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남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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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4-03-01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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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 집사가 그동안 인터넷을 통해 소개된 글들을 모아 신간 "어쩔까나 한국교회"를 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일이 떠 올랐습니다. 신 집사는 2012년 10월부터 아멘넷에 '목사도 평신도이다', '십자가 대신 십일조를 지고 가는 교회', '부흥회의 변질과 돈 잔치', '부패한 교회도 흥해야 하나', '양들의 분노와 방탄 목회'등의 글을 썼습니다. 글마다 많은 댓글이 달렸고 열띤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글의 제목에서 보듯이 그 내용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도 있었고,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비판도 있었습니다.
아멘넷은 신성남 집사의 글들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2달만에 연재를 중단하고 연재되던 글들을 내렸습니다. 이에 대해 다시한번 신성남 집사님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핑계를 댄다면 아멘넷의 편집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아마 몇년전만 했어도 어떤 비판이 있더라도 글을 연재했을 것입니다. 그런 부담가운데 신성남 집사의 신간 소식을 듣고 반가웠습니다.
이런 기대도 합니다. 지나친 비판은 글의 전체 주제를 흐리게 만들고 반감을 가져옵니다. 심지어 비판의 주체가 되는 사람들조차 신 집사의 글을 읽었을때 먼저 반감이 들게 하기 보다는 진진하게 고민하도록 유도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5% 정도의 글의 내용은 달라져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교회 장부를 숨기는 목사님들"라는 글에는 "그런데 요즘 교회들이 배가 부르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간까지 덩달아 부었나 봅니다. 교회 헌금과 재정의 주역인 성도들이 장부를 보겠다는데, 감히 종이란 자들이 나서서 이를 거부합니다. 종을 너무 풀어 놓았더니 그 방자함과 오만함이 하늘을 찌릅니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꼭 이렇게 표현했어야 했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어쩔까나 한국교회"라는 책의 제목앞에는 "꼴보수 공학박사 신 집사의"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현재 뉴질랜드에 살고있는 신 집사는 한국항공대학교에서 항공공학을 전공했고, 뉴질랜드 와이카토대학교에서 '유체역학'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신 집사는 많은 제자를 키워냈다고 자부하면서 성장한 교회가 수천억을 들여 초대형 건물을 짓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50세를 훌쩍 넘긴 나이에 더 이상 침묵할수 없어 당당뉴스등 인터넷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독자들은 아래 링크를 눌러 미국 라이프북에서 14불에 책을 구입하실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개혁을 지지하며 많은 구입을 기대합니다.
http://www.lifebookus.com/final/bookjumun.asp?gs_product=aa01070094882
"어쩔까나 한국교회" 속에는
"어쩔까나 한국교회"에는 한국교회의 개혁을 향한 성도의 아픈 마음을 담은 24개의 글이 담겨 있습니다.
1장 '가나안 성도를 아시나요'에는 △가나안 성도를 아시나요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병신도를 깨운다 △교회밖에 모르는 예수쟁이들 △빼앗긴 교회 △왜곡된 십일조 등 성도들에 대한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2장 '목사님, 목사님, 나의 목사님'에는 △도전받는 목사 왕국 △한국교회의 무법자들 △세습 목회자와 신도들, 그 나물에 그 밥 △말씀을 전하고 돈을 받는 목회자들 △목사와 박사 △부유한 목사와 가난한 목수 등 목회자에 대한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3장 '한국교회 돌아보기'에는 △교권주의의 밑뿌리 "담임목사 종신제" △밥 놔두고 죽 퍼먹는 교회 △부패한 교회도 흥해야 하나 △세상을 속이는 교회 △"유사 교회"와 종교 상인들 △예배의 변질과 예배 중독 등 한국교회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4장 '오 마이 갓'에는 △돈을 바치면 복 받는다는 목사님들 △부흥회의 변질과 목회자들의 돈 잔치 △연봉을 숨기는 목사님들 △교회 장부를 숨기는 목사님들 △건물이 목회하는 교회 △3천억 호와 예배당과 중세 삽질의 부활 등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어쩔까나 한국교회" 공감의 글
박종화 목사(경동교회)는 "지금 한국 사회는 많은 모순과 문제들을 표출하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한국교회의 회복을 위해서는 뼈를 깎는 아픔을 겪어야 한다는 자성의 소리가 드높다. 지은이의 글을 읽으면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회초리를 든 아픈 어머니의 마음을 보게 된다"고 공감합니다.
정성진 목사(거룩한빛광성교회)는 "한국교회는 지탄의 대상이 된 지 벌써 십 년도 넘었다. 많은 미래학자들이 ‘앞으로 30년’이 한국교회의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한다. 30년 동안 한국교회가 다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한다면 다음 세대에 희망이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촛대가 옮겨갈 것이다. 이런 위기감을 가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이 책은 작은 등불의 역할을 해줄 것이다"고 공감합니다.
강경민 목사(일산은혜교회)는 "그동안 한국교회의 현실을 비판한 책들이 여럿 나왔다. 그런데 이 책은 평신도의 경험과 시각에서 쓴 것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박충구 박사(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교수)는 "나는 이 책의 원고를 읽으면서 ‘우시는 예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국교회 안에 몸담고 ‘눈물을 흘리는 무수한 성도’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글을 쓴 이도 눈물을 흘리며 이 글을 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공감했습니다.
방인성 목사(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어찌 그리도 현 교회들이 성경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깨닫게 되며 놀라움을 넘어 두려움에 떨게 한다", 이필완 목사(당당뉴스 전 운영자)는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목사로서의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창피했다", 권혁률 대기자(CBS)는 "이 책을 통해 그의 한국교회에 대한 깊은 관심과 통찰을 더욱 많은 분들이 공유하고 한국교회 개혁을 향한 선한 의지를 모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공감합니다.
"어쩔까나 한국교회" 추천의 글
1.
김기석 목사(청파교회)는 "왜 잠만 자는가"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추천의 글을 썼습니다. 일부를 소개합니다.
나는 신성남이라는 분을 모른다. 그런데 그의 원고가 내게 건네졌고, 그의 글을 읽는 내내 떠오른 것이 ‘부담이 되는 주의 말씀’이라는 구절과 ‘수추’였다. 오늘의 교회에 대한 그의 진단과 비판은 신랄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자꾸만 원고를 덮고 싶었다. 그가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모습과 내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경어체로 적고 있지만, 아니 경어체이기에 그의 교회와 목회자 비판은 더 신랄하게 들린다.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다. 이미 지겹도록 들어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교회의 실상을 비판하고 지적하는 글들은 이미 넘치고 또 넘친다. 굳이 이런 책이 또 나와야 하나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글을 읽어가면서 교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저자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글을 덮지 못한 까닭은 그 때문이다. 그는 절박하다.
