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서노회 2025 신년하례회에서 "타협하지 않는 신앙”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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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3ㆍ 2025-01-15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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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KAPC) 뉴욕서노회는 1월 14일(화) 오후 5시에 뉴욕만나교회(정상철 목사)에서 2025 신년하례식을 열었다. 서노회 신년하례에는 전통적으로 많은 사모들이 부부동반으로 참가하여 신년을 기약한다.
1부 개회예배는 인도 노회장 임일송 목사, 기도 오영상 목사, 설교 박종옥 목사, 축도 정관호 목사의 순서로 진행됐다. 특히 직전 노회장 박종옥 목사는 "타협하지 않는 신앙”이라는 제목의 신년에 묵직한 메시지를 던졌다.
1.
오영상 목사는 기도를 통해 먼저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좋은 일에도 안 좋은 일에도 기쁜 일에도 슬픈 일에도 고통 중에도 환란 중에도 그 삶의 고비고비 구석구석마다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01:01 올 한 해도 우리와 동행하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2025년도에는 우리 뉴욕 선호회와 각 지교회들이 한 단계 더 부흥과 성숙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고 섬기는 종들과 특히 사모님들에게 은혜의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하나님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겸손하게 섬기게 하시고 복음으로 양육하며 사랑으로 보살피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2.
직전 노회장 박종옥 목사는 다니엘 3:13-18 말씀을 본문으로 "타협하지 않는 신앙”이라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며 “설교와 부탁을 받고 최근에 고민하고 생각했던 부분들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다음은 설교 내용이다.
오늘 본문은 굉장히 유명한 말씀이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신상을 만들었고 모든 사람들이 악기 소리 맞춰서 절을 하도록 만들었다. 모두가 절하는 가운데 절하지 않는 세 사람이 나타났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이다. 이들이 왕 앞에 끌려오게 되고 왕이 다시 기회를 줄 테니까 금신상에 절을 하라고 요구하지만, 세 사람은 그것을 거부함으로 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들어간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은 던져볼 수 있는 질문을 했다. 3사람이 굳이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을 필요가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아예 하나님을 버리고 평생 금신상만 섬기고 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한번 딱 그냥 금신상에게 절하면 아무런 문제도 안 생기는 것이고, 여전히 자기의 자리에서 그냥 일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 자리에서 모두가 절하는데 자기들만 절하지 않음으로써 큰 분란을 일으킨 셈이다. 너무 융통성 없고 너무 고지식한 것 아니냐 충분히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이런 내용은 성경 부분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서도 많이 나타났다. 초대교회 시대에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많이 박해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두드러진 이유는 황제 숭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로마 제국은 황제의 숭배를 매일같이 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1년에 단 한 번 황제를 숭배하면 증서를 써주며, 그 증서만 가지면 나머지 364일은 너희들의 신을 섬기고 자유롭게 신앙생활하면서 살 수 있다는 조건을 걸어줬다. 딱 한번이다. 그 한 번만 머리 숙이면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 생명의 위험을 겪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타협하지 않고 융통성을 발휘하지 않고 고지식하게 딱 한 번을 거부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원형 경기장에서 죽어갔다.
