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근 목사 ② 감리교 신앙 특징의 배경은 구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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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6-06-13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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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감리교회는 최근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책을 발행했다. 4인의 공저로 쓰여진 책에서 강원근 목사는 연합감리교회의 신앙생활, 이용연 목사는 연합감리교회의 신앙과 교리, 홍삼열 목사는 감리교회의 독특성, 이강원 목사는 연합감리교회의 역사와 조직을 담당했다. 저자들은 미전국을 돌며 특강을 통해 한인연합감리교인들에게 내용을 설명할 기회를 가질 예정이다. 뉴욕과 뉴저지에서는 6월 24일부터 2일간 열리는 한인연합감리교회 평신도지도자 훈련대회에서 소개하는 기회를 가진다. 이에 앞서 6월 8일 후러싱제일교회(김정호 목사)에서 열린 웨슬리 회심 기념 특강을 통해 강원근 목사(뉴욕감리교회)를 초청하여 “연합감리교회 신앙 생활”이라는 제목의 특강을 했다.
다음은 특강 내용중 감리교 신앙생활을 특징짓게 만드는 구원론에 대한 내용이다. 강 목사는 복잡한 교리적인 내용보다는 쉽게 설명했으며, 내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신앙의 교훈이 담겨있다. 한편 이용연 목사는 <우리는 누구인가>에서 “웨슬리는 몇 가지의 단계와 과정을 통해 구원이 완성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어느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삶의 전 과정을 통해 이루어가는 성숙과 완성의 과정이다”라고 설명했다.
감리교의 특징은 실천과 사회적인 사랑과 개인적인 훈련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웨슬리의 정신은 굉장히 열정적이고 사회참여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럼 왜 이런 웨슬리의 신학이 나왔을까? 다른 교단과 다른 감리교의 행동 특징의 배경에는 구원론이 자리 잡고 있다.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죄가 없어지는데 과거의 죄만 없어진 것인가 아니면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없어진 것인가? 가장 기본적인 것이지만 성도들이 잘 모른다. 이 해답이 바로 우리의 신앙행동을 가르고 분별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웨슬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과거의 죄만 없어진다고 했다. 반면 칼빈과 루터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과거의 죄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죄도 없어진다고 했다.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나는 구원을 받았는데 미래의 죄까지 다 없어지기에 하나님을 만나는 날까지 어떤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하면 자연히 방탕하게 된다. 반면 과거의 죄만 없어졌기에 지금부터는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하다고 한다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것이다.
로마 카톨릭, 오늘날 성당에서 이야기하는 구원은 개신교가 생각하는 구원과 상당히 다르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에 인간의 공로가 반드시 들어간다. 카톨릭 신학을 정립한 아퀴니스는 예수를 믿는 믿음은 꼭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했다. 구원을 얻기 위해 믿음은 굉장히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되며 인간의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 이야기하는 구원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구원의 시작일 뿐이다. 죽을 때까지 과정이 계속해서 단계적으로 연결된다. 그 단계 과정가운데 인간이 노력을 열심히 하는 것이다. 그래야 구원이 될지 안될지 나중에 결정이 된다. 그렇다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그래서 공적을 많이 쌓기 위해 면죄부를 돈을 주고 샀다. 그런 것들이 성경적이 아니라고 해서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이다.
루터가 가장 먼저 이야기한 것은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것에다 한 가지 더 이야기를 했다. "행복한 교환"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예수님과 결혼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우리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결혼하면 내 것과 당신 것이 하나가 된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고 의를 가지신 분이시다. 내가 예수님과 결혼하면 예수님의 의가 내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득의라고 한다. 대신에 인간은 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죄를 예수님께 그리고 예수님은 의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행복한 교환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이다.
그 결과 죽는 그날까지 어떤 죄를 범하더라도 예수님의 완벽한 의가 내 것이기에 내가 좀 실수를 해도 전혀 지장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로마 카톨릭이 루터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루터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의를 전가 받았다고 하는데 그러면 어떤 행위를 하든지 상관없다는 말인가 비판했다. 루터는 그것에 대해 반박할 말이 마땅하지 않았다.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을 시작한 멜란히톤은 율법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율법에 대하서도 설교해야 하고 성도들이 율법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도록 인도해야 참목자이라고 했다. 루터는 그것을 찬성하지 않았으며, 루터진영의 반대속에 종교개혁가들에게 큰 논쟁이 난다. 그렇지만 루터진영의 세가 세기에 멜란히톤의 말이 묵살됐다. 그래서 루터를 위시한 독일의 루터교는 오직 칭의, 오직 의롭게 되는 것만 중요시 여기고 율법을 중요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타락의 길을 걷는다. 신약성경을 읽으면 초대교회 이야기가 나온다. 오순절 다락방 사건때는 교회가 순수했는데 20여년이 지나면 초대교회가 타락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같은 맥락이다. 구원을 받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했기에 타락의 종착역까지 간다. 그래서 그것을 경계하면서 쓴 사도 바울의 편지들이 신약성경 서신서들에 많이 나온다. 데살로니가 후서를 읽으면 곧 주님이 오신다며 성도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언제 주님오시는 것은 하나님만 아는 것이며 너희들은 주님오시는 그날까지는 땀을 흘리고 노동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루터는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몸이기에 어떻게 행동해도 상관없고 우리에게 율법이 큰 흠이라고 했다. 행동을 중요시 여기는 야고보서를 성경에 들어가지 않아야 할 지푸라기 같은 글이라고 했다.
