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주 교수 “청교도의 삶을 살겠다는 말을 쉽게 하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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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ㆍ2020-03-12 06:3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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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수도원 수도회(PAM, 원장 김에스더 목사) 9주년 감사예배가 3월 8일 열렸다. 특징적으로 청교도 미도착 400주년을 맞아 특별 강의가 진행됐는데 이길주 교수(버겐커뮤니티칼리지 역사학과 교수)가 “청교도 정신과 미국의 정체성”이라는 제목의 인상적인 강의를 했다.
이길주 교수는 “미국 역사를 관통하는 정신적 유산은 청교도(Puritan) 정신이다. 올해는 청교도들 중 영국정교와의 완전한 결별을 주장한 분리주의 청교도, 필그림(Pilgrim)들이 미 대륙에 밝은지 400년이 되는 해”라고 강의를 시작했다.
이길주 교수의 강의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카리스마적인 강의 스타일 때문이기도 했지만, 역사를 전문으로 하는 교수로서 목회자나 신학교 교수에게서 쉽게 들을 수 없었던 청교도 신앙이 만들어 낸 사회의식, 정치의식, 공동체 의식을 다루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강의 초반에 이길주 교수가 “특히 일선 목회자 여러분, 나는 청교도의 목회나 삶을 살겠다는 말씀을 쉽게 하면 안된다. 그런 마음을 가진다면 마음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라고 이야기를 할 때 숨이 턱 막혔다. 이어진 강의를 통해 청교도 신앙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이길주 교수는 “청교도들의 예배가 5시간 정도 되었다. 앞선 설교에서 청교도들이 까다롭고 까탈스러운 사람이었다고 했는데 정확하게 집었다. 예배에서 목사가 2시간 설교하면, 나머지 3시간은 질문문답 시간이다. 대충 예배하고 집에 가는 것이 아니다. 예배에서는 찬송이나 다른 순서로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영감을 나누는 자리였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교회를 ‘처치’라고 하지 않고 ‘미팅 하우스’라고 했다”고 했다.
이길주 교수는 “청교도들은 5시간 예배가 끝나도 집에 가지 않고 공동체 사회문제를 교회 안에서 토의했다. 실존의 대한 문제를 예배후 그 영성을 가지고 공동체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했다. 예를 들어 토지를 분배한다고 하면 신앙적인 에너지를 쌓지 않고 토지 나누자고 하면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위해 싸우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토지분배를 하려면 영성으로 먼저 자기를 다스리지 않고 가능하지 않는 일이다“고 말했다. 다음은 강의 내용들이다.
청교도 사상과 미국의 정체성
Puritanism and American Identity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인 1620년 11월. 모두 102명을 태운 Mayflower 호가 오늘날의 매사추세츠주 해변에 도착했습니다. 이들 중 약 40명이 필그림(Pilgrim) 이었습니다. 이들은 영국 정교(The Church of England)가 도저히 인간의 구원의 통로가 될 수 없다는 결론아래 영국을 떠나 홀란드(Holland)로 이주했다. 다시 미대륙으로 옮겨온 이들이었다. 영국정교 (The Church of England)에 남아있는 비신앙적 요소들에 대해 강하게 비판해온 “Puritan(청교도)”들 중에서도, 영국정교와의 완전한 결별을 주장한 “Separatist(분리주의자)”들입니다.
한 역사학자는 Mayflower를 타고 미국에 온 청교도들을 “Collective Suicidal Mission” 집단적 자살 행위에 가깝다고 까지 했습니다. 작고 낡은 배의 짐칸에 몸을 의지하고, 추운 가을 바다를 66일간 항해해 미국으로 온 것입니다. 이들 중에는 아이들도, 임신부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투와 같았던 항해 끝에 드디어 육지에 도착했습니다. 모두가 서둘러 배에서 내려 땅을 밟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먼저 앞으로 이들이 형성할 공동체의 존재 이유와 운영방침을 명문화했습니다. 이에 동의하는 이들의 서명을 받았습니다. 모두 41 명의 남성 (여성은 제외)이 서명했습니다. 미국 역사의 최초 자율적 합의문이라 불리는 ‘The Mayflower Compact (메이플라워 맹약)’는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Having undertaken, for the Glory of God, and advancements of the Christian faith, and the honor of our King and Country, a voyage to plant the first colony in the Northern parts of Virginia; do by these presents, solemnly and mutually, in the presence of God, and one another; covenant and combine ourselves together into a civil body politic; for our better ordering, and preservation and furtherance of the ends aforesaid; and by virtue hereof to enact, constitute, and frame, such just and equal laws, ordinances, acts, constitutions, and offices, from time to time, as shall be thought most meet and convenient for the general good of the colony; unto which we promise all due submission and obedience.
