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목사 “바른 실천의 종교개혁도 필요-조셉 매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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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7-05-11 14:45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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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러싱제일교회(김정호 목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개혁의 역사에서 미래를 찾는다”라는 주제로 3월부터 11월까지 매월 둘째 수요일 연속 세미나를 열고 있다. 3월에는 조영준 목사가 “마틴 루터에게 길을 묻는다”, 4월에는 김중언 목사가 “요한 웨슬리에게 길을 묻는다”라는 제목으로 세미나를 인도했으며, 5월 10일(수)에는 이재준 목사가 “조셉 웨슬리 매튜스에게 묻는다”라는 제목으로 세미나를 인도했다.
10일(수) 예배에서 김정호 목사는 6월에는 장철우 목사가 도산 안창호에 대한 발표를 하며 이후에는 칼빈과 서재필도 다루게 된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종교게혁 500주년이 되는 10월에는 뉴욕과 뉴저지의 젊은 신학생이나 목회자를 중심으로 마틴 루터가 95개항을 발표했던 것처럼 이 시대의 95개 조항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조셉 웨슬리 매튜스에 대해 발표한 이재준 목사는 아스토리아한인교회뿐만 아니라 UMC 미국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김정호 목사는 “은퇴하고 보니 책 읽을 시간은 많은데 들어 줄 사람은 없다”라고 한 이재준 목사의 이야기를 듣고 종교개혁 500주년 연속 세미나를 준비하게 되었다는 일화를 밝혔다. 세미나 강사는 모두 UMC 은퇴목사들이다.
이재준 목사는 발표를 통해 조셉 매튜스가 종군군목으로 2차 대전의 비극과 참화를 몸소 겪고 허무와 절망에 빠져 있는 세대를 처절하게 경험하며 고난당하는 인간사회에 대해서 복음이 무엇인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야 하는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1960년대 초 악명 높은 깽 알카포네가 활동하던 시카고의 서부지역 흑인 빈민가를 “제5도시(Fifth City)”라고 명명하고, 백인 몇 가정이 아이들과 함께 흑인 빈민가 한 복판에 주거지를 정하고 백인 아이들을 흑인 학교에 보낸다. 흑인 아이들에게 협박당하고 힘들어 하는 아이들이 백인 부모들은 “그래도 너는 가야 한다. 그것은 이 도시의 희망과 미래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희망과 미래가 달린 것이다”라고 말한다.
김정호 목사는 이재준 목사의 발표가 끝나자 “바른 믿음의 종교개혁도 중요하지만 바른 실천의 개혁도 중요하다. 어떤 형태가 되어도 이 시대의 종교개혁은 바른 실천으로 다시 회복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하며 조셉 매튜스가 시카고 흑인지역으로 들어간 것처럼 우리도 교회가 있는 플러싱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재준 목사의 발표내용이다.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에 대해서 강조하는 김정호 목사님의 신학에 대해서 저는 깊은 공감을 느끼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한 개인에 대한 말씀일 뿐 아니라 사회적인 존재와 전 인류를 향한 말씀이므로 당연히 개인과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에 대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늘 인식해야 할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바로 그리스도의 구원은 개인과 사회 그리고 전 인류를 향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1. 교회의 사회적 책임
우리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한다고 하는 것은 종교개혁의 영적인 유산을 물려받은 개신교회의 신앙의 뿌리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를 다시 발견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 강좌에서 조영준 목사님은 “루터에게 묻는다”라는 제목의 강좌를 통해서 우리는 루터를 통해서 이룩한 신학적인 성서적 교리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깨우쳐 주었다. 구원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혜로만, 오직 십자가로만, 오직 성서로서 만 구원을 얻는 다는 교리인 것이다. 그리고 만인 제사장론을 통해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고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고 하는 구원의 도리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다. 우리는 이 교리를 끝까지 붙들어야 한다.
