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장 김성덕 사모 “ 20여 년간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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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 2007-08-0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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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전 개척된 베이사이드장로교회(담임목사 이종식) 김성덕 사모는 아직도 교회밴을 끌고 성도들을 픽업하러 다닌다. 20여 년간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는 그녀는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김 사모는 교회 개척 초기 델리 캐셔를 하며 사모와 가장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 이후에도 1박스 100개를 붙이면 5불이 남는 옷걸이 붙이기를 하며 남편이 목회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왔다.
다음은 김 사모와의 인터뷰 내용을 간증으로 풀었다.
LA에서 한인 신학교를 같이 다니며 남편을 알게 됐다. 그는 남미에서 홀로 신학을 공부하러 미국으로 날라왔다. 가난한 남편은 자신을 뒷받침하며 이왕이면 신학생을 배우자로 삼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당시 남편은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공부를 했다.
영어시간에 서로 소개를 할때 그는 내가 미스인줄을 알고 나를 대상으로 배우자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프로포즈을 하면 거절하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장로님이었으며 나는 4대째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나는 어릴때 부터 내가 사모이면 이렇게 할텐데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는 나를 배우자로 응답을 받았는데 기도해보지 않겠냐고 말했다. 청혼을 받으니 떨려서 오한이 났다. 남편은 내거 청혼을 거절하지 못하도록 연구하고 나온 것 같았다. 만약 결혼하자고 인간적으로 말했으면 당연히 나는 거절 했을 것이다.
그때서야 서로 나이를 물어 보니 내가 생일이 좀 빨랐다. 그래도 큰 차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구리반지를 해줄 돈도 없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그는 학교에서 단벌신사로 다녔다. 나에게 라면만 먹고 살아도 결혼해 달라고 했다.
그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스스로 연구하여 교수에게 어려운 질문을 하곤 했다. 교수는 정확히 대답을 못하고 포커스를 달리해 대답할 정도였다. 당시 그는 열정이 있었으며 창피함이 없을 정도였다. 또 흩어짐이 없이 단정했다.
우리집에서는 남편을 반대했다. 하지만 우리는 둘이서 데이트를 하며 돈이 없어 동전을 모아 커피를 사 마셨다. 결혼을 하며 어머니는 목회자란 경험을 이야기 하는 것인데 남미에서 돈주고도 못사는 고생을 많이 해서 목회자로 성공할 것이다고 격려하셨다.
남편은 목회학 석사과정을 위해 웨스트민스트로 간다고 했는데 아무도 믿지를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입으로 선포했다. 소신을 공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당시 다녔던 한인신학교는 정식허가가 없서 웨스트민스트에서 학위를 인정하지 않아 바로 갈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학교의 교수님 여러분들이 노력을 해 주셨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트에서 한학기를 공부할 기회를 주고 C학점 이상이면 정식학생으로 등록을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 학교는 점수를 잘 주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첫학기에 B+를 받아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한인신학교 출신이 바로 입학하게 됐다. 그리고 남미에서 와 영어를 잘하지 못하던 남편이 열심히 공부해서 토플도 좋은 성적을 받았다. 나는 남편이 입으로 시인을 하니 하나님께서 허락을 해주신 것이라고 본다.
웨스트민스트 4년은 모든 것이 어려웠다. 시아버지께서 남편의 학비를 위해 비지니스를 하나 구해주셨다. 캔디가게 였는데 아이스크림도 팔고 안파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18개월 터울의 두아이를 키우면서 교회일을 하니 생지옥과도 같은 순간의 연속이었다. 너무나 피곤해 가게에서 서서도 자는 일이 벌어졌다.
많은 목회자들이 신학교에서 공부할때 생활이 어려워 지면 공부가 늦어지기도 하는데 남편은 독했다. 어쩌면 매정한 면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보니 남편의 돌진력에 감사한다. 희생끝에 하나님의 교회가 바로 세워진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4년을 훈련 받으니 교회를 개척하는 일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교회는 토요학교 6명 부터 시작했다. 그때 빚진 돈을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갚고 있다.