“그리고 교회 비리에 대한 비판이 교회에 상처를 내는 일이니 최대한 자제하자는 안일한 주장을 가끔 봅니다. 그러나 교회에 진정으로 상처를 주는 것은 비리지 비판이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이미 극심한 비리 때문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품고 있습니다. 은밀하게 숨기고 덮는다고 그 상처가 아물거나 없어질까요? 이제는 그 상처를 공개하고 수술하지 않으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이제는 정직하게 한국교회의 실상과 대면해야 할 때다. 굳이 이 자리에서 그가 지적하는 문제들을 적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처해 있는 위기의 태반은 목회자들로부터 나온다는 말은 아프게 새길 필요가 있다. 실력과 품성과 진실함이 부족한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성찰적 신앙인, 사유하는 주체, 하나님 나라의 꿈에 사로잡힌 전사로 세우기보다는, 순종 잘하는 착한 교인의 자리에 붙들어 두려 한다. 그들은 욕망과 두려움의 주술로 교인들을 포박하여 지배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당신들의 천국’으로 변해버린 교회, 열심은 있으나 영적 분별력은 부족한 교인들, 일상의 거룩함이 소거된 신앙생활로 인해 교회는 오늘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저자는 교회 개혁을 위한 선결과제는 제왕적인 목회자의 권한을 축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목사에게 돈이 집중되는 구조를 개선하고, 임기제를 통해 ‘밥벌이 목회’ 혹은 ‘돈벌이 목회’의 가능성을 줄여야 한다고도 말한다. 목회자들은 가르치는 직무에 전념하고, 다른 일들은 교인들이 분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유형적인 교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기존의 교회가 새롭게 개혁될 수 없다면, 새로운 교회를 기획하면 된다는 것이다.
2.
조현 기자(한겨레신문 종교전문)는 "유폐된 예수 구출작전"이라는 제목으로 추천의 글을 썼습니다. 일부를 소개합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의 관심은 그 수를 불리는 ‘성장’에 쏠려 있었다. 그런데 그 성장이란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도가 성장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격이 성장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성이 성장하고, 그의 덕행이 성장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었던가? 아니었다. 저자 신성남의 글은 ‘왜 아닌지’를 냉철히 보여 주고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도 기독교인 수는 전체 인구의 1.5%에 불과했다. 하지만 민족의 고난 앞에 예언자적 사명을 다했고, 그 이전부터 문맹자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워 병든 자들을 구휼했다. 기독교는 유교나 천도교 등 주류 종교로부터 배제 당하던 소수 종교였다. 그런데도 안창호, 조만식, 이상재, 이승훈, 유영모, 함석헌, 김약연, 이동휘, 이승만, 서재필, 김구, 유일한 등 민족의 선각자들이 그 소수 종교를 택했다. 소수의 그리스도인, 특히 목사와 선교사들의 헌신적 신앙과 삶의 자세를 보며 그곳에 바로 내가 살고, 민족이 살 길이 있다고 여긴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주류 종교가 되고, 골목마다 교회가 없는 곳이 없고, 가장 많은 권력자와 기업가를 신자로 둔 현재의 한국 기독교, 특히 목사들을 보며, 과연 이곳에 내가 살고, 민족이 살 길이 있다고 여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저자는 욕망이 양심을 거리낌 없이 이기고 교회 강단까지 지배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헌신과 사랑의 화신인 예수 그리스도를 추방하고, 일부 목사들은 자기들의 왕국을 구축한 상황이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현실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꼴보수 공학박사 신 집사의 어쩔까나 한국교회』는 이렇게 유폐된 예수 그리스도 구출작전이다. 돌들이 일어나 소리치듯이, 귀머거리 같고 벙어리 같던 양들이 일어선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의 모든 책임을 목사들에게 돌리던 시대는 끝났다.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가 탄생했을 때 이미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동책임시대가 열렸다. 이 책은 오래도록 자신의 책임을 방기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주체로 일어서는 신호탄이다.
신성남 저자가 추천한 글 "예배의 변질과 예배 중독"
아멘넷 기자는 신성남 저자에게 책에 실린 24개의 글중 가장 나누고 싶은 글 하나를 추천해 달라고 했습니다. 신 저자는 '건물이 목회하는 교회', '교회 장부를 숨기는 목사님들', '예배의 변질과 예배 중독'등 3개의 글을 보내며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기자는 '예배의 변질과 예배 중독'을 택하여 소개합니다.
"예배의 변질과 예배 중독"
부제: 예배는 무당 굿이 아니다
한국의 교인들은 지금 예배와 집회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계 유일의 새벽 기도회를 선두로 하여 주일 대예배, 저녁 예배, 수요 예배, 금요 기도회, 찬양 예배, 그리고 구역 예배 등 한 주간 내내 집회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추가로 정기적인 부흥회, 신앙 강좌, 그리고 특별 집회가 수시로 열립니다. 그 덕분에 전 세계에서 예배가 가장 많은 교회가 한국교회입니다.
교회 생활이 예배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성도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가장 큰 이유가 예배니까요. 그러나 가정생활, 직장 생활, 학교생활, 기타 나머지 사회 활동의 영역마저 모두 교회의 공예배들로 인하여 시간적 또는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고 과도하게 종속된다면 이는 심각한 신앙적 불균형을 초래합니다.
예배가 매우 중요하고 유익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교회 내에 각종 예배와 프로그램들이 범람하지만 정작 신도들의 삶은 어떠한가요. 음식이란 귀하고 좋은 것이지만 이를 너무 과식하거나 잘못 먹으면 급체 또는 식중독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예배를 바르게 시행하고 적용하지 못하면 신도들은 심각한 '예배 중독'에 빠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 많은 예배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개신교 역사상 가장 부패한 교회'라는 오명을 듣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현실이 우리의 예배 생활과 전혀 무관할까요.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예배
어떤 경우는 수십 년 동안 교회를 다녀도 삶이 별로 바뀌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여전히 가정에서 짜증내고, 직장에서 이기적이고, 모임에서 험담하고, 사업에서 부정을 행하고, 어려운 친척에게 무심하고, 그리고 가난한 이웃에게 박정합니다.
