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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래 전도사 “세이지 같은 한인이민교회 여성 평신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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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7-08-10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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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러싱제일교회(김정호 목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개혁의 역사에서 길을 찾는다”라는 주제로 3월부터 11월까지 매월 연속 세미나를 열고 있다. 3월에는 조영준 목사가 마틴 루터, 4월에는 김중언 목사가 요한 웨슬리, 5월에는 이재준 목사가 조셉 웨슬리 매튜스, 6월에는 장철우 목사가 도산 안창호에게 길을 물었다.  

 

전반기가 역사적인 인물들에게 길을 물었다면 후반기는 동시대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7월에는 유성준 목사가 세이비어교회 고든 코스비에게 길을 물었다. 8월에는 김명래 전도사가 여성 평신도에게 길을 물었으며, 9월에는 2세들에게 길을 물으며, 종교개혁의 장이 열린 10월에는 차세대에게 길을 물으며 95개조 개혁선언을 하게 된다.

 

8월 9일(수) 저녁, 여성 평신도에게 길을 물은 김명래 전도사는 뉴욕한인교회 이용보 목사의 부인이다. 하지만 김 전도사가 사모라는 정체성보다 그 긍지를 가지고 있을 정체성은 여성 평신도 리더이다. 김 전도사는 현재 UMC 한인여선교회 전국연합회 총무로서 한인여선교회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일구어 낸 여성 리더이다.

 

여성 평신도 리더로서의 자긍심을 높게 해 준 사건이 있었다. 동성애 이슈로 혼란을 겪고 있는 UMC는 미래의 방향성 결정하기위해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전세계적으로 1천만 명의 UMC 회중중에 32명의 위원을 선정했는데, 한인중에서는 유일하게 김명래 전도사가 선정됐다. 목사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 여성 평신도 지도자가 선정된 것이다. 뉴욕연회 감독 등 여러 감독에게 추천되었지만 한인교회를 대표하는 위원이 되지 못한 김정호 목사는 그 결정을 “신의 한수”라고 평했다.

 

김명래 전도사는 서울 감신대를 졸업하고 미국에 와서 캔사스 세인트폴 신대원에서 공부하고 중고등부 전도사를 오래하여 전도사 명칭을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 평신도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명래 전도사는 “종교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서”라는 부제와 함께 “종교개혁 500주년: 여성, 평신도에게 길을 묻는다!”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평신도 여성의 관점에서 풀어 나갔다.

 

감리교적인 내용들도 있지만 성서적인 역사적인 여성 평신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발표였다. 특히 요한 웨슬리 목사의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의 부엌 사역은 큰 도전을 주었으며, 김명래 전도사는 “한국교회는 밥이 없으면 목회가 안된다. 목회가 먹회여야 한다”라며 “부엌 미니스트리”라고 호칭했다. 두 번에 걸쳐 발표내용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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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1520년에 그의 저서 “독일 기독교 귀족들에게 고함”에서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하였다. 만인제사장설 교리는 "모든 신자들은 그가 성직자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며 교제할 수 있다"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제사장의 자격으로 자신의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오직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분은 신부만이 그런 역할을 했으며 성도들은 신부를 통해 배우고 들었으며 성경도 직접 볼 수 없는 시대였다. 그런데 모든 신자들이 재능과 소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부여받았다는 것으로 소중한 이론이다,

 

마틴 루터는 두 가지 성경구절을 인용했는데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9, 표준새번역),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28, 표준새번역)

 

결국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아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단지 직분에 따라 그 역할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말하였다. 이러한 만인제사장설은 개신교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오늘날 교회와 사회에서 평신도들이 소명을 받아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며 주의 사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평신도 여성들의 사역과 역사를 찾아보자. 역사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긴 흐름의 맥을 보는 것은 중요하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연연하는 것은 좋지 않을 수 있지만 과거의 역사에 무엇이 있었는지 바르게 살펴보면 미래의 답이 나온다. 성경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신 역사가 오늘날까지 미래를 바라보는 귀한 거울이 되고 있다. 

