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교회 아특새, 한규삼 목사가 전하는 새해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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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5-01-03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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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는 2015년 신년을 맞이하여 3일간 새벽과 저녁 '아특새(아주 특별한 새해)' 집회를 열었다. 1월 2일(금) 저녁에는 한규삼 목사(뉴저지초대교회)를 강사로 열렸다. 뉴저지 초대교회 홈페이지 담임목사 소개란에는 "해맑은 미소가 매력적인 목회자"라고 한규삼 목사를 소개하고 있지만, 찬양교회 허봉기 목사의 미소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주게 한다. 두 목사는 또 한국의 대치동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한 공통점이 있다. 3일(토) 저녁에는 원로 조정칠 목사(뉴욕목사회 전임회장)가 말씀을 전한다.
▲허봉기 목사와 한규삼 목사
한규삼 목사는 마태복음 5:1-3을 본문으로 "예수와 행복"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흔히들 새해를 맞이하면 복을 많이 받으라는 이야기를 한다. 한 목사는 예수님이 주시는 복, 특히 팔복중 심령이 가난 한 자의 복을 신년 찬양교회 성도들에게 선물했다. 한 목사는 복이 무엇인가에서 부터 시작해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왜 복이 있는가를 설명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와 심령이 부유한 자의 차이, 그리고 현실이 가난한 것과 심령이 가난 한 것과의 차이를 설명한 후, 세속주의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또 심령이 가난한 것이 복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심령이 가난한 상태를 유지할 것인가를 나누었다. 한 목사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고 반드시 심령이 가난해 지는 것이 아니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가 없는 사람이 심령을 가난하게 유지하는 방법은 바로 예배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말씀내용이다.
▲설교하는 한규삼 목사
오늘은 새해를 맞아 간단한 것을 생각해보자. 어른들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선포했던 "예수 믿고 복 받자"라는 말씀이 있다. 다수 유치해 보일 수 있지만 이 말씀 속에 있는 진짜 복음의 진수를 생각해보자. 여러분들은 예수 믿고 복 받았는가.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것은 초기 한국교회에서 전도하는 방법이다. 물론 좀 잘못되어서 기복주의로 흐른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면 무엇이 기복주의이고 무엇이 복음적인 것인가를 구별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예수믿고 복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분이나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는 사람을 위해서 오늘 말씀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예수 믿고 좋아졌는가. 예수 믿고 인간의 기본적인 문제는 해결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없던 행복이 생기기도 하고, 고통스럽고 불편한 병이 있었다면 해결되기도 하고, 마음속에는 즐거움이 있어서 예수 믿으면 좀 달라져야 하는 것들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예수 믿고 그런 복을 받았는가. 복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해주면 복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겠다는 분들이 있을지 모른다. 오늘은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하신 팔복중 한 복을 다루게 된다. 복이라는 것은 행복을 의미한다. 행복은 형통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여러분은 행복한가.
성탄절에는 가끔 교회에 안 나오던 교인의 자녀들이 나온다. 지난 성탄절에도 한 자녀가 인사하러 왔다. 전에는 너무 잘나가서 찔러도 안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난번에는 뭔가 피곤한 것 같아서 이때가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아닌 가해서 도전했다. 도전하기를, 아무리 잘나가는 사람도 결국은 이 세상 속에서 한계를 만나게 된다. 그때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없으면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참 어렵다고 몇 마디를 했더니, 갑자기 눈이 커지면서 스펀지처럼 그 말씀을 받아들였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 세상에 행복이라는 것은 구약적으로 정리해보면 형통이다. 형통한 것이 행복이다.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형통하냐' 하는 또 다른 형태의 질문이 된다. 시편 1:3에는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형통을 설명하고 있다. 이 말씀을 보면 형통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이라는 것이 내가 원하는 어떤 것들을 무한대로 가져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가운데 있어야 할 것이 있고,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제자리에 있고, 필요한 것이 공급되어질 때 이것이 형통이고 행복한 모습이라고 구약에서 정의를 하고 있다.