그래도 예수 믿고 다소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인색하고, 옹졸하고, 잘난 척하고, 다투고, 시기하고, 공의에 무감각하고, 기복적이고, 미신적이고, 그리고 주는 것보다 받기를 좋아합니다.
일 년 내내 각종 예배를 통하여 매주 설교를 듣고, 기도를 많이 하고, 그리고 찬양도 많이 하는데 이처럼 삶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줄줄 외우고 통성기도 또한 요란하건만 실제 생활에서는 자비와 경건이 아직도 멀기만 합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왜 공예배에 그토록 열심히 참여하십니까. 진정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하기 위함입니까. 그렇다면 아직도 삶과 동떨어진 경배를 주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이번에도 또 무당굿처럼 '복을 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시려는지요.
우리의 예배가 삶에 참된 변화를 주지 못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예배입니다. 자신은 요지부동으로 변화를 거부하면서 하나님이 해결하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그저 욕심일 뿐입니다. 내 속사람과 탐욕은 그대로 둔 채 내 의도대로 하나님을 움직이려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른 예배는 바른 실천이 동반된 예배입니다. 그래서 힘이 들어도 내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는 깊은 자각이 필요합니다. 그런 진지한 각오와 결연한 마음이 없이 만날 신발이 닳도록 예배당 문턱을 밟아 봐야 무슨 변화가 있을까요. 성도들은 세상을 바꾸려 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바꾸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자신을 바꾸는 일에서부터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온갖 좋은 말을 늘어놓으며 세상을 바꾸겠다고 허세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른 예배가 될 리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본이 안 된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이 사치, 공금 횡령, 뇌물 수수, 성직 매매, 패거리 작당, 교권 남용, 성추행, 세습, 그리고 교회 사유화 등 갖은 악행을 고치지 않으면서 무엇을 바꾸고 누구를 변화시키겠다는 것인지 정말 무책임하고 몰염치한 현실입니다.
최근에 어떤 분이 한국교회의 총체적 부패를 보며 '신학의 부재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을 하셨더군요. 그 말씀이 별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그런 표현조차 큰 사치로 들립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고난도의 신학적 지식 결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매우 기본적인 기초 상식의 결여에 기인합니다. 그런 상식의 회복이 없이 아무리 신학자들과 전문가들이 모여 세미나하고 토론하고 논문을 많이 써 봐야 말짱 헛수고이지요.
한국교회 문제의 핵심에는 인간의 기본적인 상식과 최소한의 양심마저 무시하고 불의한 교권을 휘두르고 있는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타락한 무리들이 가장 경건한 척 성직으로 위장하여 신도들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고, 그리고 진리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변질
이들에게 예배는 하나의 공연 무대에 불과합니다. 유창한 설교와 멋진 기도로 신도들의 마음을 훔치고 자신을 하나님의 사자처럼 돋보이게 하려 애씁니다. 그래서 이방신의 거대한 사원처럼 시각적으로 크고 수려한 예배당이 필요하고, 엄숙한 의식이 필요하고, 고가의 전자 악기가 필요하고, 그리고 신도들의 감각을 자극할 '언어의 유희'가 필요합니다.
가장 성경적이어야 할 설교에는 권위주의적 위세와 달콤한 기만이 난무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전하라고 했더니 엉뚱하게 '목사님 말씀'을 열심히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 표절과 짜깁기가 만연하고 마무리 기도도 그냥은 못 합니다. 감미로운 음악을 깔고 사전에 고심하여 준비한 기도문을 변사처럼 애절한 목소리로 읽으며 미사여구를 늘어놓습니다. 혹시 한 글자라도 잘못 읽으면 망신이니 노심초사하며 조심조심 읽습니다. 그래도 간혹 오낭독을 하게 되고 그런 날은 정말 신성한 목사님의 스타일을 사정없이 구긴 고약한 날이 됩니다.
하여튼 이래도 감히 은혜를 안 받으면 그 교인은 정말 경우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주의 종'께서 이렇게 수고하시는데 어찌 은혜를 안 받고 배기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순진한 신도들은 별 수 없이 그 은혜라는 것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거룩하신 담임목사님의 교회는 또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돈을 더 많이 걷고, 건물을 확장하고, 교인 수를 늘리고, 그리고 다시 대형화를 향해 힘차게 전진합니다. 이런 교회에서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작두에 맨발로 선 무당처럼 홀로 북 치고 장구 치며 수고하시는 주의 종께서 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부끄러운 이야기를 좀 하면 "그건 극히 일부의 이야기이다"며 반발하는 분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침소봉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왕이면 부정적인 것 말고 아름답고 듣기 좋은 얘기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교회의 회복이나 갱신을 언급하는 사람들을 모두 불평주의자로 몰아 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너그럽고 고상한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우리 마을의 공동 우물에 개똥이 한 조각 떠 있습니다. 그러면 뭐 그까짓 거 오직 한 조각뿐이니 괜찮다고 그냥 두시는지요. 그리고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이 정말 단지 한 조각 정도라고 보십니까. 또는 단지 일부의 문제이니 아예 전부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기다리며 구경을 하자는 것인지요.
성도들의 깊은 각성이 필요합니다. 은혜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신 것이 아니신데 유독 공예배를 지나치게 신성시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아침 하나님을 만나러 간다고 정장을 빛나게 차려 입고 미리 은혜를 받을 준비를 단단히 하고 교회에 갑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평상시 가정에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힘든 모양입니다. 하여튼 그리고는 마음을 단정히 하고 예배의 벅찬 감동과 감격이 내리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물론 이런 자세가 아름답게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이 지나치게 되면 목회자나 분위기에 의존하는 신앙에 빠지기 쉽고, 또한 바른 지식보다는 감정에 좌우되는 불균형이 문제가 됩니다. 찬양만 열심히 해도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지만, 그것이 은혜의 중심이 되면 문제가 됩니다. 신자들은 생각을 좀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머리가 빈 뜨거운 가슴은 언제나 맹신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자신이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니면서 세상적으로 성공하여 남들보다 잘살거나 다소 앞서 있으면 그것을 매우 중요한 신앙의 승리로 간주하는 '성공주의'나 '번영주의' 또한 예배를 기복적으로 변질시키는 데에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일부 교권주의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순진한 욕구를 이용하여 이들의 삶을 교회에 가두고 가급적이면 '교회 중심 생활'을 하도록 우선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 빛과 소금이 되는 '성숙한 신자'는 되지 못하고, 그저 교회 일에만 몰두하는 '충성된 교인'이 되도록 유도합니다.
