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목 목사 "목회자의 재충전 모델 김익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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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4-12-24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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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목사 안수식에서 권면을 한 적이 있다. 목사 안수를 받는 그분께 주는 권면을 준비하면서, 예전 제가 목사 안수를 받았던 때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목사가 되고서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어떤 목사인가? 목사로서 나의 삶은 어떠했는가? 순간 권면의 원고를 준비하던 펜을 놓아버렸다. 나는 권면을 할 만큼의 목사가 되질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목사 안수식에 권면을 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목회자를 떠올렸다. 지금부터 64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다. 그리고 목회도 일제 강점기에 하신 분이다. 저와는 너무나 시간적인 간격이 있는 분이다. 한 번도 뵙지도 못했고, 그분의 설교를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러나 제가 교회사를 전공하면서 만났던 분이다. 그분의 생애와 목회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분을 이 기회에 다시 지면위로 모시고 싶은 것은 이제 목회를 시작하는 분들에겐 목회자의 모델로, 한참 목회 중에 있는 분들에겐 재충전의 모델로 소개하고 싶기 때문이다..
김익두 목사의 출생과 성장, 입교, 목회와 순교
김익두 목사는 1874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났다. 유학자 집안의 독자였기에 서당에서 학업을 하였고 16세에 과거를 보았지만 낙방하였다. 장사에 손을 대었지만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어버렸다. 이후로 방랑이 시작되었다. 안악골의 깡패가 되어 사람들을 괴롭혔다. 그러다가 안악장터에서 전도지를 받았는데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는 전도지 내용에 큰 자극을 받고서 교회를 나가기 시작하였다. 안악읍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김익두 성도는 이미 성경을 100독한 뒤였다.
김익두 목사의 첫 목회지는 재령이다. 그 후 소안론 선교사가 신천에 개척 전도를 부탁하자 1901년 신천에 오게 되었다. 신천에 온지 10개월 후에 전도인 김익두는 신천읍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리고 1906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졸업한 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신천읍교회에서 목회는 24년 계속되었다. 1934년 신천읍 교회 부흥회를 인도했던 김인서 목사는 당시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의 대 전도자가 24년 정력을 기울인 신천읍교회의 첫 소감은 견실하다는 것이니 바람불고 장마물이 나도 흔들림이 없을 반석 위에 선 교회다. 그리고 모든 교인이 김 목사는 아버지와 같다는 경의와 신뢰를 가지고 있음을 보았다.”
1922년에서 1927년까지는 남대문 교회에서 목회를 하였고 1935년 승동교회 담임목사가 되어 3년 6개월동안 목회하다가 1938년 일제의 강제 파직으로 목사직을 박탈당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1946년 신천 서부교회에 부임하여 순교할 때까지 목회하였다. 1950년 10월 14일 김익두 목사는 국군이 승승장구하여 북한으로 쳐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으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였다. 축도로 새벽기도회를 마치자 포위하고 있던 공산군들이 예배당으로 들어와 총을 쏘아 김익두 목사를 쓰러뜨렸다. 한국 교회사에서 우뚝 솟은 거목으로서 민족 복음화를 위해 일생을 헌신한 김익두 목사는 신천 서부교회에서 생애를 마쳤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
김익두 목사는 한국교회의 부흥회를 대명할 인물이다. 한국교회 부흥운동사에서 1기는 길선주 목사가 활동하던 시기이고, 2기는 김익두 목사 활동기이다. 3.1운동 직후의 시대적 상황은 백성에게 희망을 주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김익두 목사는 전국을 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총부흥회 인도횟수가 776회인 것을 볼 때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부흥회를 다녔는지 알 수 있다. 주기철 목사도 경남 창원 웅천에서 있었던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 은혜받고 192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조선신학교를 세운 김재준 목사도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의 특징은 대형집회의 성격이고 치병이적이다. 그의 부흥회에 몰려오는 사람들은 환자였다. 많은 환자들이 고침을 받았다. 그래서 임택권 목사는 김익두 목사의 치병이적을 <이적명증>이란 책으로 남겼다. 김익두 목사가 고친 환자들의 명단과 병명을 기록한 책이다. 김익두 목사가 치료한 환자만 1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김익두 목사의 신앙양태
첫째, 기도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였다. 김익두 목사는 기도를 특별히 강조했다. 그의 치병 사역도 기도 치병이었다. 환자를 위해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였고 2,3일 금식하면서 기도하였다. 칠중의 좁은 문이란 설교에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7개의 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네 번째가 기도문이라 하였다.