교회를 개척하다
목사도 개척이 어려운데 강도사가 교회를 개척하니 더욱 어려웠다. 나는 성도들의 필요를 돌보는 것, 가계운영등 모든 것을 맡았으며 남편은 설교준비등 목회에만 집중하게 도왔다. 목사가 성도들의 필요를 도우는 일을 많이 하면 영적인 고갈상태가 된다.
개척을 할때 베이사이드라는 곳을 처음 알았다 18년전 베이사이드에는 한인교회는 염광장로교회만 있었다. 10년뒤에는 한인들이 플러싱에서 베이사이드로 오겠다는 생각으로 교회를 설립했는데 하나님이 도우셨다.
당시 돈이 너무 없어 생활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행거(옷걸이) 100개를 붙이면 5불을 주었다. 교회와 가사일을 다하고 아이들과 남편이 자면 홀로 깨어 행거를 붙였다. 또 구슬 끼는 것도 했다. 감사한 것은 내가 일을 하면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었겠지만 목사님의 말에 순종을 한 것이다.
언젠가 목사님이 내가 옷걸이를 붙이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 했다. 1박스 100개를 붙이면 5불이 남는다고 알자 남편은 햄버거 한개 먹는 것도 어려웠다. 결혼 10년동안 한번도 백화점에 가지 않았다. 남편은 와이셔츠가 한벌 뿐이었다. 이번에 도미니카에 선교갈때 남편이 와이셔츠 10개를 넣어가는 것을 보고 격세지감을 느꼈다. 사실 와이셔츠가 한개밖에 없는 것은 아내를 죽이는 것이다. 새벽기도에 나가는 남편을 위해 매일 새벽에 와이셔츠를 빨아 말려 다리미로 다렸다.
개척해서 4-5년동안 안수집사 한분이고 전부 초신자나 다름없었다. 식사만 하고 가도 감사할 뿐이었다. 연악한 신앙인들이라 어려운 일을 시킬수도 없었다. 손이 너무 필요했다. 주일날 사람들을 밴으로 데려다 주고 돌아오면 성가대 연습을 먼저하고 설겆이를 했다.
개척후 3년동안은 바깥일을 햇다. 사회에서는 교회가 부흥되면 직장을 그만 둔다고 목사 아내에게는 직장을 잘 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은행에 다녔다. 다른 사람은 5불짜지 점심을 시켜 먹었는데 나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지하실에서 먹었다. 그래도 떳떳했다.
나중에는 델리가게에서 캐셔로 12시간동안 일하고 돌아와서 가방을 바꾸고 심방을 가기도 했다. 그렇게 하고 집에 돌아오면 신발장앞에서 그냥 쓰러져 자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스트레스가 목까지 찼다. 하지만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나는 그런일들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목사님이 설교에 집중할수 있도록 교인들에게 어려운 전화가 오면 내가 다 해결했다.
성도들을 돌보는 일이 많았다, 어떤때는 학교에서 5-6번씩 성도들 자녀들의 컨퍼런스에 참가하기도 했다. 남편이 만약 그것을 한다면 당장 설교에 지장이 있다.
4년전까지 교회밴을 가지고 다녔다. 교회 예배에는 내가 지금도 직접 운전을 하고 성도들을 픽업한다. 운전을 하면서 성도들과 상담을 하는 시간도 가질수 있으며 여자들은 사모가 오니 더 편해했다. 교회 밴을 가지고 아들과 딸을 픽업하려고 가면 아이들의 친구들이 놀리는 일도 벌어졌다. 너무 피곤하면 교회밴에 팔베게를 하고 자곤 했다. 그렇게 자면 5분이상 잠을 자지 못한다. 이때까지 밤에 4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다. 더군다나 연속해서 잔 적은 드물다.
목사님은 출타해도 반쪽의 역할을 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나서서 말을 잘 못한다. 목사님이 하라는데로 순종할 뿐이다. 또 항상 겸손하려고 노력한다.
지금 교회에서 새신자 교육, 제자훈련, 성경공부를 시키고 있다. 제자훈련을 통해 담임목사의 목회방침을 전한다. 만약 남편의 목회철학을 알지 못한다면 공부를 시키기가 어렵다. 부족하지만 사모가 남편의 목회의 비전에 동참하는 것이 감사하다.