두 번째 강좌인 김중언 목사님의 “요한웨슬리에게 묻는다”라는 주제로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웨슬리의 신학사상을 배웠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재하시는 은혜(Prevenient Grace)를 통해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확신을 얻는 다는 구원의 도리를 배웠다. 요한웨슬리의 선재 은혜의 교리는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의 예정론, 즉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상과 대치되는 사상으로 요한 웨슬리의 선재 은혜 교리는 만인 구원론의 길과 전도와 선교의 길을 열어놓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의 예정에 제한 될 수 없다는 교리인 것이다. 물론 나중에 장로교 신학자들은 이중 예정론이라는 것을 말하며 수정하였다. 이러한 요한웨슬리의 구원관은 감리교회의 에큐메니칼 사상과 운동에 길을 열어놓았다. 그리고 웨슬리는 의롭다함을 얻는 은혜의 역사와 함께 거룩한 삶 즉 성화를 완성하는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는데서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다른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성화는 개인적인 성화를 말할 뿐 아니라 개인이 속하고 있는 사회에서 나타나 사회를 거룩한 사회로 이룬다는 목표들 동시에 지향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적 성화(Social Sanctification)을 말하고 있다. 웨슬리의 이러한 신학적 사상으로 그의 전도운동은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교회를 이루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변화를 이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후에 역사학자들은 웨슬리의 복음운동을 프랑스의 유혈혁명에 비해 영국사회의 무혈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감리교회가 다른 교파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이 선재은혜 사상, 믿음으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의롭게 된다는 사상과 함께,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동시에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의 단계를 거쳐서 영생의 완전에 이르도록 전진한다고 하는 교리인 것이다. 이 구원의 내용은 지난번 김중언 목사님이 설명하신 네가지 신앙의 기둥(Quadrilateral), 즉 성서와 이성과 교회의 전통과 체험의 네 요소의 네 기둥의 다이나믹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에모리대학 캔들러 신학교의 조직신학자인 Theodore Runyon 교수는 그의 책 <New Creation>에서 웨슬리의 신앙사상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하였습니다. 바른 교리, 바른 체험, 마지막으로 올바른 실천입니다. 이 세 가지는 감리교회의 균형잡힌 신앙심의 내용을 설명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가 왜 이렇게 장황하게 서론을 반복하며 루터와 웨슬리의 종교개혁에 대해서 말하는가 하면 저의 강좌 내용이 바로 이러한 문맥 속에 연결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요한 웨슬리의 성화의 교리 중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제가 맡은 주제는 여러분들이 생소하게 느끼실 수 있는 “조셉 웨슬리 매튜스에게 묻는다”라는 제목이다.
2. 조셉 웨슬리 매튜스는 누군가?
마태복음 9:14-17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전도가 그 시대를 장악하고 있는 종교제도와 권위에 대해서 굉장한 도전을 의미하는 말씀으로 생각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된다고 하시면서 그는 모세의 율법을 근원적으로 새롭게 해석하셨다. 그리고 생활과 제도와 문화를 바꿔서 하나님의 근원적인 뜻을 따라 살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를 따라 그의 교회를 정화시키시기 위하여 개혁의 예언자들을 보내신다고 믿는다.
조셉 웨슬리 매튜스는 감리교 목사로서 제 2차 대전 때 태평양 전쟁의 극심한 전투에 종군 군목으로 직접 참가하며 일본 본토에 상륙하여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전쟁의 참화와 인간의 비극과 죄악상을 몸소 체험하였다. 그의 동생인 James Wesley Mathews 감독이 쓴 그의 전기 <My Brother Joe>에서 조셉 매튜스는 일본 상륙작전에서 오키나와에 상륙할 때 일본군에 동원된 한국 여자소녀들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드류신학교에서 쿰라우데 특대생으로 졸업한 후 뉴욕연회에서 안수를 받고 커네티컷에서 목회를 시작한 후 종군군목으로 참전하였다. 그리고 전후에 예일신학대학에서 리쳐드니버와 폴틸릭히 등 2차대전 전후의 독일의 세계적인 신학자들에게 직접 사사하고 리쳐드 니버를 자신의 멘토로 삼고 남감리교대학에서 윤리학 교수로 봉직하였다. 뉴욕연회에서 남부 텍사스 연회로 멤버십을 옮기고 남감리교대학 교수직을 떠나서 텍사스 어스틴이라고 하는 곳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믿음과 삶(Life and Faith)”이라고 하는 공동체 운동에 참가하여 활동하던 중 시카고로 이동하여 에큐메니칼 공동체(Ecumenical Institute)를 창설하고 동시에 세속 세계속에서 선교하기 위하여 사회적인 타이틀을 붙여서 “문화사업공동체(Institute of Cultural Affairs)”라는 이름을 가지고 교육과 사회 선교를 추구하는 운동을 하였다. 이 사업은 에큐메니칼 공동체(Order Ecumenica): 카톨릭의 Benedict Order, Jesuit Order, Fransican Order, Carmelite Order 등과 같은 공동체를 조직해서 공동생활하며 영적인 훈련과 선교운동을 추구하는 공동체이다.