둘째, 성령의 임재를 강조하였다. 김익두 목사는 성령에 대해 폭넓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성령받는 것을 네 가지 항목으로 설명하였다. 첫째 일시적 감화, 둘째 외감, 셋째 내감, 넷째 성령의 충만이다. 그리고 성령충만의 다섯 가지 특징을 말하였다. 첫째 이길 수 있는 열심이다. 둘째 이길 수 없는 사랑이다. 셋째 넘치는 진리다. 네째 기쁨의 넘침이다. 다섯째 말할 수 없는 능력이다.
셋째,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다. 그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경은 신령한 양식이다. 기도와 성경공부를 병행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기도는 호흡이요 성경공부는 영양섭취이다. 신자가 성경을 먹지 아니하고는 성장할 수 없다. 육신의 양식을 먹는 입은 하나뿐이나 신령한 양식 먹는 입은 넷이니 두 눈과 두 귀이다.” 김익두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를 위한 것이며 곧 영생을 위한 것임을 말하면서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임을 강조하였다.
넷째, 김익두 목사의 종말론은 현질서의 종말을 외치고 천국의 도래를 희구하는 것이지만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 현실의 토대위에 선 종말론이다. 칠중의 좁은 문이라 설교에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곱 문을 거쳐야 하는데 일곱문 중에 성결문이 있다. 이것을 현실에서의 거룩한 삶을 요청하는 것이다. 설교 내용을 소개한다. “입교 회개하고 성수주일하며 기도하며 성경 공부함으로 정진 또 정진하여 성결문에 까지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성결문에 들어와서 거룩한 자 되어야 신랑 예수를 영접할 수 있다.”
김익두 목사는 민족의 고난, 세속문명의 혼잡, 사회주의의 공격등 혼란한 시기에 하나님이 보내신 독특한 목회자요 부흥사였다. 그의 외침은 복음주의, 경건주의였다. 그가 남긴 부흥운동의 족적은 그 시대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신앙인들과 목회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세속의 물결위에 선 오늘의 교회와 목회자 신앙인에게 큰 거울이 되리라 여겨진다.
김익두 목사님의 생애와 목회 그리고 그의 신앙이 이민교회와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도전적인 자극이 되어 진정한 교회 개혁과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망해본다.
조인목 목사(뉴저지 온누리교회, 뉴저지 성서대학 학장)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목회자를 떠올렸다. 지금부터 64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다. 그리고 목회도 일제 강점기에 하신 분이다. 저와는 너무나 시간적인 간격이 있는 분이다. 한 번도 뵙지도 못했고, 그분의 설교를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러나 제가 교회사를 전공하면서 만났던 분이다. 그분의 생애와 목회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분을 이 기회에 다시 지면위로 모시고 싶은 것은 이제 목회를 시작하는 분들에겐 목회자의 모델로, 한참 목회 중에 있는 분들에겐 재충전의 모델로 소개하고 싶기 때문이다..
김익두 목사의 출생과 성장, 입교, 목회와 순교
김익두 목사는 1874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났다. 유학자 집안의 독자였기에 서당에서 학업을 하였고 16세에 과거를 보았지만 낙방하였다. 장사에 손을 대었지만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어버렸다. 이후로 방랑이 시작되었다. 안악골의 깡패가 되어 사람들을 괴롭혔다. 그러다가 안악장터에서 전도지를 받았는데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는 전도지 내용에 큰 자극을 받고서 교회를 나가기 시작하였다. 안악읍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김익두 성도는 이미 성경을 100독한 뒤였다.
김익두 목사의 첫 목회지는 재령이다. 그 후 소안론 선교사가 신천에 개척 전도를 부탁하자 1901년 신천에 오게 되었다. 신천에 온지 10개월 후에 전도인 김익두는 신천읍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리고 1906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졸업한 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신천읍교회에서 목회는 24년 계속되었다. 1934년 신천읍 교회 부흥회를 인도했던 김인서 목사는 당시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의 대 전도자가 24년 정력을 기울인 신천읍교회의 첫 소감은 견실하다는 것이니 바람불고 장마물이 나도 흔들림이 없을 반석 위에 선 교회다. 그리고 모든 교인이 김 목사는 아버지와 같다는 경의와 신뢰를 가지고 있음을 보았다.”