이제 신약에서 넘어오면서 예수님은 행복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제일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이야기는 역설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가난하기 싫어한다. 가끔은 하나님 앞에 완전히 깨어져서 나는 철저히 가난해도 괜찮다는 사람이 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적당이 있다는 뜻이나 조금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찢어지게 가난한 것이다. 물질적으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아보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가난은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이 아니고, 가난하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가난이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역설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행복은 역설 속에 있다. 역설을 이해하는데 진짜 행복이 있다. 뻔 한 것에서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설이 이해되어질 때 진짜 행복이 나온다. 가난한 것은 좋은 것이 아닌데 심령이 가난한 것이 참 좋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을 때 행복이 온다.
역설이 행복이라는 것은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도 역설이다. 원수를 어떻게 사랑하는가.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는 역설을 내가 깨닫게 되면 그 안에 행복이 있다. 사람은 가난한 것을 원하지 않지만 가난해지는 것도 축복이 될 수 있으며, 행복이 될 수 있다고 선포한다. 마태복음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는데, 누가복음을 보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 종합해보면 예수님은 때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때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심령이 가난한 자 안에는 진짜 가난한 사람도 있다. 그래서 가난도 복이 될 수 있다. 교회에서 우리 모두 가난해 지자고 유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혹 여러분이 가난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그 속에서도 행복할 요소가 있다고 예수님은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진짜 물질적으로 가난하지 않다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 심령이 가난해짐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해주시고 있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와 심령이 부유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가 왜 복이 있는가. 역으로 심령이 부유한 자는 누구인가. 누가복음 18:10-14를 보면 성전에 올라가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바리새인은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라며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기도를 하고 있다. 그 모습을 살펴보면 심령이 가난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자기 의와 자기중심으로 가득차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세리에게는 바리새인과 반대되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심령이 가난해 지는 것이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요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지만 우리의 죄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잘 드러나지 않고 가리어져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지 않는 상황속에서 스스로 부유해지려고 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있기에 내 마음이 가난해지면 내 마음속에 참 하나님의 형상을 닮으려는 것이 있는데, 우리는 자꾸 마음이 가난해지지 못하고 스스로 높이고 스스로 부유하게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정말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이 행복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어떻게 심령이 가난한 상태로 남아있을 수 있으며, 내 자신의 영혼을 가난한 상태에 묶어둘 수 있을까 하는 놀라운 진리를 배운다면 우리가 새해 우리들의 삶가운데 놀라운 변화와 행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해서 이 말씀을 가지고 왔다.
심령이 가난해 지는 것이 어떻게 행복이 되는가
심령이 가난해 지는 것이 어떻게 행복이 되는가. 참신앙은 심령이 가난할 때 특별히 우리 마음이 가난해 질때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참신앙은 언제 생기느냐 하면 순수할 때 생기고 어려울 때 생긴다. 이때가 예수 믿기 참 좋을 때이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다. 순수한 때가 예수 받아들이기 좋을 때로 옛날에는 순수한 때가 중학생 시기였다면 이제는 초등학교 1-2학년 시기이다. 그래서 유년 주일학교때 신앙교육을 잘해야 한다.
순수할 때가 예수 믿기가 좋을 때이고, 또 다른 때가 어려울 때가 예수믿기 좋을 때이다. 여러분들은 언제 예수를 잘 믿었는지 생각해보라. 어려운 때인가 편안할 때인가. 다수가 어려울 때라고 할 것이다. 그것이 정상이다. 그렇기에 가난할 때가 예수님을 믿기에 좋을 때이다. 절실함이 있을 때 예수님 앞에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여러분들은 절실한가. 만약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 무엇을 해 주신다고 하시면 무엇을 구할 것인가. 우리들은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이 막상 나에게 물으시면 준비 안 되어 있는 성도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준비 안된 분은 당황하지 말고 앞으로 이렇게 해 보라. 성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인데 우리가 기도제목이 막혀있을 때 주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구하라.
절실할 때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다. 심령이 가난해져 절실할 때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행복이기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지극이 옳다는 논리에 도달하는 것이 우리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 절실함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주님 앞에 기도제목을 구하고 하나님을 구할 때 특별한 것이 없다면 주님의 영광을 보기 원한다는 기도제목을 구할 수 있기를 축복한다.