필그림들은 먼저 왜 대서양을 건너왔는지를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며, 나라와 통치자의 명예를 위해왔다고 명시합니다.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개개인이 인간의 본능에 따라 알아서 살아 생존하는 각자도생이 아니라 “약속으로 묶인 (covenant and combine)” 공동체를 만들고 여기에 자신을 맡기겠다는 합의입니다. 이 공동체는 기꺼이 하나가 되겠다고 서약한 구성원들이 합의해 만든 법체제로 운영됩니다.
참고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약속 공동체”란 개념에 대한 아주 좋은 해석이 하나 있습니다. 한 유대교 랍비의 설명입니다. 언약 공동체란 성서적 개념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A covenantal community is "a group of people who intentionally enter into a mutual obligatory relationship in which they commit to a common mission and give of their time and psychic energy to support the viability of the group and the material and spiritual needs of the members of the group.”
필그림들이 추구한 사회의 이상도 이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확고한 이상과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율적으로 만들어진 규율, 규칙입니다. 이 짧은 Mayflower Compact 에 법철학과 정신이 명시 되어있습니다. 법은 공정하고 평등 (just and equal) 해야 합니다. 그래야 공동체 구성원들이 그 법 앞에 자신을 내어놓고 이를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공동체에는 질서가 잡히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으며, 본래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다고 필그림들은 고백합니다. 물질적 평등이 아니라, 법 앞에서의 평등이 공동체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법 집행의 목적은 Mayflower Compact 에 명시된 대로 “보편적 선(general good)이어야 합니다. 필그림 사회의 초기 지도자 William Bra ㅇford는 자신 있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재산을 안겨주지는 못하지만 자유의 기쁨을 남겨줍니다. (“Though I bequeath you no estate, I leave you in the enjoyment of liberty.”)
필그림들이 “Mayflower Compact”를 통해 남긴 공동체의 이상적 요소가 있습니다. 필그림 사회, 나아가 청교도 공동체는 존재 이유 (신앙의 차원에서는 창조주의 뜻)의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필그림 사회의 초기 지도자 William Bradford 의 고백대로 하나의 작은 촛불이 불씨가 되어 천개의 등이 밝혀지는 (“one small candle may light a thousand, so the light here kindled hath shone unto many”) 역사입니다.
다음은 그 존재 이유를 실현하기 위해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를 설정합니다. 그것은 약속의 관계입니다. “Covenantal Relations” 입니다. 강압적 힘으로 만들어진 질서와 관계가 아니라, 자의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여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공정하고 평등한 법체계를 통해 표현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는 자신의 존재 목적 (이유)를 고백합니다. 이 목적을 실현키로 뜻을 모은 구성원들이 자율적으로 합의한 법 앞에 자신을 기꺼이 맡길 때 가능합니다. 미국 사회가 지향하는 공동체의 이상입니다.
이제 역사를 한 세기 반 정도 앞으로 돌립니다. 1782 년. 공식적으로 1776년 시작된 미국의 독립전쟁이 거의 끝나갈 시점입니다. 이 때 “국가 휘장 (Great Seal of the United States)”을 정했습니다. 새로 국가가 탄생하는데, 이 나라는 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다른 말로 하면 정체성을 먼저 정하고 새로운 역사를 쓰자는 의미였습니다. 이렇게 아래의 미국의 “Seal”이 정해졌습니다. (1달라 지폐의 뒷면에도 있습니다.)