그는 영적이며 신학적으로 예언자적 사명을 가지고 광야의 사자와 같이 불을 토하며 그가 가는 곳 마다 선풍적인 반응을 일으켜 그의 설교를 듣고 당시 50년 말에서 60년대에 팽배하였던 수많은 히피들이 가방 두개에 짐을 싸들고 그와 함께 에큐메니칼 공동체생활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특별히 감리교회 목회자들이 많이 참가하였다.
1970년대에 서울 에큐메니칼에 제가 참가했을 때에도 미감리교회 목회자들이 두 가정이 있었고 제주도에서 인간개발사업을 할 때에도 감리교 목사와 함께 하였던 일이 있다. 훗날 제가 뉴져지 연회에 가입할 때에도 뉴져지 연회 성직부 실행위원 중에도 이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있어서 덕분에 저는 한국감리교 연회 정회원을 그대로 받아주어서 쉽게 연합감리교회 멤버십으로 옮길 수 있었다.
3. 에큐메니칼 공동체 운동(Ecumenical Movement)
조셉 매튜스는 전후 인간의 의식을 뒤집어 놓은 2차 대전의 비극과 참화를 몸소 겪고 허무와 절망에 빠져 있는 세대를 처절하게 경험한 종군군목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난당하는 인간사회에 대해서 복음이 무엇인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야 하는 가를 고민하였다. 시카고에서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을 신학적으로 재교육하는 운동과 선교활동을 하면서 제일 먼저 한 실험은 1960년대 초 악명 높은 깽 알카포네가 활동하던 시카고의 서부지역 흑인 빈민가를 택해서 빈민가의 구체적인 지리적 한계를 정하고 “제5도시(Fifth City)”라고 명명하고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새로운 공동체로 불러일으키는 실험을 한 것이다. 이것이 소위 “제5도시의 인간개발 사업(Fifth City Human Devempment Project)”이다.
그리고 그는 이 사업이 시카고 제5도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 모든 인간사회에 적용되는 사업으로 보고 이 사업을 모델 사업으로 정하고 이 운동을 미국 전역 각 주에 한 도시를 정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시카고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을 스태프로 파송하여 주요 도시에 사무실을 정하고 낙후된 마을에 모델 사업을 정하고 시범 사업을 시작했다. 아시아의 광대한 인도, 아프리카의 이집트, 중남미의 베네주엘라와 멕시코, 아시아의 말레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유럽 독일과 영국, 그리고 한국에도 1970년도에 제주도 중산간 마을과 강원도 화전 마을에 이 사업을 설치하는 등 세계적인 시범사업을 실시했다.
먼저 이 운동은 시카고 본부와 미 전국의 주요 도시를 돌며 지역 교회 지도자들을 신학적으로 재교육하는 일을 통하여 교회의 변화를 추구하였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령 그리고 교회와 선교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2차대전을 전후하여 일어난 신정통주의 신학인 칼발트, 불트만, 폴틸릭히, 본훼퍼와 리쳐드 니버를 중심으로 전통적인 신앙개념을 새로운 신학적인 개념으로 재해석하여 우리의 실존적인 삶과 연결시키는 교육을 시도한 것이다.
사실 우리도 신학교에서 이러한 신학자들의 사상을 책을 통해서 교수들을 통해서 듣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것이 우리 목회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런 가운데 목회 초년병으로 제가 이 운동에 접하며 눈이 번쩍 뜨이어 참가하게 되었다.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교회는 우리 신앙의 중심 개념이다. 그런데 이 운동에서는 이 개념을 재해석하여 실제로 우리 삶속에 적용하며 구체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더욱이 현대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재해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책임과 사명에 대해서 우리에게 도전한다.
앞서 말한 대로 1960년대 말에 조셉 매튜스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에큐메니칼 공동체를 조직하고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을 재교육하고 훈련하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또한 세속 사회에도 전도하기 위하여 성경과 신학적인 내용들을 현대의 세속적인 사람들도 알아듣도록 재해석하고 재해설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의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교육과 훈련은 신학적인 재교육을 위하여 RS-I 즉 신앙연구(Religious Study) 1 이라 하고 2박3일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20세기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어떻게 사회를 섬길 수 있는가를 고민하였다.
