니던 제 집을
벗어버린 달팽이가
오솔길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엎드려 그걸 들여다보았습니다.
아주 좁은 그 길을
달팽이는
움직이는 게 보이지 않을 만큼 천천히
그런 천천히는 처음 볼 만큼 천천히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성서였습니다.

2. 그리운 목소리 / 정호승

나무를 껴안고 가만히
귀 대어보면
나무 속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행주치마 입은 채로 어느 날
어스름이 짙게 깔린 골목까지 나와
호승아 밥 먹으러 오너라 하고 소리치던
그리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3.
귀뚜라미 / 곽해룡 선생

귀뚜라미가
귀뚤귀뚤
귀뚤귀뚤
막힌 귀를 뚫어 준다.

대못처럼
내 귀에 꽉 박힌 소리

귀뚤귀뚤
귀뚤귀뚤
말끔하게 뚫어 준다.

4. 비오는 날 / 김기현

후두둑 후두둑..........
작은 물방울 글씨로
촉촉히 답안지를 가득 메워

주룩 주룩 주루룩.......
여기도 동그라미
저기도 동그라미
채점을 한다.

비 오는 날은
여기도 백 점
저기도 백 점

틀린 곳 하나 없이
사방이 동그라미
모두가 백 점이다.

정말 하늘과 산과 소통이 가능할까?

저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여행하듯 살아가는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는데 본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를 해야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면 와도 볼 수 없다. 그런데 그 의도를 조금은 약화시킬 필요가 있다. 사실 이 사마리아인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가 많았을까. 사람들이 비아냥 하며 우습게 여기는 소리들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것이 한이 되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에게 한과 아픔이 있으면 그것을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은 열등감을 극복할수 있는 우월감으로 나타나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것이 욕구라는 것이다. 사람 마음에 욕구가 생겨나는데, 이 욕구때문에 누구든지 나에게 걸리기만 하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사람에게 나타날수 있는 적개심이라는 것이다. 충분히 나타날수 있는 상황인데, 비유이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럴수 밖에 없는 사마리아 인이 여행하더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아마 율법교사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굉장히 찔리는 것이 많았을 것이다. 율법교사는 지금 자기를 의롭게 보이려고 이런 질문을 했던 것이다. 율법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기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다. 자기를 의롭게 보이기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다. 의도가 분명했다. 예수님을 만나러 올때 복음이고 길이고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욕심이 있었다. 이 욕심을 어떻게하든지 예수님을 만나서 채워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욕심을 가질수 있는 사람, 욕심을 가져야되는 사람,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 지금 욕심이나 의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행하며 살아간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고 율법교사에게 되물으신다. "네 생각에는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예수님은 사마리아 인이라고 꼭 집어 말씀을 하셨다면, 율법교사도 할 수 없이 사마리아 인이라고 대답했어야 했는데, 차마 사마리아인이라고 말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둘러서 '자비를 베푼 자' 라고 대답한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의도를 보시고, 그런 의도를 가지고 오지말고 여행하며 살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하며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몇편의 시를 읽어드렸다. 여행하며 산다는 것은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바라보는 것들과 교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여행하듯 살아가는 사람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여러분은 하늘에 떠 가는 구름의 이야기를 듣는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게 먼 나라의 이야기를 듣는가, 꽃들의 향기를 통해 이야기를 들으시는지요. 어쩌면 바쁜 인생을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정신없는듯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인생을 살아가다가도 한번 스스로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 정말 바른 삶일까?", "나는 여행하듯이 살고 있을까?", "정말 이 땅을 살아가며 새를 바라보고 물을 바라보고 산을 바라보고 나무를 바라보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정말 그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할까?"

아마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런 것은 시인이니 가능하지 아무나 되겠는가'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예수님을 안믿는 사람이 우리에게 와서 나도 한번 예수님을 느끼게 해 달라고 이야기를 한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우리가 무당도 아니고 하나님을 불러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고 원하시는 대에 원하신 일을 이루실텐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라며 무릎을 꿇고 간구할수 밖에 없다.