심령이 가난과 현실의 가난
본격적으로 심령이 가난한 것이 어떻게 복이 되는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심령이 가난하면 예수를 믿을 수 있는 더 좋은 조건이 되는 것은 분명이 맞다. 모든 일이 잘될 때 보다 뭔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예수님을 붙들고 예수님에게 나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 분명이 맞다. 그런데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누님이 암으로 마지막 상태에 있을 때 심방을 했는데 누님이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니?" 이런 질문을 했다. 그 질문을 받고 당황하면서 고민을 하다가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해야지"라고 답했다. 누님이 "그렇지"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 두 가지 마음이 있다고 했다. 살 날이 얼마 안남았으니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마음 한편에는 이제 남은 며칠은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사모가 되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못살아보았는데 남은 기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누님은 그래도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했다. 이 이야기가 상당히 깊이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
우리는 심령이 가난해지면 행복하다는 것을 아는데 막상 심령이 가난해 져야 할 때에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져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한구석에서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해진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조건임으로 새해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여러분은 심령이 가난해지는 복을 받기를 축복한다.
심령이 가난해 지는 것은 현실이 가난해 지는 것과는 다른 축복이 있다. 현실적으로 찢어지게 가난하다면 어쩌면 그것은 내 영혼을 어둡게 하고 힘들게 만들 수 있다. 하나님은 훈련이 안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안하실 것 같다. 하나님에게 구할 것은 성경에 나와있는 그대로 신약적으로 말하면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 반드시 들어주실 것을 믿는다. 구약적으로 말하면 부하게도 말고 가난하게도 말고 하옵소서 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가난해질수록 싱그러워지는 우리의 영혼
그런데 여기에 오묘한 비밀이 있다.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이 어떻게 만드셨는가 하면 가난해질수록 싱그러워지며 싱싱하게 된다. 육신이 부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교만해지는 것이 문제이다. 세리의 기도처럼 우리의 심령속에 가난한 것이 없어지는 것이 문제이다. 세속주의가 겁이 나는 것은 계속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지지 못하도록 만든다. 내 힘으로 하고 내 마음대로 멋지게 살아보라고 유혹한다. 그 세속주의가 말하는 원리속에 일단 친숙해지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축복을 점점 멀리하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만드셨는가 하면 우리의 심령은 가난해질수록 더 싱그러워진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훈련이 안된 상태에서 찢어지게 가난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훈련된 사람에게는 축복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삶을 망가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심령은 가난해지는 훈련을 하면 할수록 그 안에 진짜 이것이 복이구나,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의 조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이 우리의 영혼이 더 싱그럽게 보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여러분에게 선포해 드릴 수 있다.
로마서 14:17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지 않다는 말씀으로 가난해지는 축복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심령이 가난해지면 진짜 자기비하를 하지 않는다. 심령이 진짜 가난해지면 열등감이 없어진다. 열등감을 느낄 수 있는 겨를이 없다. 우울증도 마찬가지이다. 우울중의 명약은 성경에서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고, 다른 한 가지는 마음이 가난해지면 우울할 수 있는 겨를이 없다. 수많은 자기비하와 열등의 문제, 그리고 우울의 문제가 마음이 가난해지는 법을 구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채우고 자기 자신으로 교만해지는 우리의 잘못된 습관 때문에 생긴 일이다. 심령이 진짜 가난해 지기를 축복한다. 그럴 때 가난해진 심령 안에서 우리의 영혼은 싱싱하게 소생한다.