그래서 종교개혁 2세대인 칼빈이 나온 것이다. 칼빈이 나와 권면한 것은 율법도 필요하다고 한다. 루터 같은 경우 어떻게 보면 십계명이 별로 필요없다는 주장이지만, 칼빈은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율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칼빈은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변할 수 없는 뜻이기에 우리에게 율법도 필요하다면서 루터의 약점을 보완하기 시작했다. 루터의 약점은 칭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까지는 좋은데 그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구원받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한순간 잠시면 구원을 받지만 이후의 삶에 대해서 루터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칼빈이 나서서 율법에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행위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루터의 이론을 보완하기위해 칼빈은 인간의 행동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결국은 행동이 우리의 구원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종합하면 구원받은 다음에 우리들의 행동은 구원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고 상급 받는다는 정도로 이해했다. 그러면서 칼빈은 칭의의 영원성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행복한 교환’과 비슷한 맥락이다. 한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하신 하나님이 항상 우리의 판을 붙잡고 계시기에 어떠한 범죄를 범하더라도 우리의 구원은 없어질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 칼빈의 신학이 구라파와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200년 후에 영국에서 웨슬리가 태어난다. 감리교 신학의 특징적인 것 중의 하나가 신학을 위한 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고민하고 해석하려다 보니 생긴 것이다. 웨슬리의 출발이 그렇다. 웨슬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니 생활이 엉망이다. 성경과 전혀 상관없는 행동을 한다. 웨슬리는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행동이 바르지 못하다면 둘 중에 하나이다. 처음부터 구원받지 않았던지 아니면 구원받은 다음 타락한 경우이다. 만약 타락했다면 회개해야 한다. 그런 고민들을 하면서 웨슬리는 자신의 신학을 정립하기 시작한다. 웨슬리는 칼빈을 열심히 연구하고 칼빈을 공격하는 설교도 많이 했다. 웨슬리가 내린 결론은 결국 죄가 어느 정도까지 사해지는 가에 대해 오해가 있었다는 것이다. 칼빈과 루터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현재과거미래 죄까지 모두 없어진다고 이야기하지만 성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웨슬리는 과거의 죄만 없어지는 것이고 현재와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하나님 심판대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도록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오늘과 미래를 살아야 한다며 칼빈과 결별하기 시작한다.
웨슬리가 주장했던 가장 강조했던 것은 회개의 열매이다. 우리가 타락했으면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한 동행’은 중요한 개념인데 웨슬리는 의의 전가라는 것은 성경에서 근거가 희박하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가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위해 돌아가신 것이지 그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기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오버센스를 하느냐는 것이다.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가신 것은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것이기에 그것만 인정하면 되는 것이지, 의의 전가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 구원을 받았다면 과거의 죄는 다 없어졌고, 지금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화의 모습을 이루어가면서 하나님 앞 심판대 앞에 섰을 때도 전혀 떨림없이 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에 근거해서 성도들을 훈련시키는데 전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감리교가 왜 실천을 강조하고, 왜 사랑을 강조하고, 왜 훈련을 강조하는가. 이러한 구원관을 가지고 있기에 그렇다. 다른 교단과는 다른 구원관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신앙의 형태가 이루어진 것이다.