사실 신앙은 신비함이다. 신비는 비밀과 다르다. 비밀은 가르쳐 주면 안다. 비밀은 깨닫아 진다. 그런데 신비는 아무리 가르쳐주어도 내가 경험하기 전에는 죽어도 모르는 것이 신비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신비를 쉽게 누구에게 이야기를 해주기 어렵다. 그냥 경험할수 밖에 없다. 그러니 여러분들에게 지금 그 이야기를 드리고 있다. 산의 하늘의 자연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경험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보기로 작정한 사람들, 느끼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하나님도 내가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고 바라고 원하는 사람, 마음에 정말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사람에게 보이고 들리고 느껴진다. 지금 여러분에게 그 이야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여행하면 산다는 것은 그런것이다.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소통하는 가정

주제를 옮겨 가정으로 가지고 가보자. 어쩌면 우리들이 날마다 만나는 것을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족도 마찬가지이다. 매일 같은 일상으로 산 배우자가 집에 들어올때 별일이 없었느냐고 물어보면 별 일 없었다고 대답한다면 날마다 살아가는 삶에서 감동을 잃었다는 뜻이다. 머리 끝에서 부터 발 끝까지 오는 어떤 떨림, 전율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냥 살아가는 삶이 날마다 똑같다. 날마다 똑같은 가족이다. 이렇게 바라보면 가치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것을 진짜 하기 어렵기 때문에 시인들이나 하는 것이며, 예수님 잘믿는 신앙인들이나 되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삶의 자세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건강한 가정을 만든다는 것이,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 살아가는 삶에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조금 더 쳐다보고, 조금 더 바라보고 그래서 나와 너 사이에 관계가 좀 더 소통이 돠면 좋겠다는 것이다. 소통이란 커뮤니케이션이란 나와 너사이에 여러가지 감정이라든지 의미가 오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가능해 진다면 사람들은 위로를 받게 되어 있다.

위로라고 하면 굉장히 고상해 보이고,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것은 멋잇게 보이는가. 그런데 위로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위로가 멋있지만, 위로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위로가 굉장히 이기적이다. 예를 들면, 수영을 못하는 내가 물에 빠져 살려달라고 허우적 거린다. 그런데 아무도 안오면 극심한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저만 빠진것이 아니라 제가 존경하는 좋아하는 분들이 다 빠져있다. 그럴때 위로를 느낀다. 위로는 나만 죽는 것이 아닌데, 나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래야 위로가 된다는 것이 좀 씁슬해 진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이다.

그러니 내 가족과 만날때 눈높이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왜 눈높이로 만나야 하는가 하면 눈높이로 만날때 위로가 가능하다. 서로가 통했다는 느낌이 오고가기 때문이다. 그럴려면 어느 한 쪽이 다른 쪽 보다 높거나 낮게 위치해 있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통했다는 느낌이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가족들 특히 자녀들과 만날때 눈높이로 만나야 한다. 교육학에서 눈높이라는 개념을 그저 내 무릎을 낮추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 아이들을 나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동반자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면 눈높이가 가능해 진다.

이 세상을 나와 함께 살아가는 나의 삶의 동반자라고 여기면 아이들이 위로를 느낀다. 위로의 특징은 저사람이나 나나 비슷한 존재라는 것인데 한 번 생각해 보라. 여러분들이 이세상을 살아가며 잘살았다는 느낌이 들때는 특히 부모에게 인정을 받을 때이다. 부모가 나에게 도와달라고 이야기 할 때, 예전에는 부모님이 그렇게 크고 대단한 분이셨는데 이제 보니 힘든 삶을 사신 분이었구나 하는 느낌을 가질때 '우리는 내가 많이 컸구나' 또는 '내가 많이 철이 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내 마음속에 큰 위로를 받게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녀들을 만날때도 그런 마음을 가지게 해야 한다. 그런데 부모된 입장에서 아이들을 만날때 같은 동반자의 개념으로 만나기가 쉽지 않다. 제가 사는 아파트 놀이터에는 씨름장이 있는데 한 아버지가 5-6살된 아들과 씨름을 했다. 그 아버지는 한번도 안지고 몇판을 계속 이겼다. 그랬더니 아이가 울면서 집에 들어갔다. 위로를 해주어야 하는데, 아버지가 이겼다고 좋아한다. 아버지가 당연히 이기는데도 안져준다. 그러니 애가 위로를 못 받는 것이다.

