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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승중 목사 "필부 주기철 목사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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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NCKPC) 제44회 정기총회 및 전국대회가 워싱턴DC 둘러스공항 힐튼호텔에서 6월 16일(화)부터 19일(금)까지 열렸다. 주강사중 한 명인 주승중 목사(인천 주안장로교회)는 두차례 말씀을 전했다. 주 목사는 한국교계에서 존경받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손자이다.

주승중 목사는 첫번 설교 후반에 주기철 목사에 대해 언급했는데, 주기철 목사는 슈퍼맨이 아니라 고문을 힘들어했으며,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을 잘돌보지 못해 미안하게 생각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평범한 목회자를 한국교회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게 만든 것이 있었다며 그것을 담대히 선포했다. 다음은 관련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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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승중 목사(인천 주안장로교회)

오늘 나에게 복음에 빚진 자의 심정이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한다. 저는 제 심정이 망가지고 기도의 문이 막힐 때마다 늘 되새기는 명상이 하나있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순교하신 제 할아버지, 고 주기철 목사님이 남기신 십자가의 고난의 명상이라는 기도문이다. 그는 늘 이렇게 고백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감옥의 갇힘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기철 목사님은 참 엄청난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저는 주기철 목사님이 당한 고문과 고난을 어렸을 때 부터 아버지와 숙부를 통해서 많이 들었다. 당시 주기철 목사님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저의 아버지는 3째 아들이었다. 주기철 목사님의 집에는 당시 주기철 목사님의 어머니인 증조 할머니, 주기철 목사님의 아내인 할머니,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인 초등학생이었던 숙부가 있었다. 언젠가 숙부가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주기철 목사님의 고난

어느 날 평양교도소에서 면회를 오라고 했다. 면회를 하려고 해도 안시켜주는데 면회오라고 하니 감사합니다 하고 달려가니 형무소 소장이 와서 그날따라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주기철 목사님이 너무 고생해서 자기들이 목사님을 내 보내드리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면회도 안시켜 주던 사람들이 주 목사님을 내보내준다니 믿기지 않았다. 자기들이 택시까지 대절해 줄테니 주 목사님을 모시고 가다가 평양 신사 앞을 지나갈 때 차에서 내릴 필요도 없이 창문만 조금 내려서 주 목사님이 고개만 까딱해 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보는 사람이 없으니 주 목사님의 자존심도 서고, 자기들도 체면이 서고 서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니 그렇게 하자고 했다.

할머니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랬더니 소장이 안색이 바뀌더니 두고 보자고 하면서 할머니를 3층 면회실에서 지하실로 데리고 내려갔다. 작은 방에는 밧줄과 몽둥이 등 고문도구가 있었다. 평양 교도소 지하 고문실이었다. 조금 있다 주기철 목사님이 간수의 등에 업혀 나오는데 이미 얼마나 고문을 당했는지 축 처져있었다. 업혀 나오다가 가족들이 있는 것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일본 경찰들이 목사님의 공중에다 대롱대롱 매달아 놓고 빙 둘러섰는데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그중에 검도를 들고 있던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매달려있는 주기철 목사님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팔순의 증조할머니는 당신 아들이 눈앞에서 무지막지하게 얻어 막는 것을 보고 놀라 기절하셨다. 숙부가 보니 20여대를 맞으니 주기철 목사님이 기절하셨다. 그러자 매달린 것을 풀어 내려놓고 찬물을 뿌렸다. 형사들이 화가 나서 나오더니 할머니에게 빨리 남편을 데려가 신사참배를 하게 하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기도하며 반대했다. 어머니의 당하는 모습을 보고 초등학생이었던 숙부는 그 순간처럼 아버지인 주기철 목사가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말을 듣지 않으니 가족 앞에서 주기철 목사님의 옷을 벗기고 별 고문을 다 했다.

주기철 목사님을 책상위에 눕혔다. 조금 있다가 목사님의 팔다리와 머리를 찍어 누르고 물에 시뻘건 고춧가루를 탄 주전자를 목사님 입에다 붇기 시작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다 주기철 목사님은 기절했는지 축 쳐져 더 이상 반항하지 못했다. 고춧가루를 탄 물을 잔득 먹은 주기철 목사의 배는 농구공처럼 부풀어 올랐다. 일본 경찰들은 부풀어 오른 주기철 목사의 배위에 의자를 올려놓고 히죽거리면서 두 사람이 갑자기 앉았다. 주기철 목사님이 억하는데 입코눈귀에서 피인지 고춧가루인지 모를 붉은 액체가 흘러 나왔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숙부는 그것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아 실어증이 걸렸다. 증조할머니도 자기 아들이 그렇게 고문당하고 보시고 충격을 받아 밖에 나가 돌아다니며 아무나 붙잡고 아들을 살려달라고 부르짖을 정도로 비참했다.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