그리하여 시카고 서부 변두리 악명 높은 깽단 알카포네가 활약하던 흑인가 한복판에 들어가 흑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모험을 시작한다. 시카고 제5도시에서 백인 몇 가정이 아이들과 함께 흑인 빈민가 한 복판에 주거지를 정하고 백인 아이들을 흑인 학교에 보낸다. 흑인학교에서 흑인 아이들이 백인 아이들을 박해한다. “너 왜 여기 왔냐? 우리 정탐하려고 왔냐?” 하면서 칼을 들고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아이들이 울며 집으로 돌아와 부모들에게 항의한다. 부모들도 함께 울며 아이들을 설득한다. “그래도 너는 가야 한다. 그것은 이 도시의 희망과 미래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희망과 미래가 달린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것처럼(예레미야 1:18-19,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 도시에 대형 철인(Iron Man)의 동상을 세웠다. 그리고 그들의 사명을 다짐하였다. 할 수 있다는 소망을 흑인들에게 심어주었다. 이것은 인간 모든 공동체에게 해당되는 사건이다. 그들은 이 운동의 정신과 삶을 노래에 담아 부르게 하였다. 그것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And I Love You So”라는 유명한 히트곡이었다. 그 노래의 1절을 불러드리고 싶다.
“And I love you so, that people ask me how, How I’ve lived till now, I tell them I don’t know, People say I’ve changed, that they don’t understand. Ever since the day, the day I took your hand. And yes, I know how lonely life can be, the shadows follow me and night won’t let me free, But I don’t let the evening get me down. Now that you’re around me.”
4. 사회적인 개척자로서의 교회(Church as Social Pioneer)
조셉 매튜스는 1911년에 나서 1977년에 죽었지만 그의 사상과 삶은 기독교 지도자들과 세계적인 봉사자들에게 큰 감동과 영향을 끼쳤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동지들은 그의 강연과 설교와 강좌를 수집하여 <역사의 진로를 바꾸다(Bending History)>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였다. 거기서 보스톤대학의 전총장이며 명예교수이고 보스턴대학 출신인 John R. Silber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로마 천주교회의 최고 권위의 권능을 가졌다면 아마 조셉 매튜스는 먼저 적으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성프란시스와 같은 자로 대접을 받아서 우리 시대의 위대한 영적인 부흥 운동가로 환영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동생이며 연합감리교회 감독인 James Wesley Mathews는 그가 친히 집필한 그의 동생에 대한 전기의 제목을 <내 동생 죠, 20세기의 사도(Brother Joe A 20th Century Apostle)>라는 제목을 붙였다. 20세기의 사도라는 명칭을 붙임으로 그가 얼마나 2차대전후 교회와 사회에 영적인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조셉 매튜스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의 신학적 근거를 리쳐드 니버에게서 찾는다. 리쳐드 니버는 그의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THE RESPONSIBILITY OF THE CHURCH FOR SOCIETY)> 이라는 글 마지막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 사회를 향한 하나님께 대한 교회의 책임은 각 나라의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은 크리스찬 공동체의 사도적이고 목회적이고 개척자적인 기능으로 표현될 수 있다.(The Church's responsibility to God for human societies doubtless varies with its own and the nations' changing positions, but it may be described in a general fashion by reference to the apostolic, the pastoral and the pioneering functions of the Christian community.)”
여기서 파이어니어 즉 개척자라고 하는 표현에 주목하자. 히브리서 12:2절 표준새번역 판에 보면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를 믿음의 창시자 즉 개척자라는 파이어니어라고 부르고 있다. 영어번역에는 NIV 판에 “looking to Jesus the pioneer and perfecter of our faith”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셉 매튜스는 에큐메니칼 상징을 만들었다. 나이키 상징과 같은 격자모양은 역사의 맨 첨단에 서서 앞을 향해 길을 열며 나아가는 개척자의 미래지향적 지침이고 그 가운데 수직선은 그 선 뒤로는 더 이상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조셉 웨슬리 매튜스 목사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바로 이 역사의 첨단에 서서 미래를 열며 나아가는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이 상징은 우리의 구원의 과정을 가리키는 상징이기도 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죄 사함을 얻고 죄의 몸은 죽고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새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새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후로 다시는 뒤 돌아보지 않는다. 그것이다. 그러나 구원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다. 이것은 영어로 ‘No Longer’와 ‘Not Yet’으로 표현된다. 즉 더 이상 뒤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영생을 얻는 길인 것이다. 세계적인 영국의 성서학자 James Dunn은 이 No Longer, Not Yet을 구원의 과정(Salvation Process)이라고 하였다. 세례를 받은 이후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영원하신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결되어 영생의 삶을 누린다. 그 삶은 우리가 죽기 까지 계속되다가 영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오직 앞으로 나아간다. 주님 오시는 그날 까지.