물론 이는 귀족 목사님들의 철밥통을 금칠하는 데에 매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국에 비해 한국교회에 기형적으로 예배나 집회가 많은 것이 이런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예배란 무엇입니까. 교인들이 모여 설교를 듣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그리고 헌금하면 다 좋은 예배일까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셨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예배 역시 원하지 않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피를 좋아하셔서 제사를 원하시고, 돈이 부족해서 제물을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예배보다 더욱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제자다운 삶'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귀하고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성도의 삶을 통한 사역보다 예배를 우선시하는 '예배 제일주의'나 '예배 만능주의'는 매우 위험한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예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공예배는 단지 예배의 극히 일부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도의 삶이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자주 모이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세상에 나가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성도 자신이 예수님처럼 제물이 되어 세상 속에서 자신을 희생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예배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사도들의 초기 교회에 현재처럼 번잡하게 많은 공예배와 집회가 있었을까요. 지금 서구 많은 나라들에서는 '작은 정부'를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정부가 너무 많은 일을 벌려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져서 권력을 남용하며 비효율화하고 민간에서 해야 할 것까지 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유형 교회 역시 그 활동을 적절히 절제하며 '작은 교회'를 추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의 삶이 단순히 교회 활동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니까요. 따라서 교회는 신도들이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밀알이 되어 제자다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와 반대로 교회 생활만 중시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주로 이단이나 사이비가 애용하는 수법입니다.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을 단순히 '자주 모이라' 또는 '많이 모이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도들은 성속을 차별하던 중세적 '교회 중심주의'나 '예배 중심주의'의 함정을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가난한 이웃의 눈물을 먼저 돌보아야 할 소중한 헌금으로 바벨탑같이 높은 초대형 건물을 지어 맹신도들을 유혹하고 '거룩한 성전'이라 기만하며 희희낙락하는 자들은 예배의 참된 의미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삶으로 예배하는 성도라면 결코 그런 허욕, 허망, 그리고 허세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세계 어느 나라 교회보다 큰 예배당들을 많이 짓고 빈번하게 예배를 많이 하지만, 정작 주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삶으로 그 예배를 완성시키는 일에서는 왜 결정적으로 큰 실패를 하고 있는지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예배의 무속화와 기복화
이제 우리는 예배에 대해 더욱 성숙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구약의 제사가 아닙니다. 제물이나 돈을 바치고 죄 사함을 받고 복을 구하는 의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사처럼 너무 바침을 강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전 제사는 이미 어린양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어 다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허구한 날 모일 때마다 무당굿처럼 뭘 그리 또 다시 더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인지요. 하여튼 돈을 안 걷는 굿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반면에 사도들의 초기 예배에는 아예 '헌금 순서'라는 것 자체가 없었습니다. 현대 개신교의 예배에 헌금 순서를 슬그머니 삽입한 것은 도대체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지은 성전이나 교회당에만 임재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주일에만 함께하시고 평일에는 외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성도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니 마치 예배 중에만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처럼 너무 호들갑을 떨지 말자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 시 개신교 목사가 무당이나 사제같이 권위적인 긴 옷을 입고 제사의 '제주'처럼 행세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는 잘못된 일입니다. 이런 제사장적 처신은 암묵적으로 목사직을 다른 직분들보다 특권화하여 결국 목사가 신도들 위에 군림하게 만드는 매우 미신적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를 제사처럼 의식화하거나 너무 성스럽게 미화하지 말기 바랍니다. 예배는 굿이나 제사가 아닙니다. 교회당은 성전이 아니고, 교회 부지는 성지가 아니고, 강단은 제단이 아니고, 그리고 설교하는 목사는 결코 제사장의 직분이 아닙니다. 그런 무속적 행위들은 부패한 중세 교회에서 이미 오래전에 끝장냈어야 할 미신적인 작태입니다.
또한 예배를 인위적으로 무슨 은혜를 나눠 주는 종교적 이벤트나 공연으로 격하시켜도 곤란합니다. 일부 목회자들은 복되고 은혜로운 예배를 보여 주겠다고 갖은 '감각적 수단'을 동원하며 인위적으로 힘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진심으로 말리고 싶은 일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을 깔고, 아무리 장엄한 의식을 펼치고, 그리고 아무리 거룩한 목소리로 설교와 기도를 잘 해도 그 속에 신령과 진리가 없다면 이는 단지 무속적인 굿거리장단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여러분은 아버지를 만날 때 항상 정장을 하십니까. 아버지와 매주 무슨 공식적인 회담이라도 하시려는지요. 진바지를 입거나 운동화를 신고 만나면 아버지가 언제 박대하시던가요. 그리고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만날 때마다 돈을 요구하시던가요.
공예배를 무속화하거나 기복화하는 것은 교회를 병들게 하는 중대한 범죄 행위입니다. 목회자를 사제화하여 '목사 중심 예배'를 유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는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예배나 설교가 스스로 은혜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무당처럼 지성을 드려 은혜를 받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자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이미 큰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공교회의 전유물이 결코 아닙니다. 가난하고 겸비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며 주님께 나아가기만 한다면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산에서, 빈 들에서, 또는 어두운 예배당 구석이나 골방 그 어디서든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울러 목이나 손바닥이 좀 뜨거워졌다고 은혜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감정으로 얻어진 뜨거움은 결국 감정과 함께 바람처럼 사라지는 법입니다. 그런 정도는 맹신도들도 즐기는 은혜입니다.
진리로 사는 것이 예배
예배는 이벤트가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에 무슨 군더더기를 잔득 발라서 한 주일에도 몇 번씩 모일 때마다 매번 돈을 걷고 음악으로 장식한 기도와 느끼한 화술로 쇼를 공연하고 있습니까. 이런 것들은 은혜라는 가명으로 예배 속에 위장된 교권주의자들의 치졸한 꼼수일 뿐입니다.
예배에 참석하여 은혜를 사모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가장 큰 은혜는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의 제자 된 삶을 한번 바르게 살아보겠노라고 불의와 헛된 욕심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십자가의 도'를 따르려는 단호한 결단을 성실히 실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혹시 우리는 삶은 변화시키지 못하고 감성적으로 제사화하고 기복화한 예배를 관습적으로 반복하고 평생 교회당만 오락가락하며 세월을 허비하는 '예배 중독자'들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요.