심령의 가난함을 잘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심령이 가난한 모습을 삶가운데 어떻게 적용해 볼 것인가. 진짜 여러분들이 새해에 심령이 가난해져서 행복하기 원한다면 예수님이 가르쳐준 산상설교의 첫 번째 성경의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에서 어떻게 하면 심령이 가난해 질 수 있을까. 내가 어려운 일이 생긴다고 심령이 가난해 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심령이 가난해 질 수 있는 조건은 되는데 늘 어려운 일이 있다고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은 아니다. 또 한 가지, 여러분 중에 별로 어려움이 없는 분은 어떻게 심령의 가난함을 유지할 것인가. 정말 누구나가 심령의 가난함을 잘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저는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라고 믿는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이 사마리아의 수가 성 여인을 만난다. 인생이 완전히 망가져 사람들이 인간취급도 안하는 삶을 사는 여인이 메시아하고 생각되어지는 특별한 분을 만났을 때 던지는 질문이 이제 내가 어떻게 살 수 있을까가 아니라, 예배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다. 저는 역사적 사건속에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다고 본다. 수가성 여인의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인간 전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까지 생각할 수 있다. 여인은 예배의 장소에 대해 묻고 있는데 예수님은 요한복음 4:24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인들이 사용하는 언어기법중에 명사 두 개를 붙여놓으면 뒤에 있는 명사가 앞에 있는 명사를 꾸미는 기법이 있다. 그러면 영과 진리라는 말은 진리의 영으로 예배드린다고 보면 된다. 그것은 성령으로 예배드리는 것이다. 보혜사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이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심령이 가난해진다는 것은 내 영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은 내가 주님 앞에 예배드리는 예배자리에 설 때마다 영과 진리, 진리의 영으로 예배드리면 그 심령은 가난한 심령이 된다. 이 말씀이 올 한해에 잘 기억되는 말씀이 되기를 소원한다.
말씀의 결론
심령이 가난한 것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내 삶이 절실할 때 내 마음대로 살지 말고 주님을 찾으라. 나에게 절실한 삶의 문제가 있을 때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꼭 가까워지라. 반면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주의할 때이다. 무조건 내 삶이 어렵다고 주님 앞에 가까이 나갈 수 없다. 그래서 내 삶이 어려워지고 나에게 절실함이 있고 기도제목이 있고 뭔가 문제가 있을 때 주님 앞에 더 힘써 나가라. 그런 문제나 절실함이 없을 때는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그 자리에 서라. 그래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주님 앞에 드려질 때 마다 나의 심령은 늘 가난한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영혼은 가난해지고 계속 가난해져도 절대로 멍이 안든다. 절대로 그 영혼은 나빠지지 않는다. 영혼은 가난해질수록 싱그러워지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을 유지할 때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는 복이 있을 것이다. 축복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서 새해 한해 많은 행복을 누리라.
ⓒ 아멘넷 뉴스(USAamen.net)
▲허봉기 목사와 한규삼 목사
▲허봉기 목사와 한규삼 목사
한규삼 목사는 마태복음 5:1-3을 본문으로 "예수와 행복"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흔히들 새해를 맞이하면 복을 많이 받으라는 이야기를 한다. 한 목사는 예수님이 주시는 복, 특히 팔복중 심령이 가난 한 자의 복을 신년 찬양교회 성도들에게 선물했다. 한 목사는 복이 무엇인가에서 부터 시작해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왜 복이 있는가를 설명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와 심령이 부유한 자의 차이, 그리고 현실이 가난한 것과 심령이 가난 한 것과의 차이를 설명한 후, 세속주의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또 심령이 가난한 것이 복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심령이 가난한 상태를 유지할 것인가를 나누었다. 한 목사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고 반드시 심령이 가난해 지는 것이 아니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가 없는 사람이 심령을 가난하게 유지하는 방법은 바로 예배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말씀내용이다.
▲설교하는 한규삼 목사
오늘은 새해를 맞아 간단한 것을 생각해보자. 어른들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선포했던 "예수 믿고 복 받자"라는 말씀이 있다. 다수 유치해 보일 수 있지만 이 말씀 속에 있는 진짜 복음의 진수를 생각해보자. 여러분들은 예수 믿고 복 받았는가.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것은 초기 한국교회에서 전도하는 방법이다. 물론 좀 잘못되어서 기복주의로 흐른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면 무엇이 기복주의이고 무엇이 복음적인 것인가를 구별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예수믿고 복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분이나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는 사람을 위해서 오늘 말씀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예수 믿고 좋아졌는가. 예수 믿고 인간의 기본적인 문제는 해결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없던 행복이 생기기도 하고, 고통스럽고 불편한 병이 있었다면 해결되기도 하고, 마음속에는 즐거움이 있어서 예수 믿으면 좀 달라져야 하는 것들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예수 믿고 그런 복을 받았는가. 복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해주면 복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겠다는 분들이 있을지 모른다. 오늘은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하신 팔복중 한 복을 다루게 된다. 복이라는 것은 행복을 의미한다. 행복은 형통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여러분은 행복한가.