5. 끝맺는 말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역사의 첨단을 가르고 믿음으로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며 승리하여 부활생명을 열어주신 믿음의 파이어니어 개척자 창시자 이시다. 그가 행하신 모든 일들은 기존 역사와 사회를 뒤집어 없는 변화와 혁명이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하러 오셨다고 하셨다. 여인과 어린이들을 환영하고 그들을 높여주셨다. 종교적인 혁명을 일으키셨을 뿐 아니라 사회적인 혁명도 일으키셨다. 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러 오셨다고 하셨다. 이것은 기존의 메시야 관, 모든 권력구조와 가치관을 뒤집어 업는 선언이요 삶이었던 것이다. 역사의 첨단을 가르고 그리스도의 교회는 새로운 문화를 창달하였다. 오늘날의 학교, 병원 사회복지 시설이 모두 교회를 통하여 소개되었다.
이렇게 교회는 역사의 첨단에 서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깨어 있었다. 역사는 깨어 있는 자들의 희생과 섬김을 통해서 새롭게 열리고 발전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담아서 표현하는 양식과 방법은 시대를 따라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복음의 메시지를 오늘날의 세대가 알아듣도록 형식과 방법과 전략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성령님의 역사는 언제나 새롭게 역사하신다. 이러한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 오늘날의 예언자적인 사명인 것이다.
역사의 최첨단에서 깨어있는 자들의 희생과 봉사로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진다. 후러싱제일교회는 이러한 역사의 최첨단에 깨어있는 공동체이다. 목사님의 예언자적인 메세지를 귀담아 들으시고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을 감당하는데 앞장서시기를 바란다. 그리하면 주변의 다른 모든 교회가 따를 것이다. 그리고 사회가 교회를 다시 보게 되리라고 믿는다. 교회가 변화의 중심세력이 되어 이 시대를 구원하는데 앞장서게 될 것을 믿는다. 최근에 불법체류자 피난처로 교회를 설정하고 불의의 세력에 저항하는 운동을 위하여 후러싱제일교회가 앞장서고 있는 것을 본다.
리쳐드 니버는 2차 대전 후 미국교회를 비판하며 스스로 회개하고 구속적인 화해의 책임을 짊어지라고 호소한다. 나치 독일의 만행과 전쟁의 참상을 비판하고 고발하기 전에 먼저 미국 교회는 자국이 앉고 있는 인종차별주의의 만행과 온갖 자본주의적인 악행을 먼저 회개하여야 한다고 질책한다. 따라서 교회가 사회적인 회개를 인도하려면 먼저 교회 내부에 만연한 죄악상을 고백하고 회개하여야 사회적인 회개를 인도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통성기도를 많이 합니다. 통성기도는 자기 소원을 빌기 위해서 부르짖는 기도만이 아니다. 먼저 자기의 회개가 선행될 때에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있다.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스스로 교회 생활과 조직의 구조에 은밀하게 자리 잡고 있는 불의의 요소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개혁하며 이웃을 위하여 섬길 때 진정한 복음이 전파되며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교회가 변화되어 교회의 문화와 스타일이 바뀔 때 사회문화의 변화를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대형 교회들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현상을 보지 않는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는 바로 이러한 회개운동을 제대로 한번 해 보자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폴틸리히는 교인중에 10퍼센트만 깨어 있어도 변화의 운동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 깨어있는 10%의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어 교회의 분위기를 바꾸고 그 나머지 사람들이 따라 나서면 그 힘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후러싱제일교회에서 이렇게 선구자적인 깨어있는 성도들의 훈련과 헌신으로 역사를 개척하며 새롭게 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역사의 파이니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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