공예배는 가족 모임입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아버지와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자녀들이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족합니다. 처음엔 주로 가정에서 모였던 초대교회 사도들의 무공해 예배를 생각해 보십시오. 겉치장에 분주하거나 의식과 건물의 허세가 없는 소박하고 진솔한 예배가 좋은 예배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도에게는 삶이 예배입니다. 삶이 제사입니다.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당에서 우리의 예배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 있든 지금 자신이 서있는 그 장소가 언제나 경건한 삶으로 수행하는 생생한 예배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마 12:7)."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아멘넷은 신성남 집사의 글들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2달만에 연재를 중단하고 연재되던 글들을 내렸습니다. 이에 대해 다시한번 신성남 집사님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핑계를 댄다면 아멘넷의 편집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아마 몇년전만 했어도 어떤 비판이 있더라도 글을 연재했을 것입니다. 그런 부담가운데 신성남 집사의 신간 소식을 듣고 반가웠습니다.
이런 기대도 합니다. 지나친 비판은 글의 전체 주제를 흐리게 만들고 반감을 가져옵니다. 심지어 비판의 주체가 되는 사람들조차 신 집사의 글을 읽었을때 먼저 반감이 들게 하기 보다는 진진하게 고민하도록 유도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5% 정도의 글의 내용은 달라져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교회 장부를 숨기는 목사님들"라는 글에는 "그런데 요즘 교회들이 배가 부르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간까지 덩달아 부었나 봅니다. 교회 헌금과 재정의 주역인 성도들이 장부를 보겠다는데, 감히 종이란 자들이 나서서 이를 거부합니다. 종을 너무 풀어 놓았더니 그 방자함과 오만함이 하늘을 찌릅니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꼭 이렇게 표현했어야 했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어쩔까나 한국교회"라는 책의 제목앞에는 "꼴보수 공학박사 신 집사의"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현재 뉴질랜드에 살고있는 신 집사는 한국항공대학교에서 항공공학을 전공했고, 뉴질랜드 와이카토대학교에서 '유체역학'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신 집사는 많은 제자를 키워냈다고 자부하면서 성장한 교회가 수천억을 들여 초대형 건물을 짓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50세를 훌쩍 넘긴 나이에 더 이상 침묵할수 없어 당당뉴스등 인터넷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독자들은 아래 링크를 눌러 미국 라이프북에서 14불에 책을 구입하실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개혁을 지지하며 많은 구입을 기대합니다.
http://www.lifebookus.com/final/bookjumun.asp?gs_product=aa01070094882
"어쩔까나 한국교회" 속에는
"어쩔까나 한국교회"에는 한국교회의 개혁을 향한 성도의 아픈 마음을 담은 24개의 글이 담겨 있습니다.
1장 '가나안 성도를 아시나요'에는 △가나안 성도를 아시나요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병신도를 깨운다 △교회밖에 모르는 예수쟁이들 △빼앗긴 교회 △왜곡된 십일조 등 성도들에 대한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2장 '목사님, 목사님, 나의 목사님'에는 △도전받는 목사 왕국 △한국교회의 무법자들 △세습 목회자와 신도들, 그 나물에 그 밥 △말씀을 전하고 돈을 받는 목회자들 △목사와 박사 △부유한 목사와 가난한 목수 등 목회자에 대한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3장 '한국교회 돌아보기'에는 △교권주의의 밑뿌리 "담임목사 종신제" △밥 놔두고 죽 퍼먹는 교회 △부패한 교회도 흥해야 하나 △세상을 속이는 교회 △"유사 교회"와 종교 상인들 △예배의 변질과 예배 중독 등 한국교회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4장 '오 마이 갓'에는 △돈을 바치면 복 받는다는 목사님들 △부흥회의 변질과 목회자들의 돈 잔치 △연봉을 숨기는 목사님들 △교회 장부를 숨기는 목사님들 △건물이 목회하는 교회 △3천억 호와 예배당과 중세 삽질의 부활 등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어쩔까나 한국교회" 공감의 글
박종화 목사(경동교회)는 "지금 한국 사회는 많은 모순과 문제들을 표출하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한국교회의 회복을 위해서는 뼈를 깎는 아픔을 겪어야 한다는 자성의 소리가 드높다. 지은이의 글을 읽으면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회초리를 든 아픈 어머니의 마음을 보게 된다"고 공감합니다.
정성진 목사(거룩한빛광성교회)는 "한국교회는 지탄의 대상이 된 지 벌써 십 년도 넘었다. 많은 미래학자들이 ‘앞으로 30년’이 한국교회의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한다. 30년 동안 한국교회가 다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한다면 다음 세대에 희망이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촛대가 옮겨갈 것이다. 이런 위기감을 가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이 책은 작은 등불의 역할을 해줄 것이다"고 공감합니다.
강경민 목사(일산은혜교회)는 "그동안 한국교회의 현실을 비판한 책들이 여럿 나왔다. 그런데 이 책은 평신도의 경험과 시각에서 쓴 것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박충구 박사(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교수)는 "나는 이 책의 원고를 읽으면서 ‘우시는 예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국교회 안에 몸담고 ‘눈물을 흘리는 무수한 성도’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글을 쓴 이도 눈물을 흘리며 이 글을 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공감했습니다.
방인성 목사(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어찌 그리도 현 교회들이 성경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깨닫게 되며 놀라움을 넘어 두려움에 떨게 한다", 이필완 목사(당당뉴스 전 운영자)는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목사로서의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창피했다", 권혁률 대기자(CBS)는 "이 책을 통해 그의 한국교회에 대한 깊은 관심과 통찰을 더욱 많은 분들이 공유하고 한국교회 개혁을 향한 선한 의지를 모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공감합니다.
"어쩔까나 한국교회" 추천의 글
1.
김기석 목사(청파교회)는 "왜 잠만 자는가"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추천의 글을 썼습니다. 일부를 소개합니다.
나는 신성남이라는 분을 모른다. 그런데 그의 원고가 내게 건네졌고, 그의 글을 읽는 내내 떠오른 것이 ‘부담이 되는 주의 말씀’이라는 구절과 ‘수추’였다. 오늘의 교회에 대한 그의 진단과 비판은 신랄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자꾸만 원고를 덮고 싶었다. 그가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모습과 내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경어체로 적고 있지만, 아니 경어체이기에 그의 교회와 목회자 비판은 더 신랄하게 들린다.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다. 이미 지겹도록 들어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교회의 실상을 비판하고 지적하는 글들은 이미 넘치고 또 넘친다. 굳이 이런 책이 또 나와야 하나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글을 읽어가면서 교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저자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글을 덮지 못한 까닭은 그 때문이다. 그는 절박하다.