성탄절에는 가끔 교회에 안 나오던 교인의 자녀들이 나온다. 지난 성탄절에도 한 자녀가 인사하러 왔다. 전에는 너무 잘나가서 찔러도 안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난번에는 뭔가 피곤한 것 같아서 이때가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아닌 가해서 도전했다. 도전하기를, 아무리 잘나가는 사람도 결국은 이 세상 속에서 한계를 만나게 된다. 그때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없으면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참 어렵다고 몇 마디를 했더니, 갑자기 눈이 커지면서 스펀지처럼 그 말씀을 받아들였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 세상에 행복이라는 것은 구약적으로 정리해보면 형통이다. 형통한 것이 행복이다.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형통하냐' 하는 또 다른 형태의 질문이 된다. 시편 1:3에는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형통을 설명하고 있다. 이 말씀을 보면 형통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이라는 것이 내가 원하는 어떤 것들을 무한대로 가져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가운데 있어야 할 것이 있고,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제자리에 있고, 필요한 것이 공급되어질 때 이것이 형통이고 행복한 모습이라고 구약에서 정의를 하고 있다.
이제 신약에서 넘어오면서 예수님은 행복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제일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이야기는 역설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가난하기 싫어한다. 가끔은 하나님 앞에 완전히 깨어져서 나는 철저히 가난해도 괜찮다는 사람이 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적당이 있다는 뜻이나 조금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찢어지게 가난한 것이다. 물질적으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아보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가난은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이 아니고, 가난하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가난이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역설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행복은 역설 속에 있다. 역설을 이해하는데 진짜 행복이 있다. 뻔 한 것에서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설이 이해되어질 때 진짜 행복이 나온다. 가난한 것은 좋은 것이 아닌데 심령이 가난한 것이 참 좋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을 때 행복이 온다.
역설이 행복이라는 것은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도 역설이다. 원수를 어떻게 사랑하는가.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는 역설을 내가 깨닫게 되면 그 안에 행복이 있다. 사람은 가난한 것을 원하지 않지만 가난해지는 것도 축복이 될 수 있으며, 행복이 될 수 있다고 선포한다. 마태복음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는데, 누가복음을 보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 종합해보면 예수님은 때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때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심령이 가난한 자 안에는 진짜 가난한 사람도 있다. 그래서 가난도 복이 될 수 있다. 교회에서 우리 모두 가난해 지자고 유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혹 여러분이 가난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그 속에서도 행복할 요소가 있다고 예수님은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진짜 물질적으로 가난하지 않다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 심령이 가난해짐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해주시고 있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와 심령이 부유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가 왜 복이 있는가. 역으로 심령이 부유한 자는 누구인가. 누가복음 18:10-14를 보면 성전에 올라가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바리새인은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라며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기도를 하고 있다. 그 모습을 살펴보면 심령이 가난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자기 의와 자기중심으로 가득차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세리에게는 바리새인과 반대되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심령이 가난해 지는 것이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요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지만 우리의 죄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잘 드러나지 않고 가리어져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지 않는 상황속에서 스스로 부유해지려고 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있기에 내 마음이 가난해지면 내 마음속에 참 하나님의 형상을 닮으려는 것이 있는데, 우리는 자꾸 마음이 가난해지지 못하고 스스로 높이고 스스로 부유하게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정말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이 행복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어떻게 심령이 가난한 상태로 남아있을 수 있으며, 내 자신의 영혼을 가난한 상태에 묶어둘 수 있을까 하는 놀라운 진리를 배운다면 우리가 새해 우리들의 삶가운데 놀라운 변화와 행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해서 이 말씀을 가지고 왔다.
