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준 교수 ① 구약 안식일과 신약 주일의 (불)연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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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5-02-13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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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한인목회연구원(원장 김범수 목사)은 2015년 신년 목회자 세미나와 부흥성회를 "이민 목회와 치유"라는 주제로 1월 26일부터 28일까지 메시야장로교회에서 열었다. 주강사인 김남준 목사(열린교회, 총신대학교 교수)는 "주일성수"에 대해 강의를 이어나갔다. 김남준 교수는 강의를 통해 주일성수에 대한 흥미있는 몇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1.
몇 해 전에 1920년 새문안교회 당회록을 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주일성수를 안하는 교인들을 치리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주일성수에 대해 수차례 경고했으나 말을 듣지 않아 수찬정지등 매주 치리가 이루어진다. 그것을 보면서 교회가 기강을 세우려고 노력했구나 하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치리만을 가지고 안된다는 것이 보였다. 새문안교회도 너무 많은 사람들을 치리해야 하니 어느 시점에 와서 치리를 포기한다.
2.
오래 전 제가 전도사로 봉사하던 교회에서는 주일에 무엇이 필요하게 되어 목사님이 당장 가져오라고 하자, 저는 주일에 교회에서 돈을 안 쓰는데 어떻게 하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담임목사는 "너는 왜 이렇게 머리가 안돌아 가는가. 물건을 지금 가져오고 돈을 내일주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말이 되는 것 같기도 안되는 것 같기도 해서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담임목사가 하라고 하니 하던 시절도 기억난다.
주일성수의 중요성은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지만, 개인의 성향에 따라 혼란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박용규 교수 같은 경우 "주일성수가 흐려지면 위기가 온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김남준 교수는 2014년 합동총회에서 총회의 요청에 따라 준비한 "주일성수"에 대한 논문을 중심으로 강의를 해 나갔다. 김남준 교수는 주일성수에 대한 3가지 이슈 △과연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이 옳은 것인가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이 신학적으로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그러면 주일을 어떻게 지켜져야 거룩하게 지키는 것인가를 중심으로 수차례 강의를 인도했다. 특히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의 불연속성을 강조한 종교개혁자들의 시각과 연속성을 강조한 청교도들의 입장을 설명하며 주일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그러면 결론은 무엇인가? 김남준 교수는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 탁월하지만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상황과 고민하면서 우리의 입술로 고백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주일의 의미를 교인들에게 제대로 가르쳐야 하며, 주일성수를 강제하기 보다는 영혼의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때 주일이 주일되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원리를 따르고 주일에 대한 세부적인 고백들을 개인규범화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멘넷은 두차례에 걸쳐 강의 내용을 소개한다. 다음은 첫 번째 강의 내용이다.
<img src=2015/2/9/100.jpg border=1>
<font color="#005376">▲김남준 총신대학교 교수</font>
교회마다 조금 차이는 있지만 특히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교회에서 연로하시고 신앙의 연륜이 오래된 장로를 비롯한 어른들이 '주일에 뭐 사먹지 말라' '돈을 쓰지 말라'라고 하는 주일성수에 개념과 젊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주일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교회에서 충돌하는 양상을 보게 된다.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한번쯤은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고, 우리의 태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들이 명확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야 교회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다.
<B>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이 옳은 것인가?</B>
주일이라는 말이 성경에 4번 나온다. 주일이라는 것이 영어로 'Lord's day'이다. 문자 그대로 '주님의 날'이다. 성경에는 여러가지 표현을 사용하는데 '주님의 날', '그 주님의 그 날', '그 주님께 속한 날'이라는 표현으로 나오는데, 3번은 종말론적인 심판과 관련해서 나타나고 한번은 그리스도의 날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그 주님께 속한 날"이다. 그 날은 무엇인가? 초대교회 학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 초대교회가 하나님을 예배하기로 정한 날이라고 본다. 이미 초대교회 안에 주일을 지키는 전통이 확고하게 수립되어 있다는 암시를 준다.
안식교 등은 일요일을 주일로 삼는 것 자체가 기독교 배교의 역사와 관련 있다고 해석한다. 그 이유는 당시에 일요일이 태양신 숭배의 날이었기에 그러한 로마의 정책에 굴복해서, 말하자면 기독교가 토요일을 안식을 지키던 신앙의 정절을 꺾고 그 정책에 순응해 버린 것이 주일의 유례라고 본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그 이야기가 맞지 않다. 그 당시에 일요일은 태양의 날인 것은 맞다. 하지만 태양신을 섬기는 날이 아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전부 다 신과 관련이 있는 날이었다. 월요일은 달과 관계있고, 다 관련이 되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구약의 안식일인 토요일을 지키는 것 역시 신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정당한 근거가 있는 비판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3세기경 로마제국 전체에 태양신을 포교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제국 안에 있는 수많은 종교들을 획일적으로 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국민을 통일하려는, 우리나라도 단군을 통해 정신적으로 통일하려고 했던 정도로 어떤 정서적인 국민적인 정서를 통합하려고 하는 시도가 있었지 하나의 종교적인 운동은 아니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은 문제가 없다.