1922년에서 1927년까지는 남대문 교회에서 목회를 하였고 1935년 승동교회 담임목사가 되어 3년 6개월동안 목회하다가 1938년 일제의 강제 파직으로 목사직을 박탈당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1946년 신천 서부교회에 부임하여 순교할 때까지 목회하였다. 1950년 10월 14일 김익두 목사는 국군이 승승장구하여 북한으로 쳐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으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였다. 축도로 새벽기도회를 마치자 포위하고 있던 공산군들이 예배당으로 들어와 총을 쏘아 김익두 목사를 쓰러뜨렸다. 한국 교회사에서 우뚝 솟은 거목으로서 민족 복음화를 위해 일생을 헌신한 김익두 목사는 신천 서부교회에서 생애를 마쳤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
김익두 목사는 한국교회의 부흥회를 대명할 인물이다. 한국교회 부흥운동사에서 1기는 길선주 목사가 활동하던 시기이고, 2기는 김익두 목사 활동기이다. 3.1운동 직후의 시대적 상황은 백성에게 희망을 주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김익두 목사는 전국을 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총부흥회 인도횟수가 776회인 것을 볼 때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부흥회를 다녔는지 알 수 있다. 주기철 목사도 경남 창원 웅천에서 있었던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 은혜받고 192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조선신학교를 세운 김재준 목사도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의 특징은 대형집회의 성격이고 치병이적이다. 그의 부흥회에 몰려오는 사람들은 환자였다. 많은 환자들이 고침을 받았다. 그래서 임택권 목사는 김익두 목사의 치병이적을 <이적명증>이란 책으로 남겼다. 김익두 목사가 고친 환자들의 명단과 병명을 기록한 책이다. 김익두 목사가 치료한 환자만 1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김익두 목사의 신앙양태
첫째, 기도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였다. 김익두 목사는 기도를 특별히 강조했다. 그의 치병 사역도 기도 치병이었다. 환자를 위해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였고 2,3일 금식하면서 기도하였다. 칠중의 좁은 문이란 설교에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7개의 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네 번째가 기도문이라 하였다.
둘째, 성령의 임재를 강조하였다. 김익두 목사는 성령에 대해 폭넓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성령받는 것을 네 가지 항목으로 설명하였다. 첫째 일시적 감화, 둘째 외감, 셋째 내감, 넷째 성령의 충만이다. 그리고 성령충만의 다섯 가지 특징을 말하였다. 첫째 이길 수 있는 열심이다. 둘째 이길 수 없는 사랑이다. 셋째 넘치는 진리다. 네째 기쁨의 넘침이다. 다섯째 말할 수 없는 능력이다.
셋째,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다. 그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경은 신령한 양식이다. 기도와 성경공부를 병행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기도는 호흡이요 성경공부는 영양섭취이다. 신자가 성경을 먹지 아니하고는 성장할 수 없다. 육신의 양식을 먹는 입은 하나뿐이나 신령한 양식 먹는 입은 넷이니 두 눈과 두 귀이다.” 김익두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를 위한 것이며 곧 영생을 위한 것임을 말하면서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임을 강조하였다.
넷째, 김익두 목사의 종말론은 현질서의 종말을 외치고 천국의 도래를 희구하는 것이지만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 현실의 토대위에 선 종말론이다. 칠중의 좁은 문이라 설교에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곱 문을 거쳐야 하는데 일곱문 중에 성결문이 있다. 이것을 현실에서의 거룩한 삶을 요청하는 것이다. 설교 내용을 소개한다. “입교 회개하고 성수주일하며 기도하며 성경 공부함으로 정진 또 정진하여 성결문에 까지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성결문에 들어와서 거룩한 자 되어야 신랑 예수를 영접할 수 있다.”
김익두 목사는 민족의 고난, 세속문명의 혼잡, 사회주의의 공격등 혼란한 시기에 하나님이 보내신 독특한 목회자요 부흥사였다. 그의 외침은 복음주의, 경건주의였다. 그가 남긴 부흥운동의 족적은 그 시대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신앙인들과 목회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세속의 물결위에 선 오늘의 교회와 목회자 신앙인에게 큰 거울이 되리라 여겨진다.
김익두 목사님의 생애와 목회 그리고 그의 신앙이 이민교회와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도전적인 자극이 되어 진정한 교회 개혁과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망해본다.
조인목 목사(뉴저지 온누리교회, 뉴저지 성서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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