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훈 목사 “인종차별,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고 변화시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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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ㆍ2020-06-12 10:1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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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는 인종차별적인 한 흑인의 죽음을 항의하는 시위와 혼란 때문에 77년 만에 저녁 통행금지령이 6일 동안 내려졌다. 그리고 맞이하는 주일인 6월 7일 주일에 많은 한인교회 강단에서 이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뉴욕제일장로교회 조성훈 목사는 설교 시간 대부분을 이번 시위에 대해 언급했다. 이 내용을 언급하려면 한쪽으로 치우치기가 쉽다. 경찰을 비난하거나 시위대의 약탈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하지만 조성훈 목사는 “약탈과 방화를 벌이는 범법자와 평화시위자들을 구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경찰을 일반화시켜 다 잘못되었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라며 균형을 두고 미국의 인종차별과 성경적인 시각을 광범히 하게 다루었다. 그 내용을 정리하여 소개한다.
1.
최근 타임지 표지를 보면 어떤 느낌이 나는가? 얼굴이 보이지 않는 아이를 안고 있는 한 흑인 여인의 모습이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면 행복해야 하고 밝게 웃어야 한다. 그러나 그 얼굴을 보면 아무런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다. 어떻게 보면 비통한 듯하고 슬픔에 잠긴 듯 한 모습이다. 여인이 안고 있는 아이 모습은 구멍이 뻥 뚫려있다.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타임지 표지 테두리에 보면 해답이 나와 있다. 빨간 테두리 안에 인종차별과 공권력 남용으로 죽은 35명의 흑인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인종차별 문제가 수면위에 드러났다. 왜 수면위에 드러났다고 말하는가? 인종차별의 문제가 사라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인종차별의 문제는 미국역사 기조에 깔려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다.
1991년 로드니 킹 사건으로 부터 시작해서 공권력에 희생을 당한 많은 분들이 있다. 이제 더 이상은 안되겠다고 시위를 하고 일어섰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인종차별이 없는 그런 사회를 꿈꾸면서 사회변혁을 이루기를 원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다. 지금 운동 속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다. 흑인들만 아니라 여러 인종들이 함께 동참하고 있으며, 의식있는 백인들도 동참하고 있다. 아시안들도 다 함께 동참하면서 지지를 보내고 있다. 함께 무릎을 꿇고 손을 높이든 그런 사진들이 계속하여 오르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2.
물론 평화롭게 시위하는 사람과 약탈방화하는 사람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뉴스를 통해 보이는 자극적인 내용 때문에 시위의 본질을 자꾸 왜곡되는 모습을 볼 수 있기에 말씀드리는 것이다. 평화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며 법이 보장하는 자신권리를 주장하는 건강한 시위와 혼란을 탐타 폭력적으로 약탈과 방화 등 나쁜 짓을 하는 범법자는 전혀 다르다.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뉴욕주지사와 뉴욕시장도 그것을 구별하라고 애를 쓰는 것 같다.
분명히 범법자는 끝까지 색출해서 잡아내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어야 한다. 많은 한인 비즈니스들이 피해를 입고 마음을 졸이는 상황이기에 더더구나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은 그냥 범법자이다. 그런 범법자들을 평화시위대와 혼동하여 생각하지 말라. 건강하게 시위하는 많은 분들이 있다. 이제는 시위가 세계로 확산되고 심지어 한국에도 동참하는 모임이 있다. 잘못되어진 인종차별적 모습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조지 플로이드 영상을 본 모든 이들이 이것은 아니라고 일어서고 있다. 우리도 함께 지지하며 기도하며 이 시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슈가운데 사회를 함께 끌어안고 기도하며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3.
물론 무조건 다 경찰과 공권력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공권력을 빙자하여 범죄하는 소수의 경찰 때문에 문제이다. 많은 건강하며 자기의 일을 소명으로 하고 있는 분들도 있다. 시민을 돕고 사회를 보호하기위해 최선을 다해 일하는 많은 경찰들이 있다. 그분들의 수고를 폄하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잘못되어진 법 구조 속에서 조직 뒤에 숨어서 자기들의 인종차별적인 생각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나쁜 소수의 경찰들이 있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지난 주일에 퀸즈에 시위가 있는 중에 경찰서장이 나와 함께 한 무릎을 꿇는 장면이 뉴욕 일간지 표지로 나왔다. 많은 경찰들이 함께 이번 시위의 뜻에 동참하고 마음을 모으고 있다. 이런 것들을 좀 구별하자는 것이다.
약탈과 방화를 벌이는 범법자와 평화시위자들을 구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경찰을 일반화시켜 다 잘못되었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경찰이 잘못해도 검찰이 기소를 하지 않는다. 정당방위라고 무마되고 넘어가니 뒤에 숨어있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최소한의 법적 안전장치는 있어 잘못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룰 수 있는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개혁하려는 것을 기도해주고 지지해야 한다.
사회가 변화되어야 한다. 언제까지 흑인들이 피해를 입어야 하는가? 사실은 BLM(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가 아니라 ALM(모든 이의 생명은 소중하다)이다. 모든 인종의 문제이다. 아시안이라고 과연 자유로운가? 아니다. 얼마나 피해를 보고 있는가? 저도 개인적으로 쉽게 잊지 못하는 차별적인 발언과 대우가 지금도 나를 힘들게 한다. 더 이상 그러면 안된다.
4.