“그리고 교회 비리에 대한 비판이 교회에 상처를 내는 일이니 최대한 자제하자는 안일한 주장을 가끔 봅니다. 그러나 교회에 진정으로 상처를 주는 것은 비리지 비판이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이미 극심한 비리 때문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품고 있습니다. 은밀하게 숨기고 덮는다고 그 상처가 아물거나 없어질까요? 이제는 그 상처를 공개하고 수술하지 않으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이제는 정직하게 한국교회의 실상과 대면해야 할 때다. 굳이 이 자리에서 그가 지적하는 문제들을 적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처해 있는 위기의 태반은 목회자들로부터 나온다는 말은 아프게 새길 필요가 있다. 실력과 품성과 진실함이 부족한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성찰적 신앙인, 사유하는 주체, 하나님 나라의 꿈에 사로잡힌 전사로 세우기보다는, 순종 잘하는 착한 교인의 자리에 붙들어 두려 한다. 그들은 욕망과 두려움의 주술로 교인들을 포박하여 지배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당신들의 천국’으로 변해버린 교회, 열심은 있으나 영적 분별력은 부족한 교인들, 일상의 거룩함이 소거된 신앙생활로 인해 교회는 오늘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저자는 교회 개혁을 위한 선결과제는 제왕적인 목회자의 권한을 축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목사에게 돈이 집중되는 구조를 개선하고, 임기제를 통해 ‘밥벌이 목회’ 혹은 ‘돈벌이 목회’의 가능성을 줄여야 한다고도 말한다. 목회자들은 가르치는 직무에 전념하고, 다른 일들은 교인들이 분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유형적인 교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기존의 교회가 새롭게 개혁될 수 없다면, 새로운 교회를 기획하면 된다는 것이다.
2.
조현 기자(한겨레신문 종교전문)는 "유폐된 예수 구출작전"이라는 제목으로 추천의 글을 썼습니다. 일부를 소개합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의 관심은 그 수를 불리는 ‘성장’에 쏠려 있었다. 그런데 그 성장이란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도가 성장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격이 성장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성이 성장하고, 그의 덕행이 성장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었던가? 아니었다. 저자 신성남의 글은 ‘왜 아닌지’를 냉철히 보여 주고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도 기독교인 수는 전체 인구의 1.5%에 불과했다. 하지만 민족의 고난 앞에 예언자적 사명을 다했고, 그 이전부터 문맹자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워 병든 자들을 구휼했다. 기독교는 유교나 천도교 등 주류 종교로부터 배제 당하던 소수 종교였다. 그런데도 안창호, 조만식, 이상재, 이승훈, 유영모, 함석헌, 김약연, 이동휘, 이승만, 서재필, 김구, 유일한 등 민족의 선각자들이 그 소수 종교를 택했다. 소수의 그리스도인, 특히 목사와 선교사들의 헌신적 신앙과 삶의 자세를 보며 그곳에 바로 내가 살고, 민족이 살 길이 있다고 여긴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주류 종교가 되고, 골목마다 교회가 없는 곳이 없고, 가장 많은 권력자와 기업가를 신자로 둔 현재의 한국 기독교, 특히 목사들을 보며, 과연 이곳에 내가 살고, 민족이 살 길이 있다고 여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저자는 욕망이 양심을 거리낌 없이 이기고 교회 강단까지 지배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헌신과 사랑의 화신인 예수 그리스도를 추방하고, 일부 목사들은 자기들의 왕국을 구축한 상황이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현실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꼴보수 공학박사 신 집사의 어쩔까나 한국교회』는 이렇게 유폐된 예수 그리스도 구출작전이다. 돌들이 일어나 소리치듯이, 귀머거리 같고 벙어리 같던 양들이 일어선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의 모든 책임을 목사들에게 돌리던 시대는 끝났다.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가 탄생했을 때 이미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동책임시대가 열렸다. 이 책은 오래도록 자신의 책임을 방기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주체로 일어서는 신호탄이다.
신성남 저자가 추천한 글 "예배의 변질과 예배 중독"
아멘넷 기자는 신성남 저자에게 책에 실린 24개의 글중 가장 나누고 싶은 글 하나를 추천해 달라고 했습니다. 신 저자는 '건물이 목회하는 교회', '교회 장부를 숨기는 목사님들', '예배의 변질과 예배 중독'등 3개의 글을 보내며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기자는 '예배의 변질과 예배 중독'을 택하여 소개합니다.
"예배의 변질과 예배 중독"
부제: 예배는 무당 굿이 아니다
한국의 교인들은 지금 예배와 집회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계 유일의 새벽 기도회를 선두로 하여 주일 대예배, 저녁 예배, 수요 예배, 금요 기도회, 찬양 예배, 그리고 구역 예배 등 한 주간 내내 집회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추가로 정기적인 부흥회, 신앙 강좌, 그리고 특별 집회가 수시로 열립니다. 그 덕분에 전 세계에서 예배가 가장 많은 교회가 한국교회입니다.
교회 생활이 예배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성도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가장 큰 이유가 예배니까요. 그러나 가정생활, 직장 생활, 학교생활, 기타 나머지 사회 활동의 영역마저 모두 교회의 공예배들로 인하여 시간적 또는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고 과도하게 종속된다면 이는 심각한 신앙적 불균형을 초래합니다.
예배가 매우 중요하고 유익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교회 내에 각종 예배와 프로그램들이 범람하지만 정작 신도들의 삶은 어떠한가요. 음식이란 귀하고 좋은 것이지만 이를 너무 과식하거나 잘못 먹으면 급체 또는 식중독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예배를 바르게 시행하고 적용하지 못하면 신도들은 심각한 '예배 중독'에 빠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 많은 예배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개신교 역사상 가장 부패한 교회'라는 오명을 듣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현실이 우리의 예배 생활과 전혀 무관할까요.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예배
어떤 경우는 수십 년 동안 교회를 다녀도 삶이 별로 바뀌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여전히 가정에서 짜증내고, 직장에서 이기적이고, 모임에서 험담하고, 사업에서 부정을 행하고, 어려운 친척에게 무심하고, 그리고 가난한 이웃에게 박정합니다.
그래도 예수 믿고 다소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인색하고, 옹졸하고, 잘난 척하고, 다투고, 시기하고, 공의에 무감각하고, 기복적이고, 미신적이고, 그리고 주는 것보다 받기를 좋아합니다.
