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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백주년] 김에스더 목사 “3.1정신과 기독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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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ㆍ2019-03-01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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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일어났던 삼일절을 맞이하여 김에스더 목사(미주한인여성목회자협의회 회장)가 “3.1정신과 기독여성”라는 글을 통해 100년 전을 회고하고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돌아보았다. 김 목사는 “삼일절 100주년 뜻 깊은 해를 맞이하여 위대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을 생각하며 믿음의 행적을 좇아가 볼 때 가슴이 뜨거워져 글로 옮겨 보았다”고 말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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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주년을 맞아 3.1운동 모습을 재현 ⓒ데일리굿뉴스

 

1. 들어가는 말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삼일절 100주년을 맞아 미국에 사는 대한민국 동포로서 부르는 삼일절 노래이다. 삼일절 노래는 일 년에 한번 삼일절에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자주 불러져서 그 말의 그 뜻과 그 감격을 자라나는 어린이로 부터 어른들까지 기억되었으면 한다. 영어번역으로도 말이다. 

 

우리 선조들이 100년 전 일본제국주의에게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긴 것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1,542회 만세운동 궐기시위를 했으며 참가인원이 2,029,848명, 희생자가 7,509명, 부상자가 15,850명, 감옥에 투옥된 자가 47,306명이다. (독립운동 조사통계표 최남선: 한국 독립 운동사에서 발췌).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겼던 국토, 재산, 한국어 이름 등 모든 것을 되찾아 오는 운동이었다.

 

우리가 조국을 떠나 해외에 나와 살면서 아무리 살기 좋고 미국이 제2의 조국이라 하더라도 모국 대한민국이 당당한 독립국가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존립할 때 우리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긍지와 자부를 갖고 살게 된다. 우리들에게 조국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은 뿌리가 있는 나무이고 세계 코리언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젖줄이다.

 

삼일운동은 한국의 근대적 민족주의 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나 그 보다 앞서 동경 유학생들이 1919년 2월 8일 2시에 동경의 YMCA 강당에서 400여명이 모여 민족대회 소집통고서와 독립선언서 및 결의문을 일본국회, 각 대신, 각 외교사절단 앞으로 우송했다. (한국독립유공자협의회 1981.12) 이 세가지 문서 초안자는 최남선이며 연희대 교수로 있다가 6.25때 북으로 납치되었다. 동경조선한인유학생회는 1912년 10월에 조직되어 신익희가 회장이 되어 민족주의와 배일사상으로 이어져왔다. 

 

1918년 12월 1일 Japan Advertizer 영자신문에 미국의 정한경, 이승만, 민찬호를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민족대표로 파송키로 되었다는 보도와 김규식박사의 파리활동 보도 또 1918년 12월 15일 동경 조일신문에 미국샌프란시스코 거주 한인들이 독립운동자금 30만원을 모금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에 동경 조선 유학생들이 파리강화의 조선대표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고 국내동포들에게 자극을 주어야 한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또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초안하여 기독교계의 이상재, 이승훈, 박성범의 동의를 얻었다.

 

3.1운동은 한국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하여 전국시위로 번졌으며 일본과 미국, 간도와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동포들의 참여와 지원이 있었던 세계적 대한민국 독립운동이었다.

 

2. 3.1 운동이 태동하게 된 동기

 

일본제국주의자들이 19세기 중반부터 일본을 근대화하면서 기회만 있으면 한국을 식민지화 하려고 침략정책을 강화했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한국의 외교권과 국권의 일부를 찬탈하고 1910년 8월에 한국민족의 저항투쟁을 압살한 후 일본식민지로 병탄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세워 입법사법행정을 취해 한민족 동화작업을 했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및 소년잡지를 폐쇄하고 식민지 노예교육을 강행했다. 1919년 1월 21일 서울 덕수궁에 있던 고종황제가 “내가 무슨 음식을 먹었기에 이러느냐?”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승하하셨다. 고종을 돕던 두 시녀도 폭사했다.  

 

서울 새문안교회는 승하 일주일 후 1월 27일에 전교인이 모여 황제 승하를 애도하는 특별예배를 드렸다.  3월 3일 고종황제 인산(因山)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지방에서 10여만 명이 한성에 모이기 시작했다. 장례식에 참석하러 미리 온 국민들이 만세운동을 알고 참석할 수 있었을 게다. 장례행렬은 종로 청량리 금곡까지 고종황제 운구가 지나가는 도로변에 엎드려 통곡하며 그 날 시위는 없었다.