실제로 교회역사에서도 이미 근거를 가지고 있는데, 수많은 초대교회의 문헌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부 활하신 날을 기념해서 모이는 것들이 나타나고 있고, 오히려 그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구속사역이 신약과 구약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심장한 신학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에 무게중심을 두었기에, 사실은 안식일이 바라보았던 그림자들이 주일에서 성취가 되었다고 보았기에 그들은 주일이 신구약 역사 전체에 중심이 된다고 보았다.
예수님은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당신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에 의해 그 의미가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인간에 의해 실패하게 된 것을 구속을 통해 하나님이 되돌리신다고 한다면, 사실은 구속의 사건은 창조를 계승하는 위대한 역사이기에 얼마든지 새로운 안식일이 도입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보여진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까지 말씀하셨다.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와 마리아가 주님을 뵈온 날도 주일이었고, 뵙게 되는 모임도 안식후 첫날이었고, 사도 요한이 계시를 본 것도 주일이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청교도들은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에 대해 아주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성경과 교회역사에 전통에 입각해 볼 때 결코 그것은 우상숭배의 제도에 굴복한 그런 사건이 아니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질문을 하나 한다. 지금은 일요일을 주일로 지킨다. 그런데 정부에서 일요일을 월요일로 옮겼다고 치자. 그렇다면 주일을 어떻게 할것인가? 정부하고 싸워서라도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거나, 정부의 결정과 상관없이 교회가 결정하면 월요일로 옮기면 된다 중 답이 무엇인가? 루터와 칼빈등 종교개혁자들은 공교회가 결정하면 상관없는 것이라고 본다. 교회의 공동의회에서 다른 요일을 주일로 지키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공교회가 결정을 하면 되는 것이라고 루터와 칼빈은 보았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육일 창조하시고 마지막 쉬시는 날이 안식일이다. 주일은 그것이 아니라 첫날이다. 한주일의 시작이다. 의미가 다르다. 그러면 안식일의 개념을 가지고 우리들이 주일을 정한다고 보면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한국에서 비해기를 타고 미동부로 날라오면 하루종일 날아왔는데도 시간이 뒤로 갔다. 어떻게 날짜를 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북반구로 올가가면 6개월이 낮이고 6개월이 밤이다. 이런것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렇기에 계량적인 날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다만 무질서하게 내버려 두면 교회의 질서가 흩어지니 공교회의 결정에 의해서 그렇게 해서 이루어 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일에 대해 여러 견해를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이것은 믿음의 강함과 연약함의 차이였다.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은 6일 창조후에 안식을,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지만 계기적인 한주간의 나중과 처음을 완벽하게 확정하기 어렵다. 계기적인 그날이기 보다는 교회결정에 의해 정해진 주일의 날을 지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만약 주일로 지키는 날을 개인이나 개교회가 함부러 바꿀 수 있다면 혼란과 무질서가 뒤따르기에 하나님의 섭리와 교회의 결정를 따라 역사적으로 지켜온 그날을 그날로 삼을 뿐이다.
<B>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종교개혁자들의 입장-불연속성 강조</B>
안식일과 주일의 신학적인 연속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두가지로 견해가 나뉘게 된다. 구약의 안식일 제도와 신약의 주일제도가 완전히 다른 것이며, 두개가 단절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다. 강조점의 차이이다. 연속에다 강조를 두는가 아니면 불연속에다 강조를 두는가에 따라서 의견이 둘로 나뉘어진다.
먼저 우리 개신교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종교개혁자인 루터나 칼빈같은 사람들은 불연속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 제도가 있고 신약에 주일제도가 있는데 이 두 제도가 신학적인 연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구약의 안식일 제도가 가지고 있는 그림자가 구속사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구약의 안식일 제도와 신약의 사이에는 신학적인 점진적인 계시, 모형과 실체의 완성이라는 관계에 연속성은 있지만 그것이 율법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분명히 그었다. 이것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했던 사람은 루터이다. 루터는 만약에 구약에 안식일의 계명에 나왔기에 우리가 그 유대인들이 지키는 구약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 같은 방식을 주일도 지켜야 한다면 나는 주일에 춤도 추고, 술도 마시고, 노래도 하고 모든 일을 다 해서 결코 이 주일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하게 하겠다 라고 까지 발언한다.
칼빈은 그 입장을 기본적으로 계승한다. 그러면서 몇 가지 사실을 강조한다. 첫째 주일을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기위해 시간을 떼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노동의 의무로 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것들은 충분히 인정을 하면서 루터의 입장을 따른다. 이 입장이 역사적으로 더듬어 보면 어디하고 맞닿는가 하면 특별히 초대교구들과 맞닿는다. 뒤에 4세기로 넘어가면서 엄격주의가 도입되고 엄격한 주일의 규례들이 도입된다.
여기에도 역사적으로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라. 처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고, 성령강림사건이 있었고, 많은 유대인들이 회개하며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신 것을 알게 되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유대인이었다. 그런데 주일에 대해 누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는데 이들이 당연히 주일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처음에는 안식일도 지키고 주일도 모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안식일을 점차 버리면서 주일을 지켰는데 그 방식이 누가 와서 가르쳐 준 것도 아니다. 이들은 평생을 유대인으로 살아왔던 사람인데, 그러니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의미는 알았겠고 의식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도 사도행전 15장에 와서 공의회를 해서 결정할 정도였으니, 그러니 2장에서 성령강림 사건이 나고 15장 올 때까지 정리되지 않았던 신학적인 문제들이 있었다.