 

1. 구약시대와 여성들

 

구약시대는 강력한 가부장적 시대로 여성들에게 인간적인 권리가 전혀 없었다. 여성은 아버지나 남편의 재산으로 취급되었으며 여자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가계를 이어주는 도구였다. 그래서 아버지와 남편이나 없는, 나중에는 아들이 없는 여성들은 투명인간 같이 살아야 했으며 아무도 여성의 불행을 동정하지 않는 생존까지 위협받았다. 구약을 보면 여성들이 생존을 위해 많은 휴먼 드라마가 나온다.

 

또 여성들은 하와로 인해 인류타락을 시킨 악의 근원으로 취급되어 어떤 면에서는 개인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런 사회 속에서 여성들이 생존을 위해서 당시의 종교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선 것을 볼 수 있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소리를 낼 수는 없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는 역사를 만들어 내었다. 모세에게 땅의 분배를 요구했던 슬로브핫의 딸들, 운명에 도전한 다말, 정탐꾼을 살려 가족을 구원한 라합, 민족을 구한 에스더, 바로에 저항한 산파들, 아름다운 고부간의 나오미와 룻 등 많은 여성들이 있었다.

 

2. 신약시대와 여성들

 

예수님의 시대에도 가부장적 제도에서 오는 성차별이 극심했다. 예수의 제자들도 오랜 전통으로 이루어진 풍습과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시대에 파격적인 말씀과 행동으로 여성을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고 온전한 인간으로 회복시키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에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참여하였는가를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 속에서 정죄되며 사회적으로 버림받았던 여성들에게 자신의 설교를 발아래서 듣게 하셨고, 아브라함의 딸들이라며 육신의 질병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온전하게 만드셔서 사회에 복귀시켜 주셨다. 그래서 여성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예수님과 남자 제자들의 식사와 청소, 세탁을 담당하며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당시 유대의 율법에서 여성들의 위치는 구약시대의 여성들처럼 존재감이 없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도 보면 여성과 어린이들은 사람 수를 세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여성들이 자유롭게 예수를 따라 다닌다는 것은 당시 종교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선 것이었다.  

 

12년 동안 하혈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 치유를 받은 사건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혈을 하던 여인은 유대의 율법에 보면 불결하고 죄인 중에 죄인이었다. 병을 고치려고 가진 재산을 다 탕진하고 가정과 사회로부터 죄인으로 정죄 받은 그 여인은 마지막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이었다. 유대남자의 겉옷을 일반 여성이 만지면 돌을 맞아 죽는 문화권에서 그녀는 죽을힘을 다해 군중의 무리로 들어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고 결국 예수님은 그녀를 알아채셨다. 제자들과 성난 군중들은 그녀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며 그녀를 자신의 딸로 불러주셨다. 유대풍습에 성인 남자의 옷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세 사람이었다. 어머니, 부인, 아니면 딸이었다. 바로 예수님이 그녀의 아버지가 되어 딸로서 부르셨기에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돌을 던질 수 없었다.

 

이렇게 육체의 질병만이 아니라 사회인으로 회복시켜 주신 예수님을 많은 여성들은 마지막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끝까지 함께 하였고, 남자 제자들이 모두 숨어버린 그 순간에도 부활하신 무덤에 제일 먼저 달려가 확인을 하였다. 바로 종교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선 용감한 여성들이었다. 

 

3. 초대 기독교와 여성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질 때 여성들은 복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전파하였다. 예루살렘의 교회에서 제자들이 기도할 때 여성들도 같이 있었고(사도행전 1장, 14장), 성령강림 사건에도 여성들이 남성들과 함께 참여했다(사도행전 2장). 예루살렘교회에서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 마가라 불리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와 여종 로데가 있었으며, 욥바의 교회에선 다비다라는 여자가 선행과 구제하는 일에 힘썼다. 디모데를 키운 어머니 유니게, 등이 있었는데 여성들은 남성들과 함께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자신들의 모든 것을 헌신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특별히 가정교회를 주도한 여성들은 장소를 제공하여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목회적 돌봄으로 공동체의 화합을 이루어냈다.