일 년 내내 각종 예배를 통하여 매주 설교를 듣고, 기도를 많이 하고, 그리고 찬양도 많이 하는데 이처럼 삶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줄줄 외우고 통성기도 또한 요란하건만 실제 생활에서는 자비와 경건이 아직도 멀기만 합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왜 공예배에 그토록 열심히 참여하십니까. 진정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하기 위함입니까. 그렇다면 아직도 삶과 동떨어진 경배를 주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이번에도 또 무당굿처럼 '복을 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시려는지요.
우리의 예배가 삶에 참된 변화를 주지 못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예배입니다. 자신은 요지부동으로 변화를 거부하면서 하나님이 해결하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그저 욕심일 뿐입니다. 내 속사람과 탐욕은 그대로 둔 채 내 의도대로 하나님을 움직이려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른 예배는 바른 실천이 동반된 예배입니다. 그래서 힘이 들어도 내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는 깊은 자각이 필요합니다. 그런 진지한 각오와 결연한 마음이 없이 만날 신발이 닳도록 예배당 문턱을 밟아 봐야 무슨 변화가 있을까요. 성도들은 세상을 바꾸려 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바꾸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자신을 바꾸는 일에서부터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온갖 좋은 말을 늘어놓으며 세상을 바꾸겠다고 허세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른 예배가 될 리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본이 안 된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이 사치, 공금 횡령, 뇌물 수수, 성직 매매, 패거리 작당, 교권 남용, 성추행, 세습, 그리고 교회 사유화 등 갖은 악행을 고치지 않으면서 무엇을 바꾸고 누구를 변화시키겠다는 것인지 정말 무책임하고 몰염치한 현실입니다.
최근에 어떤 분이 한국교회의 총체적 부패를 보며 '신학의 부재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을 하셨더군요. 그 말씀이 별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그런 표현조차 큰 사치로 들립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고난도의 신학적 지식 결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매우 기본적인 기초 상식의 결여에 기인합니다. 그런 상식의 회복이 없이 아무리 신학자들과 전문가들이 모여 세미나하고 토론하고 논문을 많이 써 봐야 말짱 헛수고이지요.
한국교회 문제의 핵심에는 인간의 기본적인 상식과 최소한의 양심마저 무시하고 불의한 교권을 휘두르고 있는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타락한 무리들이 가장 경건한 척 성직으로 위장하여 신도들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고, 그리고 진리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변질
이들에게 예배는 하나의 공연 무대에 불과합니다. 유창한 설교와 멋진 기도로 신도들의 마음을 훔치고 자신을 하나님의 사자처럼 돋보이게 하려 애씁니다. 그래서 이방신의 거대한 사원처럼 시각적으로 크고 수려한 예배당이 필요하고, 엄숙한 의식이 필요하고, 고가의 전자 악기가 필요하고, 그리고 신도들의 감각을 자극할 '언어의 유희'가 필요합니다.
가장 성경적이어야 할 설교에는 권위주의적 위세와 달콤한 기만이 난무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전하라고 했더니 엉뚱하게 '목사님 말씀'을 열심히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 표절과 짜깁기가 만연하고 마무리 기도도 그냥은 못 합니다. 감미로운 음악을 깔고 사전에 고심하여 준비한 기도문을 변사처럼 애절한 목소리로 읽으며 미사여구를 늘어놓습니다. 혹시 한 글자라도 잘못 읽으면 망신이니 노심초사하며 조심조심 읽습니다. 그래도 간혹 오낭독을 하게 되고 그런 날은 정말 신성한 목사님의 스타일을 사정없이 구긴 고약한 날이 됩니다.
하여튼 이래도 감히 은혜를 안 받으면 그 교인은 정말 경우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주의 종'께서 이렇게 수고하시는데 어찌 은혜를 안 받고 배기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순진한 신도들은 별 수 없이 그 은혜라는 것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거룩하신 담임목사님의 교회는 또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돈을 더 많이 걷고, 건물을 확장하고, 교인 수를 늘리고, 그리고 다시 대형화를 향해 힘차게 전진합니다. 이런 교회에서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작두에 맨발로 선 무당처럼 홀로 북 치고 장구 치며 수고하시는 주의 종께서 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부끄러운 이야기를 좀 하면 "그건 극히 일부의 이야기이다"며 반발하는 분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침소봉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왕이면 부정적인 것 말고 아름답고 듣기 좋은 얘기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교회의 회복이나 갱신을 언급하는 사람들을 모두 불평주의자로 몰아 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너그럽고 고상한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우리 마을의 공동 우물에 개똥이 한 조각 떠 있습니다. 그러면 뭐 그까짓 거 오직 한 조각뿐이니 괜찮다고 그냥 두시는지요. 그리고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이 정말 단지 한 조각 정도라고 보십니까. 또는 단지 일부의 문제이니 아예 전부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기다리며 구경을 하자는 것인지요.
성도들의 깊은 각성이 필요합니다. 은혜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신 것이 아니신데 유독 공예배를 지나치게 신성시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아침 하나님을 만나러 간다고 정장을 빛나게 차려 입고 미리 은혜를 받을 준비를 단단히 하고 교회에 갑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평상시 가정에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힘든 모양입니다. 하여튼 그리고는 마음을 단정히 하고 예배의 벅찬 감동과 감격이 내리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물론 이런 자세가 아름답게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이 지나치게 되면 목회자나 분위기에 의존하는 신앙에 빠지기 쉽고, 또한 바른 지식보다는 감정에 좌우되는 불균형이 문제가 됩니다. 찬양만 열심히 해도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지만, 그것이 은혜의 중심이 되면 문제가 됩니다. 신자들은 생각을 좀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머리가 빈 뜨거운 가슴은 언제나 맹신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자신이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니면서 세상적으로 성공하여 남들보다 잘살거나 다소 앞서 있으면 그것을 매우 중요한 신앙의 승리로 간주하는 '성공주의'나 '번영주의' 또한 예배를 기복적으로 변질시키는 데에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일부 교권주의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순진한 욕구를 이용하여 이들의 삶을 교회에 가두고 가급적이면 '교회 중심 생활'을 하도록 우선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 빛과 소금이 되는 '성숙한 신자'는 되지 못하고, 그저 교회 일에만 몰두하는 '충성된 교인'이 되도록 유도합니다.