평생을 안식일을 지켜오면서 살아온 사람들이니, 구약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방식을 따라서 주일을 지켰던 것이다. 성경에 보면 신약시대에는 선지자가 필요가 없었지만 성경이 완성이 되기 전까지 선지자들이 여전히 존재했다. 그렇게 신약과 구약의 과도기적인 성격 속에서 선지자들이 존재했다. 그러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그런 역사적인 전개의 과정을 밟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엄격하게 안식일을 평생준수하면서 살았던 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주일을 지켰다. 문제는 성령강림사건이 있고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켰던 것, 속사도 교구들과 초대교구들에 오면서 안식일을 지켰던 것, 중세로 넘어오는 것, 종교개혁자들 이후에 개혁파 정통주의자들과 이후의 계승자들 그렇게 각각 구간이 나누어지는데, 처음에 성령강림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안식일을 지킬때에 그것을 청교도들은 모델로 본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은 초대교회에서 모델을 찾지 않고 초대교구들에서 모델을 찾는다. 초대교구들의 주일에 대한 생각이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의 뿌리였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자유, 그리고 율법에서 정한 안식일이 계승이 아니라 안식일이 바라보았던 그림자 같은 예고들이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통해 성취되는 것, 그리고 그 주일은 종말이 이루어질 위대한 하나님 나라가 앞당겨져서 맛보기로 우리에게 주어진 날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구속사적으로 주일을 이해했다. 여기서 역사적으로 많은 오해들이 생기면서 견해 차이들이 일어난다. 안식일 제도의 불연속성을 강조한 이들이 루터와 칼빈들이다. 반대편에서 영국 청교도들, 찰스 하치(개혁신학의 초석을 많이 놓은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드 들이 안식일의 연속성을 강조했던 사람들이다.
칼빌은 주일을 거룩히 지킴에 있어서 안식일의 율법을 준수하는 태도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안식일의 종말론적인 의미와 현실적 실천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래서 주일은 마지막 날에 있을 영원한 안식의 완성을 바라보는 것이고 주일을 지킴으로서 신자는 전 생애에 걸쳐 완전을 향해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안식일 규례들이 나오는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정신은 계승은 하되 그 구체적인 규정사항은 의식법에 속한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가 되었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칼빈은 안식일 제도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신학적인 의미가 다 폐지되었다고 보지는 않았다. 여기서 우리들이 조심스럽게 이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
칼빈은 안식일 제도의 각종 규정들은 의식법이라고 보고 폐지가 되었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정신들은 계승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이 안식일 개념을 두신 것이 3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보았다.
첫째, 안식일을 정해서 영적이고 영원한 안식이 앞으로 올 것이라는 것을 표로 삼았다. 그래서 주일은 하나님 앞에 율법적으로 얶매어서 무엇을 못한다는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 아니라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 그곳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받으며 한없이 하나님의 복락을 누리며 즐거워하는 날이며 그것을 미리 맛보기로 보여줄 것이 주일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가능하면 아이들 용돈도 주일에 주고, 선물도 주일에 주고, 뭔가 주안에서 기뻐하고 좋아할 일이 있으면 주일에 하라고 했다. 그 대신 그것이 다음에 있는 것을 침범하면 안된다고 했다.
둘째, 믿음의 백성이 정해진 날에 모여 하나님의 법도를 깨닫고 예배하기 위함이었다. 이 신학적인 정신은 계승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유는 칼빈은 우리의 육체의 연약함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약에 제약이 없이 내버려 두면 하루라도 더 일하려 한다. 그런 연약성 때문에 공동체 전체를 묶어서 하나님게 집중적으로 말씀을 교육받고 집중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영혼과 정신을 신령한 은혜와 하나님의 법도로 도향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것들은 율법의 신학적인 정신이 주일에 계승되었다고 본 것이다.
셋째, 사람들을 노동으로 부터 쉬게 하시게 위함이었다. 노동에서 쉬어야지 두 가지 목적이 성취된다. 일반적인 차원에서는 그렇게 휴식을 함으로 재창조가 가능해지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 영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노동의 의미에 억매이지 않고 자기의 신앙심을 고양시킬 수 있었다.
칼빈은 이제 구약에서 영적인 표로 바라보고 그림자로 제사했던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성취가 되어서 그것을 조항적인 규정으로 지킬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이 주일은 미래에 이루어질 천국을 미리 맛보는 것이기에 주일에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천국의 복락을 누려야 한다고 했다. 주일에 육체적인 환락으로 기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주일을 즐거워하라고 하니 파티하고 댄스를 하는 것은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는 의와 희락과 화평이라고 이야기했지,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하늘나라의 즐거움이 그런 영적인 즐거움이 주일에 충만해 지는 날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그것이 주일로 돌아가는 정신에 가장 중요한 것이다.