 

또한 세계 일차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권(民族自決權)을 인정, 주장함으로  3.1운동은 이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3. 기독교 성경의 가르침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나라 잃고 자유 없이 일제 식민지백성으로 방황하는 민족에게 개신교 목사들은 희망의 메시지를 강대상에서 소리 높여 외쳤다. 그의 나라는 현재 내가 겪고 있는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원한 나라이다.  그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신 대한민국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찾아야 한다는 사명과 희망을 주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대한민국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그 당시에 불려졌던 노래 중에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이란 노래가 있다.

 

삼천리 반도 금수 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삼천리 반도 금수 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 날에 일가려고 그 누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이 노래는 교육자이며 독립 운동가였던 남궁억선생이 작사작곡한 노래로 민중들이 힘차게 불렀던 한국적인 창가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창세기나 출애굽기는 인간실존 문제에 대해 다루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한다. 또 선민 이스라엘백성의 애급노예 생활에서 해방을 맞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통해 한민족 상황과 비교해서 배웠다. 목사님들은 학생들에게 기독교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신다고 가르쳐 주셨다.

 

“진리를 알게 되면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

 

미국에서 민주주의 사상과 민주제도 그리고 기독교 정신을 배우고 돌아 온 서재필, 윤치호 등은 순 한글로 된 독립신문을 발간하면서 기독교 정신을 민중들에게 계몽시켰다. 예를 들면 계급타파 라든가 여성해방 및 여권신장 등을 성서의 교훈에 따라 선포했다. 만인은 하나님의 형상대로(Imago Dei) 지음 받았으므로 인간 한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평등하고 소중한 존재이고 양반이나 상민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기독교 진리와 교훈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따르게 되고 독립운동하는데 나서게 되고 3.1 운동 당시 참여하고 투옥된 사람들의 종교현황을 보면 절대적으로 기독교인이 많다. 또한 미국, 캐나다, 호주선교사들은 선교활동과 미션스쿨에서 일본식민정책의 비성서적인 면에 반기를 들며 간접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4. 미션스쿨의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한 여학교 

 

서울에서 이화학당에 다니던 유관순을 비롯해 이화 학생 다수가 기숙사 밖을 나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화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3시만 되면 조국독립을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 정신여학교 학생들도 교문 밖을 뛰쳐나가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김마리아 교사가 학생들을 지도했다.  

 

경기도에서 개성 호수돈 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동하여 읍민동 1,500명이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했다. (*당시 개성이 경기도에 속함).

파주읍 교하리 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임명애(林明愛)의 인도로 150명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황해도 남본정 예배당에서 180명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안악군, 박치간, 정계로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3.11 은홍면 은정 장날을 기해 1천명 장꾼들이 독립선언서 낭독 후 만세시위를 하는데 여학생이 앞장섰다. 

충청도에서 병천의 아오내 장날 대한독립만세 시위에 16세 유관순이 선도했다. 이 날이 음력 3월 1일(양력 4월 1일)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전라북도에서 3.5 영명(永明) 여중학교 학생과 군중 500명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전라남도에서 3.10 광주 장날을 기해 숭일학교와 수피아 여학교 학생들과 시민 1,000명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4.8 목포 영흥(永興)학교 정흥(貞明)여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태극기를 들고 수백 명이 목포에서 시위했다. 

경상북도에서 대구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대구보통학교 학생 중심으로 서문밖 시장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는데 1,000명이 참석했다. 의성 보통학교 150명 쌍계동 농민 200명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경상남도에서 3.11 부산 일신여학교 11명이 기숙사 뛰쳐나와 거리에서 독립만세 부르며 시위했다. 부산진 장꾼들이 수백 명 독립만세 외쳤다. 마산 창신학교와 의신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만세를 선도했다. 3.21. 구마산 장날을 기해 3,000명이 시위했다.

