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환 목사 별세 “그 사람의 값은 죽은 다음에 판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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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ㆍ2019-03-09 13:24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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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에 뉴저지에서 활동한 문동환 목사가 한국시간 3월 9일 오후 5시50분께 별세했다. 문 목사는 형 문익환 목사에 이어 1921년 북간도에서 태어나 98년의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고 문동환 목사는 미국 유학시절 만난 해리엇 페이 핀치벡(문혜림) 사모와 1961년 결혼하여 2남2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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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류신학교에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추모하는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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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추모예배에서 헌화하는 문동환 목사
문동환 목사는 2009년 드류신학교에서 드려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추모하는 예배에서 “그 사람의 값은 죽은 다음에 판명이 된다. 세상이 어떻게 그의 죽음을 맞이하는지 보면 사람의 가치를 안다. 우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고, 박수를 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제 그 자신이 평가를 받을 자리에 섰다.
문동환 목사는 수차례 뉴욕소금교회 집회에 참가했고, 한종은 담임목사의 아들을 위한 세례를 집례하기도 했다. 뉴욕소금교회 한종은 목사는 “문동환 목사님은 행동하는 지성인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동기는 정치적 신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다른 이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끌어안았던 예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사회를 사랑으로 품고 민족 전체를 목회하셨던 참 스승이셨고, 존재 자체로 평화를 전했던 시대의 등불이셨습니다”라고 은사의 별세를 아쉬워했다.
조원태 목사의 위임식에 학교 스승으로 참가한 문동환 목사는 권면을 하며 조 목사가 수줍어 어떻게 목회를 하나 생각했다고 말을 시작했다. 문 목사는 성실함과 기도가 조 목사의 특징이라고 칭찬했다. 스승의 별세 소식이 전해진 후 조원태 목사는 “문동환 목사님은 맑고 순수한 어린이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악에 직면했을 때는 애통해 하는 예언자이시기도 하셨습니다. 민족의 독립, 조국의 민주화, 평화통일의 시대적 과제 앞에서 유리알처럼 맑고 예레미야처럼 통렬한 애통을 쏟아낸 문동환 목사님은 하나님에게 붙잡힌 사람이셨습니다”고 말했다.
또 조원태 목사는 “문동환 목사님의 신앙과 삶의 화두는 떠돌이였습니다. 문 목사님은 민족의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날 때부터 떠돌이셨고, 뉴저지 이민자의 떠돌이 경험을 통하여 떠돌이 신학을 유산으로 남겨 주셨습니다. 1995년 플로리다에 밀입국하다 붙잡힌 한 멕시코 이민자 청년의 한 기사가 계기가 되어 현미경으로 성서의 떠돌이들을 만나셨고, 세상의 떠돌이들을 보고 아파하시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 보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민자보호교회는 떠돌이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아파하시는 사랑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밤하늘의 별처럼 어두운 역사를 비쳐주는 문동환 목사님의 삶과 신앙의 유산을 고이 나누고 싶습니다”고 말했다.
뉴욕한신동문회(회장 조원태 목사)는 고 문동환 목사 추모예배를 3월 11일(월) 오후 7시 30분 뉴욕우리교회(53-71 72nd Maspeth, NY 11378)에서 드린다. 문의 718-309-6980.
▲2012년 "바벨탑과 떠돌이" 출판기념회에서 문동환 목사와 가족(문혜림 사모와 아들), 오른쪽은 함성국 목사
▲2009년 뉴욕에서 한종은 목사의 아들에게 세례를 집례하는 문동환 목사
1.
문동환 목사는 1990년대부터 뉴저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2009년 한 교회의 설립예배에서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한다. 한국처럼 교회가 성공하는 나라는 없다. 그런데 그것이 부패를 방지하는가? 교회 안에도 부패가 들어와 있다. 우리가 과연 소금인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검토해야 한다. 복음이라고 전하고 있는 것이 부패를 방지하는가? 그것이 중요한 기준이다. 그냥 아름다운 약속만 하는 복음이 아니라 기쁨을 가져오고 부패가 사라지는 복음이어야 한다.
부패와 탐욕이 가정과 학교 그리고 교회까지 들어와 파괴하고 비참하게 만든다. 소금교회는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는가? 소금역할을 하려면 무엇이 우리를 부패하게 만드는지 알아야 한다. 부패하는 원인을 지적하고 극복하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먼저 소금인가를 반성해야 한다. 소금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 생명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 속에 사랑이 있는지 돌아보라. 부패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지를 알고 소금이 되어 악을 녹이고 물리쳐야 한다."
2.
고 문동환 목사의 1백여 평생에 대한 소개를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2012년 문동환 목사가 출판한 <바벨탑과 떠돌이>에 나오는 문 목사에 대한 소개가 고인이 원하는 내용이라 믿고 소개한다.
1921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민족주의 운동과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였던 명동총에서 성장하면서, 어려서부터 민족과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삶과 기독교 목사로서의 삶에 뜻을 두었다. 서울의 조선학교(한신대 전신)를 졸업한 뒤, 웨스턴신학교, 프린스턴신학교를 거쳐 하트퍼드 신학대학에서 종교교육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에 돌아와 모교인 한국신학대학 기독교교육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한편, 서울의 수도교회에서 목회했다. 그러던 중에 뜻이 맞는 청년들과 함께 ‘새벽의 집’을 열어 생명문화를 일구기 위한 공동체 생활을 했다.
1975년 유신정권의 탄압으로 한국신학대학에서 해직한 뒤에, 해직 교수 및 민주 인사들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실험교회인 갈릴리교회를 공동 목회로 꾸렸고, 1976년 3.1민주구국선언문 사건으로 투옥되어 2년 가까이 복역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민중의 실체에 대해 통찰하면서 민중신학에 입각한 민중운동에 깊이 천착하게 되었고, 그 뒤 동일방직 및 와이에이치 노조원의 투쟁을 지원하다 다시 투옥되어 복역했다. 1976년 10.26으로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자 한국신학대학에 복직했으나 신군부의 등장으로 해직과 더불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고, 미국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과 더불어 목회 생활을 하다가 1985년에 한국에 돌아와 한신대에 다시 복직했다. 정년 퇴임 후에 재야에서 민주화 활동을 하던 중,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1988년에 정치에 발을 들여놓아 평민당 수석부총재를 역임했고, 국회 5.18광주민주화 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정치 활동을 접은 1991년 이래로 미국에서 살고 있으며 지금은 주로 젊은 목회자들과 함께 성서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고향에서 밀려나 저임금 노예로 팔려가는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그런 비참한 삶의 구조적 원인인 신 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민중신학을 더욱 심화한 ‘떠돌이신학’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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