주일성수 문제에 대해 중세시대까지 전통은 굉장히 엄격했다. 그런데 엄격한 것이 다 지켜졌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데 루터나 칼빈 같은 사람이 파격적으로 안식일과 주일사이에 신학적인 불연속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이야기했던 것은 당시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그것은 중세후기에 가서는 아주 신비주의적이고 미신적인 요소들이 많이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수없는 이름을 붙여서 절기를 만든다. 365일 가운데 거의 200일 이상이 성인의 이름을 가진 날이다. 그것을 다 미신적으로 지키고 준수함으로서 그 공덕이 쌓이고 그러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오직 은총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로 라는 종교개혁의 지침에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약에 루터와 칼빈이 주일을 계량적으로 몇 번째 날, 이 날은 매우 중요하다고 지정을 해버리면 중세에 만들어 놓았던 그 미신적은 수많은 날들 가운데 하나가 더 늘어가거나 강조되는 것으로 사람들이 이해한다면 주일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그 많은 관습적이고 미신적인 절기 중에 하나와 어깨를 겨루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이런 루터와 칼빈 같은 1-2세대의 종교개혁자들은 안식일과 주일의 전통에 대한 이해를 성령강림 직후에 유대교적인 안식일 준수에 대한 방식에서 가져오지도 않았고, 중세시대의 바리새적인 엄격주의와 후기의 신비주의에서도 가져오지 않았고, 초대교회 교구들에게서 정통성을 가져왔다.
칼빈은 주일성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상당부분을 '아디아프로'에 속하는 것으로 돌렸다. 그렇다고 칼빈이 주일성수와 예배참석의 의무, 형식과 예전의 시행 등에 있어 규모없이 목회한 것은 아니다. 1537년에 작성된 제네바교회의 법규인 교회조직과 예배에 대한 규정에서도 나타난다. 칼빈은 예배나 주일성수에 대해 언약적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포용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문제를 다루는 것이 다른 개혁자들과 함께 중시했던 양심의 자유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양심의 자유문제를 '아디아포라'와 관련지었는데, '아디아포라'는 말씀에 명백히 규정된 바가 없고 종교적으로 행동을 규정할 타당한 근거가 없는 중립적인 것이어서 때에 따라 작위와 부작위가 허용되기에 양심이 가르치는 바에 따라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상황에 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은 안식일 준수에 있어 안식일은 신약시대에 있어 주일이라는 정한 날에만 실천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일생의 삶의 과정을 통해 계속되어야 한다고 했다. 안식일이 폐지되기는 하였지만 추출되는 원리를 따라 우리가 여전히 지켜야 할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첫째로 정해진 날에 성도들이 모여 말씀을 들어야 하며 성찬의 떡을 떼고 공적으로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 둘째 노동으로 부터 자유로워져서 하루를 쉬는데 자기뿐 아니라 식솔과 일꾼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주일성수에 대한 칼빈의 이런 견해는 제네바교회 신앙문답서에 잘 나타나 있다. 두개의 문답에서 신약의 교인들이 노동을 금하는 것이 안식일에 주신 금지명령이 의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칼빈이 주일에 노동을 쉬라고 이야기했지만 율법에 기록되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이 연약하기에 하루를 떼어놓아서 영적으로 하나님을 말씀을 배우고 경배할 때 영적인 생명이 고양될 수 있기에 한 것이지 안식일을 지키라 했기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청교도들과 생각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 명령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폐지된 제사에 대한 율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일에도 노동을 중지하고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율법에 정한 노동금지 명령이 아니라 육체의 쉼속에서 주님께서 우리 안에 충분히 쉴 수 있는 날로 삼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함으로 노동에서 해방된 가운데 말씀과 은혜, 성도의 교제와 같은 영혼의 필요를 채우는 일에 마음과 뜻을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지만, 율법을 지키지 못했고 십계명을 어겼기 때문에 정죄를 받는 것이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일성수에 대해 종교개혁자 칼빈이 가지고 있던 생각은 기존에 있었던 중세시대에 통용되었던 주일에 대한 기준은 엄격하게 정해놓고 실제적으로 방종하게 지키던 그 날에 대한 도입된 미신들을 제거하면서 순수한 개혁신앙으로서 주일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들이 주일을 바라보면서 빠지는 오류가 주일은 이미 다 율법적으로 끝났기에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인데 주일을 안 지키면 어때하는 방종주의, 주일에 대해 마치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십계명 율법을 위반한 것 같은 바리새주의등 양쪽 극단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것들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칼빈의 입장은 분명하다. 안식일에 대한 것은 제사에 관한 것으로 해서 종식되었다. 그 대신 그것에서 항구적인 신학적인 원리들을 추출해 낼 수 있다. 그것들이 추출해 낸 원리가 두 가지인데 노동으로 부터 육체가 쉬어야 하고, 우리가 연약하기에 하나님과 예배하고 말씀을 배우는 집중된 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안식일의 계명을 연장시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만 확실히 붙잡으면 된다. 교인들을 가르칠 때도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바리새주의적인 방법으로 주일성수를 생각하는 것, 자유주의적으로 주일성수를 생각하는 것을 둘 다 하지 못하게 타일러야 한다.
요점은 안식일에 강조된 육체의 안식은 주일 안에 강조되어야 할 영혼의 안식을 바라 본 것이었다. 물론 안식일 제도에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혼의 유익을 누리는 영적 안식에 대한 신적 배려가 있고 주일제도에는 육체노동을 쉬게 하려는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강조점의 문제이다. 주일성수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강조점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이루어질 종말의 안식을 바라보며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적 안식을 강조했다면, 청교도들은 구약의 안식일 제도의 성취가 그리스도 구속 안에 이루어졌고 이것은 종말 안에 누릴 영원한 안식을 이행하는 과정으로 보아 육체의 안식을 보다 강조함으로 종교개혁자들의 균형추에서 다소 이동했다.