이제는 개척교회를 돕고 있다. 2000년부터 매년 결산을 하고 그 반을 개척교회를 위해 사용한다. 그렇게 도와 하나님의 교회가 바로 설수 있다면 좋겠다.
희생된 가정
목회를 하며 가정이 희생이 되었다. 경제적으로도 단 5불도 여유가 없었다. 개척을 하고 생활이 어려워 아이들은 성도들의 물린 옷을 입었다. 얼마나 경제적으로 어려웠는지 학원은 물론이고 책이 없어 다른 아이들이 사용하던 책을 구해 답에다 스티커를 붙여 아이에게 주었다. 가족여행도 한번 간 적이 없었다.
이번 도미니카 선교를 갈때 성도들이 선교지에 선물할 신발을 가져왔다. 그것들은 돈이 없어 우리 애들에게도 못 신킨 것이었다. 당시 집에는 TV도 없었다. 애들이 제대로 교육을 못받자 학교에서 문제가 있다고 호출당하기도 했다. 두아이들은 사춘기가 오기전 10학년까지 내가 머리를 직접 짤라주었으며 옷도 성도가 가져다 준 입던 옷만 입었다.
아이들에게 한번도 장난감을 사준 적도 없다. 다행인 것은 우리 부부에게 물질적인 욕심이 없었다. 남편은 주례등 돈이 생기면 남을 돕는데 다 사용했다.
딸이 대학에 간 후 간증을 했다. 항상 가난하지만 부모에게 자부심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따른 우리 부모님들은 돈은 비록 없었지만 주님의 일에 대한 열정이 강하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못사주고 100불짜리 키보드를 대신 사주었다. 악기 레슨을 하면 돈이 없어 3개월하고 1년 쉬곤 했다.
아들은 10학년때 학교 친구를 따라 말썽을 부렸다. 그때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는 많이 했지만 아들을 위한 기도는 뒷전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들이 말썽을 부린 2-3년간을 통해 다른 사람의 위로자가 되라고 고난을 주셨다.
어려움을 감사로 받아야 한다. 아들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이젠 목회자가 되는 것을 순종하는 단계이다. 아들이 목회자가 되어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상대로 주님의 일을 하시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귀히 사용하시는 일꾼으로 삼아주신 것을 감사드린다.
ⓒ 2007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다음은 김 사모와의 인터뷰 내용을 간증으로 풀었다.
LA에서 한인 신학교를 같이 다니며 남편을 알게 됐다. 그는 남미에서 홀로 신학을 공부하러 미국으로 날라왔다. 가난한 남편은 자신을 뒷받침하며 이왕이면 신학생을 배우자로 삼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당시 남편은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공부를 했다.
영어시간에 서로 소개를 할때 그는 내가 미스인줄을 알고 나를 대상으로 배우자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프로포즈을 하면 거절하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장로님이었으며 나는 4대째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나는 어릴때 부터 내가 사모이면 이렇게 할텐데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는 나를 배우자로 응답을 받았는데 기도해보지 않겠냐고 말했다. 청혼을 받으니 떨려서 오한이 났다. 남편은 내거 청혼을 거절하지 못하도록 연구하고 나온 것 같았다. 만약 결혼하자고 인간적으로 말했으면 당연히 나는 거절 했을 것이다.
그때서야 서로 나이를 물어 보니 내가 생일이 좀 빨랐다. 그래도 큰 차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구리반지를 해줄 돈도 없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그는 학교에서 단벌신사로 다녔다. 나에게 라면만 먹고 살아도 결혼해 달라고 했다.
그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스스로 연구하여 교수에게 어려운 질문을 하곤 했다. 교수는 정확히 대답을 못하고 포커스를 달리해 대답할 정도였다. 당시 그는 열정이 있었으며 창피함이 없을 정도였다. 또 흩어짐이 없이 단정했다.
우리집에서는 남편을 반대했다. 하지만 우리는 둘이서 데이트를 하며 돈이 없어 동전을 모아 커피를 사 마셨다. 결혼을 하며 어머니는 목회자란 경험을 이야기 하는 것인데 남미에서 돈주고도 못사는 고생을 많이 해서 목회자로 성공할 것이다고 격려하셨다.