위에 세 개의 국시 (國是, 모토 motto)가 보입니다. “E Pluribus Unum-여럿에서 하나”로입니다. “nouvus Ordo Seclorum-새 시대가 열렸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Annuit Coeptis-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일을 기뻐하신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위의 세 번째, 하나님이 자신들이 하는 일을 기뻐한다는 고백은 다른 나라나 민족에게서 찾기 어려운 당찬 선언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믿고 선언한 민족은 스스로가 자신의 행위, 역사에 당위성을 부여합니다. 미국의 역사를 관통하는 힘입니다. 물론 그 힘을 파괴적으로 사용한 예는 많습니다. 하지만 그 힘은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 인식과 고백에 기초한 것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필그림 역사에서 보았듯 나라와 민족의 자기 고백은 기독교 전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신앙고백, Profession of Faith”이란 뿌리에서 피어난 꽃입니다. 청교도 정신이 남긴 역사의 유산입니다. 청교도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고백의 공동체입니다.
뉴 잉글랜드 초기 청교도 사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존 윈스롭 (Governor John Winthrop 1588-1649)은 1630년 미국으로 오는 배 ‘Arbella’ 선상에서 청교도 이민 공동체의 의미를 세상에 고백, 선포하는 설교를 합니다. 제목은 “A Model of Christian Charity”입니다. 기독교 사랑의 표본입니다.
이 설교의 시작이 무척 중요합니다. 윈스롭은 먼저 새 땅에 들어가 사회구성원들이 모든 면에서 평등하고 공통된 삶을 살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사회의 다양성을 은혜로 고백합니다. 사회에는 부유하고 강한 이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못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나라와 사회는 강력한 분배제도를 통해 이 양극을 없애는 사명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자비와 공정함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전자는 후자에게 너그러움으로 (mercy) 대할 기회가 있습니다. 후자는 전자에게 선망, 질시, 미움이 아닌, 소유의 차이와 관계없이 이웃으로서 자신의 정의로움(just)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엮어주는 힘은 균등한 소유가 아니라 “mercy와 justice”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청교도 공동체 인간관계의 핵심입니다.
God Almighty in His most holy and wise providence hath so disposed of the Condition of mankind, as in all times some must be rich, some poor, some high and eminent in power and dignity; others mean and in subjection. The Reason Hereof:...so that the rich and mighty might not eat up the poor, nor the poor and despised rise up against their superiors and shake off their yoke; second, in the regenerate in exercising His graces in them, as in the great ones their love, mercy, gentleness, temperance; in the poor and inferior sort, their faith, patience, obedience….
이어서 윈스롭은 공동체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청사진을 제공합니다.
Thus stands the cause between God and us. We are entered into covenant with Him for this work. We have taken out a commission. The Lord hath given us leave to draw our own articles.
위에 두 문장에 세 개의 “C” 단어가 나옵니다. Cause, Covenant, Commission 입니다. 하나님의 뜻 (cause)이 청교도에 임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이 뜻의 부름에 기꺼이 응했습니다. 이렇듯 부름과 응함으로써 하나 된 하나님과 청교도 사이에는 약속, 언약의 관계가 성립되었습니다. 두려움에 떠는 불확신의 상태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맺는 관계가 아닙니다. 기쁨, 확신, 겸손, 희망으로 초대에 응한 것입니다. 특히 필그림들은 이 초대에 응한 이들을 “Saint” 라고 불렀습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자신의 공동체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을 확신합니다.
그 축복의 내용은 결코 잘 먹고 잘 사는 일이 아닙니다. 윈스롭은 강하게 경고합니다. “seeking great things for ourselves and our posterity, the Lord will surely break out in wrath against us, and be revenged of such a people, and make us know the price of the breach of such a covenant.” 만약 우리 자신과 후손들을 위해 좋은 것 위대한 것을 취하려 한다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는 행위로써 하나님의 진노와 벌함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청교도 공동체가 간구하는 축복의 실체는 무엇인가요? 새로운 역사의 시작입니다.
Now the only way to avoid this shipwreck, and to provide for our posterity, is to follow the counsel of Micah, to do justly, to love mercy, to walk humbly with our God. For this end, we must be knit together, in this work, as one man. We must entertain each other in brotherly affection. We must be willing to abridge ourselves of our superfluities, for the supply of others’ necessities.