(다음은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의 연속성을 강조한 청교도들의 입장, 그리고 주일을 어떻게 지켜져야 거룩하게 지키는 것인가 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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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 1920년 새문안교회 당회록을 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주일성수를 안하는 교인들을 치리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주일성수에 대해 수차례 경고했으나 말을 듣지 않아 수찬정지등 매주 치리가 이루어진다. 그것을 보면서 교회가 기강을 세우려고 노력했구나 하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치리만을 가지고 안된다는 것이 보였다. 새문안교회도 너무 많은 사람들을 치리해야 하니 어느 시점에 와서 치리를 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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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제가 전도사로 봉사하던 교회에서는 주일에 무엇이 필요하게 되어 목사님이 당장 가져오라고 하자, 저는 주일에 교회에서 돈을 안 쓰는데 어떻게 하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담임목사는 "너는 왜 이렇게 머리가 안돌아 가는가. 물건을 지금 가져오고 돈을 내일주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말이 되는 것 같기도 안되는 것 같기도 해서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담임목사가 하라고 하니 하던 시절도 기억난다.
주일성수의 중요성은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지만, 개인의 성향에 따라 혼란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박용규 교수 같은 경우 "주일성수가 흐려지면 위기가 온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김남준 교수는 2014년 합동총회에서 총회의 요청에 따라 준비한 "주일성수"에 대한 논문을 중심으로 강의를 해 나갔다. 김남준 교수는 주일성수에 대한 3가지 이슈 △과연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이 옳은 것인가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이 신학적으로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그러면 주일을 어떻게 지켜져야 거룩하게 지키는 것인가를 중심으로 수차례 강의를 인도했다. 특히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의 불연속성을 강조한 종교개혁자들의 시각과 연속성을 강조한 청교도들의 입장을 설명하며 주일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그러면 결론은 무엇인가? 김남준 교수는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 탁월하지만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상황과 고민하면서 우리의 입술로 고백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주일의 의미를 교인들에게 제대로 가르쳐야 하며, 주일성수를 강제하기 보다는 영혼의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때 주일이 주일되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원리를 따르고 주일에 대한 세부적인 고백들을 개인규범화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멘넷은 두차례에 걸쳐 강의 내용을 소개한다. 다음은 첫 번째 강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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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005376">▲김남준 총신대학교 교수</font>
교회마다 조금 차이는 있지만 특히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교회에서 연로하시고 신앙의 연륜이 오래된 장로를 비롯한 어른들이 '주일에 뭐 사먹지 말라' '돈을 쓰지 말라'라고 하는 주일성수에 개념과 젊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주일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교회에서 충돌하는 양상을 보게 된다.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한번쯤은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고, 우리의 태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들이 명확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야 교회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다.
<B>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이 옳은 것인가?</B>
주일이라는 말이 성경에 4번 나온다. 주일이라는 것이 영어로 'Lord's day'이다. 문자 그대로 '주님의 날'이다. 성경에는 여러가지 표현을 사용하는데 '주님의 날', '그 주님의 그 날', '그 주님께 속한 날'이라는 표현으로 나오는데, 3번은 종말론적인 심판과 관련해서 나타나고 한번은 그리스도의 날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그 주님께 속한 날"이다. 그 날은 무엇인가? 초대교회 학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 초대교회가 하나님을 예배하기로 정한 날이라고 본다. 이미 초대교회 안에 주일을 지키는 전통이 확고하게 수립되어 있다는 암시를 준다.
안식교 등은 일요일을 주일로 삼는 것 자체가 기독교 배교의 역사와 관련 있다고 해석한다. 그 이유는 당시에 일요일이 태양신 숭배의 날이었기에 그러한 로마의 정책에 굴복해서, 말하자면 기독교가 토요일을 안식을 지키던 신앙의 정절을 꺾고 그 정책에 순응해 버린 것이 주일의 유례라고 본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그 이야기가 맞지 않다. 그 당시에 일요일은 태양의 날인 것은 맞다. 하지만 태양신을 섬기는 날이 아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전부 다 신과 관련이 있는 날이었다. 월요일은 달과 관계있고, 다 관련이 되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구약의 안식일인 토요일을 지키는 것 역시 신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정당한 근거가 있는 비판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3세기경 로마제국 전체에 태양신을 포교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제국 안에 있는 수많은 종교들을 획일적으로 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국민을 통일하려는, 우리나라도 단군을 통해 정신적으로 통일하려고 했던 정도로 어떤 정서적인 국민적인 정서를 통합하려고 하는 시도가 있었지 하나의 종교적인 운동은 아니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은 문제가 없다.
실제로 교회역사에서도 이미 근거를 가지고 있는데, 수많은 초대교회의 문헌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부 활하신 날을 기념해서 모이는 것들이 나타나고 있고, 오히려 그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구속사역이 신약과 구약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심장한 신학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에 무게중심을 두었기에, 사실은 안식일이 바라보았던 그림자들이 주일에서 성취가 되었다고 보았기에 그들은 주일이 신구약 역사 전체에 중심이 된다고 보았다.