 

사도바울이 아시아 지역으로 선교를 하러가려고 드로아에서 갔는데 그곳에서 바울이 환상을 보게 된다. 마게도니아 남자가 나타나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으로 알고 배를 타고 드로아를 떠나 도착한 곳이 마게도니아 지방(지금의 그리스)의 빌립보였다. 마침 안식일이어서 성 밖 강가에 유대인의 기도처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더니 강가에 여자들이 모여 있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두아디라에서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 라는 여자가 바울의 말씀을 듣게 된다. 주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주셔 큰 감동을 받은 루디아는 바울에게 자신과 집안 식구들이 모두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바울에게 자신의 집에 와서 숙박을 하라고 제안한다. 바울은 고민했을 것이다. 환상에서 본 사람은 남자였는데 만난 사람은 여성이었다.  당시 문화론 외간 유대인 남자가 모르는 이방 여성의 집에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역시 루디아도 같은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믿음으로 바울을 초청하였고, 바울도 그 제안을 받아들여 그녀의 집에 가서 거하면서 루디아를 유럽 최초의 첫 결신자로 얻게 되었고, 유럽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교회를 세우게 된다. 바울과 루디아는 종교와 문화의 영역을 넘어서 유럽에 복음을 전하는 기초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사도행전 16:1-15). 이밖에도 바울의 사역에는 여성 동역자들이 많이 있었다. 유오디아, 순두게, 부리스길라 등 여성들이 바울의 선교여행에 여성들의 동역자로 참여한 것을 볼 수 있다.

 

4. 요한 웨슬리 목사와 감리교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

 

요한 웨슬리 목사는 1703년 영국의 웹월스에서 성공회 목사였던 사무엘 웨슬리와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 사이의 19명의 자녀중 15번째로 태어났다. 어머니 수산나는 자녀들에게 규칙적이고 엄격한 신앙훈련을 시켰고, 아이들을 한 명 씩 밤에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나 고민을 듣고 대화하였다. 요한 웨슬리는 목요일 밤마다 어머니와 만났으며, 성장한 후에도 평생 목요일 밤의 시간을 그리워하였다.

 

또한 수산나 웨슬리는 자신의 부엌에서 가정집회를 인도하였다. 당시 여성들은 집회를 인도할 수 없었다. 설교도 할 수 없었고 성경공부를 할 수 없었으나 수산나는 파격적인 사역을 실시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영국 국교의 법을 어긴 것이다. 그런데 사무엘 웨슬리가 교구를 돌아다니면서 전도하고 집회하러 다닐 때 부목사가 주일오후 예배를 드리려 하는데 성도들이 없었다. 사모님 댁인 부엌에 들어가 있었다. 최대 2백여 명이 참석하여 수산나 웨슬리는 가족을 위한 기도, 설교 낭독, 신앙의 대화, 경건주의 서적들을 같이 읽는 시간을 가졌다. 부목사가 화가 나서 사무엘 웨슬리에게 부인이 영국국교의 법을 어기고 있다며 당장 중단하게 하라고 하자, 사무엘 웨슬리도 아내에게 그만두라고 했다. 하지만 수산나 웨슬리는 그만 둘 수는 있지만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기회를 못하게 하면 하나님 앞에 가서 그 책임은 당신이 지라고 하며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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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영국감리교회의 여선교회는 바로 수산나의 그 부엌에서 시작되었다. 부엌에 가보니 "수산나의 부엌에서 세계가 변화되었는가?"라는 글이 붙어 있었다. 세계를 변화시킨 곳이 수산나의 부엌이다. 그녀는 성도들에게 존경받는 지도자였고 그 덕분에 사무엘 웨슬리는 교인들과의 갈등이 있었으나 은퇴할 때까지 한 교회에서 장기목회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선교회 회원들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곳은 교회 부엌이다. 이런데 그 부엌을 무시할 수 없다. 바로 그곳이 미니스트리의 현장이다. 부엌에서 일할 때 나는 단지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사역을 담당하는 사역자임을 고백하면서 당당히 임해야 한다. 교회에서 부엌사역은 중요한 사역이다. 한국교회는 밥이 없으면 목회가 안된다. 목회가 먹회여야 한다는 것을 잘안다. 전국적으로 여선교회를 돌아다녀 보면 무엇을 먹을 것인가 하는 것이 얼마나 고민인지 모른다. 밥과의 전쟁이 큰 고민과 기도의 제목이다. 