남편은 목회학 석사과정을 위해 웨스트민스트로 간다고 했는데 아무도 믿지를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입으로 선포했다. 소신을 공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당시 다녔던 한인신학교는 정식허가가 없서 웨스트민스트에서 학위를 인정하지 않아 바로 갈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학교의 교수님 여러분들이 노력을 해 주셨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트에서 한학기를 공부할 기회를 주고 C학점 이상이면 정식학생으로 등록을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 학교는 점수를 잘 주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첫학기에 B+를 받아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한인신학교 출신이 바로 입학하게 됐다. 그리고 남미에서 와 영어를 잘하지 못하던 남편이 열심히 공부해서 토플도 좋은 성적을 받았다. 나는 남편이 입으로 시인을 하니 하나님께서 허락을 해주신 것이라고 본다.
웨스트민스트 4년은 모든 것이 어려웠다. 시아버지께서 남편의 학비를 위해 비지니스를 하나 구해주셨다. 캔디가게 였는데 아이스크림도 팔고 안파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18개월 터울의 두아이를 키우면서 교회일을 하니 생지옥과도 같은 순간의 연속이었다. 너무나 피곤해 가게에서 서서도 자는 일이 벌어졌다.
많은 목회자들이 신학교에서 공부할때 생활이 어려워 지면 공부가 늦어지기도 하는데 남편은 독했다. 어쩌면 매정한 면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보니 남편의 돌진력에 감사한다. 희생끝에 하나님의 교회가 바로 세워진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4년을 훈련 받으니 교회를 개척하는 일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교회는 토요학교 6명 부터 시작했다. 그때 빚진 돈을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갚고 있다.
교회를 개척하다
목사도 개척이 어려운데 강도사가 교회를 개척하니 더욱 어려웠다. 나는 성도들의 필요를 돌보는 것, 가계운영등 모든 것을 맡았으며 남편은 설교준비등 목회에만 집중하게 도왔다. 목사가 성도들의 필요를 도우는 일을 많이 하면 영적인 고갈상태가 된다.
개척을 할때 베이사이드라는 곳을 처음 알았다 18년전 베이사이드에는 한인교회는 염광장로교회만 있었다. 10년뒤에는 한인들이 플러싱에서 베이사이드로 오겠다는 생각으로 교회를 설립했는데 하나님이 도우셨다.
당시 돈이 너무 없어 생활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행거(옷걸이) 100개를 붙이면 5불을 주었다. 교회와 가사일을 다하고 아이들과 남편이 자면 홀로 깨어 행거를 붙였다. 또 구슬 끼는 것도 했다. 감사한 것은 내가 일을 하면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었겠지만 목사님의 말에 순종을 한 것이다.
언젠가 목사님이 내가 옷걸이를 붙이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 했다. 1박스 100개를 붙이면 5불이 남는다고 알자 남편은 햄버거 한개 먹는 것도 어려웠다. 결혼 10년동안 한번도 백화점에 가지 않았다. 남편은 와이셔츠가 한벌 뿐이었다. 이번에 도미니카에 선교갈때 남편이 와이셔츠 10개를 넣어가는 것을 보고 격세지감을 느꼈다. 사실 와이셔츠가 한개밖에 없는 것은 아내를 죽이는 것이다. 새벽기도에 나가는 남편을 위해 매일 새벽에 와이셔츠를 빨아 말려 다리미로 다렸다.
개척해서 4-5년동안 안수집사 한분이고 전부 초신자나 다름없었다. 식사만 하고 가도 감사할 뿐이었다. 연악한 신앙인들이라 어려운 일을 시킬수도 없었다. 손이 너무 필요했다. 주일날 사람들을 밴으로 데려다 주고 돌아오면 성가대 연습을 먼저하고 설겆이를 했다.
개척후 3년동안은 바깥일을 햇다. 사회에서는 교회가 부흥되면 직장을 그만 둔다고 목사 아내에게는 직장을 잘 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은행에 다녔다. 다른 사람은 5불짜지 점심을 시켜 먹었는데 나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지하실에서 먹었다. 그래도 떳떳했다.
