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샤프 선교사와 유관순, 그리고 한국 기독교 선교유적지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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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ㆍ 2018-08-24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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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2019년은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 3.1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인 유관순에 대한 관심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우리들은 유관순에 대해 얼마나 많이 정확히 알고 있는가?
지난 3월, 뉴욕타임스는 “유관순, 일제 통치에 저항한 한국 독립운동가(Yu Gwan-sun,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Who Defied Japanese Rule)”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일제 식민통치에 반대하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유관순을 소개했다.
1.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천안 근처에서 기독교 신자인 부모의 5명 자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관순이 태어나고 3년이 지난 후 일본군이 한반도를 장악했으며 8년 뒤인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병합되었다.
유관순은 16세로 이화학당의 고등부 1학년 학생이던 1919년 3월 1일 급우들과 3.1 만세운동에 참가했으며, 5일에는 급우들과 서울 남대문에서 행진하다 일제 당국에 의해 구금되었지만 이화학당의 선교사들이 노력으로 풀려났다.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자, 유관순은 몰래 입수한 3.1 독립선언문 사본을 들고 자신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3.1 운동’을 전파하며 항의시위를 독려했다.
4월 1일에는 천안 아우내 장터에 만세운동을 위해 3천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일제 헌병대는 모인 사람들을 겨냥해 총을 쏘아 19명이 사망했는데 유관순은 무사했지만 사망자 중에 유관순의 부모도 있었다. 몇 주 동안 계속된 독립시위운동에서 7천명 이상이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유관순을 포함해 약 4만6000명은 투옥되었다. 유관순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감옥 내에서도 투쟁은 계속됐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유관순은 투옥 중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으깨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라고 써놓았다. 또한 “내 나라에 내 목숨을 바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회한입니다”라는 발언도 남겼다.
지하 독방으로 이송된 후에도 독립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유관순은 반복적으로 구타 및 고문을 당했으며, 그 후유증으로 1920년 9월 28일 옥중에서 사망했다. 그때 유관순의 나이 17세였다.
2.
뉴욕타임스는 “똑똑한 아이였던 유관순은 집 근처 감리교 교회를 다니면서 성경에 나오는 구절들을 쉽게 외웠다고 서울 소재 이화박물관 큐레이터들은 말했다. 미국 선교사 앨리스 해먼드 샤프는 유관순에게 교육을 더 받기 위해 이화학당에 다닐 것을 권장했는데 당시 그렇게 하는 한국 여성은 거의 없었다”고 보도했다.
바로 그 앨리스 해먼드 샤프(Alice H. Sharp, 한국명 사애리시) 선교사 기념사업회 뉴욕지회가 출범하고, 8월 17일 후러싱제일교회(김정호 목사)에서 설명회를 열었다.
기념사업회는 “한 인물이 태어나기까지 그 인물을 길러낸 귀한 스승이 있다. 유관순 열사에게는 현대교육과 기독교를 알게 해 준 스승이 있었는데 그녀가 엘리스 샤프 여선교사였다. 스승의 가르침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기독교 사상이었고, 그 사상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만세를 주관하고 외치게 한 결과를 만들었다”라고 소개했다.
앨리스 샤프 선교사를 유관순의 양어머니로 소개하며 “특별히 어린 유관순을 충남 병천에서 데려다가 자신의 양녀로 삼아 영명학교에서 중등과정을 2년간 가르친 후 더 나은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일하던 이화학당에 교비 장학생으로 유학을 보내게 된다”라고 소개했다.
3.
앨리스 샤프 선교사는 1900년 조선에 파송을 받아 일제가 미국 선교사들을 추방하던 1939년까지 조선에서 사역했다. 일생을 조선을 바친 그녀가 조선을 떠날 때 68세의 노인이었다. 은퇴후 미국 LA지역 파사데나의 은퇴선교사 양로원에서 1972년 101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현재 파사데나 납골묘원에 안치되어 있다.
기념사업회가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앨리스 샤프 선교사는 1871년 캐나다 노봐스코시아에서 태어나 1897년 미국 북감리회 여선교회 해외선교부에서 설립한 뉴욕 브루클린에 위치한 ‘선교훈련센터 뉴욕지회’에 들어가서 선교사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1900년 미국 ‘북감리회 해외여선교회’ 소속으로 조선에 파송을 받았고, 서울에 와서 메리 스크랜튼 여선교사를 도와서 이화학당에서 교사로, 상동교회에서 주일학교와 순회전도자로 사역을 하였다. 1903년에 로버트 샤프 선교사와 결혼을 하였는데, 그는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을 받아 아펜젤러 목사를 도와서 배제학당과 정동교회에서 일하던 선교사였다. 두 사람은 1905년 공주로 내려와 선교기지로 공주 최초의 양옥집을 짓고 충청지역 최초의 근대적 학교인 영명학교를 설립하였고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사업을 했다. 그러던 중 로버트 샤프 선교사는 노방전도를 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려서 1906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공주 선교사 묘지에 묻히게 된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사망으로 방황하던 엘리스 샤프 선교사는 고난을 극복하고 일제가 미국 선교사들을 추방하던 1939년까지 충청지역의 여성들에게 복음과 교육을 위한 선교사역에 매진한다. 특별히 어린 유관순을 충남 병천에서 데려다가 자신의 양녀로 삼아 영명학교에서 중등과정을 2년간 가르친 후 더 나은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일하던 이화학당에 교비 장학생으로 유학을 보내게 된다. 엘리스 샤프 선교사는 당시 여성들을 가장 천시하던 충청지역을 순회하며 20개 여자학교들을 설립하였고, 교회들도 설립하여 여선교회 선교사역을 위해 활발한 사역을 펼쳐나갔다. 그녀는 청춘을 조선의 여성교육에 바쳤고 그 결과 한국의 많은 여성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을 배출해 냈다.
4.
앨리스 샤프 선교사 기념사업회 뉴욕지회 설명회에는 뉴욕지회장 김성태 장로와 총무 김명래 사모 등 관계자와 함께 공주대학 전 총장이자 한국선교유적연구회 서만철 회장이 참가하여 백제문화유산을 유네스코 등재에 기여한 경험을 나누며 한국 기독교 선교유적의 세계 문화유산 등재 당위성을 설명했다.
앨리스 샤프 선교사 기념사업회는 단지 앨리스 샤프 선교사를 기억하는 차원이 아니라 조선에 복음의 씨를 심은 선교사들의 희생과 헌신이 담긴 한국 선교유적지를 발굴하고 재조성하여 현장 신앙교육의 장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어려운 환경에서 전해진 귀한 기독교 복음이 오늘날 퇴색되는 것을 경계하고 차세대 기독교인들에게 도전과 소망의 신앙회복을 갖게 하며,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소망없는 사람들에게 굿뉴스인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앨리스 해먼드 샤프 선교사 기념사업회는 앞으로 선교유적지 조성을 위해 엘리스 샤프 여선교사 유해를 공주로 이전하여 남편 로버트 사프 선교사와 합장을 한 후 묘소를 만드는 일, 그리고 엘리스 샤프와 로버트 샤프 그리고 유관순 동상을 건립하고자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다. 또 한국의 기독교 선교유적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일을 추진하며, 뉴욕과 LA에 기념사업회를 설립하고 한인 청소년들을 선교유적지에 보내어 민족의 역사와 선교역사를 배우게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문의 mrkim81@gmail.com, 914-473-7401 (김명래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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