주기철 목사님은 그렇게 고문을 당하다 순교하셨다. 순교한 후 형무소에서 시신을 가져가라고 해서 가보니 사과 궤짝 두개에다 시신을 넣었는데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비참했다. 모시고 와서 장례절차를 시작했다. 주기철 목사님을 염을 하기위해 옷을 벗기고 몸을 닦는 모습을 중학생이었던 저의 아버지와 숙부님이 지켜보고 있었다. 주기철 목사님의 시신을 보니 손톱과 발톱이 모두 빠져있는 모습을 아버지와 숙부님이 동시에 보았다. 대나무를 얇게 짤라 손톱과 발톱에 쑤셔 넣고 나중에는 벤치를 뽑아서 손톱과 발톱이 하나도 없었다. 발은 망치에 맞아서 뭉그러져 있었다. 아버지와 숙부는 그 순간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우리 가족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어린나이임에도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창피했다. 그래서 주기철 목사님의 손과 발을 자신들도 모르게 가렸다. 시신을 염하며 닦아 내던 어머니가 어린 아들들이 가리고 있는 손을 치우라고 했다. 그리고 경황이 없어서 못 보았던 손톱과 발톱이 빠진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애들이 미안하구나 하시면서 한참을 우셨다고 한다.

주기철 목사님은 그렇게 고문 끝에 순교하셨는데 목사님이 어떻게 그 모진 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견디고 승리할 수 있었을까. 할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은 한국교회에서 말하는 위대한 순교자 주기철, 강인한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아니었다. 제가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주기철 목사님은 우리들과 똑 같은 연약함이 있었다. 고문받는 것을 두려워했던 분이었다. 주기철 목사님은 7년 동안 감옥을 5번 끌려갔다 나오셨다. 만 5년 4개월 동안 감옥에 있었다. 주기철 목사님의 가족들의 생활도 비참했다. 아버지는 어릴 때를 생각하면 굶는 것 밖에 생각이 안난다고 할 정도였다. 너무 배가 고프니 재래식 화장실 황토벽을 긁어서 먹었다고 한다. 일본 경찰은 배급도 끓어버리고 아무도 못 도와주게 했다. 만약 도와주었다가는 끌려가 고문당하고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래서 집에서는 굶고 있었지만, 주기철 목사님이 감옥에서 잠깐 나오니 할머니가 어디서 밥을 빌려오셨는지 식사를 대접해 드렸다. 아들들이 혹시 좀 안남겨주는가 보는 가운데 주기철 목사님은 허겁지겁 그 밥을 드셨다. 그런데 조금 있다 밖에서 왁자지껄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확 열리며 "주기철 나와"라는 고함이 들렸다. 일본 순사가 하나가 신발을 신은 채 수갑을 들고 들어왔다. 아버지가 보니 순간 주기철 목사님은 식사를 더하시지 못하시고 떨더니 수저를 내려놓고, 어머니가 있던 방으로 도망치듯이 갔다. 그리고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어머니, 나 같은 약질이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어머니 제가 변질을 할까 너무너무 두렵습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하며 팔순 어머니와 붙들고 엉엉울며 기도하다가 다시 끌려갔다. 주기철 목사님은 담담하게 "왔냐. 그럼 가자" 그러지 않으셨다. 고문을 당하는 것을 힘들어 하셨다. 저희와 똑 같은 인간이셨다.

주기철 목사님의 승리의 비법

그러면 어떻게 주기철 목사님이 그렇게 연약함속에 견디고 승리할 수 있었을까. 집에서는 목사님이 순교할 것을 알았다.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하기 2일전에 어머니 앞에 흰 두루마리를 입고 나타나 어머니에게 절을 하셨다. 그래서 증조할머니가 순교를 눈치 채고 할머니에게 말했다. 주기철 목사님은 1944년 4월 21일 밤 9시에 순교하셨는데 그날 오후 4시 마지막 면회를 했다. 할머니는 "목사님, 남기실 말씀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주 목사님은 "첫째는 내 어머니와 아이들을 당신에게 부탁합니다.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팔순의 노모를 모시지 못하고 일본 순사들에게 늘 붙들려 다니는 것을 가슴아파했던 아들이었다. 그리고 자식들을 제대로 먹이고 돌보지 못하고 잡혀가는 것을 가슴아파한 아버지였으며, 병든 아내를 두고 늘 잡혀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필부였다.

두 번째 하신 말씀은 주님 앞에 가면 조선교회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간수가 끌고가는데, 할머니는 너무 섭섭해서 또 남기실 말씀이 없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주기철 목사님은 끌려가다 뒤돌아보고 "여보, 나 따뜻한 숭늉 한 사발 마시고 싶소"라고 말했다. 주기철 목사님은 영하 15도로 내려가는 평양 감옥에서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을 그렇게 마시고 싶어 했던 인간이었다. 그렇게 연약한 인간이 어떻게 그 모진 고문을 견디고 이길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인간의 힘과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이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십자가의 복음을 붙잡고 있었고, 감옥에서 고문을 당할때 마다 십자가를 붙잡고 고백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감옥의 갇힘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그리고 할머니가 말씀하기를, 주기철 목사님은 처음에는 자신이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있는 줄을 알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주님의 십자가가 나를 끌고 있음이라고 고백했다고 했다. 인간의 힘과 의지가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이 그렇게 한 것이다. 십자가를 붙잡고 있었기에 복음의 빚진 자의 힘으로 승리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모든 고문과 고난을 견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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