위에서 보듯 윈스롭은 미가서 6장을 인용합니다.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입니다. “Sacred (성스러운)”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secular (세상)”일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두 개의 “C”가 요구됩니다. “always having before our eyes our commission and community”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대한 “책임 의식 (commission)”과 공동체 의식(community)” 입니다. 이 둘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윈스롭의 다음 선언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관계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청교도 공동체에 자유를 주셨습니다. 공동체를 스스로 관리하는 자율적 운영권입니다. (“The Lord hath given us leave to draw our own articles.”) 하나님이 청교도들을 이만큼 신뢰하시니 거기에 합당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함이 당연합니다.
이것은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드는 힘은 이미 주어진 율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를 맺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이 목표를 위해 스스로 공동체를 운영하면서 거기에 필요한 세칙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 같지만 자율 사회는 법으로 운영됩니다. 그러면 법은 무엇인가요?
자율 공동체에 절대 필요한 요건이 “consent” 입니다. 직역하면 “동의”인데 의역이 필요합니다. 자기를 내어놓는 일입니다. 법을 따르겠다는 일은 합의된 법 앞에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내려놓겠다는 뜻입니다. 공동체의 법 앞에 자신을 내어놓는 일은 “Trust(신뢰)를 요구합니다. 신뢰는 기독교적 사랑, 즉, “Christian Charity”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 사랑을 윈스롭은 아름다운 시로 표현합니다. 사도 바울 후에 기독 공동체의 이상적 사랑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정리한 인물이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We must delight in each other;
make others’ conditions our own;
rejoice together,
mourn together,
labor and suffer together:
always having before our eyes our commission and community in the work,
as members of the same body”
청교도 사회는 통제성이 강한 사회였습니다. 위에서 보듯, 서로 사랑하려면 공동체가 사랑의 끈으로 묶이려면, 두 개 저해요소를 제거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사익 (profits)과 쾌락 (pleasure)입니다. 이 우상에 빠지면 험난한 대서양을 건너는데 성공해도 그곳에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라고 말합니다.
“if our hearts shall turn away, so that we will not obey, but shall be seduced, and worship other Gods, our pleasure and profits, and serve them; it is propounded unto us this day, we shall surely perish out of the good land whither we pass over this vast sea to possess it.”
신명기 30 장의 말 대로 죽음이 아닌 생명을 택한 공동체는 어떤 것인가요? 사랑 (charity), 신뢰 (trust), 한 뜻 (consent) 위에 자율적으로 세우고 운영하는 공동체입니다. 이 곳은 세상을 빛을 발하는 빛과 소금의 공동체로서 “The City On A Hil,l” 언덕위의 동네입니다. 그 뒤에 오는 모든 공동체의 모델이 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뒤에 오는 인류 공동체들이 하늘을 향해 “더도 말고 뉴 잉글랜드처럼 만 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구할 수 있는 모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며 자신감입니다.
언급한 윈스롭의 청교도 사상을 그림으로 정리하면 다음이 됩니다.
또 아래와 같은 그림도 가능합니다.
청교도 사회가 미국사에 엄청난 유산을 남겼습니다. 세 가지를 언급하려 합니다. 첫째는 자신을 모델, 즉 이상향으로 보는 신(新) 선민 의식입니다. 둘째는 역사에 대한 책임 의식입니다. 주역, 또는 주체의식이라고도 부릅니다. 셋째는 자유, 자율 사상입니다.
위의 생각들에 대한 예로서 세 개 문서를 분석해 봅니다. 1961년 1 월 John F. Kennedy 대통령의 취임사입니다.
“Let every nation know, whether it wishes us well or ill, that we shall pay any price, bear any burden, meet any hardship, support any friend, oppose any foe to assure the survival and the success of liberty.”
그는 먼저 전 인류적 자유의 생존과 확장을 위해 미국은 무엇이든 다 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미국이 인류공동체적 지도력을 실천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축복과 도우심을 간구하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은 사람들의 몫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우리의 양심이 떳떳하고, 역사 앞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인간은 그 일을 해낸 것입니다. 역사의 주역으로서 책임 의식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With a good conscience our only sure reward, with history the final judge of our deeds, let us go forth to lead the land we love, asking His blessing and His help, but knowing that here on earth God's work must truly be our own.