나중에는 델리가게에서 캐셔로 12시간동안 일하고 돌아와서 가방을 바꾸고 심방을 가기도 했다. 그렇게 하고 집에 돌아오면 신발장앞에서 그냥 쓰러져 자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스트레스가 목까지 찼다. 하지만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나는 그런일들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목사님이 설교에 집중할수 있도록 교인들에게 어려운 전화가 오면 내가 다 해결했다.
성도들을 돌보는 일이 많았다, 어떤때는 학교에서 5-6번씩 성도들 자녀들의 컨퍼런스에 참가하기도 했다. 남편이 만약 그것을 한다면 당장 설교에 지장이 있다.
4년전까지 교회밴을 가지고 다녔다. 교회 예배에는 내가 지금도 직접 운전을 하고 성도들을 픽업한다. 운전을 하면서 성도들과 상담을 하는 시간도 가질수 있으며 여자들은 사모가 오니 더 편해했다. 교회 밴을 가지고 아들과 딸을 픽업하려고 가면 아이들의 친구들이 놀리는 일도 벌어졌다. 너무 피곤하면 교회밴에 팔베게를 하고 자곤 했다. 그렇게 자면 5분이상 잠을 자지 못한다. 이때까지 밤에 4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다. 더군다나 연속해서 잔 적은 드물다.
목사님은 출타해도 반쪽의 역할을 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나서서 말을 잘 못한다. 목사님이 하라는데로 순종할 뿐이다. 또 항상 겸손하려고 노력한다.
지금 교회에서 새신자 교육, 제자훈련, 성경공부를 시키고 있다. 제자훈련을 통해 담임목사의 목회방침을 전한다. 만약 남편의 목회철학을 알지 못한다면 공부를 시키기가 어렵다. 부족하지만 사모가 남편의 목회의 비전에 동참하는 것이 감사하다.
이제는 개척교회를 돕고 있다. 2000년부터 매년 결산을 하고 그 반을 개척교회를 위해 사용한다. 그렇게 도와 하나님의 교회가 바로 설수 있다면 좋겠다.
희생된 가정
목회를 하며 가정이 희생이 되었다. 경제적으로도 단 5불도 여유가 없었다. 개척을 하고 생활이 어려워 아이들은 성도들의 물린 옷을 입었다. 얼마나 경제적으로 어려웠는지 학원은 물론이고 책이 없어 다른 아이들이 사용하던 책을 구해 답에다 스티커를 붙여 아이에게 주었다. 가족여행도 한번 간 적이 없었다.
이번 도미니카 선교를 갈때 성도들이 선교지에 선물할 신발을 가져왔다. 그것들은 돈이 없어 우리 애들에게도 못 신킨 것이었다. 당시 집에는 TV도 없었다. 애들이 제대로 교육을 못받자 학교에서 문제가 있다고 호출당하기도 했다. 두아이들은 사춘기가 오기전 10학년까지 내가 머리를 직접 짤라주었으며 옷도 성도가 가져다 준 입던 옷만 입었다.
아이들에게 한번도 장난감을 사준 적도 없다. 다행인 것은 우리 부부에게 물질적인 욕심이 없었다. 남편은 주례등 돈이 생기면 남을 돕는데 다 사용했다.
딸이 대학에 간 후 간증을 했다. 항상 가난하지만 부모에게 자부심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따른 우리 부모님들은 돈은 비록 없었지만 주님의 일에 대한 열정이 강하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못사주고 100불짜리 키보드를 대신 사주었다. 악기 레슨을 하면 돈이 없어 3개월하고 1년 쉬곤 했다.
아들은 10학년때 학교 친구를 따라 말썽을 부렸다. 그때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는 많이 했지만 아들을 위한 기도는 뒷전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들이 말썽을 부린 2-3년간을 통해 다른 사람의 위로자가 되라고 고난을 주셨다.
어려움을 감사로 받아야 한다. 아들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이젠 목회자가 되는 것을 순종하는 단계이다. 아들이 목회자가 되어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상대로 주님의 일을 하시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귀히 사용하시는 일꾼으로 삼아주신 것을 감사드린다.
ⓒ 2007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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