 

5. 유관순과 김마리아 

“내가 어찌 내 민족이 화 당함을 차마 보며 내 친척이 멸망함을 차마 보리이까?”(에스더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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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 수형 카드 ⓒ데일리굿뉴스  

 

류관순

 

류관순이 다녔던 이화학당의 학제는 보통과, 중학과, 고등과, 대학과가 있었는데 사촌언니 류예도가 다니던 이화학당 보통과에 선교사의 권유로 편입했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류관순은 고등과 1학년이었다. 당시의 학당장은 프리스였다. 류관순은 1902년 3월 15일 류중권의 4남매 중 2녀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홍호학교를 설립한 독실한 교인이었다. 고향은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이다.

 

이화학당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3시만 되면 일제히 수업을 중단하고 조국독립을 위한 기도회를 갖고 토론과 사상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이문희를 중심으로 독립에 대한 애국심을 이어 왔다. 기독교 교육을 받은 모교출신 교사 신마실라, 박인덕, 신준려, 김활란, 황애덕 등 10여명 교사가 있었고 외부 인사인 김마리아, 나혜석 등과 함께 파리강화 회의에 여성대표를 파견할 것을 결의 하였다. 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옆에 있는 정동교회에 출석하였는데 이필주 담임목사와 전도사 겸 기독신보사의 서기로 있던 박동완으로 부터 감화를 받았던 것 같다. 이 두 분은 모두 33인 중에 속한 분이시다.

 

이화학생들은 3.1절에 두 그룹으로 나뉘어 시위에 참여하기로 했는데 한 그룹은 탐골공원 뒷문으로 들어 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세운동에 참가하기로 했으며 또 한 그룹은 상복을 입고 대한문 앞에서 곡하다가 만세 행렬에 합류하기로 했다. 류관순은 두 번째 그룹으로 학생들이 모여 있는데 서양 교사들이 교문을 막고 못 나가게 하자 5인 결사대를 조직하여 다른 친구 10명과 함께 담을 넘어 남대문 방향으로 도망쳐 시위에 참석했다.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3월 10일 학교 휴교령에 따라 류예도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 왔다. 관순은 고향유지들의 협조를 얻어 음력 3월 1일 (양력 4월 1일) 아오내 장날 정오에 만세 부르기로 했다. 음력 2월 그믐날 용두리 뒷산 매봉에서 봉화를 올려 거사확인을 시킨 후 다음날 손수 만든 태극기를 장터에 오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독립만세 소리에 일본헌병들이 칼로 찌르고 총을 쏘는 것을 본 관순의 아버지가 “어째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거하다 즉사했으며 어머니 또한 피살당했다.

 

관순은 슬퍼할 사이도 없이 헌병대에 끌려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 관순은 자기가 주모자라고 말하면서 끝내 동지의 이름을 대지 않았다. 공주 검사국으로 옮겨가 같은 만세운동으로 구속된 오빠 관옥을 잠시 만났으나 이야기도 못 나눈 채 얼굴만 멀리서 보고 헤어졌다. 7년 언도를 받았다. 이에 불복 항거하여 서울 복심법원으로 이송되었고 미결수들은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어 재판날이 오면 오동마차에 실려 정동법원으로 호송되는데 옆칸에 있는 누가 톡톡치면서 “누구십니까? 나 박인덕이요” 관순은 흥분하고 놀라서 “선생님, 저 류관순입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가 왜놈들에게 피살된 것을 기억하고 독립운동 계속 하고 있어요.” 선생과 제자는 기구하게 오동마차 옆에서 만났다. 3.1운동으로 박인덕선생도 수감된 것이다. 박인덕은 관순에게 “나는 빌링스 목사님의 보석금으로 내일쯤 나가게 될 것인데 몸조심하고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류관순은 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3년을 받고 서대문 감옥에 수감됐다. 옥중에서 매일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여간수인 아마사끼(50세 가량)에게 모진 매를 맞았다. 관순은 아마사끼의 모진 매와 아오내 만세운동 때 일본헌병의 칼에 찔린 상처에 고름이 계속 나온 것이 사망의 원인이었다. 감옥 안에서 양명이란 여인이 출산을 했는데 아기의 기저귀를 관순의 가슴에 감고 말려 주었다고 한다. (이화 100년사 1886-1986 이화여자 고등학교)

 

16세 처녀 관순은 교회와 가정에서 신앙교육을 받고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이화학당에 들어 가 민족을 위한 여성 지도자가 되는 꿈을 꾸었는데 꿈을 이루어 빨리 하늘나라에 가셨다. 하나님 믿는 믿음 없이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 없이는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의 길을 당차게 담당하셨다. 애국열사 류관순은 이화학당이 낳은, 아니 대한민국이 낳은 딸이다.