2020년 8월로 미국에 노예제도가 시작된지 401년이다. 4백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여전하다. 1619년 흑인 4명이 버지니아에 팔려옴으로 노예제도가 시작되었다. 1860년에 노예규모가 395만이었다. 감사하게도 남북전쟁 후인 1865년 수정헌법 13조에 의해 노예제가 폐지된다. 수정헌법 14조에는 흑인들도 시민으로 대우받고 권리가 보장되어져 있다. 15조에는 인종이나 피부색에 따른 투표권 제한이 있으면 안된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2020년인데 여전히 아픔 속에 있다. 1960~70년대를 지나며 얼마나 많은 흑백갈등이 있었는가? 당시 여전히 유색인종을 전용 식당, 화장실, 호텔이 있었다. 그런 아픔의 시간이 지나 흑인이 대통령이 된 시대를 살고 있지만 아직도 인종차별이 존재함을 기억해야 한다.
5.
마틴 루터 킹 목사가 1963년에 미국의 3대 연설이라고 하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나의 친구인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고난과 좌절의 순간에도, 나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이 꿈은 아메리칸 드림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예전에 노예였던 부모의 자식과 그 노예 의 주인이었던 부모의 자식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의 네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그런 꿈을 안고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강처럼 하수처럼 흐르게 해 달라고 말했다. 그의 연설 속에 이런 내용이 있다.
“‘언제가 되면 만족하겠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흑인이 경찰의 무지막지한 폭력의 공포에 희생되고 있는 한, 우리에게 만족이란 없습니다. 흑인이 여행하다가 피곤에 지쳤을 때 고속도로 근처의 여관이나 시내의 호텔에 잠자리를 얻을 수 없는 한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흑인이 이주한다고 해야, 고작 작은 흑인 거주지에서 더 큰 흑인 거주지로 가는 것이 전부일 때, 우리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미시시피의 흑인이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뉴욕의 흑인이 마땅히 투표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한,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우리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정당성이 힘찬 흐름이 될 때까지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57년이 지났다. 여전히 그 모습이 반복되어지고 있는 안타까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된다. 이제는 정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그런 시대 속에 우리의 마음들을 모아주고 함께 기도해주기를 부탁드린다.
6.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왜 이런 차별적인 모습들이 나타나는가? 사실은 401년전에 부터 시작된 문제가 아니라 결국 이것은 인간 본성의 문제이다. 범죄한 우리 인간의 본성 속에 잠겨져 있는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판단 때문이다. 나를 높이고 드러내려고 하는 욕심과 탐심들,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에 잠재되어진 죄성이 결국 항상 남들과 비교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은 누르고 짓밟으려는 모습이 우리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인종차별만의 문제는 아니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차별의 문제였고, 권력을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차별의 문제였고, 늘 그런 것들이 인류의 역사 속에 흘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적어도 우리 기독교는 적어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용납하고 수긍하고 받아들이고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차별행위에 함께 동참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죄성의 뿌리가 무엇인가? 사사기 21:25처럼 자기 생각대로 자기 판단대로 행한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판단한다. 그 열매가 무엇인가?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나타났지만 제일 가슴 아픈 열매는 홀로코스트이다. 6백만이 넘는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히틀러는 인종주의자로 정권을 잡고 인종을 등급을 매겼다. 저급한 인종으로 취급한 유태인들을 말살시키려 했다. 우리가 그런 모습으로는 아니지만 정도의 차이이지 혹시 우리 속에 나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차별하지 않는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7.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기억해야 할 것은 적어도 우리 예수 믿는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보아야 한다. 성령강림 사건후 교회가 태동되어지고 흘러내려오는 가르침이 무엇인가? 복음의 진수가 과연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가운데 있어야 한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나만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나만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 이 땅에 호흡하는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가 다스리고 정복해야 할 대상은 이 땅이고 우리를 제외한 피조물이다. 우리가 우리를 정복하려고 하면 안된다. 지배자가 되고 피지배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아니다.
하나님의 시선에서 보아야 한다. 우리의 눈으로 피부색을 보고, 우리의 눈으로 타고 있는 차를 보고, 우리의 눈으로 입고 있는 옷을 보고, 우리의 눈으로 자리를 보고 판단하고 평가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앞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그래서 서로 존귀하게 여기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볼 때 이 모든 갈등들이 해결될 수 있다. 적어도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이름으로 축복한다.
8.
때로는 우리 속에 잠재되어져 있는 죄성들이 튀어나오기에 쉽지 않다. 그때마다 기억해야 하는 것은 로마서3:22 말씀처럼 하나님의 차별없는 구원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임했다는 것이다. 차별이 없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흐르는 역사가운제 붙잡고 기억해야 할 가르침은 교회안에 그 어떤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앙 안에 복음 안에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이다. 차별을 행한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성도가 아니다. 우리 삶의 기준은 성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고 성경대로 살아가며 실천하라. 적어도 복음의 은혜의 비춤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복음의 은혜를 받았다. 택하신 모든 백성에게는 이 은혜가 차별 없이 임하고 있다. 성경은 차별은 악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야고보서 2:1에는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야고보 사도는 빈부 차이를 말한다. 예배드리러 오는데 아름다운 옷을 입고 오는 사람과 가난한 옷을 입고 들어오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지적한다. 야고보서 2:1에는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삶속에 차별을 조금이라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께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모습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새로움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과연 우리는 어떤 관점을 가지고 이 문제들을 바라보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점검할 수 있는, 무엇보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되기를 당부한다. 우리를 보아야 한다. 문제의 시작은 우리에서 부터 시작되었고 해결점은 우리에서 부터 시작된다. 함께 일하는 직장동료, 종업원, 친구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그 시선이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비춤을 받고 차별없는 예수의 의를 덧입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 이 시대의 아픔을 함께 끌어안고 기도하며 함께 시대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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