심령이 가난해 지는 것이 어떻게 행복이 되는가
심령이 가난해 지는 것이 어떻게 행복이 되는가. 참신앙은 심령이 가난할 때 특별히 우리 마음이 가난해 질때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참신앙은 언제 생기느냐 하면 순수할 때 생기고 어려울 때 생긴다. 이때가 예수 믿기 참 좋을 때이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다. 순수한 때가 예수 받아들이기 좋을 때로 옛날에는 순수한 때가 중학생 시기였다면 이제는 초등학교 1-2학년 시기이다. 그래서 유년 주일학교때 신앙교육을 잘해야 한다.
순수할 때가 예수 믿기가 좋을 때이고, 또 다른 때가 어려울 때가 예수믿기 좋을 때이다. 여러분들은 언제 예수를 잘 믿었는지 생각해보라. 어려운 때인가 편안할 때인가. 다수가 어려울 때라고 할 것이다. 그것이 정상이다. 그렇기에 가난할 때가 예수님을 믿기에 좋을 때이다. 절실함이 있을 때 예수님 앞에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여러분들은 절실한가. 만약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 무엇을 해 주신다고 하시면 무엇을 구할 것인가. 우리들은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이 막상 나에게 물으시면 준비 안 되어 있는 성도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준비 안된 분은 당황하지 말고 앞으로 이렇게 해 보라. 성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인데 우리가 기도제목이 막혀있을 때 주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구하라.
절실할 때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다. 심령이 가난해져 절실할 때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행복이기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지극이 옳다는 논리에 도달하는 것이 우리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 절실함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주님 앞에 기도제목을 구하고 하나님을 구할 때 특별한 것이 없다면 주님의 영광을 보기 원한다는 기도제목을 구할 수 있기를 축복한다.
심령이 가난과 현실의 가난
본격적으로 심령이 가난한 것이 어떻게 복이 되는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심령이 가난하면 예수를 믿을 수 있는 더 좋은 조건이 되는 것은 분명이 맞다. 모든 일이 잘될 때 보다 뭔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예수님을 붙들고 예수님에게 나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 분명이 맞다. 그런데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누님이 암으로 마지막 상태에 있을 때 심방을 했는데 누님이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니?" 이런 질문을 했다. 그 질문을 받고 당황하면서 고민을 하다가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해야지"라고 답했다. 누님이 "그렇지"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 두 가지 마음이 있다고 했다. 살 날이 얼마 안남았으니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마음 한편에는 이제 남은 며칠은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사모가 되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못살아보았는데 남은 기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누님은 그래도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했다. 이 이야기가 상당히 깊이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
우리는 심령이 가난해지면 행복하다는 것을 아는데 막상 심령이 가난해 져야 할 때에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져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한구석에서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해진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조건임으로 새해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여러분은 심령이 가난해지는 복을 받기를 축복한다.
심령이 가난해 지는 것은 현실이 가난해 지는 것과는 다른 축복이 있다. 현실적으로 찢어지게 가난하다면 어쩌면 그것은 내 영혼을 어둡게 하고 힘들게 만들 수 있다. 하나님은 훈련이 안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안하실 것 같다. 하나님에게 구할 것은 성경에 나와있는 그대로 신약적으로 말하면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 반드시 들어주실 것을 믿는다. 구약적으로 말하면 부하게도 말고 가난하게도 말고 하옵소서 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가난해질수록 싱그러워지는 우리의 영혼
그런데 여기에 오묘한 비밀이 있다.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이 어떻게 만드셨는가 하면 가난해질수록 싱그러워지며 싱싱하게 된다. 육신이 부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교만해지는 것이 문제이다. 세리의 기도처럼 우리의 심령속에 가난한 것이 없어지는 것이 문제이다. 세속주의가 겁이 나는 것은 계속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지지 못하도록 만든다. 내 힘으로 하고 내 마음대로 멋지게 살아보라고 유혹한다. 그 세속주의가 말하는 원리속에 일단 친숙해지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축복을 점점 멀리하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만드셨는가 하면 우리의 심령은 가난해질수록 더 싱그러워진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훈련이 안된 상태에서 찢어지게 가난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훈련된 사람에게는 축복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삶을 망가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심령은 가난해지는 훈련을 하면 할수록 그 안에 진짜 이것이 복이구나,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의 조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이 우리의 영혼이 더 싱그럽게 보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여러분에게 선포해 드릴 수 있다.