예수님은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당신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에 의해 그 의미가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인간에 의해 실패하게 된 것을 구속을 통해 하나님이 되돌리신다고 한다면, 사실은 구속의 사건은 창조를 계승하는 위대한 역사이기에 얼마든지 새로운 안식일이 도입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보여진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까지 말씀하셨다.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와 마리아가 주님을 뵈온 날도 주일이었고, 뵙게 되는 모임도 안식후 첫날이었고, 사도 요한이 계시를 본 것도 주일이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청교도들은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에 대해 아주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성경과 교회역사에 전통에 입각해 볼 때 결코 그것은 우상숭배의 제도에 굴복한 그런 사건이 아니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질문을 하나 한다. 지금은 일요일을 주일로 지킨다. 그런데 정부에서 일요일을 월요일로 옮겼다고 치자. 그렇다면 주일을 어떻게 할것인가? 정부하고 싸워서라도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거나, 정부의 결정과 상관없이 교회가 결정하면 월요일로 옮기면 된다 중 답이 무엇인가? 루터와 칼빈등 종교개혁자들은 공교회가 결정하면 상관없는 것이라고 본다. 교회의 공동의회에서 다른 요일을 주일로 지키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공교회가 결정을 하면 되는 것이라고 루터와 칼빈은 보았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육일 창조하시고 마지막 쉬시는 날이 안식일이다. 주일은 그것이 아니라 첫날이다. 한주일의 시작이다. 의미가 다르다. 그러면 안식일의 개념을 가지고 우리들이 주일을 정한다고 보면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한국에서 비해기를 타고 미동부로 날라오면 하루종일 날아왔는데도 시간이 뒤로 갔다. 어떻게 날짜를 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북반구로 올가가면 6개월이 낮이고 6개월이 밤이다. 이런것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렇기에 계량적인 날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다만 무질서하게 내버려 두면 교회의 질서가 흩어지니 공교회의 결정에 의해서 그렇게 해서 이루어 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일에 대해 여러 견해를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이것은 믿음의 강함과 연약함의 차이였다.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은 6일 창조후에 안식을,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지만 계기적인 한주간의 나중과 처음을 완벽하게 확정하기 어렵다. 계기적인 그날이기 보다는 교회결정에 의해 정해진 주일의 날을 지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만약 주일로 지키는 날을 개인이나 개교회가 함부러 바꿀 수 있다면 혼란과 무질서가 뒤따르기에 하나님의 섭리와 교회의 결정를 따라 역사적으로 지켜온 그날을 그날로 삼을 뿐이다.
<B>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종교개혁자들의 입장-불연속성 강조</B>
안식일과 주일의 신학적인 연속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두가지로 견해가 나뉘게 된다. 구약의 안식일 제도와 신약의 주일제도가 완전히 다른 것이며, 두개가 단절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다. 강조점의 차이이다. 연속에다 강조를 두는가 아니면 불연속에다 강조를 두는가에 따라서 의견이 둘로 나뉘어진다.
먼저 우리 개신교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종교개혁자인 루터나 칼빈같은 사람들은 불연속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 제도가 있고 신약에 주일제도가 있는데 이 두 제도가 신학적인 연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구약의 안식일 제도가 가지고 있는 그림자가 구속사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구약의 안식일 제도와 신약의 사이에는 신학적인 점진적인 계시, 모형과 실체의 완성이라는 관계에 연속성은 있지만 그것이 율법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분명히 그었다. 이것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했던 사람은 루터이다. 루터는 만약에 구약에 안식일의 계명에 나왔기에 우리가 그 유대인들이 지키는 구약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 같은 방식을 주일도 지켜야 한다면 나는 주일에 춤도 추고, 술도 마시고, 노래도 하고 모든 일을 다 해서 결코 이 주일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하게 하겠다 라고 까지 발언한다.
칼빈은 그 입장을 기본적으로 계승한다. 그러면서 몇 가지 사실을 강조한다. 첫째 주일을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기위해 시간을 떼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노동의 의무로 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것들은 충분히 인정을 하면서 루터의 입장을 따른다. 이 입장이 역사적으로 더듬어 보면 어디하고 맞닿는가 하면 특별히 초대교구들과 맞닿는다. 뒤에 4세기로 넘어가면서 엄격주의가 도입되고 엄격한 주일의 규례들이 도입된다.
여기에도 역사적으로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라. 처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고, 성령강림사건이 있었고, 많은 유대인들이 회개하며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신 것을 알게 되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유대인이었다. 그런데 주일에 대해 누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는데 이들이 당연히 주일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처음에는 안식일도 지키고 주일도 모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안식일을 점차 버리면서 주일을 지켰는데 그 방식이 누가 와서 가르쳐 준 것도 아니다. 이들은 평생을 유대인으로 살아왔던 사람인데, 그러니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의미는 알았겠고 의식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도 사도행전 15장에 와서 공의회를 해서 결정할 정도였으니, 그러니 2장에서 성령강림 사건이 나고 15장 올 때까지 정리되지 않았던 신학적인 문제들이 있었다.