 

류관순의 어록 

“나는 학교에서 청소를 하여서라도 도움을 받은 것을 갚겠다.”

“선생님 저는 나라에 몸을 바칠 각오를 하였습니다. 이천만 동포의 십분의 일만 순국할 결심을 하면 독립은 될 것입니다.”

“밖에서는 조용하지마는 우리도 조용히 있으면 죽은 줄로 알거니 만세를 부르자.”

 

 

김마리아

 

1892년 6월 18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서 김윤방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원래 서울에서 고조부가 판서를 지낸 명문가였으나 정쟁에 밀려 장연군 이곳 소래로 낙향하여 농사를 지어 대농으로 이름 난 부자였다. 부친은 언더우드와 에비슨과 서상륜이 마리아의 부친을 찾아가 솔래에 예배당을 세우고 선교할 것을 말하자 큰 사랑을 개방하여 예배장소를 만들고 선교사에게 종과 식모, 참모를 딸리게 하여 선교를 도왔다. 소래교회는 한국의 최초의 장로교회이다.

 

부친이 세운 해서제일학교를 다녔고 소래교회와 학교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았다. 서울로 와서 이화학당에 들어갔는데 외로워해서 고모와 언니가 다니는 연동여학교에 전학하여 정신여학교 4회 졸업을 하게 되었다. 마리아가 정신학교 교사로 3년 봉사할 때 로이스교장이 유학의 길을 열어 주어 한국에 여성 지도자가 필요하니 유학가서 공부하여 한국의 큰 일군이 되기를 기대했다. 1914년 일본유학의 길에 올랐다.

 

마리아는 1915년경 동경유학 남학생들과 애국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2월8일 동경유학생이 YMCA강당에서 참석했다. 죠시가쿠인 (여자학원) 시절 미국인 교수 Miss London이 마리아가 꿈꾸는 민족독립운동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마리아도 황애시덕과 함께 연행되었다. 석방 후 마리아는 독립선언서를 밀송할 책임을 갖고 2월 13일 조국을 향해 동경을 떠났다. 일본여자로 변장하고 오비(일본여자 의복의 허리띠) 속에다 미롱지에 복사한 선언서를 감추어 바느질하여 현해탄을 건넜다.

 

2월 15일 무사히 부산항에 도착 큰 고모부 서병호와 작은 고모 순애를 만나고 그 길로 전국을 누비며 독립운동을 했다. 광주에 내려 가 고모 김필례와 큰 언니 김함라를 만나고 수피아 여학교, 숭일학교에 독립선언서를 전하고 다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홍성지방을 순회하면서 교회집회를 이용해 사람을 모아 조국의 독립에 관해 연설하였다. 서울에 돌아 와서 보성학교로 손병희. 최린을 찾아 갔다. 때마침 귀국한 황애시덕은 이화학당을 중심으로 마리아는 정신여학교를 중심으로 쌍벽을 이루었다.

 

마리아는 일경의 혹독한 고문으로 평생에 고치지 못할 불치의 병을 얻었다. 마리아는 민족이 자각하여 독립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말과 자기의 순수한 판단으로 한 독자적인 말 때문에 심한 고문을 받은 것이며 유학을 보내 준 정신여학교에 보답하기 위해 휴양을 못한 것이라고 했다.(조선일보 1975.5.30. 최은희 기자)

 

마리아는 심한 고문 중에도 동료의 이름을 대지 않고 내가 주동자라고 말하고 혹독한 고문을 참아냈다. 그 후 조선애국여성동지회를 조직해 투옥됐으며 장로회전국여전도회 회장을 4년째 연임했다. 평양 기독병원에서 1944년 3월 13일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6. 나가는 말

 

3.1 독립만세 운동에는 3가지 요소가 기여했다.