그러면 통했다는 느낌이 안오는 것이다. 그러면 여행하듯이 살기가 어렵다. 교감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 세상을 살아가며 꽃을 바라보는 사람은 우리들의 감각과 연결시키기 위해 꽃을 만지거나 냄새를 맞거나 하는데 이것이 눈높이의 개념이다. 소통이 되기위해 함께 동반자의 인식을 가지기 위해 우리에게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 그럴때 자녀와 의사소통이 가능해 진다. 그런 것이 여행하듯이 살아가는 것이다.

의사소통을 이야기하면서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아이들은 자기방에 안나오고 부모들과 이야기를 안한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문밖에도 나오고 거실도 돌아다녔는데 부모에게 지적을 많이 당했기 때문에 방에서 안나온다. 자녀와 의사소통을 하려면 아이들의 방으로 들아가야 한다. 애가 무엇을 하든지 앞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면 된다. '학겨에서 어떻게 지냈는가' 또는 '밥은 먹었는가'라고 묻는 것을 대화라고 하지 않는다. 일상 회화라고 한다. 부모는 대화를 하지 않고 지적을 한다. 지적을 하니 애들과 대화가 안된다. 대화를 하려면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 같이 해야 한다. 친구사이에는 지적할 이유도 없다. 겉치례적인 이야기없이 속에 있는 이야기를 가감없이 들려주면 된다. 부모가 경험한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면 된다.

아이는 부모가 대화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불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내가 또 무엇을 잘못했는가 하고 고민할수도 있다. 그러면 조용히 나와라. 그리고 다음에도 계속하여 시도하라. '아버지는 이렇게 살았다', '오늘 지내면서 이것은 참 좋았다', '살면서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을 깨닫았다' 등등 가감없이 들려주라. 장담하건데 10번만 하면 자녀들과 대화가 가능하다. 임상실험을 했더니 90%가 관계가 개선되었다. 마음과 마음이 나누어 지게 하라. 그것을 커뮤니케이션, 의사소통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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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찬양

이 세상과 소통하라, 주님과 소통하라

이 세상을 여행하듯이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일까. 살아가다가 보면 힘든 일이 많다. 이런 것들을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는가. 아무에게도 못한다. 그런 일들도 많을것이다. 그럴때 마다 이 세상과 소통하라.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며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것들을 한번 들어 보았으면 좋겠다'고 소통하라.

1.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2. 그 청아한 주의 음성 울던 새도 잠잠케 한다 내게 들리던 주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하다 3.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후렴]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내가 나누는 이 기쁨, 이것이 어떻게 가능해 지느냐 하면 주님의 음성이 내귀에 들리게 될 때 가능해진다. 어떻게 이것이 들리게 될까. 이것은 참 중요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매주일 듣고 있다.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바라볼때가 많다. 성경말씀을 들을때 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떨려오는가. 떨려온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 제게 주신 하루가 정말 귀하고 감사합니다, 호흡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연을 바라보고 교감을 나누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이야기들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바라보며 은혜받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아이들을 바라보며 이야기 듣게 해주어서 감사합니다." 이것이 여행하듯이 살아가는 것이다. 저는 그렇게 살면 좋겠다. 여행갈수 없는 곳을 걸어갈지라도, 여행하듯이 살아간다면 그것이 이웃되는 삶이 아닐까.

율법교사가 누가 제 이웃인가를 예수님께 물어보았을때 예수님의 답변하셨다. 좋은 이웃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일까,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여러분과 담담히 나누고 싶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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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성결교회 앞 도로 "Korean War Veterans Way" 2014-05-03
뉴욕새교회, 설립자 이학권 목사 초청 부흥사경회 댓글(1) 2014-05-02
북미주 한인 청소년을 위한 최초의 영어 교재 출판 2014-05-02
이원규 교수 ① 머리의 종교에서 가슴의 종교로 2014-05-02
제1회 세계한인침례인선교대회, 2015년 체코 프라하에서 201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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