몇 년 전에 나온 <사도 바울>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감동있게 봤다. 영화에는 사도 바울과 항상 같이 있었던 누가가 로마 시내를 들어가다가 어젯밤에 자신과 대화를 나눴던 그 형제가 붙잡혀 있는 장면이 나온다. 벽에 매달려서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이는데 그 장면을 보고 누가가 뛰쳐나갈려고 그랬는데, 그 형제가 눈짓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말렸다. 그리고 산 채로 불이 태워졌다. 영화를 보다 보니까 로마 시내가 그런 불타는 사람들로 환하게 밝혀 있는 그런 모습을 봤다. 그러니까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로마 시내를 환하게 밝힐 정도 그렇게까지 고지식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되느냐는 질문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강점기 때 일어난 신사참배 강요가 있었다. 그냥 가서 한번 고개 숙이고 오면 되는 것이다. 그것에 거부해서 감옥에 가고, 그것을 거부하다가 감옥에서 순교까지 당한 것이다. 과연 이런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은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한 것이냐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어찌 보면 상황만을 따지면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따져도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에베소서 5장에 보니까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권면한 말씀이 나온다. 이 말씀도 너무 유명하니까 다 아실 것이다. 22절부터터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라고 내용이 나오다가 32절에 가니 갑자기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결국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라는 것이다. 내 아내가 혹은 내 남편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웠다. 단 한 번 바람을 피웠는데 우리 배우자는 참 융통성도 좋아 나만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사람을 다 포용한다고 받아들일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미 한몸됨의 교류가 깨지는 그 순간 신뢰가 깨지는 것이다. 넓은 마음으로 용서한다 할지라도 이전의 관계로 돌아가기는 정말 어려운 부분이다. 그래서 용서한다 할지라도 예전의 그런 마음과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그 어떤 우상에게 단 한 번만 머리 숙인다 할지라도 그 한 번으로 인하여서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는 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다른 우상에게라도 어떤 대상에게라도 머리 숙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융통성의 문제도 아니고 고지식한 것도 아니고 한 몸이라고 선언한 영원한 약속을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는 이 부분을 생각해 보면서 전도사 때부터 시작해서 목회의 길을 걸어온 30여년을 돌아보았다. 수많은 상황들과 환경들을 겪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황속에 또 시대의 흐름 속에 타협한 적은 없는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다. 상황에 떠밀려서 슬쩍 한 번 타협을 하며, 이것 한 번이면 괜찮겠지 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지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상황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야 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며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말씀하셨는데 오히려 시대의 흐름을 쫓아간 건 아닌가 내가 상황 때문에 타협한 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들을 한 번쯤은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점검해 볼 수 있기를 소망다.
3.
타협하지 않는 신앙이란 무엇인지 오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대답을 통해서 3가지로 구분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16절에서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말한다.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내가 죽을 수 있지만 이 일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뭔가 둘이 서로 잘 이야기해서 적절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말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섬기는 하나님을 따르는 일에는 결코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그런 대답인 것이다. 하나님과 다른 신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절대 신앙이라는 것을 담고 있다. 이쯤에서 다시 한 번 타협할 수 없는 절대 신앙 가운데 이 기준을 가지고 여전히 목회하고 있는지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둘째는 17절에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라고 나온다. 이것은 왕이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겠느냐?’ 라고 했던 말에 대한 대답으로 ‘바로 우리 하나님입니다’라고 답변한 것이다.
최근에 한국에 있는 친구와 통화를 했는데 친구가 좀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한국의 젊은 사람들 중에는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 아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아직도 교회 다니냐고 하는 반응이라고 한다. 한국교회가 얼마만큼 그 위상이 추락하고 있는지를 잘보여준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점점 부끄러워지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이런 시대 속에서 나는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 걸 믿는다고 외칠 수 있고, 그 하나님을 소개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우리들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대답은 18절 말씀에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나온다.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이 풀무불에서 우리를 건져주시지 않아서 왕의 말대로 죽게 된다 할지라도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세 사람은 불 속에 들어가서도 죽지 않고 살았지만,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지키다가 원형경기장에서 죽었고, 찢겨서 죽었고, 산 채로 불에 태워서 죽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 좋은 부활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구차스럽게 타협하지 않았다. 죽음이 온다 할지라도 타협하지 않는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가끔 저도 이런 상황 속에서 나에게 죽음이 다가온다면 내가 그것을 과연 믿음으로 받을 수 있을까 라고 생각을 해보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자신있게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셔야지 가능할 것 같다. 왜냐하면 너무 두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감당할 만한 믿음도 주시는 줄 믿는다. 하나님께서 나를 성공하게 하지 않으셔도, 내가 이 땅 위에서 큰 돈을 벌지 못했어도, 때로는 내 몸의 병이 고쳐지지 않아도, 이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가 나를 따르지 않아도, 내가 큰 교회를 목회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또 그것을 넘어서 예수를 믿는 것이 때로는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감당하며 여전히 주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이 바로 우리들이 돼야 될 줄로 믿는다.
분명히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전부를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 아닌가? 하박국 선지자는 하박국 3장 17절에서 19절에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라고 노래한다.
이 말씀을 통해서 내가 왜 무엇을 위해서 목회를 해왔는가, 또 앞으로 남은 시간 목회는 어떤 마음으로 해야 되는가를 다시 한 번 고민해 보게 되었다. 우리의 지나온 시간들 우리의 발걸음들을 되돌아보고 우리 앞으로 나갈 걸음들이 비뚤어지지 않고 어그러지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향하여 똑바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다시 한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4.
2부 교제의 시간에서는 부노회장 성호영 목사의 기도후에 사모회에서 준비한 떡국을 들며 교제를 나누었으며, 저녁식사 후에는 이종태 목사와 목연회 주관으로 교제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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