평생을 안식일을 지켜오면서 살아온 사람들이니, 구약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방식을 따라서 주일을 지켰던 것이다. 성경에 보면 신약시대에는 선지자가 필요가 없었지만 성경이 완성이 되기 전까지 선지자들이 여전히 존재했다. 그렇게 신약과 구약의 과도기적인 성격 속에서 선지자들이 존재했다. 그러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그런 역사적인 전개의 과정을 밟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엄격하게 안식일을 평생준수하면서 살았던 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주일을 지켰다. 문제는 성령강림사건이 있고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켰던 것, 속사도 교구들과 초대교구들에 오면서 안식일을 지켰던 것, 중세로 넘어오는 것, 종교개혁자들 이후에 개혁파 정통주의자들과 이후의 계승자들 그렇게 각각 구간이 나누어지는데, 처음에 성령강림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안식일을 지킬때에 그것을 청교도들은 모델로 본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은 초대교회에서 모델을 찾지 않고 초대교구들에서 모델을 찾는다. 초대교구들의 주일에 대한 생각이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의 뿌리였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자유, 그리고 율법에서 정한 안식일이 계승이 아니라 안식일이 바라보았던 그림자 같은 예고들이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통해 성취되는 것, 그리고 그 주일은 종말이 이루어질 위대한 하나님 나라가 앞당겨져서 맛보기로 우리에게 주어진 날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구속사적으로 주일을 이해했다. 여기서 역사적으로 많은 오해들이 생기면서 견해 차이들이 일어난다. 안식일 제도의 불연속성을 강조한 이들이 루터와 칼빈들이다. 반대편에서 영국 청교도들, 찰스 하치(개혁신학의 초석을 많이 놓은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드 들이 안식일의 연속성을 강조했던 사람들이다.
칼빌은 주일을 거룩히 지킴에 있어서 안식일의 율법을 준수하는 태도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안식일의 종말론적인 의미와 현실적 실천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래서 주일은 마지막 날에 있을 영원한 안식의 완성을 바라보는 것이고 주일을 지킴으로서 신자는 전 생애에 걸쳐 완전을 향해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안식일 규례들이 나오는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정신은 계승은 하되 그 구체적인 규정사항은 의식법에 속한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가 되었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칼빈은 안식일 제도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신학적인 의미가 다 폐지되었다고 보지는 않았다. 여기서 우리들이 조심스럽게 이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
칼빈은 안식일 제도의 각종 규정들은 의식법이라고 보고 폐지가 되었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정신들은 계승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이 안식일 개념을 두신 것이 3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보았다.
첫째, 안식일을 정해서 영적이고 영원한 안식이 앞으로 올 것이라는 것을 표로 삼았다. 그래서 주일은 하나님 앞에 율법적으로 얶매어서 무엇을 못한다는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 아니라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 그곳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받으며 한없이 하나님의 복락을 누리며 즐거워하는 날이며 그것을 미리 맛보기로 보여줄 것이 주일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가능하면 아이들 용돈도 주일에 주고, 선물도 주일에 주고, 뭔가 주안에서 기뻐하고 좋아할 일이 있으면 주일에 하라고 했다. 그 대신 그것이 다음에 있는 것을 침범하면 안된다고 했다.
둘째, 믿음의 백성이 정해진 날에 모여 하나님의 법도를 깨닫고 예배하기 위함이었다. 이 신학적인 정신은 계승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유는 칼빈은 우리의 육체의 연약함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약에 제약이 없이 내버려 두면 하루라도 더 일하려 한다. 그런 연약성 때문에 공동체 전체를 묶어서 하나님게 집중적으로 말씀을 교육받고 집중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영혼과 정신을 신령한 은혜와 하나님의 법도로 도향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것들은 율법의 신학적인 정신이 주일에 계승되었다고 본 것이다.
셋째, 사람들을 노동으로 부터 쉬게 하시게 위함이었다. 노동에서 쉬어야지 두 가지 목적이 성취된다. 일반적인 차원에서는 그렇게 휴식을 함으로 재창조가 가능해지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 영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노동의 의미에 억매이지 않고 자기의 신앙심을 고양시킬 수 있었다.
칼빈은 이제 구약에서 영적인 표로 바라보고 그림자로 제사했던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성취가 되어서 그것을 조항적인 규정으로 지킬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이 주일은 미래에 이루어질 천국을 미리 맛보는 것이기에 주일에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천국의 복락을 누려야 한다고 했다. 주일에 육체적인 환락으로 기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주일을 즐거워하라고 하니 파티하고 댄스를 하는 것은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는 의와 희락과 화평이라고 이야기했지,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하늘나라의 즐거움이 그런 영적인 즐거움이 주일에 충만해 지는 날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그것이 주일로 돌아가는 정신에 가장 중요한 것이다.
주일성수 문제에 대해 중세시대까지 전통은 굉장히 엄격했다. 그런데 엄격한 것이 다 지켜졌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데 루터나 칼빈 같은 사람이 파격적으로 안식일과 주일사이에 신학적인 불연속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이야기했던 것은 당시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그것은 중세후기에 가서는 아주 신비주의적이고 미신적인 요소들이 많이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수없는 이름을 붙여서 절기를 만든다. 365일 가운데 거의 200일 이상이 성인의 이름을 가진 날이다. 그것을 다 미신적으로 지키고 준수함으로서 그 공덕이 쌓이고 그러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오직 은총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로 라는 종교개혁의 지침에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약에 루터와 칼빈이 주일을 계량적으로 몇 번째 날, 이 날은 매우 중요하다고 지정을 해버리면 중세에 만들어 놓았던 그 미신적은 수많은 날들 가운데 하나가 더 늘어가거나 강조되는 것으로 사람들이 이해한다면 주일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그 많은 관습적이고 미신적인 절기 중에 하나와 어깨를 겨루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이런 루터와 칼빈 같은 1-2세대의 종교개혁자들은 안식일과 주일의 전통에 대한 이해를 성령강림 직후에 유대교적인 안식일 준수에 대한 방식에서 가져오지도 않았고, 중세시대의 바리새적인 엄격주의와 후기의 신비주의에서도 가져오지 않았고, 초대교회 교구들에게서 정통성을 가져왔다.