로마서 14:17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지 않다는 말씀으로 가난해지는 축복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심령이 가난해지면 진짜 자기비하를 하지 않는다. 심령이 진짜 가난해지면 열등감이 없어진다. 열등감을 느낄 수 있는 겨를이 없다. 우울증도 마찬가지이다. 우울중의 명약은 성경에서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고, 다른 한 가지는 마음이 가난해지면 우울할 수 있는 겨를이 없다. 수많은 자기비하와 열등의 문제, 그리고 우울의 문제가 마음이 가난해지는 법을 구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채우고 자기 자신으로 교만해지는 우리의 잘못된 습관 때문에 생긴 일이다. 심령이 진짜 가난해 지기를 축복한다. 그럴 때 가난해진 심령 안에서 우리의 영혼은 싱싱하게 소생한다.
심령의 가난함을 잘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심령이 가난한 모습을 삶가운데 어떻게 적용해 볼 것인가. 진짜 여러분들이 새해에 심령이 가난해져서 행복하기 원한다면 예수님이 가르쳐준 산상설교의 첫 번째 성경의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에서 어떻게 하면 심령이 가난해 질 수 있을까. 내가 어려운 일이 생긴다고 심령이 가난해 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심령이 가난해 질 수 있는 조건은 되는데 늘 어려운 일이 있다고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은 아니다. 또 한 가지, 여러분 중에 별로 어려움이 없는 분은 어떻게 심령의 가난함을 유지할 것인가. 정말 누구나가 심령의 가난함을 잘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저는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라고 믿는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이 사마리아의 수가 성 여인을 만난다. 인생이 완전히 망가져 사람들이 인간취급도 안하는 삶을 사는 여인이 메시아하고 생각되어지는 특별한 분을 만났을 때 던지는 질문이 이제 내가 어떻게 살 수 있을까가 아니라, 예배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다. 저는 역사적 사건속에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다고 본다. 수가성 여인의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인간 전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까지 생각할 수 있다. 여인은 예배의 장소에 대해 묻고 있는데 예수님은 요한복음 4:24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인들이 사용하는 언어기법중에 명사 두 개를 붙여놓으면 뒤에 있는 명사가 앞에 있는 명사를 꾸미는 기법이 있다. 그러면 영과 진리라는 말은 진리의 영으로 예배드린다고 보면 된다. 그것은 성령으로 예배드리는 것이다. 보혜사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이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심령이 가난해진다는 것은 내 영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은 내가 주님 앞에 예배드리는 예배자리에 설 때마다 영과 진리, 진리의 영으로 예배드리면 그 심령은 가난한 심령이 된다. 이 말씀이 올 한해에 잘 기억되는 말씀이 되기를 소원한다.
말씀의 결론
심령이 가난한 것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내 삶이 절실할 때 내 마음대로 살지 말고 주님을 찾으라. 나에게 절실한 삶의 문제가 있을 때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꼭 가까워지라. 반면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주의할 때이다. 무조건 내 삶이 어렵다고 주님 앞에 가까이 나갈 수 없다. 그래서 내 삶이 어려워지고 나에게 절실함이 있고 기도제목이 있고 뭔가 문제가 있을 때 주님 앞에 더 힘써 나가라. 그런 문제나 절실함이 없을 때는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그 자리에 서라. 그래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주님 앞에 드려질 때 마다 나의 심령은 늘 가난한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영혼은 가난해지고 계속 가난해져도 절대로 멍이 안든다. 절대로 그 영혼은 나빠지지 않는다. 영혼은 가난해질수록 싱그러워지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을 유지할 때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는 복이 있을 것이다. 축복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서 새해 한해 많은 행복을 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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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봉기 목사와 한규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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