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천 교수 "다시 보는 마틴 루터의 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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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ㆍ2014-07-17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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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사이드장로교회(이종식 목사)는 제 2차 베이사이드 성서원 강좌를 개설하여 7월 14일(월)부터 18일(금)까지 일정으로 집중강의를 하고 있다. 강사는 원종천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장)이며 강좌 제목은 ‘종교개혁사’이다.
첫날 원종천 교수는 마틴 루터의 회심에 대한 강의를 했다. 개신교의 탄생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루터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깨달음을 얻고, 응징적인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구속적인 하나님의 의로 개념이 변화되어 자유함을 누렸다. 루터 이전에도 비슷한 주장을 한 사람이 있었지만, 루터의 주장은 시대적인 상황과 인쇄술의 발달로 크게 확대되었다. 또 다른 회심을 기대하며 관련 강의내용을 소개한다.
1483년 마틴 루터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교육을 받습니다. 일반 사람들처럼 대학에 들어가고 학사 석사 학위를 받죠. 그는 중세 말기 로마 카톨릭을 충실히 믿고 잘 다녔습니다. 가족들도 그랬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루터에게 유별나게 심각한 고민 거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루터의 영적 고뇌'라고 이야기 합니다. 청년 시절 루터는 죄의식의 문제 때문에 굉장히 힘들어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간과할 수 없으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므로 두려운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이 루터에게는 큰 괴로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후 연옥을 생각하면 끔직했습니다. 아마 당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민감한 루터에게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대학을 마치고 아버지가 부릅니다. 아마 결혼 문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루터가 말을 타고 집으로 가던 도중 벼락을 맞게 됩니다. 말에서 떨어진 루터는 뭔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길로 수도사를 결심하고 서언을 해버리고 맙니다.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었겠죠. 하지만 수도사가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예쁨을 받게 되고 죄의식에서 멀어질거라고 생각했던 루터는 하나님의 두가지 큰 율법인 목숨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에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도저히 내 몸처럼 주님이나 이웃을 사랑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루터는 1507년 안수를 받고 사제가 되고, 1509년에는 수도원의 멘토 스타우피츠라는 사람의 눈에 들어 더 공부해서 신학 학사를 받고, 1512년에는 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비텐베르그 대학의 교수로 임명됩니다. 1513년 부터는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를 강의합니다. 이 와중 어느 시점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마틴 루터가 회심을 합니다. 자신의 오랜 문제가 해결이 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루터의 회심' 혹은 '돌파구'라고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이 루터의 회심이 오늘 강의의 하일라이트가 됩니다.
루터의 회심이 어떤것인지 본인의 말에 의하면 로마서 1장 17절을 읽다가 그리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로마서 1장 17절을 봐야 겠지요. "복음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구절 입니다.
루터의 영적 고뇌는 '하나님의 의' 때문이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심판을 해야만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 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루터에게 이 단어가 무척 힘든 단어 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굿 뉴스(Good News)'라는 말입니다. 이상하죠. '하나님의 의'가 루터에게는 '좋은 소식(Good News)'이 아니었잖아요. 루터가 보기에 말이 되지 않았어요. 그는 적어도 성경을 전공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이 틀릴리가 없다면 자기가 틀린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에는 '믿음'이란 단어가 계속 나옵니다. 루터가 지금까지 자신의 죄의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나름대로 시도했던 것이 뭐 였습니까. 수도사가 되면 더 거룩하고 바르게 살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고, 계속 선행을 쌓게 되면 하나님 앞에 의로 여겨질거라고 생각해 선행, 행위, 거룩한 삶 등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잘 보이려 했던 루터였습니다. 그런데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란 단어만 계속 나오자 루터는 뭔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부분을 보충해 주는 부분이 로마서 3장에 나타납니다. 21-28절을 같이 읽어 봅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로마서 3:21-28)"
여기에 로마서 1:17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오는 것을 알고 루터가 완전히 넘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율법을 통해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3: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을 보면 하나님의 의가 율법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타난다고 나와 있었던 것입니다.