 

첫째, 신앙을 가진 사람 선견자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승훈 장로 (오산학교 설립) 안창호 (평양 대성학교 설립), 김규식 장로 (새문안교회), 서병호 장로(새문안교회), 류관순(매봉교회, 프라이 선교사), 김마리아 집사(연동교회, 전국여전도회연합회 회장), 이상재 선생(경성 YMCA 총무) 등이다.

 

둘째, 미션스쿨과 YMCA의 역할이다. 정신여학교, 이화학당, 개성 호수돈, 광주 수피아, 목포 정명, 부신 신일, 마산 문창, 동경 YMCA강당, 동경한인유학생회, 한성 YMCA, 보성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 경성의학전문 등이다.

 

셋째,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관서지방 장로교와 서울과 중부지방 감리교)에 속한 신자들과 목사님들의 설교와 교육이다.

 

3.1운동의 가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크리스찬의 국가에 대한 책임의식

-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통합된 초기 단독 독립운동이였다.

- 천도교와 불교 종단을 초월한 대한민국 독립운동이 였다.

- 전국에 있는 미션스쿨이 총 궐기한 운동이고 다른 학교들과도 함께 했다.

- 남성 위주 운동만이 아니라 여성들이 일어난 운동(당시 사회 분위기로 힘든 일이었다)

- 사회 제도 차별없이 함께 했던 운동(학생, 교인, 상인, 농민,노동자)

- 해외 동포들도 참가한 세계적 코리언 디아스포라 독립운동 (미국, 일본, 간도, 중국, 연해주)

- 김마리아, 유관순 등 여성애국지사가 출현함

- 자발적으로 일어난 동포애 운동으로 무저항 운동이었다.

- 예수 믿기 때문에 자원하여 고난과 죽음의 길을 택한 선배들은 예수 믿고 부와 명성을 얻고자 하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진정한 복음신앙의 의미를 가르쳐 준다.

 

미국에 와서 오늘을 사는 한인 크리스찬들은 삼일정신에 따라 교파의식을 넘어 내 교회만이 아니라 큰 교회와 작은 교회가, 오래된 교회와 이제 막 시작한 교회가, EM과 KM이 서로 상부상조하여 교회울타리를 넘어 한인회와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와 타민족 간에 상호이해를 통한 상부상조하는 열린 사회, 포용하는 민족이 되어야겠다. 미국을 책임지는 민족이 되어야 하겠다.

 

조국보다 50배 큰 나라에 와서 살면서 통 크게 살며 미국에 기여하고 타민족에 베풀며 살자. 통일한국을 바라보며 미국동포가 할 사명을 준비하자. 오늘의 김마리아와 류관순이 미국에서 일어 나가를 바라며 100년 전 3.1운동을 기념하는 행사만 아니라 3.1정신을 이어가는 코리언 디아스포라가 되십시다. 하나님의 은총이 조국 대한민국과 미국에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참고도서

 

신용하: 3.1 독립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 연구소 1989

박춘화: 3.1운동 기념예배 사례집, 기독교 대한 감리회 창천교회 1984

이화여자고등학교: 梨花百年史 1886-1986, 1994

貞信女子中學校 : 貞信百年史 (上卷) 1887-1987, 金光鉉1989

貞信女子高等學校

學校法人五山學園 : 五山百年史 1901-2001, 2007

새문안교회 역사편찬위원회 : 새문안교회 100년사 1887-1987, 김동익 1995

대한예수교장로회 연동교회: 연동교회 100년사 1894-1994, 이성희 1995

남대문 교회사 편찬위원회: 남대문교회사 배명준 1979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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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과 뉴저지 교계에 3.1운동 1백주년 기념행사들 이어져 2019-02-26
뉴저지 이보교, 복지교회 첫 번째 교육 진행 2019-02-26
제3회 앰배서더 컨퍼런스의 두 날개는 강의와 멘토링 2019-02-26
제10회 니카라과 전도대회 통해 확증된 하나님의 마음 2019-02-26
이민철 교수, 메이첸 시리즈 2번째 ‘기독교의 기원’ 번역서 출간 2019-02-26
UMC 한인교회들 환호! 보수적인 “전통주의 플랜” 본회의 상정 2019-02-25
최영기 목사, 뉴저지에서 가정교회 1일 특강 인도 2019-02-25
뉴욕겟세마네교회, 뉴욕교민 초청 2019년 신년음악회 201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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