오늘날 현대신학에서 가장 큰 이슈가 구원론이다.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것인데 가장 논란이 되고 있다. 논쟁의 요지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 아니면 한번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굉장히 심각하다. 새관점의 학자들은 현재적인 칭의와 최종적인 칭의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웨슬리와 약간 비슷한 것이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현재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모든 과거의 죄가 없어지고 새롭게 태어난다. 새롭게 태어난 후부터 모든 행동이 모아져서 마지막 하나님 앞 심판대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모든 행위가 기초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최종적 칭의라고 이야기한다. 누구의 주장이 맞는가. 한쪽에서는 오직 믿음을 가지면 예수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문제가 없다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구원을 받았지만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끝까지 가보아야 하고 구원취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성경은 두 가지를 다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힘든 것이다. 성경에서 두 가지를 다 이야기하면 두 가지를 다 받아들여야 한다. 말하고 싶은 것은 신학은 개방적 신앙으로, 신앙은 보수적으로 하면 좋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문제에는 증명되지 않은 것을 따라 갈 필요가 없다. 보수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다. 저는 양쪽의 의견을 다 들어야 하고 신앙생활은 보수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구원을 받았기에 나쁜 짓을 다해도 괜찮다고 하지 말고, 나중에 행위를 가지고 심판할 수도 있으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겠다고 믿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의 자세이라고 생각한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다음은 특강 내용중 감리교 신앙생활을 특징짓게 만드는 구원론에 대한 내용이다. 강 목사는 복잡한 교리적인 내용보다는 쉽게 설명했으며, 내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신앙의 교훈이 담겨있다. 한편 이용연 목사는 <우리는 누구인가>에서 “웨슬리는 몇 가지의 단계와 과정을 통해 구원이 완성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어느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삶의 전 과정을 통해 이루어가는 성숙과 완성의 과정이다”라고 설명했다.
감리교의 특징은 실천과 사회적인 사랑과 개인적인 훈련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웨슬리의 정신은 굉장히 열정적이고 사회참여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럼 왜 이런 웨슬리의 신학이 나왔을까? 다른 교단과 다른 감리교의 행동 특징의 배경에는 구원론이 자리 잡고 있다.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죄가 없어지는데 과거의 죄만 없어진 것인가 아니면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없어진 것인가? 가장 기본적인 것이지만 성도들이 잘 모른다. 이 해답이 바로 우리의 신앙행동을 가르고 분별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웨슬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과거의 죄만 없어진다고 했다. 반면 칼빈과 루터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과거의 죄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죄도 없어진다고 했다.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나는 구원을 받았는데 미래의 죄까지 다 없어지기에 하나님을 만나는 날까지 어떤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하면 자연히 방탕하게 된다. 반면 과거의 죄만 없어졌기에 지금부터는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하다고 한다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것이다.
로마 카톨릭, 오늘날 성당에서 이야기하는 구원은 개신교가 생각하는 구원과 상당히 다르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에 인간의 공로가 반드시 들어간다. 카톨릭 신학을 정립한 아퀴니스는 예수를 믿는 믿음은 꼭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했다. 구원을 얻기 위해 믿음은 굉장히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되며 인간의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 이야기하는 구원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구원의 시작일 뿐이다. 죽을 때까지 과정이 계속해서 단계적으로 연결된다. 그 단계 과정가운데 인간이 노력을 열심히 하는 것이다. 그래야 구원이 될지 안될지 나중에 결정이 된다. 그렇다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그래서 공적을 많이 쌓기 위해 면죄부를 돈을 주고 샀다. 그런 것들이 성경적이 아니라고 해서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이다.
루터가 가장 먼저 이야기한 것은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것에다 한 가지 더 이야기를 했다. "행복한 교환"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예수님과 결혼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우리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결혼하면 내 것과 당신 것이 하나가 된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고 의를 가지신 분이시다. 내가 예수님과 결혼하면 예수님의 의가 내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득의라고 한다. 대신에 인간은 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죄를 예수님께 그리고 예수님은 의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행복한 교환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이다.
그 결과 죽는 그날까지 어떤 죄를 범하더라도 예수님의 완벽한 의가 내 것이기에 내가 좀 실수를 해도 전혀 지장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로마 카톨릭이 루터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루터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의를 전가 받았다고 하는데 그러면 어떤 행위를 하든지 상관없다는 말인가 비판했다. 루터는 그것에 대해 반박할 말이 마땅하지 않았다.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을 시작한 멜란히톤은 율법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율법에 대하서도 설교해야 하고 성도들이 율법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도록 인도해야 참목자이라고 했다. 루터는 그것을 찬성하지 않았으며, 루터진영의 반대속에 종교개혁가들에게 큰 논쟁이 난다. 그렇지만 루터진영의 세가 세기에 멜란히톤의 말이 묵살됐다. 그래서 루터를 위시한 독일의 루터교는 오직 칭의, 오직 의롭게 되는 것만 중요시 여기고 율법을 중요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타락의 길을 걷는다. 신약성경을 읽으면 초대교회 이야기가 나온다. 오순절 다락방 사건때는 교회가 순수했는데 20여년이 지나면 초대교회가 타락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같은 맥락이다. 구원을 받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했기에 타락의 종착역까지 간다. 그래서 그것을 경계하면서 쓴 사도 바울의 편지들이 신약성경 서신서들에 많이 나온다. 데살로니가 후서를 읽으면 곧 주님이 오신다며 성도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언제 주님오시는 것은 하나님만 아는 것이며 너희들은 주님오시는 그날까지는 땀을 흘리고 노동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루터는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몸이기에 어떻게 행동해도 상관없고 우리에게 율법이 큰 흠이라고 했다. 행동을 중요시 여기는 야고보서를 성경에 들어가지 않아야 할 지푸라기 같은 글이라고 했다.