3: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안의 속량'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죠. 구체적으로 말하면 값을 주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지금 죄에 메여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루고 우리를 사셨다는 말입니다. 죄에 묶인 우리를 해방되게 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죄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이야기 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은혜가 뭔가요. 만약 여러분이 저를 위해 쥬스 한잔을 가져다 놓았다고 합시다. 그렇게 하지않아도 되는데 호의를 베푼 것이지요. 댓가를 바라지 않고 한 행동인데 제가 지갑을 꺼내 돈을 줬다고 한다면 쥬스를 가져온 분은 기분이 좋을까요 나쁠까요. 호의를 무시하는 꼴이 되는 것이죠. 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호의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럴만한 자격이 없는데 죄인에 불과한데 하나님께서 그냥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속량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받아야겠죠. 그런데 그것을 놓고 내가 값을 치룬다고 해봐요. 그러면 은혜를 안 받겠다는 소리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루터는 지금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되겠는데 자신이 값을 치룰려고 합니다. 율법을 잘 지켜서, 수도원에 들어가서 뭔가를 열심히 함으로서 값을 치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겠다는 것입니다. 내 역량이 있으니까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속량을 베푸셔서 은혜를 주실려고 하는 것인데, 루터가 그동안 해왔던 것은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의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인정받으려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습니다. 루터가 이것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값을 치루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가 아니지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우리는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감사하게 받으며, 내가 내 능력과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의인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은 중요합니다. 루터는 바른 수도사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몸을 학대 했는지 모릅니다. 영적으로 맑아지기 위해서, 육체에서 나오는 죄를 없애기 위해 고통을 감내 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알몸으로 스스로에게 채찍을 가하며 자해를 했습니다. 그 당시 수도사 들이 했던 일들입니다. 그러면 거룩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외형으로 굉장히 거룩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무지무지하게 교만 할 수 있습니다. 좀 조심스런 이야기이지만 거룩해 보이는 분들, 거룩해 보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런 분들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 거룩하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예수님은 욕을 하셨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대단한 인물들로 봤습니다. 예수께서는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어린 아이들을 좋아하셨다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를 좋아하셨다는 말은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천진난만하고 있는 그대로 꾸밈없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 돌아가셔서 내가 의로워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저 감사할 뿐인 자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루터의 전환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루터의 회심을 이해 하지 못했다면 카톨릭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받는 것입니다. 본문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았을 경우, 지은 죄를 그냥 넘어가 주신다는 것입니다. 죄를 죄로 여겨 심판하시지 않는다는 소리 입니다.
3:21-28절 말씀은 로마서 17장과 연결이 되면서 루터의 눈에 확 들어오기 시작을 합니다. 수년동안 루터를 괴롭혔던 영적 문제가 이 시점에서 해결이 됩니다. 루터의 표현에 의하면 "내가 낙원에 들어가는 체험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이해해야만 종교개혁을 이해 할 수 있고, 그렇게 루터의 엄청난 확신은 유럽 전체로 흐르게 됩니다. 복음은 루터에게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충격은 변화를 말합니다. 그 변화를 자신의 신앙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복음이 들어와서 충격을 주면 일반적으로 뭔가에 크게 얻어 맞으면 깨지게 됩니다. 무너지든지, 상처가 나든지 해서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러면 복음의 충격을 받아서 깨진다는 것이 뭘까요. 저는 이것을 '가치관의 변화'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사람은 예외없이 나름대로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갖고 싶어하거나, 무엇이 되고 싶어합니다. 일반적으로 부나 명예가 가치관으로 형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들어와 충격으로 깨어졌다면 가치관이 깨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어떤 가치관을 만들어서 가장 소중하게 바라보기 시작한다면 성경적 의미로 우상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믿기 전에는 우상을 섬긴다는 말이 됩니다.
일반 사람들은 우상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복음이 들어와 깨어졌다면 우상이 깨짐을 뜻합니다. 왜냐면 가장 소중한 것이 들어 왔기 때문에 과거에 소중했던 것이 깨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를 거치지 않고 예수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되는 것이죠. 우상의 자리싸움이 계속됩니다. 아직 덜 깨져서입니다. 그런데 나 말고 다른것이 깨어졌다고 생각이 든다면 그것이 악마입니다. 우상이 깨졌다는 의미는 결국 내가 깨졌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가셔야 합니다. 내가 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이는 자신이 우상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깨어지고 우리 주님이 그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루터에게 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 나 중심주의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갖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들이 깨어짐을 많은 사람들이 불안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일반 사람들이라면 내가 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자신이 믿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는지 의심하면서 끝까지 나를 붙잡고 있습니다. 이는 뭘 몰라서 그럽니다. 깨져보시면 그것처럼 편안하고 좋은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 입니다.