다음으로 에이브러햄 링컨의 1865 년 3월 재임 취임사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남부와 북부 합쳐 60 만이 사망한 남북전쟁의 막바지. 말 그대로 “살육(殺肉)의 환란(患亂)”이었습니다. 한 달 뒤 암살되는 링컨은 이 취임사에서 고백합니다.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기도하지만, 노예제도가 완전히 무너져 내릴 때까지 전쟁이 계속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뜻의 공의로움을 믿고 끝까지 싸울 것이라 선언합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정의로움에 굳게 서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역사의 사명을 완수하자고 합니다. 역시, 역사의 사명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았다는 신념을 읽을 수 있습니다.
끝으로, 미국의 독립선언서에 담긴 역사적 소명의식을 돌아봅니다.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That to secure these rights, Governments are instituted among Men, deriving their just powers from the consent of the governed, --That whenever any Form of Government becomes destructive of these ends, it is the Right of the People to alter or to abolish it….
하나님이 인간을 평등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생명, 자유, 행복추구의 권리를 부여하셨습니다. 정부는 이 권리를 지키기 위해 공동체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어 (뜻을 한데 모아) 결성합니다. 이런 정부가 인간의 권리를 파괴한다면, 하나님이 창조하고 부여하신 인간의 생명과 권리에 대한 도전입니다. 당연히 궐기해야 합니다.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쓴 토마스 제퍼슨의 인장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펜실베니아의 벤자민 프랭클린이 창안한 표현입니다.) “Rebellion to Tyrants is Obedience to God” 압제자에게 항거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충성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항거해야 할 압제는 단지 세금을 많이 거두어 백성의 골혈을 빨아서가 아닙니다. 이보다 더 큰 잘못이 있습니다.
나의 동의 없이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인간의 기본적 생존 요건을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청교도 정신의 기본이 되는 약속의 언약의 공동체, 이미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존재하는 약속, 언약의 관계를 깼기 때문입니다. 청교도 공동체 사상이 미국의 혁명사상을 가능케 했습니다. 이상적 공동체,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 자유, 자율 사회. 미국 역사에 이어져온 자기 정체성의 요소들입니다. 이런 가치들을 지키려 한 역사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특히 자유란 이름으로 흘러내린 피, 할퀴어 진 마음, 그리고 쓰러져간 생명이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마녀사냥’도 청교도 이상 공동체의 이름으로 행해졌습니다.
이런 예를 들면 어떨까요? 과수원의 과실을 수확해 보니 실과 전체의 반이 제대로 영글지 못했습니다. 수확한 열매 중 어떤 것은 병이 들었는지 작고, 모양도 뒤틀어지고, 어떤 것은 속이 썩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은 아주 보기도 좋고, 먹기도 좋고, 몸에도 좋은 과실이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어요? 과수원 농사를 포기할까요? 그렇게 할 수는 없지요. 농사는 생명입니다. 이런 방법이 있습니다. 좋은 실과는 이웃과 더불어 맛있게 먹겠습니다. 잼을 만들어 두고두고 먹겠습니다. 그리고 먹지 못할 실과는 모아서 퇴비를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병약한 과실을 생산해 낸 과수에다 뿌리겠습니다. 내년 농사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말입니다.
청교도 역사만이 아니라 미국역사에 전체에 흐르는 독선의 물결이 있습니다. 선악의 이분법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심 의식이 강하니 그 중심과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 생각, 문화, 지역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지금도 팽배합니다.
이런 아픈 역사 앞에서 링컨을 떠올립니다. 동족상잔의 아비귀환 남북전쟁 중에 링컨은 홀로 성서를 자주 읽었습니다. 특히 욥기를 자주 펼쳤습니다. 링컨은 욥기 23 장 10 절도 자주 찾아갔을 것으로 상상합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역사의 수치, 수난, 아픔 또한 나라와 민족의 단련과정으로 승화할 때 윈스롭의 고백대로 열 명이 천의 적을 대적할 수 있는 (ten of us shall be able to resist a thousand of our enemies) 강하고 세상에 빛을 발하는 공동체가 가능해질 것으로 믿습니다.
끝으로, 아래 그림으로 청교도 공동체의 비전을 요약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들의 나라를 연결해 주는 다리는 믿음의, 신뢰의, 동의의 관계라고 봅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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