칼빈은 주일성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상당부분을 '아디아프로'에 속하는 것으로 돌렸다. 그렇다고 칼빈이 주일성수와 예배참석의 의무, 형식과 예전의 시행 등에 있어 규모없이 목회한 것은 아니다. 1537년에 작성된 제네바교회의 법규인 교회조직과 예배에 대한 규정에서도 나타난다. 칼빈은 예배나 주일성수에 대해 언약적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포용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문제를 다루는 것이 다른 개혁자들과 함께 중시했던 양심의 자유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양심의 자유문제를 '아디아포라'와 관련지었는데, '아디아포라'는 말씀에 명백히 규정된 바가 없고 종교적으로 행동을 규정할 타당한 근거가 없는 중립적인 것이어서 때에 따라 작위와 부작위가 허용되기에 양심이 가르치는 바에 따라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상황에 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은 안식일 준수에 있어 안식일은 신약시대에 있어 주일이라는 정한 날에만 실천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일생의 삶의 과정을 통해 계속되어야 한다고 했다. 안식일이 폐지되기는 하였지만 추출되는 원리를 따라 우리가 여전히 지켜야 할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첫째로 정해진 날에 성도들이 모여 말씀을 들어야 하며 성찬의 떡을 떼고 공적으로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 둘째 노동으로 부터 자유로워져서 하루를 쉬는데 자기뿐 아니라 식솔과 일꾼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주일성수에 대한 칼빈의 이런 견해는 제네바교회 신앙문답서에 잘 나타나 있다. 두개의 문답에서 신약의 교인들이 노동을 금하는 것이 안식일에 주신 금지명령이 의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칼빈이 주일에 노동을 쉬라고 이야기했지만 율법에 기록되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이 연약하기에 하루를 떼어놓아서 영적으로 하나님을 말씀을 배우고 경배할 때 영적인 생명이 고양될 수 있기에 한 것이지 안식일을 지키라 했기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청교도들과 생각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 명령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폐지된 제사에 대한 율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일에도 노동을 중지하고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율법에 정한 노동금지 명령이 아니라 육체의 쉼속에서 주님께서 우리 안에 충분히 쉴 수 있는 날로 삼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함으로 노동에서 해방된 가운데 말씀과 은혜, 성도의 교제와 같은 영혼의 필요를 채우는 일에 마음과 뜻을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지만, 율법을 지키지 못했고 십계명을 어겼기 때문에 정죄를 받는 것이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일성수에 대해 종교개혁자 칼빈이 가지고 있던 생각은 기존에 있었던 중세시대에 통용되었던 주일에 대한 기준은 엄격하게 정해놓고 실제적으로 방종하게 지키던 그 날에 대한 도입된 미신들을 제거하면서 순수한 개혁신앙으로서 주일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들이 주일을 바라보면서 빠지는 오류가 주일은 이미 다 율법적으로 끝났기에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인데 주일을 안 지키면 어때하는 방종주의, 주일에 대해 마치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십계명 율법을 위반한 것 같은 바리새주의등 양쪽 극단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것들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칼빈의 입장은 분명하다. 안식일에 대한 것은 제사에 관한 것으로 해서 종식되었다. 그 대신 그것에서 항구적인 신학적인 원리들을 추출해 낼 수 있다. 그것들이 추출해 낸 원리가 두 가지인데 노동으로 부터 육체가 쉬어야 하고, 우리가 연약하기에 하나님과 예배하고 말씀을 배우는 집중된 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안식일의 계명을 연장시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만 확실히 붙잡으면 된다. 교인들을 가르칠 때도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바리새주의적인 방법으로 주일성수를 생각하는 것, 자유주의적으로 주일성수를 생각하는 것을 둘 다 하지 못하게 타일러야 한다.
요점은 안식일에 강조된 육체의 안식은 주일 안에 강조되어야 할 영혼의 안식을 바라 본 것이었다. 물론 안식일 제도에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혼의 유익을 누리는 영적 안식에 대한 신적 배려가 있고 주일제도에는 육체노동을 쉬게 하려는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강조점의 문제이다. 주일성수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강조점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이루어질 종말의 안식을 바라보며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적 안식을 강조했다면, 청교도들은 구약의 안식일 제도의 성취가 그리스도 구속 안에 이루어졌고 이것은 종말 안에 누릴 영원한 안식을 이행하는 과정으로 보아 육체의 안식을 보다 강조함으로 종교개혁자들의 균형추에서 다소 이동했다.
(다음은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의 연속성을 강조한 청교도들의 입장, 그리고 주일을 어떻게 지켜져야 거룩하게 지키는 것인가 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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