이런 믿음을 갖게 되면 좋은 행실이 당연히 나타납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하니까 믿음 후에 엉터리로 살아도 된다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확실히 깨어진 다음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실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런 행실이 나오지 않는다면 출발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출발은 했지만 부족해서 안되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럴땐 또 한번 회개하고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첫날 원종천 교수는 마틴 루터의 회심에 대한 강의를 했다. 개신교의 탄생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루터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깨달음을 얻고, 응징적인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구속적인 하나님의 의로 개념이 변화되어 자유함을 누렸다. 루터 이전에도 비슷한 주장을 한 사람이 있었지만, 루터의 주장은 시대적인 상황과 인쇄술의 발달로 크게 확대되었다. 또 다른 회심을 기대하며 관련 강의내용을 소개한다.
1483년 마틴 루터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교육을 받습니다. 일반 사람들처럼 대학에 들어가고 학사 석사 학위를 받죠. 그는 중세 말기 로마 카톨릭을 충실히 믿고 잘 다녔습니다. 가족들도 그랬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루터에게 유별나게 심각한 고민 거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루터의 영적 고뇌'라고 이야기 합니다. 청년 시절 루터는 죄의식의 문제 때문에 굉장히 힘들어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간과할 수 없으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므로 두려운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이 루터에게는 큰 괴로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후 연옥을 생각하면 끔직했습니다. 아마 당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민감한 루터에게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대학을 마치고 아버지가 부릅니다. 아마 결혼 문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루터가 말을 타고 집으로 가던 도중 벼락을 맞게 됩니다. 말에서 떨어진 루터는 뭔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길로 수도사를 결심하고 서언을 해버리고 맙니다.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었겠죠. 하지만 수도사가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예쁨을 받게 되고 죄의식에서 멀어질거라고 생각했던 루터는 하나님의 두가지 큰 율법인 목숨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에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도저히 내 몸처럼 주님이나 이웃을 사랑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루터는 1507년 안수를 받고 사제가 되고, 1509년에는 수도원의 멘토 스타우피츠라는 사람의 눈에 들어 더 공부해서 신학 학사를 받고, 1512년에는 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비텐베르그 대학의 교수로 임명됩니다. 1513년 부터는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를 강의합니다. 이 와중 어느 시점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마틴 루터가 회심을 합니다. 자신의 오랜 문제가 해결이 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루터의 회심' 혹은 '돌파구'라고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이 루터의 회심이 오늘 강의의 하일라이트가 됩니다.
루터의 회심이 어떤것인지 본인의 말에 의하면 로마서 1장 17절을 읽다가 그리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로마서 1장 17절을 봐야 겠지요. "복음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구절 입니다.
루터의 영적 고뇌는 '하나님의 의' 때문이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심판을 해야만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 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루터에게 이 단어가 무척 힘든 단어 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굿 뉴스(Good News)'라는 말입니다. 이상하죠. '하나님의 의'가 루터에게는 '좋은 소식(Good News)'이 아니었잖아요. 루터가 보기에 말이 되지 않았어요. 그는 적어도 성경을 전공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이 틀릴리가 없다면 자기가 틀린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에는 '믿음'이란 단어가 계속 나옵니다. 루터가 지금까지 자신의 죄의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나름대로 시도했던 것이 뭐 였습니까. 수도사가 되면 더 거룩하고 바르게 살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고, 계속 선행을 쌓게 되면 하나님 앞에 의로 여겨질거라고 생각해 선행, 행위, 거룩한 삶 등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잘 보이려 했던 루터였습니다. 그런데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란 단어만 계속 나오자 루터는 뭔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부분을 보충해 주는 부분이 로마서 3장에 나타납니다. 21-28절을 같이 읽어 봅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로마서 3:21-28)"
여기에 로마서 1:17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오는 것을 알고 루터가 완전히 넘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율법을 통해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3: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을 보면 하나님의 의가 율법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타난다고 나와 있었던 것입니다.