그래서 종교개혁 2세대인 칼빈이 나온 것이다. 칼빈이 나와 권면한 것은 율법도 필요하다고 한다. 루터 같은 경우 어떻게 보면 십계명이 별로 필요없다는 주장이지만, 칼빈은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율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칼빈은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변할 수 없는 뜻이기에 우리에게 율법도 필요하다면서 루터의 약점을 보완하기 시작했다. 루터의 약점은 칭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까지는 좋은데 그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구원받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한순간 잠시면 구원을 받지만 이후의 삶에 대해서 루터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칼빈이 나서서 율법에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행위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루터의 이론을 보완하기위해 칼빈은 인간의 행동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결국은 행동이 우리의 구원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종합하면 구원받은 다음에 우리들의 행동은 구원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고 상급 받는다는 정도로 이해했다. 그러면서 칼빈은 칭의의 영원성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행복한 교환’과 비슷한 맥락이다. 한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하신 하나님이 항상 우리의 판을 붙잡고 계시기에 어떠한 범죄를 범하더라도 우리의 구원은 없어질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 칼빈의 신학이 구라파와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200년 후에 영국에서 웨슬리가 태어난다. 감리교 신학의 특징적인 것 중의 하나가 신학을 위한 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고민하고 해석하려다 보니 생긴 것이다. 웨슬리의 출발이 그렇다. 웨슬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니 생활이 엉망이다. 성경과 전혀 상관없는 행동을 한다. 웨슬리는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행동이 바르지 못하다면 둘 중에 하나이다. 처음부터 구원받지 않았던지 아니면 구원받은 다음 타락한 경우이다. 만약 타락했다면 회개해야 한다. 그런 고민들을 하면서 웨슬리는 자신의 신학을 정립하기 시작한다. 웨슬리는 칼빈을 열심히 연구하고 칼빈을 공격하는 설교도 많이 했다. 웨슬리가 내린 결론은 결국 죄가 어느 정도까지 사해지는 가에 대해 오해가 있었다는 것이다. 칼빈과 루터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현재과거미래 죄까지 모두 없어진다고 이야기하지만 성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웨슬리는 과거의 죄만 없어지는 것이고 현재와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하나님 심판대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도록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오늘과 미래를 살아야 한다며 칼빈과 결별하기 시작한다.
웨슬리가 주장했던 가장 강조했던 것은 회개의 열매이다. 우리가 타락했으면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한 동행’은 중요한 개념인데 웨슬리는 의의 전가라는 것은 성경에서 근거가 희박하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가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위해 돌아가신 것이지 그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기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오버센스를 하느냐는 것이다.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가신 것은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것이기에 그것만 인정하면 되는 것이지, 의의 전가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 구원을 받았다면 과거의 죄는 다 없어졌고, 지금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화의 모습을 이루어가면서 하나님 앞 심판대 앞에 섰을 때도 전혀 떨림없이 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에 근거해서 성도들을 훈련시키는데 전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감리교가 왜 실천을 강조하고, 왜 사랑을 강조하고, 왜 훈련을 강조하는가. 이러한 구원관을 가지고 있기에 그렇다. 다른 교단과는 다른 구원관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신앙의 형태가 이루어진 것이다.
오늘날 현대신학에서 가장 큰 이슈가 구원론이다.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것인데 가장 논란이 되고 있다. 논쟁의 요지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 아니면 한번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굉장히 심각하다. 새관점의 학자들은 현재적인 칭의와 최종적인 칭의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웨슬리와 약간 비슷한 것이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현재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모든 과거의 죄가 없어지고 새롭게 태어난다. 새롭게 태어난 후부터 모든 행동이 모아져서 마지막 하나님 앞 심판대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모든 행위가 기초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최종적 칭의라고 이야기한다. 누구의 주장이 맞는가. 한쪽에서는 오직 믿음을 가지면 예수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문제가 없다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구원을 받았지만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끝까지 가보아야 하고 구원취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성경은 두 가지를 다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힘든 것이다. 성경에서 두 가지를 다 이야기하면 두 가지를 다 받아들여야 한다. 말하고 싶은 것은 신학은 개방적 신앙으로, 신앙은 보수적으로 하면 좋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문제에는 증명되지 않은 것을 따라 갈 필요가 없다. 보수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다. 저는 양쪽의 의견을 다 들어야 하고 신앙생활은 보수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구원을 받았기에 나쁜 짓을 다해도 괜찮다고 하지 말고, 나중에 행위를 가지고 심판할 수도 있으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겠다고 믿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의 자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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