물론 이는 귀족 목사님들의 철밥통을 금칠하는 데에 매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국에 비해 한국교회에 기형적으로 예배나 집회가 많은 것이 이런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예배란 무엇입니까. 교인들이 모여 설교를 듣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그리고 헌금하면 다 좋은 예배일까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셨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예배 역시 원하지 않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피를 좋아하셔서 제사를 원하시고, 돈이 부족해서 제물을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예배보다 더욱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제자다운 삶'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귀하고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성도의 삶을 통한 사역보다 예배를 우선시하는 '예배 제일주의'나 '예배 만능주의'는 매우 위험한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예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공예배는 단지 예배의 극히 일부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도의 삶이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자주 모이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세상에 나가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성도 자신이 예수님처럼 제물이 되어 세상 속에서 자신을 희생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예배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사도들의 초기 교회에 현재처럼 번잡하게 많은 공예배와 집회가 있었을까요. 지금 서구 많은 나라들에서는 '작은 정부'를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정부가 너무 많은 일을 벌려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져서 권력을 남용하며 비효율화하고 민간에서 해야 할 것까지 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유형 교회 역시 그 활동을 적절히 절제하며 '작은 교회'를 추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의 삶이 단순히 교회 활동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니까요. 따라서 교회는 신도들이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밀알이 되어 제자다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와 반대로 교회 생활만 중시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주로 이단이나 사이비가 애용하는 수법입니다.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을 단순히 '자주 모이라' 또는 '많이 모이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도들은 성속을 차별하던 중세적 '교회 중심주의'나 '예배 중심주의'의 함정을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가난한 이웃의 눈물을 먼저 돌보아야 할 소중한 헌금으로 바벨탑같이 높은 초대형 건물을 지어 맹신도들을 유혹하고 '거룩한 성전'이라 기만하며 희희낙락하는 자들은 예배의 참된 의미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삶으로 예배하는 성도라면 결코 그런 허욕, 허망, 그리고 허세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세계 어느 나라 교회보다 큰 예배당들을 많이 짓고 빈번하게 예배를 많이 하지만, 정작 주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삶으로 그 예배를 완성시키는 일에서는 왜 결정적으로 큰 실패를 하고 있는지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예배의 무속화와 기복화
이제 우리는 예배에 대해 더욱 성숙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구약의 제사가 아닙니다. 제물이나 돈을 바치고 죄 사함을 받고 복을 구하는 의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사처럼 너무 바침을 강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전 제사는 이미 어린양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어 다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허구한 날 모일 때마다 무당굿처럼 뭘 그리 또 다시 더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인지요. 하여튼 돈을 안 걷는 굿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반면에 사도들의 초기 예배에는 아예 '헌금 순서'라는 것 자체가 없었습니다. 현대 개신교의 예배에 헌금 순서를 슬그머니 삽입한 것은 도대체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지은 성전이나 교회당에만 임재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주일에만 함께하시고 평일에는 외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성도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니 마치 예배 중에만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처럼 너무 호들갑을 떨지 말자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 시 개신교 목사가 무당이나 사제같이 권위적인 긴 옷을 입고 제사의 '제주'처럼 행세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는 잘못된 일입니다. 이런 제사장적 처신은 암묵적으로 목사직을 다른 직분들보다 특권화하여 결국 목사가 신도들 위에 군림하게 만드는 매우 미신적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를 제사처럼 의식화하거나 너무 성스럽게 미화하지 말기 바랍니다. 예배는 굿이나 제사가 아닙니다. 교회당은 성전이 아니고, 교회 부지는 성지가 아니고, 강단은 제단이 아니고, 그리고 설교하는 목사는 결코 제사장의 직분이 아닙니다. 그런 무속적 행위들은 부패한 중세 교회에서 이미 오래전에 끝장냈어야 할 미신적인 작태입니다.
또한 예배를 인위적으로 무슨 은혜를 나눠 주는 종교적 이벤트나 공연으로 격하시켜도 곤란합니다. 일부 목회자들은 복되고 은혜로운 예배를 보여 주겠다고 갖은 '감각적 수단'을 동원하며 인위적으로 힘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진심으로 말리고 싶은 일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을 깔고, 아무리 장엄한 의식을 펼치고, 그리고 아무리 거룩한 목소리로 설교와 기도를 잘 해도 그 속에 신령과 진리가 없다면 이는 단지 무속적인 굿거리장단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여러분은 아버지를 만날 때 항상 정장을 하십니까. 아버지와 매주 무슨 공식적인 회담이라도 하시려는지요. 진바지를 입거나 운동화를 신고 만나면 아버지가 언제 박대하시던가요. 그리고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만날 때마다 돈을 요구하시던가요.
공예배를 무속화하거나 기복화하는 것은 교회를 병들게 하는 중대한 범죄 행위입니다. 목회자를 사제화하여 '목사 중심 예배'를 유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는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예배나 설교가 스스로 은혜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무당처럼 지성을 드려 은혜를 받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자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이미 큰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공교회의 전유물이 결코 아닙니다. 가난하고 겸비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며 주님께 나아가기만 한다면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산에서, 빈 들에서, 또는 어두운 예배당 구석이나 골방 그 어디서든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울러 목이나 손바닥이 좀 뜨거워졌다고 은혜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감정으로 얻어진 뜨거움은 결국 감정과 함께 바람처럼 사라지는 법입니다. 그런 정도는 맹신도들도 즐기는 은혜입니다.
진리로 사는 것이 예배
예배는 이벤트가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에 무슨 군더더기를 잔득 발라서 한 주일에도 몇 번씩 모일 때마다 매번 돈을 걷고 음악으로 장식한 기도와 느끼한 화술로 쇼를 공연하고 있습니까. 이런 것들은 은혜라는 가명으로 예배 속에 위장된 교권주의자들의 치졸한 꼼수일 뿐입니다.
예배에 참석하여 은혜를 사모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가장 큰 은혜는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의 제자 된 삶을 한번 바르게 살아보겠노라고 불의와 헛된 욕심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십자가의 도'를 따르려는 단호한 결단을 성실히 실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혹시 우리는 삶은 변화시키지 못하고 감성적으로 제사화하고 기복화한 예배를 관습적으로 반복하고 평생 교회당만 오락가락하며 세월을 허비하는 '예배 중독자'들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요.
공예배는 가족 모임입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아버지와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자녀들이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족합니다. 처음엔 주로 가정에서 모였던 초대교회 사도들의 무공해 예배를 생각해 보십시오. 겉치장에 분주하거나 의식과 건물의 허세가 없는 소박하고 진솔한 예배가 좋은 예배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도에게는 삶이 예배입니다. 삶이 제사입니다.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당에서 우리의 예배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 있든 지금 자신이 서있는 그 장소가 언제나 경건한 삶으로 수행하는 생생한 예배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마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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