3: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안의 속량'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죠. 구체적으로 말하면 값을 주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지금 죄에 메여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루고 우리를 사셨다는 말입니다. 죄에 묶인 우리를 해방되게 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죄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이야기 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은혜가 뭔가요. 만약 여러분이 저를 위해 쥬스 한잔을 가져다 놓았다고 합시다. 그렇게 하지않아도 되는데 호의를 베푼 것이지요. 댓가를 바라지 않고 한 행동인데 제가 지갑을 꺼내 돈을 줬다고 한다면 쥬스를 가져온 분은 기분이 좋을까요 나쁠까요. 호의를 무시하는 꼴이 되는 것이죠. 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호의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럴만한 자격이 없는데 죄인에 불과한데 하나님께서 그냥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속량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받아야겠죠. 그런데 그것을 놓고 내가 값을 치룬다고 해봐요. 그러면 은혜를 안 받겠다는 소리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루터는 지금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되겠는데 자신이 값을 치룰려고 합니다. 율법을 잘 지켜서, 수도원에 들어가서 뭔가를 열심히 함으로서 값을 치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겠다는 것입니다. 내 역량이 있으니까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속량을 베푸셔서 은혜를 주실려고 하는 것인데, 루터가 그동안 해왔던 것은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의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인정받으려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습니다. 루터가 이것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값을 치루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가 아니지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우리는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감사하게 받으며, 내가 내 능력과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의인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은 중요합니다. 루터는 바른 수도사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몸을 학대 했는지 모릅니다. 영적으로 맑아지기 위해서, 육체에서 나오는 죄를 없애기 위해 고통을 감내 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알몸으로 스스로에게 채찍을 가하며 자해를 했습니다. 그 당시 수도사 들이 했던 일들입니다. 그러면 거룩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외형으로 굉장히 거룩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무지무지하게 교만 할 수 있습니다. 좀 조심스런 이야기이지만 거룩해 보이는 분들, 거룩해 보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런 분들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 거룩하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예수님은 욕을 하셨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대단한 인물들로 봤습니다. 예수께서는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어린 아이들을 좋아하셨다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를 좋아하셨다는 말은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천진난만하고 있는 그대로 꾸밈없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 돌아가셔서 내가 의로워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저 감사할 뿐인 자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루터의 전환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루터의 회심을 이해 하지 못했다면 카톨릭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받는 것입니다. 본문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았을 경우, 지은 죄를 그냥 넘어가 주신다는 것입니다. 죄를 죄로 여겨 심판하시지 않는다는 소리 입니다.
3:21-28절 말씀은 로마서 17장과 연결이 되면서 루터의 눈에 확 들어오기 시작을 합니다. 수년동안 루터를 괴롭혔던 영적 문제가 이 시점에서 해결이 됩니다. 루터의 표현에 의하면 "내가 낙원에 들어가는 체험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이해해야만 종교개혁을 이해 할 수 있고, 그렇게 루터의 엄청난 확신은 유럽 전체로 흐르게 됩니다. 복음은 루터에게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충격은 변화를 말합니다. 그 변화를 자신의 신앙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복음이 들어와서 충격을 주면 일반적으로 뭔가에 크게 얻어 맞으면 깨지게 됩니다. 무너지든지, 상처가 나든지 해서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러면 복음의 충격을 받아서 깨진다는 것이 뭘까요. 저는 이것을 '가치관의 변화'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사람은 예외없이 나름대로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갖고 싶어하거나, 무엇이 되고 싶어합니다. 일반적으로 부나 명예가 가치관으로 형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들어와 충격으로 깨어졌다면 가치관이 깨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어떤 가치관을 만들어서 가장 소중하게 바라보기 시작한다면 성경적 의미로 우상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믿기 전에는 우상을 섬긴다는 말이 됩니다.
일반 사람들은 우상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복음이 들어와 깨어졌다면 우상이 깨짐을 뜻합니다. 왜냐면 가장 소중한 것이 들어 왔기 때문에 과거에 소중했던 것이 깨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를 거치지 않고 예수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되는 것이죠. 우상의 자리싸움이 계속됩니다. 아직 덜 깨져서입니다. 그런데 나 말고 다른것이 깨어졌다고 생각이 든다면 그것이 악마입니다. 우상이 깨졌다는 의미는 결국 내가 깨졌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가셔야 합니다. 내가 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이는 자신이 우상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깨어지고 우리 주님이 그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루터에게 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 나 중심주의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갖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들이 깨어짐을 많은 사람들이 불안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일반 사람들이라면 내가 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자신이 믿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는지 의심하면서 끝까지 나를 붙잡고 있습니다. 이는 뭘 몰라서 그럽니다. 깨져보시면 그것처럼 편안하고 좋은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 입니다.
이런 믿음을 갖게 되면 좋은 행실이 당연히 나타납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하니까 믿음 후에 엉터리로 살아도 된다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확실히 깨어진 다음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실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런 행실이 나오지 않는다면 출발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출발은 했지만 부족해서 안되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럴땐 또 한번 회개하고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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