 

수산나의 실천적인 사역은 아들인 요한 웨슬리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요한 웨슬리는 자신이 시작한 감리교 운동에서 속회 모임을 위한 인도자로 여성들을 임명하였고, 여성들이 요한 웨슬리의 설교를 낭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요한 웨슬리와 함께 감리교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 중에는 영적 후원자 셀레나 헤이스팅스, 감리교 여성 설교자의 원형이 된 메리 보산켓, 감리교 비공식 여성 설교자 사라 크로스비, 재정적 후원자 레이디 멕스웰, 파운더리 신도회의 엘리자베스 볼티모어, 감리교 여성 순회설교자 앤 로저스 등이 있었다. 

 

특별히 사라 크로스비는 젊은 날에 과부가 되어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이 살아가다가 속회에 참석하여 영국 국교회의 젊은 목사인 요한 웨슬리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그 당시 영국 국교회도 돌보지 않는 악명 높은 교도소에 가서 일반죄수들과 사형수들에게 요한 웨슬리 목사의 설교를 읽어주고 함께 기도를 해 주었는데 그녀를 통해 죄수들이 회개하며 주님을 영접하는 영적부흥이 일어났다. 결국 그녀는 교도소의 전염병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는데 요한 웨슬리는 그녀의 장례식에서 가장 신실하게 여기던 감리교인이었던 그녀가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다가 그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갔다고 추모사를 하였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경제적으로 빈부차가 심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희망 없이 살며 어린아이들까지 노동력이 착취되던 시대였는데 요한 웨슬리 목사를 통해 훈련받은 여성들은 가난한 가정을 방문하고, 어린아이들을 위한 주일학교를 돌보는 목회적 사명을 다하였다. 그 결과 요한 웨슬리의 영적 각성운동으로, 개인영성과 사회영성을 주장하던 감리교 운동은 부패되었던 영국사회를 프랑스처럼 피 흘리는 혁명이 없이 구원하였다고 후대의 역사가들이 말하고 있다. 웨슬리 시대 영국 여성들도 사회적 지위가 없이 결혼해서 아이 낳고 가정을 돌보는 주부로 살아가던 시대였는데, 그녀들이 종교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 하나님의 선교의 역사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5. 미국 감리교회와 여성들

 

1741년 요한 웨슬리 목사는 감리교회에 속한 설교자들과 교리와 장정에 대해 논의한 첫 번째 연회를 소집했다. 감리교의 출발점이 된 이 모임의 가장 큰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만드는 사역이었다. 미국 땅에 감리교회를 조직화한 것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평신도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1766년 뉴욕시에 신대륙의 첫 번째 감리교회가 필립 엠베리에 의해 조직되었고 여성들은 초기 공회와 속회의 중요한 구성원이었다. 필라델피아의 메리 도온은 미국 감리교회 최초의 여성 속회지도자였으며, 미국 초기 감리교 설교자와 결혼한 캐더린 리빙스턴 개릿슨은 기도모임을 조직하고 어린이들과 성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영적 스승의 역할을 하였다. 설교자와 평신도들을 아낌없이 지원하고, 깊은 영성을 지니며, 미국 감리교의 성장에 헌신한 그녀의 활동은 웨슬리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여성들의 전형을 나타내주고 있다. 

 

1798년-1826년 미국의 제2차 신앙대각성 운동은 여성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쳐서 많은 회심자들을 배출하였다. 1780년대는 남성들에 의해 여자를 위한 전문학교들이 설립되었으나 1820년대와 1830년대에는 여성들에 의한 학교들이 설립되어졌다. 1860년대 미국의 남북전쟁동안 여성들은 새로운 차원에서 여성세력을 조직화하는 기회가 되었다. 남북전쟁동안 남자 65만 명이 전쟁터에서 사망하였고, 남과 북의 온 사회가 전쟁에 동원되었다. 오하이오 출신의 여자의사였던 메리 앤 비컬디키는 전쟁동안 300개의 군병원을 운영하며 군인들을 돌보았고, 수많은 여성들을 자원 간호사로 파송하였다. 또한 군인들에게 보낼 군수품을 지원하기위한 2만개의 자선단체가 생기게 되었는데 대부분 여성에 의해서 조직되었다. 여성들은 남성이 없는 동안 경제를 책임지게 되었다. 농촌에서 농장과 플렌테이션을 경영하였고, 도시에선 사업을 경영하였고, 자신의 능력에 따라 학교와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려고 전쟁으로 인해 빈곤과 노동조건이 나빠진 환경에서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1863년 뉴욕의 하류층 여성들은 가정을 위해 남성들이 군대에 징집되어가는 것을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켰고, 여성운동가들은 ‘전국여성충성연맹’을 조직하여1865년까지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40만 명의 서명을 받았다. 그 결과 수천 명의 여성들이 공적인 정치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조직 결성의 경험과 새로운 조직 기술을 습득하였다. 여성들은 미국의 공적인 역사에서 유례없는 열정과 조직력으로 남북전쟁에 투신하게 된 것이다.

 

1873년에는 오하이오 힐스보로를 중심으로 기독교 여성들이 금주운동을 전개하여 가정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금주운동은 남북전쟁 전부터 소수의 여성들이 주장해온 것으로 술로인한 남성들의 가정폭력과 재정적인 무책임과 비도덕성으로부터 가정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다. 1880년대부터 동부와 남부유럽의 이민자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여성 이민자들은 빈곤 속에서 가정을 책임지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노동기사단이라는 조직체를 통해서 전문화된 직업여성들이 생겨나고 노동조합, 등을 조직하게 되었다. 

 

초기 미국여성들은 오직 가정에서 덕성을 지키며 자녀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역할이 한정되어왔으나 1800년대부터 여성들은 종교적, 국가적에 대한 사명의식으로 용기를 갖게 되었고, 다양하게 시도되었던 조직 기반의 경험으로 마침내 단체와 협회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이런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배경들이 여성들이 해외선교사로 나가는 요인이 되었다.

 

미국 감리교인들은 타인에게 선을 행하는 자비의 사역에 참여함으로서 요한 웨슬리의 뒤를 따랐다. 가장 중요한 자비의 사역은 영적, 육체적, 지적으로 이웃을 돌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순회 전도자들이 복음의 메세지를 가지고 도시, 마을, 농촌과 변방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는데 다른 나라 백성들도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해외 선교사 파송 조직을 만들게 되었다. 1820년 미국 감리교회 총회는 최초로 공식교단의 선교 기구를 설립하였다. 미국내에선 흑인을 위한 최초의 선교가 시작되었고, 1833년에는 아프리카 선교, 1835년엔 남아메리카 선교, 1847년에는 아시아 선교사역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국내와 해외에서 감리교 여성들은 이러한 선교사역에 선구자적 위치에 서 있었다. 1869년과 1893년에 현재 미국 연합감리교회 여선교회의 모체가 되는 모든 교단의 여성들은 각각 국내와 해외 선교기구를 조직하였다. 여성들의 선교조직은 개체교회 단위에서도 조직이 되었다. 이런 선교 구조는 선교사역을 위한 선교교육, 선교기금 모금, 선교사 양성에 가장 능률적이며 효과적이었다. 

 

또한 감리교는 시작부터 차세대 신앙교육에 관심을 갖고 어린이들의 신앙과 도덕의 기초를 가르치는 주일학교를 실시하였는데 여성들이 교사로서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영향은 해외 선교에 있어서도 교육기관이 설립에 초점을 두었는데 1869년에 미감리교회 여성해외선교공회가 인도에 이사벨라 쏘번 단과대학을 설립하였고, 1886년에는 이화학당을 설립하여 지금까지 여성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미국 역사를 통해서 여성들이 종교와 문화를 뛰어넘어서 국내만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새로운 선교의 역사를 써 나간 것을 볼 수 있다.

 

6. 한국 감리교회와 여성들

 

1880년대 조선의 여성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었고, 특별히 이름이 없다는 것은 존재 자체가 없는 것이다. 어릴 때는 간난이라고 별명을 부르다가, 남동생이나 오빠가 태어나면 누구 누이라고 부르다고, 시집가면 고을 이름을 따서 무슨 댁이라고 부르다가, 아이를 낳으면 누구 어미라고 불릴 정도로 이름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라는 이름을 주셨다. 여성은 단지 집안의 자손을 이어주며, 가정에서 농사일을 하며 가사를 돌보는 존재로서 남성의 소유물에 불과했다. 일처다부제로 고통을 받았고,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과 병원이 없었다. 세 남자가 없으면 사회에서 생존할 수 없었다. 어릴 적에는 아버지, 결혼해서는 남편, 늙어서는 아들이 없는 여자는 아무리 보쌈을 당해도 관가에서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어둠속에 살던 조선의 여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을 하고 게셨다, 오하이오 리베나에 살던 루시디아 볼드윈이라는 여선교회 회원이 전재산 88불을 조선의 여성들의 복음과 교육사업에 써 달라고 지정헌금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북쪽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WSCS)에서 오하이오 평신도 여성인 메리스크랜튼을 한국의 첫 여선교사로 파송해서 1886년 이화학당과 여자 정동교회를 설립하였고, 1896년엔 남감리회 여선교부(WBFM)에서 조셉핀 켐벨 여자 평신도 선교사를 파송하여 ‘배화학당’을 설립하고 여자 종교교회를 세웠다. 그 후부터 파송된 북 감리교회와 남감리교회 해외여선교회를 통해서 100년간 1,000명의 여자 평신도 선교사들이 한국에 파송되어 “한국여성이 한국여성을 가르쳐서 보다나은 미래를 갖게 한다”는 모토아래 여성을 위한 학교, 교회, 병원 등을 설립하였다. 그런 사역의 비용은 모두 미국 감리교회 여성들이 보내준 헌금이었다.

   

미국 감리교회는 육체는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건강문제에도 관심을 갖았는데, 19세기에 술을 금지하는 운동에 많은 감리교 여성들이 앞장섰고, 미국 내에 감리교 병원들이 세워지자, 해외선교에서도 의료 봉사와 병원과 진료소를 설립하였다. 미감리교회 여성 해외선교공회에 의해서 1869년 인도에 클라라 스웨인 박사를 최초의 여자 의료선교사로 파송하였고, 1888년에는 하워드 여자 의료선교사를 파송하여 한국최초의 여성병원인 “보구여관”을 설립하였다. 

 

요한 웨슬리는 초대교회의 여성 지도자 뵈뵈의 후계자로 여성들의 능력을 인정하여 돌봄의 사역에 여성들을 등용하였는데, 그 전통을 이어받아 19세기 말에 미국 감리교회에서 시작된 “여집사 제도(디크니스)”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심방하고, 복음을 전하여 감리교회의 부흥에 원동력이 되었다. 제인 뱅크로프트 로빈슨, 루시 라이더 마이어, 벨르 해리스 베네트가 감리교 디크니스 운동에 지도자들로서 그녀들을 따라갈 단체가 없었다. 해외에서도 디크니스들이 활발하게 사역을 하여 필리핀에선 지금까지 활발한 사역을 하고 있다. 

 

한국에는 메리스크랜튼이 1903년 여선교회를 조직하여 “전도부인(Bible Women)”이란 이름으로 디크니스 사역을 시작하였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여성들이 전도부인 교육을 받고 성경을 보따리에 싸가지고 다니면서 전했고, 짚신발로 버선발로 주먹밥을 먹으며, 젖먹이 아이들을 없고 마을과 산간벽지 그리고 연해주, 북간도, 만주, 일본, 외몽고까지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전도부인들은 자신의 집을 열어 먼저 속회를 조직하였고 후에 교회가 되었는데 현재의 한국의 모든 감리교회들의 초석이 되었다. 또한 “하나님 안에서 인간이 같은 인간을 지배할 수 없으며,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다”며 한국의 3.1운동을 기점으로 여선교회 조직을 이용해 독립자금을 나르는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감리교 평신도 유관순과 평양 애국부인회가 한 예이다.

 

또한 일본이 한국의 농촌을 수탈해 가는 것을 보고 상록수의 최영신, 김노득 등 감리교 평신도 여성들이 농촌으로 뛰어 들어가 복음을 전하며 농촌 계몽운동, 야학, 문맹퇴치, 등을 실시하였다.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자유함을 체험한 한국의 여성들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들은 오랜 유교의 전통을 넘어서 여성차별의 문화를 넘어서 오늘날 한국의 교회와 사회가 있도록 선구자의 역할을 한 용감한 여성들이었다.

 

7. 미국의 한인이민자여성들

 

1904년 SS 겔릭호를 타고 104명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104명의 최초의 이민을 떠나  1905년까지 총 7,266명이 이민을 오게 된다. 그 이민자들 가운데 이화학당을 비롯하여 미국의 여선교사를 통해서 교육을 받은 신여성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와이에 도착하여 교회를 짓는데 동참하고 자녀들에게 신앙교육과 한글교육을 시켰다. 하와이 사회에서는 애국부인회, 적십자, 등을 조직하여 조국의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특별히 여성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인종차별 받으며 고된 노동을 하며 어렵게 살다가 부업을 해서 번 돈으로 남편들을 농장에서 나올 수 있게 하고 개인 비즈니스를 시작한 강인한 이민 아줌마들이었다. 

 

1965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권운동의 결과로 1970년대 아시아 이민의 문이 열리자 한인이민자들이 캘리포니아, 뉴욕 등 대도시로 집결하게 되고 곳곳에 한인교회들이 설립되었다. 여성들은 가정에선 아이들에게 훌륭한 교육을 시키려고 노력하였고, 사회에선 이민여성으로 힘든 일들을 감당하며 가정경제를 책임졌고, 교회에선 성도들을 섬기는 일인삼역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 결과 한인자녀들이 미국 사회에서 훌륭한 사회인들이 되었고, 한인사회가 크게 발전을 하였으며, 한인교회가 50개주에 설립되었다.

 

지난 113년의 한인이민역사의 주역은 이름도 없이 자신들을 희생하며 억척스럽게 살아온 우리 한인여성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농담으로 한국에는 남성과 여성이 있지만 미국엔 남성과 여성과 이민 아줌마가 있다고들 한다. 한인여성들이 종교와 문화를 넘어서 이 땅에 뿌리를 내리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이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한인이민여성들을 광야에 있는 우술초인 ‘세이지(Sage)’ 같다고 볼 수 있다. 들풀이지만 물도 없는 척박한 땅에서 강인하게 솟아나와 향기를 발하며, 정결케 하며, 치유하는 성분도 가진 세이지가 바로 한인이민여성들의 모습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평신도 여성들이 나가야할 방향에 대한 내용의 2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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